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일반

몽테뉴 수상록

rainbow3 2019. 9. 17. 01:14

몽테뉴 "누구나 앞을 보지만, 난 나를 들여다본다"

 

스토아철학 통해 죽음을 파헤쳤던 그… 실제로 죽음 경험한 후엔 감각을 칭송

자신의 내부 들여다보며 '수상록' 집필몽… 테뉴는 말한다, 사는 것은 생각하는 것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몽테뉴(1533~1592)는 서재 천장으로 팔을 뻗어 몇 해 전 들보에 적어 놓았던 문장 하나를 지웠다. 16세기가 저물어갈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없애버린 경구(警句)는 "더 오래 살아도 새롭게 얻을 낙은 없다"(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

막역한 친구 라 보에티, 존경했던 아버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다섯 자녀를 차례로 잃는 불행을 겪은 뒤 법관직을 사퇴하고 은거하면서 '어슬렁어슬렁 죽음을 향해 기어가야겠다' 다짐하며 옮겼던 글이다. 그것을 지웠으니 '삶의 철학'으로 나아갈 참이었다.

 

 

(오른쪽 사진)몽테뉴의 초상화. 그는“술을 시음하듯 인생의 맛을 알고 싶어 글을 쓴다”고 했다. /책읽는수요일 제공

 

 

역사는 몽테뉴를 '자기 자신에 대해 쓴 최초의 철학자'로 기록한다. 이 프랑스 사상가는 근대 철학의 창시자 데카르트("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달리 절대적인 확실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음울한 중세 그리스도교와 태동하는 과학 사이에서 일상이 경시될 무렵, 몽테뉴는 '수상록(Essais)'을 집필하며 삶 자체에 집중했다. 다들 앞을 바라볼 때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본 셈이다.

◇철학은 죽는 법을 배우는 학문이다?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 서문에서 그리스 예술을 가리켜 한 말이다. 16세기는 도처에 죽음이 있었다. 난폭한 전쟁과 전염병이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수상록'은 몽테뉴를 덮친 극한의 불행 때문에 더 숭고하다. 문학이 죽음에 대한 상상에 큰 빚을 지고 있듯이, 그는 폐허 위를 검시(檢屍)하듯 맴도는 상념 속에서 글을 써나갔다.

몽테뉴는 정념이나 감각으로부터 이성을 분리시키는 스토아철학을 무기로 죽음과 싸웠다. 초기 작품 중 하나에 '철학은 죽는 법을 배우는 학문이다'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낙마(落馬) 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면서 회의(懷疑)에 빠진다. 인간의 정신은 육체와 단단하게 묶여 있고, 우리는 늘 비틀거리며 불확실성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는 내세를 동경하는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자에서 벗어나 인간과 육체, 자연 쪽으로 이끌린다. 염세주의와의 결별이다.

몽테뉴는 손에 잡히는 것으로 돌아간다. 신체가 느끼는 감각을 칭송하며 스토아철학을 내던진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늘 자신을 초월하는 곳에서 맴돈다. 앞날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에 정신이 팔려 현재에 대해 느끼거나 생각할 시간을 놓치는 것이다."


◇동물의 관점에서 인간을 읽다

몽테뉴 작품에는 동물이 자주 등장한다. 글을 쓰는 까닭에 대해 "말을 길들이듯 기분을 가다듬고 성질을 한풀 꺾어놓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돈키호테가 떠오른다. 그는 나흘 고민 끝에 자기 말에 로시난테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퇴역한, 짐 나르는 말'이라는 뜻이다. 늙은 자신을 빗댄 것이었다.

동물의 가치를 깎아내린 데카르트와 달리, 몽테뉴는 "사람은 동물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한다"고 썼다. 동물에게 언어가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놀 때 사실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 구절에선 몽테뉴의 회의주의가 즉물적으로 만져진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담을 세우지 않고 인간을 창조 사슬의 일부분으로 보았다(우리는 이것을 '진화'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그는 더없이 인간적이다.

◇인생의 맛을 발견하다

이 책은 몽테뉴의 일생을 추적하며 삶이 어떻게 철학을 탄생시켰는지 들려준다. 당신이 평범함의 힘을 알고 '지금 여기'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면 400여년 전 몽테뉴에게 감사할 일이다. 허무주의의 대표 철학자 니체도 "몽테뉴의 글 덕분에 이 세상을 사는 기쁨이 커졌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와 함께 느긋하게 인생을 즐기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다.

몽테뉴는 신장결석으로 삶의 끄트머리로 몰리면서도 작은 것들을 눈에 담고 글로 옮겼다. 말 한 필, 책 한 권, 와인 한잔…. 에세이 '나태에 대하여'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농작물이 싹트고 자라기 시작하면 갖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심는 일은 힘들지 않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다양한 걱정거리를 떠안게 된다." 여생을 술통 밑에 가라앉은 앙금에 비유하기도 했다.

르네상스 문학에 정통한 저자는 "몽테뉴는 근대 개인주의 문학의 창시자"라면서 "셰익스피어의 '햄릿' '템페스트'에도 몽테뉴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했다. 여행·섹스·자아 등 열두 갈래로 몽테뉴를 들여다본 책이다. 그는 마치 결론처럼 '사는 것이 곧 생각하는 것'이라고 썼다.

답 안 나오는 힐링 서적보다 낫다. 삶에 무덤덤해진 독자에게 더 황홀하게 읽힌다.

 

  

[허연의 명저 산책]

미셸 드 몽테뉴 `수상록 Les Essais`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인간 성찰 담은 에세이의 원조

 

속설에 지식인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고 한다.

산속에 들어가서 장자가 되는 부류가 있고, 세상에 나와 싸우는 부류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경계인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몽테뉴는 경계인이었다. 몽테뉴가 살았던 16세기 유럽은 겉으로는 르네상스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매우 비이성적인 암흑기였다. 가톨릭과 신교의 대립, 다시 신교 내부에서 벌어진 루터파와 칼뱅파의 갈등이 사회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어느 쪽이나 `그리스도`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일 뿐이었다. 여기에 페스트와 기근까지 겹쳐 세상은 혼란스러웠다.

몽테뉴는 프랑스 왕정의 시종무관과 조세심의관을 지내는 등 현실권력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은둔자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직에 있으면서도 늘 권력과 법으로부터 거리를 두었고, 가톨릭 교도였으면서도 신교도를 적대적으로 보지 않았다.

무능하고 썩어빠진 보수 권력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뭐든지 갈아엎자는 식의 개혁파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이런 면모 때문에 그를 비겁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필자 생각에 몽테뉴는 경계인이었다.

그는 지나친 주의나 주장이 지닌 허구를 일찌감치 알았던 것이다. 그는 그 파벌에 가담하는 것으로 자기를 증명하지 않고 집필을 통해 증명했다.

 

 

 

 

 

몽테뉴가 스스로에게 던진 유명한 명제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였다. 그는 개인과 사회, 종교와 과학, 교육과 형벌, 남녀평등, 자연과 문명, 권력과 평등부터 삶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사색 여행을 시작한다. 몽테뉴는 사색을 하면서 틈틈이 그 내용을 정리해 책으로 낸다. `수상록`이다.

"그대가 비굴하고 잔인한지, 성실하고 경건한지를 아는 자는 그대 자신밖에 없다.

남들은 그대의 기교를 볼 뿐 그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의 판단에 얽매이지 말라.

그대의 양심과 판단을 존중하라."

1570년 몽테뉴가 보르도 고등법원 참사를 그만둔 직후부터 1592년 죽을 때까지 수많은 첨삭을 거쳐 탄생시킨 3권짜리 `수상록`은 `에세이`라는 글쓰기 장르의 원조가 됐다. 몽테뉴가 책을 출간하면서 붙인 제목이 `에세(Les Essais)`였다. `에세`는 프랑스어로 시험이나 시도, 경험을 의미했는데 몽테뉴가 이 제목을 붙인 이유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사색의 결과물을 담았다는 집필 의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언젠가부터 `수필`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문학작품과 실용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글을 의미하는 뜻으로 확장된 것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신화와 역사,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명제에 대한 답을 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수상록`에는 주옥 같은 경구들이 무척 많다.

"어리석은 자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자기 주장을 고수하고 흥분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모르는 것을 가장 잘 믿는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 버리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정말 나다워질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

"인생은 선도 악도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선의 무대가 되기도 하고 악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몽테뉴 `수상록`은 현대 프랑스, 더 나아가 서구 사회철학의 근간이 됐다. 그의 글이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용, 다양성에 대한 존중,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으로 수렴되고 있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만년에 앙리 4세로부터 관직에 나오라는 거듭된 요청을 받았지만 "관직은 제 몸 하나 가릴 수 없는 참 가련한 신세"라며 끝내 고사했고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2>‘수상록’의 미셸 드 몽테뉴

 

“확실한 건 없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일생의 화두로

 

1560년, 수년간 ‘진짜’ 마르탱 게르 행세를 한 ‘가짜’ 마르탱 게르에 대한 재판이 파리 고등법원에서 진행되었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책과 영화로도 잘 알려진 이 희대의 사건은, 재판 말미에 진짜 마르탱 게르가 출현하는 대반전을 거쳐 가짜 마르탱 게르가 처형당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당시 보르도 고등법원에서 근무하면서 이 사건을 전해들은 몽테뉴는, 이 사건의 진실을 법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가짜 마르탱 게르는 최선을 다해 진짜 마르탱 게르로 살았고, 진짜의 죽마고우도 아내도 모두 가짜 마르탱 게르를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진실은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법이 진실을 판단할 권리와 능력이 있는가.

몽테뉴가 보기에 마르탱 게르 사건은 법이나 지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인간의 모순성과 삶의 불가해함, 사실을 넘어선 진실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가톨릭이냐 프로테스탄트냐, 루터파냐 칼뱅파냐를 기준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가짜 마르탱 게르’처럼 온전히 자신의 행위와 말과 정신으로 자립(自立)하기를 갈망했던 자. 삶의 진실을 신에게 묻지 않고 자신의 걸음 속에 담고자 했던 자. 스스로 미친 자가 되어 길을 떠난 돈키호테보다 조금 앞서, 여기, 자신을 탐색함으로써 광기의 시대를 온전히 살아낸 자, 몽테뉴가 있다.

 

 

 

▲ 진실을 추구하는 법관을 지냈으나 정작 진실을 안다고 말하기 어려워했던 몽테뉴. 그래서 그의 회의주의적 태도는 숙명론적이라기보다 겸손함에 가깝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힘을 다해서 하여라. 네가 장차 들어갈 무덤 속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다.”

 

몽테뉴는 ‘전도서’의 구절을 12개나 발췌하여 서재 천장에 명문으로 새겨 놓았다고 한다. 몽테뉴가 인용한 유일한 성서 구절이다. 살벌한 ‘종교의 시대’에 몽테뉴는 대담하게도,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그는 고전 속에서 자기 시대와 인간을 읽었으며, 고전을 통해 전란의 늪에서 재생(Re-naissance)할 수 있었다.

흔히 르네상스를 찬란한 빛과 색의 시대로 상상하지만, 정작 16세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전쟁과 죽음이다. 1598년에 낭트칙령이 공포됨으로써 기나긴 종교전쟁이 막을 내리기 전까지, 가톨릭과 이에 ‘항의’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를 내세운 왕과 귀족들의 대규모 살육경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거기에 기근과 페스트까지, 16세기는 흡사 태피스트리처럼, 화려한 문예부흥의 뒷면에 상상할 수도 없는 상처와 모순을 깔고 있었다. 휴머니즘? 그런 건 헛되고 헛된 이상에 불과했고, ‘그리스도의 이름’은 살육에 필요한 명분일 뿐이었다.

 

“기독교의 적개심만큼 격렬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신앙심은 우리의 증오심, 잔혹함, 야심, 탐혹, 중상모략, 반역의 성향을 조장할 때는 참으로 놀랄 만한 힘을 발휘한다. 우리의 종교는 악덕을 근절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오히려 악덕을 감추고 키우고 부추기고 있다.”

 

전란의 한복판에서 몽테뉴는 그리스, 로마인들의 절제된 태도를 견지한 채 광신의 결과를 묵묵히 응시했다.

에라스무스의 자유주의 교육을 신봉하고, 칼 대신 펜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간파한 부친은 몽테뉴에게 두 살 때부터 라틴어를 교육시킨다. 우리로 치면, 모두가 한글을 쓰는 시대에 한문으로만 말하고 쓰게 하는, 기이한 조기교육을 실행한 셈이다. 몽테뉴가 어떤 종교나 정파와도 거리를 두며 보신(保身)할 수 있었던 데는 부친의 이런 ‘반시대적’ 조기교육이 공헌한 바가 크다.

청년기에 파리 왕립교수단에서 그리스 철학을 공부한 몽테뉴는 유학을 마치고 고향 보르도로 돌아온 1557년부터 고등법원에서 조세심의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어떤 절차로 법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법관이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법률이 신뢰를 얻는 것은 공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법률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법률이 가진 권위의 불가사의한 근거이고, 그 밖에는 아무 근거도 없다. 어쨌든 늘 공허하고 판단이 불안정한 인간이 법률을 만든다.”

 

몽테뉴의 ‘몽테뉴다움’이 여기 있다. 그는 한번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을 확신한 적이 없다. 법관으로 근무할 때는 법의 판단력을, 파리 궁정에서 왕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할 때는 국가와 군주권력의 토대를 의심했다. 가톨릭이었지만 프로테스탄트에 적대적이지 않았고, 또 한편으로는 ‘새것’을 만들려는 일체의 개혁주의에 진저리를 쳤다. 확신으로 움직이는 제도와 권력에 대한 주의 깊은 거리감 때문인지, 후대는 그를 비겁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몽테뉴는, 모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유토피아’를 상상한 대가로 처형된 토머스 모어보다는, “우리 인간은 얻어맞거나 걷어차이면서도 왜 이처럼 참을성 있게 폭군의 굴레와 족쇄를 감수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던 에티엔 드 라 보에시에 주목한다.

나는, 인간은 왜 이토록 무력한가. 인간이란 모순으로 가득 찬 존재고, “자신에 대해 절대적으로, 단순하게, 결정적으로, 혼란이나 혼동 없이, 단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자신을 끔찍하게 미워했던 어머니와, 동생과 바람난 아내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음경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을 동반한 신장결석증을 앓으면서도 병원 한번 찾지 않고 고통을 감내한 것도, 어떤 것도(그것이 심지어 병이나 죽음일지라도) 함부로 판단하거나 내쳐서는 안 된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일생의 화두는 이런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13년간의 법관 생활을 마치고 마흔 살이 된 몽테뉴는 고향으로 내려가 이 문제에 대한 탐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 몽테뉴는 마흔 이후 1000권의 책을 읽으면서 집필 활동에만 몰두했다.

그가 스스로를 유폐시켰던 성 안쪽의 서재.

 

 

▲ 영화 ‘마르탱 게르의 귀향’ 포스터. 이 사건을 전해들은 몽테뉴는 ‘진실’이 가능한지 의심했다.

 

 

●‘에세’, 전장에서의 산책

“무언가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찾아냈다’, ‘찾을 수 없다’, ‘아직 찾고 있다’ 가운데 어느 하나로 귀착한다.”

 

몽테뉴가 주목한 것은 ‘아직 찾고 있는 중’이었던 회의론자들이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입증될 수 없다. 판단의 주체도, 판단의 대상도 끊임없는 변화와 동요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성을 필요로 하는 건, 결정하고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전제를 의심하기 위해서다.

 

“회의론자는 온갖 의견들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반대되는 판단은 나를 분개시키지도 흥분시키지도 않고, 오히려 나를 눈뜨게 하고 단련할 뿐이다.”

 

이것이 몽테뉴 식의 회의였고, 때문에 그의 회의는 가볍고 명랑하다. 1572년부터 거의 죽기 직전까지 수정과 첨삭을 거듭하며 집필한 ‘에세’는 그의 명랑하고도 예리한 질문들로 가득하다.

흔히 ‘수상록’으로 번역되는 ‘에세’(Les Essais)는 몽테뉴 자신의 말을 빌리면 “정신의 잡동사니”이자 사유 시험(essai)이라고 할 수 있다. 몽테뉴는 “평화가 그 온전한 모습을 보여준 일이 전혀 없던” 전쟁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즉흥적 사유를 기록하는 일에 몰두한다.

 

“여기에 쓰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내 타고난 능력의 시험(essai)일 뿐, 후천적으로 얻은 능력의 시험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남들이 내 무지를 공격해도 별로 곤란할 건 없다. 무지의 자각이야말로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는 가장 아름답고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무리 흐트러진 걸음걸이라도 평소의 자연스러운 내 걸음걸이를 보여주고 싶다.”

 

문체에서 느껴지는 극도의 침착함과 단순함, 종종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명랑한 어조 때문에 ‘에세’를 읽으며 화약냄새와 총포 소리를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

몽테뉴는 평가하고 판단하기보다는, 판단을 중지한 채 의심하고 회의한다. 그는 신 앞에서 맹세의 언어를 남발하는 권력자보다는 시장의 언어로 삶의 지혜를 기록하는 은자(隱者)가 되길 꿈꿨다. 무도한 세상이 종종 그의 판단과 능력을 필요로 하기도 했지만, 그때도 그는 중심을 잃지 않고 나아갔다가 침착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펜으로 걸었다”.

“인생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대가 인생에 마련해 주는 자리의 좋고 나쁨에 따른다.”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과 자연과 이성을 사유한 몽테뉴가 터득한 지혜다.


●니체·푸코가 회의주의 본받아

세상을 편히 사는 법을 알아내라는 과제가 주어진다면 몽테뉴와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던 니체는, 손을 떨게 하거나 눈물을 글썽거리게 하지 않는, 겸허하면서도 용기 있는 그의 사상을 예찬했다. 우리는 인간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만 말할 수 있을 뿐, 인간의 본질이라든가 의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푸코 역시 몽테뉴의 회의주의를 한편에 늘 품고 있었다.

우리 자신의 최고 걸작품은 “떳떳하게 살아가는 일”이라며, 과(過)도 부족도 없이 “분수에 맞는 평이하고 건강한 지혜”를 최고의 지혜로 삼았던 몽테뉴. 이 죽음과 불안의 시대에, 나 역시 그의 가르침을 본받고 싶다.

 

“나는 그날그날을 살고 있다.

그리고 실례인 줄 알면서도, 단지 나만을 위해 살고 있다. 내 목적은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