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해의 정(正)과 사(邪)
불교 : 마음 길들이는 방법 네오나르도 A. 불렌 지음 - (Bodhi Leaves NO. B. 42)
여러분들은 일상 뉴스 가운데 어쩌다 불교 얘기를 듣게 되면, 아마 향냄내가 자욱한 속에 거대한 불상과 황색가사 주1) 를 걸친 승려들이 앉아있는 모습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이국적 정경을 떠올리는 것말고는 여러분과 상관있는 일이 거기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담고 있는 것이 그런 것뿐일까. 과연 뉴스 사진기자는 불교의 참모습을 제대로 포착하고 있는 것일까. 푸짐하게 꾸며진 잡지들이 진정 불교의 근본 가치들을 올바로 전해주는 것일까. 혹시 피상적인 외양만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불교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 처음 설해진 원형은 어떠했으며 손질되고 다듬어진 오늘날의 외양 속에 그 원형이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로 간주하지만, 불교는 근본적으로 마음을 계발하는 방법이다. 사실 외형적인 면에서 보면 사원전통이라든가,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요소들이 많은 점 등으로 미루어 서양 사람들이 불교를 종교와 연관시키는 것이 전연 어색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첫째로 불교는 유신론이 아니다. 우주는 창조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법칙을 따라 움직일 뿐이라고 말한다. 또 불교에선 기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스승이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불도 그 창시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 방법이자, 자기수행의 방법일 뿐이지 종교적 의무로는 보지 않는다. 이런 점들로 볼 때 불교는 전혀 종교 같지가 않다.
특히 한 가지 유념해야 될 사실은 불교에서 믿음이란 부처님께서 권유하셨던 대로 불법을 확실히 알고 신심을 갖는다는 뜻이라는 점이다. 적어도 불자라면 단순히 부처님이 그것을 말씀하셨다든가, 옛 경전에 쓰여있다든가, 오랫동안 전승되어왔다든가, 남들이 그렇게 믿는다는 등의 이유만으로 어떤 사실을 믿거나 신앙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물론 불자들이 부처님의 교의를 절대적 실천과제로 받아들이고 또 그 내용의 진실성을 신앙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불교인들은 무엇이건 자신의 이성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어 있다.
불교는 마음 닦기를 기본으로 삼는 삶의 한 방식이다. 그 유일한 궁극의 목표는 조건지워지지 않은 상태, 주2) 즉 닦지 않은 범속한 마음으로는 미칠 수 없는 세계인 열반을 성취함으로써 고(苦)로부터 완전히 해탈하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당장의 목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의 근원을 뿌리뽑는 일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그 당장에든 장기적인 면에서든 어떤 형태의 행복을 성취하는 쪽으로 지향하고 있다. 이를 다시 소극적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인간의 모든 활동은 불만 또는 불충분으로부터 해방되는 쪽으로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불만족은 인간 활동의 시발점이며 행복은 그 궁극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인간 활동의 시발점인 불만족은 또한 불교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이 점은 불교 교의의 기본 골격인 사성제의 가르침에서 분명해진다. 사성제는 불만족이란 현상을 먼저 드러낸 다음, 그 원인과 치유 그리고 치유방법의 순으로, 우리들이 처하고 있는 상황의 문제성을 풀어나간다.
이 사성제 가운데 첫 번째 근본교설은 다음과 같다. 자아란 틀을 짓고 그 안에 들어앉은 (en-selfed-life) 생활에서는 불만족을 면할 길이 없다 여기서 불만족이라 번역한 말(둑카, dukkha)은 고(苦)라는 말로 자주 번역되는데 그 원래의미는 고통·슬픔·불쾌뿐만 아니라 만족스럽지 못한 모든 것, 즉 격심한 육체적 고통과 격렬한 정신적 고뇌에서부터 가벼운 피로·싫증 또는 대수롭지 않은 실망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포함한다.
때때로 이 말은 불만족 또는 불충분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어떤 문맥에서는 이런 번역이 더 정확하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고통이란 말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문맥에 따라 고통이란 말도 쓰고, 불만족 또는 불충분이란 말도 쓰는 것이 좋겠다.
불경을 영역한 책들을 보면 `태어남은 고다. 병들음은 고다. 늙음은 고다.' 등등으로 고를 열거하는 가운데, `즐거움(pleasure)은 고다.'라고 표현한 글이 나온다. 영어로만 보면 이 마지막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을 "즐거움에는 만족이 없다."로 바꾸어 쓰면 훨씬 이해하기가 용이해진다. 모든 즐거움은 무상해서 얼마못가 반대 상황으로 바뀌게 마련이며, 적어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즐거움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속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건 그렇고, 부처님의 교리는 "자아라는 틀을 지어 그 안에 들어앉은 삶"에서는 불만 또는 고는 피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 "자아란 틀을 짓고 그 속에 들어앉은 삶(en-self-ed life)"이란 말은 설명이 다소 필요할 것 같다. 요컨대 이 교리는 고정불변의 영혼이라고 생각되는 자아란 것이 아무런 실체가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자아란 미망을 최종적으로 초월해서 구극의 깨침을 얻게 되면, 이 상대적 우주를 넘어 피안의 절대적 상태에 다다르게 된다. 조건지워지지 않은 절대적 상태에서 고는 소멸된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자아의 요소가 남아있는 한 그것이 미망 외에 아무것도 아니지만 고는 그 속에 잠재한 채 남아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첫 번째 근본교설이, 고는 숙명이어서 피할 길이 없다는 뜻이 아니란 점을 이해해야 한다. 다만 자아에 사로잡힌 인생, 또는 자아란 미망이 남아있는 동안 고는 피할 길 없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제 우리는 두 번째 근본교설로 옮겨가자. 불만의 근원은 헐떡임 만약 여러분이 미끄러운 마룻바닥에 넘어져 타박상을 입고 고통을 받게 되면, 그 고통의 원인을 미끄러운 바닥 탓이라고 말할 것이다. 얼른 생각하면 그 말이 옳고 타박상의 원인이 헐떡임(갈애)이라는 말은 조리가 닿지 않게 여겨질 것이다.
따라서 세 번째의 근본교설은 다음과 같다. 헐떡임을 없앰으로써 얻는 자유 다시 말해 자아라 부르는 이 존재의 흐름, 즉 생명의 전류를 구성하는 힘을 결합시키는 것은 자기중심의 헐떡임이다. 또한 불충분이나 고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자아란 미망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의 미망을 결합시키는 그 당체를 파괴해버리면 고의 근본원인도 파괴된다.
이렇게 보면 불교 수행의 궁극 목적은 자아의 소멸이다. 여기에서 많은 오해가 생기고 있고 한편 그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그러나 자아의 소멸을 미망의 소멸로 이해한다면 이와 같은 오해는 사라지게 된다. 미망이 제거되면 실체가 나타난다. 따라서 미망을 파괴한다는 것은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실체는 자아란 미망이 가리고 있는 한 찾아낼 수 없다.
그럼 미망이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이 실체란 과연 무엇인가? 이 궁극의 실체는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으로서 `태어남이 없다', `비롯된 것이 아니다', `창조된 것이 아니다', `결합 조성되지 않은 것이다'는 등의 말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존재의 긍정적 상태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그다지 적절하거나 썩 정확한 표현은 못된다. 그것은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최상의 지복을 특성으로 하며 일상적 존재와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달라서 어떻게 제대로 서술할 방법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조건지워지지 않은 상태, 즉 열반은 언어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어떠어떠한 상태 또는 조건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그 의미를 어느 정도 표현할 수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
모든 불교 수행의 궁극 목적은 열반의 성취이며, 이 말은 곧 불만 또는 고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성취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제 네 가지 근본교설의 마지막 항을 다룰 때가 되었다.
자유의 길은 고귀한 여덟 가지 길 이 길[八正道]의 여덟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1.올바른 이해[正見] : 존재의 진실된 성질에 대한 지식.
이 팔정도를 살펴보면, 서구인이 알고 있는 식의 종교에 꼭 있어야 할 성질이 발견되지 않는다. 차라리 일종의 윤리적 진리체계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수행에 있어서도 겉모습 같은 것은 환경에 맞추어 다양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겠지만 본질적 요소만은 달라진 것이 없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이 가르치신 대로 해로운 극단들 간의 중도(中道)인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이며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겠다.
팔정도의 첫 단계인 올바른 이해 즉 정견(正見)은 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 또는 사물을 봄에 있어 최소한 자기기만이나 회피함이 없이 보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다른 의미로 보면 올바른 이해는 존재의 성질에 대한 지성적 판단에서부터 시작된다. 또 그렇기 때문에 팔정도의 시발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팔정도를 끝까지 추구하다 보면 이와 같은 단순한 지성적 판단은 지양되고 그대신 상대적 세계를 넘어선 절대의 실재 혹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실재를 곧바로 꿰뚫어보는 판별력이 나타나게 된다.
정견은 불교 교의에 대한 완벽한 이해로 봐야하며 그것은 시간, 형상, 질료로 구성된 이 상대성 우주의 세 가지 주요 특성을 알아보는 인식 능력을 기본으로 한다.
1.비영구성[無常] : 상대 세계의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정견을 통해 확인해야 할 또 하나의 측면은, 이 우주가 원인과 결과 또는 작용과 반작용이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위에서 운행되고 있다는 점, 이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은 물리적 영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이 정신적 도덕적 영역에서도 정확하고 틀림이 없다는 사실이다.
도덕적 면에서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서, 모든 도덕적으로 선하고 건전한 의지적인 행위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 행위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반면, 불건전하고 도덕적으로 나쁜 의지적 행위는 고통을 안겨준다.
건전하거나 불건전한 의지적 행위가 빚는 결과, 다시 말해서 그런 행위가 초래하는 행복이나 고통은 보통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때로는 한참 세월이 경과한 다음에야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은 행복이나 고통이 결과로 표출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결과(과보)가 금생중에 나타나지 않는 수도 있다.
따라서 임종을 맞아서도, 자신이 지은 공덕이 가져다 줄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 채 잔고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으며, 마찬가지로 자신의 악업이 가져올 피할 수 없는 불행도 이를 겪지 않은 채 잔고로 남겨둘 수 있다.
물론 신체는 사후에 분해되지만 생명의 흐름은 불변의 영혼으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에너지의 흐름이란 형태로 계속된다. 죽음 직후에 온 새 존재가 이 생명의 흐름을 이어받아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존재가 반드시 인간이란 보장은 없으며, 따라서 다른 차원의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새 존재는 방금 죽은 존재를 곧바로 이은 속편이다.
이렇게 해서 새 존재는 이전 존재를 중단없이 잇게 되고 생의 흐름은 끊어지지 않는다. 새 존재는 이전의 존재가 지어놓은 공덕의 잔고를 물려받으며, 이 공덕의 잔고는 언젠가는 틀림없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다. 그와 동시에 새 존재는 이전 존재의 악업의 잔고도 물려받아서 언젠가는 고통을 겪어야만 된다.
사실 계속성이라는 의미에서 새 존재는 이전 존재와 같다. 똑같은 방식으로, 즉 계속성이라는 의미에 국한시켜 보면 노인은 젊었을 때의 그 청년과 같은 사람이며, 청년은 다시 어렸을 때의 그 소년과 같은 사람이며, 소년은 아기시절의 그 아기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노인이 갖는 그 청년, 소년, 아기와의 동일성은 다만 계속성의 기인할 따름인 것이며 그 밖에 어떤 동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매일매일, 순간순간 변화한다. 따라서 이 순간의 모든 존재는 전 순간의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존재이다. 동일성이 있다면 다만 계속성에 기인하는 것뿐이다. 같은 방식으로 새로이 태어날 존재는 죽은 이전의 존재와는 다르다. 그러나 계속성에 기인한 동일성만은 여전하다.
이상과 같은 가르침들은 불교 교리의 근본을 이룬다. 즉 자아의 허망성, 도덕의 영역에 작용하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그리고 생명력의 재생 등인데 이 중에 어느 것이든 자기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올바른 이해[正見]'란 제목의 교의를 간단히 개괄한다는 것이 다소 장황해져 버렸다. 다음 두 번째 단계 즉`올바른 생각' 또는 `올바른 목적'은 우리의 지성적 능력을 감정적 요소들, 즉 관능·악의·잔인성 따위들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 이런 요소들은 편견없는 지혜로운 결정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계'는 성스런 여덟 가지 길의 도덕적 부문을 이룬다. 이들이 하는 기능은 마음속에 있는 번뇌를 통어하여 엉뚱한 짓거리로 발전하지 못하게 막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 번뇌(마음의 때)는 도덕성 하나만으로는 완전히 제거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때를 완전히 청소하기 위해선 팔정도의 여타 단계를 밟아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다음 단계인 `올바른 노력'에서 실천심리학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 노력은 의욕어린 노력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팔정도의 여섯 번째 단계는 향상을 저해하는 마음상태를 방지하고 극복하기 위해, 또 정신적 발전을 가져다주는 마음상태를 일으키고 계발하기 위해 의지를 연마하는 자기 단련의 단계이다.
올바른 마음챙김의 원래 기능은 자아의 비실재성을 알아차리는 지혜[正知]를 계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일상적 주의력 또한 끊임없이 증장되어 우리 마음은 무미건조한 이 세상이 주는 온갖 문제점과 스트레스에 더 잘 대처할 수 있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마음챙김 공부는 주의력 기능을 계발시켜 우리 안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 우리가 내뱉는 모든 말,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을 일일이 놓치지 않고 지켜볼 수 있게 하여, 이기주의와 감정적 편견 그리고 자아란 미망을 벗어나도록 해준다.
여덟 단계의 마지막인 올바른 집중에선 더욱 높은 마음상태, 즉 마음의 평상적 능력을 넘어선 상태를 계발하게 된다. 이 고차적 마음상태는 마음을 통일하고 청정케하고, 강력하게 만드는데 이바지하여 해탈로 이끄는 통찰을 성취하도록 만든다.
열반은 이 궁극의 성취를 통해 얻어진다. 정지(正知)가 초월적인 상태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시간을 넘어선 영원을, 형상을 넘어선 무한을, 일체 상대적 존재를 넘어선 절대를 아는 지혜를 얻게 된다. 그 때엔 자아라는 미망도 또 그로 인한 갈애와 고통도 모두 초월하게 되는데 그런 것들은 자연히 소멸되어 버린다.
이와 같이 꿰뚫어보는 통찰력은 모든 불교수행이 얻고자 하는 최종적 목표이며, 이를 얻게 되면 삶의 참된 성질을 직관하는 통찰력이 나타나게 된다.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 즉, 열반은 자아의 소멸이지만 이것이 단순하게 무존재 또는 허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 소멸이란 미망의 소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 즉, 열반을 아무리 묘사해내려해도 그것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뿐만 아니라 사유의 세계마저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알게 되는 유일한 길은 성스런 팔정도를 끝까지 추구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불교의 본래 모습이다. 자아라는 굴레를 벗어나 실재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해탈지혜로써 보게 하여 주는 종교, 곧 성스러운 팔정도의 불교다. |
역주
1) 황색가사 : 남방불교권에서 걸치는 가사는 대체로 노란 색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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