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대중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서구에서는 부처님 교리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사람들은 불교라고하면 으레 신비주의와 미신을 적당히 섞어놓은 것쯤으로 여겼고 그 누구도 오늘날처럼 서방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떠맡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서구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교를 적대시하여 무조건 헐뜯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으면 그 해독이 커서 우울증에 빠지고 염세적이 되며 그리하여 개인의 사회활동이나 국가발전에 유해하다며 자기네 신봉자들을 확신시키려 든다. 그러나 불교를 조금이나마 제대로 알고있거나, 미얀마(버어마) 같은 전통 불교국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그런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알 것이다. 불교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주 행복하고 밝은 국민으로 알려져있다.
이제 불교의 교리가 사람들의 성향과 행동에 얼마나 유익한 영향을 주는 가르침인지를 밝혀보기로 하자.
불교는 인간이 혼자 서게 해주고 자신감을 심어주며 능력*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해 준다. 불교만큼 능력이야말로 모든 선한 일의 뿌리임을 거듭 강조하고, 정신적 무기력과 게으름*을 단호하게 경계하는 종교적 가르침도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능력은 불사의 경지에 이르는 길,
그러나 무기력과 게으름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니라."
"비구들이여, 나는 불굴의 인내심으로 광명에 이르렀으며,
불퇴전의 노력으로 구극의 평화에 도달할 수 있었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대들 역시 잠시도 쉼없이 노력한다면 머지않아 정견과 깨달음으로 성스러운 무상정각에 이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도 "해탈에 이르도록 방일하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 였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이 거듭 깨우치게되는 것은 자기자신과 자신의 노력에만 의지해야할 것이며, 천상 천하 그 어디에도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과보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줄 존재가 따로 없다는 사실이다.
"악업을 짓는 것도 자신이고 청정함을 행하는 것도 자기자신이다. 청정함이나 불순함이나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자신 이외에 그 누구도 자신의 구세주가 될 수 없느니." 불교는 누구든 자신의 선행과 불선행의 책임을 져야하며 오직 자신만이 자기 운명의 모양새를 만들어 갈 수 있을 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악행이 저질러졌다면 그것은 그대 자신이 한 것이지 부모나 친구나 그 누군가의 탓도 아니다. 악행의 과보를 고통스럽게 거두게 될 사람은 바로 너 자신이니라."
불자라면 어떤 신(神)이나 교회도, 어떤 제의(祭儀)나 사제(司祭)도, 자신을 도와주고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되고 그리하여 자기 확신에 이르게 된다. 사람이 신이나 어떤 가상의 힘에 의존하게 되면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이 약화되기 마련이고 그 반대로 자신의 능력을 굳게 믿는 사람이 확고하고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름지기 무엇이든 전통이나 권위에 끌려 믿어서는 안되며, 누구라도 자기완성과 해탈을 성취코자 하는자는 독단적 교리나 신앙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자신의 이해력과 사고력에만 의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대중들 마음 속에 자기신뢰와 자기확신을 더욱 계발해나가는데 필요한 덕목을 제시해준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단지 풍문이 그러하다고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해서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순전히 그대의 스승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대로 믿지는 말라.
만일 그대 스스로 판단하여 그것들이 악하고 나쁘며, 그대와 남을 불행으로 이끌거라고 생각 된다면 그것들을 버리도록하라."*
사람들에게 스스로 판단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이러한 교의는 대중들에게 참으로 유익한 영향을 끼칠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권위나, 경전이나, 제의나, 전통을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강요하며, 스스로의 점검을 용납하지 않는 교의는 필시 사람의 정신을 침체상태로 몰아갈 게 뻔하다. 정신적 발전은 사고의 자유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권위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판을 치는 곳에서는 어떤 정신적 발전도 이루어질 수 없다. 사고의 자유는 정신적인 활력과 발전을 가져오지만 독단적 견해는 정체를 몰고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독단적 믿음은 편협한 마음과 짝을 이룬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다. 독단적 태도를 취했다하면 곧이어 편협심이 뒤따르게 되어있다. 여기서 잠시 서양의 중세를 돌아보자.
피도 눈물도 없는 종교재판, 잔인한 학살, 폭력, 파렴치 행위, 고문, 죄없는 사람들에 대한 화형집행, 그리고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십자군 전쟁들, 이 모든 것은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독단적 믿음과 그와 짝을 이룬 편협심의 결과였다. 독단적 믿음과 편협심은 진보적 노선을 거부하는데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교회는 이제 갈릴레오나 지오르다노 브루노*에게 가했던 야만적 방법을 더이상 쓰지 않는다해도 편협심과 잔인한 광신이 현대의 정치판에서 훨씬 더 교활한 방법으로 존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이 난김에 하는 말이지만 갈릴레오와 브루노를 이단으로 몰아 박해하고 유죄 선고를 했던 교회가 그후에 그들의 터무니없는 규정을 공식적으로 폐기했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사회발전과 도덕 지식 예술 과학 철학 등 모든 분야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발전하는 것은 사고의 융통성과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종교적, 정치적 구속과 편견이 판을 치고 국민의 자유가 탄압을 받는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처럼 편견없는 아량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존재를 감싸안는 보편적인 자비심[빨리어로 '메따'(Mettaa , 산스크리트어로는 마이뜨리(Maitri)]이다. 남에게 인정과 사랑을 베푸는 이 자비심이야말로 불교가 모든 도덕적 사회적 발전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는 것이다. 실제로 참다운 불교국가의 분위기는 모든 존재를 감싸안는 자비심으로 충만해있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계명을 무턱대고 따라서가 아니라,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아래로는 한낱 지렁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똑같은 생존의 조건과 법칙을 따르게 되어있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존재하듯이 그들도 존재한다. 그들이 존재하듯이 나도 존재한다." 이렇듯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와 자신을 동등하게 여겨야하며, 산 것은 그 어느 것도 죽이거나 해쳐서는 안된다.
불교에서만큼 보편적인 자비심과 무사무욕의 사랑을 선명하게 정의하고 있는 가르침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는 계명은 엄밀히 말하자면 막연하고 모호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 제 각각이고 때로는 이성을 잃은 사랑도 서슴지 않으니까.
'메따'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그 어느 것이나 고통받지 않고, 슬픔을 모르고, 행복하기를 마음속 깊이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의 찬가'인 '자비경'은 불교국가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남녀노소 할것없이 한 목소리로 암송하는 기도이며 마음의 양식이다. 여기서 자비경의 모든 사상이 함축되어 있는 게송 두 연(聯)을 읊어 보겠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자식을 보호하듯 그것도 하나뿐인 자식을,
꼭 그와 같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한없는 자애의 마음을 늘 지니기를.
전 우주를, 그 높은 곳, 그 깊은 곳, 그 넓은 곳
끝까지 모두를 감싸는 사랑의 마음을 키워라.
미움도 적의도 넘어선
잔잔한 그 사랑을."
이제 어느 종교의 다음과 같은 선언과 설교가 얼마나 억지소리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와 믿음이 다른 자들은 모두 다 짐승이며 겉으로만 인간의 탈을 썼을 뿐이다. 저들이 짐승일진대, 선택된 백성인 우리를 공경할 자격조차 없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너의 적을 만나게 되거든 어디에서건 죽여버려라…
. 그들을 피로 물들여라.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이 받아 마땅한 벌이니…." 라고 하고 더 나아가서 "적을 무찔러라, 그들이 무력해질 때까지, 그들이 우리의 신을 경배할 때까지…. 그들이 보복당하는 고통을 겪게 하라."고 까지 하고 있다.
이런 야만적인 계명이 먹혀들여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그로 인해 극도로 파괴적인 힘과 광신, 난폭, 잔학행위 등이 난무하게 되고 그 결과 이 세상에 끔찍한 불행과 재난이 퍼져나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불교의 경전은 참으로 무한한 사랑과 자비, 참으로 무한한 관용을 설하고 있기에 그 어디를 보아도 위와 같은 계명이나 훈계라고는 한 구절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기에 불교포교사나 승려 중에는 이른바 '비신도'들에 대하여 악의나 증오에 찬 설법을 하려들 사람이 없을 것이다.
참된 불교정신이 체질화된 국민은 종교적, 국가적, 정치적 편견이나 증오 따위란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전쟁 특히 도발적인 전쟁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강도나 살인자들이 너희 사지와 관절을 자른다해서 화를 낸다면 너희들은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같은 상황 속에서도 너희들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단련해야 하느니라."
"우리의 정신은 평정을 지키리라. 우리의 입에서는 사악한 말이 한마디도 새어나오지 않으리. 우리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해 호의와 연민으로 충만해있고, 마음 속엔 아무런 원한도 묻어두지 않으리. 우리는 분노와 증오를 모르는 넓고, 깊고, 가없는 자비의 염(念)으로 그들을 감화시키리." 이렇게 모두를 감싸안는 자비심, 즉 '메따'는 한쪽 뺨을 맞았을 때 다른 쪽 뺨도 내밀어야하는 어린양의 적극적이지 못한 사랑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증오는 결코 증오로는 가라앉지 않고
오직 온화함으로만 가라앉는다."
불교는 한번도 총칼을 쓰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부처님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부처님의 이름으로든, 그분의 교리를 전파한다는 명목으로든 단 한방울의 피도 흘린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다른 종교들은 어떠했는가? 여기서 개종을 강요하며 자행한 숱한 야만적 방법들을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다.
부처님께서는 지혜와 해탈을 증득함에 있어 무턱대고 믿는 신심이나 피상적인 종교의식은 아무 쓸모도 없다고 가르치듯이 불교에서는 형식적인 개종이란 아무 의미도 없다. 강제로 불교를 포교하겠다는 것은 마치 강압과 불의를 써서 정의와 사랑을 널리 펴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불제자들은 남들이 자기를 불자라고 부르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아서 개종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것은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목표에 가깝게 다가가는 길은 스스로 바른 견해를 갖추고 분발 정진하는데 있음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불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덕성과 지혜를 갖추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도(正道)를 알아 그들 모두가 행복하게 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
한마디 더하자면 이 보편적 자비심,'메따'는 초기 불교시대로부터 불교국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왔다. 그런 나라에서는 전국의 주요도로상에 지친 여행객을 위한 무료 쉼터를 만들었고, 목마른 자를 위해 항상 시원한 물이 담긴 물항아리를 놓아두었고, 사람과 동물 모두가 먹고 마실 음식을 마련하였으며, 병든 사람이나 동물들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약을 나누어 주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필딩 홀의 훌륭한 저서 '어느 국민의 영혼'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 책에는 불교국가인 미얀마 국민의 모습이 생생하고도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불교국 국민의 성품에 커다란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불자들이 지켜야할 오계 중에 술과 약물 등 취할 것을 마시지 말라는 계율이 들어 있음으로써 그들이 천박하거나 흉포하지 않게 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처님은 사람을 취하게 하는 음료를 마시지 말라고 경고하셨고 그런 것들이 인간의 정신과 성격과 도덕성에 얼마나 해를 끼치는지를 분명하게 지적하셨다. 어쩌다 조금만 마셔도 술은 우리 몸과 마음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술을 마시고 취하게 되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이 흐려지고, 도의심과 죄의식이 희미해진다. 한마디로 말해서 술이나 약물은 사람의 윤리의식을 둔화시키고 도덕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든다. 얼마나 많은 순진한 청소년들이 술이나 약물 때문에 악덕의 희생물이 되고 끝내 죄를 저질러 옥살이까지 하게 되는지는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사람이 술에 취하게 되면 주독(酒毒)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이성을 잃는 상태가 되며, 끝내는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과음은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 기능에 장애를 일으켜 성질을 고약하게 만들고, 정신을 마비시켜버린다.
윤리적으로 무감각해지고, 난폭해지고, 잔인해지는 것도 술이나 약물복용이 주범인 경우가 허다하다. 음주행위를 자제하는 국민은 늘 맑은 정신으로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자기통제를 잘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서구에서 흔히들 넘겨짚듯이 국민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종교가 아니다. 반대로 이 세상 그 어떤 종교보다도 국민의 성격과 태도를 향상시키고 고양시키는데 적합하다. 불교는 한 국민의 자존심과 책임감을 일깨워주고 그 나라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또한 인간 본연의 능력인,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힘에 호소하여 정신의텝향상을 촉진시켜 준다. 그리고 국민들이 종교적, 국가적 편견을 떨쳐내고, 광신에 빠지지않게 함으로써 더욱 넓은 포용력을 가지게 해준다. 불교는 국민들 마음 속에 모두를 감싸안는 자비심과 형제애를 심어주어 증오심과 잔인성을 없애준다. 또한 불교는 술이나 약물 등을 금함으로써 국민이 늘 맑고 냉철한 정신을 유지하게 한다.
요컨대 불교는 인간의 모든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있으며, 어떠한 신이나 부처님도 궁극의 목표에 데려다줄 수 없기에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의 힘과 통찰력을 향상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줌으로써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불어넣어 준다. 따라서 자기 존중의 태도, 자신감, 이해심, 너그러움, 모든 것을 감싸안는 자비심, 명정한 정신, 사고의 자주성 등이 불교의 영향을 받는 국민들 사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점들이다. 이러한 장점들이 널리 자리잡고 있는 나라에서는 평화와 행복이 충만할 것이다. 그러한 나라야말로 전세계가 바라마지 않는 모범국가가 될 것이고 바로 지상의 낙원이 될 것이다.
주 해
*1) 드와이트 고다드 지음, 「불자성전」 참조.
*2) 감각의 대경:육외처(六外處), 즉 형태, 소리, 냄새, 맛, 몸의 감촉 대상, 사유의 대상을 가리킨다. 보리수 잎 복 일곱, '경전에 나오는 비유담 몇 토막', 11쪽 참조.
*3) 보리수 잎 일곱, '경전에 나오는 비유담 몇 토막', 24쪽 참조.
*4) 여기에서 능력은 五根 가운데 하나인 energy를 의미한다.보리수 잎 하나 '영원한 올챙이', 49쪽 참조.
*5) 무기력과 게으름:懈怠와 昏沈, 법륜 팔 '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방법',29쪽 참조.
*6) 법륜 둘 '구도의 마음, 자유-깔라마경', 11쪽 참조.
*7) 지오르다노 브루노:1600년 로마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화형당한 이탈리아 철학자.
*8) 보리수 잎 스물 여섯 '오계와 현대사회', 2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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