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22)] ‘기억하는 인간’ 호모 레코르단스

rainbow3 2022. 4. 2. 15:53

[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22)] ‘기억하는 인간’ 호모 레코르단스(Homo Recordans) 

 

<< 인간을 하나로 묶는 문화의 끈 >>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공동의 기억’을 구축해가는 행위…정교한 장례 의식은 인류가 공동체로 살아가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노력 

 

로마의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5세기 초 로마제국이 멸망하는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그는 그리스 철학의 도움을 받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기원후 2세기에 페르시아에서 등장한 마니교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원용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 후, 그는 밀라노의 그리스도교 사상가이며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그리스도교 교리 안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그는 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을 인간이 유전적으로 내재된 ‘원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과는 전적으로 다른 신의 전적인 개입과 희생이 필요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사건을 반복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고백록>에서 인류에게 익숙하지 않는 새로운 시간관을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선형적인 시간관’이다. 이 시간관엔 처음과 마지막이 있다. 신이 태초에 우주를 창조했으나, 인간의 원죄로 타락해 신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신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죽게 만들었다. 이 죽음이 중간 지점이다. 신은 마지막 날에 재림해 우주를 와해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순환적이며 세속적인 이교도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선형적이며 거룩한 그리스도교의 시간을 강조했다. 이 시간관은 중세의 시간과 역사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 선형적 시간과 순환적 시간관 >

 

어거스틴의 시간관은 20세기 신화학자 미르체아 엘리야데(Mircea Eliade)와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Strauss)의 지적인 세계관에 근거를 마련해줬다. 엘리야데는 <영원한 회기의 신화>(1949년)라는 책에서 ‘신화적인 사고’는 순환적이며 일상의 사건들은 원시적인 시간 유형의 반복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역사적인 사고’는 사건들을 과녁을 향해 달려가는 화살처럼 위반, 혁신 혹은 변화로 해석한다.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이 두 가지 시간관을 통해 ‘뜨거운’ 사회와 ‘차가운’ 사회로 구분한다. 뜨거운 사회는 역사를 통해 변화를 추구하며,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 삼는다. 반면에 차가운 사회는 사건을 탈-역사화해 일상적인 시간 밖에서 운행된다. 그 대신 특별한 기관들을 설립해 역사의 변천이 그 사회의 균형과 지속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는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차가운 사회’는 무엇이 부족한 사회가 아니라 특별한 지혜를 지닌 기관들이 작동하는 사회다.

기원전 9000년경 신석기시대 인류는 선형적인 시간을 믿지 않았다. 자연은 1년을 단위로 영원히 순환적으로 반복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생존을 보장한 농업과 유목은 순환적 시간을 반복하는 자연의 선물이다. 그들은 레비스토로스가 정의한 ‘차가운 사회’에 거주하며, 의례를 통해 시간을 정지시키고, 우주 안에서 자신들의 존재의미를 찾았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기 위해,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을 죽음과 영생,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마술이라고 여겼다. 20세기 러시아의 문학이론가이자 사상가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은 어떤 사건을 통시적이며 동시에 동시적인 시간관으로 다루는 방식을 ‘크로노토프(Chronotope)’라고 불렀다. 시간 안에 일어나는 사건은 자신이 거주하는 장소와 문화의 특성 안에서 토착적으로 해석된다.

기원전 9000년경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유럽에 거주하던 인류는 남하해 오늘날 터키, 시리아,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구석기를 마치고 신석기시대를 시작한 인류는 이미 궤베클리 테페에서 1년에 한 번씩 모여 공동의례를 드렸고, 보리·밀·귀리 등을 실험적으로 재배했다. 인류는 이제 먹을것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한 곳에 정착해 자연의 흐름에 따라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곳에 정착하며 거주하면서 공동체적인 의식이 필요하게 된다. 이 공동체적 의식은 그들을 하나로 묶는 문화의 끈으로, 혈연과 지연을 더욱 더 강화하며, 때로는 혈연과 지연을 넘어선 공동체를 구축하는 힘이 됐다.

 

 공동체의식을 ‘기억’이라 부른다. 기억은 개인과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자신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도와주는 기능이다. 인류는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과 사회구성원들과의 소통을 통해 공동의 기억을 만든다. 프랑스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Maurice Halbwachs)은 사회 일원으로서의 기억을 연구했다. 기억은 인간들을 공동체 안에서 거주할 수 있는 끈이며,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공동기억을 구축하는 행위다. 심리학자 칼 융이나 프로이트는 개인적인 기억탐구를 통해 인간 심리의 집단 무의식 세계의 역동성을 연구했지만, 공동체 일원으로 사는 사회적인 기억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 Aby Warburg, 1866~1929)는 개인의 기억이나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억이 아니지만, 이것을 내포하면서도 초월하는 기억을 소개한다. 바로 ‘문화적 기억’이다. 그는 한 집단이 지닌 이미지를 기억을 담고 있는 문화적 대상으로 설명한다. 그는 주로 서양 고전시대의 사후세계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런 문화적인 기억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홉 뮤즈의 어머니인 ‘므내모시네(Mnemosyne)’라고 불렀다. 바르부르크가 주창한 문화적 기억은 그림을 기반으로 한 ‘빌드게데크니스(Bildgedächnis)’로 시작했지만, 다른 모든 상징적인 형태를 분석하는 틀이 됐다.

< 시공간이 융합하는 지점과 ‘문화적 기억’

 

예리코(Jericho)는 인류가 구축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에 하나다. 이 문장에서 ‘도시’란 기획된 공간에서 혈연을 넘어선 공동체가 한 세대 이상 지속적으로 거주한 인위적인 구조를 이른다. 예리코는 사해에서 북쪽으로 10㎞ 떨어진 요르단 평원에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도시로 주변은 사막이지만, 이곳은 풍부한 지하수 공급으로 대추야자나무 숲을 이루었다. 예리코는 1949년부터 1967년까지는 요르단이 치리(治理)하다가 1967년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여 점령했다. 1994년 다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넘겨졌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20개 이상의 연속적인 거주지 지층을 발견했는데, 이 지층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9000년이다.

예리코는 히브리 원어 ‘에리호(Yericho)’에서 유래했다. 히브리어 ‘에리호’에 대한 어원 설명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히브리어에서 ‘향기가 나는’이란 의미를 지닌 ‘레아흐’ 어원설이다. 예리코는 대추야자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는 오아시스가 여러 개 있어, 중동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향기가 나는’ 지역으로 불릴만하다. 다른 하나는 ‘달’을 의미하는 ‘야레아흐’ 혹은 달 신인 ‘야리흐’에서 왔다는 어원설이다. 예리코는 예로부터 달 신을 섬기는 도시였다. 달은 농경민과 유목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천체로 그들의 숭배대상이 됐다.

예리코가 서양인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이유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 정착할 곳을 찾기 위해 정탐꾼들을 예리코로 보낸다. 예리코는 난공불락의 성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은 예리코성 주위를 하루에 한 바퀴씩 7일 동안 행군했다. 마지막 날 사제들이 나팔을 불자, 이스라엘인들이 소리 질러 ‘기적적으로’ 성벽을 허물었다고 전한다.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도왔던 창녀 라합과 그녀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예리코 성 거주민이 죽었다고 기록한다.

성서를 기록한 고대 이스라엘 작가는 왜 이런 소설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왜 그는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정착하는데, 예리코성 함락을 중요한 사건으로 다뤘을까? 서구인들이 성서를 기반으로 형성한 예리코에 대한 문화적인 기억은 실제 고고학 발굴로 수정되기 시작했다.

예리코를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한 고고학자는 찰스 워렌(Charles Warren)이다. 그는 1868년 성서에 등장하는 예리코 성 이야기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 후 영국 고고학자 캐슬린 케년(Kathleen Kenyon)이 현대적인 고고학 기법을 사용해 발굴했고, 그 후에는 이탈리아-팔레스타인 합동 고고학 팀이 1997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20년 동안 현장에서 발굴과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인류는 아직 사냥-채집으로 연명하던 기원전 1만 년 나투피아 시대부터 이곳에 정착했다. 그들은 자신이 실험하던 야생재배를 그만두고 ‘신드리아스기’(기원전 1만 800~기원전 9500년)’의 소빙하기를 맞이해 한 곳에서 정착하기를 포기하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들은 ‘아인 에-술탄(Ein es-Sultan)’ 오아시스에 종종 들려 먹을 것을 찾았다. 이 오아시스가 후에 예리코가 되었다. 나투피아인들이 이곳에 자신들이 사용하던 반달모양을 한 3㎝ 미만의 세석기(細石器)를 남겼다. 신드리아스기가 끝난 기원전 9500년에 인류는 이곳에 일시적인 정착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정착했다.

< 고대도시 ‘예리코’의 성벽과 망루 >

 

예리코 성벽은 기원전 8000년경에 구축됐다.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를 농업은 시작했으나 아직 토기를 제작하지 못한 선토기(先土器) 신석기시대(PPN, Pre-pottery Neolithic)라고 부른다. 이 성벽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요새’다. 다듬지 않는 커다란 돌들을 쌓아 올렸다. 케년은 예리코 성벽을 탄소연대측정법을 사용해 기원전 7825년의 것으로 측정했다. 이 성벽은 소위 PPNA시대에 속하는 도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성벽은 2000명에서 3000명이 함께 거주하는 신석기시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벽이다.

예리코 성벽의 주요 용도는 외부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 요새가 아니다. 이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장소로 비가 올 때 생기는 수로인 와디(wadi)의 물이 자연스럽게 몰리는 장소다. 또한 지구는 마지막 빙하기를 마치고, 아직 관개작업을 통해 다양한 수로를 개발하지 못해, 항상 홍수의 위험이 있었다. 예리코 성벽은 홍수를 막고 그 안에 사는 거주자들을 위한 의례장소로 건축됐다. 성벽은 두께가 1.5m에서 2m, 높이가 3.7m에서 5.2m다. 성벽은 예리코 주변 600m를 둘러싸고 있다. 물론 외부인들의 침투를 막기 위한 방어벽으로 사용됐다. 이와 같은 거대한 성벽은 계급과 노동의 분화를 통한 정교한 구성원들의 소통과 협동 없이 불가능하다. 예리코는 성벽보다 500년 앞선 기원전 8500년에 형성된 2.5 헥타르 크기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진흙벽돌로 만든 집들이 있었고 거리는 아직 조성되지 않았다.

예리코 성안에는 높다란 망루가 있다. 이 망루는 다듬지 않는 돌을 이용해 건축됐고, 그 안에는 22개 계단이 있다. 원뿔형으로 생긴 망루는 바닥 지름이 9m, 꼭대기 지름이 7m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자 란 바르카이와 로이 리란은 이 망루가 천문학적이며 사회통합적인 기능을 지녔다고 분석했다. 근처 산맥의 그림자가 하지(夏至)에 정확하게 망루에 떨어지고, 그 후에 마을 전체에 그늘을 드리운다.

 

예리코인들은 자신의 생존 기반인 사냥과 채집을 버리고, 농업을 주업으로 택하는 과정 중에 망루를 건설했다. 혈연적으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한 곳에 거주하면서 계급이 등장하고 통치자가 등장했다. 몇몇 사람은 농업을 통한 잉여생산물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바르카이는 인위적으로 세운 망루가 드리운 그림자는 예리코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경외심과 영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마치 파리에 있는 에펠탑이나,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보는 사람에게 자신들이 한 공동체의 소속이며, 그 공동체의 공공이익을 위해 참여하겠다는 충성심을 강화해 줬다. 사냥채집경제에서 노동집약적인 농업정착경제와 사회계급의 탄생이라는 급변한 환경에 적응하라는 일종의 상징이라고 해석했다. 이 망루는 기원전 8300년경 건축됐고 1만1000일 이상, 즉 30~4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동원돼 완성됐다.

< 예리코의 매장방식과 장례의식

 

예리코 안에 조성된 언덕인 텔 에스-술탄에는 인류 최초의 영구 거주지가 PPNA(기원전 9500~8000년)에 등장한다. 이 마을들은 조그만 원형을 형성한 가옥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야생동물들을 사냥했고, 야생 곡식과 재배 곡물을 수확했으며 아직 토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특이한 점은 이들의 시신매장 방식이다. 그들은 자기 가족의 시신을 그들이 사는 거주지 마루에 매장하고 그 위에 회칠로 덮었다.

PPNB(기원전 7220~5850년) 시기의 예리코는 PPNA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몇 가지 특징이 등장한다. 그들은 다양한 식물을 재배하고 특히 양을 사육해 삶에 필요한 필수품들을 얻는 자원으로 사용했다. 이들에겐 특별한 장례풍습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유골을 보관, 회칠을 통해 얼굴 모양을 복원하고 조개껍데기를 이용해 눈을 장식했다. 고고학자 캐년은 PPNB 예리코인들은 시신을 회칠한 마루 밑에 매장했다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해 증명했다. 시신이 분해된 후에, 해골 혹은 아래턱이 없는 두개골을 매장한 장소에서 떼어냈다. 수많은 해골과 두개골이 다양한 방식으로 보관됐는데, 이들 중 몇몇은 회칠되거나 다양한 색이 칠해졌다.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지역에서 이 시기에 61개의 회칠된 해골이 발견됐다. 고고학자들은 성별이나 나이를 알 수 있는 회칠된 해골 외에는 다른 뼈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캐년은 예리코에서 발견된 해골들을 나이가 든 남성이나 통치자로 해석했다. 그녀는 이 장례풍습을 ‘조상 숭배(ancestor cult)’의 증거로 제시하였다. 예리코인들은 이 지혜로운 통치자의 지혜가 그 공동체 안에 지속적으로 거주하기를 희망했다.

인류는 이제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특별한 의식을 통해 ‘기억’과 ‘망각’을 상징적으로 간직했다. 북 아일랜드의 시인 셰이머스 히니(Seamus Heaney)는 <과거라는 감정(The Sense of the Past)>이라는 책에서 과거의 유산의 소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과거 유산의 소유가 단순히 물건, 항목, 혹은 목록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기억과 소속감이라는 공동 감정으로 진입할 때 생긴다.”

인류학자 이안 쿠이트(Ian Kuijts)는 신석기시대 예리코인들은 공공의례를 통해 공동체 정체성과 기억을 구축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장례의례, 반복적인 이미지와 작은 인형의 사용, 그리고 해골과 두개골의 사용과 재사용은 생존한 사람들을 죽은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정교한 기술이다. 시신에서 해골들을 분리해 다시 장례의식을 치르고, 그 해골을 회반죽이나 색감으로 칠하여 의례적인 유산으로 보관하는 행위는 그 죽은 자를 공동체 안에서 기억하고 동시에 망각하는 행위다. 그리고 해골들을 다시 한곳에 모아두는 행위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초월해 그 죽은 자가 과거의 일부이면서 앞으로 이곳을 유입될 미래의 일부가 된다.

한 예리코인이 죽으면, 그의 직계가족은 1주일 안에 첫 장례를 거행했다. 그런 후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는 두 번째 장례를 또다시 치렀다. 죽은 자는 이제 한 가족의 일원일 뿐만 아니라, 예리코 마을 전체의 일원이 된다. 사람들은 이 두 번째 장례에서 시신을 사적인 장소에서 공적인 장소로 이동해 매장한다. 이 두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은 예리코 마을이라는 커다란 공동체의 신념체계 안으로 편입된다. 예를 들어 두 번째 장례에서 사람들은 유골에서 모든 살을 발라내며 두개골을 분리한다. 이 의례는 마을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 중요한 마을 의례이다. 참여자들은 이런 행위들은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개인적인 의미를 지닌 영적이며 상징적인 행위로 수용한다. 두 번에 걸쳐 거행되는 장례는 다음과 같이 여섯 단계를 통해 거행된다.

첫 단계는 직계가족이 행하는 첫 번째 장례식이다. 가족의 일원이 죽으면, 1주일 내로 장례를 거행했다. 직계가족과 가까운 친척 그리고 장례를 치르는 동네 연장자가 참여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첫 번째 매장의례다. 시신은 그 죽은 자가 살던 거주지 마루 아래에 묻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마루를 회칠하고 시신이 있는 자리, 특히 두개골이 있는 위치를 표시했다. 시신을 죽은 자가 거주했던 마루에 매장하는 행위는 삶과 죽음,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신앙표현이다.

< 두 번에 걸쳐 거행되는 장례의 여섯 단계

 

세 번째 단계는 몇 년 후 유골을 파내는 행위다. 직계 가족, 의례 집행자, 그리고 동네사람들은 죽은 자의 거주지에서 시신을 꺼내 모든 살을 깨끗이 제거한다. 세 번째 단계는 살이 거의 없어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망한 지 수년이 지난 후 거행됐다. 이 단계에서 두개골을 다른 부분과 분리하고, 두개골을 제외한 다른 유골들은 다시 매장해 회반죽으로 덮는다. 해골을 다른 부분과 분리하는 행위는 죽은 자가 개인으로 죽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변하기 위한 준비다. 이들은 직계가족의 개인기억에서 이동해 마을 전체의 기억 속으로 이동할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분리된 해골을 색칠하고 회반죽으로 장식한다. 특히 눈 부분은 조개껍질을 이용해 표시한다. 이 단계는 두 번째 장례를 치르기 위한 예비 의식이다. 해골을 장식하는 행위는 개인으로 살았던 죽은 자가 이제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스스로 변신하고 준비하는 과정이다. 해골을 회반죽을 통해 죽은 자의 얼굴을 다시 만드는 행위는 시신을 부활 시키려는 상징이다. 이들은 회반죽을 통해 죽은 자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다시 만들었다. 특히 진흙으로 눈, 귀, 입 그리고 다른 얼굴 모습을 물감을 이용해 그려 넣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의례에서 재창조된 죽은 자의 얼굴 모습을 관찰해 기억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죽은 자를 자신들이 참여해 관찰한, 회반죽돼 재창조된 얼굴로 기억한다. 이 재창조된 얼굴은 새롭게 태어난 개인이거나 무명의 조상이 된다. 이 당시 발굴된 해골들을 보면, 그 생김새가 다르다. 사실 회반죽된 얼굴은 실제 얼굴의 재현이라 기보다는, 정형화된 추상이다. 그러므로 이 해골들은 개인으로 존재했던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았고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조상으로 변한다.

이 단계를 거치면, 다섯 번째 단계인 마을 전체의 공공 장례의식을 거행한다. 이제 죽은 자의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죽은 자의 장식된 해골이 전시됐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자가 개인이 아니라 커다란 사회의 일원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한 가족이나 일족의 일원이 아니라, 농업의 발견으로 모인 마을의 일원으로 재탄생한다. 그런 후 마지막 단계인 여섯 번째 단계로 진입한다. 마을 지도자는 모든 마을사람이 모인 가운데, 죽은 자의 해골을 중앙 공동체 창고에 묻는다. 이곳은 마을에 살던 죽은 자들의 해골을 보관하는 장소다.

< 공동체 구축을 위한 ‘기억과 망각’

 

두 번째 장례의식은 직계가족의 입장에서는 망각의 과정이고, 마을 공동체 입장에서는 기억의 과정이다. 시신에서 해골을 분리해 장식하는 행위는 마을 사람들에게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기억을 깊이 심어놓은 행위다. 이 반복된 장례를 통해 마을 사람들은 삶은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는 영원한 회귀이며,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초월한 ‘거룩한 시간’을 경험한다. 죽은 자가 현재 살아있지는 않지만, 그들이 과거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다시 탄생한 자들과 살아 있다. 이 두 번째 장례가 바로 조상 숭배 의식이다. 그 장례가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 있지만, 그들은 공동체 조상의 일원이 된다.

개인의 정체성을 지우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재생하는 과정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기억을 정교하게 재구성하는 행위다. ‘문화적 기억’은 개인의 기억을 망각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첫 번째 매장된 장소에서 시신을 의도적으로 파내 살을 발라내고 해골을 분리하는 행위는 새로운 공동체의 기억을 구축하려는 시도다.

신석기시대 예리코의 성벽, 망루, 그리고 두개골을 분리해 한곳에 저장하는 정교한 장례의식은 인류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로 살아가려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노력이다. 두개골 분리의식은 인류가 기억과 망각이라는 장치를 통해 문화기억을 의도적으로 구축함으로써 문명사회로 도약하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