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김대식

우리는 누구인가

rainbow3 2019. 9. 17. 12:16

4만 년 전 식인종 혹은 찬란한 별들의 후손?

 

김대식의 ‘Big Questions’ <9> 우리는 누구인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1908년 작품 ‘아폴론과 다프네’. [위키피디아]

 

 

“악몽을 꾸다 깨어난 그레고르 잠사는 침대 위에 괴물같이 커다란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유명한 소설 『변신』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업사원으로 열심히 일해 가족을 먹여 살렸던 그레고르의 변신은 그의 가족들의 변신을 불러온다. 충격과 걱정은 서서히 역겨움과 귀찮음으로 바뀌어 가고 “저것”을 없애버리자는 첫 말은 사랑스러웠던 여동생의 입에서 나온다. 집안의 희망이며 미래였던 그가 왜 갑자기 “저것”이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는 매일 일어나며 확신한다: 오늘 아침의 ‘나’는 바로 어제 침대에서 잠들었던 같은 ‘나’라고.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몸은 영원하지도, 항상 일치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몸은 수십조 개의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세포들은 주기적으로 만들어지고, 분열하고, 죽는다.

허파 세포는 2~3주마다, 간 세포는 5개월에 한 번씩 만들어진다. 창자 세포들이 교환되는 데는 2~3일이 걸리고, 피부 세포들은 시간당 3만~4만 개씩 죽어 매년 3.6㎏이나 되는 세포들이 몸에서 떨어져나간다. 창문을 열어놓지 않았는데도 바닥에 하얗게 쌓인 ‘먼지’ 대부분이 바로 얼마 전까지 ‘영원히’ 대리석 같은 피부로 만들기 위해 씻고, 바르고, 마사지해 주었던 우리들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인간으로 잠들어 벌레로 깨어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변신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변하지 않는 듯한 ‘나’라는 그 정체성의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벌레로 변신해 벽을 기어다니면서도 그레고르는 여전히 그레고르로 생각하고 그레고르로 느낀다. 사랑에 빠진 아폴론 신에 쫓겨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자 나무로 변했다는 그리스 신화의 다프네 역시 변신 후 여전히 다프네로 생각하고 다프네로 느끼지 않았을까? 피부나 간 세포와 달리 대부분 대뇌피질 신경세포들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도, 분열하지도 않는다. 덕분에 우리는 오래전 유치원에서 들었던 노래를 아직도 부를 수 있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는 ‘마들렌’ 쿠키 맛 하나로 시시콜콜한 어린 시절 추억들을 끄집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말을 빌려 “그레고르로 생각한다, 고로 그레고르다”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까?

 

헤겔 “정체성은 타인과 갑을 관계로 성립”

 

세상과 분리된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와 정체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데카르트와 달리 독일 철학자 헤겔(G.W.F. Hegel)은 정체성이란 항상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혼자 아무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생각하고, 비판하고, 의심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그레고르가 아무리 자신을 영업사원 ‘그레고르 잠사’라고 기억하고 생각해 봐야 다른 사람 눈엔 징그럽기 짝이 없는 커다란 벌레 한 마리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헤겔은 규칙과 계급 위주인 프러시아를 ‘이성이 가장 잘 실현된 보편국가’라는 멘붕 스타일의 발언으로 유명하다. 그런 프러시아는 나치 독재를 가능하게 했고, 광적인 민족주의에 미쳐버린 독일인들은 바로 몇 달 전 옆집에서 의사, 변호사, 선생님으로 함께 살았던 유대인들을 없어져야 할 “저것들”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우디 앨런 감독의 작품 중 ‘젤리그’라는 영화가 있다.

‘인간 카멜레온 병’에 걸린 영화의 주인공 레오나르 젤리그의 인생은 “변신” 그 자체다. 흑인들 사이에선 흑인이 되고, 보수주의자 사이에선 보수, 진보주의자 사이에선 좌파가 된다. 야구장에선 멋진 야구선수이지만, 뚱뚱한 사람들 곁에선 고도 비만 현상을 보인다. 마치 로마제국에선 로마인, 이슬람 스페인에선 아랍인, 독일에선 모범적 독일인이 되려 했던 유대인들의 2000년 디아스포라(이산(離散) 유대인)를 보여주듯 말이다.

 

 

 

 

천재적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도 그런 한 명이었다. 헤겔의 나라 프러시아에서 유대인 부모 아래 태어난 하버는 그 누구보다도 더 독일스러운 독일인으로 변신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었던 조국의 승리를 위해 1차대전 중 독가스를 발명한다.

덕분에 하버는 1918년 노벨 화학상을 받지만, 그의 독가스는 10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남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희생자가 있었다. 자신도 화학자였으나 비인류적인 독가스 개발에 반대했던 하버의 아내 클라라는 남편을 설득하지 못하자 슬픈 자신의 가슴에 권총 한 방을 쏜다.

 

클라라가 자살한 바로 그 다음 날 또다시 독가스 실험을 위해 전쟁터로 나갔던 하버는 전쟁이 끝난 후 살충제 회사인 데구사(DEGUSSA)를 설립한다. 데구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살충제인 ‘치클론-A’와 ‘치클론-B’를 개발하게 된다. 그리고 불과 몇 년 후 자신만은 ‘모범 독일인’이라고 소리지르며 1차대전 참전 메달을 보여주는 유대인들마저 치클론-B 가스를 마시며 학살당하게 된다.

 

왜 하버는 유대인이지만 그렇게 독일인이 되길 원했고, 우디 앨런은 미국 시민이지만 자신을 유대인으로 표현하는 것일까? 다시 한번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2013년 대한민국을 이미 짐작하기라도 한 듯 정체성은 항상 타인과 ‘갑과 을’ 관계를 통해 성립된다고 주장했던 헤겔과 달리, 니체는(Friedrich Nietzsche) 변하지 않고 객관적인 정체성 그 자체의 존재를 부인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는 결국 사회적 믿음과 역사적 해석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해석의 기준은 무엇일까?

물론 문화적·역사적·종교적 기준들이 있겠지만,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죽음을 통해서만 인생의 의미와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살아가며 우리는 인생이라는 퍼즐의 의미에 대한 수많은 가설과 희망을 세우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바로 그 순간에야 무한의 가설과 가능성은 단 하나의 실재로 변신한다는 것이다.

 

‘영원히’란 인간에게 금지된 단어

 

헤겔, 니체, 하이데거. 다 독일 철학자들이다.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정체성에 대한 독일인들의 집착을 설명해줄 수도 있겠다. 멋진 자동차와 최강의 축구팀 덕분에 독일은 가장 빠르고 앞서가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후퇴된 사회 중 하나였다.

영국이 산업혁명을 시작하고 총리가 국회의사당에서 야당의 공격을 받을 때 독일은 여전히 수백 개의 작은 왕국들로 쪼개져 있었다. “Made In Germany”라는 의무적 표시가 싸구려 독일 짝퉁 수입품들을 구별하려는 영국 정부의 규정 아래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런 후진국 독일의 지식인들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고, 독일 왕국을 하나씩 무너뜨리던 나폴레옹은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주장했던 만인의 자유와 권리는 사실 프랑스인의 자유와 권리를 의미했다는 것을 느끼게 된 독일 지식인들은 깊은 트라우마에 빠진다. 그동안 남의 음악에, 남을 위한 음식이 나오는 남의 파티에서 춤추고 있었다는 허탈감이 생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수백 개의 미니 왕국들에 사는 ‘독일인’들의 공통적 정체성은 존재하는가?

 

결론은 언제나 하나였다: 역사와, 언어, 그리고 공통된 스토리들이 한 민족의 정체성을 좌우한다는. 그러기에 그림 형제들은 독일 곳곳을 돌아다니며 ‘백설공주’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같은 이야기들을 모았고, 현재까지 총 60권으로 부풀려진 표준 독일어 사전을 출간해 수백 개의 언어들로 구성된 독일어의 표준화를 시도했다. 그런가 하면 테오도어 몸젠(Theodor Mommsen) 같은 역사학자들은 고대 로마인 타키투스의 저서 『게르마니아』를 통해 2000년 동안 변치 않은 독일인의 정체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동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지구 전체로 이주한 호모 사피엔스의 이동 패턴. 예를 들어 ‘40000’은 약 ‘4만년 전 도착’을 의미한다.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이 언어와 역사와 스토리로 정해진다면, 결국 한 민족의 정체는 언제든지 재해석되고 재활용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변하지 않는 나만의 정체성이 존재할 수 없는 것같이, 시대의 해석과 조작으로부터 자유롭고 객관적인 “민족의 혼”이나 “민족의 정체성”이란 환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보다 ‘우리는 누가 되고 싶은가?’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현재가 미래를 만드는 게 아니다. 현재는 현재일 뿐이고, 현재의 우리는 미래를 상상한다.

원하는 미래를 그리는 순간, 우리는 그 미래를 정당화할 과거를 만들어낸다. “항상 그랬기 때문에”라는 변치 않는 정체성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항상 그랬던” 과거는 “영원히 그럴 거란” 미래를 의미한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말한 대로 “영원히”란 인간에겐 금지된 단어다.

하루 만난 연인에게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는 우리들이기에, “변치 않고 항상”이란 단 하루, 1년, 또는 10년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체성의 핵심은 결국 “무엇”이 아니라 “언제부터”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독일인, 유대인, 한국인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다. 인류의 근원은 어차피 동아프리카에 있다. 호모 에렉투스는 190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를 떠난 호모 에렉투스는 네안데르탈인으로 변신했고, 떠나지 않은 우리의 조상은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 그들은 6만~7만 년 전 또다시 동아프리카를 떠나기 시작했고, 큰 뇌와 발달된 인지 능력으로 무장한 ‘최첨단’ 사피엔스들은 4만 년 전부터 그저 “저것들”인 네안데르탈인들을 멸종시키기 시작한다. 아니, 큰 뇌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단백질이 필요했던 사피엔스들은 네안데르탈인들을 먹잇감으로 사냥하곤 했다. 우리는 다 같이 식인종들의 후손인 것이다.

 

변치 않는 인류의 정체성은 그보다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137억 년 전 빅뱅을 통해 만들어진 우주에서 탄생한 우리 모두 다 같은 고향을 가지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가장 논리적인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바로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이 말했듯 ‘우리는 찬란한 별들의 후손인 것이다’. 정답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제 이 정해진 답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릴 만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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