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개념
'철학'은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 '철학함'이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철학의 정체는 무엇이며, 철학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엔가에라도 쓸모가 있는가? - '철학'에 접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보통 사람이나 '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나 자주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이는 '철학'에 '학'(學)자가 붙은 것을 보면 무슨 '학문'은 '학문'인 모양인데, 그 말이 지시해 주는 바가 쉽게 파악되지 않음이 그 첫째 이유일 것이다.
'학', 다시 말해 '학문'이란 무엇엔가에 관한 '체계적 이론' 내지는 어떤 '이론적 체계'라고 치고, 대체 '철학'이란 어떤, 무엇에 관한 이론 체계인가?
물리학은 사물의 물질적 원리에 관한 이론 체계요, 심리학은 사람의 마음의 원리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요, 법학은 법에 관한, 생물학은 생물에 관한 학이며, 정치학이라는 것도 정치에 관한 어떤 종류의 이론 체계거니 하는 짐작이라도 간다. 그런데, '철'(哲)에 관한 학이라는 것도 있는가, 아니면 '철'하는 활동도 학문 활동이란 말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의아심을 가지면서도 명칭만 가지고 철학에 대한 어떤 감(感)을 잡을 수가 없어,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벌어진 일들의 현장, 즉 '철학사'(哲學史)를 들춰보며 '철학'의 정체를 파악해 보려 한다. 그러나 '철학사' 책을 넘겨 가면서 이른바 '철학자'들 스스로 자기 업무, 즉 철학을 규정한 것을 살펴보면, 그 다양함이 자못 철학자 수만큼이나 됨을 발견하게 된다. 대체 이런 사정은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철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만 말하고 싶다. 즉, 오랜 세월에 걸쳐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에 의해 철학이 연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고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철학을 더 잘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것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참된 의견만 있을 터인데, 실제로는 많은 갖가지 의견들이 있으며, 게다가 그것들이 학식 있는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음을 보고서, 나는 단지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을 모두 거짓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했다."(Descartes, Discours de la Méthode, I, 12)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서 철학에 대한 규정부터 어느 정도 확실히 해두는 것은 철학적 문제를 이해 탐구하고, 철학적 논의에 으레 끼어 드는 불필요한, 그뿐만 아니라 철학의 본 뜻과 정반대 되는, 개념(??)적 혼란을 방지하는 제일의 작업이 될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철학'이라는 말은 서양 문화사의 초기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등장한 '필로소피아(philosophia)'의 번역어이다. 그렇다면, 이 '필로소피아'의 본디 뜻은 무엇이던가?
'필로소피아'는 낱말의 형성 순서에서 볼 때나 사태의 전개 순서에서 볼 때나 '필로소포스'[philosophos: 지혜를 사랑하는 자, 철학자, 哲人]가 있은 후에 그의 활동[곧, 필로소페인: philosophein, 철학함]의 결실로서 나타났다. 그런데 대체 '필로소포스'란 어떤 사람을 일컫는가? 이 명칭이 뜻하는 바는,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0-500) 또는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c. 544-483)에 이어 이 말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사용했던 소크라테스(Sokrates, BC 469-399)의 다음 말에서 그 대략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파이드로스여, 누군가를 지혜 있다라고 일컫는 것은, 내가 보기엔 너무 높이 올라간 것 같고 그런 말은 신에게나 적용하면 적절한 것 같네. 그러나 지혜를 사랑하는 자[philosophos] 혹은 그 비슷한 말로 일컫는다면, 그 자신도 차라리 동의할 것이고, 보다 더 합당할 것 같네."(Platon, Phaidros, 278d)
그러니까 플라톤(Platon, BC 427-347)이 전해 주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따르면, '필로소포스'란 완벽한 지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지혜를 가진 자라기보다는 그 같은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며, 그에 이르려고 애써 노력하는 자, 가령 구도자(求道者) 쯤을 지칭하겠다.
"철학, 즉 지혜에 대한 사랑은 그 순수함과 견실함에 있어서 놀라운 즐거움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앎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찾는 사람들보다 더 즐겁게 삶을 영위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럴 법하다."(Aristoteles, Ethica Nicomachea, 1177a 20-1177b 25)
그러니까 '지혜' 그 자체를 가짐이 최상의 상태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자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일로, 사람은 기껏해야 '지혜를 찾는' 도정에 있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런 뜻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우리가 '철인(哲人)'으로 이해하는 것은 유가(儒家)의 전통에서 볼 때도 그럴 듯하다 할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arche)를 통찰하고 있는 자, 그래서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從心所欲不踰矩1)) 자, 그는 분명히 신인(神人)이며 성인(聖人)이다. 이런 성인 공자(孔子, BC 552-479)의 으뜸 제자 10명을 '십철'(十哲)이라 칭했고, 그 다음 수준의 사람들을 골라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 일컬었으니, '철인' 내지 '철학자'는 '현인'(賢人)보다는 좀더 '도'(道)에 가까이 다가간, 그러나 완전히 도에 이른 성인은 아직 아닌 자를 이름하는 것이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철인'의 진리 추구 활동과 그 결실, 곧 '철인의 학문'[哲人之學]을 이제 우리가 '철학(哲學)'이라고 일컫는다면, 그것은 '필로소피아(philosophia)'의 원래 뜻과 크게 어긋남이 없다 하겠다.
그러나 유가적인 파악에 따르든, 그리스 철학의 이해에 따르든, 이 '철인' 내지 '철학자'라는 고래의 명칭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철학자'와 똑같은 함축을 가질까? 오늘날 의미에서의 물리학자는 지혜 즉 참된 지식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며, 수학자와 역사학자는 그러한 지식을 추구하는 자가 아닌가? 이 반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초기 의미에서의 '철학자'는 오늘날 우리의 개념으로는 '학자'에 해당하며, 이에 상응해서 당시의 '철학'은 '학문 일반'을 지칭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가 말하는 '철학'은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학문'에 가깝다. 그리고 이런 개념 사용은 서양의 근대 초까지도 계속되었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에게 있어서도 그러하고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에서도 그러하며, 뉴턴(I. Newton, 1642-1727)에게서도 그러하다. 데카르트는 그의 라틴어 저술 『철학의 원리』(1644)의 프랑스어 번역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 철학을 하나의 나무에 비유한다면, 그것의 뿌리는 형이상학이요, 줄기는 물리학[자연학]이며, 가지들은 […] 의학, 역학, 윤리학과 같은 여타 학들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의 원리』는 (Ⅰ) '인간 인식의 원리들에 관하여', (Ⅱ) '물질적인 것들의 원리들에 관하여', (Ⅲ) '가시(可視) 세계에 관하여', (Ⅳ) '지구에 관하여' 등의 네 부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다 (Ⅴ) '동물과 식물의 본성에 관하여', (Ⅵ)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등을 덧붙이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뉴턴도 근대 물리학의 체계를 담고 있는 그의 저술에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라는 제목을 부여하였으니, 분명히 이때까지만 해도 '철학'은 '학문' 일반을 지칭하고 있었다.
그러던 '철학' 개념이 언제, 무엇이 계기가 되어 의미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 그것은 근대적 의미에서의 '과학'들의 성립과 함께 라고 생각되어야 한다. 서양 학문사에서 그 성립의 과정을 고려할 때나, 그냥 '학'(scientia, science)이라 일러도 무방할 터인데 굳이 '분과학'(分科學)이라 말하는 우리의 이해로 볼 때나, 과학(科學)은 총체학(總體學) 내지는 근본학(根本學), 즉 철학을 전제하고, 또 그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렇다면 '철학'이라는 말이 생긴 이래 1,500년 이상 일괄 통칭되던 학적 작업들, 혹은 학적 문제들 가운데, 왜 어떤 것들은 '과학적'이라는 명칭을 새로이 얻게 되고, 어떤 것들은 오늘날도 여전히 '철학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가? 그것은 문제의 성격과 그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는 방법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학적 관심이 싹튼 초기에는 일체의 문제들이 '철학적'이었다. 그것은, 자연에 관해서든 인간에 관해서든 문제와 사태의 근본원리를 찾으려는 문제 의식은 있었으되, 문제 해결을 위한 변변한 수단과 방법을 개발하지 못한 채 암중모색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다가 어떤 문제와 사태 영역들은 그것들에 접근해 갈 수 있는 비교적 신뢰할 만한 방법들이 개발되었고, 따라서 어느 정도 '객관적'인 논의 영역이 확보되었다. 그래서 이른바 '학의 부분 영역', 즉 '과학'들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과학들이 분과되어 간 이래로도 여전히 '철학'에 머물러 있는 문제 영역들은 그 성격상 이른바 '과학'의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오늘날의 '철학'은 연구 대상에 있어서나 연구 방법에 있어서 수학과도 다르고 과학들과도 다르다. 모든 과학들이 그리고 수학조차도 본래는 철학과 한통속이었고 이로부터 분화되었다고 해서, 오늘날의 수학과 과학이 오늘날의 철학과 동종의 학문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 물론 그 '뿌리'의 같음과 인간의 지혜의 한계로 인해 그런 제 과학에도 여전히 철학적 문제가 남아 있어, '과학철학', '법철학', '심리철학'등의 영역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철학'의 변화에 대한 뚜렷한 상황 인식을 18세기 중엽의 '철학자'들은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양 문화사에서 이 시기는 인간의 일반 이성이 '계몽'을 폭넓게 체험하고 있던 때이다.
많은 과학들은 이제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는 언어(즉 수학)와 방법(즉 실험 관찰), 그리고 그들만이 다룰 수 있는 도구(즉 과학 器機들)를 통해 큰 발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 연구 성과는 놀라웠고, 그리고 그것은 '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를 보고서, 여전히 철학적 문제에 관심이 더 큰 학자들은, 이제 철학도 전문적으로 연구되어야 함을 새삼스럽게 깨우쳤다. 이로부터 철학의 전문화가 시작되었고, 이것은 철학의 직업화를 낳았다. 그리고 이젠 어느 학문의 영역에서나 학문의 수준 자체가 전문적으로, 그리고 직업적으로 몰두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 있었기도 했다.
사실 탈레스(Thales, BC 640-550) 이래 18세기 초엽까지 오늘날 우리가 '철학자'라 부르는 사람들에 있어서 '철학'은 그들의 직업 소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생업이 따로 있었거나 필요 없었으니, 말하자면 철학함은 그들에게는 '한가(閑暇, schole)한 생활이었다. 철학사에 남긴 그들의 혁혁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그들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면, 철학의 '아마추어'들이었고, '아마추어' 신분을 또한 유지하려 했다. 고중세의 철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데카르트, 스피노자(B. Spinoza, 1632-1677), 라이프니츠, 로크(J. Locke, 1632-1704), 버클리(G. Berkeley, 1685-1753), 흄(D. Hume, 1711-1776) 등 근대 철학의 초기 대표자들도 모두 그러했다.
이런 철학사적 전통에다가 아직까지도 '객관성'이 없어 보이는 철학적 논의의 형편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철학'은 어느 정도의 지성과 일반적인 일상 체험만 가지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철학'은 당연히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철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여타의 모든 학문에서는 (전문가가 있겠거니 하고) 조심성 있게 침묵으로 관망하는 사람들도 형이상학[철학]적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학문에 비해 그들의 무식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음을 기화로, 대가인양 지껄이고 대담하게 단정한다."(Kant, Prolegomena: 『전집』 Ⅳ, 264)
고 칸트(I. Kant, 1724-1804)는 세상 사람들을 비판했고, 더 나아가 그의 후배 헤겔(G. W. F. Hegel, 1770-1831)은
"사람들은 하다 못해 구두 한 켤레를 만들기 위해서도, 비록 모든 사람이 자기 발에 맞는 구두 본(本)을 가지고 있고 구두를 만들 수 있는 소질이 있다고 하더라도, 구두 만드는 법을 배우고 훈련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유독 철학함에 대해서만은 그러한 연구나, 배움 내지는 노고가 필요치 않다고들 말한다."(Hegel, Enzyklopädie, §5)
고 철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오해를 지적했다. 이런 생각에서 칸트는, 그 역시 당시 지성인의 사회적 책무인 계몽주의 운동에 앞장섰으면서도, 엄밀한 학적 토대를 닦음이 없이 그런 운동에 나서는 '에세이스트' 내지는 '이데올로그'들을 "통속철학자"라고 비판, 자신을 그들과 구별하였다.
요컨대, 이제 철학도 수학이나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문제의 근원성과 보편성, 그리고 난해함과 절실함으로 인해, 더욱 더 엄밀히 학적으로 그리고 전문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상황에 놓였다고 칸트는 파악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 창조적 자세로 대응한 최초의 철학자로 우리는 칸트를 꼽을 수 있다.
칸트는 우리가 철학사에서 만나는 대가들 가운데 최초의 직업 철학자, 즉 대학의 철학 교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그는 종래의 여느 철학자들처럼 직업적으로는 다른 일에 종사하면서도 철학적 문제에 관심이 많고 재능이 뛰어난 그래서 후세에 큰 연구 성과를 남긴 '아마추어'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함이 그의 생업이었고, - 엄밀히 말해, 후반생(後半生)이 그러했지만 - 또 오로지 철학에 전념한 최초의 '프로' 철학자이다. 비록 당시의 대학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철학부'가, 국가 경영에 직접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상부' 학부인 신학부·법학부·의학부의 '하부' 학부로서 기초 교양 교육을 염두에 두고 설치되었다 하더라도, 이제 철학은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연구되고 교육되기 시작했으며, 칸트는 대학 강단에서 정규적으로 철학을 논하는 교수였다. 이때쯤 해서 사람들은 학교에서 연구되고 강론되는 '철학'의 개념[철학의 "학술 개념"]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일반 시민적 견지에서 볼 때, 철학은 여전히 "인간 이성에게 법칙을 수립해 주는 자"(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A839=B869)이다. 그러니까 철학의 "일반 개념"에서의 철학함의 궁극 목표는 "우리 이성 사용의 최고 원칙"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단계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18세기 중엽 철학의 '전문인'들은 철학이란 '개념들에 의한 이성 인식의 체계'라고 규정했다(Kant, K.d.r.V., A713=B741 참조). 개념들로 이루어진 이성 인식의 체계로서의 철학은 첫째로 '개념들의 구성[作圖]에 의한 이성 인식의 체계'인 수학과 구별되고, 둘째로 '경험적 자료에 의한 인식'(cognitio ex datis)들의 체계인 여타의 모든 과학들과도 구별된다.
이성 인식이란 원리적 인식(cognitio ex principiis), 즉 순수한 선험적 인식을 말하며,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첫 번째가 이성의 이성 자신에 대한 인식이요, 그 두 번째가 이성에 의해 순수하게 원리적으로 생각되는 대상들에 대한 인식이다. 그래서 철학은 두 부문을 갖는다. 그 첫 번째 부문이 이성 자신의 형식에 관한 인식들로 이루어진 '논리학'(論理學, logica)이고, 그 두 번째 부문은 순수하고 원리적이되 대상의 실질[실재] 내용에 관한 인식들로 이루어진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a)(??)이다.
이와 같은 철학의 본래 문제들의 영역 외에 19세기 이후에는 인간의 대상에 대한 인식 원리를 반성적으로 다루는 '인식론'(→)이 생겼고, 또한 이미 철학에서 분가해 나간 제 과학들이 여전히 원리로서 필요로 하는 근본에 대한 반성 작업인 사회철학·법철학·정치철학·과학철학·언어철학 등이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 영역이 확장되어 가는 만큼 무지(無知)의 영역도 확장되어 과학의 '발달'로 철학적 문제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더 넓고 깊어져 가고 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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