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도
세상사 무슨 일이건 극단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중도(中道)로써 대처한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정치와 같은 공적인 일이건, 사사로운 견
해나 행동이건, 그 밖의 인생살이 매사에 있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어떤 것이 실제로 중도인가를 찾으려들면 그것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듯 진실과 허위, 또는
옳고 그름 간의 중간절충점이 아니다. 실제로 중도야말로 그 자체가 바로
진실이며 옳은 것이다. 그것을 구현하기가 어려울 따름이다. 예를 들어 보
자. 중도는 (부처님 말씀과 같이) 자기 방일과 자기 고행 사이의 중간길이
다. 이 말씀을 밖으로 타인이나 동물에게까지 적용시키면 애지중지함과 잔
인하게 굼의 중간이다.
중도를 이렇게 규정할 경우, 이는 곧 오늘날 난제 중의 난제가 되고 있는
문제, 즉 자기 자신과 남들을 어떻게 훈련해야 중도에 합당해질 수 있을 것
인가 하는 문제로 당연히 이어진다.
또 중도는 지나친 회의주의와 맹신 사이의 중간이다. 그럴 경우 이번에는
우리들의 종교적(내지 준 종교적*) 견해와 신조들이 문제가 된다. 이렇듯
중도는 많은 문제를 제기하지만 동시에 해결의 길도 열어주고 있다. 적극적
인 측면으로 파악하면 중도는 게을러빠짐이라는 한 극단과 쉴새없는 흥분과
긴장이라는 또 한 극단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고요하고도 깨어있는 마음상
태이다. 실로 이러한 마음상태를 이루기만 한다면 우리는 당면한 문제들을
그 본질부터 냉정하게 짚어볼 수 있게 되어 모든 문제들을 풀어나가는데
크나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보다 자기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훨씬 더 넓고 깊은 통찰력을 갖게 된
다는 것을 뜻하며 그렇게 되면 물론 남들의 감정에 대해서도 좀더 큰 통찰
력을 갖는 쪽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렇듯 중도는 모든 공덕의 원천이건만, 오늘날에는 아주 온건하고 세속적
인 차원의 중도마저도 별로 인기가 없다. 유사 이래로 항상 그러했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다만 문제는 오늘날처럼 들떠있는 시대에서는 중도야말로
유달리 필요한 것이 되고 있다는 점이요, 그런데도 중도를 지키기는 유달리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상황이 이와 같다 보니 우리는 현실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나머지 과거에
대한 향수로 빠져들기가 쉽다. 엉뚱하게 옛날을 이상화시켜 동경하려 드는
경향인데, 사실 아무리 과거를 미화시켜봐도 역사상 어느 시대치고 중도를
취하기 어렵게 만드는 한두 가지 중대한 애로점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는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걸핏하면 전에는 차분한 분위기 속
에서 삶을 향유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사라져 버렸다고 개탄하여 마
지 않는다. 절이나 교회, 명상 센터 또는 그 비슷한 곳에나 가야 겨우 그런
분위기를 맛볼 수 있을까, 달리는 그런 분위기를 맛볼 길도 없어져버렸다
는 얘기다. 그러나 이 얘기도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예전의 경향은 대체로
게으름과 나태 쪽이 근심과 허둥댐 쪽보다 컸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는 것
이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도, 과거에서 살 수도 없다. 오로지 우리는 이 시
대의 결함을 바로보고자 노력할 수 있을 따름이며, 그럼으로써 이 시대에
대응할 태세를 갖추고, 그리고 이 시대가 지닌 애로 사항에 맞서 고쳐 나가
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갈 수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얼른
눈에 띄는 분명한 애로점으로는 우리가 전에 없이 온갖 종류의 선전 공세의
표적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다. 처음엔 신문이, 그 다음엔 라
디오가 그리고 이제는 텔레비전이 거침없이 우리들의 안방까지 파고들어 온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어리석고 사악한 짓거리들을 홍수처럼 쏟아놓
고 있으니, 이는 일찍이 없었던 일인 것이다.
폭력이 그런 짓거리들 중의 하나이다. 요즘처럼 매스컴이 끊임없이 보도해
대는 폭력 장면을 계속 보고 있어도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이 별로 해를
입지 않고 온전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주장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긴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들이야 무슨 말인들 못하랴만.)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둘 일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반드시 어린 아이들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그 양상도 다양한 섹스 문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의 두 문제에 못지 않게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이 있다. 바로
광고의 문제다. 가장 평범하고 일상화된 상업 광고일지라도 그 미치는 영향
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는 은폐되어 잘 드러나지 않
는 해독인 만큼 더욱이 방심할 수 없다.
온갖 종류의 폭력도 문제이고 또 노골적 표현이 이제 절정에 달한 감이 있
는 섹스도 문제지만, 광고야말로 이 시점의 우리 상황에선 가장 유해한 요
인의 하나란 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극단
적인 말같이 들릴 테고, 또 어떤 형태든 상업 문화를 기왕 누리고 있는 이
상 광고에도 일종의 합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도 인정
한다. 그러나 좀더 제대로 된 상황에서라면 광고의 문제성이 지금처럼 심각
하지 않고 그 역할이 훨씬 온당해지리라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인간의 탐욕을 드러내 놓고 충동질한다는 것은 추악한 일이며 위험천만한
일이다. 거기에 길들여지면 사람들은 물질적인 장치나 위안물 따위가 바로
훌륭한 생활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술과 담배가 그렇듯이 이들은 한
결같이 우리에게 철저히 해로움만 주고 있지 않은가. 또 그 충동질은 소위
‘생활 수준’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밀어 올리도록 몰아댐으로써 없어도 그
만인 사치품들을 마치 생활의 필수품인양 생각하게 되는 정신상태로 우리를
점점 더 깊숙이 몰아간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끝없는 임금인상 투쟁을 격발 내지 악화시키는 강력한 요인이기도 한 것이
다.* 노골적 충동질에 대해 말하려면 이 밖에도 얼마든지 더 있다.
자동차만 해도 그렇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도로를 메우고, 엄청나게 잦은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자연경관을 파괴하고, 공해를 유발하고 그리고 그런
대로 꽤 괜찮았던 영국의 대중 교통 체계를 무너뜨릴 지경에 이른 그 자동
차들이 정말 순전한 필요성 때문에 그처럼 갖가지 형태로 급증일로에 있는
것인가? 또 할부제의 문제도 있다. 요즘 무한정으로 퍼져가고 있는 할부제
때문에 옛날 그처럼 잘 지켜지던 근검절약의 미덕은 뿌리째 뽑혀지고 사람
들은 점점 더 무거운 채무를 짊어지도록 유혹받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위
에 든 문제들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우리는 자신의 ‘좀더
높은’ 생활수준에만 정신이 팔려있다보니 아직도 절대 빈곤과 싸우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선 아예 무관심하게 되어 가고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폭력의 해악은 그래도 일반이 인식이라도 하고 있다. 비
록 속수무책으로 무력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또 성 문제도 그 지나
친 방임의 위험성은 최소한 우리들의 목전에 계속 노출이라도 되고 있다.
비록 대처방안에 대해서는 합의를 못이룬 채 점점 더 지리멸렬 상태로 빠져
들고 있긴 하지만. 그런데 순전히 부추겨서 생긴 취득욕구로 생겨나는 해독
에 대해서는 명확한 인식마저 절대 부족한 실정이다. 폭력이나 섹스 못지
않게 획득욕구의 해독 역시 오늘날 모든 국면에 걸쳐 치명적인 위험을 끼치
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얼마전까지도 빈곤이 범죄의 주된 원인이라는 견해가 널리 견지되고 있었으
며 적어도 ‘진보주의 집단’ 내에서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
다. 아마 사실이 그러할 것이다. 단지 ‘가난’이라는 말만 달리 해석한다
면 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가난을 단순한 물질적 빈곤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내
가 말하는 마음과 정신의 가난이란, 기독교에서 축복하여 마지 않는 진정한
‘마음의 가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맹목과 불완전
한 정서에서 생기는 가난을 말한다. 진정한 ‘마음의 가난’이 뜻하는 바는
여러 가지겠지만 적은 것으로 만족한다는 뜻도 담고 있다. 따라서 그와 정
반대란, 바로 자기가 가진 것에, 그것이 많건 적건 상관없이, 무조건 불만
스러워 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억만장자가 그 재산도 부족해서 수백만 불짜
리 기업인수 경매에 나서는 거나, 땡전 한 푼 없는 뒷골목 좀도둑이나, 자
기 처지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점에선 똑같다. 뿐만 아니라 형태는 좀 다르
지만 한도 끝도 없이 유행을 쫓도록 부추기는 저 약삭빠른 수많은 선전원들
에게서도 만족을 모르는 가난한 마음을 볼 수 있다. 기실 그 유행품들이 얼
마나 하잘것 없는 것들인가 살펴보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따라서 이 상업주의 시대에 우리가 중도를 추구해 나가려면 우선 저 수요를
부추기는 자들부터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그래도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고 치더라도 추구하는 방법이 틀렸으며, 또한 그 동
기가 전적으로 나쁘지는 않다하더라도 완전히 순수하다고 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탐욕스런 요
구의 소리에 항상 방심하지 말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더욱이 불자된 도
리로서야. 그래서 우리들의 욕구가 필요성에서 온 것인지 탐욕심에서 온 것
인지 분명히 가려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잘
살펴보노라면 정작 우리들이 꼭 필요로 하는 것들은 의외로 매우 조촐한 수
준에서 그친다는 것이 판명될 것이다.
사실 중도는 찾아내기가 어렵다. 게다가 중도 비슷한 것이라도 찾아낸 사람
은 다시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기 쉽다. 가령 국민의 진정한 권리를 옹호하
려고 나서면 우리는 ‘체제 전복자’로 몰리기 일쑤이고, 또 국민은 권리만
주장할 게 아니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비추기만 해도 대번에 반동이
나 ‘파시스트’로 몰리고 만다. 그러나 그런 따위 어리석은 시비일랑 그것
이 어느 쪽에서 오건 아예 무시해 버릴 수 있도록 공부를 지어 나가라. 그
래서 우리 스스로 선택한 중도의 길을 흔들림이 없이 나아가도록 하자.
진 창 길
최근에 어떤 책을 읽다가 아주 기막힌 영감을 주는 재미있는 오자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대승(Mah a)과 소승(H넋ay a)을 합성한 셈인 Hah
는 오자였다. 이처럼 서구식 불교에서는 웃지못할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물론 동양식 불교에서도 그런 일이 아주 없지는 않을테지만. 언젠가 “우리
집 고양이는 선정(Zen)에 잘 들어요.” 라고 어떤 부인이 말하기에 “그래
요? 그럼 그 고양이는 탐 套치를 벗어났겠네요?” 하고 대답한 적도 있었
다.
이 정도이니 어느 유명한 영국 국교회 신학자의 다음과 같은 실수는 얼마든
지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는 불교에 대해 깊고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불교의 마음챙김[正念]을 설명하면서 그는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될 때까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을 미
루어 보건대 마음챙김이 아니라 정신집중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정신집중은 참으로 좋은 것이며 불자라면 당연히 그 수행을 해야 마땅하다.
정신집중은 커다란 고요와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그렇지만 마음챙김
이 함께 하지 않는 한 절대로 우리를 깨달음에 도달시켜 주지는 못한다. 앞
에 말한 고양이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고양이는 움직임을 절제할
줄 하는 꽤나 우아한 동물이다. 우리는 고양이가 만족해서 가르랑거리며
기분 좋아하는 모습을 가끔 본다. 이것은 아마도 고양이들이 갖고 있는 상
당 수준의 집중능력과 관계가 없지 않을 것이다. 가령 새들을 뚫어져라 바
라볼 때의 고양이를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양이가 초연하게
집착없이 새들을 바라보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은 집중
력으로 고양이가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다면 고양이도 깨달음의 길에 들어
설 수 있을테지만.
이제 서구의 불자들도, 하려고만 들면 얼마든지 스스로 체험해 볼 수가 있
는 여러 가지 의식상태의 변화에 관해 좀더 자세하게 알아야 할 때가 되었
다. 거기에 관해서는 찰스 티 타-트(Charles T.Tart)가 엮은 ‘변형된 의식
상태(Altered States of Consciousness)’라는 책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의식상태의 변화에 관해 어느 정도 지식을 지니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착오
를 일으키지 않게 될 것이고, 특히 흥미롭거나 다소 유익한 ‘체험’을 했
다 해서 벌써 깨달음을 얻은 양 또는 가까이 간 양 착각하는 일들이 없어지
게 될 것이다.
실제로 위빠싸나(Vipassan 수행을 하다 보면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특이한 경계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러한 경계를 무사히 잘 넘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경계들은 우리의 최종 목표가 아니고 단지 어떤 준비단계가
마무리되었음을 나타낼 뿐이다. 그런 경계에 들면 커다란 환희심이라든가
큰 신심, 빛의 환영 등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몸뚱이가 없는 것처럼 혹은
머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럴 때 우리는 개의치 말고 그대로
밀고나가야 하며, 일어나는 일들을 분명하게 알되[正知] 가능한 한 마음은
휘둘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선사(禪師)들이 자기 제자들을 아주 엄격하게
다루는 것도 주로 이런 단계가 있기 때문일텐데, 얼마나 고마운 경책인지
모른다. 중요한 일은 그러한 경계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도 그것을 향상으로 알고 우쭐거리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바로 이 고비를
무사히 넘겨야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향상의 길로 들어설 수가 있는 것이
다
요즈음, 명상수행에 대한 관심들이 부쩍 고조되고 있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로서 아마도 이 시대의 가장 뜻깊은 발전이라 할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
문에 공부의 초기 단계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며 또 어떤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인가를 가능하다면 누구나 다 잘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명상수행을 해 나가다 보면 즐거운 느낌도 오
고 괴로운 느낌도 온다. 마음챙김과 분명한 알아차림에 의해 이 두 가지 느
낌을 모두, 잘 넘겨낼 수 있도록 공부를 지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요새와서 명상이란 말을 너무 흔하게 쓰다보니 이 말이 온갖 사람들이 제멋
대로 하고 있는 정신적 활동을 폭넓게 지칭하는 일종의 공통 상표처럼 되어
버렸다. 우선 전통적인 기독교적 명상들만 해도 여러가지다. 특히 로마 카
톨릭과 희랍 정교회에 많이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명상하면 인도를 꼽
아야 할 것이다. 요즘 힌두교와 요가 전통에 속하는 온갖 수행법이 다 소개
되고 있는데, 개중에는 순수한 것도 있고 의심스러운 것도 많다. 또 가르치
는 사람들을 봐도, 과연 저런 사람들이 명상을 가르칠 수 있을까 의심이 가
는 경우도 많다. 물론 그중에는 매우 진지한 지도자와 수행자도 더러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가르치는 것마저도 불교의 각 전통교파가 가르치는 것과
는 현저히 다를 때가 많다. 또 요즈음엔 히피족이나 그 비슷한 무리들간에
소위 환각제 같은 약물의 복용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약물에 의
해 경험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 앞에서 설명한 경계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 그렇다면 고작 그 정도의 경험을 맛보자고 엄청난 위험을 무릅써가며 구
태여 LSD* 환각여행 같은 것을 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약물은 아
니더라도, 너무 쉽게 협잡꾼이나 사이비 교주의 최면에 걸려들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공동체의 집단최면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런 경우 비판 기능부터
마비되고 마는데, 특히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는 분위기에서는 더욱 그러하
다.
때로 지성이 지나치게 강조될 위험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또 아주 실제
적인 의미에서도 지성은 초월되어져야할 그 무엇이다.** 그렇지만 지성의
다소 비판적인 상식은 안전장치로 나쁘지 않다. 그리고 명상에서 중요한 것
은 무엇보다도 올바른 동기이다. 진지한 명상을 하는 목적은 자만심을 조장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인 것이다. 자기가 ‘깨달았다’
고 느끼는 것은 기분은 좋겠지만 바람직한 상태는 아니다. 게다가 그 동기
가 남을 지배하는 힘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고약한 일이다
. 명상의 참된 목적은 고(苦:dukkha)를 극복하는 데 있다. 정신집중만으로
도 때로는 분명 매우 행복한 상태를 누릴 수 있지만 그 행복한 상태는 오래
가지 않는다. 따라서 그 상태가 ‘고(苦)’를 없애주는 진정한 치유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도움은 될 수 있겠지만. 그러한 행복한 상
태는 더욱 깊은 통찰력을 키우는 발판 역할을 할 때에야 비로소 제 구실을
다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명상의 참된 목적은 자비심을 키우는 일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알고보면 이처럼 당연한 말도 없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대승
불교를 믿는 사람들인데, 그 교의에 의하면 자비는 지혜와 뗄 수 없는 관계
에 있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만이 남다른 이해심으로 진정한 자비행을 실
천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심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앎으로써만 얻어
진다. 다시 말하면 ‘나[自我]’라고 하는 이 신비로운 존재가 무엇인가를
알아차리는[正知] 능력을 더욱 발전시킴으로써만 그 이해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지혜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자신의 고는 물론이고 남들의 고 역시
치유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입장은 모든 교파에 공통되는 불교의 기본사
상이다. 우리 자신이 겪는 고뇌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을 때, 비로소 남들에
게 진정한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역량도 생겨날 것이다. 그렇게되면 일부러
자비행을 시도하려고 굳이 많은 애를 쓸 필요도 없다. 저절로 이루어질테니
까. 그러므로 소승불교냐 대승불교냐에 지나치게 신경쓰지 말고 오로지 불
자다운 양심에 따라 좋은 일을 해나가기만 하면 될 것이다.
혹시 당신이 자신의 본질적 문제는 제쳐놓고 이른바 ‘중생구제’에만 지나
치게 열중하는 듯 싶으면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이 건강하
지 않은 징후이기 때문이다. 남의 문제란 원래 자신의 문제보다 이론적으로
나마 풀기가 쉬운 법이다. 남의 일은 아무래도 한 다리 건너이니까. 오죽하
면 대수롭지 않게 행하는 수술을 ‘남의 몸에 칼대기’라 하겠는가.
‘위빠사나’ 내지는 여타 명상을 하는 도중에 ‘행복한 경계’에 들게 되
더라도 너무 들뜨지 말고 초연하게 그 상황을 바라보면서 그대로 정진을 계
속하라. 그렇게 하기가 정녕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연하려고 시도
만해봐도 당장에 그대 자신이 행복이란 것에 얼마나 무섭게 집착하고 있는
지 더욱 더 절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계속 수행을 해가면 오래지 않아 그대의 ‘자아’를 포함한 일체 사
물의 본성 즉 무상을 전보다 조금은 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욕
구불만* [苦]과 주체의 부재[無我]도 드러나게 된다. 깨달음에서 오는 더할
나위없는 확연함은 아직 아니지만 꽤나 명료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당신이 ‘자아’라는 관념을 떨쳐버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무아(a
natt **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개념이 분명하게 잡힐 것이다. 굳이
그것을 ‘공’(空`:`산스크리트 ㎬ny 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것도 무
방하다.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뿐만 아니라 얼핏 보기엔 부정적인
듯 보이는 이 무아가 결국 그 본질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것임을 차차 이해
하게 될 것이다.
팔정도를 닦아가는 길에는 수많은 미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누
구나 수행의 시작 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최소한 어떤 수준에 이를 때까지
는 계속 길잡이가 되어 줄 스승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알아차림 공부를 놓치지 않는 일이다. 여기에 잠시라도 끊어짐이 있으
면 안된다. 설사 어떤 경지에 이르렀든, 또는 이르렀다고 생각되든 간에,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그 경지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자만심
이 너무나 쉽게 고개를 든다는 사실도 우리는 항상 앞질러 알아차리고 있어
야 한다. 또 자만심이 생겨났을 때는 자만심이 생겨난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되는데 이것이 더 어렵다. 이 자만심을 이따금씩 지적해주는 일이
바로 스승이 하는 역할 중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이다. 일껏 지적해 주어도
제대로 못받아들이고 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어쨌든 자만심이 그
것을 펼칠 때 바로 붙잡아들일 수만 있다면 나머지 일은 제대로 풀려나갈
것이다. 그리되면 저 허다한 사람들이 달려가고 있는 진창 길(muddle way)
대신에 중도(middle way)가 우리 시야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장애물 경주
인생은 장애물 경주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장애
물들과 끝도없이 씨름을 해야만 하는 판이니까. 이 점은 ‘서구문명’의 한
가운데라고 다를 바 없다. 가난, 불건강, 주택난, 자유로운 사생활의 결여(
혹은 지나친 사생활 추구에서 오는 절망적 고독), 시끄러움, 지저분함, 혹
사 등등….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런던, 뉴욕, 동경, 서울 같은 대
도시에서는 장애물 경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전투구(泥田鬪拘)판이 벌어
지고 있다. 엄청난 인파가 도심으로 들어가고 또 나가기 위해서, 직업을 얻
고 또 지키기 위해서, 이웃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
해서(이 알량한 자존심이 뭔데 그렇게들 법석들인지), 글자 그대로 악전고
투이다.
설상가상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하며 언제 닥칠지 모를 재앙들까지 생각
해보라. 핵전쟁 渶】쬡국지전, 인종폭동과 크고 작은 폭력배들의 난동, 화
학 물질에 의한 식품과 환경의 오염, 규격화 컸뼜苦 전반적 인간성 상실,
부부지간 罐的자식간, 고용주와 피고용인간의 인간적 갈등, 수상쩍은 대
의를 내세운 감정적 호소들, 끊임없이 탐욕을 자극하며 인간의 저속한 기질
에 영합하는 광고 등.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그나마 비교적 형편이 괜찮은
지역에서의 문제들이다. 비아프라나 베트남,* 또는 수많은 경찰국가들과
절대빈곤 국가에서는 위에 열거한 문제들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 고통과
타락과 절망이 끝간데 없이 처참한 상황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간으로 인
해 동물들이 겪고 있는 각양각색의 고통은 고려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이
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고통을 모를 리 없다.
우리들 주변에는 더러 이 한도 끝도 없는 고통의 목록중에서 개인적으로 고
통의 상당 부분을 모면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생각을 가다듬
어 보면 그런 사람들도 고(苦)를 겪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이
지 누구랄 것없이 우리 모두가 날이면 날마다 현대생활의 엄청난 속도와 중
압에 시달리다 못한 나머지 궁지에까지 뒤몰리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이
어찌 무모한 짓거리들이 아니겠으며 서글픈 장애물 경주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만 하는가? 일단 당면하고 있는 상황을 있는 그대
로 직시해야만 한다. 모든 상황은 인생의 본질이 고라고 설명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입증해준다. 사실상 예전과는 달리 요즘에는 ‘인생은 고해’라는
말에 별로 거부감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바야흐로 고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불교가 이기적이라고 주장하는 소리도 가끔 듣는다. 기독교인과 인도주의자
들은 자기네가 불교도보다도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더 많이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이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우리는 당연
히 있는 힘을 다해 굶주림을 추방하고, 전쟁을 그치게 하거나 막을 수만 있
으면 막고, 또 그 밖의 것도 할 수 있는 일은 다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
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아무리 애쓰더
라도 이 사바세계에서 고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고를 없애려해도 고의 본질이랄까 또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해, 즉 정견(
正見)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기 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봐야 헛된 노력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인간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여러 방면에서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증대시켜 왔다. 그러나 더할 나위없이 선한 의도를 지닌 최고 수준의 과학
자들조차도 무서운 실수를 저질러 재앙을 초래했고 아직까지도 계속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한 가지 예만 들겠다. 디디티(DDT)의 경우를 보자.
이 살충제가 세상에 처음 알려졌을 때엔 모두들 대단한 축복이라도 받은
양 생각했다. 일단 축복이라 쳐두자. 그렇지만 그것이 고통을 수반한 축복
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실험과정에서 고통
을 받았을까? 또 그 약품으로 죽음을 당한 곤충들이 겪었을 고통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도대체 그 약품은 곤충들에게 어떤 죽
음을 주는가? 괴로움에 찬 죽음인가? 그렇지 않은 죽음인가? 우리는 그것조
차도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일에 마음쓰는 사람마저도 별로 없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디디티가 여전히 축복인가? 함부로 사방
에 뿌려댄 이 약이 이제는 인간 자신을 위협하는 괴물로 변했다고 믿을 수
있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근래에 디디티는 각국에서 생산이 금지되고 있다
.) 애당초 그런 괴물이 개발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좋았을텐데. 살충제와
곤충들의 저항성 사이에 ‘점점 더 독해지기’ 경쟁만 촉발시킨 셈이 되었
으니…. 디디티의 경우 인간들의 이익만 생각하고 곤충들을 해치려 들었으
니 결과가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을 돕는 노
력도 그것이 지혜로운 노력이라야 자신을 도우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
이다. 사실 우리는 순전히 남만을 돕거나 또는 자신만을 도울 수는 없는 법
이다. 그 둘은 언제나 같이 붙어다니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외부적인 문제들만을 살펴보았
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은 과연 어떠한가?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기질 속에
탐욕, 증오, 미망의 삼독심이 뿌리박혀 있다고 하셨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의 하나로, 종교를 가진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분별이 있는 사
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외부적’인 것들을 포함하여
우리의 모든 문제는 그 원인을 알고보면 결국 이 삼독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가 술 광고나 포르노 영화 또는 도박 따위에 그토록 쉽게
유혹을 받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내면에 뿌리박고 있는 욕심[貪] 때
문이다. 또 타국, 타인종, 타○○ 등등에 대한 폭력사용 선동에 왜 쉽사리
넘어가고 마는가? 우리 내면에 뿌리박고 있는 증오심[瞋] 때문임이 분명하
다. 어찌하여 우리는 누가 봐도 뻔한 멍청한 짓거리를 끊임없이 저지르는가
? 우리 속의 무지[癡]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보통 이러한 삼독심이 나 아닌 남에게서 작용하는 모습은 너무도 잘
알아본다. 특히 그들의 행동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이익에 불리하게 작
용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자기 마음속에서 작용하는
삼독심만은 좀처럼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처음부터 불성(佛性) 어쩌고저쩌고 하면
서 거창한 것부터 찾으려들지 말고(공부를 지어가다보면 자연히 그쪽을 향
하게 될 테니까) 먼저 우리들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탐 套치 삼독심의
움직임을 간파하도록 하자. 이 삼독심이야말로 외부의 어떤 문제보다도 진
짜 장애물이다. 병이나 가난 등의 ‘외적’ 문제들은 과거 업의 결과일 수
도 있으니, 우리는 어떻게든 즐거운 마음과 확고한 의지력을 최대로 발휘해
서 감내해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장애는 우리의 내면을 관하
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공부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병으로, 가난으로, 또는 너무 늙은 탓으로 거동이 부자유스럽고 옛날
처럼 즐거운 시간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치자. 그러면 어느 때보다도 우
리는 명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더 많아진 셈이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 좋은 일이겠는가?
그렇다. 인생은 장애물 경주다. 그런데 진짜 장애물은 어디에 있을까? 밖에
있을까, 아니면 안에 있을까?
불교에서는
자유의지를 어떻게 보는가?
“불교에도 자유의지가 있는가?”
서양의 토론장에서 종종 튀어나오는 단골 질문 중 하나이다. 대답도 연사마
다 다른데 긍정적인 사람도 있고 부정적인 사람도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
하자면 자유의지란 개념부터가 전혀 불교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
지나 기독교적 발상에서 나온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조차 이
문제를 놓고는 횡설수설하고 있다.) 하지만 용어에 너무 신경쓸 필요는 없
겠다. 불교적 관점에선 아주 다른 방식으로 제기되겠지만. 하여튼 이런 문
제를 놓고 부심하는 사람들이 불교계에도 있는 것 같으니 일단 대답을 시도
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불교용어로 이 문제를 재설정하는 것은 차치해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대답은 ‘그렇다, 인정한다’이다. 여기엔 설명과
유보 조건이 따른다. 하지만 논리적 규명만 일삼지 말고 우선 실제 상황이
그러한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기독교 신학에서는 자유의지란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략하게나
마 고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 사실 오늘날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좋게 말해 예전처럼 신학 이론에 완강하게 국집하지는 않는 것 같
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 몇 세기 전 교부 신학자들이 제시한 판에 박
힌 말에 구애받기는 정도의 차이일 뿐 지금도 매한가지이다. 분명 기독교에
서 자유의지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인간이 선과 악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어느 쪽을 택 하느냐에 따라 사후에 갈 곳이 정해진다는 논리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식으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입장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일
부 기독교인들(특히 칼빈파)은 신이 각 개인의 운명을 미리 결정해 놓았다
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하느님이 시키는대로
천국이든 지옥이든 순순히 따르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 이런 식의 주장
은 종교뿐만 아니라 세속적 차원에서도 전개되고 있다. 그럴 경우 신에 의
한 운명예정론 대신 유전인자 따위에 의한 결정론이 들어서게 된다. 그들간
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의 경우, 이 생 너머로까지 결말이 연장되지 않는다
고 믿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그들에겐 금생이 전부니까.
위에 든 견해들은 사실상 부처님 당시의 고대 인도에도 있었다. 그것들은
빨리 경전 중, 장부(長部)의 첫 번째 경인 범망경(梵網經:Brahmaj a Sutta
)*에 열거되어 있는 62가지의 그릇된 견해 중에 들어 있다. 그 속엔 예정론
이나 결정론 말고도, 인간과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포함해서 이 세상만사
는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라는 이론도 들어 있는데, 이 우연론은 최근에 와
서 프랑스의 학자, 모노* 교수가 무슨 대단한 독창적 이론이기라도 한 양 의
기양양하게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범망경에서 꼼짝없이
논파되고 있다. 철학적 사변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 경을 한번쯤 읽도록 권
하고 싶다.
불교도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업(業) 즉 깜마
의 문제이다. 여기서는 몇가지 이유로 산스크리트어 까르마(karma)란 단어
를 쓰지 않고 빨리어 깜마(kamma)를 쓰겠다. 까르마라는 어휘는 대승불교권
에서 흔히 쓰이고 있고 또 대체로 적절하고 정확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
나 이 말은 힌두교도나 신지학자(神智學者)들도 쓰고, 또 요즘에는 논리에
맞든 안 맞든 온갖 사람들이 별의별 뜻으로 다 쓰고 있는데 도무지 정확한
불교적 용법과는 맞지가 않기 때문에 피할 도리밖에 없다. 깜마를 문자 그
대로 풀면 ‘행동’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말을 다시 빨리
어, 체따나(ceta-n 즉 ‘의지’란 말로 규명하셨다. 따라서 업이란 ‘의
지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빨리어로는 꾸살
라(kusala,‘능숙한’)와 아꾸살라(akusala,‘능숙하지 못한’)-`내가 하
고자 해서 하면 그것이 나의 업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듯 업은 분명 행위(d
eed)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내가 뿌린 씨앗(seed)이기도 하다. 적당한
때가 되면 그 씨앗은 자라 어떤 과보를 맺게 마련인데 그것이 맛좋은 것이
될지 속이 뒤집히는 것이 될지는 그때 가봐야 안다. 어쨌든 우리는 뿌린대
로 거둔다. 이 생에서건 다른 생에서건. 이는 어찌보면 기독교적인 관념과
매우 유사해 보이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공식을 적용시키려 들 수도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업보(kamma-vip a)라는 것은 인격과 무관한 비인격적인 작용
과정**을 가리키는데 반해,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인간에게 상벌을 주는 것
이 신이라는 점이 분명히 다르다. 물론 업(業)의 보상과 응징은 기독교에서
처럼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한시적이며 또 지은 만큼을 겪는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우리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가지각색의 업행을 지으면서 생을 살아가고 있
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씨를 뿌리고 있는 셈이며, 그 씨앗은 때가
되면 무르익어 우리에게 맛있거나 메스껍거나 간에 어떤 결실을 가져다 줄
것이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 우리는 수많은 전생을 포함한 모든 과
거에 지은 업행의 결실을 거두어 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적 견해에도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최소한 자유의지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상
황이 벌어지면 적어도 우리는 ‘옳은’ 행동을 하든가 ‘잘못된’ 행동을
하든가 어느 정도까지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올바른’ 선택이
항상 가능하느냐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인천으로 가고 싶은데
표지가 없는 갈림길을 만났다 치자. 왼쪽으로 가면 되겠지 했는데 수원 쪽
으로 빠지고 말았다면 그것은 내가 추측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땅히
지도책을 펼쳐보아야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문제를 두고 내가 그 길을
택한 것은 하나님이나 혹은 유전인자 같은 신비스런 어떤 힘이 있어서 그
렇게 길을 택하도록 예정해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 물론 내가 그 길을 선택함에 있어 막연한 기대감이 작용했을 수도 있고
그 길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영원한 축복에로 실어다 주는
환락의 꽃길”*처럼 여겨졌을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주인공 맥베스
처럼 나도 사악한 충고와 거짓된 예언에 귀를 기울였을 수도 있다. 그런 것
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한 요즘에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나에게 다른
길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는 점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여기까지는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야
기한 것에는 대충 동의해 줄 것이다. 좌우간 우리가 추운 겨울날 아침에 억
지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가는 필경 직장에서 쫓겨나
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결과에 대해 책임질 준비가 되
어 있을 때에만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또한 즐거움을 누리려면 현금이든 다른 방법으로
든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대체로 수긍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업이라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상 다름 아닌 상식인 것이다.
“돈을 지불하면 선택권을 누릴 수 있다”는 식의 상식인 셈인데 업의 경우
조금 다른 점이라면, “지금 살고(또는 사랑하고) 대가는 뒤에 치른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좀더 교묘한 반론에 부딪치게 된다. 적어도 다음 두
가지는 반드시 마주칠 것이다. 그 하나는 “모든 것이 과거의 조건들이 빚
어낸 결과라면 선택의 자유란 끼어들 자리가 없고, 모든 것은 다 예정되어
있는 셈이 아니냐”하는 반론일 것이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만
약 자아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선택을 할 ‘나’란 것도 있을
수 없지 않느냐.”는 또다른 반론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조건들조차도 결코 불변의 ‘원인’들이 아니다. 조건들은 언제
나 많은 요인들로 이루어져 실로 복잡 다단하기가 더할 나위가 없고 게다가
항상 변하고 있다. 한 예로 우리는 땅을 고르고 씨앗을 뿌린다. 그러나 그
것만으로 씨앗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허다한 필수 요인들이 모두 순조로워
야만 그 씨앗은 자라날 것이다. 만약 그 중에 어느 필수 조건 하나만 빠져
도 그 씨앗은 자라날 수가 없다. 이렇듯 한 개의 씨앗에게 조건은 외재하면
서 또한 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식물의 씨앗에게 업의 개념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 씨앗이 사람의 마음을 의미할 경우에 비로소 업이 적용된다. 이
렇게 되면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두 번째 논란으로 접어들어 이른바 ‘자아
’라 부르는 것의 본질을 두고 다소나마 논의해야 할 계제에 이르른 셈이다
.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
란 점은 불교의 바탕이 되는 근본 교의이다. 그러나 어떤 수준에서는, 다시
말해 관습적 진실의 수준에서는 자아는 존재한다. 또한 업이 실제로 작용
하는 것도 바로 이 관습적 진실이 통하는 범위 내에서이다. 지금 ‘나’라
고 생각하는 이 존재에게, 설사 그것이 다음 생의 나일지라도, 그것이 좋든
나쁜든 간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의지적 행동이 바로 업임을 잊지 말
자. 그러니까 아라한들의 행동은 업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더이상
‘나’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나’라고 부르고 또 그
토록 애지중지하는 이것과-그것이 도대체 무엇이 되든 간에-관계되는 진
정한 상황*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명상을 해보면 무엇인가 잡히는 것이 있
을 것이다. 그렇지만 책을 통해서도 얻어지는 것이 조금은 있을 것이다. 나
아가면 갈수록 책이 명상만은 못해지겠지만 현재로선 대단히 유익한 것이
사실이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나’라는 것은 하나의 작용과정일 뿐이다. ‘나’의 마
음과 몸은 어느 한 부분도 빠짐없이 모두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변하고 있다. 정신작용은 끊임없이 변하는 (그렇다
고 제멋대로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 구름떼 같은 요인들이 명멸하는 일련
의 연속 과정이다[行]. 이들 요인들은 아비담마의 첫째 권인 법집론(法集論
:Dhammasanga蔥)* 속에 여러 제목 하에 열거되고 있다. 찰나적으로 명멸하
는 이와 같은 극미세계의 구름떼 같은 무리지음에는 89가지 유형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유형의 식(識)들 중에 높은 단계의 어떤 식들은 보통
사람들은 경험할 수 없다. 이들 89가지 가운데 20가지가 업에 의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 20종류의 의식은 선 寗 간에 업, 또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
다. 냐나뽀니까 스님은 ‘아비담마 연구’란 소책자에서 한 가지 유형의 식
을 예로 들어 그 속에서 이들 20가지 요인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를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은 모든 불자들이 머
리맡에 비치해 둘 가치가 있는 책이다.
업을 지어내는 요소는 다름 아닌 이 ‘의지’라는 요소이다. 이 요소가 일
련의 찰나식들에 걸쳐 지속적으로 작용하게 되면, 다른 것들은 다 제쳐두고
그중 가장 중요한 작용으로서 이 ‘나’라는 환상을 빚어내게 되는 것이다
. 보통 사람들에게 이 의지는 흔히 갈애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 의지를 포착할 수 있다.
연기법*의 공식 중에서는 그것은 촉(觸:감각처와 감각대상, 다시 말해 눈과
보이는 대상과의 접촉)이 수(受: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
은 느낌)를 조건지우고, 그 수(受)는 갈애를 조건지운다는 식으로 언급되고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나는 욕심나는 대상을 본다(촉), 나는 즐거
운 느낌을 갖는다(수), 그래서 그 대상을 원함으로 반응을 한다(애)는 순서
이다. 그렇지만 마음을 챙기기만 하면(정념) 그 원하는 단계의 발생을 눌러
멈추게 할 수가 있다. 단순히 그 느낌을 초연한 입장에서 지켜보기만 함으
로써.
이처럼 점점 더 세밀하게 관찰해 들어가면 갈수록, 모든 문제가 매우 미묘
하고 어려운 문제들인 것이 드러난다. 사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무지
한 사람이 이 문제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알아차림[正知]과 마음챙김[正念]을 수행하면 그 미묘한 문제에 대해 점차
적으로 공부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요컨대 이 논의의 핵심은 자유의지니
뭐니 하는 따위의 이론적 논란은 별 무소득이라는 것이다. 오로지 수행에
의해서 우리는 진리를 찾아낼 수 있으며, 바로 그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
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 준 종교적: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 원래 비종교적인
이데올로기들이 종교적 믿음에 가깝거나 유사성을 띠게 된 상태.
* 1972년 당시 영국의 임금인상투쟁은 ‘영국병’을 이루는 가장 심각한 국
가적 문제였다.
* LSD:일시적인 환각과 정신분열 상태를 일으키는 약물의 명칭.
* 서구에서 말하는 지성(intellect)은 에고의식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기 때
문이다.
* 욕구불만(欲求不滿):심리학 용어로, 영어frustration의 역어. 욕구저지(
欲求沮止) 라고도 옮기는데, 무엇인가 외적 조건에 의해서 욕구의 충족이
저지되고 있는 상태. 특히 그로 인해 긴장과 불안이 높아지고 있는 상태.
자신의 능력부족 때문인 경우에도 쓰긴 하나, 본래 뜻의 지나친 확대로 간
주된다. 저자는 ‘suffering:노고, 수난, 재난의 뜻’이란 일반화된 역어를
본문 중에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불교의 고(苦)의 의미를 제대로 전
달 못하고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많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서 일부러 생경
한 심리학 용어를 쓰면서까지 고의 뜻을 보충 전달하고자 애쓰고 있다.
법륜 白‘존재의 세 가지 속성’ 49쪽 참조.
* 이 글은 베트남 전쟁 당시에 쓰여졌다.
* 보리수 잎 잔‘세상의 무건운 짐, 삼독심’ 5쪽 참조.
* 범망경(梵網經:Brahmaj a Sutta):경장(經藏)의 장부(長部. Digha Nik a
)중 첫 번째 경. 불교의 기본입장을 밝힌 중요한 경으로 2부로 구성됨. 제1
부는 계(戒)를 小 娃大로 분류 설명하여 불교의 실천적 입장을 밝히고 있
다. 제2부는 당시에 유행하던 62종 견해(과거에 관한것 18종과 미래에 관한
44종)를 망라, 「我」에 관한 각종견해를 척파하며 「法」을 설함. 부처님
당시의 사상계를 한눈에 보여줄 뿐 아니라 그에 비추어 불교의 입장과 위
치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경임. 우리나라에서 흔히 접할 수 있
는 같은 이름의 경은 대승계통의 경으로 실제 이 경과는 전연 무관함.
* 모노(Jacques Monod:1910~1976):프랑스의 생화학자. 1965년 앙드레 르보
코, 프랑수와 자코브와 함께 유전자가 효소의 생합성을 지배함으로써 세포
대사를 조절한다는 사실을 밝힌 공로로 노벨 생리 피剋瓚밗받음. 저서 <우
연과 필연>(1970년)에서 생명의 기원과 진화 과정은 우연의 결과라는 견해
를 피력함.
* 보리수잎 ‘업에서 헤어나는 길’ 27쪽 넷째 줄 참조.
보리수잎 복건毬 ‘업과 환생’ 22쪽 참조.
* 셰익스피어 원작 ‘맥베스’ 2막3장 참조.
* 상황:어떤 순간에 있어서 어떤 개체에 영향을 미치는 제요인의 총체.
* 법집론(法集論:Dhammasanga蔥):빨리 논장 7론중 첫머리를 차지하는 논으
로 법취론(法聚論)이라 옮기기도 하며, 이전에는 Dhammasangaha(攝法論)이
라고도 불렀다. 제법의 모임을 법수(法修)에 따라 心 訖뛸錘色法 郁炙堞
으로 설하는 바 전체구성은 ①심생기품(心生起品), ②색품(色品), ③총설품
(總說品), ④해의품(解義品)의 4품과 목차격인 논모(論母)로 이루어져 있다
. ‘분별론 (Vibhanga)’과 더불어 아비담서 중 가장 초기에 이루어진 기초
적 저작으로 중요한 지위를 점한다. 특히 일심생기(一心生起)하면 그에 따
라 상응의 심소법(心所法)이 전기(轉起)한다고 설하는 점은 식본설(識本說)
내지는 유심연기설(唯心緣起說)로 간주할 수 있어 후세 대승불교와도 밀접
한 관련을 갖는다고들 말한다. (일본 남전대장경 45권 목차 참조.)
* 연기법:법륜 毬 ‘부처님 그분’ 24쪽과 법륜 ┠毬 ‘죽음은 두려운
것인가’ 37쪽 참조.
*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But by practice we can find out the tru
th, and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로, 성경구절(요한복음 8장 32절)을
빌려 수행의 위대성을 갈파하며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그 선
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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