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 4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rainbow3 2019. 9. 18. 22:50

[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

 

⑬ “감 쩨 야아보르”(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감 쩨 야아보르’는 고전 히브리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의미다.

순간을 사는 인간들이 자신이 소유한 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으로 욕심을 내고, 그 욕심으로 우리는 어둠 속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죽는다. 그런 순간을 사는 인간에게 깨우침을 주는 강력한 문장이 바로 ‘감 쩨 야아보르’이다. 이 문장은 아주 오래된 유대인 이야기를 통해 전해졌다.

고대 이스라엘의 최고 부와 권력을 지녔던 솔로몬왕은 베나이아 벤 에호야다를 자신의 최측근으로 임행했다.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베나이아에게 의지했고 그 결과 베나이아는 권력의 맛으로 항상 우쭐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솔로몬이 자신을 신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니면 이스라엘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사람들은 “베나이아가 맛이 갔군!”하며 수군거렸다.

 

이 사실을 안 솔로몬은 베나이아를 곤경에 빠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대교 최대명절인 유월절 잔치자리에 대신들과 함께 앉은 솔로몬은 베나이아에게 말했다.

“베나이아. 너는 나의 가장 충직한 종이다. 부탁이 하나있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 앉은 모든 대신들이 귀를 기울였다. 솔로몬은 세상의 부귀영화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자인데,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하니 다들 놀란 것이다.

베나이아는 재빠르게 말했다.

 

“제게 말씀하십시오. 그것이 세상에 있다면 꼭 찾아와 폐하께 드리겠습니다.”

 

솔로몬이 말하기를 “세상에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마술 반지가 있다고 들었다. 그 반지는 슬픈 사람을 기쁘게 하기도 하고 기쁜 사람을 슬프게 하기도 하는 반지라고 알고 있다.”

베나이아는 “만일 그런 반지가 있다면 당장 찾아 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솔로몬은 “그런 반지가 있다더라. 앞으로 가을 추수할 때 지키는 장막절 전까지 구해 오너라. 지금부터 6개월 남았으니 찾아오도록 하여라.”

베나이아는 예루살렘의 시장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며 그 반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예루살렘 시장에 있는 모든 금세공, 은세공 가구에 들렀다. 그는 세공장이들과 보석상들에게 “내가 솔로몬왕의 부탁을 받고 왔다. 마술 반지가 필요한데, 그 반지는 행복한 사람은 슬프게 하고 슬픈 사람은 행복하게 하는 반지다”라고 말했다. 그 어느 세공장이나 보석상도 그런 반지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베나이아도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솔로몬왕이 그런 반지가 분명 존재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것을 찾는 것은 베나이아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로 내려갔다. 이스라엘의 모든 상인들에게 물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런 반지를 본적이 있다는 사람은 없었다.

 

베나이나는 이제 항구에 들어오는 배에 올라 외국에서 오는 선원들에게 물었다. 그가 인도, 중국, 이집트에서 온 대상들에게 물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런 반지는 들어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마술 반지를 찾으려 많은 날을 보내고 이제 6개월이 지난 장막절이 다가왔다. 그는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자괴감이 들었다.

 

장막절이 시작하는 날 아침,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침 일찍 상인들이 물건을 진열하기 전에 예루살렘 시장으로 갔다. 상인들이 가게 문을 열고 있을 때 마술 반지에 대해 다시 묻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런 반지를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때 베나이아는 카펫 위에 반지를 진열하고 있는 한 소년과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값은 상관없어요. 솔로몬왕이 슬픈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반대로 행복한 사람을 슬프게도 하는 반지를 찾고 있는데. 그런 반지를 본적 있습니까?”라고 묻자 이 가난한 할아버지가 카펫 안에서 아주 평범한 금반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반지 안에 새기기 시작했다. 그 노인은 “이 반지를 솔로몬왕에게 가져가시오”하고 말했다. 놀란 베나이아는 그 반지를 받아들고, 노인이 새겨 넣은 문구를 읽었다. 그의 얼굴은 맨 처음 당혹감에 휩싸이더니, 조금 있다 얼굴이 밝아져 환하게 웃었다. 그날 밤 예루살렘에서는 장막절 축제가 시작됐다.

 

솔로몬왕과 약속한 날에 베나이아는 왕이 원한 반지를 가지고 궁궐로 들어갔다. 솔로몬왕은 대신들과 함께 장막절 축제를 시작할 셈이었다.

솔로몬은 대신들 앞에서 베나이아를 공개적으로 비하할 작정으로 “나의 충실한 신하, 베나이아여! 그대는 내가 말한 그 반지, 그 마술 반지를 가지고 왔는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대신들이 크게 웃었다. 그러자 베나이아는 자랑스럽게 조그만 금반지를 하나 높이 들고 외쳤다.

 

“폐하, 이것이 마술 반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 솔로몬왕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베나이아는 그 반지를 왕에게 바쳤다. 솔로몬은 반지 안에 새겨진 명문을 보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거기에 히브리어 알파벳 g(gam), z(zeh), 그리고 y(yod)가 새겨져 있었다.

이 세 글자는 ‘gam zeh ya’avor’ 란 히브리 문장의 첫 글자들인데, 그 의미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의미이다.

 

그 순간 솔로몬은 그가 가진 모든 권력, 재산, 그리고 지혜까지도 덧없는 인생의 한 부분이며 언젠가는 흙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베나이아도 자신의 권력이 덧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표현은 교황의 대관식에도 사용됐다. 1409년 알렉산더 5세가 교황으로 취임할 때 새로 선출된 교황이 성 베드로 성당의 성물안치소에서 세디아 게스타토리아 (Sedia gestatoria)라는 특수한 가마를 타고 갈 때 그 행렬은 세 번 멈춘다.

행렬이 멈출 때마다 행렬주관자는 새로 선택한 교황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의 손에는 불타는 아마천이 달려있는 동으로 된 지팡이를 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Sancte Pater, sic transit gloria mundi!(오, 거룩한 베드로여! 세상의 영광은 어찌 빨리 사라지는지!)”

 

교황은 이 구절을 듣고 인생과 그 영광이 얼마나 부질없이 사라지는지 기억하게 하는 장치다. 실제로 이 의식에서 사용한 막대기와 같은 도구의 이름이 ‘Sic transit gloria mundi’이다. 교황이라는 막강한 권력도 자연의 이치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덧없다는 것이다.

 

1859년 아브라함 링컨은 이 문장을 자신의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사용해 삶의 모토로 삶았다. 그는 미국 위스콘신주 농업 관련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동방의 한 왕이 현자들에게 그가 항상 보고 모든 상황에 알맞은 문장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다음과 같은 문장을 주었습니다.

‘이것 역시 지나가리라!’

얼마나 많은 것을 내포하는 문장인지! 자만심에 빠졌을 때 얼마나 정신 차리게 해주는지! 고통의 시간에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그는 이 마음가짐으로 1년 후인 1860년에 미국 대통령이 되고, 1862년에 미 농무부를 창설하고, 1863년에 노예해방선언문을 발표했다. 아브라함은 권력을 지향하고 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역경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람의 인격을 시험하고 싶다면 그에게 권력을 주어 보아라!”라고 말한다.

 

‘감 쩨 야아보르’는 역경이나 고통에 처한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세상이 가져다주는 화려한 권력, 명예, 부가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어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하되 겸허하게 살라는 충고인 것 같다.

 

 

 

 

 

[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

 

⑭ 낯선 자

 

 

 

 

여기 실의에 찬 두 청년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서쪽으로 12km정도 떨어진 엠마오로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3년 전 예루살렘에 나타난 한 청년을 만난 후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예수였다.

예수는 ‘아낌없이 주는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고 심지어는 신적으로 만든다고 설교하였다.

 

예수와의 만남은 이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버리고 예수의 제자로 3년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이 청년은 신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선포하고, 그 이웃은 심지어는 원수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예수는 깨달음을 주는 랍비일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독립을 가져다 줄 정치적인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예수가 십자가형이라는 로마형벌의 가장 극악무도한 형태로 죽자, 자신들이 바라던 꿈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힘없이 자신의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공해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가족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가슴이 답답했다.

 

복음서에 의하면 이들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지 사흘 후에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때, 한 낯선 자와 동행하게 된다. 이 낯선 자는 수심이 가득한 두 제자에게 말을 건다.

두 제자가 절망에 늪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데, 이 낯선 자는 주제넘게 말을 건넨다.

“당신 얼굴빛이 안 좋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들은 처음 보는 사람과 말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이들이 추종한 예수라는 청년과 그의 십자가 처형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말한다.

 

이들은 특히 예수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린 메시아였다고 그 낯선 자에게 말한다. 사실 예수는 그 당시 기성종교인 유대교에서는 이단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였다는 그들의 시인은 그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이 낯선 자에게 자신들의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 낯선 자는 두 제자의 말을 진심으로 듣고 이들의 슬픔을 공감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토라(유대인의 경전)>의 핵심과 메시아와의 상관관계를 두 제자에게 설명한다. 그는 <토라>에 등장하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을 설명하고 메시아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고통을 당할 운명이라고 말한다.

 

이 낯선 자의 <토라> 해석은 획기적이다. 유대인의 <토라>에는 메시아가 고통을 당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토라>를 이 두 제자의 상황에 맞추어 오늘 여기의 삶이 의미가 있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런 해석을 ‘미드라쉬적 해석’이라 한다.

 

두 제자는 거리의 철학자 같은 이 낯선 자의 해석을 무식의 소치라고 반박할 수 있었으나, 그의 지혜와 해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두 제자의 위대한 점은 낯선 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과는 ‘다른’ 해석과 견해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세계관을 바꿀 수 있는 마음을 소요했다는 것이다. 두 제자가 고향 엠마오에 도착했을 때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