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어떻게 정의(定義)할 것인가*
─생사학과 불교의 관점을 중심으로
오진탁
한림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Ⅱ. 육체중심의 죽음이해
Ⅲ. 생사학의 죽음이해
Ⅳ. 불교의 죽음이해
Ⅴ. 바람직한 죽음정의 모색
요약문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왜 그토록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심한 것인지, 불행하게 죽어 가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인지, 자살사망률이 최근 들어 왜 급증하는 것인지 문제를 추적해 보니까, 그 근원에는 죽음에 대한 오해, 육체 중심의 인간이해와 죽음정의가 오해의 근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죽음정의는 쉽게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실용적 차원에서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 제시라는 의학적 문제로 축소되었다. 인간의 죽음은 단지 뇌사, 심폐사같은 의학적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의 문제로 축소되니까, 사람들의 죽음 이해 역시 육체 중심으로 한정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죽음이란 아무것도 없는 종말이라기보다, 낡아서 헤어졌을 때 갈아입는 옷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죽음을 부정하거나 터부시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뇌사 혹은 심폐사같은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에 따라 죽음을 정의하고 있지만, 육체의 소멸에 입각해 죽음을 정의해서는 안된다. 생사학의 창시자 퀴블러로스는,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으므로, 육체적 물질적 영역을 넘어 있는 것을 고려해 죽음을 정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제어
죽음정의, 생사학, 뇌사, 심폐사, 육체적 죽음의 의학적 기준, 영혼, 죽음준비교육
Ⅰ. 들어가는 말
최근 현대의학의 발달에 따라 전에 찾아보기 어려웠던 뇌사, 식물인간, 안락사, 임사체험, 호스피스 등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현상들이 주목받고 있다. 현대의학이 급속도로 발달함에 따라 죽어가는 환자도 적절한 의학적 조치가 취해지기만 한다면, 몇 년간이나 죽지 않을 수 있게 할 수 있다. 종합병원 중환자실이나 응급실에는 이런 환자들이 연명치료 장치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보라매 병원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유죄 확정 판결이 2004년 6월29일 내려진 이후, 환자를 퇴원시키려고 하는 보호자와 이를 저지하려는 의사 사이의 실랑이는 계속 되고 있다.
안락사 문제와 함께, 과연 어떻게 죽는 것이 인간적인 죽음이냐 하는 문제가 세계적인 관심사로 되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자살현상도 성숙한 죽음문화의 부재와 관련된다.
생사학, 죽음준비교육, 자살예방교육도 새로운 연구와 교육 분야로 형성되면서 인간으로서 존엄한 죽음 권리, 바람직한 죽음문화의 모색 등도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죽음 이해와 개념규정의 방향에 따라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나 타부 등을 야기하기도 하고, 삶과 죽음의 방식까지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므로, 죽음에 대한 개념정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죽음이 물화(物化)되고 양화(量化)되는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인 일로 다루어지면서, 죽음담론은 종교에서조차 중요한 일들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다.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도 국토관리라는 경제적 이유가 그 논거로 제시되고 있고, 주검은 위생적으로 다루어야 할 쓰레기로 전락되었다. 우리의 죽음이해는 여전히 암울하고 불투명하다.
이런 우리 사회의 죽음문화와 관련해 원로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노년에 이르면, 죽음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우리 사회의 풍토가 얼마나 황량한 것인지 절감하게 된다. 자신의 죽음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고, 결국 자신이 살아온 삶이 평가절하되고 무화(無化)되어 버린다는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하면 현대인의 죽음이해가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을, 현실에서 만나는 인간의 죽음 경험에서 간과하고 있든지 망각하고 있든지 아니면 잃어버리고 있음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죽음문화의 현실이 이렇다면, 우리는 죽음이 정말 무엇인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1)
1) 정진홍 편 『웰다잉 전문지도강사 매뉴얼』 (서울 : 각당복지재단, 2007년) pp.41-42
우리 사회는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김 할머니 가족의 존엄사 요구를 인정한 서울 지방법원(2008년 11월28일), 고등법원(2009년 2월10일), 그리고 대법원(2009년 5월21일)의 판결로 인해 안락사와 존엄사 논란이 활발하게 전개된 바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존엄사, 소극적 안락사, 연명치료 중단 찬반여부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의학적 법률적 죽음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었을 뿐이다. 대법원 확정판결 이후 언론에서는 존엄사 법제화를 서두르자는 사설을 게재하기까지 했다.
우리 사회는 죽음문화의 부재, 토론문화의 결핍, 그리고 조급증으로 인해 진지한 토론과 과정을 무시한 채 존엄사 문제에 대해 하루라도 빨리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2008년 9월 유명 탤런트 최진실씨의 자살로 인해 우리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자살예방을 위한 사회적 노력과 시스템 마련은 아무것도 진전된 게 없이 다 식어버렸듯이, 존엄사 논란도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다. 존엄사를 법제화한다고 우리 사회 죽음이해와 임종방식이 성숙될 수 있을까. 죽음문제를 법으로 해결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2)
2) 임종을 가장 많이 접하는 의료계에서 죽음을 외면하는 경향이 가장 심한 것은 아이러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있는 요즈음, 병실과 장례식장 사이 중간단계 호스피스나 임종실을 운영하는 병원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의사나 간호사 대상으로 죽음준비교육도 전혀 실시되고 있지 않다.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임종환자를 보살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의료현장에서는 심폐사와
뇌사가 죽음정의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육체만의 존재,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심폐사와 뇌사는 의학적 죽음판정의 기준에 불과할 뿐이지 결코 죽음 정의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육체만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사회는 죽음문화 성숙을 위해 과연 어떤 노력을 했는지, 존엄사 법제화를 논할 정도로 충분히 준비되었는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묻고 싶다.
죽음은 바르게 이해되고 있는가?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인가?
인간은 육체만의 존재인가?
임종하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전국의 의과대학에 죽음을 가르치는 생사학 관련 교과목과 전문가는 있는가?
죽음준비교육은 초등 학교, 중고등 학교, 대학에서 실시하고 있는가?
또한 평생 교육의 방식으로 웰다잉 교육은 다양한 연령층에 실시하고 있는가?
생사학을 연구하고 죽음준비교육을 할 수 있는 전문가는 있는가?
나아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죽음준비는 어느 정도 하고 있는가?
또한 우리 사회 죽음의 질은 과연 어떠한지도 묻고 싶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죽음의 질이 가장 나쁜 나라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자살률이 OECD 가입국 중 1위로 자살대국 일본을 훌쩍 넘어섰다.
자살충동률의 경우 청소년상담원이 2007년 9월 청소년 4천5백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10명 중 6명이 자살충동을 느끼고 있고, 10명 중 1명이 자살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세계보건기구가 인정한 조사도구로 우울증 유병률을 조사했을 때 10명 중 5, 6 명 정도가 우울증세로 판정받고 있다. 노인의 경우 자살충동률이 80%가 넘는다는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 대부분은 편안하게 임종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여유있는 임종모습, 주위에서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가?
Ⅱ. 육체중심의 죽음이해
먼저 죽음 정의라는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블랙 법률사전 Black’s law dictionary』 4판에서는 죽음에 대한 전통적 정의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음, 생명의 중지. 존재하기를 멈춤. 혈액순환이 체계적으로 멈췄으며 그 결과로 호흡, 맥박과 같은 동물적 생명 기능이 정지했다고 의사가 규정한다.”3)
또 하버드대 뇌사위원회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죽음정의에 의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이전 보다 이식에 필요한 장기의 활력 조건이 크게 향상될 것이기 때문이다……비록 뇌는 죽었지만
다른 장기는 유용한 상태인 한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라고 말하면서 분명히 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4)
3) 피터 싱어『 삶과 죽음』 장동익 역 (서울 : 철학과 현실사, 2003년) p.38에서 재인용
4) 피터 싱어『 삶과 죽음』 p.45
새로운 죽음정의로 생명을 구한다?
새로운 죽음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장기이식이 훨씬 활성화된다?
“뇌는 죽었지만 다른 장기는 유용한 상태인 한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라고 말하면서 분명히 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죽음을 이렇게 정의해도 되는 것인가? 인간이 뇌만의 존재, 육체만의 존재인가?
이런 죽음정의에 의해 장기이식은 활성화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잘못된 죽음정의에 의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인간존재는 도구적 관점에서 이해되고, 죽음도 실용적 측면에서 정의된다면, 인간존재는 육체만의 존재로 물질화되어 현대 사회의 물신주의 풍조는 더욱 가속되고 생명경시는 한층 만연될 것이다. 그로 인한 비극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개념 정의하느냐 하는 죽음정의 문제는 죽음 판정의 육체적 기준과 죽음 판정기준 충족 여부 검사와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개념이 서로 혼동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심폐사와 뇌사는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일 뿐으로 의학적 죽음정의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코 죽음의 정의가 될 수 없다. 인간이 육체만의 존재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죽음정의는 육체의 죽음에 한정시켜 규정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죽음정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철학적인 문제이지만, 의학적 죽음의 육체적 기준 제시와 죽음 판정기준 충족 여부 검사는 기본적으로 의학적인 문제이다.5)
5) 임종식 『생명의 시작과 끝』(서울 : 로뎀나무, 1999년) pp.247-248
죽음정의 문제를 다루는 생명윤리, 의료윤리 관련문헌을 조사했더니 심폐사와 뇌사 등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만 논의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의 성숙한 죽음문화 부재 현상과 죽음에 대한 오해, 그리고 자살사망률 급증은 이와 같은 육체 중심의 죽음정의와 관계된다. 죽음 판정의 육체적 기준 제시와 죽음 판정기준 충족검사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보다 큰 틀에서 죽음정의 문제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차분히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죽음정의가 도출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영혼의 존재 여부 같은 문제는 현실적으로 의견차이로 인해 결론을 도출하기 어려울 수 있으므로, 의견 차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고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제시하기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의학의 입장에서 볼 때 철학적, 종교적 측면에서 보는 죽음정의와 한 가지로 정리하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죽음의 육체적 측면, 즉 의학적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된 생명경시 풍조 역시 이와같은 육체중심의 인간이해와 관련되어 있지 않은가.
죽음정의 같은 철학적인 문제는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그런 문제는 분명 아니다. 이런 이유에서 죽음정의는 결론을 도출하기 어려우므로, 실용적 차원에서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 제시라는 의학적 문제로 축소되었다. 영혼의 존재 문제라든가 사후세계 문제 등에 철학적, 종교적으로 폭넓게 접근해 바람직한 방식으로 죽음을 규정하기 위한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심폐사와 뇌사는 죽음 판정의 육체적 기준과 관련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죽음 정의 문제인 양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죽음정의 문제는 인간의 육신에 초점을 맞추어 단지 의료적인 문제, 법적인 차원에 한정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죽음은 단지 뇌사, 심폐사같은 의학적 차원의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의 문제로 축소되니까, 사람들의 죽음 이해 역시 육체 중심으로 한정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어느 생명윤리 전공 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정의하고 논의할 수 있는 영역은 육체적 죽음뿐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죽음이라는 개념은 우선 생물학적인 현상을 의미하며, 생명체 및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종말로 이해된다.
죽음은 문화형태나 종교적 전통, 과학적 지식에 따라 다양하게 파악될 수 있다. 사후에 지속되는 삶에 대한 종교적 상상도 의학적 의미의 사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종교에서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삶은 지속된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란 육체적 지속성이 끝나고, 생명이 돌이킬 수 없이 소멸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대해 의학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논란의 여지가 없다”6)
물론 죽음을 정의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생명윤리 전공학자의 지적대로 “죽음이란 육체적 지속성이 끝나고, 생명이 돌이킬 수 없이 소멸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대해 의학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논란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의학적인 설명은 몸의 소멸을 선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법률적인 죽음 이해 역시 사회적 존재로서 개체의 소멸을 뜻한다. 하지만 몸의 소멸로 죽음을 설명하는 것은 의학적 설명일 뿐이지 않은가. 죽음을 육체의 소멸로 설명한다고 해서 충분할까. 육체의 소멸로 죽음을 말하는 것은 의학자가 할 일이다.
철학교수 혹은 생명윤리 전공학자도 마찬가지로 육체의 소멸로만 죽음을 말해도 되는 것일까. 그의 주장대로 ‘우리가 정의하고 논의할 수 있는 영역은 육체적 죽음뿐’ 이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에 의학 이외에 철학이나 생명윤리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생명윤리 전공학자의 말대로 육체의 소멸이라는 말로 죽음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면, 생명윤리를 차라리 ‘육체의 윤리’라고 바꾸어 부르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 원로학자 정진홍 교수는 죽음이 육체의 소멸이라고 말하고 있는 생명윤리 전공학자에게 이렇게 반문한다.
“무릇 사물에 대한 인식이란 그 사물을 의미있는 것으로 승인하고 수용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은 분명히 몸의 소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서 멈춘다면 그것은 죽음이해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육체의 소멸이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묻고 그 해답을 얻지 못한다면, 죽음이 어떤 식으로 설명되더라도 자기 자신과 관계없는 것이 되고 만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자기 삶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죽음이해는 그 삶을 결정하는 종국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삶의 바탕이어야 하고, 동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하는 것이 삶의 내용이어야 한다.”7)
7) 정진홍 편『 웰다잉 전문지도강사 매뉴얼』 pp.42-44
죽음, 육체의 소멸이 지금 자기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어떤 해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그 해답을 얻지 못한다면, 죽음은 자기 자신과 아무 관련없는 것이 되고 만다. 특히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여부에 따라 죽음이해와 그 방식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의 이해와 그 방식까지도 달라진다고 원로학자는 말한다. 따라서 죽음을 육체 중심, 혹은 과학적 설명에 맡겨 놓는다면, 그런 죽음이해는 인간과 삶의 이해마저도 제한하게 된다.
인도 뉴델리 태생의 하버드대 의학박사 출신으로 인도 전통 치유과학인 아유르베다와 현대 의학을 접목하여 정신신체의학이란 독특한 분야를 개척한 디팩 쵸프라는 육체적 생명을 끝내는 것이 곧 죽음이라는 식으로 죽음을 정의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의식의 영역을 보다 확장시켜야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죽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이 우리 삶의 목적이며 그 완성이라는 증거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의식경계를 확장시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과 죽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8)
8) 디팩 쵸프라『죽음 이후의 삶』정경란역 (서울 : 행복우물, 2007년) p.17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건강에 4가지 측면이 있다. :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인 건강.
최근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영적인 건강을 추가시킴으로써 우리의 건강에 당연히 영혼이나 영성, 영적인 문제가 결부되어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건강에 영적인 건강을 포함해 4가지 측면이 있다면, 죽음도 당연히 4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9) 그러나 우리 사회는 육체적 죽음과 사회적 죽음에만 관심을 가질 뿐 정신적 죽음과 영적인 죽음에는 무관심하다. 인간의 삶과 죽음, 생명 혹은 영혼의 문제처럼 보다 큰 차원에서 죽음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으로서 존엄한 죽음은 어떤 죽음이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를 먼저 심사숙고해야 한다.
9) 최근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호스피스는 죽어가는 사람의 정신적, 영적인 고통을 보살피는 일을 살피지만, 우리 사회에서 죽어가는 사람 중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성숙한 죽음문화의 형성을 위해서는 죽음정의와 그 이해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뇌의 기능이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이후에도 호흡과 심장박동을 일정 기간 유지시켜 주는 일이 가능해짐에 따라 죽음 정의 문제는 이론적 차원에서나 실용적 차원에서나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심장의 기능 여부가 사망판단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심폐사에서 뇌사로 죽음정의가 바뀐다면, 뇌의 모든 기능이 회복 불가능하지만 연명치료 장치에 의해 심장박동을 유지하고 있는 환자의 경우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죽음정의가 심폐사에서 뇌사로의 전환은 또 장기이식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환자로부터 장기를 적출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뇌사자가 장기이식에 동의한 경우, 장기척출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또 뇌의 기능이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경우, 연명치료장치 사용 여부에 대한 논란도 필요 없어진다.
그러나 실용적 측면에서의 이와 같은 이점에도 불구하고 뇌사에 대한 공감대는 아직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다.10) 죽음의 결정과정에서 뇌의 중요성은 인정되지만, 뇌사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주장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죽음을 그 자체로 정의해야지 실용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다. 뇌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신체기관의 일부가 손상받은 것일 뿐으로 귀나 눈의 손상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뇌가 신체기관을 조정하는 기능을 지녔지만, 인간존재가 뇌로 환원되거나 뇌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10) 비가역적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들에게 들어가는 엄청난 부담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했다, 1968년 미국 하버드 대학 뇌사위원회는 비록 뇌는 죽었지만, 다른 장기는 유용한 상태인 한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므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뇌사를 제시했다. 이 이후 다른 선진국에서는 뇌사를 죽음 판정기준으로 수용했지만, 일본은 뇌사를 기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피터 싱어『삶과 죽음』 pp.37-57 참조.]
인간존재의 죽음이란 그 일부의 죽음이 아니라 유기체 전체의 죽음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는 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의학체계 안에서 죽음을 심장사와 뇌사로 정의하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죽음을 말할 경우 신체의 특정 부분의 죽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달라이라마도 말한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고 말할 때 ‘신체의 어느 부분이 죽었는가?’ 라고 묻지 않는다. 개별 신체기관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모든 부분을 포괄해 죽음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11)
11) Francisco Varela, Sleeping, dreaming, and dying (N.Y. : wisdom pub. 2003) pp.140-141
Ⅲ. 생사학의 죽음이해
서양에서 생사학을 창시한 퀴블러 로스도 인간존재는 육체적, 감정적, 지적, 영적인 4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면서, “진짜 문제는 우리가 죽음에 대한 참된 정의를 갖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고 의대생과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는 일에 부딪혀 보기로 결정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행하게 죽어가고 있고, 또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가족이 죽어가는 사람을 병실 한 구석에 방치하고 있는 현실 역시 죽음이해와 정의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면서 자기 환자와 항상 깊은 인간적 관계를 유지했던 그는 사람이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해서든지 알고 싶어했다. 분노와 욕설, 좌절의 상태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바로 뒤 그들의 얼굴 표정에서는 침착함, 평온함을 자주 목격하면서, 죽은 그들의 육신은 봄이 되어 더 이상 필요 없어 벗어 던진 겨울 외투처럼 보여졌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보살핀 경험이 있는 그는 아주 확실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육신은 껍질에 불과하고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은 더 이상 그 껍질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12)
죽음이 찾아오면 시체가 남는 것이지만, 시체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죽더라도 존재의 양식만 바꿀 뿐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다.13)
12) 퀴블러 로스『 사후생』 최준식역 (서울 : 대화출판사, 1996년) pp.54-55
13) 다찌바나 다까시 『임사체험』상, 윤대석역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04년) p.411
오진탁, 『마지막 선물』(서울 : 세종서적, 2007년) 4장 ‘죽음 끝이 아니다’ 참조.
임사체험을 연구한 의사 롬멜 박사는 놔파가 정지한 시간에도 의식은 살아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디팩 쵸프라 『죽음 이후의 삶』pp.41-42 참조]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뇌사나 심폐사처럼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만으로 정의될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육체 중심의 죽음판정 기준이 죽음정의를 대신하는 그런 사회는 결코 죽음문화가 성숙될 수 없고 자살처럼 불행한 죽음만 양산될 뿐이다. 사후의 삶에 대한 연구결과,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단순히 이 세상에서의 생존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고 퀴블러 로스는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정의한 것과 같은 그런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그는 이르렀다. 이제 죽음 정의는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것을 넘어 영혼, 정신, 삶의 의미같이 순전히 물질적인 삶과 생존 이상의 무언가 지속되는 것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14) 의학적, 법적인 접근은 단지 죽음의 육체적 측면만, 즉 죽음 전체를 보지 않고 일부분만 다루는 격이다. 육체의 죽음, 한 가지 죽음 판정기준에 국한시킨다면 삶과 죽음에 대한 폭넓은 가능성을 제한하는 일도 야기될 수 있으므로, 죽음을 폭넓게 또 깊이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죽음에만 국한시키기보다 다양하게 접근해야만 우리의 삶과 죽음에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다.
14) 퀴블러 로스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 박충구역 (서울 : 가치창조, 2001년) pp.225-226
또한 죽음이 끝이냐 아니냐, 혹은 죽은 뒤 영혼은 유지되느냐 여부 문제 역시 죽음 정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죽음 정의 문제는 죽음 이후 문제와 아무 관련 없이 논의되어서는 곤란하다. 죽음은 우리의 삶과 죽음 이후를 연결시켜주는 매듭의 역할을 하므로,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3가지는 함께 심사숙고되지 않으면 안된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은 단지 지식의 문제, 사실의 문제라고 말했다. 소아암 등으로 죽음에 직면한 어린아이들을 향해 그는 말했다.
“우리 몸은 헝겊으로 만든 번데기와 마찬가지여서 죽으면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나비처럼 하늘을 향해 날아 올라간다.”15)
15) 일반인의 죽음이해는 문제가 심각하다. 일반인과 생사학의 죽음이해를 다음 같이 7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난다.
일반인의 죽음이해 | 질문 | 생사학의 죽음이해 |
죽음, 육체중심으로 이해 | 1. 죽음을 육체중심으로 이해? | 육체 중심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
육체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게 끝난다. | 2. 죽으면 다 끝나는가? | 죽음은 다른 세상으로 여행 떠나는 것. |
영혼의 존재 부정, 확신하지 못한다. | 3.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 영혼의 존재 인정. |
영혼의 성숙문제 생각한 일 없다. | 4. 영혼의 성장, 영적 성장의 중요성 인정하는가? | 죽음은 성장의 마지막 단계이므로, 영혼의 성숙을 중시. |
죽음, 두려움이나 절망으로 간주. | 5. 죽음을 절망, 두려움으로 보는가? |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이유 없다. |
배움은 학교 졸업과 함께 끝난다. | 6. 우리 삶을 배움의 장소, 수행의 기회로 간주하는가? | 삶에서 배움을 통해 영적 성숙 위해 노력. |
이런 편견의 확산으로 불행한 죽음의 양산. | 7. 그런 죽음이해가 얼마나 통용? | 생사학 연구 미비. |
생사학을 창시해 현대인들에게 올바른 죽음관을 제시했던 20세기의 영적 지도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그녀는 1995년 자신의 삶을 조망하는 자서전을 썼다. 자서전 집필 내내 뇌출혈로 쓰러져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는 등 여러 번 위기를 겪기도 한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자신의 필생의 업적에 대한 기록을 끝내면서 자서전 표지를 하늘로 날아오르는 나비 한 마리 그림과 어린 암환자에게 보냈던 편지로 장식했다.
“우리가 세상에 보내져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나면 /
우리는 마치 미래의 나비를 품고 있는 고치처럼 /
영혼을 가두고 있는 육신을 버릴 수 있게 된단다. /
그리고 때가 오면 우리는 육신을 떠나서 /
고통도, 두려움도, 걱정도 없는… 마치 정말 아름다운 한 마리 나비처럼 자유로이…‘16)
16)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p.11
그녀는 어느 날 스위스에서 아침식사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순간, 갑자기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녀는 ‘이제야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죽음은 이 세상을 졸업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퀴블러 로스에게 죽음에 다가가는 것은 오히려 기쁘고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다른 임사체험자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스위스적인 산길에서 자기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회고하기도 했고 그 너머 밝게 빛나는 빛의 세계를 향해 날아가 평안과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을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퀴블러 로스의 표현) 다음 순간, 의식을 회복했다. 아직 죽을 때가 오지 않은 것이다.17)
17) 다치바나 다까시 『임사체험』상, pp.420-422
그렇게 죽음의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퀴블러 로스는 2004년 8월 24일 “나는 우주로 춤추러 간다. 그곳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놀겠다”라는 말과 함께 78세의 나이로 여행을 떠났다.
장례식에서 그녀의 두 딸이 관 앞에서 작은 상자를 열자 상자 안에서 한 마리 호랑나비가 날아올랐고, 참석자들이 미리 받은 봉투에서도 수많은 나비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라 장관을 이루었다.18)
18)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외『 인생수업』류시화역 (서울 : 이레, 2006년) p.13
Ⅳ. 불교의 죽음이해19)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도 “죽음이란 육신의 옷을 벗는 행위”라고 말한다.20) 티베트어로 육신은 ‘뤼’라고 불리는데 수하물처럼 사람이 떠난 뒤에 남는 것을 의미한다. ‘뤼’라고 말할 때마다 티베트인들은 인간이란 이 삶과 육신에 잠시 머무는 여행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는 의식이 육신을 떠나는 죽음의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 이 글의 핵심논지는 육체 중심의 죽음정의, 혹은 의학적 죽음이해가 어떤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는지 생사학과 불교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불교의 죽음이해가 시대적, 지역적, 학파적으로 다양하게 전개되는 양상은 이 글의 핵심 논지를 흩어지게 할 수 있으니까, 여기서는 생사학의 죽음이해를 뒷받힘하는 불교의 일반적 죽음이해를 중심으로 간략히 논한다. 불교 죽음이해의 시대적, 지역적, 학파적 전개양상에 대한 고찰은 다음 과제로 남겨 둔다.
20) 소걀 린포체『 티베트의 지혜』오진탁역 (서울 : 민음사, 1999년) pp. 7-9
“이제 죽음이라 불리는 것이 그대에게 찾아왔다. 그대는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대만이 유일하게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이 세상의 삶에 애착을 갖거나 집착하지 말라. 그대가 마음이 약해져서 이 세상에 남겨둔 것에 아무리 집착할지라도 그대는 이제 여기에 머물 힘을 잃었다.
그대가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는 윤회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헤매는 것밖에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그러니 마음을 약하게 먹지 마라. 다만 진리, 진리를 깨달은 자, 그를 따르는 구도자들을 기억하라. 그대의 마음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는 이때, 당황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지난 사흘 반 동안 그대는 기절상태에 있었다. 기절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대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생각할 것이다. 그대는 지금 사후세계에 있다.”21)
21) 파드마삼바바 『티베트 사자의 서』 류시화 역(서울 : 정신세계사, 1995년) pp.245-247
죽어가는 당사자를 향해 죽음이 찾아와 이 세상으로부터 떠날 시기가 되었으니까, 육신으로부터 마음이 분리되고 있는 그 때 당황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적 죽음이해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열반 개념의 차이를 먼저 명확히 해야 한다. 붓다고사의 정의에 따르면 ‘죽는다’에 해당하는 팔리어는 ‘kalam karoti’ 이다. ‘kala’는 시간을 의미하는데 인간의 생명과 관련해 수명의 길이를 말한다. ‘kalam karoti’ 는 자신이 부여받은, 이 세상에 머물 수 있는 육체의 시간을 마친다는 뜻이다.22) 불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육체 중심의 죽음이해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2) 안양규 「붓다의 죽음」 [『불교평론』(서울 : 2005년 겨울 7권 4호) pp.26-29]
“수명(호흡), 체온, 의식이 육체를 떠날 때…… 모든 근이 무너지고 육체와 명(命)이 분리는 데 이를 죽음이라 이름한다.”23)
23)『 잡아함경』『( 대정장』 2권 150b)
“수명(호흡), 체온, 그리고 의식 세 가지가 육신을 버릴 때 육신은 쓰러져 마치 아무 감각없는 나무처럼 된다.”24)
24)『 잡아함경』『( 대정장』2권 26a )
우리의 생명은 수명(호흡), 체온, 그리고 의식 세 가지를 갖추고 있다. 호흡, 체온, 그리고 의식이 육신으로부터 벗어날 때 이를 죽음이라 일컫는다. 살아있을 때에는 호흡, 체온, 의식 세 가지가 서로 분리되지 않지만, 호흡이 다하면 체온이 떨어져 육신이 차갑게 되고 이숙식(아뢰야식)이 몸을 떠나게 된다.25) 호흡이 멈추고 심장 박동이 정지하면서 육신은 기능이 다하게 된다.
25)『 유식삼십송』에 제시된 아라야식은 다음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아라야식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종자가 머무는 곳이고, 일체의 종자를 가진 것으로서 일체종자식이라고도 한다.
2 아라야식은 과거세의 행위에 의한 훈습을 받지만, 그 자체로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무기(無記)이므로, 이숙(異熟)이라고도 한다.
3 인간의 생존의 근저에 있으면서 매 순간마다 작용하여 의식의 흐름을 형성한다. 윤회는 이렇게 부단히 작용하는 아라야식을 근거로 해서 성립된다.
4 아라야식은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서 매 순간마다 지속되므로 잠재의식 또는 심층의식이라고도 부른다
…… 과거의 행위에 의해 아라야식에 훈습이 남겨져…….현세에 나타난 것이 말라식(末那識)과 육식(六識)이다. 지금 삶에서 작용하고 있는 말라식과 육식은 그 훈습을 아라야식에 남긴다. 이런 식으로 아라야식은 현세의 말라식과 육식과 함께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는 관계를이룬다.
불교생명윤리 정립위원회 편『 현대 사회와 불교 생명윤리』(서울 : 조계종출판사,2006년) p.182
‘어떤 순수하고 미묘한 마음’(subtle mind)이 육신에서 떠나면 몸의 9가지 구멍으로부터 시신은 부패하기 시작한다고 달라이라마는 말한다. 죽은 이후 시신으로부터 벗어나 유지되고 윤회하는 것은 바로 ‘subtle mind’ 라는 것이다.26)
열반은 적멸(寂滅), 멸도(滅度), 무생(無生) 등의 뜻으로 옮겨진다. 열반의 특징으로, 상주(常住), 적멸(寂滅), 불사(不死) 등이 말해지고 있다.27) 열반은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난 적멸을 뜻한다. 열반의 세계는 불생불사이다. 따라서 붓다의 죽음이란 붓다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고, 붓다의 입멸이란 붓다가 불생불멸의 열반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붓다는 열반에 들어갔으므로 윤회에서 벗어났다. 붓다는 자신의 육체를 오래된 낡은 집에 비유한다. 세월이 지나면 집은 낡아 마침내 허물어지듯이 육신도 결국 죽게 된다. 집을 받치고 있던 대지는 여전히 변함없듯이, 붓다의 육신은 죽었지만 마음은 대지처럼 안정되어있다.28) 붓다는 육신에서 벗어나는 길을 다음 같이 말한다.
26) 그러나 ‘subtle mind’ 가 윤회한다고 해서 실체로서가 아니라, 연기적 자아로서 윤회하는 것이다.
김용옥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서울 : 통나무, 2002년) pp.686-696
27) 『佛光大辭典』(臺北 : 불광출판사, 1988년) 5권 p.4149
28) 『불반니원경』(『대정장』1권 169a)
“생명이 있는 모든 중생은 죽는다. 수명은 반드시 다하게 되어 업에 따라 인연의 과보를 받는다. 선과 악 각각에 결과가 뒤따른다. 복을 쌓으면 하늘세계로 올라가고 악을 지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도를 닦으면 생사의 과보를 끊고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 윤회에서 벗어나 죽지 않게 된다.”29)
29) 『별역잡아함경』( 『대정장』2권 392b)
누구든지 죽은 이후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윤회하게 된다. 그러나 윤회,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탈의 길 역시 붓다는 제시했다.
인용문 가운데 “도를 닦으면 생사의 과보를 끊고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 윤회에서 벗어나 죽지 않게 된다”는 게송은 불교적 죽음 이해를 시사해주고 있다. 붓다가 출가한 것도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기 위한 것으로, 깨달음이란 생사에 자유자재한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Ⅴ. 바람직한 죽음 정의(定義) 모색
따라서 죽는다고 해서 모든 게 끝이 아니므로, 죽음정의 역시 육신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 결과 사람들은 육체에만 국한되는 그런 삶, 지나치게 세속적인 삶만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육체로부터 영혼의 분리과정으로 본다면,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정도 바뀔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죽음을 육체적 관점으로만 보지 말자. 보다 깊이 영혼, 영성의 문제로 보지 못학거나 죽음방식이 보다 성숙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질(Quality of Life)과 죽음의 질(Quality of Death)은 결코 올라갈 수 없다.30) 삶과 죽음을 통한 여행으로 자기존재를 이해할 경우, 우리 사회에 팽배해있는 세속주의나 물신주의를 치유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므로 죽음정의와 관련해 다음 같은 내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30) 생사학 전문가들은 죽음문제를 영혼이나 영성과 결부시켜 연구하고 있다. Kenneth J.Doka와 John D. Morgan은 Death and Spirituality (N.Y. : Baywood, 1993)을 펴낸 바 있고, 영성적 관심, 사별과 영성적 위기, 영성적 보살핌, 영성과 상담 등등에 관해 연구가 계속 나오고 있다.
─ 죽으면 다 끝난다면 심폐사, 뇌사가 죽음정의일 수 있다.31)
─ 인간은 육체만의 존재가 아니므로, 죽는다고 전부 끝나는 것이 아니다.32)
─ 죽음이란 육체가 죽는 것이지, 인간존재 전부가 죽는 것은 아니다.33)
─ 따라서 심폐사, 뇌사는 죽음정의가 아니라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일 뿐이다.34)
─ 육체가 죽으면 시신으로부터 3일 반을 전후해 영혼이 분리된다.35)
─ 주검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다른 세상으로 떠난다.36)
─ 그러므로 죽음이란 관계가 끝나는 것도 아니고 생명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육체만 사라질 뿐이다.37)
31) 퀴블러 로스는 “진짜 문제는 우리가 죽음에 대한 참된 정의를 갖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는 일에 그는 부딪혀 보기로 결정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행하게 죽어가고 있고, 또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가족이 죽어가는 사람을 병실 한 구석에 방치하고 있는 현실 역시 죽음이해와 정의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32) 각주 12, 각주 20 본문 참조
33) 각주 12 본문 참조
34) 각주 5 본문 참조
35) 각주 21 인용문 참조
36) 각주 21 인용문 참조
37) 티베트어로 육신을 뜻하는 ‘뤼’ 는 수하물처럼 사람이 떠난 뒤에 남는 것을 의미한다.
‘뤼’라고 말할 때마다 인간이란 이 삶과 육신에 잠시 머무는 여행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티베트인들은 상기하게 된다.
죽음을 육체의 측면에서 본다면, 육체의 죽음은 분명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죽음을 바라보면 죽음은 육체의 죽음일 뿐이고 육체로부터 영혼이 떠나는 것이다. 죽음은 단지 육체의 죽음일 뿐 끝이 아님을 분명히 안다면,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퀴블러 로스가 생사학의 연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남편과 이혼하면서까지 생사학 연구에 몰두한 것도, 생사학이 존재하는 이유도, 그리고 불교 가르침38) 역시 죽음은 끝이 아니므로 죽음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 전달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죽음이 끝이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 자신의 삶의 이해와 그 방식, 죽음의 이해와 그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임사체험자들은 죽음의 순간 마치 허물 벗듯이 육체의 옷을 벗어버렸다. 죽음은 흡사 나비가 고치를 벗어 던지는 것처럼 육신을 벗는 것에 불과하다. 죽음은 보다 높은 의식 상태로의 변화일 뿐이다. 죽음의 순간에 유일하게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육신이란 허물 뿐이다. 죽은 뒤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봄이 와서 겨울코트를 벗어버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죽음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39)
38) 오랜 정진 끝에 어느 날 새벽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외친 첫 마디가 “나는 불사(不死,Amrta)를 얻었다”는 말이었다. 불사의 산스크리트 원어 아므리따는 한문불교권에서 불사로 번역했지만, 무사(無死), 비사(非死)로도 옮겨질 수도 있다. 붓다는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非死)” “죽음은 없다(無死)” 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리수 나무 아래 앉기 전까지 고민하게 만들었던 죽음이 알고 보니 실재하는게 아니라 우리 의식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했다.
죽음의 순간 우리가 맞을 죽음은,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식의 죽음이 아니다(非死), 다시 말해 그런 죽음은 없다(無死)는 뜻이다. 죽음이 있다는 착각에 지금 살아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고, 지금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인연의 결과일 뿐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붓다는 말한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다음 “나는 죽지 않는다(不死),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非死), 죽음은 없다(無死)” 고 외친 것은 삶과 죽음은 우리 의식이 꾸며낸 허구,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결합된 곳에 불과하다는 선언이었다.
[김성철『 중관사상』(서울 : 민족사, 2006년) p.36 참조]
39) 퀴블러 로스『사후생』 p.39
그러므로 생사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에 죽음은 두 가지 이유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첫째, 죽음정의에 대한 논의를 심폐사나 뇌사같은 죽음판정 기준이 대신하고 있으므로, 우리 사회에 죽음판정 기준에 대한 논의만 있을 뿐 죽음정의(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존재하지 않는다.40)
둘째, 죽음이란 육체의 죽음에 불과하고, 죽음의 순간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어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므로, 영혼은 죽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차원에서 보면 죽음은 존재하지만, 영혼의 차원에서 보면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육체의 죽음일 뿐 끝이 아니므로,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41)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왜 그토록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심한 것인지, 불행하게 죽어 가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인지, 그리고 자살사망률이 왜 최근 들어 급증하는 것인지 문제를 추적해 보니까, 다른 여러 가지 원인도 작용하지만 그 근원에는 죽음에 대한 오해, 육체 중심의 인간이해와 죽음정의가 오해의 근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42)
40) 얼마 전 병원 중환자실과 응급실에서 10여년간 근무했던 간호사가 찾아와 의사와 간호사들이 죽음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종자들을 보살피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의사협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임종환자 의료지침을 통해 안락사 법제화를 요구해왔지만, 우리 사회 죽음의 질 향상을 위해 의협에서 과연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묻고싶다. 죽음이 바르게 이해되지 않는 사회에서, 더구나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을 진행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죽음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존엄사를 법제화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죽음을 타부시했다. 죽음을 일상대화의 주제로 올리는 사람이 거의 없고 평소에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죽음문화가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엄사를 성급하게 법제화한다면, 현대판 고려장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41) 생사학과 호스피스와 관련해 현대의 고전의 평가받고 있는『 티베트의 지혜』의 저자 소걀 린포체는 죽으면 다 끝나느냐 아니냐, 혹은 죽은 뒤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증명이나 논증의 문제라기보다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존재를 얼마나 깊이있게 이해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Gary doore ed. What survives ? (N.Y. : Tarcher putnam Book, 1990) p.203
42) 그러나 지금이라도 결코 늦지는 않았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이제부터라도 죽음준비교육을 학교와 사회 교육으로 실시해 바람직한 죽음이해와 임종방식을 확산시키고 호스피스에 대한 거부감을 불식시켜 호스피스 제도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힘을 해야 한다.
또 ‘생전유언’(리빙윌)과 ‘사전의료지시서’ 표준양식을 제정해 이에 동의하는 사람은 서류에 서명해 준비하는 등 죽음문화 성숙을 위한 개인적, 사회적 노력을 시작했으면 한다. 아시아에서는 대만이 2000년에 처음으로 자연사법을 법제화해 존엄사를 인정하기까지 7년의 시간이 필요했음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 알폰스 데켄 교수가 1975년 동경 조치대학에 ‘죽음의 철학’ 강좌를 개설한 이래 30여년간 전국에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을 비롯해 다양한 웰다잉 사회운동이 진행되었다.
또 자기가 원하는 임종방식을 미리 준비하는 ‘생전유서’에 서명해 두는 사람이 12만여 명이 넘어섰다. 우리 사회도 죽음이해와 임종방식의 성숙을 위한 개인적 준비와 사회적 노력을 몇 년에 걸쳐 꾸준히 진행한 다음에 존엄사는 법제화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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