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일반

환각에 사로잡힌 사람들

rainbow3 2019. 9. 14. 23:52

환각에 사로잡힌 사람들

 

조대엽│고려대 사회학 교수

 

 ‘게으를 권리’ 폴 라파르그 지음

 

 

서재의 한 모퉁이에서 점차 구석진 곳으로 밀려나 이제는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조차 아득한 책들이 있다. 젊은 시절 탐독하던 이른바 ‘고전’중에 그런 경우가 많다. 가끔씩 대학원생들의 논문자격시험문제를 출제할 때 이런 책들을 염두에는 두지만 책을 찾아 들춰보는 수고는 갈수록 포기하게 된다. 사회과학의 고전 가운데 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 가장 빨리 멀어져간 고전일지 모른다.

 

한국의 지식인에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은 불길처럼 몰려왔다가 순식간에 잦아든 열병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1980년대 중반쯤이었던가. 당시 한국의 ‘시간’은 민중해방과 사회주의혁명의 기대를 갖게 했었고 마르크스-엥겔스의 저작 또한 이 시기에 봇물 터지듯 넘쳤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시기, 세계의 시간은 이미 신자유주의가 부상하고 근대의 해체가 담론의 중심에 들어서 있었다. 1990년대 들어 한국사회는 탈근대의 담론이 확산됨으로써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관심 또한 급속히 식어갔다. 이 과정에는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가 자리하고 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근대적 사회구성의 내면을 형성했던 이성의 질서는 감성과 욕망의 질주로 대체되고, 계급을 구심점으로 한 갈등은 새롭고도 일상적인 갈등으로 전환되었으며, 온라인을 매개로 작동하는 소통의 방식은 기존의 권력구조를 위협하고 있기도 하다. 세상은 새로운 위험의 구조와 불확실성, 예측불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21세기의 현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측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다.

 

물론 오늘날 노동과 직업의 세계가 유연해짐으로써 일자리를 잃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소득이 양극화되며, 빈곤이 확대되는 현실은 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화’ 명제를 떠올리며 다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기웃거리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19세기나 20세기 전반부 자본주의의 조건으로부터 너무 먼 오늘의 현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변혁의 교과서’가 아니라 ‘고전의 향기’로 대면하게 한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이들이 언급한 대로 “종교는 가슴 없는 세상의 가슴”이라는 구절을 떠올린다면 어쩌면 오늘의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의 전망과 열망을 잃어버린 인류의 추억이다. 그러나 이 추억은 자본주의 경제원리라는 끈으로 현재에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가버린 추억’ 그 이상일 수 있다.

 

고전의 가치는 늘 현재를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고전은 당대의 가치와 전망을 담으면서 현재와의 연속과 단절을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고전으로 읽을 때는 이 같은 일반적 고전의 가치를 넘어서는 몇 가지 강렬한 요소가 더 부가되어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의 저술은 사회과학적 표현의 문학성이 어떤 고전보다 강렬하다. 모든 저술에서 분출하는 풍자의 강렬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감흥을 남긴다. 둘째로 물질에서 정신에 이르는 대상세계의 모든 질서를 유물론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설명의 ‘탐욕’이 강렬하다. 셋째로 거의 모든 저술에서 드러나는 혁명에의 실천적 의지가 강렬하다. 당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이토록 강렬한 실천의지는 어쩌면 마르크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놀라움이다.

 

마르크스의 둘째사위

 

카를 마르크스의 둘째사위이자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폴 라파르그의 글 모음집 ‘게으를 권리’는 마르크스 고전에서 느껴지는 이 같은 세 가지 강렬함을 골고루 일깨우는 맛이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의 초입에 쓴 라파르그의 글 7편을 모은 이 책은 제목만을 본다면 오히려 오늘날의 시의에 걸맞다.

라파르그를 알지 못하는 독자에게 ‘게으를 권리’라는 제목은 오늘날 사회변동의 조건에서 솔깃한 주제다.

 

근대 자본주의가 산업적 단계에 있을 때 모든 사회적 가치는 노동과 일에 집중됐다.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와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가 미덕과 선의 기준이 되었고, 게으름과 나태는 당연히 악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상의 가족생활에서도 ‘일하는’ 아버지의 권위가 뚜렷하고 모든 가족문화는 일하는 아버지의 존재를 중심으로 구축됐다.

 

우리 시대의 무엇보다도 뚜렷한 특징은 이 같은 노동과 일 중심의 사회구성이 해체되었다는 데 있다. 해체사회, 문화사회, 여가사회 등의 개념은 이러한 사회변동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은 감성적 취향과 욕구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어떻게 놀 것인가, 얼마나 많은 여가시간을 확보할 것인가에 몰두하고 있다. 당연히 일하는 아버지의 존재는 무력해지고 일상의 가족생활마저 중심이 해체되는 경향을 보이게 마련이다. 이 같은 사회에서 ‘게으를 권리’는 매력적인 적합성을 갖는 개념이 아니겠는가?

 

육체에 파문을 선고한 윤리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과도하고도 불량한 선입관이었음이 1883년 생트펠라지 형무소에서 쓴 그의 서문을 접하는 순간 이내 드러나고 만다. 말하자면 ‘게으를 권리’는 19세기의 노동현실에 대한 독실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신랄한 풍자다. 이 풍자에 따르면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노동자들은 일종의 환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 환각은 일에 대한 애착 또는 노동에 대한 처절한 열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열정은 개인뿐만 아니라 그 후손에 이르기까지 생명력을 고갈시킬 정도인데 성직자와 경제학자와 도덕가들은 이를 신성한 노동의 교리로 덧씌우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강조한 “모든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경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라파르그는 이 같은 자본주의 윤리는 노동자의 육체에 파문을 선고했다고 말한다.

즉 “생산자인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최소한으로만 제공하고, 그들의 기쁨과 분노를 억압하고, 그들에게 기계의 일부가 되어 휴식도, 대가도 없이 일만 하라고 선고했다”는 것이다. 라파르그의 ‘게으를 권리’는 이러한 자본주의 윤리에 침윤된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해방에의 메시지다. 이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의 자연적 본능으로 돌아가 부르주아 혁명의 형이상학적 법률가들이 지어낸 무기력한 ‘인간의 권리’보다 1000배는 더 고귀하고 성스러운 ‘게으를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하루에 3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가와 오락을 즐기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상품의 신비를 벗기며 설명하는 ‘필요노동시간’의 의미가 라파르그에 의해 현실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러하듯이 라파르그의 인용과 풍자는 고대와 현대를 넘나든다. 노동자를 해방시킬 것으로 여겨졌던 기계의 발명이 오히려 노동자에게 더욱 가혹한 족쇄가 되었다는 사실을 물레방아의 발명을 노래한 그리스 시인을 통해 다음과 같이 풍자하기도 한다.

 

“오, 일꾼이여, 방아를 돌리던 일손을 놓고 편안하게 잠을 자라. 날이 밝았다고 쓸데없이 울어대는 수탉은 그대로 내버려두자. 데메테르 여신은 노예의 노동을 님프들에게 넘기고는 그들이 물레바퀴에서 즐겁게 일하며 뛰노는 모습과 무거운 물레돌이 굴대와 함께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우리도 조상이 살았던 대로 살자. 데메테르 여신이 주신 선물을 누리며 게으름을 부리고 즐겁게 살자.”

 

그러나 시인이 노래한 여가는 오지 않았고 19세기의 현실에서 기계는 인간을 훨씬 더 노예로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 “노동자들이 이렇듯 노동의 교리에 따르고 금욕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게으름은 자본가들의 몫이 되었고, 자본가들은 억지로 놀아야 했으며 생산하지 말아야 했고 과소비를 즐겨야만 했다”고 라파르그는 설파한다. 이어서 라파르그는 17,18세기의 차분하고 합리적인 습관을 가졌던 자본가가 얼마나 방탕해졌는지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특히 당시 자본가의 허영을 충족시키는 하인의 규모가 섬유산업노동자와 광부, 혹은 섬유산업노동자와 금속노동자를 합한 것보다 많다는 점을 ‘자본론’으로부터 인용하여 구체적인 수치로 보여주는 대목은 마르크스를 읽어본 독자에게는 친숙하다.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라파르그의 풍자는 이 책에 포함된 다른 글 ‘말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에서 압권을 이룬다. ‘말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가 현실이라면 ‘게으를 권리’는 혁명에 대한 요청이다. 라파르그의 이 두 편의 글이 마르크스 고전의 풍자적 강렬함을 일깨운다면 다른 글들은 마르크스 고전의 두 번째 강렬함으로 안내한다. 즉 물질과 정신의 모든 세계 내적 질서를 설명해내고자 하는 유물론적 설명의 강렬함은 ‘추상적 개념의 기원’ ‘아테나 신화’ 나아가 ‘여성문제’ 등에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다른 한편 마르크스 고전의 세 번째 강렬함이라고 할 수 있는 혁명을 향한 투철한 실천적 의지는 두 편의 다른 글 ‘마르크스에 대한 회상’과 ‘사회주의와 지식인’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마르크스에 대한 회상’은 마르크스를 누구보다 더 가까이에서 지켜본 저자가 마르크스의 일상까지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21세기의 오늘은 19세기의 현실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다. 이성적 기획과 혁명의 의지에 따른 유토피아의 꿈이 성찰과 해체, 불확실성, 개별화된 욕구와 시장의 횡포 앞에 무력해진 지 오래다. 라파르그의 글 모음집은 인류의 잃어버린 꿈을 회상하게 해준다. 7편의 글은 거의 완벽하게 마르크스를 비추는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마르크스를 완벽하게 비추어주는 글들 속에서 당대의 걸출한 실천가이자 사상가였던 ‘폴 라파르그’ 자신을 찾을 대목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동시대를 산 마르크스주의자의 또 하나의 고전이 우리에게 제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러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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