인문철학/일반

니체의 동물원에서 ② 사자

rainbow3 2019. 9. 14. 11:55


니체의 동물원에서 ② 사자

 

사람은 생태적으로 동물이면서 동시에 인격적으로 동물이기를 거부한다. 사람의 정체성은 동물성의 특성들을 통해서 번뜩이며 나타나며, 동시에 사람은 늘 동물성의 저 너머에 있다.

“동물성은 우선 어떤 제한된 상태를 나타내는데, 인간의 사고는 그와 반대로 형성된다”(도미니크 르스텔, ‘동물성’)라는 가설에 따른다면, 사람은 동물성 이상의 존재다. 한 철학자의 형이상학적 통찰에 따르면, 사람은 과정이요 몰락이다. “사람에게 위대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다리라는 점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점이다.”(니체,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신과 동물 사이에 밧줄이 있는데, 그 밧줄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정신의 3단계 변용에 대해서 얘기하며, 낙타 다음으로 사자를 언급한다.

사자는 존재의 층위에서 낙타보다 더 상위 동물이다. 사자가 낙타보다 더 높은 존재론적 지위를 얻은 것은 거대한 용과 맞서는 용기와 감히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부정 정신 때문이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낙타는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사자는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사자는 여기에서 그가 섬겨 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 나선다. 그는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 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 또는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맞서 ‘나는 하고자 한다’라고 말한다.”(‘세 단계의 변화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낙타가 타자의 도덕과 명령들에 대해 ‘예’라고 했다면 사자는 ‘아니요’라고 한다. 사자가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은 타자의 요구나 필요에 앞서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런 점에서 사자는 강한 짐승이다. 사자는 거대한 용에서 발화되는 “너는 해야만 한다”는 도덕과 의무의 강령들, 그 사슬들을 끊고 자유를 갈망한다. 사자는 “너는 해야만 한다”고 명령하는 용에 맞서 “나를 내버려 두라. 나는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고 오직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용은 세계를 지배하는 법이고 도덕, 유일하게 용납되는 가치 척도이다. 용의 명령은 완강하다.

“모든 가치는 창조되었고, 이 창조된 일체의 가치, 그것이 바로 나다. 따라서 ‘나는 하고자 한다’ 따위의 말은 용납될 수 없다.”

우리가 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면 사자가 되어야 한다. 사자는 전봉준, 안중근, 전태일, 그리고 체 게바라 등이 살았던 삶의 표상이다. 그들은 납득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포효하며, 그 포효는 ‘아니요’라는 부정 정신의 외침이다.

사자-되기와 늑대-되기는 하나다. 개들은 사육되지만 늑대들은 숲 속에서 방목된다. 늑대들은 개들과는 다른 계통에서 오며(즉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가족 제도나 국가 장치에 포획되기를 거부한다.

“개들에게 미움받는 늑대처럼 민중에게 미움받는 자, 그런 자야말로 자유로운 정신이며 속박을 거부하는 자, 그 누구도 경배하지 않는 자, 숲속에 사는 자다”(‘이름 높은 현자들에 대하여’, 〃)

늑대-되기란 무엇인가? 늑대들은 개들이 갇힌 지층을 끊고 달아남으로써 비로소 늑대로 생성된다. 개는 집에 속하고, 늑대는 숲에 속한다. 개는 문명의 소산이고, 늑대는 피와 살육이라는 야만 속에서 증식하는 자연이다. 늑대들은 개들에게 결핍된 것을 욕망함으로써, 즉 속박을 거부하고 자유를 갈망함으로써, 차라리 마침내 늑대-되기에 이른다. 늑대는 개와 다른 거리를 가짐으로써, 개와 다른 강렬함으로써, 개와 다른 속도를 가짐으로써 탈영토화에 성공한다.

“도주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 늑대-되기, 탈영토화된 강렬함들의 비인간-되기, 이것이 바로 다양체다.”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71쪽)

사자는 낙타에서 탈영토화된 강렬함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는 백수(百獸)의 왕으로 군림하지만 아직은 뭔가 부족하다.

사자는 기성 가치의 파괴자, 성스러운 ‘아니요’를 가진 존재이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사자는 최후 변신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모습이다.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나보다 더 당당한 자를 기다린다. 나는 그에 반대해서 스스로 파괴될 가치조차 없다.”( ‘가장 조용한 시간’, 〃)

질 들뢰즈에 따르면 사자는 영원회귀의 원인이지만 그 결과를 낳는 것을 지체시키는 한계로서의 원인이다. 그는 ‘부정의 현기증과 유혹’을 알고 있으며, 그의 짐승들에 의해서 “고무되어야만 하는 선지자”이다. 사자는 초인의 아버지이지만, “최후의 변신이 부족한” 존재다. 

 

 

니체는 정신의 3단계 변용에 대해 얘기하며, 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면 사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사자는 전봉준, 안중근, 전태일, 그리고 체 게바라 등이 살았던 삶의 표상이다. 그들은 납득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포효하며, 그 포효는 ‘아니요’라는 부정 정신의 외침이다.

 

 

사자는 최후의 변신을 시도한다.

“내가 열망하는 것은 나의 행위이다! 자, 사자가 왔다. 나의 자식들이 가까이 왔다.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완전히 성숙하였다. 나의 때가 왔다. 이것이 나의 아침이다. 나의 대낮이 시작되는 것이다. 솟아라, 솟아라, 그대, 위대한 정오여!( ‘징후’, 〃)

정오가 가까워진다. 해가 머리 위에 뜨고,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시각! 그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고자 한다.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넘어가는 사이에는 높은 문턱이 있다. 그 문턱을 넘게 하는 동력은 웃음, 춤, 놀이다.

삶을 창조의 놀이가 되게 하는 것, 그것이 긍정의 힘이다. 사자는 짐을 지라고 명령하는 것들에게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사자는 부정 정신을 밀고 나간 끝에서 긍정의 힘을 찾아낸다. 그래서 사자는 낙타의 무거운 삶과 다른 변별적 삶을 얻는다. 긍정의 힘 속에서 가벼운 삶의 양태를 발견한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의 짐을 떠맡는 것도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을 해방시키고,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319쪽)

사자는 ‘아니요’라는 부정 정신 속에서 긍정의 가치와 긍정의 힘을 찾아내고, 제 삶을 무거움에서 해방시켰지만, 아직은 완성이 아니다.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 사자도 그것을 아직까지 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를 위해서 자기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변신들에 대해서’ 〃) 사자는 한 번 더 도약해야 한다.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를 위해서!

사자보다 더 긍정하고, 사자보다 더 창조적인 긍정 정신에 도달하는 것은 어린아이다.

어린아이는 그것을 어떻게 해낼 수 있었던가?

“그러나 말해 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은 어떻게 어린아이는 해낼 수 있는가?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원하여,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세 단계의 변화에 대하여’, 〃)

어린아이는 순수무구요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어린아이가 순진무구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들이 어떻게 망각과 연결되는지는 모호하다.

망각은 상당히 중요한 철학의 주제이기도 하다. 데리다는 망각의 정체를 그 ‘은폐성’에서 찾는다.

망각은 거기 마땅히 있어야 할 내용이 어디론가 도망가서 감쪽같이 숨는 것이다. 더 단순하게는 “결함·결여·불확실성·의혹의 외관”(자크 데라다, ‘에프롱: 니체의 문체들’, 130쪽)을 취하기도 한다. 망각은 은폐되고 삭제됨으로써 존재의 완전성을 공격해 흠집을 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따져보면 망각은 ‘존재와 동체’이고 “그 존재 본질의 운명으로서 정수의 운명으로 지배”(자크 데리다, 앞의책, 130쪽)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망각은 잊어버림으로써 그 주체를 더 잘 살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망각은 돌이키기 싫은 과거로부터의 자유로움이고, 존재를 옥죄는 강박증으로 뒤엉킨 기억에서의 느슨해짐이다.

어른들은 과거의 기억들에 사로잡히고 그것의 규정됨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망각해야 할 과거가 없다. 따라서 기억의 의무도 지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자유로운 존재란 뜻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과거와 미래 사이를, 그리고 자기 자신과 타인을 경계 없이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들은 항상 거룩한 긍정 속에서 놀이를 창조해내며, 그 놀이를 기쁨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기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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