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맛
The Taste of Freedom
비구 보디 지음
저자에 관하여 미국인 승려인 비구 보디는 1944년 뉴욕에서 출생, 美 클레어먼트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이수한 후 1972년 스리랑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스리랑카의 저명한 학승, 바랑고다 아난다 마이트레야 문하에 들어간 그는 같은 해에 사미계를 수계하고 다음해에 비구계를 수계, 마이트레야 스님으로부터 빨-리어를 배우며 불법을 닦았다. 비구 보디는 1979년부터 1982년까지 美 <워싱턴 부디스트 비하라>에서 포교할동을 했고 1984년 이래 스리랑카 불자출판회(BPS)의 편집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자유의 맛
또 국민 각자가 소속 집단의 향방에 대해 발언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군주제나 과두제와 같은 낡은 정치 형태는 '국민에 의한 정치'를 표방하는 민주주의에게 길을 비켜 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역사의 여명기 이전부터 인간을 묶어 왔던 노예제, 농노제, 카스트제도 등 유구한 전통의 사회제도도 이젠 사라져 버렸거나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는 중이며, 반면에 이런저런 유(類)의 해방 운동에 관한 기사가 매일같이 신문에 대서특필 되고 인기 잡지의 지면을 메우고 있다.
예술 역시, 보다 많은 자유를 추구하는 이와 같은 사조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시에 있어 자유시, 회화에 있어 추상적 표현, 음악에 있어 무조(無調) 주의적 작곡 등은, 예술가들에게 마음껏 개성적 표현을 할 수 있도록 숨막히는 전통의 틀을 부수고 넓은 공간을 열어 준 혁신적 새 국면 중의 몇가지 예에 불과하다.
종교마저도 이렇게 확산되어가는 해방 전선에서 성역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신앙 체계와 행위 규범은 이전처럼, 신이 명했다거나 경전이 성화(聖化)시켰다거나 성직자가 규정했다는 근거만으로는 더 이상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제 신앙 체계와 행위 규범도 신성의 베일을 걷어부치고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나서서, 자유롭게 질문할 권리를 자임(自任)하며,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최종적 판단 기준으로 삼는 현대 지성인들의 비판적인 공격을 받아낼 준비를 해야만 한다.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그리고 활동의 자유는 우리 공공 생활의 표어가 되었고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는 우리 사생활의 표어가 되었다.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든, 자유는 우리의 가장 귀중한 재산으로써 생명 자체보다도 더 값진 것으로 보호되고 있다.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2백년 전, 미국의 한 애국자는 절규했다. 그 부르짖음은 세기가 바뀌면서도 시들지 않고 지금도 메아리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의 영역을 더욱 더 넓히고 싶어 하는 인류의 요청에 응답이라도하듯 부처님은 이 세상에 그의 가르침인 법을 펴시어 2천5백년 전에나 지금에나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자유에의 길을 열어주고 계시다. "큰 바다에 맛이라곤 오직 한 가지 소금맛이 있듯, 이 법(法;dhamma)과 율(律;vinaya)에는 오직 한 맛, 자유[解脫]의 맛이 있을 뿐이다." 이 말씀으로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이 인간 해방을 본질로 하고 있음을 단언하고 계신 것이다 대양의 물은 표면에서 떠서 맛보거나 중간에서 떠서 맛보거나 바닥에서 떠서 맛보거나 그 물맛은 매양 똑 같으니 짠 맛일 뿐이다. 또 바닷물을 한모금 마시거나 한잔을 마시거나 한 통을 다 마시거나 그 맛은 언제나 똑같이 짠 맛일 뿐이다.
비교적 기초 단계에서 법을 맛보거나, 다시 말해서 관용과 도덕적 수련을 닦는 중에, 기도와 신행(信行)을 실천하는 중에, 공경 하심(下心) 자비를 몸에 익히는 과정에서 법을 맛보거나, 또는 중간 수준에서 맛보거나, 즉 선정을 통해 고요[止]와 통찰[觀]을 이루는 단계에서 맛보거나, 아니면 가장 깊은 수준, 즉 해탈을 이룬 성자가 실현하는 순수 무구한 초세간적 지견(知見)과 해탈에서 맛보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법의 맛은 똑같으니 바로 자유의 맛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올바른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재가 생활을 하여 법을 한정된 범위에서 닦으면 그 사람은 한정된 자유를 그 대가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 사람이 출가하여 한갓지게 살면서 속세를 떠난 사람다운 덕행을 짓고, 일체 조건지워진 것[諸行]들의 생(生)과 멸(滅)을 관하는 등, 보다 충분히 법을 닦으면 자유도 보다 충분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가 법을 그 구극에까지 닦아 이 생에서 구경 해탈의 목표를 성취해내면 그는 한량 없는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그 어떤 수준에서도 가르치심의 향미는 단 한 가지 성질뿐이니 자유의 향미다. 다른 점이라면 어느 정도로 이 향미를 누리는가 하는 그 차이뿐이며 이 차이는 그 사람의 수행 정도에 정확하게 비례한다. 조금 법을 닦으면 조금 자유를 얻고, 많이 법을 닦으면 많이 자유를 얻는다. 법은 언제나 과학적 법칙처럼 정확하게 자유라는 독특한 보상을 베푼다.
법은 현대 세계가 기대하는 어떤 자유도 완벽하게 충분히 제공하겠다고 제안하고 있으므로, 자유의 지평을 더 늘리려는 인간의 열망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 간에 근본적인 합치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점의 일치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이 처음으로 법을 만나게 되면 출발점에서부터 곤혹감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자기네가 친숙해 있는 사고 방식과 상충되기 때문에, 지적(知的)으로는 모순으로 보이고, 정적(情的)으로는 장애물로 느껴지는 어떤 특수 양상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다름아니라, 법이 자유로 가는 길이며, '자유의 맛'으로 넘쳐나는 가르침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법을 따르려고 들면 자유는 커녕, 자유와는 정반대인 규율, 억제,극기 따위의 생활상의 규제 주1) 만 잔뜩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 사람들은 이의를 제기한다.
일견 역설처럼 보여지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 종류의 자유 즉 방종(放從)으로서의 자유와 정신적 자율(自律)로서의 자유를 분간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현대인들은 대체로 자유를 '방종'과 동일시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유란 충동, 열정, 변덕을 마음껏 방해받지 않고 쫓아다녀도 괜찮다는 '허가증'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그는 믿는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대로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고,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고, 무슨 생각이든 다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방종과는 대조적으로 정신적 자유는 외부적 수단에 의해서는 결코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보다 높은 목표를 위해서 열정과 충동을 포기하도록 요구받는 시련 과정을 거침으로써만이 이루어지는 내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투쟁을 딛고 성취해 낸 정신적 자율은 모든 외부적 제재와 내재적 한계성에 대한 결정적 승리이다. 그러나 이 투쟁에 이기려면 경기 규정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규정엔 절제, 제어, 규율 그리고 마지막 희생으로써 자기주장을 하고 싶은 욕구의 포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자유의 개념을 좀더 명확한 초점에 맞추기 위해서 멀리 반대쪽에서부터 조금씩 당겨 보기로 하자. 반대쪽이라면 속박된 상태일 것이므로, 극단적으로 신체가 감금되어 있는 경우부터 생각해 보기로 한다. 감옥속에 격리되어 묶여 있는 어떤 사나이를 상정하자. 감방은 두꺼운 돌벽과 견고한 쇠창살로 빈틈없이 둘러 싸여 있다. 그 자신은 의자에 묶여 있는데, 팔은 뒤로 돌려 굵은 노끈으로 묶이고, 발은 차꼬로 채이고 눈은 가리개로 덮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노끈이 풀리고 차꼬도 끌러지고 눈가리개와 재갈도 제거되었다고 치자. 이제 그 사나이는 감방 안을 돌아다니고 팔도 마음대로 뻗고, 말도 하고 볼 수도 있는 자유가 생겼다. 하지만 자유로와진 느낌은 잠시뿐, 곧 그는 진정한 자유는 아직도 저 돌벽과 쇠창살 넘어 짓푸른 하늘 만큼이나 요원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이제 우리는 그 사람을 감옥에서 꺼내어 중류층의 의젓한 가장으로 올려 주고 공적으로도 국가의 시민으로써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주기로 하자. 그는, 수인으로써 박탈당했던 사회적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투표도 하고, 일도 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여행도 하며 심지어 공직까지도 맡을 수가 있다.
그런데도 아직 미흡한 게 있다. 피할 수 없는 책임이라든가, 맡은 바 임무가 주는 부담감, 그리고 권력, 쾌락, 위신의 절대적 부족 같은 것이 있을 수 있겠다. 아뭏든 개인적 욕망을 마음대로 채울 수 있는 자유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실제 상황은 너무나 마음에 차지 않게 따분하기만 하여 고통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큰 마음 먹고 그 사나이를 중산 계급의 틀에 박힌 생활에서 빼내어 그가 놀라 자지러질 정도로 대 승급을 시켜 주기로 하자. 이제 그는 전 지구를 통치하는 절대 권력자, 세계의 제왕이다. 으리으리한 궁전에다, 연꽃보다 아름다운 수백명의 후궁들에 둘러싸여서 금, 은, 보석, 토지 등 한량없는 재산을 지니고, 오감(五感)이 누릴 수 있는 쾌락은 모두 극에 달했다. 모든 권력이 그의 것이며, 모든 향락, 모든 명예, 모든 영광,모든 부가 그의 것이다. 그가 뜻만 비쳐도 그것이 바로 명령이 되고, 명령일하에 즉석 시행이라 안 되는 일이 없다. 그의 방종한 자유를 가로막을 방해물은 완전히 사라졌다.
세 가지 종류의 느낌을 부처님은 지적하셨다. 즐거운 느낌, 고통스러운 느낌 그리고 중립적인 느낌, 즉 즐겁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 세 부류가 느낌의 전영역을 망라하며, 따라서 어떤 경험의 경우에도 이들 중 한 부류의 한 느낌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한편 부처님께서는 이 세가지 부류의 느낌들과 대(對)를 이루는 주체적 요소로서 요소를 고르시어 거기에 아누싸야[anusaya] 주2) 란 이름을 붙여 놓으셨다. 아누싸야란 무한한 과거로부터[無始以來] 유정(有情)들의 잠재 의식의 연속 속에 잠복해 온 숨은 정신 성향을 말한다. 이 잠재 상태의 성향은 언제라도 튀어 나올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적절한 자극이 가해지면 겉으로 표출되고 자극을 주는 힘이 사라지면 언제라도 다시 잠복 상태로 되돌아가 버린다. 이 세 가지 정신적 요소 곧 갈구[raaga], 혐오[patigha], 무지[avijjaa]는 (도덕적으로) 불건전한 뿌리[不善根]들인 탐(貪:lobha), (嗔:dosa),(癡:moha)를 심리적 면에서 이해한 동의어 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높은 단계의 정신적 수련 과정을 밟아보지 못한 보통 심리 상태의 범부들은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게 되면 그 반응으로 잠재해 있던 갈구의 성향이 튀어 나오게 된다. 즉 유쾌한 느낌을 자극해 준 그 대상을 소유하여 즐기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는 것이다.
또 범부가 고통스러운 느낌을 경험하게 되면 잠재해 있던 혐오 성향이 작용하게 되니, 고통의 원인에 대한 반감인 것이다. 또 범부가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중립적 느낌을 경험할 때는 잠재해 있던 무지의 성향이 현저해지면서 범부의 의식을 둔한 무감각으로 덮어 씌운다. 이 무지라는 잠재 의식은 범부가 갈망, 혐오하고 있을 때에도 같이 존재하고 있지만 열성(劣性)이어서 드러나지 않을뿐이다.
이들 갈구, 혐오, 무지의 잠재적 성향들이 각각 상응하는 느낌(쾌, 불쾌, 무감각)에 자극되어 잠자던 상태에서 활성화하게 되면, 그것들을 쫓아 버리고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즉, 억누르고, 떨쳐내고, 포기하고, 헛되이 만들려고 힘쓰지 않는한, 그것들은 의식 속에 지속해서 남아 있게 된다.
탐욕[貪]의 지배를 받게되면 그는 즐거움에 끌려다니고, 증오[瞋]의 지배하에서는 고통스러운 느낌에 내몰리며, 미망[癡]의 지배하에서는 애매 모호함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행복해지면 신이나고 슬픔을 당하면 기가 죽는다. 이득과 명예와 칭찬이 올 때는 의기 양양하다가 손실이나 불명예, 비난이 닥치면 낙심 천만이다. 그 방향으로 행동하면 반드시 해를 입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피해 나갈 힘이 없다. 그 길이 아닌 이 길이 이로운 길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이 길을 추구하지를 못한다. 내버리지 못한 번뇌의 물살에 휩쓸려 삶과 죽음의 파도를 타고 비참과 절망의 소용돌이인 윤회의 바닷속을 이생저생 끌려다닌다. 겉보기엔 지상(至上)의 통치자일지 몰라도 의식의 안마당에선 아직도 수인(囚人)일 뿐이다. 방종에 관한 한 그는 완벽한 자유인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신적 자율성에 관한 한 여전히 그는 가장 절망적인 모습의 굴레씌운 노예이다. 번뇌로 더럽혀진 마음이 작용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노예인 것이다. 이와 같은 노예적 상황과 반대되는 것이 정신적 자유라 한다면 그것은 탐, 진, 치로 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이 탐진치를 버리어, 그것들이 잠재된 형태로도 남아날 수 없도록 완전히 뿌리까지 뽑아 버리면 그 사람은 영원히 쫓겨나지 않을 자율의 왕좌를, 확고 부동한 주인의 자리를,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찾아서 앉게 된다. 설혹 그가 집집을 다니며 탁발하는 두타 행자라 하더라도 그는 역시 왕임에 틀림없다.
서로 번갈아가며 계속 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들 두 상극에 대해서 그는 아무 관심이 없다. 이끌리고 배척하기의 순환 노름을 그 기반에서부터 부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는 금 한덩어리나 흙 한덩어리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칭찬과 멸시의 말이 그의 귀에는 다 빈 소리로 들린다. 그는 오랜 각고의 노력으로 얻어 낸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괴로움에서 벗어났으니 번뇌가 근절되면서 어떤 슬픔도 비애도 그의 마음에 범접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탐욕이라곤 흔적도 없는 순전한 법열(法悅)만이 거기에 남아 있다. 그는 공포에서 벗어났으니, 구중 궁궐 속에서 안팎으로 호위를 받는 제왕들도 면치 못하는 그 으스스한 불안이 그에게는 없다. 그는 질병에서 벗어났으며, 마음을 얽어 묶는 저 열정이라는 발열성의 성가신 병에서도 벗어나고, 윤회의 병에서도 벗어나 번뇌, 업지음, 과보받음의 악순환도 벗어났다.
부처님께서 당신의 가르침의 목표라고 지적하셨던 자유는 그 목표를 생생한 경험으로 실현해 낸 사람만이 완전하게 누릴 수 있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소금으로 간을 치면 어떤 음식이든 짠 맛을 내듯, 자유의 맛도 부처님께서 펴신 법과 율의 처음 중간 마지막을 가릴 것 없이 전 범위에 가득 차 있어서 우리가 어느 정도로 법을 닦든 간에 그 정도만큼은 자유의 맛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언제나 명심해야 할 점은 진정한 자유 곧 마음의 내면적 자율은 은총으로 내려지는 하사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오직 자유로 나아가는 길,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주해 1) 생활상의 규제: 원문은 'regimen,' 'rule'에서 나온 말로, 특히 '환자의 건강을 유지, 개선시키기 위해 짜여진, 체계적(단식, 치료, 투약) 계획'을 가리키는 데 여기서는 '생활상의 규제'로 다음 16쪽에서는 '섭생법'으로 옮겼음.
2) 한역(漢譯)에서는 隨眠또는 使로 옮기는데 전자는 잠복한 채로 중생을 따라 다니며 마음을 혼미하게 만든다는 뜻이며, 후자는 마음을 제멋대로 부려 악업을 짓게 한다는 뜻. 이것이 드러날 때엔 번뇌[Kilesa]라 부른다. 탐, 진, 치는 10가지 번뇌 중 제일 먼저 꼽히는것 들이다. |
'동양사상 >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아의 명상-케마 스님 (0) | 2020.06.06 |
---|---|
현대인과 불교 명상-명상의 단계적 수행을 위한 지침-아차리야 붓다락키따 (0) | 2020.06.05 |
삶을 대하는 태도들 -루스 월슈 (0) | 2020.06.03 |
업(業)과 환생-냐나띨로까 대장로 (0) | 2020.06.01 |
두려움과 슬픔을 느낄때-슬픔을 당한 친구에게-니나 봔 고르콤 (0) | 2020.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