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리더의 조건] 지적인 혁명가 페리클레스 (하)
극장서 민주주의 가르친 ‘공감’ 엔터테이너
아테네가 기원전 6세기 인류 최초로 ‘민주주의’란 개념을 만들어내고 그 제도를 과감하게 실행하게 된 원동력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어떤 천재들의 상상력의 결과인가? 이전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혁명적이고 파격적인 정치 형태가 실행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과 절차가 필요했나?
민주주의라는 고귀한 가치와 제도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높은 수준의 교양이 필수적이다. 민주주의가 한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수적이란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인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년)였다.
그는 대부분의 정치가나 통치자들과 달랐다. 다른 정치가들은 대중의 관심과 호의를 얻기 위해 그들의 기호에 아첨하여 대중 선동가나 아첨꾼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을 압박하고 있는 당면문제들의 근본적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 해결책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아테네가 민주사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인내를 가지고 부단히 실행하였다. 그는 약속한 내용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는 언행일치의 삶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아테네가 처한 당면한 문제에 당장 반응하지 않고,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추적하여 영속적 해결책을 찾아 아테네인들을 설득하였다. 그는 시민들의 감정적이며 이기적인 의견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아테네를 위해 확고한 이상을 도시 안에서 인내를 가지고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사익을 공익으로 바꾸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이라는, 아테네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절명의 위기상황을 오히려 인간이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가장 위대한 정치공동체를 창조할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그가 상상한 정치공동체란 인간의 숨길 수 없는 욕망인 명성과 불멸이라는 가치를 더욱 더 극대화하여 공공선으로 전환시키는 장(場)이다. 그리스 이전 문명에서 명성이나 불멸은 극소수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은 대중과 노예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기념물들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선 개인의 명성이 공동체의 명성으로 확장되어 더욱 더 빛나게 되는 새로운 정치질서가 등장하였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에 법적·정치적 평등과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구축하였다. 그가 시도한 삶이란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의 사적인 이윤 추구를 아테네를 위한 공동의 이윤 추구로 승화하는 예술이다. 그는 개인의 위대함이 아테네의 위대함을 성취하기 위한 기반이 되며, 아테네의 위대함이 개인의 탁월함에 기반하는 이상적인 체계를 구축하였다.
페리클레스는 이러한 이상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설득하기 위해, 아테네 시민들의 전통적 사고 기반을 해체해야만 했다. 아테네인들, 특히 아테네 지도자들에게 최적의 삶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귀족적인 삶’이다. ‘귀족’이란 영어단어 ‘아리스토크랫(aristocrat)’에서 엿볼 수 있듯이, ‘최선의 통치’는 소수의 귀족들이 대중을 다스리는 방식이다. 이런 에토스는 그리스인들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대변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이거나 왕족 혹은 귀족들이다. ‘일리아스’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는 반신반인이며,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라는 도시의 왕이다.
아테네인들은 지도자들이 특별한 신의 능력을 부여받은 자들이거나 오래전부터 귀족들이라고 여겼다. 선택된 특별한 영웅들은 전쟁에서 불멸의 명성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보통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람들이 즐기는 저들만의 유리된 삶이었다. 이런 생각은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 안에 고착된 오래된 전통이다.
아테네인들에게 호메로스식 삶의 모습에서 벗어나게 해준 두 번째 방식은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통해 등장한다. 스파르타의 삶의 방식은 기원전 7세기부터 아테네에 영향을 끼쳤다. 스파르타는 전체가 하나의 군대조직이다. 모든 남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육체적인 훈련을 통해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야 한다. 그들에게 최고의 명예는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전사하는 삶이다.
스파르타 어머니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와인에 빠뜨려 생존하는지 살핀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게루시아(gerousia)라고 불리는 왕 2명과 60세 이상의 명문 출신자로 구성된 민회로 데려가 신체검사를 받게 했다.
만일 아이가 건강하지 않다면, 아버지는 아이를 산속에 유기한다. 모든 남자아이들은 군인으로 태어나 군인으로 죽는다. 페리클레스는 이러한 스파르타 방식을 배제하고 전통적인 호메로스 방식을 수정하여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하였다.
삶을 찬양하는 호메로스의 세계관
페리클레스의 이상은 가족, 부족 중심으로 굳어진 혈연 중심 사회에 도시를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된 아테네의 공동체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드러나는 윤리적인 삶은 영웅적인 개인을 찬양하는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는 그리스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숭고한 가치를 위해 참전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명성을 얻기 위해 싸운 것이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가 추구한 최고의 가치를 아레테(arete)라고 불렀다. 여기서 아레테는 흔히 ‘덕(德)’이라고 번역되나 그 숨겨진 의미는 전쟁에서 적들을 살해하고 그 노획물을 수거하고 자신의 용맹성을 전시하는 ‘자아전시적’인 행위다. 영웅은 그런 거침없는 용맹성과 전시를 통해 명성을 얻게 되고, 명성은 그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불멸성을 선사한다. 실제로 아킬레우스의 명성은 호메로스와 같은 음유시인의 노래가 되어 그 당시뿐만 아니라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호메로스의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제한적이다. 당시 아테네인들은 다른 문명들의 기초가 된 죽음을 피하는 문명과 삶의 태도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다른 문명들처럼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을 사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스스로 신과 동등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신들과 같이 불멸의 업적을 남길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의 몸을 한 신적인 존재로 여겼다. 인간은 자기에게 허락된 신적인 최선을 발휘하여 신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또한 세상의 삶은 고통이며 죽음은 현재의 고통과 비참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해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죽음은 끝이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로마 철학자 호레스가 말한 것처럼 ‘카르페 디엠(carpe diem)’, 즉 ‘현재의 순간을 낚아채야 한다’.
호메로스의 가치와 세계관은 현실적이며 세속적이다. 전쟁에서의 용기,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말의 힘, 외적 아름다움, 부의 축적이 그리스인들이 추구하는 아레테였다. 이런 것들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 획득하기도 하고 행운의 여신의 선물이기도 하다. 아레테가 가져다주는 보상은 죽음조차 뛰어넘은 ‘클레오스(kleos)’, 즉 ‘명성’이라고 확신하였다.
종교축제를 정치행위로 탈바꿈시키다
페리클레스는 아직도 호메로스의 가치를 찬양하고 있는 종교축제를 높은 차원의 정치행위로 탈바꿈시킨다. 고대 그리스 종교축제는 기원전 6세기 아테네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us·기원전 561~527년)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아테네는 이제 왕정시대를 종결하고 유능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최고권력자에게 통치권을 이양하는 참주시대로 진입하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두 아들 히파르코스와 히피아스는 참주시대 지도자들이다. 당시 아테네는 평지에 거주하는 지주계급인 페디에이스(pedieis)와 해변가에 거주하며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파랄리오이(paralioi)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는 참주로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가난하지만 다수였던 히페라크리오이(hyperakrioi), 즉 ‘산지에 사는 이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이들이 바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주역들이 된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매년 모든 도시 주민들이 참석하는 종교축제를 도입하였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공통된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문화혁명을 일으킨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오래전부터 회자되던 노래를 하나의 민족서사시로 완성하였다. 그 민족서사시가 바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다. 호메로스는 기원전 750년경 아테네인들에게 수백 년 동안 구전으로 내려온 노래를 페니키아문자를 이용한 새로운 문자인 그리스문자로 기록하였다.
아테네인들의 정체성은 혈연이 아니라 동일한 이야기들의 기억으로 확인되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전설적이면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바로 아테네 시민이 됐다.
공연의 재정 후원자로 명성을 쌓다
페리클레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구축한 종교축제를 민주주의를 위한 도구로 삼았다. 그는 처음부터 아테네에서 정치가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는 디오니소스 축제라는 아테네 시민의 종교의례에서 종교적이며 예술적인 연극을 후원하는 제작 책임자였다. 아테네에는 왕 대신 귀족계급인 아르콘(archon)이라는 통치집단을 형성했다. 아르콘은 세 명의 극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필요한 합창단과 배우를 공급하는 임무도 맡았다. 아르콘은 극작가와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필요한 재정적 후원자 세 명도 지명했다.
이들은 아테네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로 ‘코레고스(choregos)’라고 불렸다. 코레고스는 합창대와 배우, 합창 지휘자의 임금은 물론, 이들의 의상, 무대장치 등 제반 비용을 책임졌다.
기원전 472년, 디오니소스 축제에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가 참여하여 다른 비극시인들과 경쟁하였다. 비극시인들은 모두 세 편의 비극으로 구성된 트리올로지와 사티로스(satyros)라는 해악극을 공연하여 평가를 받았다. 그해에 아이스킬로스의 작품들이 무대에 올려질 수 있도록 모든 재정적인 문제를 책임진 코레고스가 바로 27살 난 패기 만만한 귀족 페리클레스였다. 그해에 아이스킬로스의 트리올로지와 사티로스는 아테네 원형극장에서 열린 축제에서 1등을 차지하였다. 이 네 편의 연극들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페르시아인들’뿐이다. ‘페르시아인들’은 동시에 인류가 남긴 최초의 비극 대본이다.
페리클레스가 코레고스로서 모든 비용을 지불했다는 말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아 젊은 나이에 독립했다는 증거다. 당시 아테네에는 세금이 없었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세금징수가 없었다.
아테네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비극 공연을 위한 비용과 전쟁 준비 비용 등 공적인 비용을 아테네의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게 요구했다. 그들은 이 요구를 자신들의 의무라고 여겼다. 이 의무를 그리스어로 ‘레이투르기아(leiturgia)’라고 부른다.
‘레이투르기아’는 축자적으로 ‘대중(litos)을 위한 서비스(ergos)’란 뜻이다. 아테네의 부유층은 자신의 재산을 아테네가 원하면 기꺼이 희사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들은 아테네의 문화를 위해 비극 공연, 음악 경연, 시낭송 경연 등의 비용을 댔고 유사시 ‘삼중노선’과 같은 전함을 마련하기 위해 기꺼이 ‘레이투르기아’를 짊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를 대중과 아테네를 위한 신의 선물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기꺼이 레이투르기아를 실행하였고 아테네는 이들에게 명예와 명성을 선사하였다. 이 전통은 제정로마 시대에는 부유층의 과도한 의무가 되어 점점 본래 의미가 퇴색하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아테네에는 종교축제, 특히 디오니소스 축제를 위해 120명 정도가 레이투르기아를 부담했다. 오늘날 종교 의례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리터지(liturgy)’도 레이투르기아에서 유래했다.
페리클레스는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의 코레고스가 되어 자신의 이름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알리기 시작한다. 미래 아테네의 지도자가 될 페리클레스는 이 기회를 자신을 위한 최고의 투자로 삼았다. 페리클레스는 살라미스전쟁에는 나이가 어려서 참전하지 않았다. 그 전쟁의 영웅은 테미스토클레스다. 페리클레스는 아버지 크산티푸스가 살라미스전쟁에 참전했지만, 테미스토클레스의 명성에 견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원전 473년에 테미스토클레스는 도편제를 통해 추방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해인 기원전 472년에 상연된 ‘페르시아인들’에서는 자연히 그 영광이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부분 그리스 비극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신화적인 인물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은 신화적 내용이 아니라 당시 아테네인들이 7년 전, 즉 기원전 480년에 참전한 살라미스전쟁 이야기를 다뤘다. ‘페르시아인들’은 살라미스전쟁에 참전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어머니 아토사가 페르시아제국의 수도 수사(Susa)에서 절규하는 모습과, 패잔병의 모습으로 겨우 돌아온 크세르크세스의 비참한 모습을 그린다.
특히 크세르크세스의 아버지 다리우스는 혼(魂)으로 등장하여, 페르시아제국의 패전 원인을 ‘오만’이라고 진단한다. ‘오만’은 성공과 안정에 안주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엄습하는 괴물로, 오만한 영웅과 제국을 파괴한다.
비극 ‘페르시아인들’이 가르친 것
그리스의 세계관은 기원전 8세기에 등장한 도시를 중심으로 탄생했다. 도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경제 질서가 등장했다. 이 시기 ‘정치(politics)’가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 ‘정치’란 ‘도시’ 안에서 일어난 삶의 질서다. 그리스에는 수많은 도시들이 등장하고, 이 도시들이 서로 경쟁하는 풍토가 생겼다.
잦은 전쟁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시 안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도시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했다. 호메로스 시대 개인의 선(善)은 이제 도시라는 공공의 선을 위한 재정이 되어야만 했다. 대부분의 도시들에서 귀족이나 소수의 사람 혹은 집단이 사회의 이익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과두제를 어느 정도 유지하였다. 하지만 ‘법(法)’도 등장하여 시민들이 참여하고 결정하는 민회의 바탕이 되었다.
당시 아테네에서 정치에 참여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온전한 시민의 특권이었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행위는 야만이며 어리석은 일로 여겨졌다. 기원전 7세기 미틸레네의 귀족 출신으로 형제들과의 정치투쟁에서 패해 다른 도시로 유배된 알카이오스(Alcaeus)는 고향에서의 정치 참여를 그리워한다는 시를 남겼다. 아테네 도시에서 삶에 명성을 가져다주는 것은 전쟁에서의 아레테뿐만 아니라 민회에서의 발언을 통해서도 가능해졌다. 발언 기회를 얻어 감동적인 연설을 하면 명성을 얻었다.
페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는 비극 공연을 통해 아테네에 자리 잡기 시작한 민주주의의 정착을 꾀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새로운 전략을 짰다. 아테네 원형극장에 마라톤전쟁과 살라미스전쟁에 참전한 거의 2만명 가까운 참전용사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비극 공연 관람은 아테네 시민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종교의례였다. 맨 처음에는 두 전쟁에서 전사한 유가족이 자신들 아버지의 투구와 창을 들고 엄숙하게 행진하였다. 이 행진을 ‘파라도스(parados)’라고 부른다. 관객들은 이들의 행진 모습을 보면서 흐느껴 울었다.
맨 앞에는 아이스킬로스와 페리클레스가 앉았다. 그들 옆에는 유가족들이 자리 잡았다. 이제 그리스 비극 ‘페르시아인들’이 시작되었다.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군대와 함대를 물리치는 전투 장면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첫 장면은 마라톤 평원이나 살라미스해협이 아니라 자신들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하고 가 본 적이 없는 페르시아제국의 수도 수사였다.
페르시아 보초들이 초조하게 봉화를 기다린다. 봉화를 통해 살라미스해전의 승전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이 장면을 보고 실망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장면은 아테네 군인들이 페리스 군대를 전멸시키는 모습이었다.
민주시민의 기초 공감을 가르치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살라미스전쟁을 일으킨 크세르크세스의 어머니 아토사다. 그녀가 등장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이 조용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그녀의 근심 어린 표정과 몸짓, 그리고 대사에 금방 몰입되었다. 아토사는 꿈에서 크세르크세스가 말을 몰다 사고를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불길한 징조를 느낀다.
페르시아는 객관적인 전력에서 패할 수 없는 군사대국이었다.
그녀는 이미 고인이 된 남편 다리우스의 혼을 불러, 전쟁의 결과를 묻는다. 다리우스는 페르시아제국이 군사적·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크세르크세스가 ‘오만’에 빠져 무리하게 전쟁을 감행하여 패할 수밖에 없다고 질책한다. 비극의 마지막 부분엔 겨우 살아돌아온 크세르크세스가 흐느껴 울면서 자신의 과실을 개탄한다.
이 장면을 숨죽여 보던 아테네 시민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 형제, 그리고 아들을 마라톤전쟁과 살라미스전쟁에서 죽인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왕과 크세르크세스를 보면서, 그들을 원수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아버지, 자신들의 아들로 보기 시작했다. 아토사의 애통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보편적인 모성애를 발굴하였다.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들의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들도 모르게 아토사가 되었다. 그들은 또 혼으로 등장한 다리우스의 개탄하는 모습에 몰입해 다리우스가 지적한 ‘오만’이라는 비극의 원인을 관찰했다. 이들은 마음속으로 제국의 비극의 원천이 ‘오만’이라는 괴물이란 점을 깨닫는다.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영웅들을 파국으로 이끄는 3단계가 있다.
첫째는 ‘오만’이다. 오만이란 자신이 누리고 있는 현재의 혜택을 자신 혼자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자만하는 마음이다. 오만한 자에게 다가오는 병이 있다.
그것이 두 번째 단계인 ‘장님성’이다. 장님이란 이전에 보이던 불행의 요인들을 볼 수 없는 자다. 오만한 자에게 오는 방심과 게으름, 그리고 건방짐으로 인해 불행이 코앞에 와도 볼 수 있는 눈을 상실하게 된다. 장님이 되면 자기 스스로 불행을 초래한다.
이런 불행을 ‘천벌’이라고 한다. 천벌은 남이 나에게 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초래한 불행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나의 불행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내가 당하는 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연극을 보면서 스스로 오만에 빠지지 않기를 다짐했다.
페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는 무엇보다도 위대한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 ‘공감’이라는 아레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비극 공연을 보면서 자신들을 페르시아전쟁에서 승리한 용사로만 보지 않고 페르시아인들, 즉 원수의 눈으로 자신들을 볼 수 있는 혜안이 생겼다. 스스로를 자기만의 이기심으로 보지 않고 제삼자의 눈으로, 더 나아가 원수의 눈으로 보는 능력을 배양하게 된 것이다.
‘극장’이란 영어단어 ‘시어터(theatre)’의 원래 의미는 ‘자기 자신을 제삼자의 눈으로 보는 장소’란 의미다. 공감의 능력은 민주시민의 기초가 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시작은 아테네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공감교육을 통해 시작되었다. 이 교육을 통해 인간에게 숨겨진 공감의 능력이 발휘되지 않았다면, 아테네는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민중들의 분노에 편승하는 자는 군중 선동가가 될 뿐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높은 수준의 도덕심 그리고 원수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공감의 능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사람이 바로 페리클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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