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우리 시대 리더의 조건] 테미스토클레스의 ‘선견지명’

rainbow3 2022. 3. 19. 00:32

[우리 시대 리더의 조건] 테미스토클레스의 ‘선견지명’

 

혼란과 위기 속 등장한 리더 테미스토클레스는 어떻게 나라를 구했나                 *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인류 역사의 거대한 물결은 위에서 아래로만 정해진 길을 따라 흘러가는가, 혹은 한 위대한 리더에 의해 물꼬를 터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가? 인류 역사의 진보는 대중이 만드는가, 혹은 선각자가 등장하여 대중을 설득하여 이루어지는가? 한 국가나 집단이 사라질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것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기존 체제와 그 안에서 연명했던 인물들이 자신이 경험하여 알고 있던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가?

 

18세기 말 미국이라는 신생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미국의 3대 대통령이기도 한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기도 한 제퍼슨은 아테네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4년~기원전 459년)를 자신의 정신적 멘토로 삼았다.

테미스토클레스가 활약하던 시기는 기원전 6세기부터 5세기 초 아시아와 유럽을 지배하던 고대 페르시아제국이 마침내 아테네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침공할 때였다.

아테네가 풍전등화처럼 사라질 위기에 봉착했을 때 모습을 드러낸 리더가 테미스토클레스다. 그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도시국가 간의 전쟁들, 특히 마라톤전투와 살라미스해전을 치르면서 리더가 됐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제국의 속국이 될 위기에 등장하여 서양문명의 불씨를 살렸다. 오늘날 그리스문명과 그 자식들인 서양문명은 테미스토클레스의 리더십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등장한 프로노이아

 

테미스토클레스 리더십의 근원은 한마디로 ‘선견지명(先見之明)’이다. 여기에 자신의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겨 결과를 도출시키는 ‘설득의 기술’도 중요한 요소다.

리더는 없던 길을 만드는, 남들이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야만 하는 고독한 인간이다.

대중은 리더에게 자신들을 이전보다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리더는 대다수 국민이나 다른 여느 정치 지도자들이 볼 수 없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그 길을 명약관화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순간에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참신한 전략을 생각해낸다. 이것을 고대 그리스어로 ‘프로노이아(pronoia)’라고 한다. ‘프로노이아’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 상황을 사고실험을 통해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상상하고, 그것에 대한 대처방안을 내놓는 능력이다.

 

남들이 볼 수 없는 미래의 일을 상상하는 것은 점을 치거나 기도를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높은 시선에서 전략적으로 볼 때 생긴다. 그러면서 리더는 자기 자신에게 확고한 믿음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믿음을 고대 그리스어로 ‘피스티스(pistis)’라고 불렀다. 이런 자기 확신은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매개체인 말에 힘을 선사한다.

어떤 리더가 대중이나 다른 정치지도자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말에 힘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힘이란 오랜 수련을 거쳐 얻은 ‘선견지명’으로 위기상황을 직시하고 그 해결책을 구체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확신을 통해 나오는 말을 고대 그리스어로 ‘디나미스(dynamis)’, 즉 ‘힘’이라고 불렀다.

 

테미스토클레스가 활동한 시대는 정치적으로 혼란기였다. 아테네를 지배하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는 기원전 527년에 사망하면서 권력을 자신의 두 아들인 히피아스와 히파르코스에게 이양했다.

당시 아테네 귀족들이 권력투쟁을 벌여 첫째 아들 히피아스를 살해하자 히파르코스는 자신에게도 들이닥친 살해 위협에 맞서 점차로 외국 용병들에게 의존한다.

그러자 아테네에서 추방된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는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Cleomenes) 1세의 힘을 빌려 둘째 아들 히파르코스를 폐위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세상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항상 이루어지지 않듯이, 아테네 귀족들은 클레이스테네스를 지도자로 옹립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 1세가 지지한 이사고라스(Isagoras)를 ‘아르콘(archon)’, 즉 최고행정관으로 옹립한다.

그러자 클레이스테네스는 정치권력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부여하는 과감한 개혁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 정치 형태를 ‘데모크라시’, 즉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아테네 시민들은 이사고라스를 폐위시키고 자신들 스스로 새로운 힘을 획득하였다.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아테네를 수호하고 권력을 쟁취한 것이다. 그들은 클레이스테네스에게 새로운 정치구조 개혁을 맡겼다. 그의 ‘민주주의 개혁’은 부족과 종교를 기반으로 한 전통사회를 헤쳐 새 질서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는 아테네인이 과거에 속했던 네 개의 부족 집단을 재정비하였다.

그는 오래된 부족들을 없앤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퓔레(phyle)’라는 이름을 붙여 10개의 새로운 집단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 집단의 조상으로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들을 각각 배치하였다. 그리고 작은 마을들이나 도시의 한 지역을 구성하는 ‘딤(deme)’이라는 새로운 행정구역을 만들어 재정비하였다.

 

민주주의 혁명 ‘법의 평등’

 

클레이스테네스는 외적인 행정개혁을 단행하면서 그것을 작동할 체계를 고안해냈는데, 그것이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를 직역하자면 ‘대중을 위한 권력’이란 의미다. 그러나 이 용어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부정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용어다.

아테네인은 자신들의 정치체계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역사’에서 아테네서 실험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제도를 ‘이소노미아(isonomia)’, 즉 ‘법의 평등’이라고 불렀다. 아테네 시민 누구나 동일한 법 아래 있으며, 그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의미의 정치 제도다.

‘이소노미아’는 계급을 통해 자신의 신분이 결정된 아테네 사회의 근간을 허물었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하며 개개인은 고유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에 자유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등장하였다. 평등과 자유가 인간사회의 기반으로 비로소 등장하였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19세기 말까지 세습에 의한 왕정을 유지하였지만, 고대 그리스는 이론상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정치적 혁명을 기원전 5세기에 이루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서양문명은 바로 이 시점에서 탄생하였고 아테네는 서양문명의 핵심가치를 창출하였다.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라는 이소노미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세고리아(isegoria)’, 즉 ‘발언의 평등’이라고 여겼다. 아테네 남성들은 자신이 태어난 계급과는 상관없이 시민 모임인 ‘민회’에서 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당시 아테네는 남성주의 사회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진보된 사상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계급을 이론상 철폐했다는 사실이 혁명적이다. 이전에는 귀족이나 금권을 장악한 사람들만이 발언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당시 남긴 시에서 여러 증거들이 등장한다. 아테네 성인 남성들은 누구나 공적인 모임에서 자신의 생각을 동료 시민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와 함께 개인이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수사적 능력이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등장하였다. 언론의 자유는 아테네가 고안한 자치 정부의 핵심이다. 그리고 투표는 민주주의를 강화하였다.

 

이런 과감한 시도가 이전의 모든 정치행태를 전복시킨 것은 아니다. 특히 경제권을 쥔 귀족들은 건재했고 귀족들로 구성된 법정인 ‘아레오파구스(areopagus)’와 귀족들의 집인 ‘프라트레스(phratres)’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테네 일반 시민들은 여전히 귀족들에게 리더십을 요구하는 민주주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에서 기원전 523년에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네오클레스는 허울만 귀족일 뿐 플루타르코스가 저술한 ‘영웅전’의 말을 빌리자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한 전설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트라키아 출신 아브로토논이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소아시아 할리카르나소스 출신 에우테르페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아테네 성 외부의 이민자 거주지인 키노사르게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아테네 성벽 넘어 사는 귀족 자제들을 설득하여 키노사르게스에서 함께 놀며 사회적이며 인종적인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며 지내는 경계인으로 성장한다.

플루타르코스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어려서부터 리더가 되기 위해 자신을 수련했다고 전한다. 그는 전통적인 귀족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자신의 연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수사학 연습에 매진하였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남긴 말을 전한다.

 

“나는 피리를 연주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테네를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알고 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살았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예술 작품이 하나 있다. 청년을 조각한 작품이다. 이 조각상은 1866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폐기물 매장터에서 발견됐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제국의 크세르크세스가 아테네를 침공하여 신전 안에 있던 성물들을 파괴했다. 후에 아테네인들은 그 성물들을 한곳에 매장하였다.

이곳에서 발견한 한 특별한 조각상이 기원전 480년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크리티오스의 소년’이라는 그리스 조각상이다. 이것을 제작한 조각가는 신체의 각 부분이 하나의 체계로 유기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완전히 이해하였다. 그리스 고전기 이전 조각품인 경직되고 비개성적인 ‘쿠로이(kouroi)’와는 대조적이다.

이 조각품은 그리스의 고전 예술 양식을 창시한 미론(Myron)의 스승인 크리티오스의 작품이라고 추정되나 증거는 희박하다.

 

대리석으로 조각된 ‘크리티오스의 소년’은 이제 민주주의를 통해 발화된 아테네 고전문명의 시발점이라 평가할 만하다. ‘콘트라포스토’라는 인체 입상의 특징을 처음으로 표현했다.

인체의 중앙선을 S자형으로 그리며 상반신의 무게를 지탱하여 직립하는 다리인 지각(支脚)과 뒤꿈치를 살짝 들고 무릎을 구부린 다리인 유각(遊脚)을 각각 표현하였다.

전체적으로 좌우비상칭(左右非相秤)이지만 묘하게 균형이 잡혀 인체의 정중동(靜中動)과 긴장, 이완의 대비가 신비하게 표현되었다. 이 조각상은 힘이 넘치고 실물처럼 표현되었다. 신체의 모든 부분들이 모두 자신들의 특징을 잘 드러내면서 조화를 이룬다.

 

‘크리티오스의 소년’ 조각상은 아테네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다양성과 복잡성 그리고 일체감을 표현한다. 이 새로운 형식의 조각은 얼마 가지 않아 아테네와 그리스 조각의 기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를 거쳐 오늘날 조각 예술의 기준이 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여전히 머리 역할을 하는 리더가 필요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정치가로서 스승이 없었다. 다른 귀족 자제들처럼, 자신이 흉내 내고 추종해야 할 전범이 없었다. 이 점은 그가 리더로서 성장하기 위한 최대 약점이자 동시에 최대 장점이 됐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스승이 되어 스승처럼 생각해야만 했다.

예술 분야에 ‘크리티오스의 소년’ 조각상이라는 새로운 방식이 소개되고 실험되었던 것처럼,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만의 정치혁신을 시도하였다. 그는 대중을 설득하는 기술은 세련되고 감동적인 연설이라고 판단했고, 연설 중에 가능하면 많은 아테네 시민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언급하여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기로 결정한다.

 

설득의 힘을 기른 테미스토클레스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93년, 서른 살이 되던 해 아테네의 가장 중요한 선출직 중 하나인 ‘아르콘’이라는 최고 행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깊이 묵상하여 ‘프로노이아’, 즉 선견지명에 도달한다. 페르시아제국이 점점 힘을 키우고 있는 아테네를 침공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아테네로 가는 주요 항구인 피라이우스(Piraeus)에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491년 페르시아제국의 ‘위대한 왕’ 다리우스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흙과 물’을 구하는 사절단을 보낸다. ‘흙과 물’이란 페르시아제국에 승복했다는 표시다. 다리우스는 특히 페르시아의 식민지였던 소아시아 이오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테네가 군사적으로 개입하였다는 점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소아시아 이오니아인들은 주로 아테네와 그 주변에서 이주해 간 이민자들이다. 그러나 아테네는 자신들을 찾아온 다리우스의 사절단을 지하 구덩이에 감금시켰다. 당시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모든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에 승복하였을 때였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군대는 마라톤 항구에 배 600척, 보병 2만명, 그리고 기병 800명을 보냈다. 아테네인들은 전령 피딥피네스(Phidippides)를 시켜 스파르타에 군사적 지원을 부탁했다. 스타르타인들은 중요한 종교 절기 중이라는 이유로 군대 파견을 보류한다.

‘호플라이트(Hoplites)’라 불리던 아테네 보병들이 페르시아 군대와 홀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 군인들은 전력이 2 대 1로 열세였지만 정면대결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아테네 장군들은 밀티아데스, 칼리마쿠스, 아리스티데스, 크산티푸스, 스테이실아오스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 등이었다. 이들은 밀집대형이라는 새로운 전략과 높은 사기(士氣)로 불가능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6000명이 넘는 페르시아인이 전사했지만 아테네인은 192명만 죽었다.

 

마라톤전투에서 승리한 후 테미스토클레스는 권력을 잡기 위해 아리스티데스와 투쟁한다. 아리스티데스는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반면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수성가한 외톨이였다. 아리스티데스는 자신들의 창과 무기를 들고 자신들의 갑옷을 입고 참전한 아테네의 보수적인 농민들을 대변하였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주로 도시빈민 출신으로 수공업에 종사하던 테테스(thetes)라는 하류층 상인들을 대변하였다.

아리스티데스는 호플라이트 보병들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은 반면 테미스토클레스는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의 아테네 침공을 막기 위해서는 해군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리우스 대왕은 마라톤전투에서 물러간 후 다시 아테네로 돌아올 수 없었다. 기원전 486년 페르시아제국의 식민지인 이집트가 반란을 일으켜 그리스 원정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우스는 불행히도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다 사망한다.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왕좌를 이어받아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고 아버지 다리우스가 실패한 그리스 원정을 준비한다.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 그늘 아래에서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고 싶었다. 크세르크세스가 일으킨 살라미스해전을 바탕으로 기술된 최초의 그리스 비극 작품인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기원전 472년 초연)에서는 크세르크세스의 이런 이기적인 욕망을 ‘휴브리스(hubris)’라고 불렀다.

 ‘휴브리스’란 자신을 관조하지 못한 채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이나 업적을 자기 스스로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자만심으로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이다. 

 

살라미스해전을 꿰뚫어본 예지

 

아이스킬로스는 비극적 인간의 3 단계를 기술한다.

첫 단계는 오만이다.

만일 사람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내공과 수련이 부족하면, 그는 어리석게도 자기 만족에 빠지는 ‘오만’이란 늪에 들어간다.

두 번째 단계는 ‘장님성’이다.

그는 오만이란 늪에서 아첨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자신과 주위 사람,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장님이 된다. 스스로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사건을 파악할 정신적·영적인 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해야 할 일들을 남에게 맡기고 게을러진다. 이 단계를 고대 그리스어로 ‘아테(ate)’라고 부른다. 자신이 장님이 되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세 번쩨 단계는 ‘복수’다.

고대 그리스어로 ‘네메시스(nemesis)’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영어로 그대로 차용되었다. ‘네메시스’라는 단어의 원초적 의미는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을 받는 행위’다. 복수는 내가 남에게, 혹은 남이 나에게 가하는 나쁜 행위가 아니라, 내가 자초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당하는 운명적인 벌이다.

 

드디어 벌어진 살라미스해전 당시 아테네에는 테미스토클레스라는 리더가 있었다. 그는 마라톤전투를 통해 페르시아제국의 야망을 경험하였고, 마라톤전투에서 패한 페르시아가 반드시 아테네를 재침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도 그 사실을 아는 유일한 아테네의 리더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전열을 재정비하여 오는 페르시아 군대를 이길 방도는 ‘삼단노선’이라는 배를 증강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호플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보병 중심의 주력부대를 운영하던 아테네에 해군을 강화하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삼단노선을 증강하지 않는다면, 아테네는 불타 없어지고 그리스는 인류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깊은 묵상에 빠져 ‘프로노이아’를 통해 해결책을 찾는다.

 

위기의 순간 해결책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선명하게 상상하고 입체적으로 구상하고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자에게만 떠오른다. 기원전 483년 아테네 근처 라우리온(Laurion)에서 대량의 은이 매장된 광산이 발견되었다. 100달란트나 되는 은은 오늘날 수천억원에 해당하는 재물이다. 아테네인들이 은 광산을 발견하였을 때 하는 일반적인 일 처리 방식은 은을 채굴하여 골고루 배분하는 것이다. 이 순간, 테미스토클레스의 프로노이아가 그의 정신을 깨웠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비하여 발견된 은을 전쟁 비용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육군을 장악한 아리스티데스는 이 안에 반대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의 직접적인 이익에 관련된 예를 들어 다시 설득한다. 그는 아테네에서 17㎞ 떨어져 있는 아이기나섬을 언급한다. 아이기나섬은 마라톤전투 때 페르시아 편을 든 해상강국이다. 그는 아테네가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눈앞에 보이는 아이기나의 해군에 맞설 수 있는 삼단노선 구축이 절실하다고 다시 설득한다.

 

아테네 민회에 라우리온의 은 사용에 대한 안건이 상정되었다. 전통적이며 부유한 호플라이트 계급은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아이기나를 제어하기 위해 삼단노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안에 찬성한다.

아테네의 가난한 도시빈민들은 자신들에게 일거리를 주는 선박 구축에 찬성한다. 삼단노선은 그 당시 크루즈 미사일이었다. 배가 삼단으로 되어 있어 노를 저어 속도를 낸다.

아테네인은 100척의 삼단노선을 건조하여 크세르크세스와의 480년 살라미스해전에서 승리한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선견지명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저 멀리서 떠올리며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독수리의 눈을 가진 자가 지닌 능력이다. 주관적 자아를 선명하게 보고 수련하여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공공이익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고유한 임무를 자신의 목숨처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 선견지명을 지닌 리더다.

리더는 스스로에게 항상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나에게 믿을 만한 존재인가?”

 

내가 내 자신을 못 믿는다면 누가 믿겠는가? 선명지명과 자기 확신은 그 사람에게 카리스마를 선물한다.

그것이 그의 말의 힘 ‘디나미스’다. 선견지명이 있어 자기 확신에 찬 리더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