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의 이정표
Emancipation from the World
붓다다싸 스님 지음
관법 수행(觀法修行)이란 우리가 더이상 고(苦)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될 만큼 마음의 수위를 향상시키려는 정신 훈련을 가리킨다. 세상의 그 무엇도 붙잡거나 매달려 애걸복걸할만한 가치가 없다는 분명한 인식이 생기면, 그에 힘입어 언젠가 우리 마음은 고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인식이 세속적인 것들을 무력화시켜 마음이 더이상 좋아함이나 싫어함에 분별없이 끄달리지 않도록 만든다. 그와 같은 분명한 인식을 얻으면 마음은 세간의 조건들을 뛰어넘어 출세간의 경지에 들게 되는 것이다. 출세간을 분명히 파악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 반대 차원인 세간이 어떠한 것인지 알아야만 한다.
세간(世間, lokiyabhuumi)이란 세속적인 것들이 마음을 지배하는 모든 차원을 통틀어 말한다. 크게 나누어 말하자면 세간에는 세 가지의 차원이 있다. 첫째로는 마음이 아직도 온갖 종류의 쾌감에 만족을 느끼는 차원인 욕계(欲界, kaamaavacara-bhuumi)가 있고, 둘째로는 감각적 대상에는 관심이 없으나 형체색상을 대상으로 한 여러 선정 단계에서 만족감을 얻는 마음 상태인 색계(色界, ruupaavacara-bhuumi)가 있으며, 끝으로는 형색 이외의 것을 대상으로 선정에 잠겨 거기에서 오는 희열과 평정에서 만족을 얻는 한결 더 높은 마음의 차원인 무색계(無色界, aruupaavacara-bhuumi)가 있다. 세간의 이 세 가지 차원은 대체로 중생들의 마음 차원이기도 하다. 그 존재들이 인간으로 불리어지든 천인, 천신, 축생, 지옥중생으로 불리어지든 간에 그들은 모두 세간을 이루는 이 세 가지 계층 속에 들어간다.
중생의 마음은 어느 특정한 순간에 세 가지 계층 중 어느 차원에든 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 결코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사실이다. 그런데도 산만하기 짝이 없는 감각적 수준으로 뒷걸음질하려는 것이 갈데 없는 중생들의 마음자리이다. 색깔과 모양, 소리, 냄새, 맛, 접촉 대상[色聲香味觸法] 등을 만나 즐거움을 맛보면 그 영향력에 굴복해버리고 만다. 마음이 이런 유혹적인 것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형색이나 기타 대상에 대한 선정을 닦고 거기에서 오는 고요함과 법열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단지 특정한 경우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선정력(禪定力)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특정한 시기에 어떤 사람의 마음은 선정의 이런 경계들 중에서 어디인가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부처님 재세시의 인도에서는 이 같은 관점이 지극히 보편적이었음에 틀림없다. 당시에는 선정의 여러 단계에서 얻어지는 적정과 법열을 추구하여 출가한 사람들이 이 고장 저 고장 숲 속마다 머물곤 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없지만 보통 사람들도 능히 이러한 수준의 선정력을 얻을 수 있는 일이다.
만일 누군가가 하나의 형색을 대상으로 선정에 온통 몰입하여 법열을 느끼는 단계에 있다면, 그에게 이 세상은 바로 그 형색으로만 이루어진 셈이 된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그 하나의 형색[一物]과 완전히 같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마음 상태에 변화가 오거나 할 때까지는 이 세상은 그 일물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세간의 세 가지 차원 중 어느 곳인가에 처한 누군가가 비록 바위나 흙덩어리나 나무토막처럼 앉아서 법열과 적정을 이루어냈다 하더라도, 자아라는 것을 붙잡고 거기 매달리려는 욕구는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아주 미세하고 희박한 상태이긴 하지만 가지가지 욕망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를테면 자신이 처한 상태에 불만족을 느끼고 새로운 상태를 찾아나서도록 재촉해대는 조바심 같은 것이다. 변화를 바라는 그러한 욕망은 업(業)을 형성하고, 따라서 그런 사람은 아직 세간을 초월하지 못한 상태이다.
출세간(出世間, lokuttarabhuumi)에 머무는 마음은 세간을 초월해 있다. 그 마음은 세속의 상태를 본질이 아니라고 보고 자아나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며, 그 어느 것도 붙잡으려 들지 않는다. 출세간에 머무는 이런 사람들은 또다시 몇몇 위계로 나누어질 수 있다. 이는 네 단계의 도(道)와 과(果)로서, 흐름에 들어선 이[預流果], 태어남이 한 번 남은 이[一來果], 태어남이 끝난 이[不還果], 그리고 완전히 끝마친 성자[阿羅漢果]가 있다. 이런 네 부류의 고귀한 이들, 즉 성자들의 상태가 곧 출세간이다. 출세간이란 세간을 넘어서 있다는 뜻으로, 이는 마음을 두고 하는 말이지 몸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이다. 몸은 생존 여건이 적합하기만 하면 어느 곳에건 머물 수 있다. 출세간이란 쉽게 말해서 세간을 넘어서 저 위에 들어있는 마음이다. 이 세상도 뛰어넘는 판이니 지옥이나 연옥 같은 하계나, 괴로움과 고뇌와 속박의 세계 따위는 성자들의 경계에서 보면 언급할 거리도 못된다.
예류과와 세 가지 족쇄 출세간의 네 단계[四果]를 알아보는 척도는 향상의 도상에서 떨쳐버려야 할 갖가지 정신적 불순물이 얼마나 닦아졌는가를 통해서이다. 네 단계에 걸쳐서 떨쳐내야 할 이 번뇌들을 부처님께서는 열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셨고, 그것들을 족쇄(足鎖, samyojana)라고 부르셨다. 이 열 가지 족쇄가 인간과 모든 중생을 세속에 얽어매고 세간에 가두어 넣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족쇄들을 자르고 풀기 시작한다면, 그의 마음은 점진적으로 향상도를 더해 세속의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든 애를 써서 그 족쇄들을 몽땅 벗겨내게 된다면 그의 마음은 완전히 자유로워져 세속을 초월하고 출세간에 들어있게 될 것이다.
우리를 얽어매는 열 가지의 미묘한 정신적 불순물 가운데 첫째 것은 유신견(有身見, sakkaaya-di.t.thi)이다. 자아에 대한 믿음, 즉 몸과 마음을 나 자신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그것은 `나는 무엇무엇이다, 나는 어떠어떠하다'라는 관념에 집착함으로써 빚어진 오해이며 착각이다. 일반 사람들은 몸과 마음의 참 본성을 모르는 탓으로 깊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몸과 마음[名色]을 자아로 간주해 버린다. 몸과 마음을 자기 자신으로, `나'로 믿는다. `나'가 있고 `나의 것'이 있다는 이 원초적 관념은 아주 단단히 뿌리 박혀 있어, 그런 사실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조차 없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자기 본능이 자기 보존, 먹이 추구, 종족 번식의 기초가 되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자아에 대한 믿음은 가장 원초적 의미에서 이기성(利己性)의 근본 원인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족쇄로서 무엇보다 먼저 풀어내야 할 부분이다.
두 번째 족쇄는 의심(疑心, vicikicchaa)으로, 마음속에 망설임과 반신반의를 일으키는 원인을 말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의심거리를 말해 보자. 고를 벗어나 해탈에 이르게 하는 수행에 대해 믿지 못하는 의심,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의심, 이 주제가 과연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하는 의심, 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한다는 수행이 참으로 사람이 해야 하는 바른 일일까, 수행이 다른 일보다 정말 값진 것일까, 수행을 해본들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처님은 진짜 깨달음을 얻으신 것일까, 그분은 참으로 고로부터의 해탈을 이루셨단 말인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에 기초한 수행 방법이 정말 고로부터의 해탈로 이끌어줄 것인가, 그리고 승가의 비구가 고로부터의 해탈을 얻는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혹 등이 그것이다.
망설임[優柔不斷]의 근본 원인은 무지이다. 늘 물 속에서만 살아온 물고기는 물 바깥 대지에도 생명체가 살고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말을 전혀 믿지 못하거나 기껏해야 반신반의할 것이 틀림없다. 감각의 세계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물고기가 물에 익숙해져 있듯이, 관능성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누가 감각주의의 초월이나 세속 차원의 초월에 대해 이야기해도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고, 또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확신을 못하고 망설이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낮은 차원에 주저앉아 그런 수준에나 걸맞게 사고하는 것도 다 그럴만하긴 하다.
왜냐하면 높은 수준에 맞추어 사고를 하자면 새로운 안목을 통한 상황 파악이 요구되는데, 고차원적 사고와 저차원적 사고 사이에서 갈등이 빚어지니 망설임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정신력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면 저차원적 사고가 기승을 부리게 마련이다. 선(善)에 대해 의심하고 망설이는 태도는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고질적 성향이다. 바르게 성장해오지 못한 사람의 경우에 그것은 아주 일반적인 병폐이다. 우리는 이러한 망설임이 가져오는 나쁜 결과를 스스로 분석하고, 내적 성찰을 통해 똑바로 보아야 한다. 망설임이야말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나 일상 생활을 꾸려나가는 가운데에도 붙어 다니며, 심해지면 선과 진리를 의심하고 고로부터의 해탈에 대해서까지 회의하게 만드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셋째 족쇄는 미신(迷信, siilabbataparaamaasa) 또는 의례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見]으로, 이는 의례 의식의 본래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은 본질적으로 어떤 일을 할 때 그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이런 일은 흔히 어떤 주의, 주장 혹은 의식(儀式)과 관계가 있다. 마법이나 주술적 관습에 대한 맹신이 그 하나의 예로서, 틀림없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미신에 불과한데도 불자들마저 거기에 빠져드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말한 세 가지 족쇄인 자아에 대한 믿음, 의심, 미신을 완전히 벗어내 버린 사람은 출세간에서의 가장 낮은 단계에 도달한 셈이다. 즉, 흐름에 들어선 이, 예류과가 된 것이다.
어느 누구나 정진하여 이들 번뇌를 없애버리고 나면 그 마음은 속세의 결박으로부터 풀려난다. 세 가지 번뇌는 진리를 가리는 무지와 미혹의 산물이고, 마음을 세속에 얽어매는 족쇄이다. 그것들을 버리는 것은 마치 쓸모 없는 세 가지 굴레와 눈가리개를 풀어내는 것과 다름없고, 그런 다음 훌훌 털고 세상 너머 저 위로 솟구쳐 올라 출세간의 첫 경계에 드는 것이다. 처음으로 성인의 반열에 들어 출세간의 첫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러한 분을 열반으로 이어지는 흐름에 처음 들어선 사람, 예류과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이런 지위를 얻은 사람은 미래의 일곱 생 이내에 언젠가는 반드시 열반을 성취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그가 해낸 일은 일단 열반으로 가는 흐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일 뿐, 아직 열반 그 자체를 성취한 것은 아니다. 마치 강의 물길이 바다를 향해 흘러내리듯 이 흐름은 열반을 향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곧장 열반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하지만, 비록 시간은 좀 걸릴지 몰라도 일단 흐름에 들어선 그 마음은 마침내 열반을 성취하고 만다.
일래과, 불환과와 두 가지 족쇄 출세간의 두 번째 경지를 증득한다는 것은 위에 설명한 세 가지 족쇄를 풀어버림은 말할 것도 없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갈애, 혐오, 미망 같은 번뇌들을 무력하게 만듦으로써 마음이 높이 향상되어, 관능성에 대한 집착이 아주 미미해진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이 경계에 들어간 사람은 기껏해야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돌아오면 되는 것으로 여겨져서, 태어남이 한 번 남은 이, 일래과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일래과는 예류과보다도 한결 열반에 가까이 와 있으니, 그에게는 겨우 세속의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가 욕계인 인간 세계에 돌아온다 해도 한 번 이상은 돌아올 일이 없다. 왜냐하면 갈애, 혐오, 미망을 완전무결하게까지는 못 되더라도 놀라우리만치 약화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일래과 다음으로 세 번째 단계는 태어남이 끝난 이, 불환과의 단계이다. 이 등급의 성인은 일래과가 되기에 족할 만큼의 번뇌를 제거했음은 물론이고 어렵사리 넷째와 다섯째 족쇄마저 벗어던지고 말았다. 넷째 족쇄는 감각적 욕망이고 다섯째 족쇄는 악의이다. 예류과나 일래과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무결하게 없애버리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 두 경지에는 매혹적이고 호감을 주는 대상이 나타나면 아직도 흐뭇함을 느끼는 마음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그들이 자아에 대한 믿음, 의심, 미신을 이미 벗어났다고는 하나 아직 관능성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으므로 엷게나마 그 흔적이 남아있는 셈이다. 그러나 세 번째 단계의 성자인 불환과는 그런 것을 남김없이 멸진해냈기 때문에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분노나 불쾌 같은 느낌들을 포함하여 악의라는 번뇌는 일래과 경계에서 대부분 씻겨 없어져 마음속에 께름칙한 기분 사나움 정도의 흔적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불환과는 그것마저 몽땅 털어 없애버렸다. 즉 감각적 욕망과 악의, 그 둘 다를 여읜 것이다.
감각적 욕망(感覺的 慾望, kaama-raaga=貪心), 즉 감각에 집착하고 거기서 만족을 구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앞서 감각적 집착을 언급하면서 충분히 설명했다. 이 욕망은 마음속에 아주 단단히 달라붙어, 본질적으로 마음과 다름이 없고 정말 마음과 한 물건이나 되는 듯이 고착되어 있는 고질적 번뇌이다. 이것이야말로 범부로서는 그 정체를 알아보기 어렵고 박멸해내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 세상의 별의별 것이 다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온갖 종류, 온갖 성질, 천차만별의 색깔과 모양, 소리, 냄새, 맛, 접촉대상, 그 어느 것이나 다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들이 곧 감각대상이고, 마음에 드는 이들 대상에서 만족감 따위를 얻는 심리적 집착 상태를 감각적 욕망이라고 한다.
이른바 악의(惡意, pa.tigha=瞋心)라는 것은 마음이 불만족을 느낄 때 나타내는 반응을 가리킨다. 만족감을 얻으면 감각적 욕망이 생기고, 불만족해지면 악의가 일어난다.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은 이 두 상태에 매여 있다. 악의는 심지어 무생물인 대상을 향해서 일어나기도 하며, 더욱 가관인 것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물건이나 제 마음속에 일어난 대상에 대해서도 불만을 터뜨린다. 실제로 어떤 대상이 정말 미워지고 그에 대해 화가 치밀 때, 악의는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해진다. 불환과보다 낮은 차원에 있는 예류과나 일래과는 자신의 향상도에 부합되는 정도만큼 악의를 없앤 상태에 있다. 셋째 단계의 성자인 불환과에게 남아있는 악의의 잔재는 대단히 미세한 내면적 반응에 지나지 않아 겉보기에는 전혀 악의의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순전히 내면에서만 동요가 일어나는 것으로, 속으로만 마음에 쏘옥 들지 않고 약이 좀 오른다거나 곤혹스러움을 느낄 듯 말 듯한 그런 상태이다. 그러니 여기, 모든 갈래의 악의를 말끔히 멸진시킨 대장부를 상상해 보라. 참으로 얼마나 희유한 존재이며 얼마나 존경스러운 분이겠는가!
아라한과와 다섯 가지 족쇄 부처님께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다섯 가지 번뇌를 뭉뚱그려 우선적으로 버려야 할 번뇌로 분류하셨다. 자아가 있다는 믿음, 의심, 미신, 감각적 욕망, 악의는 세 번째 단계의 성인이 되어서야 모두 다 벗어나게 된다. 감각적 욕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이 단계의 성자는 결코 욕계의 존재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 없다. 그래서 태어남이 끝난 이, 불환과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제 관능성 따위와는 전혀 무관해진 그에게는 오로지 향상만이 있을 뿐이니, 더할 나위 없이 거룩한 경지인 아라한과와 열반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위로 솟아오르는 저 향상의 길만이 펼쳐져 있을 따름이다. 여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의 다섯 가지 번뇌는 성인의 넷째 단계에 이른 아라한만이 완전히 놓을 수 있다.
여섯 번째의 족쇄는 형색(形色, ruupa-raaga)을 주제로 한 여러 선정 수행 단계에서 얻어지는 희락(喜樂)을 탐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형색에 몰입함으로써 얻어지는 기쁨과 적정에의 집착은 앞의 세 단계에 이른 성자들도 아직 여의지 못한 상태이며 마지막 단계인 아라한과에 올라선 다음에야 여읠 수 있다. 선정에 완전히 몰입된 상태는 수행자로 하여금 매혹적인 묘미를 맛보게 만드니 열반의 맛을 미리 좀 보여주는 것이라고나 할까. 비록 참다운 열반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맛에 있어서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수행자가 완전히 선정에 몰입하면 번뇌들은 잠복해버린다. 하지만 그 기운이 완전히 증발된 것은 아니어서 선정력이 무너지자마자 다시 고개를 내민다. 그렇다 하더라도 번뇌가 잠든 동안에는 마음이 시원하고 맑고 자유로워져 참 열반의 맛을 잠시나마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상태가 다시 집착거리가 될 수도 있다.
일곱 번째 번뇌는 무형(無形, aruupa-raaga)의 대상을 주제로 깊은 선정에 몰입했을 때 거기에서 얻어지는 묘락(妙樂)을 탐하는 미세한 욕망이다. 여섯 번째 족쇄와 비슷하지만 이 번뇌는 포착해내기가 한결 더 어려우리만치 엷게 깔려 있는 것이다. 우주나 허공 등을 대상으로 선정에 들면 형색을 주제로 한 선정보다 훨씬 더 심심미묘한 적요로움과 고즈넉함이 얻어지게 되며, 결과적으로 그 상태에 대한 집착이 싹틀 수도 있다. 아라한은 어떤 상태의 쾌감이든, 그 쾌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든 거기에 매혹되는 법이 없다. 아라한은 온갖 느낌에서 응당 덧없음[無常]과 불만족[苦]과 자아 없음[無我]을 한눈에 알아보기 때문이다. 숲 속에서 선정 수행을 하는 외도의 은둔자나 신비론자들은 이런 희열 속에 숨겨진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기쁨의 맛에 매료되어 집착을 일으킨다. 마치 미성숙한 속인들이 감각 대상의 단맛에 끄달리는 것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두 경우 모두를 `욕망'이라는 같은 말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정말 그 취지를 알게 된다면, 성자로 불리는 분들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염으로 가슴이 벅찰 것이다.
우리를 세간에 묶어두는 여덟 번째 족쇄는 우열의식(優劣意識, maana=慢心)이다. 이것은 남들과 관련해 자신을 이런 저런 지위에 놓아보는 망상을 말한다. `나는 아무개만도 못해', `나도 아무개만은 해', `내가 아무개보다 더 낫고 높아'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나는 아무개만도 못해'라고 생각할 때, 그는 열등감을 느낀다. `내가 아무개보다 더 나아'하고 생각할 때, 그는 의기양양해진다. 그리고 `나도 아무개만은 해'라고 생각할 때도 그는 어떤 경쟁선상에서, 혹은 남보다 앞서가야겠다는 맥락에서 생각을 하고있는 것이다. 그것을 자부심이나 자만심이라고까지는 부를 수 없을지 모르지만….
무심결에 자신이 남보다 낫다거나 못하다고 단정짓는 것, 이 번뇌를 여덟 번째로 친 것은 그만큼 극복해내기 어렵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거의 마지막 항목에 나와 있는 것이다. 이 번뇌는 가장 높은 경지의 성자만이 벗어날 수 있다. 자연히 우리 같은 범부들은 없앨 엄두조차 못내 보는 번뇌이다. 남보다 낫다, 남과 비등하다, 남보다 못하다 하는 생각은 일종의 집착심 때문에 일어난다. 좋다 궂다 하는 데에 마음이 개입되어 있는 한, 남에 비해 우월함, 열등함, 동등함을 분별하는 생각이 살아남아 마음에 소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좋고 나쁨을 완전히 초월해버리면 이런 생각들이 살아남을 여지가 없다. 아직 이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진정한 환희와 적정은 있을 수 없다.
아홉 번째 족쇄는 도거(掉擧, uddhacca)로 정신적 불안정, 주의 산만, 완벽한 평화와 정적을 이루지 못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관심을 끄는 대상을 접할 때에 일어나는 동요와 들뜬 느낌 같은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무엇인가를 자꾸만 바라는 고질적인 갈망이 깔려 있다. 이것저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 안 가지고 싶은 욕망, 또 이런 저런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 안 되고 싶은 욕망들이 특히 그것이다. 눈, 코, 귀, 혀, 몸을 통해서 자기의 어떤 취향에 맞는 대상이 스치면, 좋다 싫다 하는 어떤 마음의 반응이 일어나기 쉽다.
그런 반응을 우리는 관심이나 흥미라고 부른다. 무엇인가 새롭고 낯선 것을 보면 마음설렘과 호기심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우리에게 아직도 원하는 대상이 남아있고, 두려워하고 의심쩍어 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스쳐 지나가는 여러 가지 대상들에게 마음이 쏠리고 만다. 적어도 바로 지금 우리 범부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은 그러하다. 주어진 감각 대상이 우연히도 그 사람의 욕망과 일치할 때는 뿌리치기가 참으로 어려워진다. 그는 이제 갈피를 못 잡을 정도로 흥미에 끌리고 자기를 망각할 정도로 좋아 날뛰기 십상이다. 반면에 그 대상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풀이 죽어 그 좋았던 기분도 마침내 끝나버리고 만다. 도거의 본성은 바로 이런 것이다.
세 번째 단계까지의 성자들에게는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나 궁금증이 남아 있지만, 아라한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그의 마음에는 어떤 무엇에 대한 욕망도 남아 있지 않다. 두려움이나 미움, 걱정이나 근심, 불신과 의심, 그리고 대상에 대해 알고 싶음, 보고 싶음 따위의 모든 `싶음'마저 다 없애버린 것이다. 그의 마음은 자유롭다. 어떤 대상도 그를 자극하거나 유혹하지 못한다. 궁금증도 호기심도 일으키지 못한다. 이것은 순전히 그가 어디에건 쏠리고 치우치는 마음을 다 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마음이 동요되는 것은 반드시 욕망이 개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욕망이 어떤 형태의 욕망이 되었건 마찬가지이니, 지식에의 욕망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것이 덧없고 가치 없고 실체 없음을 깨달아서 모든 `싶음'이 씻겨나가 버리면, 그 무엇도 가지거나 되어볼 만한 가치가 없게 되고, 그러다보니 무엇을 대하더라도 호기심이 일어날 리가 없다. 여기 어떤 아라한이 있다고 해보자. 설령 바로 그 옆에 벼락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지속적으로 존재하고픈 갈애도, 아니 그 어떤 욕망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위험이 닥쳐오거나 어떤 기상천외한 것이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그렇다. 그는 어떤 사물이 내게 이득이 될 것인가 아닌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전혀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우리 범부 중생들로서는 이룰 수 없는 청정과 평온을 성취한 것이다.
열 번째이자 마지막 번뇌는 무지(無知, avijjaa=癡心)이다. 지금까지 열거해 온 아홉 가지 이외의 다른 모든 번뇌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무지란 앎이 결여된 상태를 말한다. 이 경우의 앎은 참다운 앎, 올바른 앎을 뜻한다. 물론 어떤 존재든 어느 정도의 앎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만일 그 앎이 거짓된 것이라면, 그런 앎은 없느니만 못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질적 무지와 그릇된 앎으로 인해 고를 받는다.
우리는 너나없이 캄캄한 무명(無明) 속에 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다음 네 가지 물음이다. "고란 정말 무엇인가[苦]?" "고가 일어나는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集]?" "고에서 풀려난다는 것은 정말 무엇인가[滅]?" "고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지는 참된 길은 무엇인가[道]?" 어떤 사람이 참다운 앎을 얻었다면, 그래서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면, 그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 된다. 인간 지식의 총체적 범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광대하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대부분을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보지 않으셨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알아야 될 것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부처님께서는 알아야 할 것들을 남김없이 알고 계셨다. 전지(全知), 즉 `모든 것을 알고있다'는 말은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모두 안다'는 뜻이다.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식을 얻고 싶어한다. 하지만 만일 그가 배운 지식이 그릇된 것이라면, 많이 알면 알수록 더더욱 미망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어떤 종류의 지식은 앞을 못 보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깨달음, 각성, 개화, 문명 등의 뜻을 가진 영어 단어 `enlightenment'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단어의 어간(語幹)인 `light(빛)'는 무지의 번쩍임일 수도 있고, 눈을 멀게 하고 착시 현상을 일으켜 과신을 부추기는 눈부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무지의 현란한 빛에 눈멀어 우리는 바르게 사고할 수 없고, 그러다보니 고를 물리쳐 극복할만한 지위에 이르지도 못한다.
우리는 관심을 둘만한 값어치도 없는 하찮고 시시한 일로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감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데에 모든 정신이 팔려 있다. 감각적 만족이야말로 사람의 삶에 있어서 훌륭하고도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누구나 죽기 전에 마땅히 제 몫을 누려야 하는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어떤 이상(理想)을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엉뚱한 변명까지 늘어놓는다. 사후에 천상에 태어나고 싶어하는 기대마저도 관능적 욕망에서 오는 것이다. 어떤 대상에든지 집착을 가지는 것, 특히 감각적 만족에 집착하는 것은 무지가 마음을 뒤덮어 모든 탈출로를 끊어버렸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세상을 온통 뒤덮어 사람들이 참 빛을 못 보게 가로막는 두꺼운 조개껍질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무명이라는 비유가 경전의 여러 곳에 나온다.
부처님께서는 무지를 열 가지 족쇄의 마지막에 놓으셨다. 가장 높은 자리의 성자인 아라한이 되면 남아있던 다섯 가지 번뇌마저 몽땅 떨쳐버리게 된다. 형색에 대한 욕망, 형색 이외의 대상에 대한 욕망, 우열의식, 동요심, 그리고 무지를 벗어버리는 것이다.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 그리고 아라한, 이 네 자리의 성자들은 세간을 뛰어넘은 차원에 들어가 있다. 그들이 성취한 경지가 바로 출세간인 것이다. 출세간은 아홉 가지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번뇌를 없애는 도중의 상태는 예류도라 하고, 그 번뇌를 다 소멸시킨 성자는 예류과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래도와 일래과, 불환도와 불환과, 아라한도와 아라한과, 이렇게 모두 네 쌍이 있고, 여기에 열반을 포함하여 출세간의 아홉 측면이 된다. 출세간에 든 도인들은 자신의 위계에 걸맞게 고를 줄여 나아가다가, 마침내는 고를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사물의 참 본성에 대해 명료하고도 완벽한 통찰력을 얻는 데 일단 성공하여 어떤 대상에 대해서나 욕망을 멈출 수 있게 된 사람은 이제 출세간에 도달한 것이고, 그의 마음은 세속의 조건을 뛰어넘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마음속 번뇌를 완전무결하게 벗어놓았을 때, 예전 같으면 좋다 궂다 했을 세상만사에서 벗어나 이제 그의 마음은 영원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열반(涅槃, nibbaana)은 도저히 그 무엇에도 비견될 수 없는 상태이다. 그것은 여느 세속적 조건과는 다르며, 실로 세속적 조건과 정반대의 상태이다. 세속적 조건, 즉 현상적 존재의 특성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그 모든 특성들을 완전히 없애버린 결과가 열반일 것이다. 열반이란 어느 모로 보나 분명히 세속적 조건과는 반대이다. 열반은 무엇을 만들어내지도 않고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열반은 모든 지어냄[作爲]이 끝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공덕의 측면에서 본다면 열반의 경지는 지옥불, 채찍질, 고문, 속박, 굴종, 노예상태 따위를 온통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다. 열반의 성취는 모든 불만족스러운 마음 상태의 원인이 되는 번뇌들을 완전히 제거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열반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 저 너머에 있다. 그것은 참으로 독특하고도 희유한 것이어서 세속의 무엇과도 같지 않다. 도리어 세속적 조건의 소멸이 곧 열반이다. 부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열반은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이 없어진 경계'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열반은 대자유의 상태요 족쇄로부터의 해방이다.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일일이 근원을 댈 수조차 없는 숱한 고뇌와 아픔, 가슴에임과 짜증스러움이 모두 끝나버린 곳이다. 이것이 구경지(究境地)인 출세간의 본래면목이요 불자들의 목표이자 종착점이다. 이것이야말로 불법 수행의 궁극적인 열매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불교의 몇 가지 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해 보았다. 사물의 참 본성을 보는 지혜를 키우기 위해서 그것을 짜임새 있는 체계로 풀이해 본 것이다. 실상 모든 것은 무상하고 불만족스러우며 자아가 없다. 그러나 뭇중생들은 그런 것들에 이끌리고 집착한다. 바로 알지 못함, 단지 그놈 하나 때문이다. 도덕성[戒, siila], 마음의 집중[定, samaadhi], 통찰력[慧, pa~n~naa]에 기초한 불법 수행은 붙잡고 매달리는 마음을 완전히 끊기 위해 사용되는 하나의 도구이다. 우리가 집착을 일으키는 대상은 오취온(五取蘊)으로서 몸·느낌·인식·의지·의식[色受想行識]이다. 우리가 오취온의 참 성품을 알게 되면 모든 대상을 밝게 이해하게 되어, 갈애가 사라진 자리에 깨우침이 들어서게 되고, 그래서 오취온의 어느 것에도 더이상 매달리지 않게 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팔정도에서 올바른 삶이라 표현된 그런 생활을 이어 나아가는 것이다. 처음이나 끝이나 항상 선하고 아름답고 바른 행위, 거기에서 솟아나오는 안락을 밤낮으로 맛보는 것이다. 이런 생활은 이리저리 방황하는 생각을 단속해주고 집중력을 되찾게 하며 언제나 분명한 통찰력을 갖게 해준다. 그러다가 시절인연이 무르익으면 자연히 자신의 미혹을 깨치게 되고, 고에서 벗어나려 애쓰게 되고, 자유로이 빠져나와 심지어는 완전한 열반까지 얻을 수 있다. 좀더 빨리 나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관법 수행의 체계가 있으니, 이는 계율 닦음과 마음 닦음으로 시작하여, 완전하고 명료한 직관적 통찰력을 차질없이 성취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우리를 저 세간에 단단히 묶어두던 족쇄를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서 다 끊어버리면, 우리도 구경의 도과(道果)를 얻어낼 수가 있다.
부처님께서 "모든 부처는 열반을 최고선(最高善)으로 인가한다"고 하셨듯이,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기 위해, 그리고 다다라야 할 곳에 다다르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은 우리 불자들의 의무이다. 그렇게 해야만이 불자라 불릴 자격을 얻게 되고, 통찰력을 얻음으로써 불법의 요체를 꿰뚫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불법을 `실참실수(實參實修)'하지 않는다면 단지 그것에 관해 `알' 뿐이며, 진정한 지혜는 얻지 못하고 말 것이다. 내적 성찰을 실행하는 일, 자신의 오염된 곳을 보고 알아차리는 일, 그것을 완전히 뿌리 뽑으려 애쓰는 일, 이 모든 것은 각자에게 달려있는 일이다. 정녕 우리가 절반의 성공만 거두더라도 그 결과로 불법에 대한 바른 견해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번뇌가 점점 떨어져 나감에 따라 그 자리에는 청정과 지혜와 평온이 깃들이게 될 것이다.
여러분도 이런 방식으로 수행에 임하시기를 간곡히 부탁하며 거듭 당부하는 바이다. 그렇게 해 나아갈 때 여러분은 불법의 실상을 꿰뚫어보게 될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이 기회,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이 절호의 기회를 허송하지 말기를! 부디 이 좋은 때를 놓치지 말고 완성된 사람, 성자의 길에 오르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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