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23)] ‘거주하는 인간’ 호모 하비투스(Homo Habitus)
<< 인간문화의 기초, 가옥(家屋) >>
터키의 기원전 거주지 ‘차탈휴윅’은 신석기시대 인류 문화의 중심…인간은 가옥에 거주하면서부터 집안에서 살아가는 동물로 진화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인간은 자신이 사는 장소다. 자신이 거하는 장소가 그 사람의 인격을 만든다. 습관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해빗(habit)은 한 사람을 규정하는 그 사람만의 습관(習慣)인 동시에 그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場所)다. 인간은 이제 한 곳에 정착해 자신이 점령한 장소를 가옥으로 꾸며, 인간다운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차탈휴윅(Çatalhöyük)은 기원전 7500년에서 기원전 5700년까지 존재했던 신석기시대 거주지다. 오늘날 터키 중부 콘야(고대 이코니움) 근처에 위치한 차탈휴윅은 ‘도시’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대규모 마을이다. 이곳은 화산으로 형성된, 두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은 하산산(3268m)으로부터 140㎞ 떨어져 있다. 인류는 이제 직계가족이나 친족을 넘어서 자신과 혈연과 지연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방인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기원전 7000년경 차탈휴윅에 거주한 이들이 남긴 가옥 터들을 근거로 8000명 정도의 인구가 200호 정도의 가옥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인류는 기원전 9500년, 인류가 아직 농업을 발견하기 전에, 궤베클리와 같은 장소에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지역에서 온 다른 인간들과 교류해 함께 의례를 지냈다. 그들은 매년 동일한 시간에 한 곳에 모여 동물 희생 제사를 드렸다. 함께 모인 이들이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 종교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로 묶어줄 초월적인 신을 상상하고, 이 신에 대한 정교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이야기가 이들을 하나로 묶는 거룩한 끈이 됐다.
이들이 제한된 공간에서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다양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한 곳에 정착해 사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 인류는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지켜오던 사냥-채집이라는 생활방식을 수정해 농경-정착생활을 시작한다. 최근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학자는 비어 고든의 ‘신석기혁명’ 이론에 기초해, 농업이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촉발시킨 절대적인 출발점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궤베클리 신전과 그곳에 남겨진 수만 개의 동물 뼈는 인류가 함께 모여 의례를 행하면서,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하고 후에 등장한 문화와 문명의 근간이 되는 ‘농업’이란 기술을 터득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8000년경으로 추정되는 팔레스타인의 오래된 성벽이 있는 여리고에서 발견된 정교한 장례문화는, 동일한 장소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공동의 기억과 그것을 기념하는 의례가 문명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차탈휴윅은 인류가 사냥-채집 생활에서 점차로 동물을 사육하고 식물을 재배하는 생활로 이주해, 이제 한 곳에 모여 사는 인류 최초의 마을인 것이다. 이들이 정착생활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상징’들은 그림과 조각과 같은 예술로 등장했다.
<차탈휴윅의 첫 발굴자 제임스 멜라르트>
영국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르트(Jame Mellart, 1925~2012)은 1958년 차탈휴윅의 고고학적 가치를 감지하고 1961년부터 1965년 사이 고고학 발굴팀을 이끌고 네 계절 동안 발굴을 주도했다. 그는 차탈휴윅이 신석기시대 문화의 중심이란 사실을 밝혔다. 그는 이곳에서 18개나 되는 연속적인 고고학 지층을 찾아냈는데, 이 지층들은 기원전 7500년에서 기원전 5600년 것으로 측정됐다. 그들은 이곳에서 150개 이상의 붙어 있는 가옥을 발굴했다. 이 건물들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정교한 벽화, 석고 부조, 그리고 조각들로 장식돼 있었다. 인류가 이제 자신의 집을 장식하는 취미(趣味)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취미가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멜라르트는 차탈휴윅을 대모신(大母神) 숭배의 기원이자 중심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일부 학자와 여성주의자들이 그의 주장을 수용했지만, 다른 고고학자들은 멜라르트의 성급한 주장을 근거 없다고 폄하했다. 멜라르트는 학자들의 반론을 무마하기 위해, 무리하게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 논란의 중심이 됐는데, 이것이 바로 ‘도락 사건(Dorak Affair)’이다. 이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멜라르트가 1958년 이스탄불에서 이즈미르(Izmir)로 가는 열차에서 우연히 자신의 앞자리에 앉은 안나 파라스트라티라는 그리스 출신 여인을 만난다.
그녀가 찬 황금 팔찌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 팔찌가 고고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유물이라고 직감해 기차에서 처음 만난 여인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그녀는 집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물을 보여주었는데, 멜라르트는 그녀가 보여준 그 보물들이 이집트 투탄카멘 보물의 발견과 견줄 만한 중요한 발견이라고 확신, 그 집에 며칠간 거주하면서 유물들을 스케치했다. 그리고는 이 사실을 영국 주간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알렸다. 터키당국은 멜라르트가 터키에 이 유물에 관해 알리지 않고, 외국으로 밀수해 나갈 것이라고 의심했고, 멜라르트의 터키 입국을 금지시킨다. 도락 보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사건으로 멜라르트가 발굴 중인 차탈휴윅은 1990년대까지 무려 30년 동안 고고학 발굴이 중단됐다.
이후 영국 고고학자이자 스탠퍼드 대학 교수인 이안 호더(Ian Hodder, 1948~)가 1990년에 차탈휴윅을 다시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발굴한 가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동물의 사육과 식물 재배를 통해, 인간도 점점 야외생활이 아니라 가옥 안에서 생활하여 그것에 익숙해지는 동물로 점점 ‘사육됐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안 호더의 이런 주장을 이전 고고학 이론인 ‘신고고학’ (혹은 ‘과정고고학’)과 구별해 ‘후기 과정고고학’이라고 부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고학 유물을 해석하는 이론은 ‘과정고고학’이었다. 과정고고학은 1958년 고돈 윌리와 필립 필립스가 <미국고고학의 방법론과 이론>이란 책에서 “미국 고고학은 인류학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선포하며 시작됐다.
고고학의 목표는 인류학의 목표와 동일하다. 인간과 인간사회에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를 대답하는 것이다. 과정고고학 이전의 근대 고고학자들의 목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과거의 인간들과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정보축적이었다. 과정고고학자들은 이유물들을 통해 그것을 사용한 과거 인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탐구했다. 그들은 고고학을 통해 과거 사회, 그들의 기술, 그들의 경제적인 기반, 그리고 사회 기관과 환경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유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질문화를 가능하게 한 비가시적인 정신문화를 정교하게 유추하기 위해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의 ‘연역적 가설검증법’을 원용했다. 그들은 특정한 문제와 관련된 가설을 예상해 세우고, 자신들이 발굴한 고고학적 자료를 연역적으로 분석했다.
‘후기 과정고고학’ 정립한 이안 호더의 재발굴
이언 호더와 일련의 고고학자는 1980년대 고고학을 인류학으로부터 독립시켰을 뿐만 아니라, 과학에서 빌려온 연역적 가설검증법을 버리고, 독립적이며 독창적인 고고학적 방법론을 찾아 나섰다. 그는 이 새로운 고고학적 이론을 ‘후기 과정고고학’이라고 불렀다. 이안 호더는 신고고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고고학적 해석이 과학처럼 객관적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이 발굴하고 제시한 유물들을 자신의 독특한 시선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세계관과 편견을 유물해석에 사용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안 호더는 한걸음 더 나아가, 고고학자들이 자신과는 다른 인종들의 선 역사에 대해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인종주의, 식민지주의, 그리고 엘리트주의를 숨기고 있었던 이전 고고학 이론에 대한 야심 찬 공격이었다.
이언 호더는 집이 사람들을 제한된 공간인 ‘도무스(domus, 가옥)’를 통해 ‘사육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야생’(아그리오스, agrios)에 있는 동식물이 사육과 재배를 통해,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쪽으로 진화된 것처럼, 사람도 가옥 안에서 거주하면서, 스스로를 사육시켰다고 본다. 호더는 멜라르트가 1961~1965년에 차탈휴윅을 발굴한 후, 거의 30년 만인 1993년에 발굴을 시작했다.
차탈휴윅엔 거리나 골목이 없다. 가옥들이 모두 붙어 있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붕에서 이웃의 지붕으로 걸어 다닌다. 각 가옥은 옥상에 마련된 구멍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집 안에 마련된 사다리를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 이동한다. 지붕이 실제 거리다. 지붕에 뚫린 구멍이 유일한 공기순환 시설이다. 가옥 안은 모두 회칠됐고, 가파른 사다리가 지붕에 연결돼 있다. 가옥의 남쪽 벽에 요리를 할 수 있는 화로와 난로가 있다. 중앙 방들은 다양한 가족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주위보다 융기돼 있다. 가옥 안의 신전인 셈이다. 일반적인 가옥엔 음식을 하는 부엌과 수공예를 위한 공작실이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의 방들이 모두 깨끗이 정돈돼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가옥 안에 쓰레기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이 집들은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경제, 사회 그리고 의례의 기본 단위다. 호더는 이곳의 집들을 ‘신전들’과 ‘가옥들’로 구분했다. 거주자들은 신전들에 모여 공동의례를 위한 음식을 장만하고, 의례 후에 함께 식사를 하고, 의례를 위한 성물(聖物)이나 성물을 다듬기 위한 근처 화산(火山)인 하산산이나 멀리 카파도기아에서 수입한 흑요석(黑曜石)을 다듬거나 혹은 동물의 뼈를 가공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이곳의 거주자들은 개인생활뿐만 아니라 공동의례조차 건물 안에서 거행했다. 예를 들어 집 안에서 흑요석을 다듬은 흔적과 흑요석을 보관한 은닉장소가 발견됐다. 모든 가옥은 진흙으로 만든 쓰레기 저장통이 있다. 또한 음식을 장만하기 위한 화덕과 난로가 마련돼 있다.
그들은 시신들을 마을 근처에서 매장한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유골을 추려내 마루 밑에 다시 매장했다. 두개골은 종종 분리해 살아있는 사람처럼 장식했다. 많은 가옥이 죽은 자를 6명에서, 많은 경우는 60명까지 자신의 집안에 매장했다. 이 매장 규모는 거의 차이가 없어, 아직 경제적인 차이나 성별간의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오직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구슬로 장식하고 몸은 황토로 칠해졌다. 아이들의 시신을 이렇게 특별하게 취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류는 정착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노동, 가족 그리고 유산이란 개념이 중요해졌다. 어린아이들은 이런 개념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개인 가옥은 또한 예술작품과 의례의 중심이었다. 모든 가옥은 예술작품이나 의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장 검소한 가옥조차 벽에 기하학적인 모형을 표시했다. 각 가옥은 생계와 공동생활을 위한 최 전선이다. 나중에 등장하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신전이나 왕궁으로 사용되는 큰 건물이 나머지 건물과 그 안의 거주자들을 다스리는 주종관계가 뚜렷하다. 그러나 차탈휴윅에서 대규모 모임이나 의례를 행한 중앙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리고를 제외하고, 이 당시 다른 신석기 거주지에는 대규모 모임이나 의례를 행하는 장소가 없다. 가장 큰 건물은 20~30명만 수용할 수 있다. 나중에 등장하는 왕이나 통치자가 의례를 주제하고 사회규율을 정한다.
그러나 차탈휴윅 지도자들은 매일매일 가옥 안에서 일어나는 반복적인 일과를 관장하는 자다. 그들이 가옥 안에서 생존에 관련된 반복적인 행위는 그들의 하비투스(habitus)가 되고 그들이 지켜야 할 도덕이 된다.
차탈휴윅 사람들은 시신들을 매장하기 전에 단단히 묶고 종종 커다란 바구니나 갈대로 만든 멍석 위에 놓았다. 몇몇 무덤에선 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시신을 야외에 한동안 노출시킨 후 뼈를 추려 매장했다. 여성의 무덤에는 물레바퀴가 발견되고 남성의 무덤에서는 돌로 만든 도끼가 발굴됐다. 그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자신들의 삶을 조절하는 신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신앙관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유물은 ‘앉아 있는 여신상’이다.
대모신은 자연, 모성, 풍요, 창조를 상징하는 여신이다. 대모신은 지구 혹은 자연세계와 동일하게 여겨져 ‘대지의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한다. 19세기 스위스 법제사가이자 신화학자였던 요한 야콥 바코펜(1815~1887)은 고대 그리스 신화 속 모계사회를 기반으로 한 자연법이 후대 로마시대에 부계사회를 중심으로 한 시민법으로 전환되었다는 단선적인 진화 모델을 제안했다. 이 여신상의 발견으로 인류가 처음에는 모계사회였다는 가설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모계사회’ 지배한 여신으로 이해한 멜라트르>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이며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0)는 마르크스와 함께 과학적 공산주의 이론과 유물론의 창시자다. 그는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이란 책에서 가부장제는 농업과 사유재산의 성공으로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남성들은 토지, 동물, 여성들에 대한 소유권을 장악해 여자라는 성을 역사적으로 퇴출시켰다. 일부 여성주의 학자는 과거의 평화로운 모계-농경사회가 호전적인 부계-유목 사회로 대치됐다고 주장했다. 리투아니아 출신 미국 고고학자 마리아 김부타스(Marija Gimbutas, 1921~1994)는 고대 유럽문화의 모계기원을 기초로 한 ‘쿠르간 기원설’을 주장했다.
비어 고든의 ‘농업혁명’ 이론이 아직 고고학계의 정설이었고, 차탈휴윅을 처음 발굴한 멜라르트는 자신이 발굴한 ‘차탈휴윅의 앉아 있는 여신상’을 그 모계사회를 지배하는 여신으로 해석했다. 이 작은 조각상은 왕좌에 좌정한 풍만한 여인상이다. 왕좌 옆에는 커다란 표범이 앉아있다. 이 여인은 출산을 하려는 모습이다. 그는 이 동상이 1908년 오스트리아 남부에 조그만 마을인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기원전 2만8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11㎝에 불가한 작은 조각상도 풍요와 다산을 강조하기 위해 커다란 가슴과 불룩한 배, 그리고 두툼하고 넓은 엉덩이를 가지고 있다. 멜라르트와 당시 많은 학자에게 이 조각상의 모습은 단순히 신체적이며 상징적인 의미 이상이었다. 이 조각상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대모신’ 이론에 대한 실증이었다.
멜라르트는 대리석, 파란색과 고동색 사암, 편암, 방해석, 현무암, 설화석고, 진흙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만든 여성상은 대모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차탈휴윅의 18지층 가운데 첫 번째 5지층에서 신전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여신상이 많이 출토됐고, 6지층 이상에서는 여신상들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추수와 풍요를 관장하는 여신이 양 옆으로 두 마리 암사자와 함께 ‘앉아 있는 여신상’이 곡식 저장통에서 발견됐다.
이안 호더는 차탈휴윅 전체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호더 발굴팀은 차탈휴윅의 18지층을 모두 발굴했다. 이 지층들은 중간에 단절이 없는 1200년간의 연속적인 거주 지층이다. 그들은 엥겔스나 멜라르트가 주장한 모계중심이나 대모신의 물질적인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호더는 차탈휴윅이 남녀의 차별이 없는 진정한 남녀평등사회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후기과정고고학의 방법론에 의거해, 이곳에서 발굴된 남성들의 유골과 여성들의 유골의 건강상태와 그 환경을 조사했다. 차탈휴윅에 거주하던 남녀는 건강상태가 대동소이했고, 동일한 노동에 종사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야외에서 노동하며 지냈다.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동일한 공간에서 거주했고, 사후에도 동일한 장례절차를 밟아 매장됐다. 이곳은 성차별이 없는 평등사회였다.
인류는 오랫동안 도시문명과 정치는 남성들이 구축한 것이며, 여성들은 그것을 보조하는 도구로 여겨왔다. 역사, 종교, 과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여성주의’는 자연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믿어왔다. 특히 종교에서 남성주의는 오늘날까지 팽배해 있다. 아직도 몇몇 종교에서는 여성이 사제나 종교의 수장이 될 수 없다.
<망자의 상징물, 부적으로 해석한 이안 호더>
호더는 이 조그만 조각상을 멜라르트와는 전혀 다르게 설명한다. 이 조각상에는 머리 부분이 남아있지 않다. 이 조각상을 뒤에서 보면, 팔이 매우 가늘고 등은 뼈가 보일 정도로 매우 말랐다. 이 동상은 한 여인이 죽음을 경험하면서 죽은 조상이 되는 과정에 대한 표현이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경계를 묘사했다고 봤다. 이와 유사한 여러 점의 조그만 조각상은 신전이 아닌 쓰레기 통, 화롯가, 벽, 그리고 마루 혹은 버려진 구조물에서도 출토됐다. 이 조각상은 신전에 올려진 거룩한 물건이 아니라, 나쁜 기운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제작된 일종의 부적(符籍)과 같다고 보았다.
호더의 동료 고고학자 린 메스켈(Lynn Meskell)은 차탈휴윅에서 발굴된 이 조각상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녀는 이 풍만한 작은 조각상들은 의례의 대상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거의 모든 조각상이 한 번 쓰고 유기됐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적처럼 목걸이 장식으로 차고 다녔을 것이다. 이 모형들은 아마도 차탈휴윅의 존경받는 할머니들이었다. 조각에 표현된 몸은 젊지 않다. 배가 가슴이 임신한 젊은 여성의 몸이 아니라, 나이든 노인의 몸이다. 이들은 오히려 지혜롭고 나이가 많은 여인들이다.
차탈휴윅과 같은 평등사회에서 노인들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며 존경받는다. 이들은 차탈휴윅의 지도자들로 전체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 의례를 거행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이 여인의 풍만은 사회적 지위와 노년의 상징이다. 이런 지위의 등장은 인류가 모든 재산을 공유하는 공동체에서 중요한 재화를 교환하는 공동체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인류는 정착하면서 자신이 축적한 부를 이용해 자신이 필요한 재화를 구입,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인간사회는 차탈휴윅 이후에 점점 더 불평등사회가 됐다. 자신들이 사는 가옥들은 점점 다른 가옥과 떨어져 독립화됐다. 그 이유는 농업이 가져다준 잉여생산과 이웃 마을이나 지역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계급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언 호더는 메스켈과는 약간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이 조각상은 평등사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계급사회가 됐다는 증거다. 차탈휴윅은 기원전 7500년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5700년에 폐허가 됐다. 이 조각상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영매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차탈휴윅에서는 죽은 자들의 시신이나 뼈를 자신들이 사는 가옥의 마루에 매장하고 회칠해 살았다. 그들이 사는 지상은 산 자를 위한 공간이고 지하는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다. 그러나 차탈휴윅의 후기 가옥에서는 죽은 자들의 유골이 발견되지 않는다. 호더는 이 조각상들은 죽은 자들을 대신한 상징물이라고 해석한다.
<동물 뼈를 이용한 장식이 예술의 탄생>
차탈휴윅 가옥 장식의 특징은 동물의 뼈를 이용한 장식이라는 것이다. 황소 뿔, 동물의 두개골, 치아, 새부리, 큰 동물의 어금니 등이 벽이나 마루 위에 장식됐다. 고대 차탈휴윅인들은 자신이 동물들을 사냥한 후, 동물의 가장 위협적인 무기들인 뾰족한 뼈들만을 집으로 가져왔다. 우리는 이들의 동물 뼈 장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 단서는 동물의 성격과 종류 분류에서 나온다.
차탈휴윅의 가옥 장식이나 벽화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아직 사육되지 않는 야생동물이다. 이들의 음식 쓰레기는 대부분 야생 황소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길들이고 싶은 사나운 동물들을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이 동물들은 동시에 차탈휴윅인들의 주식이었다. 이들이 농업 기술을 발견했지만, 대규모 생산을 위한 수로를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여전히 사냥-채집으로 연명했다.
이들 중 가장 놀라운 장식은 많은 가옥의 안방에서 황소 두개골 장식(bull bucrania)이 종종 발견된다는 것이다. 황소의 양 뿔이 가옥의 공동 장소를 향하도록 벽에 장식돼 있다. 이 뼈들은 종종 붉은 황토로 칠해져 있다. 황소 뿔은 후대 히타이트,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란 문명의 가장 중요한 신의 상징이 됐다. 이 당시 생존했던 야생 황소는 몸무게가 700㎏에서 1500㎏, 키가 180㎝, 그리고 뿔의 길이가 80㎝ 정도 되는 야생동물의 최강자였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이 황소를 만난 경험을 수메르 문자로 ‘메’(수메르문자 )라고 표현했다. ‘메’는 황소 뿔이자 신성을 의미한다.
차탈휴윅인들은 황소 뿔을 자신의 가옥 안에 장식해 이 야생동물이 가진 초월적인 힘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차탈휴윅은 인간이 가옥 안에 거주하면서 인간을 집이나 건물 안에서 생존하는 동물로 진화시켰다. 인간은 가옥 안에서 야생의 무시무시한 동물의 일부를 장식하면서 예술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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