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 2

rainbow3 2019. 9. 15. 16:20

[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

 

⑥ 일상이 거룩이다!

 

 

 

기원전 2000년부터 중동지방에는 본격적인 사막화가 시작되면서 겨우 자리 잡은 도시문화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24세기 메소포타미아의 중부 ‘아가데’라는 곳에 인류 첫 번째 제국인 아카드가 세워졌지만 기원전 2000년경 이란에서 몰려온 구티인에 의해 파괴됐다.

강력한 도시국가인 아카드가 자그로스 산맥에 거주하던 구티인들에게 전복된 실제적 이유는 심각한 가뭄 때문이었다. 심각한 가뭄은 고대 이집트도 강타했다.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한 인류문명의 첫 개화기인 이집트 고왕국시대도 강우량의 감소로 이집트의 젓줄인 나일강이 점점 말랐다. 나일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해 강 주위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농사를 할 수 있었다. 기원전 2000년경 이집트 한 파피루스는 기근이 심해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이집트인들 원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기록한다. 최근 기후학자들은 연구를 통해 65m 깊이의 카이로 남쪽에 위치한 파이윰 호수가 완전히 말라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거주하던 유목민이었다. 그와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에서 거주 지역의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항상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하는 나그네였다. 이런 나그네를 고대 셈족어로 ‘이브리’, 즉 ‘경계와 장소를 넘나드는 사람들’이라 불렀다. ‘이브리’가 바로 영어로는 ‘히브리(Hebrew)’다.

십계명을 받은 모세도 떠돌이 ‘히브리인’이었다. 기원전 13세기경 이집트에 거주하는 이주 노동자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성서에 의하면 당시 이집트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해 이들의 자녀, 특히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성서 <출애굽기>에 의하면 모세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나일강가에 숨겼고 파라오 공주가 그를 발견해 입양했다고 전한다. 이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은 없으나 기원전 13~14세기 고대 근동의 불완전한 사회상황을 반영해주는 글이다.

파라오의 궁에서 자란 모세(모세라는 이름도 이집트어로 ‘태어나다’라는 의미다)는 자신의 동포인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인들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이집트인들을 살해하고 도망친다. 도망친 곳은 시내반도의 미디안인데 사막과 화산으로 형성된 돌산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기원전 13세기는 이전에 도시중심의 지역이기주의를 벗어나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대였다. 이 시기를 통해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말하는 ‘축의 시대 (기원전 9~2세기)’의 씨를 뿌렸다. 기원전 12세기 인도에서는 힌두교로, 이란에서는 마즈다이즘(혹은 조로아스터교)으로, 소아시아에서는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통해 그리스 정신으로,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는 유일신정신세계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등장했다.

유일신정신이란 다른 신들을 배척하고 한 신만을 섬기자는 ‘일신우상주의’가 아니다. 유일신정신은 ‘고아, 과부, 그리고 나그네’를 위한 신이 등장했으며 이들을 대변하는 신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주장이다.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40년(?) 아주 오랜 기간 양치기로 세월을 보낸다. 한 사람이 한 일을 40년 동안 그것도 요즘같이 복잡한 사회가 아니라 지금부터 3000년 전 중동사막 지역에서 목동으로 40년이나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양떼를 몰고 가던 그 똑같은 길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사막의 가시덤불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나무가 연소되지 않았다. 그는 이 초월적인 현상을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가려하자 이상한 소리가 그 나무가운데서 나왔다. 그 소리가 천둥소리와 같은 소리인지 아니면 마음의 소리인지는 구분이 가지 않았다.

“모세, 모세! 여기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모세는 이성을 뛰어넘는 이 현상 앞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떨고 있었다. 모세는 ‘거룩’을 경험한 것이다.

스위스 종교학자 R. 오토는 <거룩의 개념>이란 책에서 거룩의 세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신비(Mysterium), 인간의 오감을 넘어서는 경험

2) 전율(Tremendum), 타자와의 만남으로 떨리는 경험

3) 매혹(Fascinosum), 나와 너무 달라 끌리는 경험.

‘거룩’을 경험하고 있는 모세에게 신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샌들을 벗어라! 네가 서있는 그 장소는 ‘거룩한 땅’이다.”

거룩한 공간과 세속의 공간을 표식은 바로 ‘신을 벗는 행위’이다. 유목민들의 자기 재산목록 1호는 바로 ‘샌들’이다. 우리는 중동지역에서 항의의 표시로 ‘신발’을 던지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미디아를 통해 종종 듣는다. 자신의 모든 것, 즉 ‘신발’을 내버릴 정도로 상대방을 혐오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샌들을 버려야한다. 이 ‘샌들’의 의미는 나 중심의 이기심이다. 우리가 이기심을 스스로 포기할 때 신은 우리에게 최고의 깨달음을 준다. 그것은 바로 ‘내가 서 있는 이 장소(場所)가 바로 거룩한 땅’이라는 생각의 전환이다.

인간의 문명은 공간의 정복이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오지를 탐험하고 외계를 탐험해 우주선을 띄웠다.

인간은 신을 모시기 위한 혹은 신을 감금하기 위한 화려한 공간을 마련해왔다. 인간들은 이 공간들만이 거룩한 공간이며 이곳에서만 신을 만날 수 있다고 현혹한다.

모세에게 준 최고의 가르침은 ‘바로 네가 서있는 그 장소, 네가 지난 40년 동안 지겹도록 다녔던 그 먼지 나고 더러운 그 장소가 바로 천국’이라는 생각의 전환이다.

기원전 13세기 모세를 통해 ‘신과 만나는 곳’은 특별한 장소, 특히 종교인들의 말하는 그런 장소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삶의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삶의 현장이 ‘천국’이라고 가르쳤다.

‘거룩한 장소’를 인위적으로 만든 종교는 소멸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그것을 조절하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일상’이 ‘거룩’이라는 가르침으로 적어도 중동지방에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등장시켰지만 인간들은 다시 신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만드는 데 혈안이다.

유대교에서 신이 계신 공간이란 단어가 ‘마콤(Maqom)’인데 ‘네가 지금 서있는 그 곳’이란 의미다.

오늘, 일상에서 ‘거룩’을 찾아봐야겠다.

 

 

 

 

⑦ ‘테오리아’ 자신 바라보기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가는 곳이 있었다. 보스턴에서 북서쪽으로 차를 타고 40분 정도 달리면 한적한 도시 콩코드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월든’이란 호수가 있다. 이 호수가 유명한 이유는 미국작가이자 철학자였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가 이곳에 거주하며 <월든, 숲속에서의 삶>이라는 책을 저술했기 때문이다.

소로는 1845년 여름부터 2년 동안 이 호수 북쪽에 기거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기록했다. 이곳은 사실 그의 친구이자 멘토였던 랄프 왈도 에머슨이 그에게 빌려준 땅이었다. 그가 살던 조그만 오두막에 가면 다음과 같은 푯말이 등장한다.

“나는 숲에 갑니다. 나는 삶의 가장 본질적인 사실을 대면해 신중하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이 가르쳐야 만하는 것을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고 혹은 내가 죽을 때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소로는 월든 호수에서 인생의 겉모습을 버리고 그 본질들을 대면해 최선의 삶이 무엇인가를 모색했다. 우리의 문제점은 인생의 겉모습에 집착해 인생의 순간들을 생각 없이 흘러 보낸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최선의 삶은 무엇인가?

소로는 인생의 핵심을 자신만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시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외로움’은 상대방의 부재를 절감하는 상태와 심지어는 남들과 같이 있어도 심리적으로 혼자인 상태다. 반면에 상대방의 부재를 느끼지 않고 혼자 스스로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상태를 ‘고독’이라고 한다.

영어에서도 전자를 ‘Loneliness’라고 하고 후자를 ‘Solitude’라고 한다.

세상은 점점 빨라져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순간을 통해 정보를 전달한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오는 정보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의도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자기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혼자만의 ‘고독’의 시간이 필수적이다.

‘외로움’과 ‘고독’이 모두 혼자 있는 시간이지만 고독은 명상, 내적인 탐구와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고독을 통해서만 심오한 독서와 예술에 심취할 수 있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고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자유’다. 자유는 창조력과 직결된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창조성을 꺼낼 수 없다. ‘자아의 발견’은 고독의 또 다른 선물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자아 발견’을 위한 ‘고독’을 ‘테오리아(Theoria)’라고 불렀다.

영어단어 ‘Theory’가 여기에서 유래했다.

테오리아는 중세교회에서 ‘콘템플라티오’ 즉 ‘내면 보기’ ‘내면 관조하기’로 번역됐다. 터키 카파도키아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테오리아를 위한 수많은 동굴들이 있다. 수도사들은 이 동굴에서 3년 동안 수련을 한다.

터키를 중심으로 기원후 4세기 이후에 등장한 동방교회는 ‘신과 합일 되는 깨달음을 위한 단계’인 테오리아를 그리스도 교인들의 최우선으로 삼았다.

테오리아를 통해 삼라만상 특히 마음의 움직임을 의식하는 ‘넵시스(Nepsis)’를 의도적으로 인식한다.

신과 대면할 수 있는 테오리아 수행을 통해 신을 관조하게 되면 신과 합일되는 ‘테오시스(Theosis)’의 경지에 도달한다. 우리는 테오리아를 정결한 삶, 절제와 경전의 명령 준수, 그리고 신과 이웃사랑을 실천함으로 얻을 수 있다.

동방그리스도교의 수행전통의 세 가지 단계는

첫째 ‘카타르시스’로 즉 더러운 생각, 말, 행동을 정화하고

둘째는 ‘테오리아’로 명상과 깨달음을 통해

셋째는 ‘테오시스’ 신과 합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테오리아를 실천한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 한명이 무함마드(기원후 570~623년)다. 무함마드는 570년에 유복자로 태어나 6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됐다.

가난한 삶을 타파하고자 당시 다른 아랍소년들처럼 대상무역상으로 출발한 무함마드는 어려서부터 ‘알-아민’ 즉 ‘믿을 수 있는 자’라는 별명을 지닌다. 그는 25세에 자기보다 15살 많은 미망인이자 자신의 고용주였던 카디자와 결혼해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난다.

무함마드의 대상무역업은 날로 발전해 메카에서 존경받는 상인이 된다. 만일 무함마드가 자신의 삶을 아무런 자기발견의 노력 없이 지나갔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함마드가 다른 성공한 대상무역인과는 달리 1300년이 지난 오늘날 17억 인구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이슬람의 창시자가 된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테오리아였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누구인지 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기 위해 매해 메카 외곽의 히라 동굴로 퇴거했다. 당시 아랍사회는 부족중심이었다.

부족들 간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정의였으며 그 정의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복수였다.

아랍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아무도 모르는 영적인 병에 걸려있었다. 무함마드는 이 영적인 병을 히라 동굴에서 명상하기 시작한다. 이 명상을 아랍어로 ‘타한누스(Tahannuth)’라고 한다.

그는 해결책을 골똘히 궁리하는 동시에 금식하며 영적 훈련을 수행했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타한누스란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진 자아를 발견하고 대면하는 일이다.

무함마드는 타한누스를 통해 그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살다간 수많은 무명의 인물이 아닌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무지’의 사회를 신에게 승복한 ‘이슬람’ 공동체의 창시가가 됐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하루에 식구들 밥을 먹이는 상인이 아니라 타한누스를 통해 아랍인 전체를 위해 삶의 기준을 전달할 예언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17억 인구의 정신세계를 마련할 무함마드에게 타한누스는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종교에서는 ‘자신을 모르는 것’ 또는 ‘자신이 가야할 길을 모르는 것’을 죄라고 불렀다. 종교지도자들은 모두 ‘명상’을 통해 자신의 길을 발견했다.

명상은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해 경전과 고전을 깊이 읽는 시간, 자신의 삶의 원대한 계획과 이 순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까지도 제어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이전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마술이다.

종교는 우리에게 산 정상에 올라가라고 촉구한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 한 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한다. 영적인 정상으로 가는 길이 바로 테오리아다.

 

하루에 30분 정도 자신을 위한 분리된 시간과 장소에서 명상하는 시간은 우리에게 자유 창의성 그리고 카리스마를 선물해 줄 것이다.

 

 

 

⑧ 恕 (恕=心+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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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로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뽑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트로이 성벽 앞에서 펼쳐진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전투장면을 떠오를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갑옷을 입고 몰래 전쟁에 나가 트로이 왕자인 헥토르에게 살해를 당한 자신의 애인이자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트로이 성벽 앞에 서서 목청껏 소리 지른다.

“헥토르, 헥토르!”

헥토르는 트로이 프리아모스 왕의 효심이 많은 맏아들이었고 아내 안드로마케에겐 자상한 남편이었다. 이 세상에서 아킬레우스와 대적해 이길 자가 없다는 것을 안 헥토르는 눈물 짓는 아버지와 아내와 작별인사를 하고 아킬레우스와 결투를 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였고 그의 시체를 전차 뒤에 매달아 파트로클로스의 무덤 주위로 끌고 다니며 시체를 험하게 훼손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최고의 장면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전투가 아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시체를 찾기 위해 아킬레우스에게 달려온 헥토르의 아버지와 아킬레우스와의 조우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적절한 장례절차가 없이는 다음 세계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프리아모스는 변장해 아킬레우스의 진영에 잠입한다. 늙은 프리아모스는 굴욕적으로 아킬레우스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아킬레우스의 손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간청한다.

 

“오, 아킬레우스여. 나처럼 나이가 들어 생명이 거의 다해 몸을 떠는 당신의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혹시 어떤 이웃이 그를 억압하고 그의 고통을 덜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는 아킬레우스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분명히 기뻐하며 언젠가 그가 당신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이라는 생각에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은 내게는 어떤 위안도 없습니다. 마치 때늦은 일리움의 꽃처럼 모든 것이 떨어졌습니다. 내게도 하나가 있긴 있었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싸운 이 세상 모든 것보다 귀한 아들이습니다. 나는 지금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시체를 가지러 왔습니다.

오, 아킬레우스여! 신들을 생각하고 당신의 아버지를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아버지를 위해 내게 은총을 내리십시오!”

프리아모스의 간청이 아킬레우스를 움직였다. 아킬레우스 안에 있던 자기의 죽은 아버지에 대한 깊은 슬픔을 일깨웠다. 그도 ‘지금은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리고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울기 시작한다. 그는 자기 발 앞에 무릎 꿇은 프리아모스의 백발을 보고 그를 일으켜 세워 말한다.

“프리아모스여! 당신은 여기까지 신의 도움이 아니면 올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감히 내 앞에 설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간청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당신의 헥토르에 대한 사랑에 감동받았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이 말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곧 시신이 너무 무거워 프리아모스가 가져갈 수 없다고 생각해 두 명의 건장한 용사를 불러 헥토르 시신을 전차에 싣고 무사히 트로이로 옮길 것을 명령한다.

그는 헥토르 장례의식이 마칠 때까지 12일 동안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한다.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마음은 하나였다.

그리스 문명은 바로 이 정신,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서(恕)의 정신으로 시작됐다. 호메로스는 기원전 8세기 페니키아인으로부터 알파벳을 처음 받아들인 후 지난 300년 동안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리스 정신을 전하기 위해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기록했다. 그는 앞으로 펼쳐질 서양문명의 기둥은 아킬레우스의 영웅성이 아니라 남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서의 정신’이라고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서의 정신’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 당시 창조적인 두 집단이 등장해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한집단의 대표는 ‘힐렐’(기원전 110년-기원후 10년)이고 다른 집단의 대표는 ‘예수’(기원전 4년-기원후 30년)이다. 힐렐의 어록은 후대 미쉬나와 탈무드의 기초가 됐다.

한 이교도가 위대한 랍비인 힐렐의 명성을 듣고 그를 시험할 목적으로 찾아왔다. 그는 “한쪽 다리로 서있는 동안(짧은 시간 안에) 유대인의 경전인 토라 전체를 암송할 수 있다면 자신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고 선언한다.

 

 

 

 

 

⑨ Pieta

 

오시리스와 이시스

 

 

‘피에타’는 이탈리어어로 ‘동정·연민·슬픔’이란 의미이다. 어머니가 아픈 자식을 보고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아이가 아프면 어머니도 아프고 아이가 기쁘면 어머니도 기쁘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처음 만나는 존재인 어머니는 바로 ‘피에타’의 화신이다. ‘피에타’는 인간이 접하는 최고의 감정이며 이 감정을 통해 어린아이는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집트 신화 <오시리스와 이시스>는 우리에게 알려진 ‘피에타’의 원형이다. 이집트 이시스 여신(이집트어로는 아세트)은 처음에는 중요한 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집트 왕좌를 보호하는 여신으로 ‘왕권’의 화신이다. 이시스는 항상 머리 위에 왕좌를 이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집트가 기원전 27세기 고왕국시대에 진입하면서 이집트 종교가 혁신적으로 변한다. ‘영생’이 이전에는 파라오만의 특권이었다가 정교한 의례를 행하는 자에 대한 신으로부터의 선물이 됐다. 이시스 여신은 바로 이 이집트 종교의 혁신적인 변화에 가장 중요한 신으로 자리 잡는다.

로마 작가 플루타르코스의 <오시리스와 이시스> 신화에 의하면 이집트의 첫 번째 신이자 왕인 오시리스가 인간에게 법률과 농업을 소개했다.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오시리스를 시기하는 그의 동생인 혼돈의 신 세트는 잔치를 열어 신들을 초대했다. 세트는 모든 신들이 소유하기를 가장 흠모하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만든 관을 하나 준비했다. 이 관은 세트가 자신의 형 오시리스 몰래 그의 신체 사이즈를 측정해 만든 것이었다. 세트는 이 백향나무 관과 정확히 몸의 크기가 일치하는 신에게 선물하겠다고 말한다. 여러 신들이 그 목관에 들어가 보았지만 크기가 맞지 않았다. 마침내 오시리스가 들어가니 꼭 맞았다. 그 순간 세트의 부하들이 관 뚜껑을 닫고 못질을 해 나일 강에 띄워 보냈다.

오시리스를 실은 관이 흘러 지중해로 진입해 레바논의 비블로스 항구에 떠밀려 도착했다. 오시리스의 시신이 담긴 관 주위에 커다란 백향목이 자랐다. 비블로스의 왕은 그 나무를 잘라 자신의 궁궐을 만드는 기둥으로 삼았다. 이시스는 마술의 신 토트의 도움을 받아 오시리스의 시신이 있는 관을 백향나무 안에서 꺼냈다. 시기에 불타는 세트는 다시 오시리스의 시신을 훔쳐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그 후 이시스는 다시 기적적으로 오시리스의 시신을 찾아 부활시켰다. 이시스는 마술적으로 죽은 오시리스의 시신을 통해 임신한다. 임신한 이시스는 세트를 피해 이집트 삼각주의 갈대밭에서 태양신인 호루스를 잉태해 키운다. 마술의 여신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부활시키고 호루스를 처녀 잉태한 이집트 최고의 신으로 등극한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가 등장하면서 이시스 숭배가 이집트 전역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문화와 그리스 헬레니즘을 하나로 엮을 종교제의를 찾았다. 프톨레미 소테르왕은 이시스 신앙을 그리스-로마사회에 접목시킨다.

오시리스는 ‘세라피스’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와 하데스로, 이시스는 그리스의 데메테르와 아프로디테로 동일시됐다.

이시스, 오시리스, 그리고 호루스는 그리스인들에 의해 ‘세 명의 거룩한 세 신들’ Holy Trinity로 신앙의 대상이 됐다.

이 세 명의 신들 중 가장 중요한 신은 바로 이시스이다. 이시스는 재생의 신이자 가난하고 병든 자의 신으로 자리 잡는다. 이시스가 처녀 잉태한 호루스를 젖 먹이는 동상은 이시스 신앙이 로마제국 안에 퍼지면서 가장 익숙한 종교 아이콘이 됐다. 특히 기원후 4세기 이후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오시리스-이시스-호루스의 관계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형성에, 이시스의 호루스 처녀 잉태는 예수의 탄생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피에타’는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에 대한 세 가지 예술적인 표현들 중 하나였다. 다른 두 가지 표현은 ‘마테르 돌로로사(슬픔의 어머니)’와 ‘스타바트 마테르(어머니가 여기 서있다)’이다.

‘피에타’는 독일에서 1300년경부터 ‘베스페르빌트’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베스페르빌트’란 저녁 예배시간에 사용되는 그림이나 조각을 의미한다. 이 예술품을 보면서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의 찢겨진 몸을 자신의 무릎 위에 놓고 애도한다. 이전의 유사한 이집트 이시스-호루스 동상이나 초기 그리스도교 마리아-아기예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들이 있다. 이전의 조각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지만 ‘피에타’의 예수는 죽은 모습으로 절망과 슬픔을 묘사한다.

‘피에타’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승화시킨 최고의 조각가는 미켈란젤로이다. 이탈리아 카프레세에서 1475년 행정관의 아들로 태어나 12세에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으나 1년 후 회화를 그만두고 조각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는 예술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메디치가의 로렌조 집안에서 기거하면서 르네상스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가 23세가 되던 해 로마에 파견된 프랑스 추기경이었던 장 빌에르 드 라그롤라는 그의 무덤에 배치할 조각품을 미켈란젤로에게 주문한다. 그는 거의 2년 동안 커다란 대리석판을 자르고, 갈고, 광을 내 이전 북유럽 스타일과 다른 ‘피에타’를 조각한다. 북유럽 조각가들은 과장된 몸짓, 상처, 표현으로 슬픔을 표현하려 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죽음 후의 영원한 세계를 표현하고자 시도했다.

마리아는 순결한 여인으로 똑바로 앉아 예수를 그녀의 무릎 위에 안고 있다. 여기에는 과장이 없고 예수의 상처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예수의 몸에서는 죽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이 탄력이 있다.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라 깨우면 금방 일어날 것 같은 모습이다. 마리아의 평온한 얼굴과 몸짓은 영광스러운 자기희생의 미션을 마친 아들을 위로한다.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동정녀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젊은 여인으로 묘사한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인 ‘피에타’는 동서고금을 통해 창조적으로 재생산된 인간이 갈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⑩ 황금률

 

 

 

 

 

모든 종교들을 관통하는 강력하면서도 흠모할 만한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황금률’이다. 이들은 모두 ‘당신이 당하기 싫은 방식으로 상대방을 대하지 말라’ 혹은 긍정적인 방식으로는 ‘당신이 대접받고자 하는 방식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라’이다.

동서양의 주요 종교들은 이 핵심을 나름대로 시대에 알맞게 터득하고 발전시켜왔다. 만일 당신의 선행을 당신이 속한 집단에만 국한시킨다면 그 집단은 서로 간의 이익이 상충해 분쟁만 남게 될 것이다.

우리의 선행이 우리의 이익집단으로 나가게 하는 노력, 우리 자신의 ‘에고’에서 벗어나 ‘무아(無我)’의 상태로 진입해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共感)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마음가짐은 매일매일 연습을 통해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들 간의 갈등의 원인은 보통 인간의 욕심, 질투, 야망이지만 이것들을 위장하기 위해 종종 종교적인 어법을 사용한다.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극악무도한 테러를 행하면서도 자신들의 종교를 도용하며 미움을 조장한다.

 

유대 근본주의자들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신이 유프라테스 강까지 주겠다’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웨스트 뱅크에서 지난 3000년 동안 거주했던 팔레스타인들을 몰아내려고 하고 중동평화를 위해 노력하던 자신들의 수상 이츠하크 라빈마저 암살한다.

스스로를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로 지칭한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은 노르웨이에서 100명가량을 무참히 사살하면서 유럽에서 무슬림을 몰아내겠다는 ‘유럽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코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국제적인 테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특히 오사마 빈 라덴은 자신이 조직한 알카에다의 막강한 자금으로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와 9·11 미국대폭발테러를 감행한다. 이들은 모두 신의 이름을 빌려 살인, 폭력, 미움을 조장한다.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들과 주교들은 자신들 관할 아래 있는 성직자들이 저지른 성 학대 스캔들을 못 본 채함으로써 수많은 여성들과 아이들의 고통을 무시해왔다. 몇몇 종교 지도자들은 마치 세속적 정치가들처럼 자신들의 종파를 찬양하고 상대 종교에 대해 험담과 비하 발언을 멈추지 않는다.

 

이 근본주의 종교집단의 공개적인 신앙고백에서 ‘자비’를 찾아 볼 수도 없으며, 대신 성직자의 성적 취향, 여성 사제/목사 안수 혹은 난해한 교리적 규정들과 같은 부차적인 문제에만 초점을 맞춰 종교에 속한 신앙인들을 종교공동체로부터 발을 돌리게 만들다.

이들은 황금률보다는 이 부차적인 문제에 대한 구차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기준이라고 착각한다. 심지어 한국의 몇몇 대형 개신교회들은 자신들의 세습이 성서에 근거한 것이라며 북한이나 재벌처럼 세습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버티고 있다.

오늘날처럼 종교의 핵심인 황금률이 이토록 간절히 요구되는 시대는 없었다. 세상은 점점 위태롭게 양극화되어 있고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 몇몇 거대 이익집단의 전자기계와 게임이 정해주는 가상세계의 늪에 서서히 빠져들어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간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권력과 돈이 염려스러울 정도로 소수에게 편중되어 있고 그 결과 분노, 불안, 소외, 굴욕이 점점 커져 근본주의 테러리스트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소외자들의 정신분열적인 무차별적 폭력과 미움이 분출되어 모두를 슬프게 한다.

 

우리는 끝낼 수도 이길 수도 없어 보이는 그리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