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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지 집착과 다른 종교에는 성인이 없는 이유

rainbow3 2020. 6. 20. 10:50

4가지 집착과 다른 종교에는 성인이 없는 이유

 

 

 

불교와 여타 종교와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 차이점은 영원주의(常見)와 허무주의(斷見)라는 극단적인 견해와 무아(無我)의 이론이다.

이 차이 때문에 다른 종교에는 없고 불교에만 성인이 있다고 사자후를 토한다.

모든 짐승들이 두려워 떠는 사자의 포효소리를 들어보았는가?

붓다께서는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사자후를 토하셨다.

“불교에만 성인이 있다.”(작은 사자후 경, M11)

 

 

성인(聖人) 또는 성자(聖者)라는 개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인(성자)은 영어로 Saint이다.

Saint라고 말하면 천주교에서 성인으로 추대된 성자(Saint)라는 의미를 떠오르게 한다.

천주교의 성인은 교황청에서 추대된 인물이다.

그들은 대체로 박해받고 순교한 사람이나, 헌신적으로 남에게 봉사한 사람, 믿을 수 없는 기적을 행한 사람이다.

이들이 성인으로 추대된 것은 진리를 깨달은 것과 무관하며, 천주교 안에서 성인일 뿐이다.

천주교 안에서라는 말은 보편성의 원칙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붓다,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를 사대성인(四大聖人)으로 꼽는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인이라는 단어는 불교에서 말하는 성인이라는 단어와 쓰임새가 다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인은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 청정한 마음을 성취한 사람, 평화롭고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닙바나)를 성취한 사람이다.

여기에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네 종류가 있다.

수다원은 유신견(有身見), 계금취견(戒禁取見), 의심을 제거한 사람이다.

사다함은 감각적 욕망과 분노가 반으로 줄어든 사람이다.

아나함은 감각적 욕망과 분노가 완전히 제거된 사람이다.

아라한은 색계 존재에 대한 집착, 무색계 존재에 대한 집착, 들뜸, 무명, 에고 등 모든 오염원이 제거된 사람이다.

불교에서는 수다원에서부터 성인으로 분류한다.

 

 

집착에는 4가지가 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慾取), 견해에 대한 집착(見取),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자아의 이론에 대한 집착(我語取)이다.

이 4가지 집착을 넘어서지 않으면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은 원초적 욕망이다.

감각기관이 대상과 부딪치면 항상 일어나는 욕망이며,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욕망이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형상을 보면 갖고 싶어 하고, 맛있는 냄새가 나면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미인을 보면 품에 안고 싶은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원초적 본능이다.

욕망에는 거친 욕망과 미세한 욕망이 있다.

거친 욕망은 감각적 욕망이며 미세한 욕망은 잠재되어 있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욕망이다.

감각적 욕망은 아나함에서 제거되고, 나머지 모든 미세한 욕망은 아라한에서 제거된다.

 

 

견해에 대한 집착에는 2가지가 있다.

영원주위(常見)와 허무주의(斷見)이다.

영원주의는 ‘내가 항상 존재한다.’는 견해로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이 견해 위에 세워져있다.

‘나는 항상 존재한다.’라는 개념들, 즉 죽으면 나는 ‘영혼’이라는 존재로 다른 세계에 가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영원주의이다.

허무주의는 유물론적 단멸론으로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2가지 견해는 양 극단이다.

견해에 대해 집착하면 탐욕이며, 한쪽 견해를 믿으면 다른 견해를 배척하고 혐오하고 분노를 일으킨다.

탐욕과 분노는 깨달음올 나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이다.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은 인도의 풍습과 관련이 있다.

개를 흉내 내어 기어 다니며 개처럼 먹고 살면 깨달음을 얻는다며 수행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었다.

또 소를 흉내 내어 소처럼 기어 다니고 소울음 소리를 내고 소처럼 먹으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하며 수행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었다.

지금도 인도에 가면 한쪽 다리로 오래 서있는 사람, 한 가지 자세로 오래 버티는 사람 등 별스런 사람들이 있다.

이와 같이 그릇된 수행을 바른 수행이라고 생각하거나, 삿된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계금취견이다.

요즈음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 수행도 하지 않고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이 현대의 계금취견일 것이다.

 

 

자아의 이론은 ‘무아’의 이론에 반대이다.

무아의 이론은 오직 불교에만 있는 이론이다.

불교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아의 이론 위에 세워져 있다.

자아를 포기하면 그들의 종교는 무너지게 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살아남아 끝까지 지속한다.

어떤 종교에서는 신의 구원을 받으면 이 영혼이 천국으로 가며 구원을 받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고 한다.

그러므로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교리 전체가 무너지게 되며 교단은 문을 닫아야 한다.

 

 

 

자아가 존재한다는 이론이 유신견(有身見)이다.

자아가 존재한다는 환상을 깨뜨려야 수다원과를 성취한다. 

유신견을 타파하지 못하면 깨달음의 첫 관문인 수다원과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붓다께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이교도(사문과 바라문)들이 4가지 집착 중에서 3가지 집착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자아의 이론에 대한 집착’은 이해하지 못한다.”(M11)

이교도들은 무아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아의 이론에 대한 집착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며 이로 인해 이교도들에게서는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 나올 수 없다고 붓다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법성(法性),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법신불(法身佛)의 개념은 자칫 ‘내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라는 관념을 심어줄 위험이 있다.

힌두교에서는 브라만과 아트만(眞我)의 합일을 부르짖는다.

법신불의 개념은 비인격적이고 우주의 근원이라고 여겨지는 힌두교의 브라만 개념과 비슷하다.

‘참나, 진아’라는 단어도 불교적인 단어가 아니며, 자칫 ‘나는 항상 존재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므로 일종의 자아의 이론에 대한 집착이 될 수 있다.

이런 견해가 있는 한 수다원과 이상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단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