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생각과 관점의 차이
황선생 와이드 철학논술
Ⅰ. 생각해보기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1951년 62세로 영국 캠브리지에서 숨을 거둔 현대 분석철학 대가로 예술가와 지식인을 존중하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비트겐슈타인 부모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였다.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제철사업가였으며, 예술애호가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오귀스트 로댕, 구스타프 클림트와 같은 예술가를 후원하였으며, 빈 분리파 전시관 설립을 위한 재정을 책임졌다.
비트겐슈타인 집에는 요하네스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와 같은 여러 예술가들이 초대되었다. 브람스는 루트비히보다 두 살 위의 누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그의 주요 작품 가운데 몇몇을 비트겐슈타인 집 음악실에서 초연하였다. 루트비히 형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른팔을 잃고 난 뒤에도 명성을 유지하였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또한 절대음감을 갖고 있었으며, 음악에 대한 열정은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저작에 음악을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했으며, 클라리넷을 능숙하게 연주하였고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기도 하였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교향곡 전체를 외워 휘파람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교생활은 1903년까지 루트비히는 집에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린츠에 있는 린츠 국립실업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보다 6개월 생일이 빠른 아돌프 히틀러는 1년간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학교에 다녔다.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높은 톤 어투에 약간의 말더듬이가 있었고, 우아한 옷을 입은 민감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대부분 동급생이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점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았다.
비트겐슈타인 사상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전기사상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 참혹한 전쟁터에서 직접 경험하고 쓴 『논리철학논고』 잘 나타나고 있다. 후기사상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953년 출간된 『철학적 탐구』에 잘 나타나 있다.
1. 곰브리치 애매도형(다의도형多義圖形, ambiguous figures)
하나의 도형이면서 보는 방법에 따라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으로 볼 수 있는 도형. 애매(曖昧)도형이라고도 한다. 반전도형(反轉圖形)도 다의도형 일종으로 보고 있다.
흔히 「아내와 그 시어머니」라는 다의도형의 사례가 제시되는데, 보기에 따라 젊은 부인으로 보이기도 하고, 노파로도 보이는 도형으로 유명하다.
2. 생각과 관점 오리와 토끼
곰브리치 ‘애매도형’으로 토끼-오리 그림이다.
그림은 변함없지만 대상을 보는 주체가 가지고 있는 시각경험내용이 정신활동과 판단, 보는 방향에 따라 토끼와 오리로 다르게 결론을 내리게 된다. 스프링도 동그랗게 그려놓으면 위인지 아래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된다. 원뿔도 원 중심에 점을 찍어놓으면 위인지 파여진 것을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는 거짓이거나 둘 다 거짓일 수 있다. 둘 다 참일 수는 없다. 이 때 그림의 감춰진 의미가 드러나는데, 이것을 ‘국면의 떠오름’이라고 한다.
오리로 보았던 그림이 토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물리적 대상의 감각적 외양이 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이나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요소를 선택했는가에 따라 오리 부리가 될 수 있고, 토끼 귀가 될 수 있다. 보는 주체의 관점에 따라 물리적 대상의 감각적 외양이나 실재를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Ⅱ. 생각 확대하기
1. 러셀의 패러독스
한 마을에 이발사가 있다. 이 이발사는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면도해 주는 사람이다. 그럼 자신의 면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스스로 면도를 한다면 이는 이발사 의미에 맞지 않는 말이다.
그렇다고 면도를 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을 면도해 준다는 명제에도 맞지 않는 말이다. 결국 그는 어느 부분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언어 오류)
2. 거짓말쟁이 역설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말들은 자기모순이다. 정확히 참 또는 거짓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를 생각해 보자. 만약 이 문장이 참이라면, 문장 내용에 의해 이 문장은 거짓이어야 한다. 반대로 이 문장이 거짓이라면, 역시 문장 내용에 의해 이 문장은 반드시 참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모순된 명제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문장 형식을 잘 보여준다. 그 까닭은 거짓말쟁이는 항상 거짓말만 하고, 진실 된 사람은 항상 진실만 말한다는 애매한 가정이 필요 없게 되기 때문이다.
3. 프레게 동일성(equality)에 관한 논의
동일성은 대상들 간 관계가 아니라, 이름・대상・기호 간 관계라고 한다. 이유는 a=a와 a=b의 인식적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a=a는 선험적인(a priori) 관계로 단순히 사태만 기술하지만, a=b는 우리들에게 지식의 확장을 가져다준다. 예를 들어, 금성은 샛별도 될 수 있고, 개밥바라기도 될 수 있다. 이때, “금성은 샛별이다”와 “금성은 개밥바라기이다”는 진술은 단순한 동어반복이지만,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는 진술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의 확장을 가져다준다. 즉, 천문학적으로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동일한 대상인 금성을 지시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프레게는 의미론에서 뜻(Sinn, sense)과 지시(Bedeutung, reference)에 대한 구분을 강조한다. 즉, 두 개의 표현이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면서도 뜻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금성은 ‘샛별’도 되고 ‘개밥바라기’도 된다. 이는 지시하는 지시체는 동일하지만 그 뜻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뜻과 지시의 구별은 ‘샛별’과 ‘개밥바라기’라는 표현이 동일한 대상인 금성을 지시하지만, 서로 다른 의미로 지시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즉, 하나는 ‘아침에 보이는 별’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저녁에 보이는 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때 낱말의 의미결정 기준은 그 말이 가리키는 지시와 그 말의 내포인 뜻이다. -출처 : 박정식 (안동대), 「비트겐슈타인의 의미결정의 기준」, 동서사상연구소논문집, 「동서사상」 제9집, 2010.
4. 곰브리치 환영
지각에 대한 독특한 특성에 의해 재현되는 것에 대한 곰브라치 이론은 ‘환영이론(Illusion theory) ’이라 불린다. 이는 재현된 그림이 실제와 똑같지 않더라도 혹은 어떤 사물이 재현되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있는 듯한 환영을 느낀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시간 속에서 경험과 같지 않으면서, 공간 속에서 경험과 같지 않지만 환영을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환영은 정확히 말해 모방(Ïmitation)이 될 수 없다. 모방은 3차원인 것을 3차원으로 혹은 2차원을 2차원으로 옮기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예를 들어 위조지폐와 같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환영에 대한 개념을 이런 모방과 구별시키는 한편 잘못된 믿음(false belief)과 분리시킨다. 그는 오케스트라 공연 녹음을 듣는 경우를 예로 든다. 청취자가 녹음된 음을 들으면서 행하는 것은 설제 오케스트라가 공연을 하는 콘서트와 비교가 아니라 콘서트에서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즉 청취자는 콘서트장에 있는 듯한 속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음악이 흘러나오는 박스 뒤에 앉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속임을 당하진 않지만 환영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이 가능한 근거로 곰브라치는 ‘불신의 자발적인 정지(the 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라는 개념을 차용한다. 위의 오디오적 경험을 시각적인 것으로 전환시킨다면 재현에 있어서 환영은 그림에 속아 넘어가서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단지 이차원의 캔버스일 뿐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삼차원의 환영을 받아들이려는 우리의 자발성에 의해 유지되는 시각적 경험이라는 것이다.
환영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극 (stimulate)과 반응(respond)에 대한 관계이다. 생물학자 연구결과에 따르면 특정한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최소한 자극만으로도 가능하다. 오리새끼를 연구한 결과 알에서 깨어난 새끼 오리에게 어미오리 대신 갈색의 두꺼운 종이오리를 움직여 주었더니 그것을 어미인 줄 알고 따라다니는 것을 발견하였다. 충분한 모사가 되어있지 않더라도 특정한 자극, 즉 반응을 촉발(trigger)시키는 힘이 있는 자극만으로도 환영에 대한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식과 관련이 있는 환영 현상은 곰브리치 주장에 있어 여러 층위의 것이 있다. 먼저 환영을 일으키게 하는 것.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미리 어떤 생각을 하고 있거나 혹은 어떤 단어를 들었다면 그 다음에 보는 장면의 지각에 있어서 이미 들었던 단어나 생각이 그 장면의 지각에 영향을 끼쳐서 환영을 일으킬 수 있다.
-출처 : 박지민, 「E.H.곰브리치에 있어서 지각과 도식의 문제」, 홍익대학교 대학교석사논문, 2003.
5. 비트겐슈타인과 언어
비트겐슈타인의 위대한 점은 “언어”를 철학영역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게 한 점이다. 언어는 인간 사유가 구체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도구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유에 대한 한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한계”가 무엇인가를 밝혀야 했으며, 이는 ?논리철학논고?를 쓰게 된 목적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참된 모습이 무엇인가를 밝혀야 했다.
?논리철학논고?에 의하면 언어는 외부적으로 그 언어가 가리켜 보이는 실재세계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며, 내부적으로 일정한 개념이 적용된 전 범위(外延性) 논리에 의해 그 구조가 드러난다. 언어가 외부적으로 실재세계와 갖는 일정한 관계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성립·효력 등에 꼭 있어야 할 성분 또는 조건(要素)이 실재세계 요소와 1대1로 서로 같은 관계를 갖는 동일구조를 말한다. 여기서 요소의 단위는 언어에서는 요소문장이며, 세계에서는 일의 상태나 되어 가는 형편인 사태(事態/사실)가 된다. 이렇게 요소문장과 사태는 서로 동일한 논리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언어는 세계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고 『논리철학논고』는 밝히고 있다.
우리가 언어를 보고 들으면서 그것이 발화하는(묘사하는) 세계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이유는 언어가 세계와 논리적 형식을 공유한다는 점에 있다고 『논리철학논고』는 말한다.
『논리철학논고』는 확실한 언어는 외부적으로 세계를 표현하는 그림 역할을 하며, 내부적으로는 외연성 논리구조를 가진 언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언어는 언어 같아 보이기는 하나 제대로 된 언어 역할을 하지 못하는 언어가 되고 만다. 자연과학적 저술에 씌어진 언어는 제대로 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 형이상학 저술에 활용된 언어는 확실성을 가진 언어가 아닌 경우가 많다고 『논리철학논고』는 분석한다. 제대로 된 언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한 경우에는 무엇을 말하지만 상대와 소통이 안 되는, 즉 말이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로 헛된 시도에 불과하다. ?논리철학논고? 는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종교, 윤리, 예술은 침묵 영역에 속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보았다.
6. 언어와 기호 체계
인간은 약속된 문자로 이름을 붙이고 이름은 기호 체계가 된다. 기호에는 생각과 사유가 담겨 있으며, 이를 통해 커뮤니케이션한다. 때문에 문자는 인간에게 자기 정체성을 갖게 한다. 자신이 볼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모습을 글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고 결론 내리면서 언어는 본질이 없다고 주장한다.
언어는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게임이므로, 언어행위는 언어게임(말놀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행위를 제한하는 규칙이 있다.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판단양식과 반응양식인 원초적 삶의 양식과 문화 차이에 의한 사회역사적 특성인 판단, 행동양식인 문화적 삶의 양식이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삶에 대한 양식에 의해 언어의 성질과 작용이 결정된다. 이는 인간 개념체계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특성과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Ⅲ. 생각정리하기
1. 비트켄슈타인 전반기와 후반기 사상의 비교
전반기 | 후반기 | |
대표저서 | 논리철학논고 | 철학적 탐구 |
철학에 문제의 발생원인 | 언어의 오류 | |
언어에 대한 견해 | 이상언어(언어 통일성) | 일상 언어(언어 다양성) |
참, 거짓 판별의 기준 | 내부와 외부 비교에 따른 참, 거짓의 판별 | 내부세계에서만 참, 거짓의 판별 가능 |
주제에 대한 자세 | 단편적인 주제 분석 | 주제간 자연스런 연결 |
대표이론 | 그림의미이론 | 언어게임이론 |
언어로 이름 지어지는 대상 | 대상 본질을 긍정 | 대상의 본질을 부정 |
참, 거짓 판별의 수단 | 기호논리학 | 용법(문법) |
2. 언어는 여러 가지 종류의 도구와 같다.
“이름을 물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미 어떤 것을 알아야(또는 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는 어떤 사물(entity)이 아니라 인간 삶을 이해하기 위해 동원되는 여러 가지 종류의 도구와 같은 것이다. 언어는 여러 가지 다른 기능을 가진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어의 유일한 본질은 없으며,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언어활동들 사이에는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 있을 뿐이다.
언어는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게임이라 볼 수 있다. 즉 언어행위는 언어게임(말놀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언어행위를 제약하는 규칙은 두 가지 다른 종류인 인간에 대한 삶의 양식(forms of life)에 뿌리박고 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생물학적 특성에 뿌리를 둔 인간에 대한 판단양식, 반응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사회역사적 특성을 지닌 인간에 대한 판단, 행동양식에 뿌리를 둔 것이다.
전자를 “원초적 삶에 대한 양식”이라 한다면 후자는 “문화적 삶에 대한 양식”이라 부를 수 있다. 이렇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삶에 대한 양식에 의해서 언어에 대한 성질과 작용이 결정된다. 이것이 함축하는 뜻은 인간에 대한 개념체계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특성과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3. 생각과 관점 차이
비트겐슈타인 그림이다. 어떤 사람은 오리라고, 어떤 사람은 토끼라고 볼 수 있으나 그림은 불변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 생각과 관점 차이에 의해 해석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보고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은 각자 나름대로의 해석의 틀이 있고 그 틀 위에서 사물을 새롭게 이해하고 재정립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7’이란 수를 동양에서는 좋은 수로 생각하지만, 서양에서는 좋지 않은 수로 생각하는 것은 사물을 이해하기 전에 사물을 해석하는 사회적인 틀이 각 사람마다 정해져 있기 때문에 동일한 현상과 사물이라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4. 그림의미이론
“언어와 세계는 논리학이 세계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관계한다.”
“언어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그림이며, 그러한 한에 있어서 언어는 의미를 갖는다.”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는 “어떻게 언어가 세상을 나타낼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림이론(Picture Theory)으로 이를 설명한다.
그림과 세계에 대한 관련방식(양자 구성요소들 간 대응관계, 구조 동일성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이 방식을 언어에 적용하여 언어가 세계의 그림임을 밝힌다.
“그림 속에 있는 요소는 세계 속에 있는 대상과 짝을 이루고, 그림 속에 있는 요소 배열은 실재하는 대상의 가능한 배열에 짝을 이룬다. 문장은 이름을 포함하고, 이 이름이 세계 속에 있는 대상에 짝을 이루며, 문장 속에서 이름의 배열 역시, 세계 속에 있는 대상에 대한 가능한 배열에 짝을 이룬다.
따라서 그림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나타내듯, 언어 또한 그림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다. 언어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그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실재를 표상할 수 있으려면, (문장이 사태[가능한 사실]를 표상할 수 있으려면) 문장과 사태 사이에 공통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문장과 문장이 표상하는 사태가 어떤 공통적인 구조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문장은 가능한 사실에 대한 일종의 그림과 같은 것이 된다고 보았다.
5. 언어게임이론
언어게임이론이란 언어가 외적 세계에 대한 그림이 아니라, 게임과 같은 인간 공동 활동이며, 말의 의미 역시 말과 대상의 상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에 있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물”이라는 말은 그 말의 발언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목마를 때나 화재발생시, 또는 화학실험의 경우 “물”이란 말의 의미는 모두 다르다. 이는 마치 유사한 공놀이이지만 각기 다른 규칙 속에서 진행되는 야구, 축구, 농구 같은 게임을 생각할 때와 비슷하다)
이러한 이론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언어에 대한 의미를 그 언어의 다양한 사용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과 언어가 일종의 게임과 같은 것이기에 (즉, 다수의 참여와 그 게임의 규칙준수가 전제되기에) 언어에는 공공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은 마치 놀이를 하듯이 (진지하게 그러나 이것을 의식하지는 못한 채로) 하나의 활동을 하는 것이며, 이것은 언어가 우리 삶의 한 형식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말의 의미를 논할 때, 언어의 형식적인 구조보다는 실제적인 활동문맥이, 불변의 대상적 세계보다는 삶의 형식이 초점이 된다. 즉, 한 진술의 참·거짓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언어행위가 주목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언어활동의 다양성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를 언어활동 자체를 떠나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치 다양한 게임들을 통해 이들의 공통된 규칙을 찾지 못하고 다만 가족과도 같은 유사성만을 발견하듯이, 언어활동 역시 그 자체를 벗어난 상태에서 그 의미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또한, 언어활동은 다수가 참여하며 다수가 합의한 규칙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언어란 일종의 집단 게임이다. 즉, 언어는 그 게임의 성격상 공공성을 띈다. 이러한 논의에서 “언어게임의 최종적인 정당성은 그 게임의 집단적 실천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사적 언어의 불가능성 또한 그의 이론에서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 출처 : http://www.nalm.info
6. 그림과 언어에 대한 상관관계
그림과 언어에 대한 상관관계를 논의의 단계에 따라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림 | 언어 |
2. 우리는 사실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 명제는 사실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
3. 그림은 실재 모델이다. | 명제는 실재 모델이다. |
4. 그림이 나타내는 것이 그림에 대한 의미이다. | 명제가 그리는 사실이 명제에 대한 의미이다. |
5. 그림을 구성하는 것은 그림에 대한 요소들이 서로 특정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 명제를 구성하는 것은 명제에 대한 요소들이 서로 특정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
6. 그림의 요소들이 서로 특정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실재 요소들도 그림의 요소들과 공통된 방식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 명제의 요소들이 서로 특정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의 요소들도 명제의 요소들과 공통된 방식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
7. 그림이 실재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방식은 그림 형식이다. | 명제가 사실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방식은 논리적 형식이다. |
언어의미가 세계와 관계에서 해명된다는 가정은 표 1, 2, 3에서 구체화되었다. 즉, 언어와 세계 관계는 명제가 사실을 그리는 관계이며 명제의미는 그 명제가 그리는 사실인 것이다.
한편 이름이 대상을 지칭한다는 원리는 표 4, 5, 6 맥락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된다. 그림형식이 실재 요소들, 그림 요소들과 공통된 방식으로 관련될 수 있다는 가능성인 것처럼 논리적 형식은 사실 요소들이 명제 요소들과 공통된 방식으로 관련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런데 사실 요소는 논리적 단순체인 대상이고 명제 요소는 논리적 단순체인 이름이므로 대상들이 결합하여 사실을 구성하는 논리적 형식과 이름들이 결합하여 명제를 구성하는 논리적 형식은 동일하다. 이로부터 언어와 세계 사이의 이원적 동형성이 도출된다.
한편 명제와 사실 사이에는 명제가 사실을 그리는 관계가 설정 되어 있다. 그렇다면 명제를 구성하는 이름과 사실을 구성하는 대상사이에도 어떤 관계가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림 관계는 명제와 사실 사이에만 국한되므로 이름과 대상 사이의 관계는 그림 관계와는 달라야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름이 대상을 지시한다는 원리를 도입하여 양자의 관계를 맺어 주는 것이다. -출처 : 『현대철학의 흐름』, 동녘, 1996.
Ⅳ. 논제 찾아보기
어떤 사람은 오리라고, 어떤 사람은 토끼라고 볼 수 있으나 그림은 불변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 생각과 관점 차이에 의해 해석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보고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은 각자 나름대로의 해석의 틀이 있고 그 틀 위에서 사물을 새롭게 이해하고 재정립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7’이란 수를 동양에서는 좋은 수로 생각하지만, 서양에서는 좋지 않은 수로 생각하는 것은 사물을 이해하기 전에 사물을 해석하는 사회적인 틀이 각 사람마다 정해져 있기 때문에 동일한 현상과 사물이라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언어가 올바른 소통 수단이 되려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똑같은 의미소로 해석해야 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언어와 지시 대상(‘떡’이라는 언어와 실제 떡)의 관계는 당연히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가정’일 뿐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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