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철학 개념 ??..

정신

rainbow3 2019. 9. 21. 20:49


정신(精神. spiritus. Geist) 

낱말 '정신'의 유래와 상관 개념

우리말 '정신'은 본디 한자말이다. 한글말 '정신'은 한자어 '精神'을 한국 사람들의 발음으로 읽어 적은 것이다. 곧,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정신(精神)'이라는 낱말은 1870/80년대 일본인들이 서양 사상을 수용하면서 'spirit'·'Geist' 등을 '精神'으로 번역한 것10)을 받아쓰기 시작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한자어 '精神'은 중국 태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본 태생인 셈이다. '정신(精神)'이라는 이 낱말을 한국인이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한 조사 연구11)에 따르면,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펴낸 『韓英字典 - 한영자뎐 - 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Kelly & Walsh: Yokohama/ Shanghai 1890)에 'reason'을 '지각'·'의리'와 더불어 '졍신'으로 옮긴 예가 이미 보인다 한다. 철학 분야에서는 조선 사람 전병훈(全秉薰, 1860∼ ?)이 1920년경 베이징(北京)에서 출간한 것으로 추정되는 책 『精神哲學通編』에서 볼 수 있고, 또한 우리나라 사람이 쓴 최초의 철학개론서인 한치진(韓稚振)의 『最新 哲學槪論』(復活出版部, 1936)에서도 쓰이고 있다. 그러니까 '철학'이라는 낱말을 포함해서 다수 철학 용어들이 그러하듯이 '정신'이라는 말도 서양 사상이 우리 사회 문화에 유입되면서부터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12)

그 이후 '정신'이라는 말은 우리 문화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여러 사태와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유사어만 하더라도 정기(精氣), 정령(精靈), 영혼(靈魂)[靈, 魂, 넋, 얼], 마음[心], 이성, 생명, 이념, 의식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이것과 대립적인 의미를 지닌 말들 또한 물체, 신체, 육체, 몸, 물질 등 다수가 있다. 이것은 '정신'이라는 말이 여러 가닥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지시하는 사태가 그만큼 복잡다단하고 애매모호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정신'이라는 말은 이미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철학적 개념으로서 '정신'의 의미는 서양철학 사상이 우리 문화에 수용되면서 더욱 더 풍부해졌고, 오늘날 여러 가지 철학적 논쟁에서 '정신'이 주제어가 될 때 그것은 이 말의 한자어 연원의 의미에서보다는 오히려 서양 사상의 원천에서 유래한 근대철학적 논의의 맥락으로부터 얻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날의 철학적 논의에서 '정신'은 특히 '영혼'·'마음'과 때로는 교환가능한 말로 때로는 서로 구별되는 말로 사용되고, 또한 많은 경우 그것들의 상관 개념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상관 개념은 정신-물체[물질]·영혼-육체·마음-몸[신체](心身) 등으로, 이것은 바로 그 안에 많은 철학적 논의거리를 함유하고 있다. 세계의 본원적 존재에서부터 세계 구성의 요소, 생명체의 고유성에서부터 인간의 인격성 또는 '나'라는 자아의 근원에 관한 문제에까지 거의 모든 형이상학적·인식론적·윤리학적 문제들은 이 켤레 개념들과 연관되어 있다.  


'정신' 개념의 고전적 의미

우리가 '정신'이라는 낱말 자체를 사용한 것은 기껏해야 19세기 말부터지만, 그러나 이 말의 의미 연원은 거의 인류 문화사 초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사람의 동물적 삶에 관련돼 있는 말들은 대개 역사가 깊은 반면, 고급 문화 영역을 지시하는 말들은 오히려 역사가 짧은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정신'은 분명 문화어 중의 문화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 연관의 역사가 참으로 깊을 뿐만이 아니라, 많은 문화 현상들과도 깊게 얽혀 있다. 게다가 '정신'이 지시하는 바는 인간 자신 내지는 인간 사회 문화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정신'의 개념은 인간관이나 세계관 또는 가치관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 개념의 의미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여러 사상 형태들을 살펴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중국 고전에서 '정신'

'정신(精神)'이라는 말이 번역어로 채용됨으로써 비로소 20세기에 와서 널리 쓰이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말의 연원은 옛 중국의 고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한자말에서 '정(精)'과 '신(神)' 그리고 이 두 낱말이 합해진 '정신(精神)'은 때로는 서로 무관하게 때로는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정(精)'은 일찍부터 '곡식의 알맹이'·'순수함'·'정액(精液)'·'정세(精細)함' 등을 뜻함과 함께 '만물 생성의 영기(靈氣)'를 뜻했다(『莊子』, 在宥: "吾欲取天地之精 以佐五穀 以養民人" 참조). '신(神)'은 오늘날은 거의 '하느님'과 동일한 말로 사용되고 있지만, 옛적에는 '천신(天神)'·'신령(神靈)'·'혼령(魂靈)'이라는 뜻과 함께 '의식(意識)'·'정신(精神)'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쓰였다(『荀子』, 天論: "天職旣立 天功旣成 形具而神生" 참조). '정신(精神)'이라는 말 또한 이미 일찍부터 때로는 형해(形骸) 또는 신체와 구별되는 '정기(精氣)'의 뜻으로(『呂氏春秋』, 盡數: "聖人察陰陽之宜 辨萬物之利 以便生 故精神安乎形 而年壽得長焉"; 王符, 『潛夫論』, 卜列: "夫人之所以爲人者 非以此八尺之身也 乃以其有精神也" 참조), 때로는 '의식(意識)'의 뜻으로(『史記』, 太史公自序: "道家使人精神專一 動合無形 贍足萬物" 참조)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중국 고전에서의 낱말 '정신'의 문맥상의 어의는 오늘날의 용례에서와 상당 부분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예컨대, 오늘날 우리가 '심신(心身)의 문제'라 일컫는 것은 옛 사람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신형(神形)의 문제'라 할 수 있는 등 낱말 사용상의 차이가 없지 않고, 또한 '정신(精神)'이라는 말은 아주 드물게만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와 초기 기독교 고전에서 '정신'

우리말 '정신'에 상응하는 말로 구약성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말은 헤브라이어 '루아(ruah)'이다. 이 말은 본디 숨결·바람 등을 뜻한다. 예컨대, 입김(시편 33:6), 숨[입김](욥기 19:17), 생명숨결[바람](예레미아 10: 14) 또 선들바람(창세기 3:8)과 폭풍[세찬 해풍](출애굽기 10:19) 등이 언급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힘들에 대한 고대 유대적 표상들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은 이 사념들을 창조 신앙과 결합하고, 그래서 신의 숨 내지 신의 입김으로서 "야훼의 숨결"(ruah jahve)이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생리적 효력이 된다. 인간과 동물의 세계는 동일한 생명력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다(시편 104:30, "숨을 거두어 들이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지만,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와집니다."). 숨결은 생명의 숨(창세기 6:17)이며, 모든 피조물의 생명 정신이 야훼에 의해 소환되면, 모든 피조물은 죽음에 든다(창세기 6:7 참조). 생명의 비밀은 숨 속에 들어 있다. 숨은 다름 아닌 '목숨'인 것이다. 야훼의 숨은 창조신의 절대적인·마음대로 할 수 없는·생명을 만드는 권력이다. 예언자시대에 야훼의 생명 숨결은 야훼의 말씀과 결합되고, 그래서 시편은 "야훼의 말씀으로 하늘이 펼쳐지고, 그의 입김으로 별들[모든 무리, 군대]이 돋아났다"(시편, 33:6)고 읊고 있다.

때때로 생명의 숨결은 '네페쉬(nefes)'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한다(출애굽기 23:12). 그럼에도 '네페쉬(nefes)'는 '루아(ruah)'와 구별되는데, 그것은 '네페쉬'가 '루아'처럼 보편적으로 생명을 일으키는 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과 동물의 개별적인 구체적인 생명을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페쉬'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루아'의 죽음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다.

신약성서에서도 정신을 지칭하는 말로 '루아'에 대응해서 그리스어 '프네우마(pneuma)'가 사용되고 있다. 이 '프네우마' 역시 근원적으로는 "공기·바람·숨의 힘이 충전된 운동"을 뜻하며, 그러니까 생리적-물질적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은 의미의 변경 없이 "성령"을 일컬을 때에도 쓰이고, 때로는 악령을 지시할 때도 쓰인다.

'프네우마'가 마르꼬와 마태오에서는 구약의 연장선상에서 인간 정신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면서, 한편으로는 '생명의 힘'이라는 뜻의 '숨'(마태오 27:50)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지각·인식·감각이라는 뜻의 '생각'(마르코 2:8)으로 쓰인다.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에서 '정신'

'정신'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그리스어 낱말 '프네우마'(pneuma)는 동사 '호흡하다'(pneo[πγ?ω])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니까 '프네우마'는 원래 '움직이는 공기', '호흡된 공기', '호흡'[숨] 정도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 말이 '호흡작용'[숨을 쉼]을 뜻한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질료적 의미를 가졌다.

고대 그리스 초기부터 이 말은 의학과 철학에서 사용되었다. 우주와 인간의 생리 작용에서 공기와 '정신'은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살아 있는 숨은 피와 함께 혈관을 돌면서 생물학적 작용들의 근원을 이룬다. 정신의 중심부는 뇌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기서 인간의 전 신체 조직을 주재한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정신은 심장에 위치하며 거기서 피와 함께 전 신체를 관통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렇게 생각한 사람 중의 하나다.

스토아철학에서 '정신'은 포괄적인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개별 영혼의 실체나 내적 신성(神性)의 실체를 지시하는 말로 쓰였다. 예컨대, "따뜻한 정신은 영혼이다."(Diogenes Laertios, VII, 157) "이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에 깃들은 신적 정신의 한 부분이다."(Seneca, Epistulae, 66, 12) 정신은 만물을 관통하고 우주의 통일성과 우주 안에 함유되어 있는 개별 존재자들의 통일성을 보증한다. 우주는 커다란 유기체이고 살아 있는 것으로서, 그것의 부분들은 모두 서로 화합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개개 영혼이 육체에게 그렇게 하듯이, 우주 유기체에게 내부로부터 혼을 넣어주는 것은 생명의 호흡인 신성(神性)이다. "그러니까, 세계가 신적인 정신과 연관을 이루고 있는 정신에 의해 통합돼 있지 않다면, 세계의 모든 부분들이 서로 화합하는 일이란 정말로 일어날 수 없을 터이다."(Cicero, De natura deorum, II, 7, 19) 만물은 신의 정신으로부터 생긴다. 그것은 우주의 질서 잡힌 실재를 자신으로부터 산출하는 창조적인 불이다(Diog. Laert., VII, 156). 그렇기에 우주의 생성은 개개 생물의 생성과 똑 같은 것으로 관찰된다. 우주는 나중에 펼쳐질 모든 성분들을 이미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최초의 정자(精子)로부터 발생한다. 또 주기적인 세계 화재(火災)가 있어, 그로부터 우주가 발생했던 근원 종자(種子)로의 규칙적인 귀환이 있다. 똑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생의 표출들도 육체의 모든 부분들에 들어있는 영적 정신을 근거로 해서 설명된다. 그래서 감각적 인식이란 영적 정신에 지각된 대상의 모상(模像)의 인상(印象)으로 파악된다. 이 인상은 영혼의 중심부에서 육체의 주변으로, 또 주변으로부터 중심부로 흐르는 정신의 유동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 정신의 유동들은 유기체의 응집을 돌본다. 이 정신의 유동들이 영혼의 중심부에 의한 일정한 육체 운동들의 성립을 설명해 주고,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인상들이 외부로부터 중심부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설명해 준다(Diog. Laert., VII, 158 참조). 스토아학파에서 정신은 일관되게 질료적인 원리로 간주되었고, 그러면서도 그것의 섬세성과 운동성이 매우 강조되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영적 정신은 사후에도 한 동안 개별성을 유지하고 있다가 이내 보편적 세계 영혼 안에 받아들여진다. 이런 식으로 우주의 전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개별 영혼에서도 모든 것이 순환적 과정에 따라 진행된다. 그러니까 스토아 자연학자들은 인간을 포함하는 '물질주의적' 우주생물학을 내놓았다고 볼 수 있다.

1세기 초의 종교·철학의 절충주의(syncretism) 학파는 정신에게 중요한 위치를 부여했다. '정신'이라는 말은 신의 세계에 대한 관여를 상징적으로 서술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정신은 신의 세계 생기(生起)에 대한 직접적인 관여이다. 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정신이 더 이상 질료적인 것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신의 비물질적인 성격이 좀더 자세하게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영지(靈知)주의(gnosticism)자들에게서 '정신'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자주, 혼돈적이면서도 조형적인 물질에 혼을 집어넣는 우주의 형식적 원리를 뜻한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이 말은 빛과 어둠 사이의, 그리고 우주의 상위 영역들 사이의 중간에 놓여 있는 우주 원리를 뜻한다. 또 어떤 때는 인간의 상위 부분을 의미한다.

신플라톤학파 철학에서 정신은 무엇보다도 비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중간자로서 간주된다. 정신이란 영혼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영혼의 육체와의 오염된 접촉을 방지하는 어떤 것을 뜻한다(Plotinos, Enneades, II, 2, 2 참조). 이것은 인식작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혼은 물질적인 대상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고, 사물들의 모상들을 영혼의 정신적 보자기에 싼다. 인간과 신성(神性)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은 배제되어 있다. 예언과 황홀은 신적 정신을 매개로 일어나는 바, 신적 정신에 의해 영혼은 빛나고 정화되며, 그렇게 해서 인간은 보다 높은 인식에 이를 수 있고, 그의 자연적인 가능성들을 뛰어넘는 활동을 펼칠 수 있다.

한편 '정신'에 대응하는 라틴어는 '스피리투스'(spiritus)라 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이미 1-2세기의 기독교 문헌에 자주 등장하며, 그 의미는 스토아학파의 유물론적 정신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점차 정신주의 색채를 드러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정신(spiritus)을 무엇보다도 비물질적 실재, 곧 신이나 인간의 영혼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 그때 정신적인 것은 적극적인 의미를 얻어, 그것은 신플라톤학파의 영향을 받아 단순하고 불가분리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Augustinus, De natura et origine animae, IV, 22-23; De trinitate, XV, 5, 7 참조).

이로써 우리는, 보통의 말들이 그러하듯이, 처음엔 일상 언어 생활에서 구체적인 대상적 내용을 갖던 말 '정신'이 철학적인 숙고가 덧붙여지면서 원래의 의미와는 차츰 멀어지는 말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근대 '정신' 개념의 형성과 해체

실체인 정신으로부터 이념인 정신으로

'정신' 실체의 함축

'정신' 개념이 철학적 논의의 핵심에 등장한 것은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가 마음-몸, 정신(mens)-물체(corpus)라는 두 실체론을 폄으로써였다. 데카르트의 이 두 실체론은 기독교적 전통 사고와 새로운 수학적 자연과학의 지식을 화해시키려는 시도의 산물로서, 그것은 계몽주의 시대가 철학자에게 한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체'란 "그것이 존재하는 데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Descartes, Principia philosophiae, I, 51)을 말한다. 그러니까 실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규정대로라면 절대자인 '신'만을 실체라 할 터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의식[생각]이라는 본성을 가진 정신과 연장성[공간적 크기]이라는 본성을 가진 물체는 상호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러므로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res)이라는 뜻에서 각각 실체라고 말한다. 이 제한적 의미에서의 실체 이원론을 인간의 존재 구조 설명을 위한 이론으로 원용하면서 '심신이원론'과 함께 '심신상호작용설'이 나왔고, 이로부터 현대 심리철학의 제 문제는 발단한다.

데카르트는 "나란 정확히 말해 다름 아니라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이며, '생각하는 것'이란 곧 '정신'·'영혼'·'지성'·'이성'이라고 풀이하고, '나[자아]=생각[의식]하는 것=정신[마음]'이라고 규정하는 한편, 이것과는 다른 '물질적인 것'(res materialis) 또한 "존재"한다고 말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생각함을 본성으로 갖는 '나'라는 실체는 "존재하기 위해 아무런 장소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떠한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Discours de la Méthode, IV, 2). "이 나는, 곧 나를 나이게끔 하는 정신은 신체[물체]와는 완전히 구별되며, […] 설령 신체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인 바 그대로 온전히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같은 곳) 더 나아가, "완전한 존재자로서 신이 […] 존재한다는 것은 기하학의 어떤 논증보다도 더 확실"(같은 책, IV, 5)하고, 세계 내의 모든 "물체들", "지성적인 것들", 기타 "자연물들" 모두가 "그것의 존재를" 이 완전한 자의 "힘에 의지하고 있고, 이것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같은 책, IV, 4)

데카르트의 이 문맥에서, '나'라는 정신이나, 모든 것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완전한 '존재자'로서 신이나 공간상의 어느 지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심지어 데카르트는 그것은 공간적인 존재자가 없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어떤 존재자가 논의되는 자리에서라면 언제나 묻기 마련인, "그것은 언제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이 '신'을 포함해 이른바 '정신'이라는 존재자에게는 물어질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슨 뜻에서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이 '나'라는 지성에 의해 명석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존재자라 한다면, 그래서 불명료한 감각이나 "상상"에 의해서 파악되는 물리적인 존재자보다도 훨씬 더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같은 책, IV, 6)이라면, 참으로 존재하는 것인 '신' 및 '나'에 비해 차라리 '물체'는 가상(假象)적으로 존재하는 것,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만약에 물체를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라 한다면, 물체와는 전혀 다른 것인 '정신'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존재자가 아니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명석하지 못했던 데카르트의 반성은 '정신'의 본질적 성질인 '생각[의식]'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서 더욱 더 모호함을 드러낸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것으로서 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곧, 의심하고, 통찰하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의욕하고, 의욕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감각하는 것이다."(Meditationes, II, 8)고 대답한다. 정신 실체로서 '나'의 적어도 한 가지 활동은 '감각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란 신체에 대해 독립적인 것이고, 공간상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 것이라 했다. 대체 이때 신체 없는 내가 '감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데카르트는 실체로서의 '정신'을 내세우면서도 부지불식간에 그것이 적어도 지각활동에서는 신체 의존적임을, 그러니까 더 이상 실체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로크(J. Locke, 1632-1704)는 정신 실체를 이 방향으로 계속 끌고 가 마침내 그 존재가 해소될 처지에 놓이게 한다.

로크에서 '실체'는 일종의 복합관념이다. 그는 실체란 마음에 주어진 단순 관념들이 "그 안에 존속하고, 그로부터 유래하는 어떤 기체(基體)"(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Essay], ed. A. C. Fraser, Bk II, ch. 23, sect. 1)라고 규정하기도 하고, "우리 안에 단순 관념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성질들, 즉 보통 우연적인 것들이라 일컬어지는 그런 성질들을 담지하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단지 가정된 것"(같은 책, II, 23, 2)이라고 부연하기도 한다.

그런데 로크는 이렇게 '실체'를 규정한 후에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실체를 "세 종류" 곧 신·유한한 정신들(finite spirits)·물체들(bodies)로 나눈다. 여기서 로크는 데카르트처럼 단지 '정신'이라는 것 그리고 '물체'라는 것을 말하는 대신, '정신들'과 '물체들'을 말함으로써 다수의 셀 수 있는, 그러니까 서로 구별되는 정신들과 물체들을 거론하고 있고, 이것은 아직 데카르트에게는 의식되지 않은 더 많은 '심신의 문제들', 예컨대 마음과 몸의 '개체성', '자기동일성' 따위의 문제들까지도 문제의 전면에 등장시킨다.

로크에서 "유한한 정신들"에 속하는 '우리 인간들의 마음들'이란 이렇게 한 묶음으로 지칭될 수 있는 한에서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임과 동시에, 복수인 점에서 서로 구별되는 개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 중의 하나인 '나'는 개별성을 가지며, 하나의 '나'는 다른 '나들'과 구별되는 한에서는 자기동일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무한 실체로서 "신은 시작도 없고, 영원하고, 불변적이고, 무소부재하고, 그러므로 그것의 동일성에 관해서 어떠한 의문도 있을 수 없다."(같은 책, II, 27, 2) 그러나 유한한 정신들을 포함해서 유한한 실체들은 어느 것이나 "존재하기 시작하는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가지며, 그 시간과 장소와의 관계는, 그것들 각각이 존재하는 동안, 언제나 그것의 동일성을 결정할 것이다."(같은 곳)

우리는,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어떤 것이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가 어떤가의 비교를 통해 어떤 것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얘기할 수 있다(같은 책, II, 27, 1 참조). 이때 우리가 구하는 것은 개별성의 원리다. 즉 이때 우리는, "어떤 것은 무엇에 의해서 바로 그 '어떤 것'이 되는가?"를 묻는다.

물체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들이 동일한 한에서 바로 '그것'이다. 만약 그것을 구성하는 분자들의 일부 또는 대부분이 바뀌면, 더 이상 '그것'이 아니다.

그런데 "생물들의 상태에서는, 그것들의 동일성은 같은 분자들의 덩어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생물들에서는 물질의 큰 뭉치의 변이가 동일성을 변경시키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묘목에서부터 큰 나무로 자라 베어지는 참나무는 줄곧 같은 참나무이다. 말로 성장하는 망아지는 때로는 살찌고 때로는 마르지만, 언제나 같은 말이다."(같은 책, II, 27, 4) 다시 말해, 한낱 물체는 "어떻게 결합되든, 물질의 분자들의 응집일 따름"이나, 한 식물과 한 동물의 동일성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자양분을 흡수하고 분배하는 데 적합한 그것의 부분들의 조직"에 의거한다(같은 책, II, 27, 5).

그렇다면, 한 "사람의 동일성은 어디서 성립하는가"? 그것은, 인간도 동물인 한에서, "오로지, 같은 유기체를 위해, 지속적으로 생명적으로 통일된,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질의 분자들에 의한, 계속되는 같은 생명의 참여에서" 성립한다고 로크는 말한다(같은 책, II, 27, 7). 그러나 인간은 단지 동물이 아니라, 또한 '인격'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로크는 무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더 나아가 묻는다. "인격의 동일성은 어디서 성립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격이 무엇을 지칭하는가"를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로크의 생각에, "인격이란 이성과 반성을 가진, 그 자신을 그 자신으로 고찰할 수 있는, 생각하는 지성적 존재자이다. 그것은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상에서도 동일한 생각하는 것[thinking thing]이다. 인격은, 생각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의식에 의해서만 그 자신을 그 자신으로 고찰한다. 어느 누구도 그가 지각한다는 것을 지각함이 없이는 지각할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듣고·냄새맡고·맛보고·느끼고·성찰하고·의욕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현재의 감각과 지각에 대하여 그러하다. 이로 인해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가 자아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같은 책, II, 27, 11[9]) 그러니까, 로크에 따르면 '인격' 내지 '자아[자기]'의 동일성은 자아의 자기지각 곧 자기인식 또는 자기의식에서 성립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로크는 인격 내지 자아를 물체로서의 신체와도 그리고 유한한 정신과도 분리시켜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기의식에 근거해 '자아'를 얘기할 때, "같은 자아가 같은 실체[물체(신체)]에서 계속되는가 다른 실체[물체(신체)]들에서 계속되는가는 고려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은 언제나 생각함에 수반하고, 그것이 각자를 그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 되게끔 함으로써, 그 자신을 여타의 생각하는 것과 구별짓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만 인격의 동일성이, 다시 말해 한 이성적 존재자의 동일성이 존립한다. 그리고 이 의식이 어떤 과거의 행동이나 생각에 거슬러 올라가 미칠 수 있는 데까지는 그 인격의 동일성이 미친다."(같은 책, II, 27, 11[9]) 그러므로 로크에게서는 자아의 동일성이나 인격의 동일성은 궁극적으로는 오로지 자기의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격의 동일성은 실체[물체(신체)]의 동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 의식의 동일성에 있다."(같은 책, II, 27, 19) 자기의식이 자기의 동일성을 구성한다. 인격의 동일성은, 내가 나중에 내가 이전에 어떤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앎으로써 구성된다. 이제 로크에서 문제로 남는 것은, 그렇다면 '(유한한) 정신'이라는 실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고, 이 이론적 개념이 존재 세계에서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물체'라는 실체는 종국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는 점 때문에 그 정체야 장막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관념들의 귀속처, 갖가지 현상적 성질들의 담지자로서 물리적 사물들의 동일성의 기반이고, 실재적 인식[진리]의 척도이자 '실재하는 사물'의 근거가 된다. 반면에 '(유한한) 정신'이라는 실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한 식물·한 동물·동물로서의 한 사람의 동일성의 근거인 "같은 생명"의 담지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나 인격, 그러므로 나아가서는, '마음'의 동일성의 토대는 아니라 하니, 이것의 토대가 되는 이른바 '자기의식'은 누구의 의식이라는 말인가? 그게 아니고, '물체'라는 실체가 물리적 사물의 동일성을 담보하듯이, '정신'이라는 실체가 자아의 동일성을 담보하는 것이라면, 물체와는 달리 정신이라는 실체는 '자기의식'을 통해 자기에게 알려진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정신'이라는 실체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알려지는 것이라는 말인가? 여기서 '정신' 실체는 그 정체가 의혹에 싸인다.  


'정신' 실체의 부정과 그 귀결

로크에서 실체가 어느 경우에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라고밖에는 규정되지 않는 것이라면, 암암리에 마음의 고정불변성 곧 동일성의 근거로 제시되는 '정신' 실체 역시 정체 불명이다. 그래서 오로지 경험적 확실성의 보증 아래에서만 논의를 진행시키고자 하는 흄(D. Hume, 1711-1776)은 '마음'의 실체성, 그러니까 자아 내지 인격의 동일성 자체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흄에 따르면, 우리가 갖는 일체 개념의 원천은 경험적 지각, 곧 경험적 인상과 관념들이다. 그런데 흄의 생각에는, "한 순간이라도 변함 없이 같은 것으로 머물러 있는, 단 하나의 영혼 능력도 없다. 마음은 일종의 극장이다. 여기에서 여러 지각들은 잇따라서 나타나고, 즉 지나가고, 다시 지나가고, 어느덧 사라지고, 무한히 잡다한 사태와 상황 속에서 뒤섞인다. 마음에는 당연히 한 시점에서라도 단일성은 없으며, 서로 다른 시점에서 동일성도 없다. 우리가 그 단일성과 동일성을 상상하는 어떤 자연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Hume, A Treatise of Human Nature, Bk. I, Part 4, sect. 6[ed. L.A. Selby-Bigge/P.H. Nidditch, p. 253]) 여기서 '마음=극장'의 비유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극장은 아무런 공연이 없을 때라도 텅 비어 있는 장소로 있고, 막이 오르면 그 안에서 여러 장면들이 연출되는 것이지만, 흄에게서 마음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마음을 구성하는 것은 단지 잇따르는 지각들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이 장면들이 표상되는 장소 또는 이 장소를 이루고 있는 재료들에 관한 아주 어렴풋한 개념조차도 갖고 있지 않다."(같은 곳) 그러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은 극장과 같은 공연 장면들이 펼쳐지는 장소라기보다는, 차라리 잇따르는 장면들의 모임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관계들에 의해 함께 통일된, 그리고는, 잘못되게도, 완전한 단순성과 동일성을 부여받은 것으로 가정된, 서로 다른 지각들의 더미 내지는 집합일 따름이다"(같은 책, I, 4, 2[p. 207]). 흄은 '나'의 실체성 곧 고정불변성은 결코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 "자아 또는 인격은 어떤 하나의 인상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우리의 여러 인상들과 관념들이 관계하고 있다고 상정되는 그러한 것"(같은 책, I, 4, 6[pp. 251-2])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서로 다른 지각들의 다발 내지 집합인 바, 지각들은 포착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서로 잇따르며, 영원한 유동과 운동 중에 있다"(같은 책, I, 4, 6[p. 252])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이렇게 잇따르는 지각들에 동일성을 부여하고, 우리 자신을 우리의 전 삶의 과정을 통해 불변적이고 부단한 존재를 갖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하는가? 흄에 따르면, 그것은 순전히 상상력과 기억작용이 하는 일이다. 서로 잇따르는 지각들의 더미 사이에는 기껏 유사성이 있을 뿐인데, 우리는 "상상에 따라, 이들 서로 다른 연관돼 있는 대상들이, 단절적이고 변형적임에도,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대담하게 주장한다. 그리고는 […] 단절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감관의 지각들의 지속적인 존재를 꾸며내고, 변형성을 감추기 위해서 영혼, 자아, 실체 따위의 개념 속으로 뛰어든다."(같은 책, I, 4, 6[p. 254])

더 나아가 "기억은 동일성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지각들 사이의 유사 관계를 낳음으로써 동일성 산출에 기여한다."(같은 책, I, 4, 6[p. 261]) "기억만이 우리로 하여금 지각의 이런 잇따름의 연속과 범위를 알게 하기에, 주로 이것에 근거해서 기억은 인격 동일성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아무런 인과의 개념도 갖지 못할 터이고, 또한 따라서 우리의 자아 내지 인격을 구성하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에 대해서도 아무런 개념을 갖지 못할 터다. 그러나 일단 기억으로부터 인과의 개념을 얻고 나면, 우리는 원인들의 같은 연쇄를 확장하여, 그에 따라서 우리의 기억을 넘어 우리 인격의 동일성에 이를 수 있다."(같은 책, I, 4, 6[pp. 261-2])

그러나 이 같은 흄의 경험적으로 건전하고 정밀한 논구의 도정은 도대체 '기억작용'을 누가 하는가 라는 물음 앞에서 길이 끊긴다. 누군가가 기억을 통해 1994년 여름에 본 로마 시가와 1996년 겨울에 본 로마 시가를 비교하여 그 유사성을 인지하고, 그 유사성을 넘어 - 상상력에 의해서든 습관에 의해서든 또는 다른 무엇에 의해서든 - '동일성'을 주장할 때, 1994년 여름에 로마 시가를 본 자와 1996년 겨울에 로마 시가를 본 자는 동일한 자여야 한다. 그 자를 우리가 '나'라 부르든, '나의 마음'이라 부르든 '나의 의식'이라 부르든 상관없이, 만약 그 자가 '동일한 자'가 아니라면, 기억작용도 '연상작용'도 귀속시킬 데가 없다. '자아'를 또는 마음을 한낱 '지각들의 다발'이라 하고, 지각들이란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으로 간주할 때, 일정한 한 시점(t1)과 다른 한 시점(t2)에서의 '지각들의 다발'은 내용상 다를 것이고, 그래서 시점 t1에서의 '지각들의 다발'(m1)인 마음을 甲이라 한다면, - 제 아무리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 결국은 이미 내용상 똑같지 않은, 시점 t2에서의 '지각들의 다발'(m2)인 마음은 乙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甲과 乙은 서로 다른 자이고, 따라서 甲이 어느 시점에서 지각한 것을 乙이 기억하고 '습관'에 따라 연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이나 습관을 얘기하려면, 어느 시점에서든 그 활동을 하는 자는 동일한 자로 전제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미 기억과 습관을 얘기하는 마당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든 '자아의 동일성'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 내지 인격의 동일성은 지각 자료를 근거로 한 상상력의 조작이나 성향만으로써는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 '동일성'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경험적인 세계에는 도대체가 동일한 것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우리는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 얘기해서는 안 된다. '변화'는 어느 경우에나 '동일한 것'의 달리됨이니 말이다. 


개념 또는 이념으로서 '정신'

인식하는 자아의 동일성과 관념성

데카르트의 '정신'-'물체' 두 실체론은 인간과 자연세계의 관계 설명 방식의 단초가 되어, 로크에서는 '마음'과 '실재하는 사물'이라는 두 실체론으로 전이되고, 버클리(G. Berkely, 1685-1753)에서는 이른바 '실재하는 사물'이 "존재는 지각된 것"(Berkeley,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I, 3)이라는 그의 대상 현상론에 의해 마음 안의 관념들의 집합으로 해체되고, 흄에 이르러서는 '마음'마저 '지각들의 다발'로 규정되어 그 실체성이 부정되었다. 이 같은 '실체' 사상의 변천은 더욱 더 경험주의 원칙에 충실해 간 근대인들의 사고의 반영이고, 현대 물리주의의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 노선은 대답되어야 할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예컨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연세계 전체가 또는 그 안의 갖가지 사물들이 변화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데, 이 대상의 변화를 '고정불변성'이나 '동일성' 개념 없이, 바꿔 말해 '실체-우유성(偶有性)' 개념 없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이 같은 문제들을 의식한 칸트(I. Kant, 1724-1804)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결코 실증할 수 없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실체적 물체'와 '영원불멸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 영혼[정신]' 대신에 대상 인식을 수행하는 주관으로서의 '의식'과 그 의식의 기능 형식인 순수 지성 개념으로서 '실체' 개념을 도입하여, 문제들을 풀어간다.

흄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감관들에서 생기는 인상들과 관련해 그것들의 궁극 원인이 인간 이성에 의해서 완벽하게 해명될 수는 없다.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대상들로부터 생기는지 또는 마음의 창조적인 힘에 의해 생산된 것인지, 아니면 우리 존재의 창조자로부터 파생된 것인지 확실하게 결정한다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하다"(Hume, Treatise, I, 2, 6[p. 67]). 그래서 흄은 사람들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 '실체'를 한낱 "우리"의 "지속되는 존재자라는 허구에 의해 쪼개져 있는 현상들을 하나로 묶는 성향"(같은 책, I, 4, 2[p. 205])에 의한 관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흄은, 다양한 지각 묶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묶음들을 어떤 '동일한 사물'에 귀속시키는 우리의 인식 행태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물의 그 동일성의 근거를 이제까지의 상식처럼 이른바 '우리 마음 밖에 실재하는' 사물의 실체성에서 찾지 않고, 그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 자신에게서 찾고 있다. 이로써 흄은 주관주의의 문을 연 셈이고, 이미 열려진 문안으로 들어선 칸트는 주관주의의 대저택을 세운다.

칸트는 어떤 지각 군이 사물 A로 통일되고, 또 어떤 지각 군이 사물 B로 통일되는 근거를 더 이상 '사물 자체'에서 구하지 않고, 인식하는 의식의 통각의 초월적 통일 기능에서 찾는다. '통각'(apperceptio)이란 내가 무엇인가를 의식하고 있음에 대한 의식이다. '나는 내가 무엇인가를 의식한다는 것을 의식한다'(ego-cogito-me-cogitare-cogitatum)는 의식의 구조에서 '나는 의식[생각]한다'라는 자기의식은 "나의 모든 표상들에 수반할 수밖에 없다."(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131) 왜냐하면, 내가 생각[의식]하지 않는 것이 나의 표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니 말이다. 모든 표상들에 수반하는 이 '나'의 자기의식에서 그 모든 표상들은 "나의 표상들"이 되고, 시시각각 표상되는 그 잡다한 표상들에 수반하는 이 '나'가 "동일자"인 한에서, 그 표상들은 하나로 통일된다. 그래서 칸트는 바꿔 말해, "내가 주어지는 잡다한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결합할 수 있음으로써만", 나는 "이 표상들에서 의식의 동일성을 스스로 표상할 수 있다"(같은 책, B133)고 말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의식한다'는 대상의식에는 '나'와 '의식함'과 '의식되는 것'의 세 요소가 있다. '나'는 의식의 주체이고 대상을 의식하는 주관이다. '의식함'이란 이 주체의 대상 지향 활동이고, '의식되는 것'은 바로 그 지향된 대상이다. 만약 우리가 감각 경험의 의존 여부에 따라 '경험적임'/'순수함'이라는 말을 구별해 쓴다면, '나'는 예컨대 수학적 대상을 의식할 때처럼 순수하게 기능하기도 하고, 자연적 대상을 의식할 때처럼 경험적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내가 무엇인가를 의식한다'에 수반하는 자기의식의 '나'는 언제나 순수하게 기능한다. 자기의식은 어떤 감각기관의 기능도 아니니 말이다.

대상의식에 수반하여 대상 통일 기능을 수행토록 하는 이 순수한 자기의식은 대상의식이 기능하는 데에 일정한 틀[형식]을 제공한다. 이른바 "순수한 지성 개념들", 바꿔 말해 사고의 "범주들"이 바로 그것이다.

인식 주체 곧 의식이 갖추고 있는 이 같은 일정한 인식의 틀은 인식작용을 가능하게 하고, 인식작용이 있는 곳에 비로소 인식되는 것, 다시 말해 우리에게 존재하는 사물, 대상이 나타난다. 이런 사태연관을 고려하여 칸트는 우리 인간에게 경험되는 사물은 모두 "현상"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에서 인식하는 의식의 특정한 성격은 경험에 선행하고, 그래서 경험되는 것 곧 현상에 선행하고, 바꿔 말해 "선험적"(a priori)이고, 그래서 "모든 경험에 선행하면서도 (선험적이면서도), 오직 경험 인식을 가능토록 하는 데에만 쓰이도록 정해져 있는 어떤 것"을 "초월적"(transzendental)(Kant, Prolegomena: 『전집』 IV, S. 373)이라고 술어화한다면, 선험적인 의식 기능은 경험적 인식에서 초월적이다.

경험적 인식과 초월적 인식이 구별되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경험적 나[자아]'와 '초월적 나[자아]'를 구별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 언어 생활에서 모든 '나들'이 서로 구별됨에도 똑같이 '나'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그 '나들'에 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나들이 서로 구별되는 것은 또한 차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상 인식에서 '동일한 나'는 의식의 동일한 인식 기능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칸트는 "초월적 나[자아, 주관, 주체]"라고 칭한다. 그러니까 '초월적 나'의 차원에서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다. 그래서 만약에 '나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 하나의 사과를 나누어 먹으면서 한 사람은 "시다"고 느끼고 다른 한 사름은 "달다"고 느끼는 ?? '경험적 나'의 차원에서의 일이라 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신체성을 도외시하고서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초월적 나'는 신체성과 무관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기에 그것은 시간·공간상의 존재자가 아니라, 단지 "초월논리적" 개념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서로 다른 '나들'을 각각 적어도 하나의 '나'로서 가능토록 하는 논리적 전제(Kant, 『전집』 XX, S. 270 참조)이나, 그러나 우리는 그 동일성을 '나들'이 인식작용에서 보이는 동일한 기능 - 예컨대, 모든 '나들'은 대상 인식에서 한결같이 "무엇이 어떠어떠하다"는 인식 틀을 따른다 -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하나의 나'가 적어도 두 관점에서 얘기될 수 있다.

한 관점에서 '나'는 자연적 존재자이다. 자연적 존재자로서 '나'는 당연히 자연, 곧 신체를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신체들에 구별이 있는 한에서, '나들'도 구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나들' 가운데 하나인 '나'가 영원히 존재하느냐[불멸적이냐] 그리고 자기동일적이냐는 오로지 경험과학적으로 확정될 수밖에는 없다. 이 같은 맥락에서의 '나'의 나임에 대한 탐구는 생리-심리학적 또는 사회학적으로만 가능할 것이며, 로크나 흄이 자기의식이나 기억을 통해서나 '나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도 암암리에 이 '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나임'의 근거를 영혼[정신]으로 보고, 영혼은 실체[비물질성]이고, 그 자체로 단순[불멸성]하고, 자기동일적[인격성]이고, 영원한 생명성[불사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이성적 영혼론은 학문으로서는 전혀 성립할 수 없다"(Kant, K.d.r.V., A382)고 비판하면서, '나'에 대한 지식체계로서는 오로지 "일종의 생리학인 경험적 심리학"(Kant, K.d.r.V., A347=B405 참조)이 있을 뿐이라고 칸트가 결론지었을 때, 그 역시 이런 '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나'는 그 '나'가 누구이든 '나'라는 점에서는 동일하고, 또 '나'인 한에서 항상 자기동일적이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에서의 '나'는 자연적인 존재자가 아니다. 아니, 우리가 만약 존재자를 시간·공간상의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런 것은 도대체가 '존재자'가 아니다. 그것은 '나'를 '나'이게끔 하는 형식적 규정일 따름이다. 그것은 도대체가 '나'라는 개념이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일체의 '경험적인 나들'을 동일하게 '나'이게끔 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초월적인 나'다. 그리고 이 '형식적' 나는 문자 그대로 하나의 개념 내지는 이념이다. 


실천하는 인격의 이념성

사람의 의식 활동은 인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도 한다. '실천'(praxis)이란 존재자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인식과는 달리, 의지적으로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다.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함은 존재에 변화를 일으키고 생성 소멸케 함을 뜻한다.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일반적으로 자연 내의 사물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나 그런 것을 우리는 실천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의지적으로 기투(企投)하는 행위만이 실천이라 일컬어 질 수 있다. 이런 실천 행위에는 노동과 도덕적 행위가 있다. 노동은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노동은 자연의 법칙의 범위 내에서 수행된다. 반면에 도덕적 행위는 자연의 제약을 넘어선다. 그래서 칸트는 이런 도덕 행위의 주체를 '순수한 실천 이성'이라고 부른다.

실천 이성이 "어떤 법칙의 표상에 따라서 행위를 규정하는 능력"(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전집』 V, S. 427)이라면, 순수한 실천 이성은 이성 자신이 제시한 법칙의 표상에 준거해서 행위를 규정하는 능력이라 볼 수 있다. 이성은 원리의 능력이고, 순수한 이성은 원리 자체이니, 순수한 실천 이성은, 자신이 제시한 원리에 따라 행위를 하는 능력, 즉 자율적 능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유로운 의지이기도 하다.

순수한 실천 이성은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법도를 제시하는 바, 그 법도가 도덕법칙이다. 도덕 법칙은 언제나 당위의 법칙이다. 당위의 법칙은 무엇이 어떠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필연성이나,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며 생겨나는가를 반영하는 사실적 필연성이 아니라, 무엇이 존재해야만 하며 생겨나야만 하는가를 규정하는 당위적 필연성의 표현이다. 도덕적 규범은 사실 내지 존재의 규칙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보통 이러이러하게 행동하게 마련이라든지, 그러저러하게 행위한다면 개인이나 사회를 위해서 유익할 것이라는 따위의 사실 보고나 이해타산에 의거한 권유 훈계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무조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을 명령한다. 그것이 명령하는 '인간다운' 행위 내용은 사실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이상(理想)에 근거해서 정해지는 것이다. 이 이상은 선(善)이라는 선험적 가치의 표현이고, 도덕 규범은 그러니까 선험적 행위 원칙이다.

이 같은 선험적 도덕 규범에 따른 행위만을 선행이라 할 수 있고, 이런 행위의 주체가 인격(人格, Person)이다. 도덕적 행위 주체로서 인격은 무엇과의 비교에 따라 가치를 얻는, 즉 수단으로서 가치를 갖는 물건과는 달리 "그것의 현존이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격은 다름 아닌 목적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실천 이성의 원칙은 "이성적인 자연 존재자는 목적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인간 행위의 주체적 원리'를 전제로 한다. 여기에서 이성이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에게 보편타당한 행위 규범으로 부과하는 실천적인 명령이 나온다. 예컨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사용치 않도록 행위하라"(같은 책, V, S. 429)는 칸트 도덕 철학의 정언 명령 같은 것 말이다.

인식 가운데 진리와 허위가 있다면, 선과 악은 도덕 행위 가운데 있다. 도덕 행위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실천 행위다. 사람을 인격으로, 그 자체 가치 있는 것으로 대하는 행위는 선하고, 사람을 한낱 수단 가치로 취급하는 행위는 악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한 행위 가운데서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존재자, 목적인 존재자가 된다. 목적 자체인 인간을 우리는 존엄하다고 한다. 이성이 제시하는 선의 이념은 이로써 다름 아닌 인간 존엄성의 이념이다.

그런데 자연적 존재자인 인간이 언제나 자기 자신이나 남을 인격으로 대하는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신체 욕구적 경향성을 제어하고 도덕 명령을 존경하여 준수할 수 있는 힘을 인간이 한편으로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 힘이 바로 의지의 자유이며, 인격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자유 의지이다.

도덕적 행위의 주체는 자유로운 의지이다.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수행되는 도덕적 실천 행위는 아직 없지만 그러나 마땅히 있어야 할 것 즉 이상을 실현하는 당위적 활동이다. 그리고 그 실현은 자연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유로운 의지의 활동이 자연에서 무엇인가를 실현시킨다 함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다르게 변화시킨다는 뜻이고, 의지가 자유롭다 함은 자연으로부터 결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연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순수 의지가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된다. 그것은 자연 안에서 살고 있는 자연 존재자인 인간이 자연의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서 자연을 변경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자연 세계는 수학적-역학적 법칙들의 통일 체계이고, 도덕 세계는 당위적 실천 법칙의 통일 체계이되, 자연 세계는 도덕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도덕 세계는 자연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자연 세계에 물리적 원인에 의해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도덕적 원인에 의한 사태가 일어나기도 함을 뜻한다. 나는 머리를 들고 있기가 힘들어 머리를 숙이기도 하지만, 어른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 머리를 숙이기도 한다. 머리를 숙이는 움직임은 이 두 경우에서 다같이 물리적-생리적 법칙에 따라 진행되지만, 그 움직임을 작동시킨 원인은 서로 다르다. 이것은 자연 내에는 자유(의지의) 원인성과 자연(인과의) 원인성이 양립함을 말한다. 인간은 행위에서 자연 존재로서 물리적 법칙에 종속하기도 하면서 자유 존재로서 도덕적 법칙에 종속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생리적 법칙에 종속하는 한 인간은 여타의 자연 사물과 한가지지만 도덕법칙에 종속하는 한에서는 인격이다.

그러나 이때 인격적으로 자연 세계에서 행위하는 자는 자연적 존재자, 즉 신체를 가진 존재자이고, 그런 한에서 '너'와 '내'가 구별되는 인간이다. '너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라'는 명령은 이미 '너'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도덕법칙의 보편적 당위성을 표상하는 실천 이성은 보편적 이성이지만, 그것을 자연 안에서 실행에 옮기는 행위 주체는 개별자로서 인간, 즉 개인이다. 즉 행위 주체로서의 개개인은 보편성과 더불어 개성을 가진 자유의지적 존재자이다


절대자로서 정신

칸트는 '초월적 의식' 개념을 세워 대상 인식 현상을 해명하고, '인격' 개념을 세워 인간의 도덕적 행위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거기에 실체로서 '정신'은 없었다. 이에 반해 헤겔(G. W. F. Hegel, 1770-1831)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유일한 것으로서 '정신(Geist)'을 세계 생성과 운동의 중심에 놓는다.

헤겔은 정신이란 자기 정립적이며 자기 활동적인 것이고, 그래서 자유이자 주체이므로 본래 무엇에 관하여 상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은 절대자다. 그러나 정신이 삼라만상과 인간을 통하여 그 자신을 드러낼 때, 다시 말하면 개념으로서의 정신, 절대자가 매체를 통하여 전개 실현될 때, 그것은 여러 모습[相]을 보이고 그런 한에서 전변(轉變)하고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정신은 실재에서는 이를테면 '상대적인 절대자'라 할 수 있고,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되어 가는 중에서 자기 자신을 세우고 자기 자신에 머무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신은 원래 절대자이건만 현실적으로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정신의 모습은 언제나 가상(假象)이고 그런 만큼 정신은 본래의 자신을 세우기 위하여, 곧 진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의 그때 그때의 모습을 스스로 부정한다. 그래서 헤겔은 정신을 "순전히 스스로 하는 운동의 절대적 불안정"(Phänomenologie des Geistes[PdG]: GW 9, S. 100) 또는 "절대적 부정성"이라고도 말한다.

정신은 현실에서 결코 안정 중에 있는 일이 없으며, "항상 전진하는 운동" 속에 있다. 그런데 이 전진 운동은 자기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한 계기에서 '진상'으로 현상하는 정신은 다음 계기에 현상하는 정신에 의해 부정되고 가상으로 전락한다. 그것이 진정한 '진상'이 아니었기에 새로운 현상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이 부정은 필연적이고, 이 부정은 그러나 바로 정신 자신의 힘이라는 점에서는 자유 자체이다. 자유로서 "정신의 힘은 그것이 표출되는 꼭 그 만큼 큰 것이며, 정신의 깊이는 그의 펼쳐 냄 중에서 자신을 확장하고 그리고 자신을 상실해 갈 수 있는 그 만큼의 깊이를 갖는다."(같은 책, S. 14) 정신에 의한 정신 자신의 이 부정을 통한 확장 운동 과정이 "정신의 생(生)"이며, 정신은 이 끊임없는 자기와 자기의 "분열" 중에서 완성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함으로써만, 자신의 진정한 "진상"을 마침내 획득한다(같은 책, S. 27).

정신은 전변 운동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나, 그러나 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운동 중에서도 정신은 항상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며,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불변의 절대자이자 실체이다. 또한 이 절대자는 "살아있는 실체"(같은 책, S. 18) 곧 "주체"이며, 언표 상에서는 "주어"이다. 전개되는 모든 계기들, 전상(展相)들은 이 주체에 속하는 것이며, 이 주어에 속하는 술어들이다. 속성들은 언제나 주체 내지 기체(基體)인 실체에 속하며, 술어들은 언제나 주어에 속해 있다. 그러나 실체 내지 주체는 속성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술어 없이 주어는 결코 표현될 수 없다. 이 속성들이 바로 그 실체는 아니지만, 속성들 곧 전개되는 계기들을 통해서 실체는 그러나 자신의 참모습[眞相]을 드러낸다. 정신의 한 계기 한 계기, 한 전상 한 전상은 정신을 현실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각각 진상이지만, 그러나 진정한 "진상은 전체"(같은 책, S. 19)뿐이다. 물론 이 "전체는 그것의 전개를 통해서 완성되어지는 것이다."(같은 곳) 정신은 이렇게 다수이면서 하나[一者]이며, 보편적인 것[普遍者]이고, 이런 의미에서 절대자이다. 이 절대자로서의 정신은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운동의 주체이며, 이 점에서 자유인 정신은 "달리 되어감"에서 자신임을 유지하고, "달리 있음"에서 "자기와 같음[同一性]을 재생산" 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오직 매개적으로만 현상하며, 따라서 실체 내지 주체로서, 그리고 절대자로서 정신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는 이 부정 운동의 "종점"에서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이 "종점"은 정신이 자기 부정 운동을 막 "시작"할 때부터 그러니까 살아 있음을 보일 때부터 "목표"로 가진 "이념"[개념]이자 긴 도정을 매개로 한 "결실"이다(Hegel, Wissenschaft der Logik[WdL] I: GW 11, S. 376).

정신의 자기완성의 긴 도정이 세상의 역사, 세계사이며, 그런 점에서 세계사의 주체인 이 정신은 "세계정신" 또는 "세계이성"(Hegel, PdG: GW 9, S. 25)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세계란 세계정신의 자기 인식 내용이며, 자기 기투와 노역(勞役)의 결과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한, 이 세계정신의 대표적인 매체는 인간이며, 세계정신은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대상 인식과 자기 인식 그리고 실천을 통하여 가장 잘 발현된다.  


'정신' 없는 물리주의 세계

헤겔이 세계의 운동 원리, 주체인 실체로서 정신을 그다지도 강력하게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반이후 많은 사람들은 정신·영혼·마음의 지위를 더 이상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일찍이 라 메트리(J. O. de La Mettrie, 1709-1751)는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으로 『인간기계론(L'homme machine, 1748)』과 『인간식물론(L'homme plante, 1748)』을 폈었다. 그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기계적 운동만을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의식 활동 일체도 물리적 자극과 육체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란 물질적 기계 운동의 특수한 부산물일 뿐으로, 실체로서의 정신은 ?? 인간적인 것이든 신적인 것이든 ??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제 헤겔 비판으로부터 자리를 잡은 신칸트학파의 랑게(F. A. Lange, 1828-1875)는 "영혼 없는 영혼론", 곧 "마음 없는 심리학"(Psychologie [Seelenlehre] ohne Seele)을 발설했고(F. A. Lange, 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 Iselohn/Leipzig 1866, Bd. 2, S. 381), 20세기 중반을 넘자 마침내 플레이스(U. T. Place)는 '의식은 두뇌 과정'이라는 물리주의적 원칙을 주창하였다("Is Conciousness a Brain Process?", in: Britisch Journal of Psychology, 47(1956), Pt. 1, pp.44-45 참조). 그 후 주로 영미 심리철학들은 물질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심리 현상에 대한 용어들은 물리적 현상 외에 아무런 것도 지시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제거되어야 하고, 실제로 과학의 발달에 의해 마침내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제거적 유물론, Eliminative Materialism). 정신 내지 심리 현상의 정체는 오로지 신경 과학(neuro science)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모든 유형의 심리 상태는 그것에 상응하는 일정한 물질적 상태, 곧 두뇌 신경 상태가 있으며, 양자는 존재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유형 동일론, Type-Type Identity Theory 또는 환원적 유물론, Reductive Materialism). 가령, '사랑'이란 오른쪽 1·2·3·4·5번 뇌세포가 활발하게 운동한 상태이고, '미움'이란 왼쪽 1·3·5·7·9번 뇌세포가 격렬하게 운동한 상태라는 것이다.

이 같은 사조에 따라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정신'·'영혼'·'마음[心]'·'자아'·'인격' '의식' 따위는 물리적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한 지시하는 바가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런 유물론적, 물질주의적 주의 주장들은 학자들 사이의 갑론을박을 거치면서 점점 세밀화 내지 교묘화 해가고 있는 중이므로, 아직도 이론적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만으로도 '정신' 없는 물리주의가 인간 세계에 미친 파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인간 세계의 질서 원리를 새로이 모색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물리주의, 다시 말해 세상 만물의 이치를 물리적 내지는 물리학적이라고 보는 견해는 의당 '정신'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고, 인간에게서도 자기 원인(causa sui)적인 자유(自由)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당위를 허용치 않음으로써 무엇보다도 결국 인간 사회의 질서 원리인 도덕이 설자리를 없애버린다. 물리적 법칙에 따라 만물은 운동하는 것이고, 바위와 소나무 사이에, 사과나무와 까치 사이에, 개와 개 사이에 당위가 없고 윤리가 없는데, 아무런 자유로운 의지나 의사(意思) 없이 똑 같은 자연 법칙의 지배 밑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당위, 윤리가 있겠는가?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데카르트가 새삼스럽게 정신과 물체 이원론을 내놓았던 것은, 사실 세계의 진리는 승인하되, 당위적 도덕과 희망적인 성스러움을 여전히 인간 세계에 남겨두려는 간절하고도 진지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의 세계에서는 진리보다는 선함과 성스러움이 으레 우위를 차지하는 법이니, 정신과 물체의 공존이란 사실상은 여전히 물체가 정신에 종속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정신이 있다고 받아들여지는 한 모든 사회 질서의 권위는 '고귀한 영혼'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혼의 본거지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감성의 '독자성'이나 감각의 '자유로움'은 비천함을 면하기 어렵다. 인간을 철두철미 감성적, 신체적 존재자로 파악한 마르크스(K. Marx, 1818-1883가 종교[기독교]는 "민중의 아편"(Aus den Deutsch-Französischen Jahrbüchern, in: Frühe Schriften, Bd. 1, hrsg. H.-J. Lieber/ P. Furth, Darmstadt 1989, S. 488)이라고 규정한 것이나, 니체(F. Nietzsche, 1844-1900)가 "신들은 죽었다"(Also sprach Zarathustra, in: Nietzsche Werke, Bd. III, hrsg. K. Schlechta, München/Wien 1980, S. 340)고 외친 것은, 신을 정점으로 하는 정신 체계의 본거지에 대한 감성적 공격이다. 이에 비해 20세기 후반 미국 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물리주의는 동일한 주의 주장의 이성적 변형이다. 물리주의는 이성의 옷을 입은 니체주의인 것이다.

이성적인 논증과 과학적인 사실 입증을 '토대로' 정신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고 천명함으로써 사실상 신의 존재와 인간이 정신적 존재임을 부정하고 나면, 선의 관념 자체가 원천을 잃게 되는 것이고, 결국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자연 물리적 사물들의 관계이거나 아니면 감성적 욕구의 교환, 곧 이해(利害) 관계로 환원될 따름이다. 신도 이성도 없는 곳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 곧 '정도(正道)'를 거론할 때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상호 역학 관계를 맺고 있는 운동체들인 사람들 사이의 힘의 균형밖에는 없다. 이 판국에서 '정도'를 제시하는 것은 하느님도 아니고, 이성을 대변하는 탁월한 현자(賢者)도 아니고, 오직 힘있는 '다수'일 따름이다.

그런데 잦은 이합집산 중에 형성되는 '다수'는 변덕장이다. 그래서 아침나절의 '정도'는 저녁나절에는 이미 '정도'가 아니기도 하고, 오늘의 정도는 내일이면 벌써 '사도'(邪道)일 수 있으며, 동쪽에서의 '정도'는 서쪽에서는 '헛소리'일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모든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말할 것도 없이 윤리적 가치 또한 상대화되고, 이름하여 도덕 '상대주의'가 득세한다. 도덕의 상대성이란 결국 무도덕성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에게는 선한 것이지만, 너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고, 그들에게는 선한 것이지만 우리에겐 악한 것임을 승인하게 되면, 한 행위가 보는 이에 따라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도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데, 이 상황에서 어떤 윤리적 척도가 제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세상에서 자신을 신체적 존재자라고 공공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신체적 삶의 질은 십중팔구 사람들의 영리한 계산 능력 곧 지력(知力)에 따라 결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차라리 '지력이 좀 모자란다'는 평은 감내할망정 '도덕적으로 악질이다'는 평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못 견뎌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도덕적 가치어'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론은 그야말로 '복음'이다. 형이상학적 명제들과 함께 윤리적 판단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확인된 마당에 윤리적 강령들은 어떤 본부에서 발령이 되든 어떠한 권위도 얻지 못한다. 물리주의는 사람들을 도덕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복음'인 것이다. 그렇게 '해방된' 인간은 그래서 하나의 물체가 된다. 물체에게 분명 도덕적 가치어들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가 보통 '인간의 존엄성'을 얘기하는 것은 인간이 여타의 생명체보다 지력이 뛰어나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온갖 사물을 부릴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사람 중에서도 가장 존엄한 사람은 가장 지략이 출중하고 뭇 사람을 굴복시키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람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엔가 쓸모가 있어서 가치가 있는 그러니까 수단적 가치를 갖는 물건과 달리 사람은 누구나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그러니까 목적적 가치를 가진 존재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인간을 스스로 이렇게 높여 보는 것은, 만물 가운데서 사람만이 유독 윤리적 당위 질서에 자신을 복종시킬 줄 알고, 바로 그런 한에서 신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이지 물리주의의 주장이 사실이고,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실에 근거해서 '도덕의 세계'를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해야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 역시 물리적인 의미밖에는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사회도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만사는 기껏해야 물리적-생리적-심리적으로 설명될 것이니 말이다.

그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윤리 도덕에 그 정당성의 뿌리를 두고 있던 국가 사회의 법령들의 권위도 물리주의적 사회에서는 한낱 물리적 힘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된다. 물리주의적 사회에서는, 우리가 남의 담장 너머까지 가지를 뻗친 감나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남의 집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제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듯이, 배고픈 나머지 남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먹은 사람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책임은 스스로 행위한 자에게나 물을 수 있는 것이지, 물리-생리-심리적 인과 연관에서 기계적으로 운동한 사물에게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물리주의적 사회에서는 이른바 '범죄자'란 단지 대개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동한 자를 지칭할 터이니, 범죄자는 더 이상 처벌의 대상일 수가 없고, 오직 치료의 대상이거나 수리(修理)의 대상일 따름이다. 톱니가 손상돼 빨리 내닫는 시계는 톱니를 좋은 것으로 바꿔 주거나 쓰레기로 버리듯이, 아비가 없어 죄지은 자에게는 아비를 만들어 주고, 정서가 불안정하여 남에게 행패를 부린 자에게는 적절한 치료를 해주거나 그래도 쓸모가 없으면, 또는 수리비가 효용보다 더 들 것 같으면, 내다버리는 것이 물리주의적 처리 방식이다.

물리주의적 세계에는 기껏해야 '물격'(物格)과 그것의 등급인 '물품'(物品)이 있을 뿐 '인격'(人格), '인품'(人品)의 자리는 없다. 그런 곳에서 이른바 '선비정신'이란 선비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생리-심리적 운동 규칙 이상을 의미할 수는 없는 것이며, "현대인들은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더 추구한다"는 따위의 말은 애당초부터 무의미한 말일 수밖에 없다. 


인간 세계의 가치 원리로서 정신

그래서 진정한 문제는, 단순히 '정신이란 무엇인가?'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정신인가?'이고, 정신이 과연 있느냐 없느냐보다는, '정신이 있다'·'정신이 없다'가 무엇을 함축하느냐이다. 정신을 세계 주재(主宰)의 원리나, 세계에 대한 인간 인식의 주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실적 증거들이 필요할 터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정신은 있으며, 적어도 인간 세계를 규제하는 가치 원리로서 있다. 그 가치 원리가 어떤 초월적 신에게서 유래한 것이냐, 인간의 자연 심성에서 발원한 것이냐, 인간의 이상에서 정립된 것이냐, 아니면 유한한 인간의 한낱 환상이냐는 물론 여전히 '사실적'으로 답해질 문제다. 그러나 인간은 줄곧 가치 체계 속에서 살아 왔으며, 살고 있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인 바, 그 가치 체계의 원리를 우리는 충분히 '정신'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이 결코 물리적 원리와는 다른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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