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노장자

장자의 언어에 대한 견해

rainbow3 2019. 10. 1. 11:30


장자의 언어에 대한 견해*          최 유 진**

 

요 약 문

 

이 논문은 장자의 언어에 대한 견해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장자는 당시의 언어 사용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리하여『장자』에는 언어에 대한 부정적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장자가 전적으로 언어를 부정했다고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존하는『장자』가 그 증거이다.

그러면 장자의 언어에 대한 견해는 어떠한가? 이 논문에서는 먼저 그가 언어와 의미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에 대해 논의하였다. 장자는 언어를 고정불변의 알맹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에 대해서 비판하고 언어는 수단에 불과함을 주장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도와 언어의 한계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장자 사상의 핵심인 도를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도는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이다. 그는 그 것을 여러 방면으로 주장하여 도는 단순한 언어적 차원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언어로 도를 전달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또한 그의 주장이다. 기존의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면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다음으로는 장자의 표현방법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장자』에는 기존의 표현 방법과는 다른 독특한 표현 방법이 있다. 불언지언(不言之言), 말과 침묵을 떠난 말, 망언(忘言)의 말이 그것이다. 전통적으로는 우언, 중언, 치언의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밖에 그는 부정, 우화, 비유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도이긴 하지만 도의 정신으로 또는 도의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한다면 도의 표현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장자의 주장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장자의 이상적인 언어는 바로 걸림이 없는 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 주요어: 장자, 도, 언어, 불언지언(不言之言), 우언(寓言), 중언(重言), 치언(卮言).

 

* 이 연구결과물은 2006학년도 경남대학교 학술진흥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이루어졌음.
** 경남대학교 인문학부(철학전공) 교수.

 

 

1. 서 론

 

장자의 언어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연구가 있었다.1) 기존의 연구에서는 장자의 언어관에 대해서 다양하게 접근을 하고 있다. 우선 표현가능성의 문제에 대해서 왜 장자는 특히 도에 대해서 표현불가능을 주장하였
는지를 따지고 그 불가설(不可說)이 과연 전적인 표현불가능을 말하는 것인지를 논의하는 연구들이 있다. 이들 연구에서는 대부분 장자는 언어에 대해서 부정적 표현을 많이 하긴 하지만 완전히 부정을 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밖에 표현가능성의 문제보다 표현 방법의 문제에 집중하여 장자의 표현 방식의 특징에 대해서 연구한 것들도 있다.

 

『장자』에는 언어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과 언어 사용에 대한 비판이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기도 하므로 이러한 연구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표현가능성의 문제에 있어서 어디까지 표현이 가능하다고 보는가의 문제와 말로 할 수 없다면 말을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표현가능성의 문제에 대해 장자가 과연 왜 표현불가능을 그렇게 강조했는지의 문제와 그것이 과연 완전히 표현이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인지를 우선 논의한다. 그리고 표현 방법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과 언어의 문제에 대해서 논의한 다음 구체적 표현 방법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먼저 장자는 언어에 대해 어떻게 규정하고 언어와 의미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1) 국내의 연구는 장자가 언어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와 긍정적인 사용의 측면 모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연구(최도희)와 긍정적인 면에서 장자의 적극적 언어 사용을 강조하는 연구(김성태, 박소정, 이시은, 원정근, 정대현, 정세근)로 대별할 수 있다. (각 연구의 구체적인 서지 사항은 뒤의 참고문헌 목록 참고) 구미권의 연구를 보면, Youru Wang은 장자의 언어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언어의 생산적인 사용 사이의 모순을 강조하는 A.C. Graham과 장자의 적극적 표현 측면을 강조하는 Chad Hansen의 연구를 장자의 언어관 연구의 대표로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두 연구 모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즉 Graham은 언어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과 적극적 표현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Hansen은 언어가 부적당하다는 장자의 말을 무시하는 약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Youru Wang, Linguistic Strategies in Daoist Zhuangzi and Chan Buddhism, Routledge Curzon, 2003, p. 95 참조)

 

 

2. 언어와 의미

 

장자는 이름2)과 실질3)의 관계에 대해서 “이름은 실질의 손님이다.”4)라고 하여 중요한 것은 실질이고 이름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본다. 말과 뜻의 관계에 대해서 「외물」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장자』에서는 이름(名)이 명예라는 뜻을 가질 때도 있는데 이 경우 언어관에 대한 논의의 대상에서는 제외한다. (“덕은 명예심 때문에 녹아 없어지고, 지식은 경쟁심에서 생긴다. 명예란 서로 헐뜯는 것이며, 지식은 다투기 위한 도구이다.(德蕩乎名, 知出乎爭. 名也者相軋也. 知也者爭之器也.)(「人間世」)”가 그 한 가지 예이다.)
3) 대상을 實로 표현할 때도 있고 形이나 物로 표현할 때도 있다. 삼자는 상통한다.(孫以楷·甄長松,『莊子通論』, 東方出版社, 1995, p. 147 참조.)
4) 名者實之賓也.(『逍遙遊』)(『장자』번역은 안동림의 번역(현암사)과 안병주·전호근 번역(전통문화연구회) 및 陳鼓應 번역(『莊子今注今譯』, 中華書局)을 주로 참고하였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있으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 따위는 잊혀지게 마련이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해 필요하며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는 잊혀지고 만다. 말은 생각을 전하기 위해 있으며 생각하는 바를 알고 나면 말 따위는 잊고 만다.5)"

5)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外物」)

 

생각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고 말은 수단이라는 것이 장자의 주장이다.
목적이 달성되면 수단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따라서 생각한 바를 알고나면 말은 잊혀진다. 그런데 장자는 말과 뜻의 관계를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보지 않고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그는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거친 것이고 뜻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은 사물의 정미(精微)한 것이다.”6)라고 하여 말은 거친 것이고 뜻은 정미한 것으로 본다. 말이 통한다는 것과 뜻이 통한다는 것을 다른 차원에 놓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천도」편에서는 말과 뜻, 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6) 可以言論者, 物之粗也.(「秋水」)

 

 

"세상에서 도를 위해 소중히 여기는 것은 책이다. 그러나 책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말에는 소중한 데가 있다. 말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뜻 때문이다. 뜻에는 가리키는 바가 있다. 뜻이 가리키는 것을 말로는 전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말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책을 전해주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소중히 여긴대도 소중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란 정말로 소중하지는 않다.

눈으로 보아서 보이는 것은 형체와 색깔이고 귀로 들어서 들리는 것은 이름과 음성이다.

슬프구나, 세상 사람들은 그 형체·색깔·이름·음성으로 저것의 참모습을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형체·색깔·이름·음성으로는 도저히 저것의 참모습을 터득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까 참으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런데 세상에 이 사실을 누가 알고 있단 말인가!7)

7) 世之所貴道者書也, 書不過語,語有貴也. 語之所貴者意也, 意有所隨. 意之所隨者, 不可以言傳也, 而世因貴言傳書.

世雖貴之, 我猶不足貴也, 爲其貴非其貴也.

故視而可見者, 形與色也, 聽而可聞者, 名與聲也.

悲夫, 世人以形色名聲爲足以得彼之情! 夫形色名聲果不足以得彼之情,

則知者不言, 言者不知, 而世豈識之哉!(「天道」)

 

말에서 뜻으로, 뜻에서 뜻이 가리키는 것으로 차원이 올라간다.8)

참된 것은 도이고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책이나 말이 있지만 사실 말로 도를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뜻이 가리키는 것은 말로 전달할 수 없다. 언어는 실질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말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은 여기에서도 명백히 하고 있다.

8) 朱哲은 言-意-意之所隨者-道의 순서로 배열된다고 해석하고 또 意之所隨者는 象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朱哲, 『先秦道家哲學硏究』, pp. 238-239 참조)

 

다음으로 말은 고정불변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사용해서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고 본다. 장자는 “길(道)이란 그곳을 다니니까 생긴 것이고 사물은 이름을 붙이니까 그렇게 된다.”9)라고 말하고 있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언어를 사회적 약속이라고 봄으로써 언어에 대해 상당히 자유로운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말에 구별이 생긴 것이 “이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9)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齊物論」)

 

 

"도란 본래 한계가 없고 말이란 애초에 일정한 내용이 없다. 그런데 “이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구별이 생기게 된다. 그 구별에 대해 말해 보자. 左가 있고 右가 있으며, 이론과 논쟁, 분석과 유별, 대항과 경쟁이 있다. 이것을 여덟 가지 덕이라 한다. 이 우주의 밖에 대해 성인은 그 존재를 부인하지 않지만 논의하지도 않는다. 또 우주 안에 대해 성인은 대강을 말할 뿐 상세한 점을 들추지 않는다.

역대의 경세의 기록이나 옛날 왕들의 기록에 대해 성인은 논의는 하되 분별을 하지는 않는다. 분석한다는 데에는 분석하지 못함이 있고, 구별한다는 데에는 구별하지 못함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성인은 그대로 자기 가슴 속에 품지만 일반 사람은 구별을 하고 남에게 내보인다. 그러므로 구별을 한다 함은 보지 못하는 바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10)"

10) 夫道未始有封, 言未始有常, 爲是而有畛也, 請言其畛: 有左, 有右, 有倫, 有義, 有分, 有辯, 有競, 有爭, 此之謂八德. 六合之外, 聖人存而不論, 六合之內, 聖人論而不議.

春秋經世先王之志, 聖人議而不辯. 故分也者, 有不分也., 辯也者, 有不辯也. 曰:「何也?

聖人懷之, 衆人辯之以相示也. 故曰辯也者, 有不見也.(「齊物論」)

 

“말이란 애초에 일정한 내용이 없다.”는 이곳에서의 말도 “사물은 이름을 붙이니까 그렇게 된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결정적으로 정해진 바가 없다고 보는 것이 장자의 입장이다. 언어에 고정불변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본질이 있는 것으로 고집함으로써 많은 문제가 생긴다고 보는 것이 장자의 견해인 것으로 보인다.

 

 

3. 도와 언어의 한계

 

장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도이다. 도는 만물의 근원이고 만물의 근본 법칙이기도 하다. 인간의 최고의 경지이기도 하다. 지혜의 경지에 대해서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사람의 지혜에는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데가 있었다. 어떤 경지에 다다랐는가? 애초 사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지이다. 지극하고 완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덧붙일 수가 없다.

그 다음 경지는 사물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구별을 두지 않는 경지이다. 그 다음은 구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시비를 고려하지 않는 입장이다.

시비가 나타나면 도가 파괴되는 원인이 되고, 도가 파괴되면 또한 편애가 이루어지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과연 완성과 파괴가 있는 것일까? 과연 완성과 파괴는 없는 것일까?

… 자기의 판단을 가하지 않고 평상시의 자연스러움에 맡기는 것, 이것을 명(明)에 의거함이라 한다.11)"

11) 古之人, 其知有所至矣. 惡乎至? 有以爲未始有物者, 至矣, 盡矣, 不可以加矣.

其次, 以爲有物矣, 而未始有封也. 其次, 以爲有封焉, 而未始有是非也.

是非之彰也, 道之所以虧也. 道之所以虧, 愛之所以成. 果且有成與虧乎哉? 果且無成與虧乎哉?

 … 爲是不用而寓諸庸, 此之謂以明.(「齊物論」)
옛 사람의 지혜의 단계를 논하는 부분은 거의 같은 문장이 「庚桑楚」에도 나온다.

 

 

최고의 경지는 무의 경지, 다음은 유이긴 하지만 구별이 없는 경지, 그 다음은 구별은 있지만 시비가 없는 경지이고 마지막 단계는 시비가 있는 일반적인 수준이다. 가장 궁극적인 경지가 바로 도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 도의 표현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장자의 선배인 노자는 “도라고 할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다.”12) 또는 “도는 항상 이름이 없다.”13)거나 “도는 숨어서 이름이 없다.”14)라고 하여 도의 표현 불가능을 말한다. 장자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니 언어로 한정된 도는 이미 도가 아니다. 「지북유(知北遊)」편에서는 “도는 말할 수 없다. 말하면 그르다.”15)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대도는 칭할 수 없다.”16)고도 말한다. 장자는 이와 같이 도는 표현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도가 남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거라면 사람들은 자기 형제에게 말해 줄 거요.17)라고도 말하여 전달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와 같은 부정적인 언급은 이외에도 많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그 예이다.

 

12) 道可道非常道.(『老子』1장)
13) 道常無名.(『老子』32장)
14) 道隱無名.(『老子』41장)

15) 道不可言, 言而非也.(「知北游」)
16) 大道不稱.(『齊物論』)
17) 使道而可以告人, 則人莫不告其兄弟.(「天運」)

 

 

"이는 또 사람들이 다 같이 거론하는 것이지만 도에 이른 자는 그런 일을 논하지 않는데, 논하는 자는 도에 이르지를 못하오. 뚜렷이 보려 하면 만날 수가 없고 변론하기보다는 침묵해야 하오. 도란 들을 수가 없으니 귀를 막고 터득함만 못하오. 이와 같이 하면 위대한 이치를 터득했다고 하오.18)"

18) 此衆人之所同論也, 彼至則不論, 論則不至. 明見无値, 辯不若黙. 道不可聞, 聞不若塞. 此之謂大得.(「知北遊」)

 

"도는 그 모습을 볼 수도 없고 그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사람들은 어둡고 깊다고 하지만 도를 논하는 방편은 되어도 이미 참된 도는 아닌 것이다.19)"

19) 視之無形, 聽之無聲. 於人之論者謂之冥冥, 所以論道而非道也.(「知北遊」)

 

"무시가 말했다. “도란 들을 수가 없는 것, 들었다면 아니요. 도는 볼 수가 없는 것, 보였다면 아니요. 도는 말할 수가 없는 것, 말했다면 아니요. 만물에 형체를 베풀어주면서도 그 스스로는 형체가 없음을 안다면 그 도는 의당 뭐라 이름 붙이지 못하게 되오.”

무시가 말했다. “도를 물었을 때 이에 대답한 자는 도를 모르오. 도를 묻는 자도 역시 아직 도를 듣지 못했소. 도는 물을 수가 없고 물어도 대답할 수가 없소. 물을 수가 없는데 묻는다면 없는 것을 물음이오, 대답할 수 없는데 대답하는 짓은 마음에 도가 없는 거요. 도를 얻지 못한 채 대답할 수도 물을 수도 없는 것을 응대하는 자가 있다면 이와 같은 자는 밖으로는 우주 자연을 보지 못하고 안으로는 태초를 알지 못하오. 그래서 높고 먼 경지에 이르지 못하며 절대의 세계에 노닐지 못하오.”20)"

20) 无始曰:「道不可聞,聞而非也., 道不可見, 見而非也, 道不可言, 言而非也. 知形形之不形乎! 道不當名.」

无始曰:「有問道而應之者, 不知道也. 雖問道者, 亦未聞道. 道无問, 問无應. 无問問之,是問窮也, 无應應之, 是无內也. 以无內待問窮, 若是者, 外不觀乎宇宙, 內不知乎大初, 是以不過乎崑崙, 不遊乎太虛.」(「知北遊」)

 

 

도는 말로 할 수 없지만 일반적인 사물은 어떠한가? 노자의 경우에는 도는 무명(無名)이지만 일반적인 사물은 유명(有名)이라고 본다. 도는 표현 불가능하지만 일반 사물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21)

장자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도니까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지 일반적인 사물이 표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즉 “말로 논할 수 있는 것은 사물 중에서 조잡한 것이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사물 중에서 정미(精微)한 것이다. 말로 논할 수 없고 생각으로 살필 수 없는 것에 이르면 조잡하다거나 정미하다는 개념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22)라고 하여 도는 표현이 불가능하지만 사물의 거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21) 최유진, 「원효와 노자」,『원효학연구』 제9집, 원효학연구원, 2004, pp. 126-130 참조.

22) 可以言論者, 物之粗也. 可以意致者, 物之精也. 言之所不能論, 意之所不能致者, 不期精粗焉.(「秋水」)

 

 

하지만 도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경우에도 언어를 통해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한다. 그 어려움을 얘기하는 것을 윤편(輪扁)의 일화에서 볼 수 있다. 윤편은 수레바퀴를 만드는 장인인데 수레바퀴 만드는 요령은 마음으로 응할 뿐이지 말로 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성인의 말씀인 경전도 옛사람들의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23)

「천운」편에서는 노자의 입을 빌려서 “육경이란 옛 성왕의 낡은 자취일 뿐 어찌 그 자취를 만들어낸 것이겠소.”24)라고 말한다. 그리고 더 나가면 “지혜로운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지혜롭지 못하다.”25)라고 말하거나 “지극한 말은 말을 배제하며 지극한 행위는 행위를 배제한다.”26)라고 하여 말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한다.

 

23)『莊子』 「天道」 참조.
24) 六經, 先王之陳迹也, 豈其所以迹哉.(「天運」)
25) 知者不言, 言者不知.(「天道」)

 

그러나 아무리 그러다 하더라도 언어적인 표현을 하긴 한다. 전달의 필요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장자는 시험 삼아 말한다고 하면서 도에 대해 표현을 한다.

 

"(참된 도는) 마음에서 찾아도 고생만 할 뿐 알 수가 없고 말로 나타내려 해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말할 수가 없지만, 이제 시험 삼아 당신을 위해 그 대강을 말해 보겠소.27)"

27) 心困焉而不能知, 口辟焉而不能言, 嘗爲汝議乎其將.(「田子方」)

 

이는 도에 대한 언어적 표현은 절대적인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이도 말한다.

 

 

"설결이 왕예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모든 존재가 하나같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아십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나?”

“선생님은 자신이 모르는 바를 아십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나?”

“그렇다면 모든 사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단 말씀입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나?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시험삼아 말은 해보자. 내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모르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며,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앎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28)

28) 齧缺問乎王倪曰:「子知物之所同是乎?」

曰:「吾惡乎知之!」

「子知子之所不知邪?」 曰:「吾惡乎知之!」

「然則物无知邪?」

曰:「吾惡乎知之! 雖然嘗試言之. 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 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齊物論」)

 

 

여기에서도 앎과 모름을 대비시켜서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험 삼아 말한다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단언하여 어떤 것이 결정적으로 옳다고 말하지 않는 것에 장자 표현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확실하지 않다고 물리친 다음, 그렇다면 자기 자신의 말도 말인 한에는 그러한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시험 삼아 말한다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주장을 확실하게하지 않는다는 전략은 어떤 견해에 대한 강한 집착을 완화시키는 실질적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어떤 견해에 대해서 집착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도(道)라고 표현되는 이상적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직접적 의사소통이 아닌 간접적 의사소통 방법으로 장자의 언어관을 해석하는 입장도 있지만29) 그 경우에도 어떻게 효과적으로 목표에 도달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장자의 메시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더 믿음직스럽게 생각할까, 아니면 한 번 해 보는 말이니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할까의 문제이다.
적어도 말 그 자체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 인정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장자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도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도를 표현하는 자신의 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가 문제이다. 여기에서 도의 표현이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표현방법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29) Youru Wang이 이와 같이 해석을 한다.(Youru Wang, Linguistic Strategies in Daoist Zhuangzi and Chan Buddhism, pp. 125-138 참조.)

 

 

4. 표현 방법의 문제

 

도를 전달하려면 말을 하여야만 한다. 결정적인 말이 아닌 임시적인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은 당시의 일반적인 사람들의 말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어떻게 말을 하여야 하는가? 장자는 이상적인 말, 바람직한 말을 불언(不言)의 말이라고 말한다.

 

 

"대체로 참된 도는 명칭으로 나타낼 수가 없고, 참된 변론은 말로 하지 못한다.

…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다. 불언(不言)의 말, 도로 나타나지 않는 도를 누가 알까?

만약 그것을 알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천부(天府)라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는 아무리 부어도 차지 않고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어째서 그런지 원인은 모른다. 이러한 경지를 보광(葆光)이라고 한다.30)"

30) 夫大道不稱, 大辯不言.

… 知止其所不知至矣. 孰知不言之辯, 不道之道.

若有能知, 此之謂天府. 注焉而不滿, 酌焉而不竭, 而不知其所由來. 此之謂葆光.(「齊物論」)

비슷한 말이 「徐无鬼」에도 있다.

(“彼之謂不道之道, 此之謂不言之辯, 故德總乎道之所一. 而言休乎知之所不知, 至矣.”)(「徐无鬼」)

 

 

불언의 말은 결국 평상적인 언어와는 다른 태도에서 나온 언어 사용법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말을 않는 것은 아니고 언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장자의 소위 무용지용(無用之用), 부지(不知)의 지(知) 등 역설적인 표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를 설명하는 문제에 대해서 외편에 속하는 「칙양(則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를 말로서 족히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온종일 말하고 있어도 모두다 도에 알맞지만 말이나 생각에 구애되면 온종일 말해도 모두 사물에 달라붙게 된다. 도란 사물의 극치이다. 말로도 침묵으로도 죄다 설명할 수가 없다. 모름지기 말을 떠나고 침묵을 떠나 도의 극치를 말해야 한다.31)"

31) 言而足, 則終日言而盡道., 言而不足, 則終日言而盡物. 道物之極, 言黙不足以載., 非言非黙, 議有所極.(「則陽」)

 

 

도는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언어와 침묵 모두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언어와 침묵으로 언어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은 무용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무용과 유용을 넘어서야 한다는 입장
으로 나아가는 주장을 생각나게 한다. 『장자』 「산목」에는 유용과 무용의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다음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 속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그 천수를 다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 이 집 주인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느 입장에 머물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그 쓸모있음과 없음의 중간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이란 비슷하지만 아니므로 화를 면하지는 못한다. 만약 자연의 도에 의거하여 유유히 노닌다면 그렇지 않다.

… 제자여, 이것을 명심하라. 다만 도덕의 경지에서 노니는 자만이 겨우 화를 면할 수 있다는 점을!”32)"

32) 明日, 弟子問於莊子曰: 「昨日山中之木, 以不材得終其天年, 今主人之雁, 以不材死, 先生將何處?」

莊子笑曰:「周將處乎材與不材之間. 材與不材之間, 似之而非也, 故未免乎累. 若夫乘道德而浮遊則不然.

… 弟子志之, 其唯道德之鄕乎!」(「山木」)

 

 

여기에서 유용과 무용을 떠난 도의 경지를 말하고 있는데 언어와 침묵의 경우에도 두 가지를 모두 벗어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 비슷하다. 일단은 유용의 경지보다는 무용의 경지가 높은 경지이지만 무용의 경지가 완성은 아니다. 언어와 침묵의 경우도 침묵의 경지가 일단은 높은 경지이겠지만 더욱 높은 차원에서 보면 사실은 언어의 경지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침묵의 경지인 것이다.

말로 할 수 없다는 것도 결국은 말이라는 것이다. 말로 할 수 없다는 것도 말로 할 수 있다는 것과 상대적인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도라 하여 침묵으로 도를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규정하는 순간 말을 한 것이 된다. 따라서 침묵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반성이 한 차원 높아진 것이지만 더 나아간다면 말과 침묵을 떠난다는 것을 또 떠나야 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또 계속 반복되어 끝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결국 결론은 걸림 없이 말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장자의 언어관에서 고려하여야 할 것은 망언(忘言)의 문제이다. 앞서 인용한 「외물」편의 이야기를 다시 보도록 하자.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있으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 따위는 잊혀지게 마련이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해 필요하며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는 잊혀지고 만다.

말은 생각을 전하기 위해 있으며 생각하는 바를 알고 나면 말 따위는 잊고 만다. 나는 어찌 말을 잊은 사람과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볼 것인가.33)"

33)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吾安得夫忘言之人而與之言哉!(「外物」)

 

 

말은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 있으니 생각하는 바를 알고 나면 말을 잊는다는 것이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다. 후대의 논의에 의하면 망언(忘言)이 득의의 방법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특히 왕필의 경우가 그러하다.34)
그러나 여기에서는 망언을 득의의 방법이라 볼 수는 없다. 말을 잊음으로써 뜻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뜻을 얻기 위하여 망언하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뜻을 얻은 사람은 망언한다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뜻을 얻은 사람은 도를 체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사람은 말을 잊는다.35)

그러면 말을 잊은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도를 체득한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뜻을 얻은 사람도 말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말을 잊었으므로 말을 잊고 말을 할 것이다. 말을 잊고 하는 말은 걸림이 없는 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망언의 말은 불언의 말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말이 될 것이다.

 

34) 왕필은 주역을 해석하면서 장자의 이 “得意而忘言”을 원용하여 “得意在忘象 得象在忘言”이라 주장한다. 망언이 득의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왕필이 이것을 주장한 까닭은 漢儒들의 象數學을 배격하기 위해서였다. (이재권, 「魏晉玄學에 있어서의 言意之辯에 관한 硏究 ― 王弼의 得意忘言論을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pp. 60-61 참조.

35) 「대종사」편에서는 진인은 말을 잊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古之眞人 … 忘其言也(「大宗師」))

 

 

다음으로 언어의 한계를 넘어 말하려는 장자의 구체적인 표현 방법에는 우언(寓言), 중언(重言), 치언(巵言)이 있다. 「천하」 편에서는 장자가 우언, 중언, 치언을 사용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주는) 아득한 이론에 황당무계한 말과 종잡을 데 없는 말로 논하였다. 때때로 자기 멋대로 논하였지만 치우치는 일이 없었고, 한 가지에만 적용되는 견해를 내세우지 않았다. 지금 천하는 침체하고 혼탁하여 올바른 이론을 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치언으로 모든 사물에 대하여 논하고 중언으로 진실을 논하고 우언으로 광범한 문제들을 얘기하였다.36)"

36) 以謬悠之說, 荒唐之言, 无端崖之辭, 時恣縱而不儻, 不以觭見之也. 以天下爲沈濁, 不可與莊語,

以巵言爲曼衍, 以重言爲眞, 以寓言爲廣.(「天下」)

 

 

그렇다면 우언, 중언, 치언이란 무엇인가? 「우언(寓言)」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언(寓言)은 십 분의 구이고 중언(重言)은 십 분의 칠이며37) 치언(巵言)은 매일같이 나와서 천예(天倪)와 조화를 이룬다. 십 분의 구가 되는 우언은 밖의 사물을 인용해 논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서 중매인이 되지 않는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칭찬하는 것이 아버지 아닌 사람이 칭찬하는 것만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 십 분의 칠이 되는 중언은 시비의 논쟁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옛 노인의 말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 치언은 매일같이 나와서 천예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을 따라 무궁함으로써 영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일치하지만, 일치함과 말은 일치하지 않고, 말과 일치함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말없음을 말한다면 평생토록 말한다고 하더라도 일찍이 말한 것이 아니고 평생토록 말하지 않아도 일찍이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38)

38) 寓言十九, 重言十七, 巵言日出, 和以天倪. 寓言十九, 藉外論之.

親父不爲其子媒. 親父譽之, 不若非其父者也.,

非吾罪也, 人之罪也. 與己同則應, 不與己同則反, 同於己爲是之, 異於己爲非之.

重言十七, 所以已言也, 是爲耆艾, 年先矣, 而无經緯本末以期年耆者, 是非先也. 人而无以先人, 无人道也. 人而无人道, 是之謂陳人. 巵言日出, 和以天倪, 因以曼衍, 所以窮年. 不言則齊, 齊與言不齊, 言與齊不齊也, 故曰言无言. 言无言, 終身言, 未嘗言. 終身不言, 未嘗不言. 有自也而可, 有自也而不可. 有自也而然, 有自也而不然. 惡乎然? 然於然. 惡乎不然, 不然於不然.惡乎可? 可於可. 惡乎不可? 不可於不可. 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无物不然, 无物不可.

非巵言日出, 和以天倪, 孰得其久! 萬物皆種也, 以不同形相禪, 始卒若環, 莫得其倫, 是謂天均. 天均者天倪也.(「寓言」)

37) “寓言十九, 重言十七”은 일반적으로는 “우언은 십 분의 구, 중언은 십 분의 칠”로 해석하지만 孫以楷·甄長松은 실제 숫자 19, 17로 해석한다. 즉 그들은『장자』외·잡편을 제외한 내편 중에 실제로 나오는 우언과 중언의 숫자가 19회, 17회라고 주장한다.(孫以楷·甄長松,『莊子通論』, 東方出版社, 1995, pp. 10-15 참조.)

 

 

우언은 타인에게 의탁해서 하는 말이고 중언은 존중할 만한 사람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치언은 “도의 말, 무심한 말,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말, 치우침이 없고 올바른 말, 날마다 새로운 말, 옳다 또는 옳지 않다가 없는 원만한 말, 끝없이 계속되어 시작과 끝이 없는 말, 무질서하여 수미(首尾)가 없는 말, 의미심장한 말”39)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세 가지 모두가 결국은 도를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하여 고안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표현 방법으로 달리 말할 수 있는 것은 부정, 패러독스, 풍자(아이러니)의 방법이다.40) 장자의 표현법은 일반적인 표현 방법과는 다른데 그것은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장자에 걸맞은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천하」편에서의 장자에 대한 평가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39) 朱哲, 『先秦道家哲學硏究』, 上海人民出版社, 2000, p. 231 참조.
40) 이는 Youru Wang이 설명하는 바이다.(Youru Wang, Linguistic Strategies in Daoist Zhuangzi and Chan Buddhism, pp. 151-160 참조.)

 

 

"막막하여 형체가 없고 변화무상하니 죽음도 삶도 더불어 하고 천지의 아우름과 더불어 하고 신명의 운행과 더불어 한다. 망망한데 어디로 갈 것이며 순간인데 어디까지 갈까?

만물이 모두 그물인데 근원으로 돌아감만 못하리라! 옛 도술에 이런 것이 있었는데 장자는 이런 풍격을 듣고 설복되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와 황당한 말과 끝없는 사설은 때로는 방자하지만 구차하지 않으며 억지로 기이한 것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런 것은 천하가 심히 혼탁한데 엄숙한 정론으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치언으로 모든 사물에 대하여 논하고 중언으로 고쳐 다시 참되게 하고 우언으로 뜻을 넓힌다. 홀로 천지와 더불어 정신을 왕래하여 함부로 만물을 분계하지 않고 시비를 따지지 않으며 속세와 더불어 거처한다. 그의 글은 비록 괴이하고 독특하지만 사물을 따르므로 몸을 해침이 없다. 비록 들쭉날쭉 허실이 있지만 그 기이한 해학이 볼만하다. 달리 가슴 속에 꽉 찬 것을 다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로는 조물주와 노닐고 아래로는 삶과 죽음을 뛰어넘고 시작과 끝이 없는 초월자를 벗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뿌리로 하는 것은 광대한 열림이요, 깊고 텅 빈 마음의 자유로움이다. 그것이 종주로 삼은 것은 조화로 나아가 높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그가 조화에 조응하여 사물을 해명함은 그 조리가 미진하고 그 유래가 벗겨지지 않아 망연하고 애매하여 미진함이 있다.41)"

41) 芴漠无形, 變化无常, 死與生與, 天地竝與, 神明往與! 芒乎何之, 忽乎何適, 萬物畢羅, 莫足以歸, 古之道術有在於是者. 莊周聞其風而悅之. 以謬悠之說, 荒唐之言, 无端崖之辭, 時恣縱而不儻, 不以觭見之也. 以天下爲沈濁, 不可與莊語,

以巵言爲曼衍, 以重言爲眞, 以寓言爲廣. 獨與天地精神往來而不敖倪於萬物, 不譴是非, 以與世俗處. 其書雖瓌瑋而連抃无傷也. 其辭雖參差而諔詭可觀. 彼其充實不可以已, 上與造物者遊, 而下與外死生无終始者爲友. 其於本也, 弘大而辟, 深閎而肆, 其於宗也, 可謂稠適而上遂矣. 雖然, 其應於化而解於物也, 其理不竭, 其來不蛻, 芒乎昧乎, 未之盡者.(「天下」)

 

자유롭고 걸림 없는 장자의 표현방법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장자의 표현방법은 약점도 있다. 여기에서의 지적처럼 조리가 미진하여 애매한 부분이 많이 있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5. 결 론

 

장자는 많은 이론들이 난무하고 많은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언어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그의 언어에 대한 관심은 이론적인 면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인 면에 관한 것이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말이란 무엇인가 또는 말이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떤 말이 훌륭한 말이며, 어떻게 표현을 하여야 올바른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언어의 실제적 기능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이 장자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언어의 한계와 잘못된 사용을 지적하고 그것을 벗어나야 할 것을 강조한다.

장자는 특히 도는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말 그 자체가 실제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적 경험도 언어에서 벗어나 있음을 강조한다. 언어가 바로 실제는 아니라는 것이 장자의 강조점이다. 이러한 비판으로 하여 장자는 언어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잘못된 언어 사용을 비판하고 언어를 절대화하는 것을 비판한다고 해서 장자가 언어의 적극적 기능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적극적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견해를 널리 세상에 알렸다. 그런데 그 표현 방법이 기존의 방법과는 다른 독특한 점이 있다.

도를 표현하는 장자의 언어는 불언지언(不言之言), 말과 침묵을 떠난 말, 망언(忘言)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우언, 중언, 치언으로 알려져 왔다. 특히 언어의 자유로운 사용이라고 할 수 있는 치언의 방법이 장자의 언어 사용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치언이라는 것은 결국은 도에 따른 언어 사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도이긴 하지만 도의 정신으로 또는 도의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한다면 도의 표현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장자의 주장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장자의 이상적인 언어는 바로 걸림이 없는 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참 고 문 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