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 ⑲
묵상
1936년 1월 19일 미국 뉴욕의 한 교회에 다니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리치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학생은 과학자들도 기도를 하느냐고 물었다. 또한 만일 기도한다면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놀랍게도 5일이 지난 1월 24일에 기도에 관해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내가 네 질문에 가능하면 간단히 대답하도록 노력할게. 이게 내 대답이다.
과학연구는 모든 일어나는 현상들이 자연의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해.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들의 행동에도 적용되지. 이런 이유로 과학자들은 사건들이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전달되는 바람인 기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믿지 않아. 그러나 이 법칙에 대해 우리가 실제로 아는 지식은 불완전하고 파편적이어서 실제로는 자연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법칙의 존재에 대한 믿음도 역시 일종의 신앙이지. 마찬가지로 이 신앙도 과학연구의 성공으로 지금까지는 정당화되었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과학적인 추구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영혼이 우주의 법칙 안에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어. 그 영혼은 인간의 영혼보다 훨씬 우월하지. 약간의 능력을 지닌 인간은 그 앞에서 겸손해 질 수밖에 없어. 이런 식으로 과학의 추구는 일종의 종교적 감정으로 가지만 좀 더 순박한 사람들의 종교와는 실제로 너무 달라.”
아인슈타인은 한 초등학생의 ‘기도를 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종교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 그는 심지어 “만일 당신 신에게 기도하여 어떤 이익을 요구한다면 당신은 종교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아인슈타인의 기도에 대한 개념은 동양이냐 한국 그리스도교의 개신교에서 만연한 기도형태와 사뭇 다르다.
기도로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바를 신에게 부탁하는 전통은 동아시아 전통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아시아 삼국에서 신에게 간구하는 행위를 ‘기도(祈禱)’라고 표현한다.
중국 후한(後漢) 때 허신이란 학자가 집대성한 한자 부수의 기원을 설명한 책을 보면 ‘기(祈)’자는 원래 ‘보일 시(示)’와 ‘도끼 근(斤)’ 사이에 ‘양 양(羊)’자가 있었다가 생략되었다고 전한다.
‘보일 시(示)’는 그 본래 모양이 제사상이다. 그러므로 ‘기(祈)’자는 ‘제사상 위에 도끼로 쳐 희생된 양’의 모습으로 신에게 바치는 모습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신에게 간절히 청원하는 모습은 ‘도(禱)’에도 찾을 수 있다. 이 글자는 ‘보일 시(示)’와 ‘목숨 수(壽)’가 합쳐진 글자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신에게 간절히 비는 모습’이다.
이 글자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 ‘대학입학수능고사 100일 기도’이다. 수험생 부모들이 자식들의 성공적인 입시를 위해 대신해서 간구하는 모습을 모든 종교기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럼 아인슈타인이 말한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기도가 있을까?
불교에서 기도는 원래 명상과 경전연구를 위한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붓다는 인간의 ‘드야나’라고 불리는 명상을 통해 해탈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기도는 그런 명상을 강화하는 강력한 심리적-육체적인 도구일 뿐이다.
힌두교에서도 기도는 ‘요가’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요가는 평소에 편하지 않는 몸의 자세를 취하여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마음속에 가득한 이기심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이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요가’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는 ‘더하다, 엮다, 하나가 되다’라는 뜻이다.
소의 멍에가 하는 역할처럼 내 중심적인 생각, 말, 그리고 행동에 대한 제어이며 자신을 비우는 행위이다. 요가의 목적인 바로 신과 합일되는 경험이지 우리가 흔히 아는 대로 유산소 운동이 아니다.
이슬람에서의 기도는 이슬람을 지탱하는 소위 ‘이슬람의 다섯 기둥들’ 중 하나이다. 무슬림이라면 반드시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하여 기도해야만 한다. 아랍어로 ‘짤라’이라고 불리는 기도는 ‘절하기, 존경심을 표현하기’라는 의미이다. 이슬람 종교를 창시한 무함마드는 아라비아 유목민들이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들은 자기부족의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지만, 그 경계를 벗어나면 복수를 정의하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부족을 넘어선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소위 ‘자힐리아시대’, 번역하자면 ‘무식의 시대’에 안주하였다. 무함마드는 하루에 다섯 번의 기도를 모든 무슬림들의 의무로 정했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머리 숙이기를 가장 싫어하는 유목민들에게 부족 중심적인 욕심을 없애기 위해 상징적으로 머리와 몸, 그리고 다리를 모두 숙여 메카를 향해 절을 하도록 요구한다. 모든 무슬림들이 하루에 다섯 번씩 자신의 삶이 이기적인가를 점검하고 그 방향을 찾으려는 행위가 바로 ‘짤라’이다.
무함마드는 이들이 기도하는 방향을 처음엔 예루살렘으로 정했지만 그 후에 메카로 수정하였다. 이들이 기도하는 방향을 아랍어로 ‘끼블라’라고 한다. ‘끼블라’는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인간이 반드시 가야하는 길을 알려주는 방향계이면서 나침반이다.
불교와 이슬람 전통의 ‘기도’ 전통은 서양철학과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형식과 유사하다. 고대 그리스 전통에서 ‘묵상’을 의미하는 단어는 ‘쎄오리아’이다. 이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Theory’가 이 단어에서 파생했다. ‘쎄오리아’의 의미는 ‘묵상, 들여다보기’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묵상’이란 ‘자신의 처지를 제3자의 눈으로 보는 시선’을 의미한다. 묵상은 자신 안에 감금된 자기를 관찰자의 눈으로 보고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한 연습이다.
‘마음의 눈’이라고 불리는 ‘누스’를 통해 사물을 경험하고,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바로 ‘쎄오리아’이다. 쎄오리아는 궁극적으로 신과 합일되는 ‘쎄오시스’의 과정이다. 결국 인간은 쎄오리아를 통해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 전통의 쎄오리아와 비견할 수 있는 고대 로마 전통의 ‘묵상’이란 라틴어 단어는 ‘콘템플라치오(Contemplatio)’이다. ‘콘템플라치오’는 ‘-와 함께’라는 의미를 지닌 Con-과 ‘신전, 거룩한 장소’라는 의미를 지닌 ‘템플룸(Templum)’과 합성어다. 고래 로마에서 템플룸은 ‘점을 치기 위한 거룩한 땅’ 혹은 ‘예배장소’라는 의미이다.
템플룸은 고대 로마사회의 중요한 일을 치르기 전에 점을 치는 장소로, 특히 희생된 동물이나 조류의 모양이나 내장의 모습을 보고 미래 일어날 일에 대해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그러므로 ‘콘템플라치오’는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이 희생된 동물의 심정으로 신의 계시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의 표시이다. 묵상은 바로 자신을 버리고 마치 죽은 동물과 같이 되었을 때 신이 인간에게 원하는 바를 알려주는 수단이 바로 ‘묵상’이다.
두 번째 의미는 ‘새의 비행’과 관련되어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이집트, 그리스와 로마 모두 새가 비행하는 모습을 보고 점을 치는 예들이 등장한다. 고대인들은 새의 일정한 모양의 비행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현생인류의 조상인 크로마뇽인들이 기원전 20000년경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라스코 동굴에 600여점 이상의 그림을 남겼는데, 그 그림들 중 가장 특이한 그림이 동굴 맨 안쪽에 있다. 이 그림은 창자를 쏟으며 죽어가는 매머드가 오른쪽에, 새 모양을 한 솟대가 중간에, 그리고 새머리를 한 인간이 창을 들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다.
태고부터 인간은 날고 싶었다. 인간이 가장 동경한 능력이 바로 비행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콘템플라치오’는 ‘독수리와 같은 새의 시각으로 자신이 위치한 장소를 내려 보는 연습’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바쁘게 살면서도 왜 바쁜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야 할지 등 인생에 중요한 질문들을 간과하고 있다. ‘묵상’은 내 자신을 보는 연습이며, 내가 아닌 제3자, 심지어 독수리의 눈으로 내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며 그 대답을 찾으려는 과정이다.
기도는 내 욕망을 내가 상정한 편리한 대상, 혹은 ‘신’이라고 상정한 존재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내가 가야 할 목적지와 일직선상에 있는지, 제3의 눈으로 내려 보는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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