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정치철학* 임헌규
[한글요약]
『老子』는 그 동안 많이 연구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오해를 낳고 있다. 특히 그의 정치철학은 소극적/부정적 허무주의이며, 권모술수적인 愚民政治를 표방하며, 나아가 그의 이상국가는 진정한 정치조직이 출현하지 않았던 은나라 초기 이전의 원시부락을 지칭하는 것으로 반역사적 반문명적 復古主義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老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우선 텍스트 자체에 수없이 등장하는 無, 無名, 無爲, 無知, 無欲, 無欲 등과 같은 부정적인 언사에 기인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일면적이며, 문자적인 해석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즉 본고는 우선 老子가 역설한 정치이념으로서 무위정치는 단순히 현실의 폭력적 정치권력에 대한 반작용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긍정 즉 常足의 자율적 공동체를 주창한다고 점을 피력하고자 한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노자가 말하는 愚民의 뜻이 무엇인지를 논구하였다. 노자는 비록 명시적으로 백성을 無知, 無欲하게 하고, 어리석게 한다(愚民)는 표현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곧 도를 체득하여 근본으로 복귀한다는 뜻이며, 이는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백성들을 우매하게 만든다고 하는 세칭 ‘우민정치’와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본고는 노자는 정치권력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오며, 정치권력은 어떻게 행사되어야 한다고 말했는지를 다루었다.
노자는 聖人統治論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권력의 정당성은 道의 체득여부에 있지만, 통치자의 高貴함은 또한 비천한 백성에 기반한다고 말했다는 점에서 孟子와는 또 다른 의미의 民本主義를 주창했다고 말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노자가 말하는 小國寡民의 공동체는 반문명적이거나 과거회귀적인 것이 아니라, 문명을 긍정한 바탕 위에 현실 정치를 비판할 표준으로 제시된 것임을 기술하였다.
주제분야 : 중국철학, 노장철학, 정치철학
주 제 어 : 도, 우민정치, 치도론, 무위정치, 소국과민
* 이 논문은 2005년도 강남대학교 교내학술지원비에 연구되었음.
1. 서론
儒家와 더불어 전통 중국의 양대 사조의 하나인 道家를 대표하는『老子』는 그 동안 상당한 연구가 있어왔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오해를 낳고 있다. 특히 노자의 정치철학은 현실에 대해 혐오감에 제기된 소극적/부정적 허무주의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으며, 나아가 권모술수적인 내용을 담지하고 있는 愚民政治를 표방한다는 것이다. 1] 그리고 그가 제시한 정치의 이상향은 진정한 정치조직이 출현하지 않았던 은나라 초기 이전의 원시부락을 지칭하는 것으로 復古主義적 성격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2]
기실 노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우선『老子』라는 텍스트 자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老子』에는 無, 無名, 無爲, 無知, 無欲 등과 같은 부정적인 언사가 허다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가 볼 때, 바록『老子』에 이러한 부정적인 언사가 허다하게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부정적/소극적인 정치관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면적이며 문자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자의 정치사상을 군주의 술수 혹은 책략으로 규정하는 것은 道와 術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으로, 이는『老子』를 오도하는 다소 악의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점에 착안하여 본 논문은 우선 老子가 역설한 정치이념인 무위정치(無爲之治)는 분명 현실의 폭력적 정치권력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의 道개념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된 영구철학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제시할 것이다. 즉 노자는 분명 백성을 無知無欲하게 하며, 나아가 어리석게 해야 한다(愚民)는 표현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도를 체득하여 근본으로 복귀한다는 뜻이지,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앞을 보지 못하게 하는 세칭 우민정치와는 분명히 구분된다는 점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노자는 정치권력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오며, 정치권력은 어떻게 행사되어야 한다고 말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노자가 제시한 이상사회를 살펴볼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노자가 말하는 이상사회는 도가 실현되는 근원적인 정치상황을 묘사한 것이지, 결코 문명에 반대하는 과거회귀적, 복고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개진할 것이다.
1] 특히 김홍경, 『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노자』, 들녁, 2003, 49-65쪽. 유택화주편(장현근역), 『중국정치사상사』(하), 동과서, 2002, 30-64쪽. 대빈호(임헌규역), 『노자철학연구』, 청계, 1999, 247-308쪽 참조.
2] 소공권(최명, 손문호역), 『중국정치사상사』, 서울대출판부, 1998, 312쪽.
2. 노자 정치철학의 기조와 우민정치
주지하듯이 중국의 춘추시대에서는 철제 농기구가 개발되고, 이 새로운 도구의 발명은 생산력의 비약적인 향상을 가져왔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력의 비약적인 향상은 인구 증가와 제후국들로 하여금 물질적 축적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제후국들은 물질적 축적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중국을 통일하고자 전쟁을 일삼아,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과 계속되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굶주리고 죽어갔다.
이렇게 참혹한 현실을 목도하고 孔子는 正名論을 피력함과 이울러 인위적인 강제와 형벌을 배격하고 德治과 禮治를 통해 백성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 낼 것을 피력하였고, 墨子는 반전박애의 兼愛主義를 표방하는 등 수 많은 학파들이 출현하여 저마다 난세를 구제할 방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노자의 정치사상 역시 항상 동요하고 불안했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 사회를 어떻게 평온하고 안정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즉 그는 밖으로는 침략전쟁에 골몰하는 국가간의 대립과, 안으로는 호사스런 위정자와 굶주리는 백성들의 모순을 어떻게 해소시킬 수 있을까 하는 점에 골몰했다. 노자가 제시하고 있는 당시의 사회상을 몇 구절 살펴보는 것으로 출발해 보자.
"조정은 거대한 누각들로 아주 잘 정돈되어 있지만, 논밭은 매우 황폐하고, 창고는 텅 비어 있는데도, (통치자들은) 아름다운 비단에 수놓은 옷을 입고, 번득이는 검을 차고, 물리도록 마시고 먹으며, 재화는 남아도니, 이를 일러 도둑질을 자랑한다고 한다. 이 얼마나 도에서 어긋나는가? " 3]
3]『老子』53장. 朝甚除 田甚蕪 倉甚虛 服文采 帶利劍 厭飮食 貨財有餘 是謂盜夸 非道也哉.
"하늘의 도는 활시위를 당기는 것과 같을 것이다. 높은 것은 억누르고 낮은 것은 들어올리며 남는 것은 덜어내고 모자라는 것은 보탠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서 모자라는 것에 보태주거늘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 모자라는 자의 것을 덜어내어 남는 자에게 바친다. " 4]
4]『老子』77장. 天之道其猶張弓乎 高者抑之 下者擧之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天之道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위에서 세금을 많이 먹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굶주리게 되는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기 힘든 것은 윗사람이 작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스리기 힘든 것이다. 백성이 쉽게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은 윗사람이 살기를 갈구하는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쉽게 죽는다 " 5]
5]『老子』75장. 民之饑以其上食稅之多 是以饑 民之難治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民之輕死以其求生之厚 是以輕死.
그런데 노자는 이렇게 모순되고, 혼란스런 상황이 초래된 근본이유를 도의 상실에서 찾았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난세의 상황을 不道(33장, 55장), 非道(53장), 失道(38장), 廢道(18장), 無道(46장)라고 표현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不道, 非道, 失道, 廢道, 無道의 상황은 어떻게 해서 초래된 것일까?
노자는 인간이 스스로 그러한 도를 본받지 않고, 小知를 내어 탐욕하고 作爲로 다스리려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노자는 “천하에 꺼리고 피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짐에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 지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기물이 많아질수록 국가는 점점 혼란해 지고, 사람들이 지혜와 기교가 늘어남에 사특한 일들이 더욱더 일어나게 되었으며, 법령이 더 많이 공포됨에 도적이 오히려 많아졌다.” 6]고 말한다.
그렇지만 세상의 이론가들과 치자들은 혼란한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하면서 仁義를 강조하고, 지혜를 내어 다스리려 하고, 孝慈와 忠臣이라는 관념을 강요한다.
그런데 노자가 볼 때에 仁義, 智慧, 孝慈, 忠臣등과 같은 관념들은 大道가 폐해지자 나타난 부자연스런 외적 강제규범 혹은 작위에 불과하다.7]
그래서 노자는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 더해지고,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백성들이 다시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에게 자애로워지며, 공교로운 기술을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사라진다” 8]고 말하여, 우선 작위적인 정치와 인위적인 외적 관념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노자의 이런 입장은 다음 구절에 집약되어 잘 나타나 있다.
6]『老子』57장. 天下多忌諱而民彌貧 人多利器國家滋昏 人多伎巧奇物滋起 法令滋彰盜賊多有.
7]『老子』18장. 道廢有仁義, 慧智出有大僞, 六親不和有孝慈, 國家昏亂有忠臣.
그런데 이 구절은 최근 발굴된 <죽간본>에는 “故大道廢 安(焉)有仁義, 六親不和 安有孝慈, 邦家昏亂 安有正臣”로 되어 있어 후대에 개조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8]『老子』19장. 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
이 구절 또한 <죽간본>에 “絶智棄辯 民利百倍 絶巧棄利 盜賊亡有 絶僞棄詐(慮) 民復孝慈(季子)”로 되어 있어 후대 개작의 가능성이 있는 구절이다.
"어진 이를 존숭하지 않음으로 백성들을 다투지 않게 한다. 얻기 어려운 보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 백성들을 도둑이 되지 않게 한다. 탐낼만한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한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다스림에 있어 백성의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워주며, 그 의지를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한다.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無知, 無欲하게 하여 저 지혜롭다고 하는 자가 감히 작위하지 못하게 한다. 無爲로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9]
9]『老子』3장.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 爲無爲則無不治.
여기서 ‘어진 이를 존숭(尙賢)’하는 입장에 대한 노자의 비판은 우선 儒家를 겨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論語』에 이런 입장이 잘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10], 결정적으로 『中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10] 『論語』 1:7. 賢賢易色. 13:2. 先有司 赦小過 擧賢才.
"仁은 인간 그 자체이니 어버이와 친함이 가장 크고, 義는 마땅함이니 어진 이를 존숭함이 가장 크다. 친척과 친함의 강등과 어진 이를 높이는 등급에서 禮가 발생한다. "11]
11] 『中庸』20章. 仁者人也 親親爲大 義者宜也 尊賢爲大 親親之殺 尊賢之等 禮所生也.
이른바 仁義禮智라고 하는 덕에 의한 정치, 즉 有德者 정치론을 주장했던 유가 정치사상의 핵심은 바로 어진 이를 존숭하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나아가 墨子 또한 무려 그의 저서 3편을 통해(「尙賢」上, 中, 下) 이러한 견해를 피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노자는 이러한 ‘상현론‘을 어느 점에서 비판하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우선 노자는 정치에 있어 결코 어진 이를 등용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존숭하는 제도적 차별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을 따름이다. 즉 그는 어진 이를 선발하여 등용하되,12] 우대하는 제도적 차별은 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그 우대를 획득하기 위해 백성들이 쟁투하는 사태를 초래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노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동등하게 道에 의해 태어나, 德을 지니고 있다.13] 그러나 현실상 노자 또한 공자와 마찬가지로14] 인간의 도덕적 우위를 인정하고 있다. 15]
12]다음 구절은 그 전거이다. 樸散則爲器 聖人用之則爲官長. 『老子』 28장.
13] 『老子』 51장. 道生之 德畜之.
14] 『論語』 16:9. 孔子曰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17:3. 子曰 唯上知與下愚 不移.
15] 특히 인간을 上士, 中士. 下士로 나누고 있는 41장 참조.
그런데 노자는 이러한 현실 인간의 도덕적 우위에 의해 인간을 제도적으로 차별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노자는 외적 대상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면서 治者가 임무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구절에 있다.
즉 그는 聖人은 “백성들의 마음을 비우게 하고 배를 채워주며, 그 의지를 약하게 하면서 뼈를 강하게 하며, 항상 無知, 無欲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진정 愚民政治의 전형이 아닌가?
이에 대해 劉澤華는 노자가 말하는 無爲는 일종의 정책이라고 단정한다.
"『老子』의 무위정치는 사람들의 사회성을 최저한도까지 감소시키고 사람의 생물성을 특히 드러낸다. ... 모든 인류를 馬牛에 가깝게 만들려고 한다. 정말 이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연히 無爲해도 안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 16]
16] 劉澤華(장현근역), 38-47쪽.
노자는 진정 이렇게 백성들을 馬牛와 비슷한 어리석은 존재로 만들어 통치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순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노자의 의도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노자는 분명히 다른 곳에서 “그러므로 성인이 이르기를, 내가 무위로 행위하니 백성들이 스스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들이 스스로 바르고, 내가 일삼음이 없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부유하고, 내가 사욕이 없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꾸밈없는) 통나무가 되었다“17] 고 말하여, 백성들은 自化, 自正, 自富, 自樸하는 ‘주체’로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 구절에서 노자가 진정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왕필의 해석이 도움을 준다.
17]『老子』57장. 故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撲.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운다 함은 마음으로는 지혜를 품고 배로는 음식을 품으니 지혜 있음을 비우고 無知를 채운다는 말이다. 의지를 악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한다 함은 뼈는 無知로 줄기를 삼고 의지는 일을 만들어 어지럽게 하니 마음이 비어 있으면 곧 의지가 약해진다는 말이다. 無知하고 無欲한 자는 참됨을 지킨다. 지혜는 알아서 무엇을 固爲로 함을 말한다. " 18]
18]왕필(김학목역), 『노자도덕경과 왕필의 주』, 홍익, 2001, 48-9쪽.
요컨대 여기서 노자가 “배를 채워주고(實其腹) 뼈를 강하게 해준다(强其骨)”고 말한 것은 자연 그대로 타고난 본바탕을 양성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음을 비운다(虛其心)’에서 마음心은 외적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을 말하고, ‘의지를 약하게 한다(弱其志)’에서 의지志는 외적 대상을 작위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의지를 말한다. 따라서 “마음을 비우고(虛其心) 의지를 약하게 한다(弱其志)”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외적 대상에 대한 탐욕을 비우게 하고, 외적 대상을 작위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의지를 약하게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이어지는 백성들을 無知 無欲하여, (왕필의 해석대로) 참됨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분명 ‘백성들은 어리석게 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愚民政治를 주창하지 않았던가?
"옛날 도를 잘 실천한 사람은 백성들을 明敏하지 않게 하고 어리석게 하였다.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렵게 하는 것은 지혜智를 많이 부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해악이며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복이다. " 19]
19] ?老子? 65장. 古之善爲道者非以明民 將以愚之 民之難治以其智多 故以智治國은 國之賊 不以智治國 國之福.
이 구절을 두고 노자가 분명히 愚民政治를 주장했다고 비판하는 해석자들이 있지만, 문제는 노자가 말하는 愚民이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노자는 ‘백성들을 명민하게 하는 것(明民)’과 ‘어리석게 하는 것(愚民)’을 대비하여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 용어의 의미를 노자가 “다스림이 어수룩하고 흐릿하면 그 백성이 순박하고 후해지고, 다스림이 자세하고 빈틈이 없으면, 그 백성이 각박해 진다” 20]고 말하고 있는 구절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즉 노자에게서 ‘백성을 명민하게 한다(明民)’고 하는 것은 “禮樂刑政을 빈틈없이 제정하여 백성들을 각박하게 하는 것”이며, ‘백성들을 어리석게 한다(愚民)’는 것은 “백성들을 순박하고 후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愚民이란 “성인은 항상 사사로운 마음이 없어, 백성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면서 천하에 임함에 있어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잘 모으면서 천하를 위해서 그 마음을 혼연하게 하여, 백성들이 모두 성인에게 그 이목을 집중함에, 성인은 그들 모두를 어린아이처럼 되게 하는 것이다.. 21]
그리고 또 노자는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인가 보다, 혼란스럽기만 하다. 세상의 뭇 사람들은 영특하지만 나 혼자만 멍청하고 멍청한 것 같고, 세상의 뭇 사람들은 잘도 분별하지만 나 혼자만 혼돈 속에 얼버무린다. ... 세상의 뭇 사람들은 모두 유능하지만 나 혼자만 완고하고 비루하구나. 나만 홀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길러 주시는 어머니(道)를 귀하게 여긴다.” 22]라고 말하여, 명민함과 어리석음의 차이를 설명해 주고 있다.
요컨대 왕필의 설명대로 ‘明民’이란 위정자가 빈틈없이 禮樂刑政을 제정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교묘한 속임수를 많이 드러내어, 그 순박함을 가리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愚民’이란 성인이 도에 따라 무위로 정치를 시행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無知하여 그 참됨을 지키고 自然에 따르도록 하는 것” 23]을 말한다.
20]『老子』58장. 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
21]『老子』49장.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聖人在天下 歙歙焉爲天下渾其心 百姓皆注其耳目 聖人皆孩之.
22]『老子』20장.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衆人昭昭 我獨昏昏 衆人察察 我獨悶悶 ... 衆人皆有以 我獨頑且鄙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23] 왕필(김학목역), 앞의 책, 245-6쪽. 明謂多見巧詐 蔽其樸也 愚謂無知守其眞順自然也.
나아가 이렇게 백성을 어리석게 하는 것(愚民)은 곧 지혜(智)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자가 말하는 지혜란 무엇인가? 노자는 “지혜가 나오자 큰 거짓이 생겨났고”(18장),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 더해지고... 이 세 가지는 인위적으로 꾸민 것이므로 부족한 것이니, 그러므로 (성인은) 명령하여 귀속할 바가 있게 한다. 본바탕을 보고 통나무를 껴안고,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여라.”(19장)라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지혜가 없이 할 수 있겠는가? 24]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노자가 말하는 지혜는 도와 합체하는 방법인 無知, 無爲 및 “본바탕을 보고 통나무(도)를 껴안고(見素抱樸) 사사로운 욕심을 줄이는(少私寡欲) 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곧 인위적인(僞) 잔꾀와 속임수라고 하겠다. 이렇게 인위적인 잔꾀와 속임수인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해악이며, 따라서 지혜로서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복”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노자가 “백성을 어리석게 해야한다(愚民)”고 말한 것은 “백성들을 단지 순종하고 노동력만을 제공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가축처럼 기른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백성들이 虛心, 無心, 無知, 無欲함으로써 도와 합일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백성들을 自化, 自正, 自富, 自樸하는 ‘주체’로 긍정(57장)하는 것이다.
24]『老子』10장. 愛民治國, 能無知乎.
3. 정치권력의 원천과 시행방식
이미 2000여년 전에『老子』는 ‘君王의 南面之術’을 다룬 책, 25] 곧 바람직한 군주의 통치술을 제시하기 위한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26]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기실 늦어도 춘추말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최근에 발굴된 <죽간본>『老子』에도 ‘民利’(통행본 19장에 해당됨, 이하같다), ‘王, 民’(66장), ‘人主’(30장), ‘臣, 侯王, 民’(32장), ‘王亦大 國中有四大焉 王居一焉’(25장), ‘治人事天’(59장), ‘正臣’(18장), ‘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平大’(35장)와 같이 정치적인 용어가 나오며, 나아가 老子의 治道論의 전형인 현재 통행본 17장(修之身... 修之家... 修之鄕 修之邦), 31장(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57장(以正治邦 以奇用兵 以亡事取天下...我欲不欲而民自撲) 등의 구절이 그대로 나와 있다.
그리고 우리는『老子』25장에 근거를 두고 노자 역시 고대 중국의 정치이념의 정형인 “內聖外王”의 입장이 제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때문에『老子』에는 聖人과 侯王이란 명칭이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老子』에서 우선 정치권력의 행사 주체는 聖人의 덕을 쌓고 있는 군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聖人으로서 군주는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도를 인식, 체득하고, 도를 구현하는 군주라고 말할 수 있다. 27]
25]『漢書』, 30, 「藝文志」.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術’이란 有心, 有欲의 작위에 의해 행해지는 兵家와 法家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道라는 말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6]이외에도 다소 악의적으로『老子』를 군사적 전략서 혹은 권모술수서라고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傅斯年(장현근편저),『중국정치사상입문』, 지영사, 1997, 275-289쪽 참조.
27]이 점은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老子』, 17장)라는 구절에 전형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옛날에 하나(도)를 얻은 자가 있으니,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 평안하고,
... 제후와 임금은 하나를 얻어 천하를 곧게 하였는데, 이런 모든 것들을 이룬 것은 하나이다. 하늘이 (하나에서 얻은 것으로써) 맑음이 없으면 무너질까 두렵고, 땅이 평안함이 없으면 솟아오를까 두렵고,
...제후와 임금이 고귀함이 없으면 쓰러질까 두렵다. 그러므로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하고 높음은 낮음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므로 제후와 임금은 자칭 고아, 덕 없는 사람, 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는 천함으로 근본을 삼은 것이 아니겠는가? " 28]
28]?老子? 39장. 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 侯王得一 以爲天下貞 其致之一也 天無以淸 將恐裂 地無以寧 將恐發
...侯王無以貴高 將恐蹶 故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
是以候王自謂孤寡不穀 此非以賤爲本邪.
이렇게 노자에 따르면, “성인은 도를 체득하였기에 천하의 본보기로서의 군주가 된다.” 29]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 볼 것은 “제후와 임금이 고귀함이 없으면 쓰러질까 두렵다. 그러므로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하고, 높음은 낮음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므로 제후와 임금은 자칭 고아, 덕없는 사람, 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라고 노자가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자의 이 말은 곧 “고귀한 군주의 권력은 비천한 일반 백성에게서 나온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노자는 “도는 항상되어 이름이 없으니, 통나무는 비록 극히 작으나, 하늘아래 그 어떤 것도 감히 신하로 삼지 못한다. 제후와 임금이 만일 (도를) 지키면, 만백성이 장차 저절로 찾아들 것이다” 30] 혹은 “도는 항상 작위가 없지만 이루지 않는 것이 없으니, 제후와 임금이 능히 이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백성이 장차 (자기 본성에 따라) 自化하여, 천하가 장차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 31]라고 말하여, 군주가 되는 근거는 도의 체득과 그 실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노자에 따르면, 권력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근거로서 도를 체득하고 구현하고 있는 사람은 백성의 자발적인 지지를 받아 군주로 추대된다. 그래서 그는 도를 체득한 “성인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그 자신을 뒤로 돌리지만 오히려 앞서게 되고, 그 자신을 도외시하지만 오히려 항존하게 된다.” 32] 혹은 “성인은 윗자리에 처하나 백성들은 중압감으로 느끼지 않고, 앞자리에 처하나 백성들은 해를 입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천하 사람들이 즐겨 그를 추대하고 싫어하지 않는다” 33] 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노자는 “만일 천하를 취하고자 시도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가 얻지 못함을 볼 따름이다. 천하는 신묘한 그릇이라, 작위로 취할 수 없다. 취하고자 시도하는 자는 패하고 잡는 자는 잃는다.” 34]고 분명히 말하여 무력과 강제에 의해서는 권력의 정당성을 얻을 수 없을 분명히 하고 있다.
29]『老子』22장.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
30]『老子』32장.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不敢臣 侯王若能守 萬物將自賓.
31]『老子』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天下將自定.
32]『老子』7장.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33]『老子』66장. 是以聖人處上而民不重 處前而民不害 是以天下樂推而不厭.
34]『老子』29장.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이러한 입장은 다음 구절에도 반복된다. 48장. 取天下常以無事 及其有事不足以取天下.
그런데 노자의 이러한 입장을 두고, 안외순은
“여타 복잡한 사정들을 논외로 한다면, 특히 자연상태와 욕망에 대한 전혀 상이한 시작을 무시한다면, 인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자에게 주권을 양도한다고 본 홉스(Hobbes)와 유사하다.” 35]
35]안외순, 「老子의 無爲政治論에 나타난 勸力개념」, 『정치사상연구』5, 2001, 28쪽.
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의 관점에서는 老子에서 일반 백성들이 이렇게 성인을 추대하는 것은 “욕망의 충돌에서 비롯된 혼란스런 자연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인민들이 그 안전을 책임지는 자에게 主權을 양도한다”고 하는 홉스(T. Hobbes)를 위시한 서양의 근대 사상가들이 주장한 주권 양도설과는 분명히 차이 난다. 여기에는 여러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다음 두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것은 먼저 홉스 등이 주장한 주권 양도설에서는 주권을 양도받는 군주의 자질에 대해 어떠한 규정도 없지만, 노자는 반드시 도를 체득한 聖人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자의 이 입장은 중요한데, 홉스 등의 경우에는 주권을 양도받은 군주가 부당한 권력행사, 즉 인민에게 폭력행사를 할 수 있지만, 노자는 그 점을 미리 예방하여 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둘째, 홉스 등은 권력을 위임받은 군주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무력을 수반한 강제력을 지닌다고 말하고(Liviathan, 14장 참조), 결국 개인보다 국가 우위의 전체주의로 나아갔다. 36] 그러나 노자는 궁극적으로 백성들이 自化, 自正, 自富, 自樸하는 자율적 공동체를 지향한다(57장). 37]
36] D. Held(안외순 역), 『정치이론과 현대국가』, 학문과사상사, 1996, 32 및 327-8쪽.
37]이 점 때문에 노자를 아나키즘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대빈호(임헌규역), 앞의 책, 268쪽 참조.
노자의 이러한 입장은 聖人으로서 군주는 자신에게 위임된 정치권력을 어떻게 운용하는 지를 살펴보면 바로 드러난다. 우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누어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도를 체득하여 군주로 추대된 聖人은 사사로움 없이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공평무사하게 권력을 운용하여,38] “버려지는 사람이 없이 모든 사람을 잘 구제한다.”39] 이는 현대 복지주의 이념과 자율 속의 평등을 주창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서 모자라는 것에 보태주거늘,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 모자라는 자의 것을 덜어내어 남는 자에게 바친다. 누가 능히 남는 것으로써 천하를 봉양할 것인가? 오직 도를 체득한자일 뿐이다.” 40]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無爲에 거처하는 것이자 말없는 교화를 시행하는”41] 성인은 常德(玄德)처럼42] 권력을 운용한다. 그런데 常德(玄德)이란 유와 무, 어려움과 쉬움, 김과 짧음, 높음과 낮음, 앞과 뒤, 43] 암컷과 수컷, 검음과 흼, 영광과 치욕(28장), 수축과 팽창, 약함과 강함, 폐함과 흥함, 소여와 탈취 44] 등 상대성을 相反하여 根本, 無極, 無名, 無物로 復歸하는 도의 작용 45]을 말한다.
즉 성인은 “만 백성을 키우고 돌보며, 형성하고 완숙하게 하고, 감싸고 어루만져 주면서, 낳았으되 소유하지 않고, 이루되 자랑하지 않고, 기르되 주재하지 않는 ‘玄德’”(51장)처럼 권력을 운용한다. 그것은 곧 “백성들로 하여금 도를 배우도록 하여 잘못을 회복시키고, 모든 사람들의 스스로 그러함을 도와줄 뿐, 감히 작위하지 않는” 46] 방식으로 권력을 운용한다는 뜻이다. 성인이 권력을 이렇게 운용하기 때문에 “공과 일이 완수하여도 백성들은 모두 우리가 스스로 그와 같았다고 말하는” 47] 것이다.
38]『老子』16장.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2장. 天地不仁... 聖人不仁. 7장. 聖人... 非以其無私耶.
39]『老子』27장. 聖人常善救人 故無棄人.
40]『老子』77장. 天之道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孰能有餘以奉天下 唯有道者.
41]『老子』2장. 有無相生...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42]현덕은 도와 冥合하는 덕이다. 玄德은 항상되므로 또한 常德이라 칭한다. (그리고) 玄德은 비어 있으므로 孔德이라고 부른다. 서복관(유일환역),『중국인성론사』, 을유문화사, 1995, 65쪽.
43]『老子』2.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그런데 백서본은 “有无之相生也 難易之相成也 長短之相形也 高下之相呈也 音聲之相和也 前後之相隨 恒也”라 하여 상대성을 상반하는 것이 ‘恒(常)德’임을 분명히 나타내 주고 있다.
44]『老子』36장 참조
45]『老子』40장. 反者 道之動.
46]『老子』64장. 學不學 復衆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而不敢爲.
47]『老子』17장.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셋째, 성인은 권력을 柔弱하게 운용한다. 그런데 노자가 말하는 柔弱함이란
"천하에서 물보다 유약한 것은 없지만, 굳세고 강한 것을 치는 데에는 물을 이길 것이 없으니, 물은 굳세고 강한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드러움이 굳셈을 이기고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것을 천하 사람들은 누구나 알지만 능히 실천하지는 못한다. " 48]
48]『老子』78장. 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故柔之勝剛 弱之勝强 天下莫不知 天下莫能行.
즉 노자는 8장에서도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을 것이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으니 도의 이미지에 가깝다” 49]고 말한 바 있다. 즉 물은 둥근 그릇 안에 들어가면 둥글게 되고, 네모난 그릇 안에 들어가면 네모나고, 막으면 멈추고, 터주면 흐를 정도로 유약하지만, 철을 녹이고, 바위를 뚫는다. 그래서 그는 “굳세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에는 물을 능가할 것이 없다”고 말하여 유약함을 예찬한다.
그리고 76장에서도 노자는 “사람과 초목이 생존할 때는 유약하고, 죽었을 때는 堅强하다”는 사실을 들어, 유약함으로써 도와 합일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50]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노자가 찬미하는 유약함을 견강함에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자는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에서 가장 굳센 것을 부린다. 형체가 없는 것이 틈새가 없는 곳에 들어간다. 나는 이것으로써 無가 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안다. 말없이 가르침과 무위의 유익을 미쳐서 행할 수 있는 자 세상에서 드물다.” 51]라고 말하여, 유약함이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絶對行으로서 無爲 및 不言과 연결되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8장에서도 노자는 분명 “물이 도에 가깝다(幾於道)”고 말했지, 도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柔弱한 삶을 영위하는 聖人은 “‘不爭의 德’을 체득하여 싸우지 않고도 잘 이긴다.” 52] 이는 노자의 입장에서 보면 논리적인 귀결이다. 왜냐하면 유약함이 견강한 것을 이기기 때문에, 유약한 삶을 영위함으로써 부쟁의 덕을 체득한 성인은 싸우지 않고도 잘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유약함의 덕을 체득한 聖人은 겸손히 아래에 처한다(處下). 53] 그러나 비록 聖人은 유약하여 비록 겸손히 아래에 처하지만, 聖人 또한 천하 만백성에게 추대되어 귀의하는 바가 된다. 이는 마치 강과 바다가 아래에 있지만, 온갖 시냇물이 흘러들어 귀의하는 바가 되는 것과 같다.
노자는 국가간의 교린에도 적용하여 “큰 나라란 하류(바다)와 같아, 천하가 교제하는 곳이요 천하의 암컷이다. 암컷은 항상 고요함으로써 수컷을 이기며, 고요함으로써 아래가 된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의 아래가 됨으로써 작은 나라를 취하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로 내려감으로써 큰 나라에 취해진다. 그래서 둘 모두 각기 바라는 바를 얻을지니, 그러므로 큰 나라가 마땅히 아래가 되어야 한다.” 54] 라고 말하고 있다.
49]『老子』8장.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幾於道矣.
50]『老子』76장.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是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는 生之徒.
51]『老子』43장.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無有入無間 吾是以知無爲之有益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52]『老子』22장 및 66장.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31장. 夫佳兵者 不祥之器 故有道者不處. 68장. 善勝敵者不爭 ...是謂部不爭之德. 71장. 天之道 不爭而善勝. 81장. 聖人之道爲而不爭.
53]『老子』8장, 61장, 66장 참조.
54]『老子』61장.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故大國 以下小國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則取大國 ...夫兩者各得其所欲.
마지막으로 聖人은 자애와 검약, 그리고 감히 천하에서 앞서지 않는 것으로 55] 권력을 운용한다. 여기서 ‘자애慈’란 “자애로운 어머니가 젖먹이를 기르듯이 만물을 감싸 안고 덮어 기르되 모든 것을 포용하며 빠뜨리는 않는”(27장) 도의 작용을 체득하여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그 위가 없고, 그 밖이 없는 지극히 큰 도를 체득한 사람은 만물을 자식처럼 사랑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사로움도 없이 超然自若하므로, 두려움 없이 능히 용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검약儉’이란 57장의 말한 ‘嗇’과 같다. 거기서 노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김에 아끼는 것 만한 것이 없다. 대저 오직 아끼기 때문에 (도에) 일찍 복종할 수 있는 것이니, 일찍 복종하는 것을 덕을 거듭 쌓는다고 말한다. 덕을 거듭 쌓으면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고,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으면 그 한계를 알 수 없다.” 56]고 말했었다.
즉 사사로운 욕심을 줄이고, 마음을 虛靜하게 하여, 덕을 쌓아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고,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경지에 나아가는 것이 바로 ‘검약함儉’이다. 이렇게 검약하면 한계를 알 수 없는 경지에 나아가므로, 검약하면 능히 널리 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를 체득한 성인이 “자애로 만물을 남김없이 감싸 안고, 검약함으로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어 널리 미치는” 방식으로 권력을 운용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성인이 앞서고자 하는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겠다. 그래서 노자는 “감히 천하에서 앞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즉 “성인은 항상 無心하여 백성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으로 삼기 때문에”(49장) 감히 앞서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성인은 감히 앞서지 않지만, “선한 사람은 선하게 대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 또한 선하게 대하여, 선함을 얻어, ...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잘 모으면서 천하를 위해서 그 마음을 혼연일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55]『老子』67장. 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56]『老子』57장. 治人事天 莫若嗇 夫唯嗇 是以(謂)早服 早服謂之重積德 重積德則無不克 無不克則莫知其極.
4. 이상사회
노자는 정치의 단계를 논하면서 “太上에는 백성들이 군주가 있다는 것만을 알았고, 그 다음(其次)에는 군주를 친근해 하고 칭송했으며, 그 다음에는 군주를 두려워했으며, 그 다음에는 군주를 모멸했다.” 57]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太上.. 其次... 其次...其次는 1) 정치의 역사적 쇠락과정 2) 정치의 서열 규정으로 볼 수 있다.
역사적 쇠락과정으로 보면 일종의 상고 혹은 복고지향적으로 볼 수 있으며, 정치의 서열로 본다면 이상적인 정치와 타락한 정치의 서열을 나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태상太上은 1) 아주 오랜 옛말 2) 최상의 군주로 일반적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노자는 14장(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15장(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65장(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 39장(昔之得一者) 등에서는 ‘古之’ ‘昔之’라는 말을 빈번히 사용하여 마치 고대 사회를 예찬하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많은 해석자들이 老子를 복고주의적이라고 말해 왔다.58]
특히 진고응은 “노자는 「反本復初」의 사상이 매우 농후하다. 그러나 本初의 상태로 과연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 동시에 本初의 상태라는 것이 정말로 노자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움 것인가?” 59]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太上에는 백성들이 군주가 있다는 것만을 알았다”고 노자가 말했을 때, 太上은 도의 작용을 그대로 체득하여 시행하는 무위의 정치가 행해지는 것을 그린 것이지, 결코 역사상 존재했던 상고 어느 시기를 거명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즉 도는 역사상 실존하는 시간을 초월 60]하기 때문에, 무위의 정치 역시 초시간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자가 이상사회로 제시하고 있는 구절은 어떠한가? 이제 우리는 그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57]『老子』17장. 太上下知有之 其次親之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
58]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대빈호(임헌규역), 앞의 책, 248-255.
59]진고응(최재목, 박종연역),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 영남대출판부, 2004, 77쪽.
60]『老子』1장. 無名天地之始. 4장. 道...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52장.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어(小國寡民) 열사람 백사람 몫의 그릇이 있어도 사용할 필요가 없고,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여기도록 하여 멀리 옮겨가지 않게 한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으며,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진을 펼칠 일이 없고,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결승문자를 사용하게 하여, 지금 자기가 먹는 음식을 달게 먹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 그 풍속을 즐긴다. 이웃 나라가 서로 마주 보며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할 일이 없다. " 61]
61]『老子』81장. 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無所乘之 雖有甲兵無所陳之 使民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不相往來.
이 구절에 대해 진고응은 “다분히 시적인 의미가 풍부하여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든다”고 전제한 후 “이것은 노자가 고대 농촌사회의 기초 위에 이상화시킨 민간생활의 모습이다”고 규정하면서 “현실에 불만을 느끼며 당시 몰락하고 있던 농촌생활의 기초에서 허구적으로 나온 桃花源식의 유토피아” 62]라고 평하고 있다.
그리고 소공권은 “오로지 문화가 발달되지 못했던 은나라 초기 이전의 원시부락일 뿐이다. 대체로 원시부락은 엄격히 말한다면 진정한 정치조직은 아니었다” 63]라고 평하고 있다.
62] 진고응(최재목, 박종연역), 『진고응이 풀이한 老子』, 영남대, 2004, 78쪽 및 416-8쪽.
63] 소공권(최명, 손문호역), 앞의 책, 312쪽.
심지어 유택화는
"다시 말해 일체의 기술을 없애고, 일체의 문화를 없애며, 사람들의 사회관계와 교류를 최저한도까지 감소시켜 사람을 더욱 많은 부분에서 식물인간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차라리 복고적인 역사관이라고 말하기보다 현실에 대한 반동이라고 말함이 더 낫겠다. 소국과민설은 주로 압박과 착취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과 기술의 진보에 대한 반대이다...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앞을 보도록 인도하지 않는다. " 64]
64]유택화(장현근역), 앞의 책, 62-4쪽.
고 폄하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노자의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렇게 해석하는 데에 반대한다. 그 반대의 근거를 우리는 먼저 위의 구절의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어(小國寡民)”에 대한 해석에서 찾으려고 한다.
즉 이 구절을 두고 사람들은 노자가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을 지향한 것을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도 문자적이며, 즉자적인 해석이다. 노자는 60장(治大國 若烹小鮮) 및 61장(大國者下流)에서 大國를 다스리는 법과 대국과 소국의 교린에 대해 말하고 있고, 그리고 여러 곳(2, 13, 22, 25, 28, 29, 46, 52, 57장 등)에서 天下에 대해 말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우리는 노자가 말하는 道는 모든 만물을 포용한다는 점에서, 노자는 항상 천하 만백성을 두고 말하지, 작은 나라 적은 국민에 한정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小國寡民이란 진정 무엇을 뜻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 구절을 “본바탕을 보고 통나무를 껴안고,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여라.”(見素抱樸 少私寡欲, 19장)는 구절과 연관하여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대빈호의 탁월한 해석을 보자.
"여기서 우리는 노자가 말하는 欲의 성격을 알 수 있다.
... 欲은 私欲을 의미한다. 그러나 욕을 적게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無欲이라고 말할 수 있다. 57장(我無欲而民自樸)과 ... 19장을 비교하면 寡欲은 無欲이다.
... 단순히 무욕이라고 말하면 부정을 거치지 않는 즉자적인 무욕으로 오해될 수 있다. 또한 욕망의 완전한 단절로 오해될 수도 있다. 무욕이 무반성적이고 즉자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전적인 무도 아니라는 표현이 과욕이라고 생각된다. 적게하라寡는 것은 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전적인 없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적게할 이유를 알고 적게 하기 때문에 즉자적인 것이 아니다. " 65]
65] 대빈호(임헌규역), 앞의 책, 153쪽.
요컨대 노자가 말하는 ‘少私寡欲’이란 단순히 즉자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부정을 거쳐 사사로운 욕심을 줄여나가, 마침내 無欲, 無爲로 돌아감으로써 도와 합일하여 천하를 취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6]
66]『老子』48장.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取天下常以無事.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小國寡民’ 또한 큰 나라를 만들어 백성이 많게 하려고 하는 작위적인 욕심을 버리고 또 버려, 마침내 無爲와 無事로 나라를 다스려 종국적으로는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의 ‘什佰之器’는 1) 열 사람, 백 사람이 사용하는 편리하고 중요한 기물 혹은 무기 2) 열 사람, 백 사람을 당할 수 있는 뛰어난 인재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뒤의 구절(雖有舟輿이하)과 연관하여 본다면 1)의 해석이, 그리고 “어진 이를 떠받들지 않음으로 백성들을 다투지 않게 한다” 67]는 구절과 연결해서 볼 때는 2)의 해석이 타당해 보이는데,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이 또한 무위정치(無爲之治)가 행해져서 온 천하 사람들이 自足, 自富해 지면, 편리한 도구나 무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혹은 무위의 정치가 행해져 모든 사람들이 항상 스스로 그러하다고 자족하고 있어 68] 굳이 능력 있는 이를 발탁하여 인위적으로 다스리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 다음의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여기도록 하여 멀리 옮겨가지 않게 한다.”는 말은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즉 혹독한 정치가 시행되어 나라에 부역이 많고 세금이 무거우면 백성들이 죽음을 가벼이 여겨, 죽음을 무릅쓰더라도 그 나라를 떠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무위로 다스리면 모든 백성들이 편안해하고, 지금 거기에 사는 것에 만족하여 죽음을 중하게 여겨 떠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여기도록 하여 멀리 옮겨가지 않게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멀리 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으므로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다”고 말했다.
나아가 自足, 自化하여 욕심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그것으로 진을 펼칠 일이 없다”고 말했다.
나아가 사람들은 간교한 지혜를 쓰거나 하려한 미사어구로 남을 속이는 일이 없이, 흡사 재단하지 않은 통나무처럼 소박할 따름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다시(復) 새끼줄을 꼬아 약속하는데 사용하는 것처럼” 순박해 진다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이 구절 또한 단순히 과거회귀적으로 결승문자를 사용하는 원시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復古主義를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노자가 문명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하여도 사용할 필요가 없는(有而不用) 사회를 주창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노자는 “그 수컷을 알면서도 그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천하의 계곡이 되면 상덕이 떠나지 않아,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69]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계곡과 어린아이가 도를 상징하는 것인 만큼, 근원적인 도로 복귀하는 것을 말한다. 즉 노자가 말하는 復歸는 근원적인 도로 복귀한다는 의미이지, 과거회귀적으로 원시사회로 거꾸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노자의 이 언명들은 “문명을 알면서도 소박함을 지킬 줄 알면”(知其文明 守其素朴) 상덕이 떠나지 않아 무위의 정치가 실현된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41장의 노자의 어투로 표현하면 “지극한 문명은 마치 야만인 것 같다”(大文明若野蠻) 70]고 하겠다. 적어도 위의 구절에서 우리는 노자가 “열사람 백사람 몫의 그릇이 있어도”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뒤에 뒤따르는 구절 또한 무위의 정치가 실현되어 백성들이 自化, 自靜, 自富, 自樸(57장)하는 것을 묘사하였다.
백성들이 自化, 自靜, 自富, 自樸, 自足하므로, 절대로 다른 것을 흠모하지 않아 자신의 평소의 먹는 음식을 달게 먹고, 평소의 입는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고, 자기가 기거하는 곳을 평안하게 여기고, 그 마을의 풍속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닭과 개 짖는 소리가 들린 정도로 이웃나라가 가깝지만, 만족하여 왕래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필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자 한다.
즉 이상사회에 대한 노자의 기술은 1) 무위의 정치가 행해지는 상태를 기술한 것이지 “당시 몰락하고 있던 농촌생활의 기초에서 허구적으로 나온 桃花源식의 유토피아” 혹은 “오로지 문화가 발달되지 못했던 은나라 초기 이전의 원시부락”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2) 노자는 여기서 근본적인 도로 복귀하는 것을 말했지, 현실에 존재했던 과거의 어떤 시점으로 되돌아간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3) 노자는 문명이 존재하여도 이용할 필요가 없는, 즉 문명을 지양한 무위정치의 상황을 묘사하였지 결코 문명이나 기술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이러한 이상사회는 진정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대빈호는 “노자는 이 장에서 단순히 유토피아를 말한 것이 아니다. 유토피아는 현재의 사회상태의 해악으로부터 거꾸로 추론된 이상사회이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을 요청하지도 않는다. 노자의 경우는 현실 사회에서 실현 가능한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71]라고 말하여 이 점에 대해 긍정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노자가 말하는 이러한 이상사회는 현실적인 사회가 아니라 현실 사회를 규제하는 사회 이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인간 사회를 이해, 비판, 부정, 초극하는 표준이며 이념일 따름이지 인간의 사회는 아니다.
풍우란이 노자의 언명을 패러디하여 “지극한 문명은 마치 야만인 것 같다”(大文明若野蠻)고 말했듯이, 이 이상사회에서는 인간도, 사회도, 노동도, 생산도, 그리고 문명도 그 성격을 현실에 존재하는 것과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가 어떠하다고 말하는 것은 현재 우리의 언어로 묘사하는 것도, 그리고 그러한 사회가 가능하리라고 전망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도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듯이, 도가 행해지는 무위정치의 상황 또한 단정적인 명제적 언어로 기술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67]『老子』2장. 不尙賢 使民不爭 ... 無爲而無不治.
68]『老子』17장.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69]『老子』28장.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70]馮友蘭(박성규역), 『중국철학사(상)』, 까치, 1999, 306-7쪽.
71] 대빈호(임헌규역), 앞의 책, 252쪽.
5.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노자 정치철학의 기조와 권력의 운용 및 그가 말하는 이상사회에 대해 살펴보고, 거기서 제기되었던 몇 가지 오해를 비정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노자의 정치철학이 함의하는 것과 연관하여 안외순이 제기한 몇가지 문제점을 살펴보고 이 글을 맺는 것이 생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노자의 무위정치론의 권력관념에는 1) 방임주의와 전제주의 2) 반도덕주의와 또 다른 도덕주의, 3) 자연적 무위정치와 반역사적 유위정치간의 모순적 성격”이 드러난다고 주장하고 있다.72] 즉
1) 방임주의와 전제주의와 연관하여 안외순은 “노자의 무위정치론은 일차적으로 自化主義, 곧 방임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 백성들의 무욕과 무지를 위해 끊임없이 국가권력이 개입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것은 마치 ‘자유로운 인민의 안정’울 위해 강력한 보호자를 요청하다가 오히려 전제주의 가능성의 볼모가 된 홉스적 주권론과 유사한 상황이 연출된 듯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일견 노자는 “국가권력이 민의 생활에 개입하지 않고 방임할 때, 즉 국가권력이 쓸데없는 지식과 욕망, 다시 말해서 세속적 지식과 욕망을 부추기지 않을 때 인간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게 되고, 그러면 우주만물의 자화 상태에 인간도 동참하게 된다”고 하는 자유방임을 주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주장은 無爲라는 말을 너무나도 단순히 문자적으로 부정적으로, 즉 작위없는, 간섭없는 것으로만 해석한 데에서 내려진 결론이라고 생각된다.
노자가 말하는 無爲는 도의 작용이다. 도는 덕으로 인간에게 품부되어 있다. 무위는 인간의 이 덕을 발현시키는 작용을 말한다. 그래서 김형효는 “無爲之治의 뜻은 자유방임주의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자성(본성) 에너지가 저절로 자연스럽게 솟아나도록 도와주는 사회구조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본성이 생기를 발하는 구조를 만들어 놓으면 본성이 스스로를 모든 것을 가르쳐준다. 이것이 바로 무위지치의 뜻이 아니겠는가” 73]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형효의 지적이 옳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자유방임은 인간이 욕망을 자연스럽게 분출시키도록 정부권력은 방임하여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추구한다면, 노자의 무위정치는 도로부터 부여된 덕을 실현시키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위가 덕을, 혹은 인간의 자성(본성)을 발현시키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전제주의로 나아가는 것인가? 그러나 이 또한 옳지 않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는 노자 말하는 玄德을 이해하면 그 대답이 나온다고 생각된다. 앞서 지적했듯이 노자는 무위정치가 실현하는 현덕은 “백성을 키우고 돌보며, 형성하고 완숙하게 하고, 감싸고 어루만져 주지만, 낳았으되 소유하지 않고, 이루되 자랑하지 않고, 기르되 주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곧 “백성들로 하여금 도를 배우도록 하여 잘못을 회복시키고, 모든 사람들의 스스로 그러함을 도와줄 뿐, 감히 작위하지 않는”(64장) 방식으로 작용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과 일이 완수하여도 백성들은 모두 우리가 스스로 그와 같았다고 말하는 것이다.”(17장).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노자는 자유와 자율적 주체의 공통체를 표방하였지, 결코 전제주의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72]안외순, 앞의 논문, 35-37.
73] 김형효, 『사유하는 도덕경』, 소나무, 2004, 543쪽.
2) 반도덕주의와 또 다른 도덕주의와 연관하여 노자는 반도덕주의를 주창한 것 같지만 “三寶論을 위시하여 ... 처세덕목으로 유약, 겸하, 관용, 지족, 견미 등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반도덕적일 수 없었으며, 오히려 대안적인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안외순은 주장한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필자는 다음과 답하고자 한다.
즉 노자는 無道, 非道, 失道, 廢道가 인간의 物化에서 비롯된 자기 망각, 즉 자연의 상실로 규정하였다. 이미 자연과 근본을 망각하고 상실한 후에 도덕, 지식, 학문, 治人 등을 논변하는 것은 본말전도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노자는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을 회복하는 길은 우선 이런 뿌리 없는 도덕, 지식, 명분, 치인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노자는 우선 부정적, 소극적인 방식으로 처방을 제시하였다. 노자가 말하는 삼보론을 위시한 유약, 겸하, 관용, 지족, 견미와 같은 덕목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정적, 소극적 처방은 진정한 긍정으로 복귀하기 위한 방편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진정한 긍정, 즉 근본으로 복귀했을때 우리는 이제 비로소 常道, 常名, 常德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자가 제시한 것은 도덕을 부정하는 반도덕주의가 아니며, 나아가 기성의 도덕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또 다른 도덕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도덕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3) 자연적 무위정치와 반역사적 유위정치와 연관해서 안외순은 “노자가 대안으로 창조한 소국과민의 정치공동체 혹은 무위정치 역시 통치사의 엄청한 결단과 의지의 소산이며...『노자』에서 제시되는 사회는 ‘반문명적’ 사회이기에 이미 전개된 ‘문명’을 거부하고 다시 작은 분국상태로 환원시키는 작업은 엄청난 강제적 유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노자는 자연적 무위정치를 주장했으나 실은 반역사적 정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미 4장에서 언급하였다. 즉 노자가 제시한 소국과민의 공동체는 1) ‘큰 나라 많은 국민’을 지향하는 것에 대한 반대로서의 ‘작은 나라 적은 국민’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무위정치가 실현되어 常足하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며, 2) 반역사적이며 반문명적인 원시 공동체로의 회귀가 아니라 근본(道)으로의 復歸이며, 3)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사회가 아니라 현실을 비판하는 준거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노자의 소국과민의 공동체는 반역사적 유위정치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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