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글쓰기의 지도 원칙에 대한 고찰
소병철(경기대학교)
Ⅰ. 머리말
이 글의 목적은 최근 우리나라의 대학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교양으로서의 철학적 글쓰기1) 교육에 대한 하나의 원칙적 관점을 ‘일상의 비판’이라는 철학의 고전적 개념에 준거하여 제안하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가 운위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철학적 글쓰기 교육과 같은 의사소통 교육의 활성화는 강단 철학의 참담한 실패를 경험해 온 철학 교수자와 학습자에게 철학 교육과 의사소통 교육의 접목을 통한 새로운 교육적 실험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철학에 국한하여 생각할 때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한 주요한 ‘외생적’ 원인으로는 무엇보다도 철학 교수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우리 문명의 장기적인 경향성, 예를 들면 도구적인 합리화의 징후들을 들 수 있다. 오직 시장 반응형 인력의 양성만을 대학에 요구하며 화폐로 치환되지 않는 학문의 퇴출을 유도해 온 체계의 도구적인 합리성에 의해 오늘날 “인문학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홀로 변호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법정 에 끌려온 늙은 소크라테스처럼 말이다.”2) 인문학을 무용한 학문으로 치부하게 하는 그러한 시대적 징후들은 우리 문명의 건강과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거시적 차원의 비판적 공공성을 끊임없이 환기함에 의해서만 극복의 전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 논자는 이 글에서 발표, 토론, 논술의 훈련을 통한 비판적ㆍ논증적 사고력의 함양을 목표로 하는 ‘기초 교양’ 강좌로서의 ‘글쓰기,’ ‘사고와 표현,’ ‘발표와 토론’ 등을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적 글쓰기’로 통칭하고자 한다.
2) 오문석,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자의 삶」, ?인문학이야기 + 토론 ‘난장’?, 광주: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7, 62쪽.
반면에, 철학 교수자들이 특별한 책임의식을 느껴야 하는, 인문학의 위기의 ‘내생적’ 원인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갖는데, 이러한 원인으로는 논자를 포함한 일부 철학 교수자들의 타성적인 무능을 들 수 있다. 일부 철학 교수자들은 ‘지금’의 ‘여기’를 살아가는 젊은 학습자들의 관심과 흥미에 부응하는 논제들을 개발하고 그들과 함께 이 논제들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 의사소통 공동체를 강의실 안에 구축하려고 노력
하기보다는 수 세대 동안 변하지 않은 고루한 개념 체계의 자가발전에 만족하며 스스로를 고고한 지식의 상아탑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철학적 사고의 구체성과 현장성을 강화하기 위한 철학 교수자들의 자구적인 노력이 없는 한 실효적인 의미를 갖는 철학적 계몽이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최종욱은 교수자의 해석자로서의 권위에만 전적으로 의존해 온 기존의 훈고학적 철학 수업 운영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그러한 수업에서는] ‘내’(Ego)가 사고의 ‘주체’가 아니라 ‘그들’이 사고의 주체가 되고, 오늘 ‘현재’가 문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대상이 된다. 이런 수업 분위기 속에서 나는 ‘그들’ 위대한 철학자에 비해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존재로 치부되고, 그들의 권위 앞에 무력하고 무능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급기야 ‘나’의 사고는 위축되어 정지되고 자율성과 창의성은 힘을 잃게 된다."3)
3) 최종욱, ?일상에서의 철학?, 서울: 知와사랑, 2000, 102-103쪽.
이와 같은 진단은 강의를 통한 정보의 일방적 전달보다는 발표와 토론 및 글쓰기와 같은 역동적 의사소통의 훈련을 통한 비판적 사고 능력의 형성이 철학 수업의 주요 목표로 설정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2,400여 년 전에 이미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인상적으로 보여 준, ‘철학’ 에 대한 ‘대화’의 구성적 의의를 감안하더라도 학습자를 정보로 채워져야 할 빈 그릇과 같은 존재로 간주하는 태도는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으로서의 철학의 자기이해를 배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철학은 대화에서 비로소 실천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 만들어 놓은 생산품처럼 방법과 매개를 통해 전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4) 오히려 “시작과 끝이 확정되어 있는 단순한 모사 교수법의 저편에 있는 계몽의 과정으로서의 철학”5)을 관철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발표, 토론, 논술의 주기적인 조직화를 통해 비판적인 사고의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을 보장할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소우주를 강의실에 구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들어 활성화되기 시작한 철학적 글쓰기 강좌6) 는 철학함의 본래적 방법인 대화를 철학에 되돌려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선용될 수 있고 또 선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논자의 생각이다.
4) E. Martens, ?철학교육?, 이기상 옮김, 서울: 서광사, 1988, 92쪽.
5) E. Martens, 위의 책, 136쪽.
6) 물론 의사소통 교육으로서의 모든 글쓰기 교육이 논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과 같은 ‘철학적’ 정향 하에 수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대학은 ‘글쓰기’, ‘사고와 표현’, ‘발표와 토론’ 등의 교과목을 새로운 버전의 교양 국어로 간주하며 국어학자들과 국문 학자들의 ‘관할’에 내맡기고 있고, 이에 따라 의사소통 교육은 우리말의 어문 규범에 준거한 몇 차례의 작문 시험과 첨삭, 윤문을 통한 피드백을 중심으로 국어 구사 능력 의 향상에 정향하여 수행되는 경우가 많은 실정이다. 국어 구사 능력은 의사소통 능력의 매우 중요한 일부분이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데에만도 대학 사회는 앞으로 상당한 교육적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철학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 능력이 생각의 교류를 통해 참과 거짓,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을 준별하는 비판적 지성의 덕이라는 광범위한 공감대를 인문학 분야의 교수자들 사이에 형성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나아가서 의사소통 교육의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방식들 간에 생산적인 종류의 학제적 협력과 연대를 확립하는 것 역시 중차대한 교수 법적 과제의 하나이지만, 이 글에서 논자는 그것을 상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화를 이끌 최적의 지도 원칙은 무엇일까? 논자는 이를 철학의 고전적 대가들에게서 비롯된 ‘일상의 비판으로서의 철학’이라는 개념으로 정식화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통상 우리는 법률의 조항에서 부터 식사 예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에 스며든 매우 다양한 종류의 규율들 덕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며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결정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안전 운행을 보장해 줄 것으로 기대되는 습관의 궤도에 안이한 발걸음을 싣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궤도의 정상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이 불경스런 자의식의 대가로 경이와 의심에서 비롯된 일상과의 ‘철학적’ 마찰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철학적인 사고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암시하듯 수동적인 바라봄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이며, 동시에 계몽의 빛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구속하는 인습의 족쇄들 하나하나를 힘겹게 벗겨 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러셀(Bertrand Russell)은 이와 같은 일상성(dailiness)에 대한 혁명적 전복의 기도를 철학적인 사고의 요체로 간주한다.
"사고는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것, 파괴적이고 가공할 만한 것이다. 사고는 특권과 기성 제도와 편안한 습관을 무자비하게 다룬다. 사고는 무정부적이고 법률로 제어할 수 없으며 권위를 중시하지 않고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정교화된 지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고는 지옥을 들여다보고 지옥을 무서워하지 않는다."7)
7) B. Russell,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행복한 사회 재건의 원칙?, 이순희 옮김, 서울: 비아북, 2010, 166쪽.
철학적인 사고의 이러한 특징은 일상성을 내면화한 자연적 사고와의 대비를 통해 가장 뚜렷이 부각될 수 있다. 왜냐하면 철학적인 사고는 일상성의 바깥을 사고할 수 없는 지적 일차원성을 자발적으로 극복하는 자아의 능동성을 생명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러한 대비를 통해 ‘일상의 비판으로서의 철학’을 보다 더 상세히 규명해 보자.
Ⅱ. 몸말 : 일상의 비판으로서의 철학적 글쓰기
논자는 “교육은 특정한 신조를 진리로 여기는 확신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을 조장해야 한다”8)는 러셀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한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가장 먼저 근절해야만 하는 악폐는 아마도 “교육을 학생들의 성장을 돕는 수단이 아니라 학생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9)일 것이다. 러셀은 이에 맞서 “무조건적인 수용 대신에 건설적인 의문과 지적 탐구심, 진취적인 태도가 승리를 거둔다는 세계관, 사고의 대담성을 조장하는 것”10)이야말 로 진정한 교육의 목표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철학 교수자는 하나의 중대한 교수법적 과제와 대결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평균적인 세인’의 익명성에 ‘자아’를 양도한 채 사회적 전통, 관습, 선입관과 같은 주어진 일상 성의 근거지어지지 않은 권위를 맹신하는 학습자의 지적 태만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흔히 철학적 글쓰기 강좌를 수강하는 학생들의 발표, 토론 및 논술에서는 그러한 일상성의 관성적인 효력을 당연시하며 정당하게 여기기까지 하는 소박한 ‘자연주의적’ 가치 판단이 드러나곤 한다.
예컨대 논자의 경험에 따르면 상당수의 학생들은 ‘군대에서의 가혹 행위’와 같은 논제에 대해 ‘때려야 말을 듣는 것이 졸병들의 습성’이라는 병영 생활의 통속적 교범을 사고의 원칙으로 제시하는가 하면, ‘청년 세대의 경제지상주의적 인생관’과 같은 논제에 대해서는 경제적인 종류의 효율성을 제외한 모든 가치를 기각하는 태도로 일관하며 정글과도 같은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경쟁 체제에서는 ‘승리가 곧 정의이고 패배는 불의’라는 의사 (擬似) 다윈주의적 통념을 완강히 고집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보다 건전한 다른 종류의 조직 문화나 다른 종류의 인생관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아의 목소리가 평균적인 세인의 익명성에 힘입어 더더욱 마법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특정 관념의 스테레오타입에 압도당한다. 야스퍼스 (Karl Jaspers)는 이와 같은 일상성의 검질긴 감염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인간의 소박하고 의심 없는 현존은 자신의 개별적인 의식을 주변 사람들의 일반적인 의식과 일치시킨다. […] 그와 같은 소박한 현존 속에서 나는 만인이 하는 것을 하고, 만인이 믿는 것을 믿으며, 만인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한다. 의견, 목적, 불안, 기쁨 등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부지불식간에 전염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하나의 근원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인, 만인의 동일화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11)
8) B. Russell, 위의 책, 156쪽.
9) B. Russell, 위의 책, 158쪽.
10) B. Russell, 위의 책, 158쪽.
11) K. Jaspers, Philosophie, Bd. 2, Berlin: Verlag von Julius Springer, 1932, p. 51.
평균적인 세인의 속견이 지닌, 자아에 대한 이와 같은 최면 효과를 야스퍼스에 앞서 가장 예민하게 의식했던 근대인은 단연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일 것이다. “거짓된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 것과 제아무리 유능하고 교활한 사기꾼이라도 내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못하도록 불굴의 정신으로써 주의하는 것”12)을 자신의 철학함의 과업으로 설정했던 데카르트는 그러한 자아의 각성을 방해하는 일상성의 최면 효과와 안이한 자족에의 유혹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해묵은 의견들은 마치 오래된 습관과 관습처럼 들러붙듯 돌아와서는, 본의 아니게 쉽사리 믿고 마는 내 마음을 점령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정말 있는 그대로라고 여기는 한, 즉 […]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나 적잖이 그럴듯하여 이것들을 부정하기보다는 믿는 편이 훨씬 더 합당하다고 여기는 한, 나는 결코 이것들에 동의하고 이것들을 신뢰하는 일을 그만두지 못할 것이다."13)
"또 어떤 나른함이 나를 일상의 삶으로 되돌려놓는다. 나는 포로와 다르지 않다. 꿈속에서 상상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가, 나중에는 내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는 이내 깨어나기를 두려워하며 그 매혹적인 환상을 좇아 서서히 눈이 멀어가는 포로처럼, 나는 홀로 옛 생각에 돌아 들어 잠에서 깨어나기를 두려워한다. 안락한 휴식 뒤에 수고로운 각성이 이어지면, 혹시 빛 속에서가 아니라 […] 난제들이 뒤얽혀 있는 암흑 속에서 내내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며."14)
12) R. Descartes, ?성찰?, 양진호 옮김, 서울: 책세상, 2011, 41쪽.
13) R. Descartes, 위의 책, 40쪽.
14) R. Descartes, 위의 책, 41쪽.
안타까운 일이지만 실제로 발표, 토론 및 논술에 임하는 학생들의 상당수는 안일의 쾌락을 방해하며 ‘수고로운 각성’을 촉구하는 철학을 ‘철학은 철학일 뿐’이라는 통속적 유형(流刑) 선고로 냉소에 부쳐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말과 글에서는 ‘철학적 언명이란 고상하긴 하지만 쓸 곳은 없는 이상주의적 넋두리이거나 고상한 판타지일 뿐’이라는 맹목적 믿음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철학은 ‘인텔리겐치아의 게토’15) 에 유폐된, 불온하지만 무기력한 정신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철학 교수자의 역할은 스스로에게 자연적ㆍ인습적 현존의 굴레를 씌워 놓고 사고를 중단한 채 이 상태에 안주하는 것이 이성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리는 일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학습자를 인도 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말대로 “사고 를 금지하면 사고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을 승인하게 된다.”16) 나아가서 그러한 금지에 따라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현재 상태에 근거하여 해독된다면, 이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사보타주가 될 것이다.”17) 그가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일상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부정변증법적 사고’를 그토록 급진화하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의 긍정성을 물신화하는 일상의 통속적 의식에 반하여 “단호한 부정은 존재하는 것의 승인에 관계하지 않는 엄격함을 고수한다. 부정의 부정은 부정을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이 충분히 부정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증명한다.”18) 이와 같은 사고의 부정성에 대한 아도르노의 특별한 강조가 시사하듯 철학은 안락한 영면(永眠) 속으로 잦아드는 무기력한 정신을 끊임없이 흔들어 깨움으로 써 매 순간 새로운 차원에서 새로운 생산적 불안정을 만들어 내는 비타협적 비판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사고는 이미 존재하는 것의 지적인 재생산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이 파괴되어야만 사고는 확고한 가능성의 근거를 마련한다. 그 충족될 줄 모르는 성향, 쉽고 빠르게 충족되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은 포기와 타협이라고 하는 어리석은 지혜를 거부한다'.19)
이와 같은 ‘일상의 비판으로서의 철학’의 개념20)에 따라 교양 강좌로서의 철학적 글쓰기 역시 인습화된 일상성의 정당한 근거를 끊임없이 따져 물으며 목전의 부조리한 현실이 노정하는 합리성의 비합리성과 비합리성의 합리성을 간단없이 폭로하는 지적 훈련의 기회를 학습자에게 제공할 수만 있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한 훈련을 통해 학생들은 특정한 사회적 고정관념의 기득권 위에 구축된 동일성의 체계를 합리적으로 거부하며 비동일적이고 불연속적인 체계 외적 체험에 자기표현의 기회를 부여하는 부정변증법적 의사소통의 방식을 발표, 토론, 논술의 기법과 규범에 대한 이해에 의거하여 숙달할 필요가 있다.
15) 논자는 이 표현을 르페브르(Henri Lefebvre)에게서 빌려 왔다. 르페브르는 일상의 안이함을 뒤흔들지 않겠다는 자중(自重)의 서약의 대가로 그러한 문화적 게토 속에서의 추레한 생존을 보장받은 형해화된 철학의 이미지에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저항한다.그에 따르면 철학자에게는 “무기력에의 권리보다는 박해가 차라리 낫다.”(H. Lefebvre, ?현대세계의 일상성?, 박정자 옮김, 서울: 기파랑, 2005, 296쪽) 왜냐하면 철학적인 사고의 생명력은 “일상에 대한 간섭의 능력, 일상 속에서의 변혁(또는 재조직)의 가능성”(H. Lefebvre, 위의 책, 333쪽)을 보여 주는 ‘문화 혁명’의 집요한 실천에 의해서만 입증되기 때문이다.
16) T. W. Adorno, Negative Dialektik, Frankfurt am Main: Suhrkamp Verlag, 1975, p. 93.
17) T. W. Adorno, 위의 책, p. 130.
18) T. W. Adorno, 위의 책, p. 162.
19) T. W. Adorno, The Culture Industry: Selected Essays on Mass Culture, ed. J. M. Barnstein,
London & New York: Routledge, 1991, p. 292.
20) 르페브르가 간명하게 표현한 것처럼 “철학적 전통은 근본적 비판과 비판적 거리의 유지, 반항, 그리고 자유를 수락(受諾)의 철학에 대립시킨다.”(H. Lefebvre, 2005, 351쪽)
나아가서 그와 같은 일상의 비판을 수행할 수 있는 독립적 자아의 형성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고전적인 철학의 대가들이 철학함의 스타팅 블록으 로 여기며 중시했던 ‘경이’와 ‘의심’의 중대한 발견법적(heuristic) 의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은 “경이는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태”라고 말한다. “실로 이것 이외에 다른 철학의 시초는 존재하지 않는 다”21)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종종 일상성의 정당한 근거를 경이의 눈 으로 따져 묻는 순간 일상성의 근거 없음에 근거해 온 우리의 안이한 무지를 깨닫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지의 자각을 동반하는 경이의 그러한 발견법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사람들은 ‘(어떤 것을) 의아하게 생각함’(驚異)으로써 ‘지혜를 추구하기’(철학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까이에서 벌어진 뜻밖의 (조그만) 일들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놀라고, 그 다음에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예를 들어 달의 겪이(현상)들, 해와 별들의 주변 현상들, 우주의 생성에 관해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영문을 몰라 (어떤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무지하다)고 생각한다."22)
21) Platon, Theaitetos, Sämtliche Werke, Bd. 3, Reinbek: Rowohlt Taschenbuch Verlag, 2007, p.170.
22) Aristotle, ?형이상학?, 김진성 옮김, 서울: 이제이북스, 2007, 38-39쪽.
한편 우리는 이와 같은 무지의 자각에 힘입어 오랜 기간 정당한 근거도 없이 불변의 진리를 참칭해 온 일상의 유력한 속견들을 비로소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베이컨(Francis Bacon)은 인간의 정신에 깊이 뿌리박힌, ‘우상’과도 같은 일상적 편견의 타파를 부르짖음으로써 그러한 의심의 근대적인 표상을 만들어 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학문과 삶의 발전을 저해하는 네 종류의 우상적 편견을 척결해야만 하는데, 이는 정신의 인간 중심주의적 편향에서 비롯된 ‘종족의 우상(idola tribus),’ 개인의 연구 방법, 취향, 관심 등의 편협성에 의해 생긴 ‘동굴의 우상(idola specus),’ 잘못된 언어의 사용에서 비롯된 ‘시장의 우상(idola fori),’ 특정한 종교적ㆍ학문적 권위의 맹신에서 비롯된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 등으로 상술된다.23)
모든 인식의 확고한 ‘아르키메데스 점(Archimedian point)’을 찾는 일에 골몰했던 데카르트는 “진지하면서도 자유롭게 내 의견들을 통째로 뒤집는 일”24)에 착수함으로써 그러한 철학적 발견법으로서의 의심을 더더욱 급진화한다.
"벌써 몇 해 전에 나는 깨달았다. 어린 시절 나는 얼마나 많은 거짓된 것들을 참되다 여겼던가. 그 뒤로 이것들 위에 세워 올린 모든 것들은 또한 얼마나 의심스러운가. 그러니 내가 언젠가 학문에 확고부동한 무언가를
세우고자 열망한다면, 사는 동안 한번은 모든 것을 뿌리째 뒤집어 최초의 토대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하리라. […] 완전히 확실치는 않은 견해는 물론이고, 의심스럽지 않은 견해에 동의하는 일까지도, 명확히 거짓된 견해에 동의하는 일 못지않게 엄밀히 삼가야 한다. 이는 지금 이성이 설득하는 바이다. 이 때문에 내가 만일 이것들 각각에서 무언가 의심의 근거를 발견한다면, 그 모두를 버려야 마땅하다."25)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는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은 마치 확실히 거짓된 것으로 경험한 양 모두 제쳐놓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리고 이 의심은 “무언가 확실한 것을 만날 때까지, 아니, 다른 것은 몰라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인식할 때까지”26) 계속되어야 한다. 철학적 글쓰기 교육의 요체는 이와 같은 경이와 의심의 철학적 발견법으로서의 의의를 지속적으로 일깨우며 주어진 일상과의 생산적인 마찰을 감당할 지적 용기를 갖도록 학습자를 고무하는 데 있다.
전술한 것처럼 자신과 타인이 가진 의견의 합리적인 근거를 끊임없이 탐문하며 생각을 시험하고 단련하는 의사소통적 상호작용의 절차들은 학습자에게 그러한 불굴의 비판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23) 이에 관해서는 F. Bacon, ?신기관: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 진석용 옮김, 서울: 한길사, 2001, 48-74쪽 참조. 이러한 베이컨적 비판 정신은 당연히 베이컨 자신이 영도했던 근대의 과학주의적 시대정신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탈(脫)우상적 우상’과도 재귀적ㆍ자기지시적으로 대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의 과학주의적 자연 지배 사상은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우상론이 비판의 표적으로 삼았던 네 가지 우상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상당 부분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24) R. Descartes, 2011, 35쪽.
25) R. Descartes, 2011, 35쪽.
26) R. Descartes, 2011, 45쪽.
Ⅲ.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일상의 비판으로서의 철학’의 개념이 철학적 글쓰기 강좌의 교수자와 학습자에게 견지하도록 요구하는 태도의 덕은 한마디로 ‘자기계몽(self-enlightenment)’에의 성실성이다. 우리는 종종 지금의 우리를 양육해 낸 가족적ㆍ사회적 전승과 우리를 대신하여 정사(正邪)를 판단해 주는 여야 정당, 우리를 대신하여 시위를 벌여 주는 유력 단체, 사고의 부담 자체를 부당히도 면제하려 드는 평균적 세인의 정형화된 속견에 우리의 자아를 의탁함으로써 자기를 계몽하려는 의지 자체를 스스로 무력화하는 경향이 있다. 칸트는 이와 같은 안일에의 유혹을 물리치고 사고의 대지 위를 자신의 당당히 선 두 다리로 두려움 없이 걸어 나가는 지적 과감성이야말로 전술한 철학적 자기계몽의 출발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 미성년 상태의 책임을 마땅히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은, 이 미성년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을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하는 것이 계몽의 표어이다.27)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의 자기계몽은 단순한 인지적 차원을 넘어 실천적인 차원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왜냐하면 일상성이 제공하는 안일의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지적인 성숙의 시기를 끝없이 유예하려고만 하는 사람은 그러한 지적 무위를 통해 현존하는 세계의 구조적인 역리와 불의에 군말 없이 순응하며 이를 방조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치스의 친위대 중령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피고로 세운 1960년의 예루살렘 전범 재판에서 아렌트(Hannah Arendt)를 경악케 했던 ‘악의 평범성(banalityof evil)’은 바로 그러한 순응 속에서 형성되고 강화된다.28) 그녀의 보고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라는 ‘인간성에 반(反)하는 범죄’의 집행자였던 아이히만은 수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괴물도 악마도 아닌 일개 범부였을 뿐이다. 그는 어떤 특기할 만한 살인마 기질보다는 오히려 전율할 정도의 평범함으로 충만한 정상인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독특한 인격적 특징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일상성과의 비상한 불화를 감당할 수 없는 일차원적 순응성뿐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보고로부터 악의 진원은 악마의 흉측한 수족이 아니라 주어진 일상성의 헤게모니에 백기를 들고 투항한 압도적 다수자의 정상성이라는 역설을 간취할 수 있다. 이처럼 ‘아이히만’은 ‘사고할 의지를 잃은 평범한 정상인’ 안에 편재한다.
상아탑의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더 이상의 번거롭고 위험스런 운신을 자제하는 교수와 실용적 처세훈이 아닌 것에는 어떠한 지적 반응도 보이지 않는 학생, 그 안에도 ‘아이히만’은 있다.
27) I. Kant,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칸트의 역사 철학?, 이한구 편역, 파주: 서광사, 2009, 13쪽.
28) 이에 관해서는 H. Arendt,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김선욱옮김, 파주: 한길사, 2006 참조.
그렇다면 ‘일상의 비판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원칙에 의해 인도되는 철학적 글쓰기 수업은 전술한 우리의 인지적ㆍ실천적 무기력을 비판적 이성의 법정에 회부하는 합리성의 단련을 통해 일상성의 근거 지어지지 않은 권위를 끊임없이 무력화하며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고 실험을 고무하는 의사소통적 상호작용의 장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원칙적 정향 하에서만 철학적 글쓰기 수업은 진선미를 향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뎌가는 지적 방랑의 도정으로서의 철학함을 강의실에 온전히 구현하게 될 것이다.
【주제어】철학적 글쓰기, 일상의 비판으로서의 철학, 경이와 의심, 비판적 사고, 의사소통적 상호작용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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