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 ⑪ 경전
경전(經典)은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와 각각 종교전통 안에서 기록된 인류의 지혜 총체이다. 고대 힌두교인들은 경전들을 말린 잎사귀에 쓰고 그것을 하나로 묶는 실은 ‘수트라(Sutra)’라고 했다. 이 세상의 모든 흩어진 생각을 하나로 묶어 보존한 것이다. 그래서 ‘수트라’라는 산스크리트어에는 ‘묶다’라는 의미를 지난 ‘seu’어근이 들어가 있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고대 중국인들은 ‘수트라’를 경전(經典)이라고 번역하였다.
경전(經典)이란 한자에서도 ‘실’을 의미하는 ‘糸가 들어가 있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중요하기 때문에 실로 꿰매 제사상에 올려놓을 만큼 소중한 책이라 하여 경전(經典)이라 불렀다. 이 전통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전은 ‘서로 엮어진’ 무한한 개체들로 이루어진 조직인 직물(Textus)이다. ‘문헌(Text)’이란 개념이 바로 이 ‘직물’에서 유래했다. 경전을 읽는 사람은 거대한 수수께끼 같은 조각들을 맞추듯이 모든 단서들을 서로 연결하여 그 심오한 의미를 파악하려 한다.
수많은 베스트 셀러들 중에 고전(古典)이라 불리는 책들은 극히 드물다. ‘고전’의 반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경전은 그 고전들 중에 고전으로 수많은 고전들 중 경전이라 불리는 책은 몇 권밖에 없다. 경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마술적인 힘이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숨겨진 의미가 새록새록 드러나기 때문이다. 경전은 그것을 아끼고 삶의 안내자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글자 뒤에 숨겨진 행간과 공간이 서서히 말을 걸기 시작한다.
이 경전들 중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 성서(聖書)다. 유대인의 토라이자 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비결은 바로 이 경전이 가진 ‘창조적인 유연성’이다. 신과 창조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신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반응이 담겨있는 ‘성서’는 기원전 6세기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론으로 포로생활을 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제들과 서기관들은 유배생활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聖殿)을 대치할 성전(聖典)을 모으기 시작하여 ‘경전’으로 삼았고 이 경전에 ‘울타리’를 쳐서 다른 책들과는 구별된 거룩한 책으로 여겼다. 토라 학자들은 성서내용을 숙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주석을 통해 토라의 의미를 밝히고 그들 자신들이 토라에 등장하는 예언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교인들이 토라를 이용하여 경전에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 할 때 유대인들의 주석전통을 이어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교 토라를 그리스도교 경험과 초기 신앙공동체 경험을 통해 새롭게 해석하였다. 두 번째로 예루살렘이 허물어진 기원후 70년 그리스도교인들을 자극하여 <신약성서>라는 새로운 책들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모든 구절들을 통해 예수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기원후 2세기부터 시작한 랍비 유대교는 미드라쉬라는 주석을 통해 토라를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다. 미드라쉬 해석의 원칙은 ‘자비의 행위’이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토라’는 글이 아니라 행동이며, 신앙생활을 통해 완성된다고 생각하였다.
경전은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열려진 책’이다. 랍비들은 신의 말씀은 무한하며 경전을 연구할 때 신의 영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믿었다. 랍비들은 특히 토라의 모든 구절들이 신의 ‘자비’를 내포하고 있다고 여겼고, 심지어는 토라 원문의 내용을 수정하면서까지 이 ‘자비’를 드러내려 노력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서를 연구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이 성서 해석의 네 가지 원칙을 ‘콰드리가’라고 불렀다. 성서의 표면적인 ‘축자적인 의미’에 감추어진 비유적인, 도덕적인, 그리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축출하였다. 유대 랍비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주석가들에게 성서의 원래의 의미보다는 자신들이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해석한 창의적이며 신학적인 해석이 더 중요했다. 중세 유럽학자들은 성서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은 성서의 신화적이거나 전설적인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위한 상식적인 설명을 찾으려 했고, 이 과정을 통해 신비적인 요소를 제거하였다. 이 시도에 대한 반격으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서 신비주의가 강하게 부각되었다.
르네상스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성서를 원전으로 읽으려고 시도하였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성서를 라틴어로 읽었지만, 유럽으로 유입된 그리스어로 기록된 성서를 읽으면서 중세 교리에서 벗어난 새로운 성서 해석의 지평을 열었다. 칼뱅이나 츠빙글리는 성서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신이 역사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으며 성서는 그 증언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과학의 발견은 종교와 과학과의 관계와 성서를 읽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미국을 건립한 청교도들은 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이라는 민족주의적 해석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세기에 등장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고고학과 고전문헌학의 발달로 성서를 상식적으로 그리고 민주적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진화론과 성서 비평학의 발달로 기존 성서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했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성서에 대한 견해를 방어하기 시작하였고 자유주의 신앙인들과 무신론자들과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이 보수주의자들의 일부가 성서를 축자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축자영감설’만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근본주의자들이라 한다.
정치와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증거 문헌들을 인용하는 현대인들의 습관은 성서 해석 전통과 맞지 않는다. 성서는 교리와 신념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성서의 주된 기능은 아니었다.
성서의 문자적 의미를 강조하는 근본주의자들의 해석은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지만 성서전통에서 벗어난 일이다. 성서 전통은 상징적이거나 혁신적인 해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서를 축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19세기 이후에 생겨난 현상이다. 특히 근본주의자들의 축자적인 해석은 유대-그리스도교의 창조적이며 자유로운 해석에 대한 모독이다. 성서는 문헌이 아니라 자비의 행동을 촉구하는 안내자이며 자비활동 그 자체이다.
성서를 통해 우리가 오늘날 해야 할 자비의 행동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서를 잘못 읽은 것이다. 성서를 깊이 읽는 행위는 이기심이 판치는 세계에서 이타적이며 초월적 세계로 가기 위한 영적인 운동인 것이다.
[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⑫ 세상의 세 기둥
기원후 2세기 유대교 랍비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경전인 ‘토라’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6세기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됐을 때 일련의 책들을 경전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515년 예루살렘 성전이 페르시아 제국의 도움으로 재건됐지만,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토라’라는 이름으로 수집하기 시작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서 경전을 읽기 시작하고, 기원후 60년경 일련의 책들은 ‘타낙’이란 이름으로 유대교 회당의 예배에 사용됐다. ‘타낙(Tanak)’이란 ‘토라(모세오경)’ ‘느비임(예언서)’ 그리고 ‘케투빔(성문서)’의 첫 글자를 사용해 만든 이름이다. 타낙은 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에 해당한다.
이들은 ‘타낙’을 통해 유대국가를 회복하려 시도했으나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은 소요와 반란이 잦은 유대를 침공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파괴한다. 유대인들은 ‘타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담긴 경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랍비들은 135년에서 160년 사이 ‘타낙’과는 다른 새로운 경전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미쉬나’이다. 히브리어로 ‘미쉬나’는 ‘반복학습으로 배우기’라는 의미다. 그래서 미쉬나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탄나임’ 즉 ‘반복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비록 문헌형태이지만 이 새로운 경전은 구전작품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암기하며 공부했다. 200년경 랍비 유다가 마침내 미쉬나를 완성시켰는데, 이것이 랍비들에게는 ‘신약’이 됐다.
미쉬나는 역사도 아니고 이야기도 아니며 신학도 아니었다. 유대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내용이었다. 미쉬나는 여섯 ‘세다림(Sedarim, 순서)’에 의해 정리된 방대한 율법적 결정사항들이었는데, 이 여섯 세다림은 다음과 같다. 제라임(Zeraim, 씨앗) 모에드(Moed, 축제) 나쉼(Nashim, 여성) 네지킨(nezikin, 손해) 코데쉼(Qodeshim, 성스러운 것들) 토호롯(Tohoroth, 정결규칙). 이들은 다시 63개의 소주제로 나뉜다.
미쉬나는 ‘타낙’으로부터 자랑스럽게 거리를 두며, 경전을 인용하지도 않았고 그 가르침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미쉬나는 유대인이 무엇을 믿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관심을 가졌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일생생활에서 어떻게 ‘차별된 거룩한 행위’를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사실 시대의 필요에 맞춰 재해석될 수 없는 경전은 죽은 것이다. 미쉬나는 단순한 지적 추구가 아니며, 그 연구가 목적이 아니다.
미쉬나는 실제 행동을 유도하도록 영감을 줘야 한다. 경전을 읽는 자는 토라를 실제 상황에 적용시키고, 이것이 공동체의 모든 이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할 의무를 지닌다. 목표는 불명확한 구절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화급한 문제에 응답하는 것이다. 실제 적용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경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랍비들은 경전을 ‘미끄라(Miqra)’, 즉 ‘부름’이라고 불렀다. 경전은 유대인들을 행동으로 인도하는 요구이다. 미쉬나는 실생활에 적용할 법률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미쉬나의 ‘네지킨’ 편에 등장하는 ‘선조들의 어록’이란 부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잠언집이다. ‘선조들의 어록’의 핵심은 1장 2절에 등장한다.
“의로운 시몬은 ‘위대한 회중’ 가운데 한 명이었다. 세상은 다음 세 가지에 달려 있다. 토라, 아보다 그리고 헤세드 베풀기.”
기원전 3세기에 생존했던 ‘의로운 시몬’은 유대인 전통에서 가장 존경받은 지도자 120명으로 구성된 ‘위대한 회중’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입법부에 해당하는 크네셋의 정수도 이 전통에 따라 120명이다. 시몬은 나라를 잃고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고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을 세 가지로 규정했다.
*토라 : 모세오경(율법), 구약성서의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아보다 : 예배,일,봉사
*헤세드 : 불변의(하느님의)사랑,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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