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불교의 많은 경전 가운데 부처님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 내용이 다른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부한 데서도 제자들이 부처님의 죽음을 얼마나 애통해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위대한 죽음(Maha nirvana)을 기록한 텍스트는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한역경전 등에 상세히 나온다. 이를 종합해 임종의 순간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부처님의 나이는 어느새 80세, 몸은 쇠약해졌고 몇차례의 병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부처님은 마지막 안거를 베살리에서 보내고 오랜 전도의 근거지인 사밧티로 향했다. 길을 재촉한 부처님은 파바마을에 도착해 대장장이 춘다가 올린 공양을 들고 심한 복통을 일으켰다. 아난다가 정성스럽게 간호를 했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부처님은 아픔을 참고 쿠시나가라 마을에 이르러 무성한 사라나무 숲에 누웠다.
부처님은 자신이 죽음에 임박했음을 알고 제자들에게 무엇이든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물으라고 했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면 우리들은 무엇에 의지해야 하느냐'고 여쭈었다.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제자들은 또 '교단의 후계자는 누구로 하면 좋을까'에 대해서도 물었다.
"계율을 스승 삼으라(以戒爲師)"
이어서 부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간곡한 부촉의 말씀을 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2월 보름 한 밤중이었다. 그것은 보통사람의 죽음과는 달랐다. 마치 태양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며 떨어지는 것 같은 위대한 낙조였다. 제자들은 이 위대한 낙조를 열반이라 불렀다.
열반(Nirvana)이란 '불어서 끈다(吹滅)'는 뜻으로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 말은 원래 불교 이전의 우파니사드 철학에서 사용했던 용어로 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해 얻어진 궁극적 경지를 의미한다. <장아함경>18권은 열반을 이렇게 설명한다.
"탐욕이 영원히 없어지고 성냄이 영원히 없어지고 어리석음이 영원히 없어진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貪欲永盡 瞋 永盡 愚痴永瞋 是名涅槃)" 부처님이 처음부터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히 이러한 열반의 경지였다.
그리고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들도 이러한 해탈과 열반의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최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인생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이었다. 부처님은 이것을 바로 알고 집착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것이 해탈이고 열반이었다. 부처님이 발견한 이러한 방법이야말로 부처님이 다른 종교가와 다른 부처님다운 특색이었다. 부처님이 부처님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처님은 정녕 이 경지에 도달했던 성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적 의미의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후대의 교리연구가들은 부처님이 생존에 얻은 열반을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그리고 육체를 버림으로써 얻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유여의열반은 다른 말로는 현법열반(現法涅槃) 즉 이 세상의 노병사(老病死) 속에 있으면서 얻은 열반이라고도 한다. 장아함경 15권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이란 어떤 것인가.
노병사를 싫어하고 욕심을 버리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면 이것을 일러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부처님이 지향하고자 했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는 열반의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부처님의 제자를 자처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확대하고 증장시키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고도 우리는 뻔뻔하게 부처님을 입에 올리고 있다. 이 얼마나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인가.
열반절은 부처님이 열반을 통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주신 날이다.
부처님이 평생 가르치고자 한 내용이 '열반'이란 말 한마디에 있다.
삼독번뇌의 불길을 끄지 않으면 해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날은 그만두고라도 최소한 이날 하루만이라도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되새기는 그런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면 부끄러움이라도 깨닫는 그런 날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날을 어떻게 보냈는가. 반성해보니 그저 고개를 들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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