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을 꿰뚫는 단 하나의 법칙, 그 열쇠는 수학?
김대식의 'Big Questions' <12> 인간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나
‘과학을 통해 베일이 벗겨지는 자연의 여신’, 루이 에르네스트 바리아스(Louis-Ernest Barrias)의 조각, 1899. [위키피디아]
“Hotos Estin!.”
플라톤마저도 ‘어두운 철학자’라며 어려워했던 파르메니데스의 말이다. ‘존재는 하나다’ 또는 ‘존재는 그냥 존재다’라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기원전 8세기부터 그리스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이탈리아 남부 작은 도시 엘레아에서 태어난 파르메니데스는 생각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제우스신, 불, 나비, 나, 그리고 나의 생각들. 그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파르메니데스는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므로 우주엔 ‘변화’ 역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변화가 존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로 변하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의 다른 무언가를 거쳐야 한다. 만약 ‘그 무언가’가 역시 존재하는 것이라면 단순히 ‘존재에서 존재가’ 유지되는 것이지 변신한다고 볼 수 없다고 한다.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존재들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엇, 그러니까 ‘무(無)’가 존재해야 한다. 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는 것들은 변할 수도, 생산될 수도, 소멸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우주의 모든 존재는 영원하며 하나라는 말이다. 존재는 그냥 존재다. 어렵다. 오죽하면 플라톤도 어려워했을까.
파르메니데스의 논리를 더 따라가서 존재하는 것이 오로지 하나라고 가설해보자.
하나와 여러 개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나는 같은 것이고, 여러 개는 다른 것이다. 구별할 수 없는 것은 같은 것이고, 서로 다른 것들은 구별할 수 있는 것들이다.
존재가 하나라면 그것은 서로 구별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일한 원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제우스신만을 위한 법칙, 불을 위한 법칙, 나를 위한 법칙, 내 생각만을 위한 법칙같이 다양하고 서로 독립적인 법칙들이 우주에 존재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19세기 과학은 자연의 비밀을 캐는 학문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남부 이탈리아는 문화의 변두리였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예술가들로 북적이던 아테네, 그리고 사치스러웠던 이오니아인들이 보기엔 얼마나 촌스러운 곳이었을까? 하지만 그 시골 바닷가에 앉아 매일 밤 별들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파르메니데스는 하나의 작은 생각을 피워 올렸다:
존재는 하나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단 하나의 만물 법칙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인간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뀐다. 단 하나의 만물 법칙으로 설명하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다양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밤하늘의 별들과 내가 바다에 던진 작은 돌이 같은 법칙을 통해 존재한다는 것인가? 그러나 세상을 우리 눈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만약 눈에 보이는 게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면?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빌려보자:
“Phusis kruptesthai philei”. 자연은 숨는 것을 좋아한다고.
그렇다. 자연은 마치 베일을 쓴 여신과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은 만물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자연의 베일을 벗기는 순간 인간은 자연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파리 센강 변엔 오르세이 미술관이 있다. 기차역으로 쓰이던 건물을 미술관으로 변신시킨 -파르메니데스가 그다지 좋아했을 것 같지 않은- 건물이다. 이 미술관 한 곳엔 루이 에르네스트 바리아스가 1899년 완성한 ‘과학을 통해 베일이 벗겨지는 자연의 여신’이라는 작품이 전시돼 있다.
수줍은 자연은 영원히 숨으려 하지만, 과학은 그녀의 베일을 결국 벗겨버린다는 게 주제다. 그 누구의 동의도 없이 벌거벗겨진 자연의 가슴과 음부를 관찰하고 손으로 쥐어짜고 냄새를 맡아본다. 19세기 유럽인에게 과학은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게 아니었다. 과학은 자연을 단순히 성폭행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은 어떻게 자연의 베일을 벗길 수 있는 것일까? 바로 관찰과 수학을 통해서다. 바닷가에서 돌을 던진다고 상상해 보자. 어떻게 던지면 가장 멀리 날아갈까? 책상에 앉아 멋진 이론을 만들고, 상상만 한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 주장했듯 자연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반복된 관찰, 고로 ‘실험’을 해야 한다. 각도를 너무 낮게 잡으면 수직으로 빨리 날아오르지만 금방 땅에 떨어진다. 거꾸로 각도를 높게 잡으면 공중엔 오래 머물겠지만, 멀리 날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멀리’ ‘오래’ 같은 단어들은 주관적이다.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관찰의 결과를 숫자를 통해 표현한다면 어떨까?
브라헤(Tycho Brahe)의 관찰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케플러의 ‘루돌프 표’(왼쪽). 케플러는 태양계를 플라톤의 입체들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오른쪽).
수천 년 전의 파르메니데스처럼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도 밤하늘의 별을 보며 존재와 우주의 비밀을 생각했다. 모든 존재를 엮어놓는 단 하나의 법칙. 그것이 무엇일까?
케플러는 우주구조의 비밀을 수(數)를 통해 알아내려 했다. 밤하늘 별들의 움직임을 잘 관찰한다면 존재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데이터가 필요했고 마침 튀코 브라헤(Tycho Brahe)는 케플러가 그렇게도 원하는 데이터를 갖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루돌프 2세 황제 밑에서 일했던 브라헤는 당시 행성들의 관찰 기록을 가장 많이 갖고 있었다. 브라헤의 조수가 된 케플러는 하지만 바로 절망에 빠진다. 브라헤에게 자신의 관찰기록은 수집품에 불과했을까? 수십 년 공들여 모은 기록을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1601년 10월 24일, 귀족 만찬에 참석한 브라헤는 과음했지만 만찬이 끝날 때까지 화장실에 가지 못해 방광이 파열됐고 결국 그로 인해 숨지게 된다. 우주 비밀의 열쇠를 쥔 사람이 소변을 못 봐 죽은 것이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기록을 기반으로 세상에서 가장 자세한 행성 관측 자료를 완성한다. 바로 후원자였던 황제의 이름을 딴 그 유명한 ‘루돌프 표’다. 표에 적힌 수천, 수만 개의 숫자들. 우주구조의 비밀이 이 어딘가에 숨어있을 게 분명하다! 우주의 비밀이 숫자들 사이에 있다면, 그 관계를 알아보면 되지 않을까? 자연의 법칙은 숫자들을 서로 묶는 수학적 원리를 통해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불·흙·공기·물을 존재의 4대 원소라고 생각했다. 만물의 모든 존재가 네 가지 원소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4개일까? 플라톤은 후기 작품 티마이오스에서 4대 원소, 그리고 그 원소들을 품은 우주 전체를 5종의 정다면체와 연관시켰다.
정다면체란 무엇인가? 정4각형, 정5각형, 정6각형 같은 정n각형을 결합하면 입체도형을 만들 수 있다. 그 많은 정n각형 입체도형 중 단 한 가지 정다각형으로 둘러싸인 입체도형은 몇 가지나 있을까?
오늘날 플라톤의 입체라 불리는 정다면체는 정4면체, 정6면체, 정8면체, 정12면체, 정20면체 다섯 개뿐이며 각각 불, 흙, 공기, 우주, 물에 대응한다.
케플러는 생각했다. 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 등 당시 알려진 6개 행성들의 원형궤도를, 서로 포개져 겹을 형성한 플라톤의 5개 입체들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루돌프 표에 적혀있는 숫자들은 플라톤의 입체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지친 케플러는 마지막 시도를 한다. 만약… 만약… 태양계 행성들이 완벽한 원형을 따르지 않는다면? 만약 행성들이 원이 아닌 타원 궤도를 그리며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케플러의 직감은 맞았고, 그의 행성 운동 법칙은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의 기반이 된다. 결국 우주의 법칙을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주의 진리를 탐색하는 여행객을 그린 중세기 목판. 만약 우주 자체가 거대한 컴퓨터라면?
이해는 우주라는 컴퓨터의 계산 과정인가
자연은 관찰할 수 있고, 측정된 자연은 숫자로 표현된다. 숫자들 사이엔 절대적 관계가 존재하며, 우리는 그 관계들을 통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뉴턴, 아인슈타인, 양자역학, 초끈이론. 파르메니데스의 2500년 전 꿈을 우리는 이렇게 관찰과 수학을 통해 실현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수학일까? 수학이란 무엇일까?
한국어, 영어, C++(컴퓨터 프로그램 언어), 산스크리트같이 수학도 사람이 만들어낸 언어에 불과할까? 소련 수학자 안드레이 콜모고로프(Andrey Kolmogorov)는 “숫자는 인간 뇌의 창작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독일의 레오폴드 크로네커(Leopold Kronecker)는 “1, 2, 3,… 같은 자연수들은 신이 만들었지만 나머지 모든 수학은 인간의 작품”이라 말했다.
하지만 두개골 속 1.5㎏짜리 고기 덩어리인 ‘뇌’가 만들었다는 수학으로 우리는 어떻게 우주의 기원과 양자 사이의 역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수학자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는 그렇기에 “자연을 설명하는 수학의 ‘지나칠 정도의 효율성’이 놀랍다”고 한다.
손으로 던진 돌은 지구 중력의 영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형으로 움직인다. 두 점(点)질량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왜 우주의 법칙은 숫자들 간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자연의 법칙을 인간은 단순히 수학이라는 ‘만들어진 도구’로 설명하는 것일까?
아니면 플라톤이 주장한 대로 숫자들은 이데아 세상에 존재하는 실질적 실체이며, 그들의 관계가 결국 우주의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그렇다면 한발 더 나아가 이런 주장도 해볼 수 있겠다. 우주 그 자체가 수학이라고. 수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실체들은 물리학적으로 존재하며,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거대한 존재라는 함수를 계산해내는 컴퓨터의 부분들이라고.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그렇다면 우리들의 ‘이해’ 그 자체가 우주라고 불리는 컴퓨터 안에서 끊임없이 작동 중인 유일한 존재함수의 계산과정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리에 묻어갈 수 없는, 하나뿐인 ‘원본’이니까
김대식의 'Big Questions' <13> 인간은 왜 책임을 져야 하는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져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핵폭탄. 그 폭탄을 만든 과학자의 책임은 무엇인가? [사진 위키피디아]
1937년 12월 13일, 중국 국민당 정부가 충칭(重慶)으로 피한 뒤 수도 난징(南京)에 갇힌 시민들은 일본군의 사냥감이 된다. 남자들은 총살당하거나 생매장당한다.
100명의 목을 누가 먼저 베느냐를 놀이 삼아 경쟁하고, 매일 수천 명의 여자들이 강간당한다.
임신부는 총검에 찔려 죽고, 배 안의 아이는 엄마의 따뜻한 손길을 느껴보기도 전에 죽는다. 6주 동안 난징 시민들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밟아 죽일 수 있는 바퀴벌레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었다.
난징에 살던 독일 나치당원 욘 라베(John Rabe)마저 야만적이라며 항의할 정도로….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王) 왕자.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삼촌으로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 현장 책임자. 프랑스 유학 때 아르 데코(art deco·1920~30년대 프랑스 파리의 장식예술 풍조)에 빠져 도쿄 시로카네다이(白金台)에 멋진 아르 데코 집까지 지었다는 사람. 난징에서 모든 포로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지? 아니?
자신은 책임 없고, 다 참모가 몰래 한 짓이라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면책받아 우아하게 골프장이나 설계하다 93세에 따뜻한 침대에서 죽었다지.
1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 군인. 뭐가 그리 즐거웠을까?
2 좋은 할아버지로 행복한 노년을 즐겼던 요제프 멩겔레,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자, 이시이 시로(왼쪽부터).
‘인간 백정’ 아사카노미야·멩겔레 아이러니
난징에서 아사카노미야 왕자가 샤토 오 브리옹 와인을 마시며 아마도 예전 프랑스 애인들을 기억하고 있었을 무렵, 수천㎞ 떨어진 독일에선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가 나치당에 가입한다.
‘인종위생학자’로 줄곧 독일 민족의 절대 우월성을 주장했던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특히 쌍둥이 유전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43년 아우슈비츠 수용소 의사가 된다.
수용소에서 그는 절대 신이었다. 웃음을 머금은 표정 때문에 ‘죽음의 천사’라고 불린 멩겔레. 배설물로 범벅 된 기차에서 내리는 유대인, 집시들, 선생님, 어린아이, 할아버지, 여배우 앞에서 그는 크게 외친다. “Zwillige heraustreten!(쌍둥이들 나와!). 나오면 살고, 아니면 죽는다.”
하지만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더 행복했던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 아니었던가? ‘선택된’ 아이가 울면 설탕을 주며 달래다 짜증 나면 벽에 내던져 죽이고, 살아 있는 아이의 몸을 해부한다.
‘의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쌍둥이들을 서로 꿰매고, 7살 여자 아이의 요로를 대장에 연결하며, 울부짖는 어린아이의 간을 마취 없이 꺼내 본다.
배고픔과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삼촌’이라 부르게 했던 멩겔레. 전후 그는 유럽에서 잘도 빠져나와 볼프강 게르하르트(Wolfgang Gerhard)로 이름을 바꿔 아르헨티나ㆍ파라과이ㆍ브라질에서 승승장구했다. 사업도 크게 벌여 멋진 목장에서 살았고 바다에서 수영하다 67세에 익사했단다.
하긴 멩겔레뿐만이 아니다. 전쟁 포로들을 마루타 삼아 생체실험하던 이시이 시로(石井四) 관동군 731부대장도 전쟁 뒤 소아과 의사로 평화롭게 살다 역시 67세에 식도암으로 죽었다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인류가 구질구질한 도덕에 얽매여 사는 벌레 같은 인간들과 비범하고 강력한 ‘나폴레옹’식 인간으로 분류된다고 주장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던 위번멘쉬(초인)랄까? 세상의 갑이 바로 자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집주인인 악덕 할머니를 살해한다. 도덕을 초월한다던 라스콜니코프는 하지만 죄책감을 느끼고 자수한다. 원작의 제목은 ‘프레스투플레니에 이 나카자니에(Prestuplenie i Nakazanie)’, 그러니까 ‘범죄와 처벌’이다. 영어로 ‘Crime and Punishment’라고 하듯 말이다. 그런데 독일어 제목은 ‘Schuld und Suehne-죄와 속죄’다.
범죄와 죄, 그리고 처벌과 속죄. 인간은 죄를 짓지만, 진정한 책임과 속죄 없는 처벌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이다.
일본군 일병, 멩겔레, 이시이, 아사카노미야, 히로히토, 히틀러. 그들에겐 교집합이 하나 있다.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버지를 찾아 브라질로 온 아들에게 멩겔레는 “나는 굶는 아이들에게 설탕을 나누어줬다. 그러니 영웅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했단다…. 악마이며 정신병자이며 천사 같은 웃음을 가진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난징에서 칼부림하던 군인은 장교가 시켜서 했다 할 것이고, 장교는 장군에게 책임을 돌린다. 장군은 왕자의 명령을, 왕자는 왕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겠다. 왕은 나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라 할 것이고, 왕자는 장군의 보고를 들은 바 없고, 장군은 현장의 장교가 제대로 하지 못해서라고 한다.
장교는 어차피 칼질은 군인들이 했다고 하며 군인들은 또다시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란다…세상만 돌고 도는 게 아니다. 주인 없는 책임들도 돌고 돈다.
라스콜니코프는 한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눈으로 쳐다보며 죽였기에 죄책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내 책상 위의 빨간 버튼을 눌러 눈에 보이지도 않는 100만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미학자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은 기계적 복제가 가능한 현대 사회에 더 이상 ‘원본’이라는 개념이 가능한지 물었다. 사진으로 ‘모나리자’를 100만 번 똑같이 찍어낼 수 있는데, 왜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한 장의 그림만이 특별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가 하면 베냐민의 사촌 동생이자 철학자였던 귄터 안더스(Guenter Anders)는 책임감의 복제에 대해 생각한다. 한 사람이 한 명은 죽일 수 있지만 혼자 100만 명을 죽일 수는 없다. 100만 명을 죽이려면 그렇게 할 무기가 필요하고, 무기를 만들 공장이 필요하다. 공장은 기계가 필요하고, 기계를 만들 수 있는 과학과 기술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100만 명을 죽인 책임은 도대체 누구에게 있을까?
‘맨해튼 프로젝트’ 과학자들이 재회한다면…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 한가운데 로스앨러모스(Los Alamos). 1942년 이곳으로 당시 최고의 천재들이 모인다. 승승장구하는 나치 독일을 막을 비밀병기 원자탄을 만들기 위해서다. 로버트 오펜하이머, 리처드 파인맨, 폰 노이만 같은 당대 최고의 물리학 천재들과 26조원의 예산이 투입된 맨해튼 프로젝트는 1945년 여름 드디어 완성된다. 독일은 이미 항복해 원자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지고 일본 역시 항복한다.
하지만 두 도시에서 섭씨 1억 도가 넘는 화염에 불타 단말마의 비명 속에 사라진 수많은 목숨. 왜 그들이 난징 대학살과 진주만 공격의 책임을 지게 된 것일까?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책임에 괴로워한다. 그들이 다시 만난다고 상상해보자.
오펜하이머ㆍ노이만ㆍ라이너스 폴링ㆍ파인맨
오펜하이머=“핵폭탄이 터지는 순간. 해보다 더 밝은 또 하나의 해를 탄생시켰지. 우리 과학자들의 손으로. 나는 그때 힌두교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의 시 한 줄이 기억나더군. 내가 죽음,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구나.”
노이만=“오피(오펜하이머의 별명), 당신이 맨해튼 프로젝트 총책임자로서 괴로워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그 폭탄 없인 Japs(2차 대전 당시 일본인을 낮춰 부른 말)들이 절대 항복하지 않았을걸. 더 많은 군인이 죽었을 거라고. 그리고 어차피 우린 폭탄을 개발했지 사용자는 아니잖아. 책임은 군인들이, 아니 정치인들이 지면 된다고!”
라이너스 폴링=“나도 한마디….”(미국의 물리학자 폴링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원자·수소폭탄 반대운동을 벌여 196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노이만=“폴링! 당신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도 않았잖소!”
폴링=“(노이만을 무시하며) 책임을 백만 조각으로 나눠버려 잔인한 인류 범죄도 무죄로 만드는 게 오늘날 현실이오…하지만 책임 없인 인류가 동물하고 다를 바가 없지 않나요?”
파인맨=“책임지려면 절대 독립적인 인간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계몽주의적 사고요. 인간은 독립적이기에 자신의 선택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 하지만 고도로 발달하고 분업화된 세상에서 그 누구도 완벽하게 독립적일 수 없소. 우리 과학자들은 사회라는 기계의 수많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오. 우리가 나선다고 바뀔 게 없고, 나서봐야 인생만 복잡해진다고요. 어차피 세상은 나쁜 곳이며 바꿀 수도 없는 것인데
…한 번뿐인 인생을 쓸데없이 낭비하느니 차라리 재미있게 연구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하며, 술잔을 기울이며 바닷가 노을을 즐기는 게 더 현명하지 않나요? 저는 우울한 책임론자보단 행복한 무책임론자로 살겠습니다….”
폴링=“(불쌍한 듯 쳐다보며) 책임 있는 인생과 재미있는 연구는 모순이 아닙니다. 뭐,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한 연구했고, 노벨상도 두 개(54년 화학상, 62년 평화상)나 받았거든요. 물론 현대 사회에선 그 누구도 절대 자유로울 수 없지만, 우리 과학자들이 그나마 가장 자유롭지 않나요?
우리가 그 무기들을 창조했고, 그 무기들은 우리 없이는 세상에 탄생하지 못했을 것 아닙니까? 결국 우리의 존재와 노력이 필요조건이었다는 겁니다.
베냐민은 복제품과 원본의 차이는 원본이 갖고 있는 ‘아우라(aura)’라고 했지요. 원본의 창출 조건과 배경 그 자체가 복제품과 차별화해준다는 겁니다. 우리 과학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연구의 배경과 창조 조건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대 기술의 아우라를 기억한다는 거지요. 그런 우리야말로 복제된 지식의 추한 모습을 사회에 알리고 이해시킬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원본입니다. 자신은 톱니바퀴 같은 복제품이 아닌 우주에 하나뿐인 원본임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라는 원본의 아우라 중 하나가 바로 피할 수 없는 책임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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