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함은 뇌가 느끼는 ‘좋음’ 중 하나이기 때문?
김대식의 ‘Big Questions’ <7>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귀스타브 쿠르베 작, 1865). [위키피디아]
미국에서 겨우 10만 권 팔린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선 100만 권 이상 팔렸다. 그리고 샌델 교수는 그 어디에서보다 더 많은 강사료를 받으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강연을 하곤 한다(결국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지식을 돈만 많이 내면 살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우선 잊어 보자).
이유야 어쨌든 ‘경제민주화’ ‘재벌 때리기’ ‘빈부격차’ 등이 화두인 2013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정의’가 중요한 이슈인 건 확실해 보인다. 샌델 교수가 동일한 웅변술과 재치 있는 스타일로 ‘우표 수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면 그다지 성공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는 말이다.
1 쓰레기장에서 사는 어린아이(인도). 2 부촌 바로 옆 빈민촌(브라질).
몇 년 전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영화가 인기였다. 정상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뭄바이 쓰레기장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불쌍해하고 분노하거나 또는 우울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에 화난 것일까? 만약 우리 스스로도 쓰레기장에 산다면 어떨까?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쓰레기장에 산다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 그 자체가 쓰레기장이라면 쓰레기장에 산다는 사실에 화낼 이유가 없겠다. 은하수 한구석에 처박혀 평생 지구라는 돌덩어리와 중력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지 않듯 말이다.
쓰레기장 아이들이 불쌍한 이유는 어딘가 수영장에서 물놀이하고 있을 부촌 아파트의 다른 아이들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하게 우리는 소중한 무엇을 빼앗은 사람에게 분노하며 정의를 요구한다. 어렵게 장만한 집이나 차를 훔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우리에겐 정의이며, 단 하나뿐인 목숨을 빼앗은 자에 대한 분노는 극치에 다다라 거꾸로 그들의 목숨을 요구하기도 한다. ‘눈에는 눈’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설득력이 여기서 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무한의 목숨이 있다면 어떨까? 어쩌면 나를 살인한 사람하고도 즐겁게 웃을 수 있겠다. 마치 나의 수많은 머리카락 한 가락을 뽑은 사람에게 대하듯 말이다.
누구나 동의할 ‘정의’ 개념을 만들 수 있나
플라톤의 ‘에우튀프론’에서 ‘신들이 정의를 원한다’라고 주장하는 에우튀프론에게 소크라테스는 그럼 신들이 무언가를 “정의롭기 때문에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원하기 때문에 무언가가 정의로워지는지”라고 묻는다. ‘정의란 무엇 무엇이다 ’라고 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 무언가를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당화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세상에 지각 능력이 없는 존재들만 있다면 ‘정의로운 세상’이란 무의미하다. 돌멩이와 지렁이 사이엔 ‘정의’란 단어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우주에 나 혼자 존재하거나, 존재하는 모두가 이 세상 모든 걸 가질 수 있다면 역시 ‘정의’란 무의미하다.
결국 정의는 인지·감정·기억을 가진 사람들끼리 한정된 것을 나눌 때 느끼는 분배 패턴의 정당성이지, 나눠지는 그 무언가의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나누는 것이 정의로운 것일까?
우선 생산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n분의 1로 나누거나 각자 필요한 만큼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이상적 패턴을 마르크스는 경제학적으로 뒷받침하려 노력했지만 문제 있어 보인다.
더 열심히 일하려고 하는 인센티브가 희미해지며, 내가 소유한 재능과 노동력을 통해 생산한 것들을 투자하지도 않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짜증 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프루동같이 어차피 ‘개인 소유’란 불가능한 개념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내가 소유한 재능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거나, 교육을 통해 얻거나 책에서 읽었을 것이다.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매번 연관돼야만 나의 재능과 노동력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계나 땅 역시 독립적으로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기에 사회의 도움을 얻어서만 생산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한 특정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프루동은 그래서 “모든 개인 소유는 도둑질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개인의 모든 재능과 시간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동일한 공헌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주장은 지나쳐 보인다.
로버트 노직
반대로 아무도 사회로부터 100% 독립적인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당연해 보이지만, 그게 바로 자유론자 로버트 노직의 핵심 아이디어였다. 노직은 정의와 분배 패턴의 상호관계 그 자체를 부정한다. 합법적으로 얻은 자원에 내 재능과 시간을 투자해 생산한 결과물은 내가 소유하거나 시장에서 정당한 가격을 받고 교환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동의 없이 나라에서 가져가는 세금은 결국 나의 재능과 시간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정부에서 가져간 만큼의 재능과 시간을 고로 나는 사회에 무료 헌납한다는 말이고, 동의 없는 재능과 시간의 헌납은 노예나 하는 짓이므로 모든 세금은 결국 노예제도라 할 수 있다.
프루동과 노직이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세상 사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한다고 상상해 보자. 장소는 노직이 활동했던 하버드대학교 근처 리걸 시 푸드(Legal Sea Food)라는 꽤 괜찮은 레스토랑이다.
프루동=…그럼 무슈 노직은 만약 세상의 99% 식량을 제가 소유해 대부분 먹지 못한 채 썩어서 버리더라도 식량의 일부를 사회가 세금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말인가요? 집 앞에서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노직=그렇습니다. 정의가 분배의 패턴이고, 사회가 그 패턴을 정할 수 있다면 정당하게 얻은 개인의 소유를 정부가 제멋대로 손질할 수 있게 됩니다.
굶는 아이를 위해 제 것을 동의 없이 가져갈 수 있다면 나중엔 그 아이의 옷을 위해서, 그리고 다음엔 그 아이의 대학 교육과 새집을 위해 맘대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그래서 정부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규제화하는 순간 우리는 정부 노예제도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고 했지요….
프루동=무슈 노직은 ‘정당한’ ‘나의 소유’라는 단어를 자주 쓰십니다만…
선생님의 그 ‘정당한 소유’ 역시 사회가 마련해 주고 보호해 주는 것 아닌가요? 알몸으로 태어나 하버드대 교수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던 건 뭄바이 쓰레기장의 아이보다 단지 우연히 더 좋은 부모, 고향, 신경세포들을 가진 선생님이 사회로부터 더 많은 부를 훔쳤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공로 없는 우연과 확률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항의하려는 노직을 막으며)
그렇다면 벤담이 추구한 사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행복지수는 어차피 로그(log) 함수로 증가하기 때문에 제가 10조를 가졌든, 11조를 가졌든 더 이상 큰 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겐 무의미한 1조를 세금으로 걷어 가난한 10만 명에게 나눠주는 게 사회 전체 행복지수를 더 최대화하지 않나요?
노직=그런 공리주의 난센스에 따르면 한번 지하실에 갇혀 노예로 일하는 10명의 아이들이 10만 개의 명품 백을 만든다고 상상해 봅시다. 10만 소비자의 행복 덕분에 사회 전체 행복지수는 늘어나겠지요. 하지만 그건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노예로 살아도 된다는 위험한 말입니다.
프루동=선생님 같은 자유론자가 아이들의 행복을 걱정한다는 게 신기하군요….
노직=(못 들은 척하며) 그럴 바에야 하버드대 제 옆 방 동료였던 롤스의 정의론이 더 설득력 있겠네요. 효율적이면서도 정의로운 사회란 차별된 분배의 패턴을 통한 최소 수혜자에게도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이 생겨야 한다는.
프루동=…거기다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모델을 도입했지요. 정의로운 분배 패턴에 대해선 사회적 강자와 약자가 어차피 다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 우리가 뭄바이 쓰레기장 아니면 빌 게이츠의 자식으로 태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한 후 적절한 분배 패턴을 정하라는 거였지요. 아는 게 힘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정의로움이군요.
노직=‘무지의 베일’은 귀여운 아이디어지만 비현실적입니다. 나는 나이기에 ‘만약 내가 아니라면’이란 무의미합니다. 무지의 베일엔 항상 ‘나’라는 구멍이 뚫려 있다는 말이지요. 비슷하게 칸트는 공리주의식 결과보다 도덕적 동기를 더 강조했지만 정말 그가 원하듯 우리 ‘동기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 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개인 동기의 정의성을 보편적 입법의 정의성을 통해 판단한다는 건 단순히 말장난 아닌가요? 결론은 항상 같습니다:정의는 그 어떤 분배의 패턴도 아닙니다!
프루동=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노직’ 이라고 불리는 ‘나’는 왜 ‘노예제도’보다 ‘자유’를 더 선호할까요? ‘나’는 나의 뇌고 나의 기억입니다. 그런 ‘뇌’에겐 확실히 ‘좋고’ ‘싫고’가 있습니다.
음식과 물은 좋고 배고픔과 아픔은 싫습니다. 독립적인 판단과 행동은 대부분 뇌에겐 ‘좋음’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자유론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거지요. 하지만 ‘공평’ 역시 뇌에겐 ‘좋음’ 중 하나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 영장류의 뇌는 공평한 나눔을 경험할 때 ‘좋음’을 느끼고, 불공평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정의를 기대하는 건 마치 자유를 기대하듯 공평 역시 뇌의 기본 행복 조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인간은 동물이 아니고 자유이든 공평이든 우리가 꼭 뇌의 성향을 따라야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자유는 본능이기에 지켜야 하나 공평은 본능이어도 지킬 필요 없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반박하려는 노직을 막으며) 그나저나 너무 늦었네요. 계산은 어떻게 할까요?
저는 샐러드 하나 먹는 사이에 선생님께서는 가장 비싼 바닷가재를 드셨군요. 각자 자유의지로 선택해서 먹은 만큼 내지요….
노직=(당황하며) 뭘 그렇게 복잡하게… 우리 그냥 n분의 1 할까요?
소유란 무엇인가? /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1809-1865)
내가 "노예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리고 한마디로 답해야 한다면, "그것은 살인이다"라고 답을 할 터인데, 내 뜻은 즉시 이해될 것이다. 인간으로부터 사고, 의지, 개성을 박탈해가는 권력은 생과 사를 좌우하는 힘이며,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것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입증하는 데에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또 다른 질문, "소유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도 십중팔구 오해받을 걱정없이, 두번째 명제는 첫번째 명제의 변형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도적질이다"라고 비슷하게 답변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1793년의] 인권선언은 소유권을 인간의 자연적이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 가운데 배치하였는데, 이 권리들은 다음 네가지이다. 자유, 평등, 소유, 안전. ... 이들 세가지 혹은 네가지 권리를 서로 비교해 본다면, 소유권은 다른 권리들과 닮은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시민 대다수에게 소유권은 단지 잠재적으로, 그리고 빛을 보지 못한 잠자는 재능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 권리를 향유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유권은 자연권 사상과 어울리지 않는 모종의 거래와 변경이 용인된다. 즉, 실제로 정부도 재판소도 법률도 그것을 존중하지 않으며,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한결같이 그것을 헛된 것으로 간주한다.
자유는 침해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나의 자유를 팔거나 양도할 수 없다. 자유의 양도나 정지를 목적으로 하는 일체의 계약, 일체의 계약조건은 무효다. 노예는 자유의 대지에 발을 내딛는 바로 그 순간에 자유인이 된다. 사회가 범죄자를 붙잡아 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경우, 정당방위에 해당한다. 범죄를 통해 사회적 계약을 위반하는 자는 모두, 스스로를 공적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는 타인의 자유를 침범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자유를 앗아가도록 만든다. 자유는 인간의 본원적 조건이다.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다운 행위는 어떻게 영위할 수 있을 것인가?
유사하게, 법 앞의 평등에는 제한도, 예외도 있을 수 없다. ... 이것은 안전권에도 동일하다. ... 소유권은 전혀 다르다! 소유권은 모든 사람이 떠받듦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승인하지 않는다. 법률, 도덕, 관습, 공적 및 사적 의식 모두가 소유권의 죽음과 파산을 획책하고 있다.
... 자유는, 인간에게 불가입성이 물질에 해당하는 것과 같은 것, 즉 존재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리이다. 평등은, 그것이 없고서는 사회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리이다. 안전은, 모든 사람이 보기에 그 자신의 자유와 생명이 타인의 것만큼이나 귀중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리이다. 이들 세가지 권리는 절대적인데 즉,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자신이 주는 것 만큼을, 즉 자유에는 자유, 평등에는 평등, 안전에는 안전 등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유권은 어원학적 의미 및 법률상의 정의에 의하면, 사회 외적 권리이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부가 사회적 부라면, 조건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할 것이며 따라서 "소유권은 사람이 재산을 가장 절대적인 방식으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 평등, 안전을 위하여 결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소유권을 위하여 결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소유권이 자연권이라면, 이러한 자연권은 사회적이 아니라 반사회적이다.
소유와 사회는 서로가 전혀 조화될 수 없는 것이다. ... 사회가 망하거나, 아니면 사회가 소유권을 파괴해야만 한다.
상업을 말하는 자라면 누구나 동등한 가치의 교환을 말하는데, 이는 만약 가치가 동일하지 않으며 손해를 입은 편에서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교환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상거래는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업은 자유로운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강제력이나 사기를 통한 거래도 있을 수 있지만, 상거래라고 할 수는 없다.
자유인은 자신의 이성과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는 맹목적으로 열정을 좇지 않으며, 공포 때문에 위축되거나 방해받지 않으며, 그릇된 주장에 속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모든 교환에는 계약 당사자 누구도 상대방에게 손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즉 정당하며 진실되기 위해서 상업은 모든 불평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도덕적 책무가 존재한다.
이것이 상업의 첫번째 조건이다. 두번째 조건은 그것이 자발적일 것, 즉 당사자들이 자유롭게 그리고 솔직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다하며, 궁전을 짓고서도 마굿간에서 자며, 넉넉한 옷감을 짜고도 누더기를 걸치고 있고, 세상만물을 생산하고도 아무 것도 없이 지내는 문명사회의 노동자는 자유롭지 않다.
그의 고용주는 임금과 노력봉사를 교환한다고 해서 그의 동료가 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의 적이다.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나라를 섬기는 병사는 자유롭지 않다. 그의 동료, 상관 그리고 군사재판의 관료나 기구, 이들은 모두 그의 적이다.
토지를 소작하는 농민, 자본을 빌린 제조업자, 통행세, 관세, 특허료, 면허세, 인두세, 재산세 등을 바치는 납세자, 그리고 이것들을 심화시키는 대의원, 이들 모두는 분별있게, 그리고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들의 적은 소유자, 자본가 그리고 정부이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명료한 주장 앞에서 어떠한 궤변, 어떠한 억지 선입견이 버틸 수 있을 것인가?
1. 개별 점유는 사회생활의 조건이다. 소유의 5천년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소유는 사회의 자살이다. 점유는 법 안에 존재한다. 소유는 법에 위배된다. 점유를 지지하는 한편, 소유를 제압하라. 원리의 간단한 변경을 통해서, 당신은 법률, 정부, 경제와 제도를 변혁하고, 이 땅에서 악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2. 점유권은 만인에게 평등하기 때문에, 점유는 점유자의 수에 따라 변하며 소유는 형성될 수 없다.
3. 노동의 효과는 만인에게 동일하기 때문에, 소유는 외부의 착취와 지대로 인해 사라진다.
4. 모든 인간 노동은 집단적 강제력의 결과이므로, 따라서 모든 소유는 집단적이며, 분할할 수 없게 되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동은 소유를 파괴한다.
5. 모든 노동능력은 모든 노동도구처럼 축적된 자본이며, 집단적 소유이기 때문에, (능력의 불평등에 따른) 임금과 부의 불평등은 정의롭지 못하며, 따라서 도적질이다.
6. 상업의 필수조건은 계약당사자의 자유, 그리고 교환되는 생산물의 등가이다. 그런데, 가치는 각 생산물에 드는 시간과 비용의 양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에, 그리고 자유는 침해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자는 권리와 의무가 평등한 것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임금을 가져야 한다.
7. 생산물은 생산물에 의해서만 구매된다. 그런데, 교환조건은 생산물의 등가이기 때문에 이윤은 불가능하며 정의롭지 못하다. 만약 이러한 기본적인 경제원리가 지켜진다면 빈곤, 사치, 억압, 악덕, 범죄, 기아는 우리들 사이에서 사라질 것이다.
8. 인간은 선택에 의해 결합되기 이전에 생산의 물리적, 수리적 법칙에 의해서 결합된다. 그러므로 정의 즉, 사회법과 협의의 법은 조건의 평등을 필요로 하며, 존경, 우정, 감사, 칭찬 등은 모두 형평법 혹은 비례법에만 속한다.
9. 자유로운 결합 즉, 생산수단의 평등과 등가교환을 유지하는 데 국한되어지는 자유만이 유일하게 가능하며, 유일하게 정의로우며, 사회의 유일한 참 형태이다.
10. 정치학은 자유의 과학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는 어떠한 이름으로 위장할지라도 압제이다. 사회의 최고도의 완성은 질서와 아나키의 결합 속에서 찾을 수 있다.
* 프루동 (Pierre-Joseph Proudhon). 1809. 1. 15 프랑스 브장송~1865. 1. 19 파리. 프랑스의 자유론적 사회주의자, 저널리스트. 그의 사상은 후에 급진적·무정부주의적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초기생애와 교육
프루동은 가난한 통 제조업자 겸 선술집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9세 때 쥐라 산맥에서 목동이 되었다. 고향에서 보낸 유년기와 농민이었던 그의 선조들은 평생 동안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이상사회에 대한 그의 전망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수공업자나 농민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그린 것이었다. 그는 빈곤을 고귀하게 생각했으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결코 사치를 추구하지 않았다. 프루동은 어린시절부터 명민함을 드러내어 장학금을 받고 브장송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부유한 상인 아이들로부터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 가난뱅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향학열에 불탔으며, 집안의 경제적 파탄으로 견습 인쇄공(나중에는 식자공)이 될 수밖에 없었을 때도 그 열은 식지 않았다. 인쇄소에서 기술을 배우는 동안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를 독학했으며, 인쇄소에서 여러 지역의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과 사귀었고, 같은 브장송 출신의 이상적 사회주의자인 샤를 푸리에와 만나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후에 프루동은 다른 젊은 인쇄공과 마찬가지로 직접 인쇄소를 차렸으나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그가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인쇄소의 경영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이때 그가 프랑스어로 쓴 1편의 글은 외국어로 번역하기에는 난점이 있었으나 플로베르, 생트 뵈브, 보들레르 같은 여러 작가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838년 프루동은 브장송 아카데미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할 수 있었다. 이때의 여가를 이용해 그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최초의 주요저서 〈 재산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a propriété?〉(1840)를 발표하여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
여기서 프루동은 "나는 무정부주의자"라고 선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반적인 의미의 재산에 대해서는 공격하지 않았으며,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는 재산만을 공격했다. 반면에 다른 의미의 재산, 즉 농부가 자신이 일할 토지를 소유할 권리 또는 장인(匠人)이 도구나 작업장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는 자유의 보존을 위해 본질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 성격이 공상적이든 마르크스주의적이든 그는 모든 공산주의가 개인으로부터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아버림으로써 자유를 파괴한다고 비판했다.
1840년대 7월 왕정의 다소 반동적인 분위기 속에서 프루동은 가까스로 정부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으나 1842년 〈재산이란 무엇인가?〉의 후속편이자 더욱 선동적인 저서 〈소유자에 대한 경고 Avertissement aux propriétaires〉를 출간하면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최초로 받은 이 재판에서 판사가 그의 주장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죄를 물을 수 없다고 양심적으로 판결함으로써 그는 유죄를 면했다. 1843년 프루동은 수상운송회사의 사무 책임자로 일하기 위해 리옹으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직조공들이 조직한 비밀결사의 회원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산업사회에서는 노동자들에 의해 공장이 운영될 것이며, 노동자들은 폭력혁명보다는 경제적 행동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원시적 무정부주의의 주장을 전개했다.
이러한 견해는 프랑스의 자코뱅적인 혁명 전통의 변형이었다. 프루동은 이들의 정치적 집중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했으나 그래도 이들의 견해를 수용하여, 나중에 그의 고유한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상호부조주의(Mutualism)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리옹의 노동계급 지도자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프루동은 리옹의 무명 노동계급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이자 여성해방 운동가인 플로라 트리스탕을 만났으며, 파리를 방문하여 카를 마르크스, 미하일 바쿠닌, 러시아의 사회주의자이며 작가인 알렉산드르 헤르젠 등과 친교를 맺었다.
1846년 그는 사회주의 운동의 조직문제에 있어서 마르크스의 중앙집중적인 견해를 반대하면서 마르크스와 대립하게 되었다. 얼마 뒤 프루동이 〈경제적 모순 또는 빈곤의 철학 Système des contradictions économiques, ou philosophie de la misère〉(1846)을 발표하자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 La misère de la philosophie〉(1847)을 집필하여 프루동의 오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무정부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 간의 역사적 대립의 시작이었다. 또한 프루동 사후에 마르크스와 프루동의 제자 바쿠닌 사이의 갈등은 제1인터내셔널이 분열되는 상황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프루동은 1848년초 리옹의 일자리를 그만두고 파리로 가서 2월부터 〈인민의 대표자 Le Représentant du peuple〉라는 무정부주의적인 논조의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848년의 혁명기와 1849년 1월에 그는 모두 4종류의 신문을 편집했다. 맨 처음 나온 신문은 어느 정도 정기적으로 발행되었으나, 4개 신문 모두 정부의 검열에 의해 차례로 폐간되었다. 프루동은 1848년 혁명기에 소수파로 있었는데, 그는 이 혁명에 견고한 이론적 기초가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1848년 7월 제2공화정의 제헌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그는 주로 혁명의 와중에서 태동하여 결국 나폴레옹 3세의 독재로 귀결된 전제적 경향을 비판하는 데 몰두했다.
한편 상호 신용과 노동 전표에 기초한 인민은행을 설립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는 생산에 소비된 노동시간에 따라 임금을 주는 제도였다. 프루동은 결국 제2공화정의 대통령인 루이 나폴레옹을 비판한 죄로 투옥되어 1852년까지 감옥에 있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 쿠데타를 일으킨 뒤 다음해 스스로 황제 나폴레옹 3세 자리에 올랐다. 그는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수감생활을 했으며, 투옥기간중에 결혼하여 첫 아기를 얻었다. 옥중에서 그는 A. 헤르젠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그가 마지막으로 발행하던 신문을 편집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이 시기에 〈혁명가의 고백 Confessions d'un révolutionnaire〉(1849)·〈19세기의 혁명관 Idée générale de la révolution au ⅩⅨe siècle〉(1851) 등의 주요저서를 집필했다. 〈19세기의 혁명관〉은 국경선이 사라지고 국가가 소멸하고, 코뮌 또는 지역조직에 권력이 분산되며, 자유계약이 법을 대신하는 세계연합사회를 묘사함으로써 그의 이상사회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1852년 프루동은 석방된 후 제국 경찰로부터 끊임없이 방해를 받았다. 사회주의 사상을 전개한 저서는 발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투자자를 위한 시시한 글이나 쓰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858년 그는 출판업자를 설득하여 〈혁명과 교회에서의 정의를 위하여 De la justice dans la Révolution et dans l'église〉(3권)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교회의 선험적 전제에 인도주의적 정의론을 내세웠다. 이때문에 책이 모두 몰수되고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벨기에로 망명함으로써 결석재판에서 더 높은 형량을 선고받았다.
그는 1862년까지 벨기에에 남아 있으면서 민족주의의 비판과 세계연방사상을 발전시켰다. 이는 저서 〈연합사회의 원리에 대하여 Du Principe fédératif〉(1863)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파리로 돌아온 뒤 프루동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상호부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파리의 수공업자들은 1865년 그가 죽기 직전에 창립된 제1인터내셔널의 주된 세력이 되었다.
프루동의 마지막 저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능력에 대하여 De la capacité politique des classes ouvrières〉(1865)는 그의 임종 직전에 완성되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노동계급의 해방은 경제적 투쟁을 통한 노동계급 스스로의 과업임을 주장했다.(G. Woodcock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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