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리더의 조건] 지적인 혁명가 페리클레스 (상)
페리클레스는 어떻게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됐나?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우리는 지금 흠모할 만한 리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나도 모르는 어리석음을 지적해주고 나에게 최선의 삶을 열정적으로 제시하고 촉구하는 정신적이며 실천적인 스승을 만나고 싶다. 그(녀)는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고질적으로 품고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분석할 뿐만 아니라, 그 해결책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평가하거나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천이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그 대안의 탁월성을 감동적으로 설득한다. 그 대안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간절히 바라는 이상적인 삶이라서 자신들 스스로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을 인내할 수 있는 희망까지 선사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그는 인간을 그리스어로 ‘조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이라 정의했다. ‘조온 폴리티콘’을 직역하자면 ‘폴리스(polis·도시) 안에 사는 동물’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공생하는 동물로, 최적의 삶을 최대한 보장하는 규율과 관습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산다. 인간은 자신의 잠재력과 개성을 그 공동체 안에서 발견하여 발전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삶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도시 안에서 개인이 추구해야 할 최선의 삶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정의한다. 이 단어는 흔히 ‘행복’이라고 번역하나, 실제적 의미는 개인이 가진 ‘최고 잠재력을 증진시키는 최선의 삶’이다
기원전 6세기 말엽,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정치제도가 탄생했다. 바로 ‘민주주의’라는 제도다. 새로 등장한 이 제도는 불안정했다. 실험을 거듭하던 제도를 과감한 개혁을 통해 고전적 모습으로 만든 한 명의 리더가 있었다. 페리클레스(기원전 495~기원전 429년)다. 그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인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선물했다. 당시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엄격한 위계질서, 명령하달이라는 제왕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심지어 최근까지도 마찬가지다. 페리클레스가 제시한 민주주의는 인류가 애써 찾은 바닷속 진주였고 오늘날까지 가장 효과적인 정치 제도로 평가받는다.
민주주의의 세 가지 요소
페리클레스가 구축한 민주주의는 아테네 출신 남성 어른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모든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의 재산 정도와 사회적 계급에 상관없이 도시국가의 중요한 결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 민주주의를 21세기 시선으로 보면 시대적 결함도 있다.
아테네인은 여성, 어린아이, 외국인 거주자, 노예들을 정치적 삶에서 제외시켰다. 정치적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이 평등하다는 원칙은 프랑스혁명 이후 꽃피운 근대적인 보편적 평등주의의 씨앗이 되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당연한 체계로 여긴다. 인간과 집단의 욕망과 이기심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가장 예외적이며 금세 시들어 버릴 꽃과 같다. 민주주의는 아테네와 그 주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서 200년 동안 실행되다 사라졌다. 민주주의 불씨가 다시 타오른 것은 2000년 후다. 민주주의는 광범위하지만 취약하게 등장하였다.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으로 다시 불이 붙은 민주주의는 어린아이를 제외한 모든 구성원들에게 정치참여를 부여했지만, 현대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와는 달리 간접적이다.
고대 그리스와 지금의 미국에서만 민주주의가 200년 동안 지속되었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왕의 등장으로 왕정으로 돌아갔다. 2016년 11월에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도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지가 나타났다. 금권을 기반으로 한 대중선동정치가 권력을 쥘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쓴 대부분의 국가들도 그 정치 형태는 신권정치와 왕권정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서양에서는 아테네 민주주의 이후 왕정과 독재정치가 2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왕조, 독재, 혹은 파벌정치는 타도되는 듯이 보이지만 혼동을 거쳐 이전과 유사한 정치 형태로 어김없이 되돌아간다.
민주주의는 근대에 자본주의와 결탁했고 소련, 동유럽, 아프리카와 남미, 그리고 북한에서는 독재적인 공산주의가 등장하였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같은 정치학자는 “자유민주주의가 인류가 가진 정부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섣불리 단정하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탄생한 고대 그리스에서도 기원전 4세기에 민중의 인기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가 왕정과 신정으로 회귀하였다. 현대인들은 ‘민주주의’를 소중하게 여기지만 그 가치를 어렴풋하게 안다. 현대인은 민주주의가 가진 원칙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적이며 영적인 가치를 망각하여 대중영합정치와 혼동한다.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제도나 사회제도가 성공하기 위해선 적어도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사회구성원들의 염원을 담아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제도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자유민주주의가 개인의 행복을 신장하는 버팀목이 된다고 평가한다. 둘째는 그 민주주의의 원칙을 잘 이해하는 시민집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삶의 불편을 감수할 수 있는 인내를 지닌 자들이어야 한다. 세 번째는 높은 수준의 리더십이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잘 부각되지 않지만, 위급한 시절에 등장하여 사람들의 요구를 경청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대안을 설득하는 자가 리더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탄생한 지 50년 만에 위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민주주의는 민중들이 귀족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제한적인 민주주의였다. 이런 상황에서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정치제도를 더욱 발전시켰다. 대부분의 민중들이 이론적·실제적으로 권력의 주체가 되는 보다 온전한 정부로 탈바꿈시켰다. 이를 기반으로 25만명의 아테네 시민들은 오늘날까지 클래식이 된 문학작품, 조각품, 그리고 건축물을 창조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를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과학적으로 열거하고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는 역사 서술을 탄생시켰다. 그들은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식물과 동물, 그리고 특별히 인간들을 심오하게 관찰하여 과학과 철학이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학문의 기반을 닦은 것이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탄생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서양역사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달성한 4가지 문명을 나열한다. 페리클레스 주도의 아테네 문명과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끈 로마 문명, 그리고 르네상스와 루이 14세가 주도한 프랑스 문명 등이다. 이 중에서도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문명은 극히 예외적이다. 이전에 존재했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이스라엘, 시리아, 인도, 그리고 중국 문명은 아테네 문명과 거의 유사하지만 한 가지 점이 다르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로, 아테네 문명을 중심으로 피어난 서양사상의 특징을 이룬다. 다른 문명들은 왕, 군주 혹은 사제 계급이 주도한 정교한 관료 구조를 가진 도시문명이었다. 이들은 극히 일부의 지식인들만이 통용하는 복잡한 문자 체계를 가졌다. 그들의 특징은 계급을 기반으로 한 엄격한 신분사회라는 점에 있다. 이들은 한 국가로서 문화적 일체감과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헬레니즘 문명은 달랐다. 이들은 이집트,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제국의 영향을 받아 미노스 문명과 미케네 문명을 구축하였지만, 기원전 11세기경 알 수 없는 이유로 무참히 무너졌다. 학자들은 에게해에 위치한 테라섬이 폭발하여 화산먼지가 하늘을 덮어 지중해 일대의 모든 섬들이 폐허가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해상무역도시들이 초토화되어 조그만 농업 마을로 전락하였다. 이들이 사용하던 선형문자 B와 선형문자 A가 사라지면서 거의 300년 동안 무(無) 문자 사회가 되었다. 학자들은 기원전 11세기부터 8세기를 그리스의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이 암흑시대에 그리스 문명의 특징이 등장한다.
그리스는 이전의 가족, 부족을 넘어서 동일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외부의 적에 공동 대응하고 자신들 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는 기본 단위를 ‘폴리스(polis)’, 즉 ‘도시국가’라고 칭했다. 수백 개의 도시를 만든 그리스인들은 이보다 큰 체계를 만드는 것을 터부로 여겼다. 이 도시들은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탁월성을 성취하는 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겼다. 아테네인들은 ‘경쟁’을 그들의 삶을 고양시키는 원동력으로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어로 경쟁을 ‘아곤(agon)’이라고 부른다. ‘아곤’은 전차와 승마경주일 수도 있고 공적 의례에서 경연하는 음악이나 문학을 통한 각축일 수도 있다. ‘아곤’은 종교 축제, 특히 매년 열리는 디오니소스 축제 때 무대에 올리는 비극 경연대회이기도 하다. 아테네 시민과 심판관들은 공연된 여러 편의 비극들 가운데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최초의 작품을 선정한다. 경쟁은 문학과 예술에서 두드러져 예술가와 시인들을 자극하였다. 개인은 자기 분야에서 최고 지도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연마하고 경쟁하였다. 미케네 문명이 사라지고 암흑기가 도래하면서 왕들은 사라지고 도시를 차지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등장하였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대개 가난했기 때문에 이들 간의 빈부격차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계급 차이도 다른 오리엔트 문명과 비교하여 현격하지 않았다. 기원전 700년경 아테네 자유 시민들이 주동이 된 자발적인 군인과 군대가 등장한다. 이 완전 군장한 보병들을 ‘호플라이트(hoplites)’라고 부른다. 호플라이트가 모인 집단 형태를 ‘팔랑스(phalanx)’, 즉 ‘밀집대형’이라 부른다. 다른 문명들의 왕이나 군주는 자신의 부와 권력으로 사병을 조직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외부의 적을 물리치는 책임을 진다. 그러나 아테네는 일상적인 농부가 스스로 창과 방패를 사고 밀집대형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하여 그 책무를 다했다. 아테네 군인들은 보수를 받지 않는 시민 병사들로, 전쟁 후에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공공의 안정과 이해를 위해 독립적으로 자원한 군인들이다. 그들은 전쟁 중에 밀집대형에서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담당한 것처럼, 평화로운 시절에는 아테네 정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아테네는 민중들이 대거 정치에 참여하였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도시국가에는 복잡한 관료제도가 필요 없었다. 커다란 조직을 관리하고 감찰할 인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런 관료 조직을 지탱할 자원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대부분 도시국가들은 정기적인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사제가 필요 없었고 당연히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이처럼 다양하고 역동적이며 세속적이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처음으로 사변적인 철학이 등장했다. 이 세계관은 과학과 철학의 핵심인 관찰과 이성을 기반으로 생겨났다.
에게해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그만 도시였던 아테네에 등장한 한 인물이 민주주의와 오늘날의 정치, 리더십에 관해 혜안을 주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정치, 외교, 전쟁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페리클레스의 경험과 삶에서 실질적인 지혜를 얻는다. 페리클레스는 민주주의의 창시자도, 민주주의의 기반을 닦은 자도 아니다. 그는 페르시아전쟁의 영웅인 아버지 크산티푸스(Xanthippus)와 아테네 정치의 명문가인 알크마이온 집안 출신인 어머니 아가리스테(Agariste)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떤 학자들은 페리클레스를 민중 선동주의자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가 혁혁한 공을 세웠던 펠로폰네소스전쟁과 그 시대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통해 그를 평가했다. 이 기록을 통해 재구성된 페리클레스는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리더의 전형이 되었다. 그는 자신만의 특별한 역할을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탁월하고 감동적으로 보여준 리더였다. 그는 위대한 민주주의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 시민이었다. 그를 통해 아테네는 인류 역사상 도달한 적이 없는 부와 명성을 획득하였다. 그가 구축한 육군과 해군의 막강한 군사력을 통해 아테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시로 창조되었다.
예술과 인문에 대한 후원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귀족이었지만 다른 귀족들에 비해 재산이 많지 않았다.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한 시민이자 ‘스트라테고스(strategos)’라는 장군이었다. 아테네는 10명의 장군이 있었고 이들의 권한은 동등했다. 그들은 사적인 용병을 부릴 수 없었다. 그들이 공적인 돈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아테네 시민들의 모임인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민회에서 투표를 거쳐야만 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나 총리의 권한과 비교하면 페리클레스의 권한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그는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정당이나 지역 기반도 없었다. 그는 매년 장군으로 다시 선출되기 위해 지속적인 감시와 정치적 도전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로마의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전쟁에 참여하여 선봉장에 서는 야전사령관이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확인하고 확장하여 아테네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공적인 조약과 사적인 약정서를 체결하였고 아테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안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또한 르네상스시대 메디치가의 로렌조나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처럼 예술적이고 지적인 창의성이 분출되도록 아테네인을 자극하였다. 그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를 신전과 동상들로 채웠다. 이를 지난 2400년 동안 세상의 보고가 되도록 변모시켰다. 그는 특히 천재적인 건축가와 조각가들을 심사숙고하여 선발했고 그들을 후원하여 아테네를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리스 대중문화의 시작이자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 비극이라는 장르를 개척하였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페르시아인들’을 후원하여 무대장치와 배우들의 의상, 월급을 지원하였다. 그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비극작가라고 칭송받는 소포클레스와 친구였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인 ‘오이디푸스왕’을 보면서 오만을 통해 비극적 인간으로 전락하는 인간사를 깨달았다. 그는 이런 연극을 보면서 스스로 근신하였다. 그는 또한 위대한 건축가 피디아스(Phidias)의 친구였다. 그는 피디아스에게 파르테논 신전을 기획하고 건축하도록 맡겼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도시기획자인 밀레투스의 히포다무스(Hippodamus)를 시켜 도시를 격자기획(格子計劃)으로 조성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 도시계획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역사의 아버지인 헤로도투스의 친구였고 여가시간에는 당대의 학자들인 제노, 아낙사고라스, 프로타고라스와 대화하였다. 그의 예술과 인문에 대한 후원으로 아테네에 내재한 잠재력이 천재들을 통해 분출됐다. 이를 통해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페리클레스가 남긴 유산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그는 이런 일을 절대권력을 쥐고 이루지 않았다. 절대권력을 통해서는 창조적이며 예술적인 작품이 등장할 수가 없다. 그는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와 끊임없이 씨름한 리더다. 그렇기에 그의 업적은 흠모할 만하다. 그는 위대한 아테네를 건설하기 위해 필연적인 시민들의 희생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참주나 독재자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병이나 용병을 이용한다. 스파르타와 같은 전제국가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삶을 포기하였다. 민주적인 아테네는 그런 힘을 원용할 수 없었다. 그 대신 페리클레스의 리더십은 자유로운 공교육을 통해 이루어졌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의 이익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 이익과 밀접하게 엮여 있으며, 아테네가 번성하지 않으면 그 안에 거주하는 개인도 성공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아테네 시민의 위대함은 아테네 도시국가의 위대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은 모두 아테네를 고양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폭력과 공포가 아니라 생각의 힘으로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싶었다. 페리클레스는 생각 수련을 통해 높은 수준의 사상을 포착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인격을 신장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감동적으로 전달했다. 그는 시민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 수사학 능력을 배양했는데 그의 수사학 능력은 유일무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중요한 정책을 공개 토론을 통해 정했다. 대중연설은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연설가였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유명한 레슬러이며 정치지도자가 페리클레스를 평가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내가 그를 (토론에서 은유적으로) 던져 이길 때마다 그는 넘어지지 않았으며 그 장면을 본 모든 사람을 설득하였다.”
대부분 정치가들은 대중의 욕망과 편견에 부합하거나 부추기는 말을 통해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토론이 민주주의 정책 결정의 중요한 보루이기 때문에, 민주시민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직언을 들어야 한다. 페리클레스는 매년 자신의 신임을 대중에 물어야 하는 취약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에게 아첨하거나 그들의 편견에 편승하기를 거절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당면한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전달했고 그들에게 함께 대처해 나가자고 설득했다. 그는 아테네 시민 스스로가 만든 공포를 초월하자고 설득했고 단기간 이익에 탐닉하지 말자고 촉구하였다. 그는 필요하다면 시민들을 꾸짖고 그들의 화를 감수하였다.
페리클레스는 다른 민주주의 지도자들처럼 대중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험난한 세월을 보냈다. 다른 동료들은 그를 민주적인 참주 혹은 민중 선동주의자라고 폄하하였다. 그리스 희극작가들은 그를 원형극장에서 조롱하였고 그의 불쑥 튀어나온 머리를 흉봤다. 사람들은 심지어 페리클레스의 친구들을 추방하고 온갖 비방을 일삼았다. 그는 이 모든 모함을 이겨냈지만 말년에 비극적 사건에 휘말린다. 페리클레스가 촉구한 전쟁이 역병으로 이어져 아테네 시민 3분의 1이 죽은 것이다. 아테네인들은 그를 전쟁 패배와 역병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그를 쫓아낸다. 특히 반민주적이었던 철학자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그를 과소평가한다. “아테네인은 자신들이 더 악했기 때문에 페리클레스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다. 페리클레스는 말년에 그들을 ‘숭고하고 선하게’ 만들었지만, 그들은 그를 배임으로 고소하고 그를 거의 살해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페리클레스가 비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런 평가는 페리클레스와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페리클레스의 천재성은, 민주주의 리더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일원들을 자신의 삶의 모습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인식에 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자도 아테네라는 도시를 통해 자신의 최선을 이룰 수 있도록 비전을 제시하였다. 오늘날 민주 진영의 지도자들은 경제적 안정과 번영 이상의 무엇을 추구해야 한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물질적 풍요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며 영적인 비전을 제시하였다. 아테네 시민들은 이 비전으로 자신의 일상이 던지는 어려움조차 인내로 극복하는 삶의 지혜를 얻게 되었다. 리더로서 페리클레스가 보여준 구체적 예들은 다음 호에서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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