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불교

두려움과 슬픔을 느낄때-슬픔을 당한 친구에게-니나 봔 고르콤

rainbow3 2020. 5. 30. 12:50

두려움과 슬픔을 느낄때
- 법우에게 보내는 두편의 편지 -

The Problem of Fear in Time of Grief


니나 봔 고르콤 지음
전채린 옮김

 

두려움과 슬픔을 느낄때

 

 

 

차례

두려움에 관한 의문

슬픔을 당한 친구에게

 

                             두려움에 관한 의문

친애하는 쿤 차루판 씨에게

지난번에 선생님께서는 불법(佛法)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의문나는 것이 있다
며 저의 의견을 물으신 적이 있었지요. 그 의문은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의문이고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는 것은 저에게도 불법에 관해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해 볼 기회가 되겠기에 가치 있는 일로 사려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하신 질문을 되풀이하고 거기에 대한 제 생각을 말해 보겠습니다.

 

질문: 두려움의 특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될 수 있습니까? 저는 늙는
것이 두렵고, 병들까봐 두렵고, 죽음이 두렵습니다. 또한 제가 사랑하는 사
람들이 병들고 죽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가 두렵습니다. 악처(
惡處)에 태어나는 것도 두렵습니다. 깨달음의 첫 단계인 예류과(Sotapanna)
에 들어선 성인이 아니면 죽은 다음 악처에 다시 태어나서 삶의 여러 현상
에 대한 올바른 이해[正見]를 발전시켜 나갈 기회를 갖지 못할 수 있다니까
요. 금생에 선행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선처(善處)에 환생한다는 보장은 없
습니다. 어느 전생에선가 행했던 악행까지도 악처 환생의 조건이 될 수 있
을지도 모르니까요.

 

대답: 두려움은 혐오의 형태를 띌 수 있는데 그럴 경우 우리에게는 해롭습
니다. 혐오감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순간 접하는 대상물을 좋아할 수 없습니
다. 우리는 기분 좋은 대상에는 집착하려 하고 불쾌한 대상에 대해서는 혐
오감을 느끼게 됩니다. 혐오감은 가벼울 수도 있고 강할 수도 있으며, 심지
어는 증오에까지 이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두려움이나 공포의 모습을 띌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는 그 대상으로부터 움츠러들게 되고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또한 늙음, 병듦, 죽음, 혹은 악처 환생과 같은 미
래에 일어날 수 있는 불행에 생각이 미치면 걱정스럽고 겁이 납니다.

 

두려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그대로 있는 한 두려움은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두려움이란 단번에 근절될 수는 없습니다. 두려움을 완전히 없
앤 사람은 깨달음의 세 번째 단계인 불환과(Anagami)에 이른 성인들 뿐입
니다.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정견을 발전
시키는 것만이 두려움을 뿌리뽑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로 나가
면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두려움이 생길 때 그것을 그
인연에 의해 생겨난 현상으로 볼 뿐 '내가 두려움을 느낀다'고는 생
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무지와 집착에 의해 생겨납니다. 우리는 모든 기분 좋은 대상에
매달리며 그것을 잃을까봐 안절부절합니다. 증지부(제6권, 제3장, 제3항,
두려움 편)를 보면 감각적 욕망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지칭하며 그것들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 중에 하나가 두려움입니다.

 

"비구들이여, 어찌하여 두려움이 감각적 욕망을 부르는 이름 중에 하나이
더냐?"
"비구들이여, 우리 인간은 금생에서도 내세에서도 두려움에서 마음대로
헤어나지 못 하느니라. 관능에 휘말리고 정염에 묶여 꼼짝 못하고 있으니,
그러므로 '두려움'은 우리를 묶어 놓는 감각적 욕망의 하나이니라."

 

올바른 이해[正見]를 터득하기 위하여 우리는 눈앞에 벌어지는 어떠한 현상
도 잘 알아차려야 하고 그 무엇도 알아차림의 대상에서 제외시켜서는 안 됩
니다. 물론 두려움도 알아차림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상 우리가 말로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싶습니다. 즉 우리 앞에 닥치
는 일들을 우리는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죽은 다음 다시 생을
받을 때 첫번째 의식인 재생 의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
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환생의 두려
움은 여전히 우리를 불안케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자아'에 대한 사
랑 때문에 생겨납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 이 '자아'가 어떻게 될지 걱
정스럽고 또한 이 '자아'가 다음에 태어나서 삶의 실상을 이해하는 정
견을 터득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예류과에 이르른 성인
은 자아가 있다는 믿음을 뿌리채 뽑아 버렸으므로 장차 자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류과에 이르른 성인에게는
더 이상 악처에 환생할 인연들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류과에 이르기 전까
지는 자아에 집착하며 악처에 환생하게 되는 인연들을 갖추고 있는 셈입니
다.

 

우리가 과연 다음 생에서도 정견을 체득해 갈 수 있을지 걱정하는 자세는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正智, awareness]의 수행은 결코 헛되
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한 번 알아차림이 다음에 다시
알아차리게 해줄 조건이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의 알아차림도 그렇게 해서
생겨났습니다. 과거 혹은 전생에 부처님의 법을 듣고 그 법을 생각한 때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알아차림이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지금 이 순
간의 알아차림이 비록 지속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때그때 축적되므로, 미
래 어느 시점의 알아차림을 생겨나게 합니다. 비록 다음 생이 정견을 터득
해 갈 기회조차 없는 불행한 상황에서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 이후의 어느
생에선가 정견 수행이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직 보살이었을
때 지옥에 환생한 적이 있었지만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 정견 수행
을 계속하였던 것입니다.

 

혐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두려움은 불선한 註1 것으로서 우리의 정신과 육
체에 해를 끼칩니다. 그런데 선한 두려움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있으니 그것
은 불선(不善)과 그 결과를 두려워하는 착한 마음입니다. 이 때의 두려움
은 혐오와는 다릅니다. 좋지 않은[不善한] 의식에는 좋지 않은 마음들이 따
라오고 좋은[善한] 의식에는 아름다운 마음들이 따라옵니다. 의식에 따라오
는 갖가지 마음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좋은(善한) 의식이 떠오를 때마다 일어나는 아름다운 마음에는 불선을 스스
로 돌아보아 부끄러워하는 마음인 참(慙, hiri)과, 불선의 결과를 두려워
하면서 남에 대해 부끄러워 하는 마음인 괴(傀, ottappa)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이 작용을 하는 순간에는 좋지 않은[不善한] 의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생사 윤회에 말려 들 위험에 대한 좋은[善한] 두려움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음 생을 받게끔 하는 악업이나
번뇌가 초래하는 불이익을 정견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무지와
집착이 있는 한 우리는 거듭거듭 생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환생이 얼
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아는 좋은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정견을 꾸준히
발전시켜 마침내 모든 번뇌를 뿌리뽑도록 다그쳐 줍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의 환생은 없을 것입니다.


아직 보살이었을 때 부처님은 성불하기 위해 꾸준한 인내와 노력으로 정견
을 계발하였고 그 결과 중생들에게 생사 윤회를 벗어나는 길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본생경(本生經: Mugapakkha Jataka, VI, No. 538)을 보면 부처
님이 보살이었을 때의 영웅적 행위를 그린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옥 환생을 저어하는 선한 두려움 때문에 그 분은 지혜를 닦는 일을 잠시
도 등한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 분께서는 극심한 고난을 겪어야 했지
만 항시 완벽하게 침착하여 흐트러짐이 없으셨고 결코 한 순간도 헛점을 들
어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과연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서도 삶의 실상을 바로
보는 정견을 터득하려고 계속 참고 노력할 수 있을까요? 여섯 감각 기관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들을 모두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몹시 바쁘거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특히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러
한 상황을 우리가 통과해야 할 검사나 시험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우
리가 그 시험에 실패한다면 또다시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본생경에는 보살께서 카시왕의 아드님으로 태어나 테미야라는 이름을 받으
셨다고 씌어 있습니다. 보살은 전생에 왕이었을 때 백성을 사형에 처했었고
그 불선업의 결과로 지옥에 환생하신 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계셨습니
다. 그 후에 그 분은 테미야 왕자로 다시 태어나신 것입니다. 보살은 당신
의 여러 전생을 기억해 내 아버님의 왕좌를 계승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절름
발이, 귀머거리에 벙어리 행세를 하셨습니다.

 

그 분의 놀이친구는 후궁들이
낳은 500명의 아이들이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우유를 달라고 울 때에도
그 분은 울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왕으로 백성을 다스리다가 지옥에 환생
하는 위험에 빠지느니 차라리 목말라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
습니다. 우유 먹일 시간이 훨씬 지나서 우유를 주거나 우유를 아예 주지 않
아도 그 분은 울지 않았습니다. 유모들이 일 년 동안이나 시험해 보았지만
그 분에게서는 어떤 약점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분을 시험하려고 다른
아이들에게 맛있는 떡과 과자를 주어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더 먹으려고
서로 싸우고 때리기까지 해도 보살께서는 맛있는 떡과 과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분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아, 테미야,
네가 지옥에 가고 싶거든 이 떡과 과자를 먹으렴!"

 

사람들이 계속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분을 시험해 보았지만 그 분께서는
불행한 환생에 빠질 위험을 알고 계셨기에 항상 인내심을 갖고 침착하게
대처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길들지 않은 코끼리와 뱀을 가지고 그 분을 놀래
주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또 좋아할 물건들도 주어 보고 인형극
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아이들은 '와아' 하며 신나 했
습니다. 그러나 테미야는 인형극도 보려 하지 않고 옴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 지옥에서는 한 순간도 즐겁거나 신이 날 수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이 정말 귀머거리인가 해서 사람들은 소라고동을 크게 불어보았지만
"온종일 그 분에게서는 마음의 동요나, 손발의 흔들림이나, 혼란의 기미
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분 몸에 끈적끈적한 당밀찌끼를 쳐발라
파리떼가 우글거리며 달려드는 곳에 넣어 보기도 했으나 그 분은 계속 꼼
짝하지 않고 전혀 괘념치 않았습니다. 보살이 열여섯 살이 되자 사람들은
춤 잘 추고 노래하는 아름다운 여인들로 그 분을 유혹해 보았습니다. "


그러나 그 분은 완전한 지혜의 눈으로 그 여인들을 바라 보았고 혹시 그 여
인들이 몸을 건드릴까봐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멈추어서 그의 몸이 목석같
이 되었습니다."


보살은 완전한 침착함과 지혜의 눈으로 그 아름다운 여인들을 바라 보았
습니다. 그 많은 시험과 테스트를 거치는 중에 그 분은 겉으로는 미동도 하
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방심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챙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분께서는 성불하기 위하여 인내를 지니고 정견 수행을 지속해야 했습니
다. 그 어떤 처지에서나, 그 어떤 일을 당해서도 그 분께서는 마음을 챙기
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들이 본생경에 글자 그대로 씌어 있는 것
은 아니지만 행간에 충분히 암시는 되어 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은 왕에게 그 분을 생매장하라는 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러나 병사가 그를 파묻기 위한 구덩이를 파고 있는 동안에 기적이 일어났습
니다. 신들의 왕인 삭카가 나타나 천상의 장엄물로 테미야를 치장하는 것이
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자신이 절름발이도 아니고 귀머거리나 벙어리도
아니라고 그 병사에게 말씀했습니다.


그 때에 그 분은 고행자의 모습으로 변하여 부모님께 무상(無常)에 관해 다
음과 같이 설법하셨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을 엎어버리고
늙음은 죽음의 문턱에서 우리를 노려보니
조만간에 여러 밤은 다 지나고
제 목적 이룬 것 어두운 밤들 뿐이네.

베짜는 여인이 하루 종일 베를 짜면은
짜야 할 거리가 점점 줄어 들 듯이
우리의 생명도 그렇게 허망하게 줄어 드는 것을.

강물은 흐름을 재촉하여 앞으로만 흘러가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듯이
우리의 인생도 흘러흘러 앞으로만 달리네.

강둑의 나무들이
강물에 뿌리뽑혀 휩쓸려 떠내려 가듯이
죽을 운명의 우리도 곤두박질 치며
늙음과 죽음에 휩쓸려 떠내려 가네."

그 분은 재산, 젊음, 아내, 자식 그 외의 모든 즐거움이 영속하는 것이 아
니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왕위를 이어받지 않겠다고 아버님께 설명해 드렸습
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내일 다시 해를 보게 될런지
그 누가 보장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죽음은 마왕, 그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오."

이 게송은 우리에게 정견의 계발을 미루어서는 안될 것을 일깨워줍니다. 보
살은 정견을 닦겠다는 결심을 잠시도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혹독한 시
험을 당할 때에도 그 분은 오로지 지혜의 계발에만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우리의 결심도 그만큼 꿋꿋할까요? 아니면 우리의 인생에서 무엇이 참으로
가치 있는가를 잊고 있지나 않은지요? 지혜는 그 어떤 소유나 명예나 칭찬
보다도 훨씬 더 값진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얻게 되면, 그리하여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인연들 때문에 일
어나는 정신적, 물리적 현상일 뿐이라고 볼 수 있게 되면, 우리 자신의 존
재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되고 '자아'에 매달려 그토록 안
달하지는 않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생사 윤회가 얼마나 위
험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깨우쳐 줍니다. 윤회의 위험스러움을 생각해
본다면 좋지 않은[不善한] 두려움은 물러가고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
릴 것을 재촉하는 좋은[善한] 두려움이 생겨날 것입니다.

 

질문: 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계만 지키면 될런지요? 우리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번뇌가 없을거라고 생각되는데 그게 옳은지요?

대답: 우리가 오계를 지킨다고 해서 그것으로 번뇌가 근절되는 것은 아닙
니다.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인 제 4단계에 이르른 성인들, 아라한들만이 번
뇌를 뿌리뽑은 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의식이 여러 형태로 일어날 때 그
의식을 하나하나 알아차리는 일에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의식
들 속에는 선(善)한 순간보다 불선(不善)한 순간이 더 많다는 사실에 눈뜨
게 될 것입니다.

 

번뇌는 정도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데, 거칠게 들어나는 것, 중간 정도의 것
, 미세한 것 등이 있습니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는 악행은 거칠게 들
어난 번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굳이 악행을 하지 않을 때라 하더라도 좋
지 않은[不善한] 의식을 가지는 순간들이 수없이 많은데, 이런 것들이 중간
정도의 번뇌입니다. 예를 들어서 집착이나 혐오심이 악행으로까지는 이어
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좋지 않은[不善한] 것이며 그러기에 위험한
것입니다. 한번 생긴 좋지 않은 의식은 일단 사라져도 그 좋지 않은 성향은
축적되어 언젠가 또다시 좋지 않은 의식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축적된
좋지 않은 성향들이 바로 미세한 번뇌입니다. 비록 정도가 미세하다 하더
라도 위험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리 몸 속에서 우글대는 세균처럼 기
회만 오면 마각을 드러냅니다. 그 성향들이 근절되지 않는 한 좋지 않은 의
식을 일으키고 악행을 지을 근원이 되어 우리를 생사 윤회에 매이게 합니다.

우리는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감각의 문과 마음이라는 문을 통해서
다양한 사물과 접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물을 접하면서 번뇌가 일어
납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 보이는 대상은 눈을 통해 들어와 안식(眼識)에
의해 감지됩니다. 안식은 다만 보이는 사물만을 감지할 뿐 그 밖의 다른
것은 알지 못하며 그 순간에는 그 대상물에 대해서 좋다거나 싫다는 분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는 행위가 끝난 직후에 좋거나[善하거나] 좋지 않은[
不善한] 의식들이 있게 됩니다. 그 때에 우리가 너그러운 마음, 계(戒) 지
키는 마음, 기타 선(善)한 마음을 닦고 있지 않는 한 좋지 않은 의식이 일
어날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집착은 흔히 눈으로 무엇을 본 다음이나 그 밖
의 다른 감각 기관으로 무엇을 인지하고 나서 또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 때
생겨나곤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나 사람에 관해서 생각을 할 때 그 생각은 좋은 의식이 아
니면 좋지 않은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일어납니다. 즉 집착하거나 애착하면
서 생각을 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애착에는 즐거운 느낌이나 아니면 무덤덤
한 느낌이 따라오는데 무덤덤한 느낌일 때에는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위에 있는 모든 친숙한 사물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 하며 그 어떤 것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집착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지요? 그러기에 딱딱한 바닥에 앉으면 거
부감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거부감은 부드러움에 대한 집착에서 생긴 것입
니다. 우리가 다른 여러 집착들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알아차리게 되면
좋지 않은 의식을 일으키는 순간들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보다는 진실을 아
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비록 우리가 계율을 잘 지켜 오랫동안 어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계속해서 계를 철저히 지키리라는 것을 의미 하지는 않습니다. 예류과에 이
르지 못하는 한 악처에 환생하게 하는 악행의 불씨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
다. 가령 우리가 생명의 위험에 처하게 될 때에는 오계를 저버릴 수도 있습
니다. 예류과에 이르러야만 삶의 모든 현상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正見]로
인해 다시는 오계를 범하지 않게 되는 계청정(戒淸淨)을 이루게 됩니다.

 

질문: 비록 이득이나 명예나 칭찬이 영원한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생겨날
인연이 있을 때라야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가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지위와 직책을 누리지 못했을 때 속이 상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욕심을 줄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 우리가 욕심을 품고 있는 것은 자신이 잘났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집착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지려고 애쓸 때
집착이 일어납니다. 또한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그것을 놓치지 않
으려고 꽉 움켜쥡니다. 집착이 있는 한 욕구 불만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더욱 더 위대해지기를 바라지만 그럴수록 자아의 관념
을 없애기는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우리가 남을 좀더 많이 인정할수록 자
기에 대한 애착은 점점 줄어 들 것입니다.


우리가 인연으로 생겨나는 현상들이 얼마나 무상한지, 그리고 온갖 즐거운
대상들이 얼마나 무상한 것인지를 마음 속에서 생각은 해본 적이 있겠지만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을 곧바로 실상(實相)대로
아는 이해를 계발시켜야 집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실의에 빠지거나 불행을 당하고 나서야 실상대로 보는 이해를 계발
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아에 대한 집착이 덜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기 몸에 악착
스레 집착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몸이란 고체성[地], 접착성[水]
, 온도[火], 움직임[風] 등의 여러 요소들의 결합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고체성은 딱딱함이나 부드러움으로 감지되는데 그것에 대해 생각
을 기울이거나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육체적 감각을 통해서 직접적으
로 체험됩니다.


딱딱함이 느껴질 때 그저 '딱딱함'이라고 알아차리며 그것이 우리의 몸
이 아니라 오직 딱딱함일 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딱딱함은 오직 딱
딱함일 뿐입니다. 소위 몸이라는 것이 지닌 딱딱함이냐 아니면 몸 밖에 있
는 딱딱함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딱딱함이 느껴질 때 이렇게
알아차릴 줄만 안다면 그것이 자아가 아니라 하나의 요소일 뿐이라고 이해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정견이 계발되면 우리는 명예나 칭찬이라는 현상조차도 다만 요소들에 불과
할 뿐임을 알게 되고 자아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법(法, Dhamma)에 대한 확신이 더욱 커지고 법을 명예나 칭찬
보다 훨씬 더 귀중히 여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득이나 호의나 아첨에 마음을 빼앗기기는 쉬운 일입니다. 그런 것
들은 얼핏 보기에는 바람직해 보이지만 끝내는 불행한 곳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에 기대를 배반하고 맙니다.


상응부(相應部) 경전에는 이득과 호의와 아첨의 위험성을 지적해 주는 43개
의 경(經)이 있습니다. 이득이나 호의나 아첨은 위험하기가 물고기에게 드
리운 어부의 낚시바늘 같고, 벼락과 같고, 사람을 해치는 독 묻은 화살과
같고, 한 마리 새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태풍과 같습니다. 거짓말을 쉽사
리 할 줄 모르는 사람도 이득과 호의와 아첨을 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
을 때에는 짐짓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 장(章)의 10항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이득과 호의와 아첨은 무서운 것이며 최상의 안식처로 나아가
는 길을 가로막는 무섭고 모질고 가혹한 장애물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남
의 호의에 마음이 사로잡혀 홀려 있음을 보고 또 어떤 이는 남의 호의를 얻
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받고 싶은 호의는 받지 못
하고 원치 않는 호의는 넘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곤한다. 나는 그들 모
두 남김없이 죽음을 맞아 육체를 떠나면서 끔찍한 지옥에 환생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니 비구들이여, 이득, 호의, 아첨은 그처럼 무서운 것이다....


진실로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수행해야 하느니라:
"이득, 호의, 아첨이 다가 올 때에는 그것들을 밀쳐 버리거나 마음에 오
랫동안 머무르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남의 호의가 넘치도록 누릴 때나
그 누구의 호의도 받지 못할 때나
확고하고 잘 챙겨져 있는 마음은
눈꼽 만큼도 흔들리지 않으리,
그의 삶은 성실하니까.
열심히 알아차리고 있고
확고한 의지를 지닌 사람,
미세하게 알아차리고 있고
통찰력을 지닌 그 사람은,
이제 집착을 놓아 버렸음을 기뻐하나니
그가 진실로 선한 사람이노라.


내내 평안하소서

1983년 7월 15일
니나 합장

 

                슬픔을 당한 친구에게


사랑하는 모드

당신은 전에 내게 물어 온 적이 있었지요. 남편을 여의고 혼자 아이들을 키
우며 살아야 하는 우리 친구 이나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위로받을 수 있겠
는지를요.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녕 우리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바른 견해
[正見]를 갖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왜 우리
는 죽지 않으면 안 됩니까? 우리는 인생을 즐거운 것으로 믿고 싶어 하지만
삶에는 고통과 병듦과 슬픔과 비통의 순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게다가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생겨난 것[生]은 무엇이나 사라지게[滅] 마련이며 그대로 있지 못합니다.
우리도 태어났으니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되겠지요. 우리의 몸은 죽어야만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동안 시시각각으로 쇠퇴해 가고 있습니
다. 오래 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예전보다 나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눈에 띄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실은
매순간마다 변화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서는 많은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현상은 순간순간 변해 갑
니다. 체온도 변합니다. 어떤 때는 덥다가 어떤 때는 춥게 느낍니다. 시시
각각으로 우리는 몸 안에서 움직임이나 압박을 느낍니다. 우리가 '자기
몸'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도 생겼다가 사라져 버리는 여러 요소들의 합성
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무지몽매[痴]하여 그 사실을 알지 못할 뿐
이랍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결국 매순간 부패하고 쇠락한다는 점
에서 시체와 다름없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몸은 자기
에게 속한 것이 아닌데 우리는 몸에 매달려 집착합니다. 우리는 진실을 모
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이 온전한 개체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
리적 요소들의 집합체일 뿐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러한 이해란 그저 머리로 헤아리는 생각일 뿐이며, 비록 틀림없는 생각이기
는 해도 그것을 가지고는 사물의 참모습을 가리우는 그릇된 견해를 뿌리뽑
을 수가 없습니다. 진리는 직접 체험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자
기 몸을 정말 있는 그대로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지금부터 잠시 우리 몸에 관한 이론적 지식은 제쳐 놓읍시다. 그리고 이리
저리 생각하지 않고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육체적 현상이 지금 있는지를
자문해 봅시다. 우리가 앉아 있을 때나 걷고 있을 때 딱딱함이 느껴지지요?
지금 잠깐만이라도 그것을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직접 느낄 수 있습니까?
이런 것들은 촉각을 통해서 한 번에 한 가지씩 직접 체험될 수 있는 물리적
요소들이랍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고체성을 지닌 요소는 촉각을
통해 느껴질 때에 딱딱함이나 부드러움으로 직접 체험될 수 있습니다. 촉각
은 우리의 온몸에 퍼져 있습니다. 딱딱함과 부드러움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
리가 그 감각이 느껴지는 부위를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온도 또한 물리적 현상으로서 직접 체험될 수 있는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온도가 촉각을 통해 느껴질 때는 뜨거움과 차가움으로 감지됩니다. 온도는
시시각각 변합니다. 어떤 때는 덥게 어떤 때는 춥게 느껴지지 않던가요? 이
러한 온도를 체험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필요치는 않습니다.

 

여기 예를 든 것은 육체적 현상,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리적 요소 가운데
겨우 몇 가지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예만으로도 우리는 부처님의 모든 가
르침이 직접 체험을 통해 증명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직접 체
험에서 얻어진 앎은 이론적 지식보다 훨씬 분명합니다. 직접 체험을 통한
앎이야말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계발하라고 가르치셨던 지혜입니다. 그
지혜를 계발시킴으로써 모든 무지와 집착을 뿌리뽑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히 자기 몸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
물리적 요소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차츰 알게 되면
몸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관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명 없는 물질이거나 생명 있는 존재이거나,
생겨난 모든 것은 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게 될 것입니다.


육체적 요소만이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이라 부르는 것도 매순
간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마음이나 영혼은 없고 다만 지금
이 순간 한 의식이 있을 뿐이며 이 의식은 다음 순간 다른 의식에게 자리
를 내어주며 사라져버립니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겠지
만 다음 순간 그 생각은 이내 사라져 버리고 다른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이
생각, 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 않습니까? 한 가지 생각이 그대로
지속되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일어나는 생각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던가요? 우리는 한때 무언가를 좋아하다가도 곧 싫어지기도 하고 그 다
음에는 너그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너그러운 마음이 오래 가기나 하던
가요? 그 마음 역시 사라지고 금새 자만심이 생기거나 인색한 마음이 고개
를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어났다가는 즉시 사라져 버리는 많은 다
른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의식의 생멸은 평생을 통해 거듭됩니다. 따
라서 보통 '죽어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살아가는 매순간 일
어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셨던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비탄에
빠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소중
했던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여전히 크나큰 슬픔을 느끼게 되며 때로는 자신
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가신 길을 따라 막
첫 걸음을 내딛는 초심자들에게 부처님은 어떤 가르침을 주고 계실까요? 비
탄에 몸부림치거나, 죽는다는 생각에 불안해 하는 모든 사람에게 부처님은
이렇게 일러 주십니다. '현재 순간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능력을 계발하
라'고 말입니다.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지혜를 계발하라고 가르치신 것인데 그 지혜란 우리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물리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얻
어지는 앎입니다.


그 중에서 정신적 요소란 순간순간 일어나는 의식, 느낌 및 그 밖의 여러
정신적 특성-노여움이나 애착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뿐, 이미 지
나간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 딱딱함을 느낍니까? 지금 더운
가요, 아니면 추운가요? 이것들은 단지 물리적 요소들일 뿐입니다. 지금 기
분이 좋습니까? 지금 무엇인가 싫은 느낌이 듭니까? 그것들은 단지 정신적
요소들일 뿐입니다. 우리들은 내면 세계나 바깥 세계를 요소의 집합으로 보
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기 일쑤일 것입니
다.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내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그것이 이미 죽은 남편이나 아내, 내 아이나 내 친구를 되살려 내
지는 못하지 않는가. 그것이 이 몸의 아픔을 덜어 줄 수도 없고 나를 다시
건강하게 해줄 수도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삶을, 내 소유물이 아니며 그러기에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도
없는 요소들의 인연 화합이라고 보게 된다면, 어리석음은 줄어 들어 불행을
당하더라도 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슬픔에 잠길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슬픔의 본질이 무엇인
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슬픔이나 비탄은 혐오심의 하나며 우리에게 닥친
어떤 상황을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비탄을 겪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연만 있다면 비탄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과거 어느 때인가
혐오감을 품은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 혐오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삶의
참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로 인해 혐오심을 비롯한 모든 좋지 않은 번
뇌들이 생겨납니다. 혐오심은 또한 애착으로 인해 생겨납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기분이 좋으며, 그 좋은 기분에 애착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게 되면 우리는 비탄을 맛보게
됩니다. 이렇듯 비탄이란 사실상 자신의 기분 좋은 느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집착으로 생겨납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하다고 할런지 모르지
만 우리가 자신에게 솔직해진다면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슬픔을 초래하는 인연이 무엇인지를 좀더 정확하게 알게 되
면 슬픔이란 하나의 정신적 요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슬픔이란 마냥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슬픈 마음은 일어났다간 곧 바로
사라져 버립니다. 슬픈 감정이 또다시 생길 수 있지만 그것은 전에 느꼈던
슬픔과는 다른 그 다음 순간의 슬픔입니다. 슬픔을 단지 인연에 의해 생겨
난 하나의 현상으로 볼 수 있게 되면 '나의 슬픔'이라는 식으로는 생각
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슬픔 때문에 휘둘리는 일이 줄어 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무엇을 보는 때도 있는데, 그 순
간에는 '보는 것'만이 있지 슬픔이 동시에 자리잡지 못하며, 걸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현재 순간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
한 걱정은 줄어 들게 될 것입니다.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것인데 지금
우리가 어떻게 그 일을 바꾸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순간을 올바로 이해하는 능력을 계발시키는 일입니다.


부처님의 본생담 중에 나오는 「욕망의 탄생 이야기」(Kama Jataka, NO. 46
7) 속에는 집착 때문에 생긴 슬픔을 다룬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본생담의
해설 편에는 정성껏 옥수수를 키우던 어느 브라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브라만은 옥수수가 다 익으면 부처님과 제자들께 공양을 올릴 생각이었습
니다. 그런데 옥수수를 수확하기 전날 밤에 큰 홍수가 나서 옥수수 밭이 몽
땅 떠내려 갔습니다. 브라만은 한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애통해 엉엉 울면
서 자기 집으로 가서는 자리에 몸져 누웠습니다. 그를 위로해 주시려고 부
처님께서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네가 슬퍼한다고 없어진 곡식이 다시 돌아오겠느냐?"

브라만이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고타마시여,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타이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슬퍼하느냐?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은 옥
수수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수중에 있을 때는 있는 것이지만 없어지고 나면
없는 것이니라. 인연 화합으로 생겨난 것 치고 멸하지 않는 것은 없느니라.
그러니 그 때문에 자꾸만 마음 쓰지 말지니라."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나자 그 브라만은 사물의 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합니다.

"욕심을 하나씩 놓을 때마다
행복이 하나씩 얻어지나니
모든 행복을 얻은 자는
모든 갈애를 끊은 자이니라."

내내 행복하소서

1989년 3월
니 나 합장

 

주 해

1)선(善)과 불선(不善):wholesome(kusala)은 선(善), unwholesome(akusala
)는 불선(不善)이라 漢譯되었는데, 선(善)이란 도덕적으로 좋으며 정신의
성숙에 기여하면서 나와 남 모두에게 이로움을 가져다 주는 것이고, 불선(
不善)이란 그 반대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