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불교

우파니샤드와 불교

rainbow3 2020. 5. 8. 02:58



우파니샤드 (힌두교 문헌)  [Upanishad]출처: 브리태니커관련태그
힌두교문헌, 요가, 인도의철학, 수필
 


(산)Upaniṣad
('스승 가까이에 다가앉는다'라는 뜻).


가장 오래된 힌두 경전인 베다를 운문과 산문으로 설명한 철학적 문헌들.
현재 108가지 정도 알려져 있는 우파니샤드에는 일찍이 BC 1000~600년경에 크게 활약했던 일련의 힌두 스승들과 성현들의 사상들이 기록되어 있다. 후기 인도 철학의 많은 부분이 이 문헌에 기반을 두었다. 우파니샤드는 베다 전통의 마지막 단계를 대표하기 때문에 이것에 기반을 둔 가르침들을 베단타(Vedānta : 산스크리트로 '베다의 결론'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초기의 우파니샤드는 각 베다서의 브라흐마나(Brāhmaṇa : 주석서)의 일부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는 철학적·신비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베다의 신들과 제사의례에 관한 관심이 옅어지면서 브라흐마나와 분리되었다.

 

우파니샤드는 실재의 본성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 최고의 유일한 존재에 대한 관념이 형성되고 있으며, 지식은 그것과 재결합하는 데 있어서 직접적 수단으로 중시된다. 일부 우파니샤드에서 보이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은 모든 힌두 사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카타 우파니샤드 Kaṭha Upanishad〉에서는 죽음의 신 야마를 찾아간 나치케타스의 이야기를 통해 도덕성과 영원한 삶의 본질에 관해 언급했다. 그외의 주제로는 윤회와 생성의 인과율이 있다. 우파니샤드는 19세기초 유럽에서 2, 3차 번역본까지 나와 상당수의 사상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특히 독일에서 그 영향이 두드러졌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 우파니샤드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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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와 불교  - 알기쉬운 불교교리 - 

 

큰 흐름 속에서 만나는 경쟁 상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비슷한 부류의 사람끼리 서로 질투도 하고 원망을 한다는 겁니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 잘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질투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부자가 된 것에 대해서 배아픈 서민이 있을까요? 비슷해야 싸움이 생긴다는 건 동서고금을 가릴 것 없이 분명한 진리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은 엄청난 것이지만, 그 교리의 차이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아주 다르면 오히려 덜 싸울텐데, 비슷한 데가 더 많으니까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인도철학에서도 통용이 됩니다. 불교와 우파니샤드는 비슷한 시기에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 경쟁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둘이 비슷한 데가 많으니까 오히려 치고 받았다고 보는 게 순리일 겁니다.

진리의 밀담(密談)
우파니샤드는 기원전 7세기쯤에 성립한 철학인데, 이는 인도철학의 원천지라고 평가받는 것이고, 그 의미는 ‘가까이 앉는다’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서 가까이 앉는 사람들은 연인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가 볼세라 주로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긋나긋하게 목소리 깔고 말하면서 사랑을 속삭입니다. 이것 말고 또 가까이 앉아서 밀담을 나누는 경우는 사업상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을 때입니다. 경쟁업체에서 혹여나 도청할세라 라디오 틀어서 일단 소음을 만들어놓고서 사업얘기를 나누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렇듯 중요한 말은 일단 가까이 접근해서 전달하는, 어떤 원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파니샤드도 이런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누가 들을까봐, 산 속에 들어갑니다. 아마 우파니샤드가 성립된 당시에 라디오가 있었으면 아마도 틀었을 겁니다. 누가 듣지 못하게…. 그런데 아주 유감스럽게도 그런 문명의 이기가 없어서 그냥 맨손으로 수풀이 울창한 산 속에 들어갔겠죠. 그리고 우주의 비밀에 대해 아주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눕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되는 영업상의 비밀이므로, 둘이서만 진리의 밀담을 속삭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파니샤드의 철학이고, 내용입니다. 

이렇듯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눈 내용은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는 겁니다. 인도의 고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자아를 ‘아트만’이라고 하는데, 이 아트만을 찾고자 하는 게 우파니샤드철학의 핵심이자, 이 뒤를 잇는 모든 인도철학의 커다란 줄기가 되었습니다.

우주의 근원과 자아
우파니샤드 철학의 특징은 아트만을 바로 찾기만 하면 우주의 근원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우주의 근원 또는 존재의 신비를 산스크리트어로 ‘브라흐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트만과 브라흐만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게 우파니샤드철학의 핵심이 됩니다. 이 내용은 매우 특징적인 것입니다. 자신을 아는 건 내면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고, 우주의 근원을 아는 건 바깥 외면의 세계의 일입니다. 그래서 아무 관련이 없어야 지극히 당연한 일일텐데, 고대 인도사람들은 이런 당연한 상식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 바로 우주의 신비한 근원을 밝히는 길이라는 겁니다. 이런 관점이 발전하면 모든 신비주의 철학의 모태가 될 수 있습니다.

아트만에 대한 충고 ‘무아(無我)’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찾기 운동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거 찾아봐야 아무 소용없으니,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자라”고 하는 겁니다. 쓸 데 없는 곳에 시간낭비하지 말라는 걸, 철학적으로 우아하게 표현한 말이 ‘무아(無我)’입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아트만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냉수 먹고 속차려라”고 넌지시 말해주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트만을 반대하는 논의조차도 사실 아트만을 찾자는 그런 흐름에서 벗어나는 게 아닙니다. 무얼 반대한다고 할 때, 사실은 많은 영향을 받은 대상에 대해 반기를 들게 되는 거지, 진짜로 아무 관련이 없는 것에는 반대조차 일어나지 않는 게 세상사의 이치입니다. 다만 초기불교에서 아트만을 반대했던 건 그런 식으로 아트만을 찾아서는 백년 가도 도로아미타불이라고 충고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하면 좋을 듯 합니다. 그래서 우파니샤드의 ‘자아추구’와 불교에서 ‘자아는 없다’는 말은 아주 많이 다른 듯 보일지라도 큰 흐름에서는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철학사에 근거한 객관적 시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