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불교

삶을 대하는 태도들 -루스 월슈

rainbow3 2020. 6. 3. 08:19

삶을 대하는 태도들

Attitudes to Life

 

 

 

루스 월슈 지음

전채린 옮김

 

삶을 대하는 태도들

 

 

이 글에서 나는 가능한 한 책에서 얻은 지식은 나열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 글의 방향을 알려 주는 길잡이로서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며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그저 충만한 인생을 향해

손을 뻗치기만 하십시오.

누구나 다 인생을 살지만

인생을 아는 사람은…

인생이란 막상 움켜쥐어야만

재미가 있는 법이지요."

(167-169행)

 

이제 이 글에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여섯 명의 실재 인물을 소개하고 그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불교도적 눈을 통해서 관찰해 볼까 합니다. 여기서 삶을 대하는 태도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이미 개개인이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다를 수 있고 따라서 제각기 나름대로 인생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사실 우리 불자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이 기껏 감각을 통한 앎에 불과한바, 그것은 사실은 우리가 마음속에서 일일이 정교하게 만들어 낸 감각 인상[觸] 註1 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하니 우리가 생을 이야기할 때는 인생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생에 대한 심적 영상을 말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

 

그렇다고 보면 이 세상에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삶에 대한 심적 영상도 많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만큼 우리들 각자의 심정은 판이하니까요. 하지만 삶이 주는 감각적 인상을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몇몇 부류로 사람들을 나눌 수 있겠습니다. 이 때 우리는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서로 유사하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부류를 대표하는 친지 여섯 사람을 들고져 합니다. 그들에게 각각 다음과 같은 이름을 붙여 보겠습니다.:

(1)`철학자

(2)`물질주의자

(3)`완벽한 어머니

(4)`삶을 두려워하는 여인

(5)`고(苦)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

(6)`고를 받아들이는 사람

 

우선 철학자로 명명한 알버트를 잠시 살펴봅시다. 그는 유명한 의사입니다. 고도로 지성적이고 세련된 사람입니다. 그는 가족과 친구들 뿐 아니라 환자들로부터도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매우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는 수입도 좋고, 좋은 집과 차도 갖고 있고, 의학과 심리학에 관한 저술도 몇 권 쓴 바 있습니다. 정말 진찰실 밖에서 만나 보면 알버트는, 일부러 겸손한 척 하는 듯한 느낌을 줄 때가 많긴 하지만 하여튼 매우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람을 좀 더 깊이 알게 되면 그의 사고방식이 대단히 예리하고 논리적으로 비치는데 반해 실제로는 의외로 추상적이고 도식적이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식전부터라도 열띤 토론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알버트가 즐기는 토론의 주제는 그 자신의 전공 분야뿐 아니라 정치, 경제, 철학 등등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을 망라합니다. 그는 유머 감각은 모자라지만 재치만은 뛰어나며 자기주장이 강하며, 범속한 신념들을 견지하고 있으며 저명인사라든가 전통적인 것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자 이런 사람을 두고도 우리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점이 있다고 탓해야 할까요?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단연코 그렇습니다. 왜냐 하면 알버트는 지성이 곧 삶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지성을 인간의 정신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로 여긴다고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불교를 이해하고 또 일상생활을 통해 불교를 실천하자면 동원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지성을 다 동원해야 할 형편입니다.

 

지성이 없이는 우리 모두에게 고(苦)의 원인이 되는 미망의 두터운 구름을 걷어버릴 수도 없으며 부처님께서 그렇게도 명약관화하게 제시해 주신 팔정도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팔정도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하면 우리는 지성만으로는 감당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됩니다. 명상 시간 동안 자기 자신을 제삼자를 대하듯 주시하고 있노라면, 더 나아가서는 명상 시간뿐 아니라 하루 종일을 내내 그렇게 주시하다보면 어느덧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 주위에 대해, 그리고 남들에 대해-다시 말해 우리의 삶이라 부르는 것 그 하나하나에 대해 일종의 분명한 앎(正知; Sampaja~n~na)을 계발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시작 단계에는 이러한 앎의 능력은 매우 미약하지만 인내성을 갖고 성실하게 계속 노력해 나가면 그것은 대단히 예리하고 집중된 것이 되어서 마침내는 앎의 범주를 넘어 통찰력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지성을 초월하게 되는 시점이 바로 그 때입니다.

여기서 잠깐 지성과 지혜의 차이를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지성은 아직 자아에 묶여 있는 상태의 마음이 발하는 예리함인데 반해 지혜는 자아에 더 이상 묶여 있지 않은 마음의 예리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혜는 보편적이며 일체를 포용합니다.

 

그러나 알버트는 자기 지성의 한계성을 내심으로조차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지적했듯이 향상의 길의 첫 단계(예류향) 註2 를 이해하는 데에 지성을 쓰는 것으로써 그치고 그리고는 그 뒷자리를 비록 섬광같이 짧은 순간 동안이라도 지혜가 이어주도록 바라야 마땅한 일인데도 그는 지성을 끝내 붙들고서 생으로부터 자기를 격리시키는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외부 세계에 대해 만든 감각적 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호하는 방패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외견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자기 자신과 자아의식을 동일시하는 데서 야기되는 불안감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석연치 않은 느낌을 물리치기 위해서 그는 자기의 지성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는 오직, 자신이 영원한 실체라고 따라서 그 영원한 실체를 튼튼히 구축 보호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자신에게 다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자아신념은 점점 더 강해지고 그 결과 그의 불안감 또한 점점 더 증대되어 갑니다. 그는 온 머리를 다 짜내서 자기의 신념을 정당화시키고 의심과 갈등을 최대한 억제해 버립니다.

 

그는 융(Jung)이 '강사고(强思考)유형'이라 부르는 그런 유의 인간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삶, 적나라한 모습의 삶을 직시할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감히 자기 자신이라는 쓰레기통의 뚜껑을 확 열어제칠 엄두를 못 냅니다. 심리학자인 알버트는 그 뚜껑을 열었다가는 무엇이 튀어나올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잠재의식에다 강력한 경보체계를 개발해 놓았습니다. 이 경보기는 성능이 매우 좋아서 그가 그처럼이나 공들여 구축해 놓은 지성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것이 있을 라 치면 그 즉시로 위험 신호를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을 따름입니다.

 

찰스에게는 천상 물질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수밖에 없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에 아주 흔한 부류의 인간으로 여러분들에게도 친지 중에 그런 사람 한두 명은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아는 이 사람은 친절하고 아주 똑똑하며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옛날 내가 비엔나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독일어를 공부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꽤 쪼들리는 형편이었는데도 그 때 벌써 인생살이의 갖가지 쾌락들에 입맛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수년 전에 런던에서 찰스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수리의 털이 드문드문하여 대머리가 되어 가고 있긴 했으나 두툼한 수표책과 어마어마한 검은색 유선형의 자가용을 가진 꽤나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부자나 영화배우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도 또한 이혼을 했고 줄줄이 쫓아다니는 반 타스 가량의 여자 친구들을 거느리고 희희낙락 하고 있었습니다. 뱃속이 허용하는 껏 실컷 먹어 제치고 소다수보다 위스키를 더 진하게 타서 마시고 두툼한 미제 시거를 피워대고 있었습니다. 내가 불교신자라고 말하자 그는 기겁을 했습니다.

 

"뭐라고, 불교라니 당치도 않아!" 하고 그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아니, 날더러 이 모든 즐거움을 버리라고? 내가 얼마나 뼈 빠지게 애를 써서 이런 것들을 얻어 냈는데!" 그래서 나는 "하지만 그 즐거움들을 애써 버리지 않아도 돼요. 그런 것들

이 시들해지는 날이 절로 올 테니까." 하고 담담하게 대꾸를 해주었습니다.

.

찰스는 멍해진 것 같았습니다.

"점점 더 고약한데! 이 돈은 모두 다 어쩌란 말이야!"

그 말에 나는 깔깔 웃었습니다.

"아 돈이 필요 없어지면 모두 어느 불교재단에다 기부해 버리면 될 것 아니오!"

그는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 이후 찰스는 다시는 나를 만나려 들지 않았습니다.

 

찰스는 정말 행복한 사람일까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그 사람이야말로 갈애와 집착이 어떻게 인간의 고통을 증대시킬 따름인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표본처럼 느껴집니다. 사실이지 찰스는 우리가 '행복한 기질'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자질을 갖고 있으며 겉으로는 어느 정도 자기 팔자에 은근히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돈은 이제 더 벌어 보았자 대부분 세금쟁이에게 바쳐야 할 판이라 더 이상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갖고 있는 모든 소유물을 지키고자 온힘을 다해서 집착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새끼를 지키는 어미호랑이와 같다고나 할까요. 그러면서도 그의 내면은 주체 못할 정도로 불안정하며 심각하리만큼 혹독한 쾌락 후유증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는 자기가 속한 물질적 세계가 제공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에 지나치게 탐닉한 나머지 이젠 물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자기의 타성적인 감각적 쾌락에 무기력한 노예일 뿐입니다. 왜냐 하면 그의 삶에 있어 달리 의미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이니까요.

찰스는 결코 교양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양서(良書)를 읽기 좋아하는 것을 보아도 그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버트가 그랬듯이 찰스도 어디까지나 책은 책일 뿐이고 그의 세계는 엄연히 따로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어떤 것도 자기의 자아를 파고들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책은 지적 자극을 주기 위해 존재할 뿐으로써 한마디로 말해 또 다른 감각적 쾌락, 즉 정신적 쾌락을 제공해 주는 원천일 뿐입니다. 그런데 정신적 쾌락이란 여느 육체적 쾌락과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意]은 또 하나의 다른 즐거움을 인지할 줄 아는 감각기관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찰스의 세계는 주로 금전 위에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불안감은 알버트의 경우 보다 더 큽니다. 그 자신도 마음 깊이에서는 자기가 엄청난 실패자임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갈망하는 것들이 모두 항시 변화하고 있어 무상하다는 사실, 물론 그의 자아도 마찬가지라는 것, 오로지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무상을 알고 이해하는 그 어떤 것- 아는 당체(當體)인 지(智)와 그 대상인 진리, 그리고 앎의 행위인 이해가 모두 합일된 그것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업과 윤회를 믿습니다. 나는 지금도 찰스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찰스도 역시 모든 무지와 미망으로부터 헤어나서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찰스는 친절하고 남을 도울 줄 아는 인간입니다. 언젠가 그는 나에게 자기가 갖고 있는 유일한 신조라면서 모든 사람이 지금보다 조금은 더 친절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많은 선행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기의 신념을 지금도 실천에 옮기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자아를 완강하게 고집하고 있어 탈이긴 하지만 앞으로 여러 생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선행을 계속 지어 나간다면 틀림없이 열반에 드는 문을 열게 되지 않을까요? 만약에 열반을 여는 문이 있기만 하다면요.

 

자 이제 숙녀들 편으로 넘어가기로 합시다.

내가 여러분에게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사람은 위니, 완벽한 어머니입니다. 그 여자는 가정적인 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매우 유능하고 상냥한 여인입니다. 누구든 위니를 보면 첫눈에 호감을 아니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처음 위니를 만났을 때 그 집 딸 로즈마리는 아홉 살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로즈마리가 위니의 인생에 있어 전 존재이자 전 목표라는 것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모든 대화, 관심, 걱정이 언제나 로즈마리에게 쏠리곤 했습니다. 그러고 있노라면 어느덧 남편 피터는 한구석에 비켜 앉아 책을 읽는데 열중함으로써 면구스러움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분명히 어느 때인가 위니와 같은 부류의 여인을 만나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면 여러분들도 틀림없이 나처럼 몹시 따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유욕이 강한 어머니의 경우, 상황은 결코 친구들에게 따분함을 끼치는 데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심각하고 복잡한 데까지 번져 나가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위니는 로즈마리 때문에 결혼 생활도 거의 파탄에 이르렀고 뿐만 아니라 그 애지중지하는 딸을 파멸시키는데 그야말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위니가 딸 로즈마리를 완전히 버르장머리 없는 망나니로 바꿔 놓는 데는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로즈마리를 싫어하게 되었고 선생님들도 이 애가 까다롭고 변덕스럽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 피터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요? 이 가엾은 남자는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는데도 아무런 발언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자기 서재로 숨어들었습니다. 슬슬 혼자서 외출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여름 휴가철에 혼자서 스위스에 등산을 하러 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기간을 위니는 로즈마리를 데리고 휴양지 블랙 풀에서 휴가를 보냈고요. 그래도 위니는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몽땅 로즈마리의 인생에 종속시켜 버릴 지경으로 그녀에게는 로즈마리가 인생의 전부였으니까요. 실제로 그녀는 자신이 바로 로즈마리가 되어서 로즈마리의 모든 문제들, 그것이 근심이든 기쁨이든 그 모두를 자기 것으로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더 이상 결혼생활에도 남편에게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일 정도로 모성적 본능의 힘이 주종을 이루는 것 같았습니다.

 

불행 중 다행은 피터가 매우 호인이고 이해성도 많은데다가 자기 아내와 딸을 애지중지하고 있었기에 그 상황에서도 잘 버텨내면서 자기의 삶을 적절하게 잘 적응시켜 주었다는 점입니다. 요즘 와서 소위 '완벽한' 어머니를 대놓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어머니들의 태도가 지나친 소유욕을 동반한 과도한 모성본능 탓이라고 말합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훨씬 더 나아갑니다. 실제로 불교가 가장 효율적인 정신치료법의 하나라고 거론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정신과 의사들보다 훨씬더 깊이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는 문제의 근원을 규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근원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불교도들은 우리의 이 가엾은 위니의 경우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도 심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위니가 자기의 자아를 자기 딸 로즈마리에게 투사(投射) 註3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이 자아의 투사 그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이 진단법의 근저를 캐 봅시다. 그래야 병을 치료할 수 있을 테니까요.

 

언젠가 한 동종요법(同種療法) 註4 전문가가 내게 이런 설명을 해 준 적이 있습니다. "환자가 위암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진단해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정신상태가 그 환자로 하여금 위암에 이르게 했는지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위암이라는 병은 일종의 욕구불만이 항상 그 원인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병 자체는 의사가 고친다 치더라도 그 재발을 확실하게 방지하려면 우리는 환자의 욕구불만을 어떻게 해서든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에게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그 순간 그것이야말로 불교가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상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야말로 병을 가져오는 그 정신상태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그럼 이제 위니에게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왜 그녀는 온 생애에 걸쳐서 자신의 자아를 로즈마리에게 투사해 왔을까요? 첫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녀의 모성적 본능이 유달리 강해서 그러지 않고는 달리 충족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위니와 같은 여자는 적어도 아이를 대여섯은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위니가 왜 자기의 인격적 독립성을 자기 딸의 인격 속에 매몰시키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딸아이를 극진히, 심지어 소유욕을 갖고서 사랑하면서도 그 아이의 삶과는 별개로 자신의 삶을 얼마든지 독립적으로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에 대해

서 혹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니의 불안감이 특별히 강해서 자기의 자아가 밖으로 뻗어나갈 필요성을 느끼고 그래서 그 아이의 자아에까지 파급되게 된 것이라고. 요컨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른 허다한 어머니들과 다를 바 없으며, 로즈마리도 딸인 이상 그 어머니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다시 우리 불자들은 말합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만일 당신이 업과 윤회를 믿는다면 당신은 로즈마리를 전적으로 그 애 자신의 의지, 사유, 행동의 소산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들 의지, 사유, 행동은 선하게 든 악하게 든 전생 및 금생에 행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불교는 심지어 정신적 유전은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육체적 유전만 있을 따름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쯤 하면 여러분들은 왜 불자들이 남에게 충고를 하거나 도울 수 있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자기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에 관해서 너무나도 깜깜한 형편인데 하물며 남의 내면생활에 관해서 우리가 안다고 해봐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충고라고 해주는 것이 곧 간섭이 되어 버리고 때로는 이익보다는 해악을 끼치게 될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자기감정을 다스릴 수 있어서 남의 애로나 결함을 이해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고 해도 그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많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를 도울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일, 그것도 대단히 정중하게 이끌어 주는 일 뿐일 것입니다. 그것이 훌륭한 스승이 해줄 수 있는 전부가 아니겠습니까? 자기의 삶에다 자식의 삶까지 덧붙여 살려고 드는 것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짓이 아니겠어요? 우리가 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한낱 감각적 인상이라는 정신적 허상에 불과하다고 서두에서부터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거늘 어찌 타인의 감각적 인상이라는 정신적 허상까지 우리가 떠맡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로즈마리에 대한 위니의 극성맞은 소유욕은 그 원인이 위니의 불안감이나 지나친 모성본능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의 배경에는 대단한 탐욕과 자만 역시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자만은 어느 경우에나 탐욕의 한 형태인데 말하자면 자아현시 욕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자동적으로 집착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점점 더 탐욕적으로 되면 될수록 우리는 감각대상을 더욱 갈구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로즈마리에 대한 위니의 집착이 야기된 것입니다. 다만 그녀의 경우는 너무 과장되고 비정상적 이어서 자기 자신의 감각대상에 대한 갈구는 제쳐두고 주로 자기 자식의 감각대상에 대해 갈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의 자아가 로즈마리의 자아를 거의 집어삼켜 버린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배경에도 역시 엄청난 욕구불만이 도사리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위니는 자기 생에서 성취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로즈마리를 통해 성취하고자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의 인생은 아직도 형성과정에 있으므로 위니는 로즈마리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가운데 새로운 희망과 야심과 욕구를 실컷 설계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니와는 달리 소유욕을 발하지 않고 자식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도 흔연히 바칠 수 있는 그러한 어머니들에 대해서 나는 커다란 존경심을 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모든 세속적 사랑 가운데 가장 순수한 형태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랑마저도 불교적 방법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그 배후에 욕망의 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자기가 준 사랑에 대한 보상으로 자식의 사랑을 기대하는 욕망 말입니다.

 

불교가 이와 같이 감정을 배제하고 냉철하게 분석해 들어가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로부터 불교도들은 기독교도들과 달리 이웃에 대한 사랑이 충분치 못하다는 비난을 듣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적 사랑 이외에도 자애[慈], 연민[悲], 더불어 하는 기쁨[喜]까지 세세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은 오직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세 가

지의 뛰어난 정신적 능력은 모두 자아의식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능력들은 보편적이고 일체를 포용하는 반야(지혜)로, 통찰지인 관(觀)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실제로 연민과 지혜는 언제나 더불어 작용합니다. 그 한쪽은 다른 쪽을 서로 발전시켜 마침내는 완전한 존재를 충만 시키기에 이른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불자들의 궁극 목표인 깨달음,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삶을 두려워하는 여인으로서 내가 꼽고 싶은 여인인 폴라는 어느 큰 병원에 근무하는 수간호원입니다. 직책상으로 볼 때 그녀는 조직의 관리자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고 따라서 상당한 책임도 따르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처럼 삶에 직접 맞닿아 있는 여인이 정작 그 자신은 삶이 두려워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기란 그리 용이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신체적 고통을 두려워하는 겁장이란 말은 아닙니다. 그녀의 두려움은 그것보다 훨씬 더 미묘합니다. 그녀는 정신적 고통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그녀는 자기 주위에 높은 벽돌담을 쌓아 놓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태도가 지극히 편협한 것입니다. 폴라는 새침 떼기이고 성적 욕구불만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결혼이나 자녀를 기르는 일보다는 자신의 직장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대단히 높은 윤리 규범을 지니고 있는 진정 행실바른 여인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규범은 높은 대신에 너무 좁습니다. 그녀는 융(Jung)이 말하는 그림자(shadow) 註5 에 관해서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간에 일체 관심을 가지려 들지 않습니다. 그녀에겐 손톱만큼의 유머 감각도 없기 때문에 절대로 남의 유머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일생 동안 철저히 선량한 여인으로 살기 위해서 혹시 이상하고 위험한 물가로 이끌 수도 있을 그 어떤 유혹도 엄격하게 피하고 있습니다. 별로 이쁘지도 않은 그녀의 외모를 더욱 평범하게 보이도록 꾸미고 어떤 남자에게도 직업상 도와주는 관계에서 단 한발짝도 더 다가가 본 적이 없습니다. 알아 볼 것도 없이 폴라는 엄격한 채식주의자에다 금연주의자입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재미없는 사람도 참으로 드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폴라야말로 불교가 권장하는 바로 그 유형이 아니냐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야말로 감각적 집착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도대체 남을 해치는 일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실제로 그녀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쌓아온 종교적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내면 성찰이 너무 얕아서 피상적이라는 것입니다. 방금 말했듯이 그녀는 추(錘)가 엉뚱한 쪽으로 흔들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억압 註6 과 욕구불만이 축적되어 갈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것들은 결코 불교가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놓아 버리는' 철학입니다. 고통을 돌파하여 비고통으로 나아가는 철학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그늘진 측면에 대해 어떤 핑계도 속단도 하지 않고 용기 있게 사실대로 인정하고 들 때 비로소 그것을 초월할 가능성도 기대해 볼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여기에서 핑계나 속단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 뜻은 대상을 거듭 주시하는 것, 즉 제삼자적 주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감정들이 나타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게 됩니다. 감정이란 결국 자아를 강화시킬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지(智)가 나타날 것이며 지는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다룰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동전을 놓고 한쪽 면만 계속 닦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검고 때 묻은 다른 쪽 면은 계속해서 모래 속에 파묻혀 있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그것은 같은 동전인데도 말입니다.

 

고(苦)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인 미찌는 요컨대 아주 색다른 여인입니다. 폴라와는 정반대인 여인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내가 비엔나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지극히 매력적이고 세련된 그리고 꽤나 바람기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사교계 여인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차라리 밤 사교계의 여인이라 해야 할지, 하여튼 그런 세계의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미찌는 모직 잠바를 광고하는 모델이었고 비엔나 굴지의 패션 사진작가들 상당수와 꽤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찌의 나이가 지긋해져서 이제는 모직의류며 사진작가들이며 칵테일파티며 춤이며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된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그 세계로부터 뛰쳐나와서 어떤 종교에 귀의해버렸습니다. 그녀는 주로 그 종교의 교리와 의식에 심취해 들어갔습니다. 자기 수양이 태부족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교리 공부가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가지만 정도가 지나쳐 너무 경건해져 버린 것은 미상불 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 경건함이 순수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자기의 강력한 자아의식의 발로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우리 같으면 깨달음의 가능성으로 보아 줄 그 무엇인가가 그녀에게서도 표출하려 꿈틀거리는 것이 누구에게도 느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밖으로 나오려 할 때마다 그녀의 자아가 그것을 속으로 깊숙이 깊숙이 밀어 넣어서 자아의 두꺼운 그림자 아래로 감추어 버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가엾은 미찌는, 우리들 대다수가 그러하듯이 자아와 불성의 밀고 밀리기를 내내 반복하며 고역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불교에서 같으면 명상이나 마음 챙김을 하고 있는 가운데 잠시 동안이라도 자아를 피하거나 놓아 버릴 수 있는 방법을 최소한 배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아의식을 붙잡고 늘어질 줄밖에 모르는 미찌로서는 남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만사가 잘 되어 나간다는 식으로 꾸미려 드니 유다른 경건을 피울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어찌 보면 미찌는 앞에서 든 폴라와 유사한데 한 가지 크게 차이 나는 점은 유혹을 피해 낼 힘이 그녀에게는 없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불자들이 탐욕형이라 부르는 유형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그녀에게 있어서는 삼독심 가운데 탐욕이 다른 두 불선근인 증오와 무지보다 단연 우세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누구나 삼독심을 골고루 꽤나 많이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삼독심은 경건함과 같은 어떤 상(相)에 의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탐, 무진, 무치의 선근이 증장함으로써만 약화되고 구경에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미찌는 좋은 데 시집가서 아들 딸에 손자까지 거느리고 잘 살고 있지만 그녀의 자아만은 젊었을 때나 다름없이 별로 변한 게 없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탐욕의 정을 갖고 있어 매사에 자기가 중심이 되고 싶어 하며 남을 밀쳐 내고라도 주변의 관심을 독차지하려고 끊임없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그 순간 원하고 있는 것들을 먼저 손에 넣고 난 다음에라야

남의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줄곧 자신을 기만하려 듭니다. 자기는 어느 모로나 두루 상냥하고 점잖고 남에게 도움 되는 존재라고, 적어도 표층의식상으로는 스스로 그렇게 확신하여마지 않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녀는 분명 그런 존재일 수 있습니다. 다만 방금 말했듯이 자기의 자아의식이 충족되고 있을 동안에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대단히 종교적입니다.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녀는 예나 마찬가지 태도로 종교를 주로 자신의 양심을 달래는 데 쓰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가련한 미찌가 딱한 것은 항상 무언가 되고져 바라기만 할 뿐 단 한 순간도 현재를 살고 있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나는 우리 자신의 자아라고 해서 미찌의 자아보다 뾰죽하게 더 나을 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자신에게 정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그림자' 위에 경건함이라는 덮개를 씌워 놓고서는 그림자가 없는 척하며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림자'를 직시함으로써만 우리는 고(苦)를 받아들일 입장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의식을 진정한 자기인줄 잘못 안 데서 생겨난 직접적인 결과가 바로 고이니까요.

 

내가 예로 들고 있는 여섯 유형의 실재 인물 중에서 고를 받아들이는데 가장 가까이 다가선 사람은 에델입니다. 에델은 우리 집에서 주급(週給)으로 파출부 일을 하던 여인이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헤어진 옷을 걸치고 심한 런던 토박이 사투리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투를 이해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유머 감각이 뛰어난데다 발랄한 천진성을 겸비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각고의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벌써 어린 나이 적부터 가족을 돌보기 위해 학교를 장기결석 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주 병을 앓아누우실 뿐만 아니라 많은 동생들을 거느린 장녀였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후에도 형편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일과 고생 보따리를 끌어안게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부부는 몹시 가난했는데다가 줄줄이 아이를 낳았으니까요. 그녀의 남편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었고 그 후 그녀는 다섯 아이를 혼자서 키워내느라 온갖 고생을 다 해야 했습니다.

 

내가 에델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아이들이 거의 모두 결혼을 하고 난 후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밖에 나가 파출부 일을 안 하는 날에는 손주녀석들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녀의 며느리들은 공장에 일하러 나갔으니까요. 이 가련하고 말라빠지고 키가 작은 에델이 예순 살이 넘도록 삼대에 걸쳐 집안 식구 뒤치다꺼리에 허리가 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든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의 이 기구한 운명을 조금도 불평 없이 당연지사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자기보다는 더 잘 살고 있건만 그 중 어느 한 사람에 대해서도 부러워하는 법이 없었으며 어째서 삶이 그녀에게만 이토록 불공평하게 고생스러운가고 한탄한 적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짜 훌륭한 불자가 된 셈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그녀가 업과 윤회의 교의를 훤히 꿰뚫고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럴 수 있으랴 싶을 것입니다. 실제로 에델은 어느 모로나 특별히 종교적인 구석은 없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영국 성공회에 이름이 올라 있긴 하지만 교회에 갈 시간을 낼 수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입에 올리는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나는 에델이 깨달음에 아주 가까워져 있는 게 아닐까 종종 자문해 보곤합니다. 이 문제는 물론 간단히 귀결지을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녀가 분명히 나보다는, 그리고 내가 잘 아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훨씬 깨달음에 가까이 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느낄 따름입니다.

그녀가 정신적으로 고도로 향상된 여인이라는 점만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녀의 지성이 그녀의 심성만큼이나 발달되었더라면 내 느낌 같아서는 벌써 그녀는 그런 경지에 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탐욕도 증오도 그녀에게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음(미망)만은 꽤나 많은 편입니다. 불행하게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사고가 아직도 꽤 원시적이고 비논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녀의 마음은 더 갈고 다듬어져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달리 하여 보자면, 그녀는 타고난 유머와 재미 감각 덕분에 오히려 그 힘든 역경을 치뤄내는 사이에 많은 상식을 얻고 있는데 이러한 값진 상식이야말로, 내 생각 같아서는 낮은 단계의 지혜에 해당된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에델은 어쩌면 우리 불자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본보기가 될는지도 모릅니다.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그녀는 올바른 길을 택했고 용기있게 깨달음을 향해 상당한 진보마저 이루어 낸 것입니다. 어느 면에서 보면 그녀의 지성이 불교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정도로 충분히 발전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릇된 이해에서 야기될 수 있는 그 허다한 함정을 그녀는 요행히도 다 피해 가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래도 때로는 그녀가 겪어 나가야 하는 그 고의 참된 가치를 일일이 설명해 주어서 위로해 주고 싶어지는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지니고 그녀를 보면 내 생각이 도리어 쑥스러워질 뿐입니다. 그럴 필요가 전연 없는 것이 그녀는 언제나 즐겁고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이제 여러분들은 도대체 삶에 대한 여러 태도들에 대해 불교가 취하는 태도는 무엇인가고 자문하고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생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방호조가비를 깨뜨리는 일입니다. 그 조가비는 날로 자라 단단해질 뿐만 아니라 그럴수록 유연한 생명력을 점점 더 흡수해서 화석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방호조가비가 다름아닌 우리의 낯익은 옛 친구, 자아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러면 그 방호조가비를 산산조각을 내고 나면 그 다음에 남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참으로 대답하기 힘든 질문입니다. 왜냐 하면 그 해답은 진정 말로, 즉 개념으로 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아의식이 시키는 대로, 자신을 영원한 실재로 믿고 싶겠지만 그것이 아니라고 불교는 말합니다. 영원한 실재이기는커녕 우리는 다만 순간적인 의식들의 연속체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거대한 근본 무명과 미망으로 만들어진 이 방호조가비가 일단 깨어지면 우리의 실상(實相),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실상은 결코 '우리의 것'이었던 적은 없지만 그러나 전 우주의 본질적인 부분인 것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절대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고 우리 지성으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전재 하에서 일단 나름대로 시도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자아라는 미망에 매어 있는 한, 각 가지로 태도, 확신, 견해 따위를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마련인데 이들은 전적으로 생각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현재에서 삶을 직접 체험하는 대신, 과거 또는 미래에 대한 상념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 속에 산다는 것은 우리가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인 것이며 그만큼 억측과 두려움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마음속에서 삶을 재생시켜 고물(古物)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삶의 너무나 큰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방호조가비를 꿰뚫고 자신의 참 실상을 깨닫는 날이면 그 때부터 우리는 현재의 순간을 살게 됩니다. 그 때엔 행동 이외에 별도로 아의식의 부담까지 질 필요가 없이 행동 그 자체에 걸림 없이 전 주의력을 쏟게 됩니다. 그런 팽한 순간이 우리의 행위 전부를 - 즉 우리의 감각 인상[觸] 전부를 채울 것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아는 그 모든 행위를.

 

부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바히야여, 봄에 있어서는

오직 봄이 있을 따름이며

 

바히야여, 들음에 있어서는

오직 들음이 있을 따름일지하며

 

바히야여, 느낌에 있어서는

오직 느낌이 있을 따름일지며

 

바히야여, 앎에 있어서는

오직 앎이 있을 따름일지니라." 註7

 

 

 

 

주 해

 

1)觸: 눈, 귀, 코, 혀, 몸, 뜻의 처(處)와 각 처의 대상인 색 소리 냄새 맛 감촉

가치의 경(境)과 분별식(識) 이렇게 삼자가 동시에 만나는 것[知識]을 촉이라 함.

 

2)예류향(豫流向): 성위(聖位)에 든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첫 단계. 이 단

계가 충분히 무르익으면 우리를 윤회의 고에 묶고 있는 열 가지 족쇄 중 처

음의 세 가지(자아가 실재한다고 믿는 그릇된 견해, 의례의식에 의해 해탈

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일체의 의혹)가 사라지

는 예류과의 순간적 지혜가 뒤를 잇는다.

 

3)투사(projection): 투사란 자아(自我)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드(Id)의 충

동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남에게 내던지는 것을 말

한다. 즉 받아들일 수 없는 느낌이나 욕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기

에는 마음이 아픔으로, 주관을 객관화하고 자기 감정을 남에게 뒤집어 씌움

으로써 자신은 마음 편히 눈가림 하고 있게 된다.

 

4)동종요법(同種療法): 심리학자 E.Jones의 용어인, 어떤 것의 원인을 다스

리다 보면 그 결과가 치료될 수 있다는 원리(homeopathic principle)를 응

용한 치료 요법. 가령 증오에 기인하는 죄의식은 그 증오를 표출함으로써

경감될 수 있다.

 

5)그림자(shadow):C.G.Jung의 용어로써 인간의 동물적 저급한 본능으로 구

성된 원형(原型). 의식적 자아가 인정할 수 없는 충동들, 예를 들어 성적

충동이나 공격적 충동을 포함한다. 이러한 충동이 의식을 뚫고 나오다 개인

적 무의식(집단 무의식과 반대 뜻임) 속에 억제되면 열등감을 형성한다.

 

6)억압(repression):정신분석학에서 쓰는 용어. 가장 주된 방어적 심리과정

. 억압을 통해 자아는 반갑지 않은 충동, 감정, 소원, 환상, 기억 등이 의

식되는 것을 막아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리고는 그러한 것들이 존재하

지 않는 양 행동한다. 억압과 혼동되기 쉬운 것으로 억제 (suppression)가

있는데 이는 억압처럼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잊고 싶은 기억

이나 용납되지 않는 욕구 또는 생각을 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이다.

 

7)Udana(感興語) 1-10. 여기서 말하는 앎(muta)은 코 혀 접촉을 통한 감각

인식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