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불교

교상판석과 불립문자

rainbow3 2020. 6. 20. 10:42

실천방법이 없이 논리만 내세우는 복잡한 불교철학에 대한 소고

 

 

 

불교에는 다양한 교리체계가 있다. 화엄경과 같은 고도의 관념철학, 현대의 심리학이라 불리는 유식철학, 삼승귀일(三乘歸一)을 주장하는 법화철학, 중도를 내세우는 중관철학, 공사상을 주장하는 반야사상, 기독교적인 구원신앙인 정토사상 등이 있다.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하고, 어찌 보면 서로 모순되는 교리들로 인해 불자들의 머리는 복잡하고 정리가 안 된다. 그래서 아무리 절을 오래 다닌 불자라도 불교를 이해하는 수준이 매우 낮은 실정이다. 중국의 천태종의 개산조인 천태지의는 이런 복잡한 교리를 얕고 깊음에 따라 분류하였다. 그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한다.

 

 

① 화엄시(華嚴時) : 붓다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서 정각을 이루고 21일간 대승의 무상법문인 「화엄경」을 설한 시기이다.

② 아함시(阿含時) : 화엄의 교리는 깊고 미묘하여 이해하는 사람들이 없자, 수준을 낮추어 12년간 녹야원에서 소승의 「아함경」을 설한 시기이다.

③ 방등시(方等時) : 소승에서 대승을 향하는 중간단계의 교리들을 8년간 설한 시기로 「유마경」, 「능가경」,「금광명경」설한 시기이다.

④ 반야시(般若時) : 22년간 「대반야경」을 설하여 제법의 참된 진실과 이치를 설한 시기이다.

⑤ 법화시(法華時) : 최후 8년간 진정한 대승의 법문인 「법화경」,「열반경」을 설한 시기이다.

 

 

붓다께서 정각 후 최고의 진리인 화엄경을 설했는데, 너무 어려워 이해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방편으로 수준을 낮추어 설한 것이 아함경(5부 니까야)을 설했다고 한다. 그리고 점점 수준을 올려서 마지막에 가르침의 정수인 법화경을 설했다는 것이다. 붓다께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단계별로 설법했다는 논리는 아직도 대승불교도들의 뇌리 속에 끔찍하게 각인이 되어있다.

 

 

상윳따 니까야에는 붓다께서 정각 후 녹야원에서 최초로 초전법륜경을 설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이때 오비구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최초의 설법이 화엄경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납득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법화경의 교리는 삼승귀일(三乘歸一)이다. 성문, 연각, 보살은 방편이며 붓다가 되어야 수행이 완성된다. 삼승은 붓다가 되기 위한 방편이다. 하지만 소승들은 붓다가 되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붓다가 될 생각을 내지 않으므로 먼저 아라한, 벽지불, 보살의 단계를 밟아 목적지에 도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비유가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이다. 그런데 법화경에서는 어떤 수행을 통해 붓다가 되는 것일까? 요즈음 법화경을 신봉하는 법화행자들을 열심히 사경을 하거나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따라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기도한다. 그럼 기도하면 붓다가 되는 것일까?

 

 

중국의 화엄종에서도 복잡한 불교 교리를 심천(深淺)에 따라 이렇게 교상판석을 했다.

① 소승교(小乘敎) : 「아함경」

② 대승시교(大乘始敎) : 대승의 초입에 들어서는 가르침 「유식론」 과 「반야경」,「중관론」

③ 대승종교(大乘終敎) : 대승의 참된 정신인 이사원융理事圓融을 밝히는 「능가경」과 「기신론」. 하지만 붓다가 될 마음이 없다.

④ 돈교(頓敎) : 단박에 진리에 드는 「유마경」의 불이법문(不二法門).

⑤ 원교(圓敎) :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삼승은 방편이며 결국 붓다가 되는 것을 설한「법화경」과 理事圓融의 마지막 가르침인「화엄경」.

 

 

화엄종은 자신들이 믿고 신봉하는 화엄경을 제일 꼭대기에 얹어놓았다. 화엄경에서는 붓다가 되려면 무려 53단계의 수행계위를 거처야 된다고 한다. 정말 까마득하게 높다. 언제 53단계를 올라가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화엄경에도 특별한 수행법이 없다. 선재동자 구도여행이 수행법이라 할 수 있을까? 선재동자는 진리를 구하기 위해 스승들을 찾아 나선다. 그는 심지어 기생에게까지 질문을 던진다. 이게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교학체계의 분석은 화엄종과 천태종이 자신들의 우월감을 드러내며 주장하는 고도의 관념놀이일 뿐이다. 실천이 없는 학문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중관철학, 유식철학, 화엄철학, 법화철학은 철학일 뿐이며 이론일 뿐이다.

 

 

이것이 중국에서 선종이 널리 퍼진 이유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수행법 없이 학문적으로 따지는 것에 대한 반발이다. 그래서 선종은 불립문자를 표방했다.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 밖에 따로 전하는 가르침, 바로 마음을 보고,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선사들은 잡다한 불교철학들이 일찌감치 무의미하다는 것을 논파하고 바로 실천으로 들어갔다. 스스로 수행해보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데, 방대하고 복잡한 이론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는 선종과 남방 상좌부 불교가 일치한다.

 

 

이런 철학들은 사실 붓다의 말씀도 아니고 붓다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것이다. 붓다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붓다께선 화엄경에서처럼 세상이 어떤 유기적 연관관계로 존재하는지 관심이 없다. 중중무진법계인지, 이사무애인지 사사무애인지 관심이 없다. 법구경에서도 논리의 무의함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경전을 적게 암송할지라도

가르침을 실천하여

탐욕,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고

가르침을 여실히 알아 해탈한 이는

이 삶과 저 삶을 붙잡지 않고

깨달음의 열매를 맛보리라.(법구경 게송 20번)

 

 

이로움을 주지 않는 천 마디 말보다

들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한 마디 말이 더 가치 있다.(법구경 게송 100번)

 

 

이로움을 주지 못하는

수천 구절의 게송보다는

들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한 구절의 게송이 더 가치 있다.(법구경 게송 101번)

 

이로움을 주지 못하는

수백 편의 게송을 읊어주는 것보다

들으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한 구절의 법문을 해주는 것이 더 가치 있다.(법구경 게송 102번)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다. 이들에게 고차원적인 논리를 내세워서 복잡한 철학을 설명하면 직설적으로 반문한다.

“불교의 가르침이 깨달음이면 어떤 수행을 해야 그곳에 도달하는가? 어떻게 해야 불안한 마음에 평화가 오는가? 어떻게 해야 이 힘든 현대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불교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는 불교 본연의 역할을 하지 않고, 복잡한 관념놀이나 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요가, 단전호흡 등과 같은 다른 종교의 문턱을 기웃거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