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노장자

『莊子』의 神明에 대한 고찰

rainbow3 2019. 10. 1. 14:39


『莊子』의 神明에 대한 고찰         이 재 봉*

 

요 약 문

 

인간이 자연에 예속되던 시기에 자연과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진 것은 神(神들)이었다. 지적 수준이 발달하자 인간은 자연과 대등하거나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장자』에서는 초월적 神이 인간의 神으로 내재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곧 神은 인간생명의 본질적 요소로서 모든 인간에 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과거처럼 초월적 神의 의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神을 지키고[守神] 길러[養神] 완전하게 하는[全神] 것이다.

 

『장자』에서 神은 모든 생명활동의 기초가 되므로, 全神은 곧 생명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장수[盡年]’와 ‘온전한 지식(지혜)의 획득’으로 드러난다. 그 가운데 지식은 인간 생명활동의 본질적 요소이다. 온전한 지식은『장자』에서 특히 明이라는 개념으로 차별화되는데, 생명활동의 기초를 神이라 하면 이때의 神은 神明이 된다. 神明이라는 개념은 곧 인식의 측면에서 神의 본질적인 속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장자』에서 神은 인간생명의 본질적 요소이고, 明은 神의 본질적 요소이다. 인간이 온전한 지식으로서의 明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神明으로서의 神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인식의 측면을 강조할 때 神의 내재화는 곧 神明의 내재화인 것이다.

 

온전한 지식은 궁극적으로 道에 대한 인식이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道를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道는 천지만물의 존재근거이고 존재법칙이다. 천지만물을 지배하는 것은 과거에 초월적 神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인간이 자신의 神, 곧 神明을 통하여 道를 인식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에 관하여 자각적이고 능동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장자』에서 神을 이야기하는 것은 곧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神明은 神의 본질적 속성을 드러내는 관념이다. 따라서『장자』의 神明관념은『장자』의 생명사상을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 주요어: 莊子, 神, 神明, 明, 生命.

* 부산외국어대학교 영상미디어학과 교수.

 

 

1. 머리말

 

『장자』사상의 이상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속박되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곧 우리의 생명이 억압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해방1)을 추구하는 것이 곧『장자』사상의 요지인 養生이다. 양생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생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도가의 양생은 육체적 생명에 대한 집착과 유가의 도덕적 생명에 대한 강조를 함께 부정하고, 신체적 생명을 기초로 하지만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생명을 그 대상으로 한다.

 

『장자』에 의하면 모든 생명의 기초는 氣이므로 양생은 養氣로 이해될 수 있다.2) 하지만 氣에는 精粗의 차이가 있으며, 가장 미세한 차원의 생명을 神이라 한다. 이것이 곧 精神개념이다. 그러므로 양생의 궁극적인 내용은 養神이 되어야 한다.

한편『장자』는 인간생명을 形과 神의 요소로 설명한다. 따라서 양생은 養形과 養神을 포함하지만, 양생으로서의 養氣는 養形3)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養神으로 나아가야 한다.

 

養神을 위해서는 생명요소로서의 神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孔孟이나『노자』에서는 神개념이 전통적, 종교적 의미로만 사용되었으나,『장자』에서는 神개념이 생명의 본질적 요소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노자』의 道관념을 통한 세계에 대한 통일적 이해를 바탕으로 과거의 神관념을 새로이 규정한 것이다. 『장자』에서는 神의 성격을 규정하는 용어로서 精神과 神明이라는 개념이 함께 사용되고 있는데, 전자가 神의 존재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神의 기능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神明개념은 神의 원초적 의미를 잘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장자』의 神明관념에 대한 분석을 통해 원래는 종교적이던 神明관념이 어떻게『장자』에서 생명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神明관념은『장자』의 사상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봄으로써 『장자』의 神관념과 양생사상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물론 그 출발은 삶의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이다.
2) 養氣에 관한 이야기는『맹자』에도 등장하므로 당시에 흔히 접할 수 있던(유행하던) 양생의 주장임을 알 수 있다.
3)『莊子·刻意』, 吹呴呼吸, 吐故納新, 熊經鳥申, 爲壽而已矣; 此導引之士, 養形之人, 彭祖壽考者之所好也. 이하『장자』의 인용은 「편명」만 표기함.

 

 

2. 神, 神明

 

『장자』에서 생명의 요소인 形과 神을 포괄하는 생명의 기초적 요소는 氣이다.4)

氣의 거친 것은 形이 되고, 미세한 것은 神이 된다. 미세한 것은 순수한 것이고, 순수한 것은 본래 상태이고 참된 것이다.5) 따라서 神은 인간 존재에서 가장 깊은 층차에 있는 생명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4) 「至樂」,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知北遊」, 人之生, 氣之聚也.
5) 「刻意」, 純素之道, 唯神是守; … 故素也者, 謂其无所與雜也; 純也者, 謂其不虧其神也. 能體純素, 謂之眞人.

 

『장자』에서 神은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장자』「내편」에서 神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경우는 다음과 같다.

 

 

"(神人이) 神을 집중하면 사물이 재해를 입지 않고 풍년이 든다.6)
방금 저는 神으로써 (소를) 만나지 눈으로써 보지 않았습니다. 감각의 지각은 멈추고 神의 작용이 발휘됩니다.7)
지금 그대는 그대의 神을 밖으로 내돌리고 그대의 精을 힘들게 하며, 나무에 기대어 읊조리고 책상에 기대어 잠든다.8)
만약 나의 꽁무니를 수레바퀴로 바꾸고 神을 말로 바꾼다면, 나는 그것을 타고 다니면 되니 다른 탈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9)"

6) 「逍遙遊」, 其神凝, 使物不疵癘而年穀熟.
7) 「養生主」, 方今之時, 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8) 「德充符」, 今子外乎子之神, 勞乎子之精, 倚樹而吟, 據(槁)梧而瞑.
9) 「大宗師」, 浸假而化予之尻以爲輪, 以神爲馬, 予因以乘之, 豈更駕哉!

 

 

여기서 사용된 神은 정신, 의식이라는 뜻이다. 짐승의 경우에도 神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10)

그 밖에 내편 에서 神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는 전통적인 神관념, 곧 인간을 넘어서는 神관념으로 ‘신과 같다’, ‘신묘하다’, ‘신비하다’는 의미로 사용한다.11) 외·잡편 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神이라고 단독으로 쓰지 않고 精神, 神明이라 쓰기도 한다. 精神의 경우 「내편」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외·잡편」에서는 총 7회 등장한다.12)
앞에서 인용한 “外乎子之神, 勞乎子之精”(각주7)의 구절에서는 神과 精을 구분하여 따로 쓰고 있다. 外神과 勞精이다. 神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사물을 인식하고 차지하려는 것, 名利聲色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神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곧 精을 피로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精은 神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精神은 한 묶음이 된다. 神은 인간 생명에서 가장 미세한 영역에 속하는데, 神의 기초는 氣이고 氣의 미세한 것을 精이라 하므로 神은 精神이 된다.

 

10) 「養生主」, 澤雉十步一啄, 百步一飮, 不蘄畜乎樊中. 神雖王, 不善也.
11) “雖有神禹”(「齊物論」), “至人神矣”(「齊物論」), “鄭有神巫曰季咸, … 若神”(「應帝王」) 등이 그러하다.

12) “水靜猶明, 而況精神˙ ˙ !”(「天道」), “精神˙ ˙ 四達並流, 无所不極, …”(「刻意」),

“汝齊戒, 疏瀹而心, 懆雪而精神˙ ˙ , 掊擊而知! … 精神˙ ˙ 生於道, 形本生於精, …”(「知北遊」),

 “小夫之知, 不離苞苴竿牘, 敝精神˙ ˙ 乎蹇淺, … 彼至人者, 歸精神˙ ˙ 乎无始而甘瞑乎无何有之鄕.”(「列禦寇」), “獨與天地精神˙ ˙ ˙ ˙ 往來而不敖倪於萬物, 不譴是非, 以與世俗處.”(「天下」).

마지막의 天地精神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인간의 정신이다.

 

 

神明개념은 어떠한가? 먼저 神明의 원초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神은 원래 인간 외부의 神이었다. 종교적 숭배 대상으로서 神을 神明으로 부르는 것은 곧 神의 일차적인 속성을 明이라 하는 것이다.

神이라는 글자가 원래 의미하는 것이 日月星이 그 빛을 드리우는 것이라면 神이 明과 연결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明은 글자 자체가 의미하는 대로 해와달의 빛에 의한 밝음이다.13)

해와 달은 곧 밝은 것이며, 그 밝음[光明]은 생명과 생명활동의 기초로 간주된다. 특히 해의 광명은 곧 따뜻함[陽氣, 生氣]을 의미하여 생명의 원초적인 기초가 된다.

 

이와 같이 숭배대상으로서의 神은 원래 자연신이었으며, 자연신 가운데 태양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최고신으로서의 天神개념이 확정되었을 때 천신의 상징은 태양이었다.14)

그러므로 神을 神明이라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神明은 원래 인간을 넘어서는 숭배대상으로서의
神의 본래적 의미라 할 수 있다. 후대에 자연계 신들이 天혹은 天地로 통합되었을 때 神明은 주로 천지신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13) “‘밝을 명(明)’자의 옛 글자인 ‘囧’자의 갑골문 형태는 ‘밝음의 신(明神)’, ‘천지신명(天地神明)’과 관련된 상징을 상형한 것이라고 본다.” 우실하, 「삼태극(三太極)/삼원태극(三元太極) 문양의 기원에 대하여」,『정신문화연구』제29권 제2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15쪽.
14) “神明(‘神明은 해이다’ 『漢書·郊祀志』 張晏의 注)·神(고문에는 ‘不+旬+旦’로 쓰이며 旦을 따른다. 그리고 旦, 神두 자는 고대에 통용되었다. 神明또한 ‘旦明’이라 한 것이 『禮記·郊特牲』에 보인다.

일출을 旦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神자의 본의 또한 태양의 존칭에서부터 나왔다)·皇·昊·帝및 금문과 『상서』·『시경』 중에 모두 자주 보이는 ‘丕顯’·‘丕顯大神’·明德·明明德등은 모두 태양신의 존칭이나 찬양의 말이다.” 何新,『神의 起源』, 洪熹역, 42쪽.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神들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각자 힘의 범위 내에서 자연계와 인간계의 일들을 결정하므로 사태의 진행과정을 알고 있다. 따라서 神들은 인간에게 앞일을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神은 종교적 의식[巫術]의 대상이 되며, 종교적 의식의 주된 내용은 앞일을 점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神明의 明은 神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이것이 아마 천지자연의 神들을 神明이라 부르게 된 이유일 것이다. 이와 같이 神明은 처음부터 인간의 중요한 지식의 원천이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을 神明이라 하면 역시 그 실체의 본질적 속성을 明이라 하는 것이다.

 

물론 神明이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神들이 위에서 인간 세상을 굽어본다는 생각과도 관계있을 것이다. 보는 것은 곧 아는 것의 출발이다. 달리 말해, 明이 태양(일월 혹은 日月星)의 빛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밝음은곧장 보는 것, 시각과 관계된다. 따라서 明의 일차적 의미는 눈이 밝은 것이 된다.

 

明의 의미를 일단 앎으로 규정하면, 그것은 인간의 무지(無知)에 대한 상대개념이 된다. 그러므로 神을 神明이라 부르는 것은 인간은 알지 못하지만 神은 안다는 것이다. 인간은 神의 영역, 역할, 작용을 알지 못하므로, 神의 전통적인 속성은 神秘, 神妙莫測이 된다.

 

 

3. 神(神明)의 내재

 

이와 같이 자연과 인간사회를 결정하는 중요한 정보들에 대한 지식은 원래 외부의 神으로부터 오는 것이었지만(占卜이나 接神을 통해), 점차 인간의 지식이 늘어나고 인식능력이 확대되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인식 수준이 깊어짐에 따라 인간 스스로가 인식 주체로 등장한다. 물론 무당(사제)에 의해 전달된 정보들의 신뢰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가의 경우 天혹은 天命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가지고 이러한 전환을 설명할 수 있다. 과거 천명에 대한 인식은 무당이 담당하던 것이지만, 孔子 때가 되면 한편으로 역사적 경험을 학습하고 한편으로 사유능력을 극
대화시킨 지식인이 그것을 담당한다. 특히 유가에서는 자연계의 운행에 관한 지식은 포기하고 인문적 지식을 관심의 주대상으로 삼아, 인간의 삶과 관계된 지식 및 판단은 이제 인간들이 자신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군자는 ‘知命’해야 한다고 하였다.15)

하지만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어서 孔子도 나이 50이 되어서야 ‘知天命’했다고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天을 알 수 있는가?

孟子는 盡心-知性-知天의 도식을 통하여 天이 性으로 내재되어 있으며, 心을 통하여 天을 알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16) 天의 의지를 더 이상 天을 향하여 물어볼 필요가 없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그 선한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선한 마음은 孟子의 표현에 따르면 本心, 良心, 仁義之心, 四端之心이다.

둘째,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17) 心의 사유능력(도덕적 판단능력)을 다하는 것이다.

 

15)『論語·季氏』, 君子有三畏; 畏天命, … 小人不知天命而不畏也; 『論語·堯曰』,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16)『孟子·盡心上』,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17)『孟子·告子上』, 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

 

 

이와 같이 유가에서는 天으로 귀결되는 神의 의지[天命]를 확인하기 위해 무당[巫術]에 의존하던 단계를 극복하고 인간의 자각적 사유능력, 도덕적 실천능력, 곧 心의 기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도가의 경우는 어떠한가?

 

『노자』에서는 인간은 道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외부의 神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등장하고 있다.18) 모든 것은 법칙의 지배를 받으므로 인간은 그 법칙을 인식하면 된다. 더 이상 神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 아울러 인간과 神은 동일한 근원에서 동일한 생명력을 부여받아 생겨나므로, 인간은 神과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19)『노자』에서는 造化의 원리, 생명의 원리로서의 ‘도’를 통해 과거의 종교적 사고방식을 부정하는 데 주안점이 있기 때문에 神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인간생명을 설명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장자』에서는『노자』에서와 달리 인간의 생명, 정신작용을 표현하기 위해 神이라는 용어를 적극 사용한다. 이것은 유가[孔孟]와도 확연히 다른 태도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장자』가 그 사상배경에 있어 巫術적 전통과 상당히 밀접하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장자』사상은 기본적으로 楚를 배경으로 하는데, 楚는 巫風이 우세하던 곳이다. 이 점에서 유가사상이 대표하는 북방의 周문화와 다르다.20)

 

巫術에서 神의 의지를 파악하는 방법은 곧 神人합일하는 것, 곧 나를 비우고 神을 맞이하는 것이다.21) 接神을 통하여 神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세계는 통일적이라는 철학적 사고를 거쳐 인간이 곧 神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장자』에 등장하는 神人개념이 곧 그것이다. 神人은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로서 과거 숭배대상이었던 神이 가지는 능력을 체현한다.

 

18)『老子·60장』, 以道莅天下, 其鬼不神; 非其鬼不神, 其神不傷人. 이하『노자』의 인용은 「~장」으로 표기.
19) 「39장」, 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 萬物得一以生.
20)『荀子』에는 神明개념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如是, 百姓貴之如帝, 高之如天, 親之如父母, 畏之如神明.”(「彊國」), “心者形之君也, 而神明之主也, 出令而無所受令.”(「解蔽」) 등인데, 두 인용문에서『순자』의 神明관념이 숭배대상으로서의 신명과 인간의 생명 요소로서의 신명을 포괄하여『장자』의 신명관과 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자 사상의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21) 巫術에는 나에게 신이 들어오는 것과 내가 신에게로 나아가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이와 같이『장자』에는 神人(혹은 眞人, 至人)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장자』전반에 걸쳐 오히려 강조되는 것은 養生을 통하여 全生保眞하는 것이다. 비록 존재의 근원이나 우주와 하나됨을 이야기하지만, 그 결과는 우주를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를 중심으로 하는 현실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장자』「내편」에서는 존재(생명)의 실상을 밝히는 내용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면 결국 양생도 知의 문제에서 시작한다.

 

『장자』에서는 形神개념을 가지고 인간생명을 설명하고 있는데22) 그것이 무의미하지 않다면, 달리 말해서 心身이나 形心구분과 달리 心대신에 神개념을 부각시키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다면, 그 神은 결국 心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이 될 것이다. 그 동안 心은 인간의 위대함이나 인간다움을 보증하는 인간적 능력이었으나, 『장자』에 이르면 그러한 心은 오히려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23)

그것은 특히 유가의 도덕적 판단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강하다 할 것이다. 물론 신체를 중심으로 하는 욕망이
心의 영역에 포함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과거 인간은 자연에 예속되었지만, 인간적 능력이 늘어남으로써 자연에 대한 예속 관계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제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적 한계를 넘어섬으로써 위대한 자연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대함을 보증하던 기존의 心의 능력을 편협한 것으로 규정하고 心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현상의 기초가 되는 개념으로 神을 제시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孔孟이나『노자』에서 神은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22) 「外·雜篇」에서 주로 확인된다.

“无視无聽, 抱神˙ 以靜, 形˙ 將自正. … 汝神˙ 將守形˙ , 形乃長生.”(「在宥」),

“形˙ 體保神˙ , 各有儀則, 謂之性.”(「天地」),

“汝方將妄神˙ 氣, 墮汝形˙ 骸, 而庶幾乎!”(「天地」),
“勞君之神˙ 與形˙ .”(「徐无鬼」).
23) “『장자』에 나오는 心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成心, 師心, 不肖之心, 賊心, 機心, 滑心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일체의 기교가 모두 이런 종류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런 의미의 心은 여러 욕망과 잡념에 이끌려 삶에 나타나는 혼란의 근원이 되고 더 커지면 정신적인 질곡이 된다.

다른 하나는, 常心이나 靜心처럼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 모든 창조적 가치의 근원이 되는 이런 의미의 心은 여러 잡념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속세의 구속을 초탈하였으며, 만물의 본질을 관조하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아무런 구속이 없는 경지에서 노닐 수 있다.” 陳鼓應,『老莊新論』, 최진석 옮김, 374-375쪽.

 

 

이와 같이『장자』에서 神의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고, 생명의 해방을 위해 올바른 지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면,『장자』에서 사용된 神明의 개념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神明의 明개념은 곧장 올바른 지식이라는 의미로 연결되기 때문이다.『장자』에서 인간생명의 본질적 요소를 神이라 하는 것은 곧 인간이 神과 같은 능력을 가진다는 말이 되고, 神明이라 표현하는 것은 곧 인간이 神과 같은 인식능력을 가진다는 말이 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神의 능력은 造化의 능력[能]과 인식의 능력[知]을 포괄한다. 神明으로서의 神이 이제 인간에 내재하게 되면, 인간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인식한다.

 

우리는『管子』에서 ‘인간의 인식이 神에서 유래한다.’, ‘그 神이 인간에 깃든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은 외부의 神에 의한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하는 생명요소에 의한 능동적인 것이다.’라는 일련의 사고방식들을 확인할 수 있다.

 

 

"욕심을 비우면 神이 들어와 머물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것을 소제하면 神이 머물게 된다.

… 세상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精(정기)이다. 욕심을 제거하면 소통되고[宣], 소통되면 고요하다. 고요하면 정미하고, 정미하면 (상대적 세계로부터) 독립한다. 독립하면 밝아지고[明], 밝아지면 신령하다[神]. 神이라는 것은 지극히 귀한 것이다.

… ‘깨끗하지 않으면 神이 머물지 않는다.’24)"

24)『管子·心術上』,

虛其欲, 神將入舍; 掃除不潔, 神乃留處.

… 世人之所職者精也, 去欲則宣, 宣則靜矣; 靜則精, 精則獨立矣; 獨則明, 明則神矣, 神者至貴也. 故館不辟除, 則貴人不舍焉,

故曰, ‘不潔則神不處’.

 

 

神은 인간 속에 들어와 머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한편으로 절대의 경지가 되면25) 밝아지고, 밝아지면 神과 같아진다고 하여 明과 神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25) “『장자』는 ‘獨’의 관념을 가장 중시한다. 도에 대한 노자의 형용은 ‘獨立而不改’인데, ‘독립’은 곧 일반 인과계열 위에 있어, 다른 것과 對待하지 않으며, 기타 인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노자가 말하는 것은 객관적 도이고, 장자가 가리킨 것은 사람이 도를 본 이후의 정신경계이다.”

徐復觀,『中國人性論史』, 390쪽, 陳鼓應,『莊子今註今譯』 上, 204쪽 재인용.

 

 

"뜻과 마음을 전일하게 하고 이목을 단정하게 하는 것이 먼 일을 아는 방법이다. 능히 전일할 수 있는가?

점을 치지 않고도 길흉을 알 수 있는가? 능히 그치고 마칠 수 있는가?

능히 남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 답을 얻을 수 있는가?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여도 얻지 못하면 귀신이 가르쳐 줄 것이다. 그것은 귀신의 힘이 아니라, 精氣가 지극하기 때문이다.26)"

26)『管子·心術下』,

專于意, 一于心, 耳目端, 知遠之證. 能專乎? 能一乎?

能毋卜筮而知凶吉乎? 能止乎?

能已乎? 能毋問于人而自得之于己乎?

故曰, 思之. 思之不得, 鬼神敎之. 非鬼神之力也, 其精氣之極也.

 

 

인간은 사유작용을 통하여 앞일을 미리 알 수 있으며, 그것은 귀신이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精氣가 지극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정기는 곧 생명요소인데, 곧『장자』의 精神의 기초이다. 앞에서는 神이 깃든다고 하고, 여기서는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인간에 내재하는 정기가 작용한 결과라 하였으니, 곧 전통적인 神관념이 인간에 내재화되어 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장자』에서 神이 인간생명의 본질이자 인식의 주체가 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도가적 전통(만물의 공통적 근원을 道혹은 氣라고 하는 것)에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천지(자연계)에 神明이
있다면 인간에게도 神明이 있다. 천지가 神에 의해 움직인다면(신 혹은 신들이 천지자연을 지배한다면),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것도 神이다. 그 결과 전통적인 神관념이『장자』에서 인간 생명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장자』에서 사용된 神明의 구체적인 용법을 살펴보기로 하자.

 

 

4. 神明의 용법

 

『장자』에 나타나는 神明에 대한 언급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장자』에서 神明이라는 단어는 6회 등장하는데, 「제물론」 1회, 「지북유」 1회, 「천하」 4회 등이다.

 

 

"神明을 힘들게 하여 (모든 것을) 하나로 이해하려 하지만, 그것들이 원래 같음을 모르는 것을 朝三이라 한다.27)"

27) 「齊物論」, 勞神明爲一, 而不知其同也, 謂之朝三.

 

여기서 神明은 사유기능의 주체로서의 정신이다.

 

 

"저 神明[彼神明]의 지극한 정밀함에 합하고, 저 변화[彼百化]에 참여하지만, 만물의 생사와 다양성은 아무도 그 근거를 모른다. 무성한 만물은 예로부터 그렇게 존재하였다.28)"

28) 「知北遊」, 合彼神明至精, 與彼百化, 物已死生方圓, 莫知其根也, 扁然而萬物自古以固存.

 

‘彼神明’의 彼는 天혹은 천지를 가리키고, ‘彼百化’의 彼는 만물을 가리킨다.29) 따라서 神明은 곧 천지의 신명이다. 합하고 참여하는 것은 인간의 神明이다.

29) 林希逸說: 「上‘彼’字, 在天底; 下‘彼’字, 在物底.」 王先謙說: 「上‘彼’, 彼天地; 下‘彼’, 彼物.」. 陳鼓應, 『莊子今註今譯』上, 616쪽.

 

 

"옛사람은 (道術의) 전체를 다 갖추었다. 神明에 짝하고 천지를 본받아, 만물을 기르고 천하를 조화시키며 백성에게 은택을 끼쳤다.

… (한 부분에만 능한 선비는) 천지의 아름다움을 나누고, 만물의 이치를 쪼개며, 옛사람의 온전함을 살피지만, 천지의 아름다움을 완비한 자가 적으면서도 서로 神明하다 한다.30)"

30) 「天下」, 古之人其備乎! 配神明, 醇天地, 育萬物, 和天下, 澤及百姓,

… 一曲之士也. 判天地之美, 析萬物之理, 察古人之全, 寡能備於天地之美, 稱神明之容.

 

여기서는 神明과 천지를 나누고 있지만, 그 뒤의 만물과 천하의 경우에도 보통 천하만물이라 불리므로, 神明과 천지도 천지신명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이다. 神明과 천지를 나눠서 언급한 것은『장자』식의 形神이분법에 따라 神을 더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이라 할 수 있다.31) 뒷부분의 神明은 서술어로 쓰인 것인데, ‘신명하다’, ‘천지신명과 같이 지혜롭다’는 의미이다.

31) 천지와 신명을 구분한 것은 다음 구절들에서도 유사한 사고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彼方且與造物者爲人, 而遊乎天地之一氣.”(「大宗師」) 造物者는 神明에 해당하고,天地는 一氣로서 규정된다. “吾與日月參光, 吾與天地爲常.”(「在宥」) 일월과 천지를 함께 들었는데, 일월은 神明의 원래 의미에 충실한 것이다.

 

 

"근본[本]을 정미하다 여기고, 형체 가진 것[物]을 거칠다고 여기며, 인위적인 노력[有積]을 부족하다고 여겨서, 맑게[澹然] 홀로 神明과 머무니, 옛날의 道術에 이와 같은 것이 있었다.32)"

32) 「天下」, 以本爲精, 以物爲粗, 以有積爲不足, 澹然獨與神明居, 古之道術有在於是者. 關尹老聃聞其風而悅之.

 

여기서 神明은 物과 有積과는 거리가 있고 本에 가까운 것이므로 마땅히 천지신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노자』식으로 엄밀히 말하면, 천지신명도 有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만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근본에 속하는 것이다. 이곳의 ‘與神明居’는 앞 글의 ‘配神明’과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과거에는 神明과 합하기 위해 齋戒를 포함한 일정한 종교적 의식이 요구되었는데, 이제는 그 조건이 여기서 澹然으로 표현되는 虛靜의 상태가 된다.

 

 

"황홀하여 모습이 없고, 변화하여 고정됨이 없이, 나고 죽음에 천지와 함께 존재하고, 神明과 함께 간다. 황홀하고 아득하게 어디로 가는가. 만물이 펼쳐지지만 어디로 돌아가는지 모른다. … 홀로 천지의 精神과 왕래하지만 만물을 무시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며,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33)

33) 上同, 芴漠无形, 變化无常, 死與生與, 天地竝與, 神明往與! 芒乎何之, 忽乎何適, 萬物畢羅, 莫足以歸,

… 獨與天地精神往來而不敖倪於萬物, 不譴是非, 以與世俗處.

 

여기서는 천지가 먼저 나오고 神明이 나중에 나오지만, 뒤에서 天地精神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精神이 곧 神明과 같은 뜻이라면 천지신명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상이『장자』에서 神明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구절들이다. 그 의미는 인간의 정신, 천지신명, 신명하다(신명과 같다) 등이다. 「내편」에서는 정신이라는 뜻으로 쓰이고(1회), 「외·잡편」에서는 천지신명이라는 뜻으로쓰였는데(5회), 그 사용 횟수만 가지고 보면『장자』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래 원시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던 神明 관념이 도가사상의 체계 속에서 한편으로는 인식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의 정신작용으로 내재되고, 한편으로는 천지만물을 지배하는 造化의 원리로 이해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神明은 精神이라는 개념과 함께『장자』에서 神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장자』사상은 이미 기본적으로 존재의 근원, 조화의 원리, 생명의 원리인 道를 전제하여 원시종교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천지신명이라고 할 때에도 그것은 화복을 초래하는 원시종교의 神明은 아니다. 세계는 道혹은 氣에 의해서 통일적으로 설명되므로, 천지에 神明이 있다면 인간에게도 神明이 있다. 천지의 神明이 인간에 내재한다고 할 때, 그 神明은 인간의 지식, 지혜로 드러난다. 따라서 老莊에서는 明이라는 개념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는데, 그 용법은 神明관념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곧,『장자』에서 神明이란 용어가 비중있게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비록 明이라는 용어만 사용할 경우에도 그 개념은 神明이란 개념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장자』에서는 神明이라는 관념을 神(생명의 본질, 정신)과 明(생명작용, 인식능력)으로 분리하여 사용함으로써 그 종교적 성격을 벗고 합리적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장자』에서 우리는 神과 明을 구분하는 용법을 볼 수 있다.

 

"천하에 方術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모두 자신의 성취에 부족함이 없다고 여긴다.

‘옛날의 소위 道術은 과연 어디 있는가?’ ‘없는 곳이 없다.’ ‘神은 어디서 내리는가? 明은 어디서 나오는가?’ ‘聖은 생겨난 바가 있고, 王은 이루어진 바가 있는데, 모두 하나에서 근원한다.’

… 옛사람은 완전히 갖추었으니, 神明에 짝하고, 천지를 법하며

… 內聖外王의 도가 어두워 밝게 드러나지 못하고, 막혀서 발휘되지 못하여 …34)"

34) 「天下」, ,“天下之治方術者多矣, 皆以其有爲不可加矣.

古之所謂道術者, 果惡乎在? 曰:‘无乎不在.’ 曰:‘神何由降? 明何由出?’

‘聖有所生, 王有所成, 皆原於一.’

… 古之人其備乎! 配神明, 醇天地,

… 是故內聖外王之道, 闇而不明, 鬱而不發, 天下之人各爲其所欲焉以自爲方.

 

 

“道術은 어디 있는가? 없는 곳이 없다.”는 구절은 지북유 편의 “道는 어디 있는가? 없는 곳이 없다.”35)는 구절을 연상시킨다.36) 따라서 “神과 明이 어디서 내리고,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질문의 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神과 明을 구분한 것은 뒤이어 나오는 聖과 王의 구분에 상응하는 것이다. 곧 神聖과 明王이다. 도술을 이야기하므로 聖王을 이야기한 것이다. 도술은 곧 ‘內聖外王의 도’이다. 질문의 답은 ‘하나’에 근원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곧 존재의 근원, 생명의 원리인 ‘도’이다.

 

일단 여기서 神과 明은 내외의 구분은 있지만, 둘 다 인간에 속하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다시 ‘配神明’이라 하였으며 그 神明은 천지의 神明이므로, 인간의 神과 明은 곧 천지의 神明에 상응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37) 그리고 降, 出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것이 과거의 종교적 神明관념에 기원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종교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인간이 神明한 것은 降神혹은 接神의 결과이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의 神明이나 천지의 神明이나 모두 공통의 근원을 가진다. 천지의 神明과 짝하는 것은 공통의 근원에서 유래한 인간의 神明을 충분히 실현한 결과이다.

 

그것이 천지의 神明이거나 인간의 神明이거나 간에 神明의 원래 의미를 가지고 말하면, 明은 神의 작용이다. 곧 神은 體가 되고, 明은 用이 된다.38)

 

35) 「知北遊」, 東郭子問於莊子曰: ‘所謂道, 惡乎在?’ 莊子曰: ‘無所不在.’
36) “‘无乎不在’는 道術의 運行을 가리켜 말한다. 「지북유」의 ‘無所不在’가 道體의 流佈를 專言하는 것과 다르다. 대개 운행하는 것은 聖人이 道의 원칙을 가지고 運하는 사물이고, 流佈하는 것은 道體가 사물에 散在하는 표현이다. 두 구절의 文은 아주 같지만 義는 서로 다르다.” 蔣錫昌, 『莊子哲學』, 188쪽.
37) 蔣錫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神何由降? 明何由出?) 明亦神也. 分言之, 曰神曰明, 合言之, 亦曰神明. 神明者, 卽自然之稱.”, “(配神明, 醇天地;) 此言古之道人與自然爲配合, 與天地爲一體.” 위의 책, 188, 195쪽. 神明을 自然으로 해석하고 있다.
38) “林雲銘說: ‘神者, 明之藏. 明者, 神之發. 言道術之極也.’(『莊子引』),

梁啓超說: ‘神明猶言智慧.’(『諸子考釋』內「莊子天下篇釋義」),

唐君毅說: ‘以神明言靈臺靈府之心, 尤莊子之所擅長. 神與明之異, 唯在神乃自其爲心所直發而說, 明則要在自其能照物而說, 故明亦在神中.’(『中國哲學原論』4 7쪽)” 陳鼓應, 『莊子今註今譯』下, 933-934쪽.

 

 

구태여 神과 明의 의미를 구분한다면, 神은 造化의 능력(현상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능력)이고, 明은 인식의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열어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고르지 않은 것을 가지고 고르게 하면 그 결과는 고르지 않다. 증명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증명하려면 그 결과는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明者는 부림을 받고, 神者는 징험한다. 明이 神을 이길 수 없은 지 오래 되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소견에만 의지하여 …39)"

39) 「列禦寇」, 以不平平, 其平也不平; 以不徵徵, 其徵也不徵. 明者唯爲之使, 神者徵之. 夫明之不勝神也久矣, 而愚者恃其所見入於人, 其功外也, 不亦悲乎!

 

여기서도 역시 明과 神을 구분하고 있으며, 동시에 神이 明보다 고차원이라 주장한다. 이때 明은 인간의 지력을 사용하는 것이고, 神은 神人이라고하는 경우처럼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우주적 차원에 진입한 것이다. 지력을 사용하는 것은 제물론 에서 말한 ‘勞神明’하는 것이다. 전자를 인위의 영역이라 하면, 후자는 자연의 영역이다.『장자』식으로 말하면 明은 人이고 神은 天이다. 이상과 같이 神明을 나누어 각각 ‘內聖外王’과 연결하거나, 神이 明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 일반적인 용법의 한 단면을 짐작하게 한다.

 

이상에서『장자』에서의 神明에 관한 용법을 살펴보았는데, 일단 다음과같이 정리할 수 있다.

원래 종교적 의미를 가지던 神明관념은 여전히 천지신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존재의 근원, 생명의 원리인 道 관념에 종속되어 종교적 의미는 탈색되어 造化의 원리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으며, 아울러 인간에 내재하는 정신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神明이라는 관념이 자주 쓰이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그 원래의 종교적 의미가 강하기 때문일 수 있는데, 따라서 神과 明관념이 분리되어 明관념은 인간의 인식능력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神明이라는 관념은 종교적 전통에서 철학적 전통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의미와 역할을 가지게 되었다.

 

 

5. 明의 의미

 

이제는 明의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明이라는 관념이 부각되는 것은 철학적 전통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明을 神明관념과 연결시킬 때,『장자』에서 인식(지식과 지혜)은 생명의 깊은[精] 영역인 神의 작용이고, 그 인식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明이라 한다.『장자』에서 인식과 관련하여 明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일반적인 의미로서 ‘알다’, ‘뚜렷이 알다’, ‘뚜렷하다’는 의미로도 쓰이지만, 특별한 의미를 가질 때는 단순한 지식보다 더 높은(깊은) 인식, 혹은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가리킨다.

『장자』에서의 明관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노자』의 明관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을 알면 지혜롭고[智], 자신을 알면 밝다[明].40)"

40) 「33장」, 知人者智, 自知者明. 여기서 ‘知人’은 다분히 유가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論語·顔淵』, 問知. 子曰: ‘知人.

 

智와 明을 구분하여, 明을 智보다 차원이 높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41) 하지만 明이 진정으로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41) “옛날에 도를 잘 실천하는 사람은 백성을 밝게 하지 않고 어리석게 한다.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65장」) 여기서 明은 愚와 상대가 되므로 일반적인 지식·지혜라는 뜻이다.

 

 

"생명을 회복하는 것(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영원함[常]이라 한다. 영원함을 알면 밝고, …42)
(氣의) 조화[和]를 알면 영원하고, 영원함을 알면 밝다.43)"

42) 「16장」,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43) 「55장」, 知和曰常, 知常曰明.

 

明은 常을 아는 것이다. 영원한 것[常]은 곧 道이거나 ‘도’에 따르는 것이고, 따라서 常은 常道, 영원함의 원리이다. 常을 강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노자』와 그 후의『장자』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곧 생명의 지속이다. 이와 같이 하여 明은 일반적인 지식을 넘어서는 근원적, 궁극적 지식을 그 내용으로 한다. 진정한 지식 혹은 지혜는 ‘도’(常道), 생명의 원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52장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다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 한다. 그 빛을 사용하여 그 밝음에 복귀하여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는 것을 ‘영원함의 원리를 따르는 것’[習常]이라 한다.44)"

44) 「52장」,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謂習常.

 

작은 것을 보는 것은 일차적으로 시각의 영역이고 또한 明의 일차적 의미이기도 하지만,45) 여기서는 마지막에서 常을 이야기하였으므로 知常의 明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작은 것은 ‘도’를 가리킨다.46) 한편 明은 새로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복귀’하는 것이라 하였다.47)

인간의 생명(『장자』에서는 神)은 원래 밝다. 光은 神의 光이다. 그 빛을 밖(현상세계)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고, 존재의 근원으로 향하게 할 수 도 있다. 36장 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45) 「外物」, 目徹爲明.
46) 「32장」, 道常無名, 樸, 雖小, 天下莫能臣也.
47) 본래는 완전하다는 것은 도가의 기본관념이기도 하지만, 유가의 경우에도 맹자의 性善이나『대학』의 明明德의 주장은 같은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장차 수축시키고자 하면 반드시 펼치고, 약하게 하려 하면 강하게 하고, 폐하려 하면 일으키고, 뺏고자 하면 준다. 이를 아는 것을 ‘은미한 것에 밝음’[微明]이라 한다.48)"

48) 「36장」, 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擧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

 

張, 强, 擧, 與는 歙, 欲, 廢, 奪의 전조, 기미이다. 어떤 현상은 그것이 결과로 드러나기 전에 이미 그 원인이 존재한다. 보통 사람들은 결과로 드러나야 알지만, 지혜로운 이는 미리 안다. 이와 같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 기미를 통해 미리 아는 것을 微明이라 한다.

微는 감각적 인식을 넘어서는 것이므로49) 微明은 결국 道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反者, 道之動.”( 40장 )의 反에 대한 인식이다.

그 밖에 『노자』에서 明을 언급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聖人은 항상 사람을 잘 구하므로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항상 사물을 잘 구하므로 사물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밝음을 계승하는 것’[襲明]이라 한다.50)"

50) 「27장」, 善行無轍迹. 善言無瑕讁. 善計不用籌策. 善閉無關楗而不可開. 善結無繩約而不可解.
是以聖人常善救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

 

천하만물을 잘 구하고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곧 만물을 낳고 기르는 道의 작용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襲明은 곧 ‘도’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이다.51)

51) 奚侗,『老子集解』: “襲, 因也. … ‘襲明’謂因順常道也.” 汪福潤點校輯譯,『老子註三種』, 95쪽.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고, …52)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은 밝지 못하고, …53)"

52) 「22장」, 不自見, 故明; 不自是, 故彰; 不自伐, 故有功; 不自矜, 故長.
53) 「24장」, 企者不立, 跨者不行,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 .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밝다’는 말을 56장 의 “知者不言, 言者不知.”와 관련지어 이해하면, 스스로 안다고 하는 사람은 진정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한편 明은 자연히 그 밝음이 드러나는 것이지 억지로 드러낼 수 없다는 뜻도 될 것이다.54) 곧 밝음의 본체가 확립되면 작용으로서의 밝음은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54) 自見의 見을 본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夫目至明而不自見. 使目而自見則不明矣.” 魏源撰,『老子本義』:『諸子集成』 3, 上海書店.

“韓非云:  ‘能並視, 故曰不見而明.’” 馬其昶, 『老子故』; 汪福潤點校輯譯, 『老子註三種』.

하지만 明은 뒤이어 彰, 有功, 長등과 병렬되므로 지혜의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상에서처럼『노자』에서 이야기하는 明은 常(「16장」, 「55장」)에 대한 인식이고, 微(「27장」), 小(「52장」)에 대한 인식이다. 이 특징들은 곧 존재의 근원, 생명의 원리로서의 道에 연결되므로 明은 곧 ‘도’에 대한 인식이다.
따라서『노자』에서 明은 감각적 인식과 일반적인 지혜를 넘어서는, 근원적인 인식·지혜를 가리킨다. 한편 ‘明에 복귀한다’[復歸其明](「52장」) 하였으므로 明은 본래적인 것인데, 그것은 곧 생명의 근원인 ‘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생명의 알맹이[一]를 얻은 모든 인간은 明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55) 明을 실현하는 방법은 ‘도’와 하나되는 것, ‘도’를 지키는 것56)이다.

55) 「39장」, 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一也).
56) 「52장」, 旣知其子, 復守其母”; 「32장」, 道常無名, 樸, 雖小, … 若能守之;

「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若能守之,

 

 

이제 이와 같은『노자』의 明에 대한 언급을 기초로『장자』의 明에 관해 살펴보자. 먼저『장자』의 독특한 인식방법으로 이해되는 ‘以明’의 주장이 있다.

 

 

"道는 작은 성취에 가려지고, 말은 화려함에 가려진다. 그러므로 儒墨의 시비가 있으니, 이로써 저쪽에서 그르다는 것을 옳다 하고, 저쪽에서 옳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한다.

그 그르다는 것을 옳다 하고 그 옳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하는 것은 ‘明으로써 판단하는 것’[以明]만 못하다. 모든 것은 저것이 되기도 하고, 이것이 되기도 한다.

… 是가 있으면 非가 있고, 非가 있으면 是가 있다. 따라서 聖人은 이 길을 따라가지 않고, 하늘에 비춰본다[照之於天].

… 피차가 서로 대립하지 않는 것(피차의 관계가 해소되는 것)을 도추(道樞)라 한다.

 옳다는 주장도 무궁하고, 그르다는 주장도 무궁하므로 ‘以明’하느니만 못하다.57)"

57) 「齊物論」, 道惡乎隱而有眞僞? 言惡乎隱而有是非?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而不可?

道隱於小成, 言隱於榮華. 故有儒墨之是非, 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 則莫若以明. 物無非彼, 物無非是.

…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是亦一无窮. 非亦一无窮也. 故曰莫若以明.

 

우리의 삶에서 행동지침이 되는 是非는 彼此의 관계에 따라 달리 규정되므로, 피차라는 상대적 관계에서 벗어나야 사태의 진상, 사물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 그 방법을 ‘以明’이라 하였으므로 ‘以明’은 일단 부분으로서의 상대적 관계에서 벗어나서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참된 인식을 획득하는 것이 明인데, 여기서는 그 방법으로서 明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以明’이라고 할 때는 明이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以明’의 明은 결과가 아니고 수단, 방법이다. 그렇다면 ‘以明’을 이야기할 때는 먼저 明에 대한 규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장자』에서는 明에 대해 따로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장자』가『노자』에서 언급한 明을 전제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明은 곧 知常이고, 常은 곧 존재의 근원, 생명의 원리로서의 道[常道]이거나, 그 ‘도’에 따른 결과를 의미하므로, ‘以明’은 곧 ‘도’의 관점에서 사태, 사물을 비춰보는 것이다. ‘도’의 관점에서
는 상대적인 세계가 사라진다.58)

‘도추’(道樞)라는 표현이 그것을 나타낸다. ‘以明’은 곧 근원, 전체(통일성, 하나),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판단하는) 것이다.59)

 

58) 「齊物論」, 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無物不然, 無物不可. 故爲是擧莛與楹, 厲與西施, 恢恑憰怪, 道通爲一˙ ˙ ˙ ˙ . 其分也, 成也; 其成也, 毁也. 凡物無成與毁, 復通爲一˙ ˙ ˙ ˙ . 唯達者知通爲一˙ ˙ ˙ , 爲是不用而寓諸庸; 因是已. 已而不知其然, 謂之道.
59) 「秋水」편의 ‘以道觀之’가 곧 그것이다.(“以道觀之˙ ˙ ˙ ˙ , 物无貴賤; 以物觀之, 自貴而相賤; 以俗觀之, 貴賤不在己. 以差觀之, 因其所大而大之, 則萬物莫不大; 因其所小而小之; 則萬物莫不小;”)
勞思光은 ‘以明’을 ‘虛靜한 마음으로 관조한다’로 풀이하였으며, 陳鼓應은 ‘明靜한 마음으로 관조한다’고 풀이하였다. 陳鼓應,『莊子今註今譯』上, 60쪽 참조.

 

 

‘以明’은 또한 ‘하늘에 비추어 본다’[照之於天]는 말과 같은 뜻이 된다.60)
天은『장자』에서 일반적으로 自然의 뜻으로 풀이되지만, 그 전통적 의미는 만물을 낳는 존재의 근원이고, 모든 것을 덮는다는 의미에서 전체라는 뜻을 가진다.『노자』에서도 ‘天道’, ‘天之道’라 하여 天에 ‘도’의 체현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했었다. 따라서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자연에 비춰 본다’고 말하기보다는 ‘근원과 전체의 입장에서 비춰 본다’고 풀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天을 본래, 본연의 뜻으로 풀이하면 ‘照之於天’은 또한 ‘본래의 밝음에 비춰 본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明이 본래의 것임을 이미 보았다.

 

60) “勞思光은 말하기를; ‘照之於天’과 ‘莫若以明’은 서로 유사하다. ‘明’은 자각의 朗照를 가지고 말한 것으로, 成見의 封閉性을 배척하는 것이다. ‘天’은 超驗意義의 주체를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 인위의 조건성을 배척하는 것이다.” 陳鼓應, ,『莊子今註今譯』上, 63쪽.

 

 

「제물론」에서는 ‘以明’에 대해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모든 것은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없이 다시 통하여 하나가 된다. 오직 통달한 자만 모든 것이 통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안다.

… 이미 그러하지만 왜 그러한지 모르는 것이 ‘도’이다.

…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지 않고 사물의 고유한 쓰임새에 의존하는 것, 이것을 ‘以明’이라 한다.61)"

61) 「齊物論」, 凡物無成與毁, 復通爲一. 唯達者知通爲一, 爲是不用而寓諸庸; 因是已. 已而不知其然, 謂之道. … 其好之也, 欲以明之. 彼非所明而明之, 故以堅白之昧終.

… 物與我無成也. 是故滑疑之耀, 聖人之所圖也. 爲是不用而寓諸庸; 此之謂以明.

 

모든 것은 변화의 과정 중에 드러나는 한 단계이다. 고정적이지 않고 다른 것으로 변한다. 그 과정을 결정하는 것은 道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통일적 전체에 포섭된다. 전체의 부분으로서 각각은 고유하고 평등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관점으로 세계를 대하는 것이 곧 ‘以明’이다.

 

이제 생명의 관점에서 明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以明’은 道의 관점에서, 곧 근본·전체·영원의 관점에서 사물을 비춰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원래 인간에게 내재하는 것이다. 「제물론」에서 말하는 天府(천부적 지식·지혜 창고), 葆光(지혜의 빛을 감추는 것)62)은 明이 인간에게 원래 갖추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明은 인간 생명의 본래적 속성이 된다. 「천지」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62) 上同, 故知止其所不知, 至矣. 孰知不言之辯, 不道之道? 若有能知, 此之謂天府. 注焉而不滿, 酌焉而不竭, 而不知其所由來, 此之謂葆光; 林希逸說: ‘葆, 藏也. 藏其光而不露, 故曰葆光.’ 勞思光說: ‘… 道家之思想, 則爲息言說以養虛靈之自覺, 卽所謂葆光是也.’ 陳鼓應,『莊子今註今譯』上, 86쪽.

 

 

"형체는 道가 아니면 생명을 가지지 못하고, 생명은 德이 아니면 밝지 않다. 형체를 보존하고 생명을 다하며, 덕을 세워 도를 밝히니 덕이 성한 사람이 아닌가!63)"

63) 「天地」, 故形非道不生, 生非德不明. 存形窮生, 立德明道, 非王德者邪!

 

여기서 道를 생명의 원리라 하면, 德은 생명력이 된다. ‘생명이 밝다(밝아진다)’고 하였는데, 생명의 모든 활동은 다 明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64) 인간의 입장에서는 생명력을 획득하면 德이 되고, 덕이 있으면 밝게 된다. 생명활동은 구체적으로 여러 기관을 통해 실현된다. 따라서 明에는 층차가 있다.

64) 「天下」, 譬如耳目口鼻, 皆有所明, 不能相通.

 

 

"눈이 (막힘없이) 통하는 것[徹]을 明이라 하고, 귀가 통하는 것을 聰이라 하고, 코가 통하는 것을 顫(전)이라 하고, 입이 통하는 것을 甘이라 하고, 心이 통하는 것을 知라 하고, 知가 통하는 것을 德이라 한다.65)"

65) 「外物」, 目徹爲明, 耳徹爲聰, 鼻徹爲顫, 口徹爲甘, 心徹爲知, 知徹爲德.

 

여기서는 耳目口鼻心知여섯을 병렬하였지만, 知는 心의 내용이므로 실제로는 耳目口鼻心다섯이다. 그것은 또한 耳目口鼻와 心의 둘로 구분되니, ‘心齋’설에서 耳와 心이 對擧되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인데,66)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形과 心을 구분하는 것이다.

耳目口鼻心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徹이라 하였는데, 徹은 곧 通이다. 明·聰·顫·甘·知는 目·耳·鼻·口·心이
대상과 만남에 있어 通하는 것, 곧 막힘이 없는 것이다. 내외의 장애요소가 다 사라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明이라 하는 것이 ‘生非德不明’의 의미이다.

 

66) 「人間世」, 若一志, 無聽之以耳而聽之以心, 無聽之以心而聽之以氣! 耳止於聽, 心止於符. 氣也者, 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虛者, 心齋也.

 

(인식기관으로서의) 心이 통하는 것을 知라 하고, 知가 막힘이 없는 것을 德이라 하였는데, 곧 지식과 지혜의 궁극으로서의 明이다. 달리 말하면 생명의 빛이 막힘없이 발휘되는 것이 明이다. ‘心徹爲知’에 그치지 않고 ‘知徹爲德’을 이야기하는 것은 ‘心齋’설에서 耳-心-氣의 인식 층차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耳와 心의 지각과 인식은 아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전면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다. 아직 한계, 막힘이 있다. 대상을 전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곧 대상과 하나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通(通徹, 通達)의 결과인 明이다.

 ‘心齋’설의 虛는 곧 막힘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明은 일차적으로 시각의 밝음이지만, 이목구비의 감각적 지각은 궁극적으로 心知에 포섭되어서, 明은 시각적 밝음을 넘어서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지식·지혜로서의 밝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것이 ‘生非德不明’에서 明의 궁극적 단계이다.

 

한편 「천도」편에서 明과 通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天道의 운행은 적체됨이 없으므로 만물이 이루어지고, 帝道의 …, 聖道의 …,

하늘에 밝고[明於天] 성스러움에 통하며[通於聖] 제왕의 덕에 걸림없는[六通四辟] 사람은 저절로 그러하여[其自爲也], 한결같이[昧然] 고요하지 않음이 없다.67)

67) 「天道」, 天道運而无所積, 故萬物成; 帝道運而无所積, 故天下歸; 聖道運而无所積, 故海內服.

明於天, 通於聖, 六通四辟於帝王之德者, 其自爲也, 昧然无不靜者矣.

 

天道, 帝道, 聖道의 공통점은 운행, 실행에 적체됨이 없다는 것이다. 明과 通(六通四辟)은 결국 같은 의미를 가짐을 알 수 있다. 통하기 위해서는 막힘[積, 積滯]이 없어야 한다.

「외물」편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은 지혜[小知]를 버리면 큰 지혜[大知]가 밝아진다. 선을 버리면 저절로 선해 진다[自善].68)"

68) 「外物」, 去小知而大知明, 去善而自善矣.

 

大知가 밝아진다고 했지만, 달리 이야기하면 大知가 곧 明이다. 원래 知는 본연의 明의 결과이다. 따라서 自善(저절로 선해진다)과 마찬가지로 自知(저절로 알게 된다), 自明(저절로 밝아진다)이라 할 수 있다. 大知가 밝아지는 조건은 小知를 제거하는 것이다.

小知는 곧 제물론 에서 “道隱於小成"이라고 이야기하는 그것이다.69) 小와 大의 구분에서 小는 부분이고 大
는 전체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明은 근원·전체·영원에 대한 인식이므로 부분적 인식은 明을 방해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장자에서 神·神明관념이 인간에게 내재하게 되는 과정과 神明의 용법, 明의 의미에 관해 살펴보았다.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69) 제거의 대상이 되는 善과 知는 유위의 것이고, 세속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儒墨의 善과 知같은 것이다.

 

 

6. 맺음말

 

老莊사상은 道라는 관념을 통해서 종교적 세계에서 철학적 세계로 전환하였다. 인간사회와 자연계를 지배하는 것은 더 이상 神이 아니라 造化와 생명의 원리인 ‘도’이다. 그런데『장자』에서는 『노자』에서 ‘도’ 관념에 의해 격하되었던 神이 인간의 생명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전면에 등장하였다. 그것이 곧 形神론이다. 따라서 養生을 이야기할 때도 養神을 지향한다.

 

『장자』에서 인간생명의 본질적 요소로서 心대신에 神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특수한 요소70)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우주적 요소를 강조하려고 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통 사람들은 욕망의 주체로서의 心이 주로 작용하고, 유가에서는 도덕적 주체로서의 心이 강조되었는데, 『장자』에서는 이 둘 다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과거 숭배의 대상이었던 神(신들)은 생명과 중요한 지식의 원천이었다. 일차적으로 태양신을 의미하던 神明은 神의 본질적 속성[光明, 全知]을 드러내는 개념으로 神의 특수한 호칭이 되었다. 신들의 체계가 天혹은 天地로 개괄될 때 神明은 주로 천지신명이라 불린다. 다양한 숭배의 대상은 점차 天혹은 天地로 수렴되고, 다양한 숭배의 대상이 가지고 있던 知와 能은 최고신의 知와 能으로 수렴된 것이다.71)

 

70) 인간이 인간인 까닭, 군자와 소인의 차이를 결정짓는 마음(사유능력, 도덕적 판단력).
71) 물론 사람들은 천지신명이라는 말을 천지 사이의 모든 신령이라는 뜻으로도 이해한다.

 

 

『장자』에서 초월적 존재이던 神이 인간에 내재한다고 여겨지게 되는 과정은 먼저 巫術에서 접신을 통한 神人합일의 체험이 있었고, 나중에는 도가의 통일적 세계관에 의해 우주(천지)의 구성원리와 인간의 구성원리는 동일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유가에서 외재적인 天이 孔子를 거쳐 孟子에 와서 性으로 내재화되는 것처럼, 도가에서는 『노자』에서 도와 덕으로 인간생명을 설명하는 과정을 거쳐『장자』에서 神의 내재화가 이루졌다고 할 수 있다. 천지에 神明이 있다면 인간에게도 神明이 있다.

 

神이 내재화된 결과는 무엇인가? 이제 인간은 지식·지혜의 획득을 위해 자신에 내재하는 생명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인간은 주요한 현상과 사건의 원인에 대한 무지로 인해 외부의 神(그러한 현상·사건을 일으키고 지배한다고 여겨지는 존재· 힘)에 의존하게 되고, 神은 특별한 방식[巫術]을 통하여 인간에게 사태의 결과를 알려주고 행동지침을 지시해준다. 그러던 것이 점차 만물을 지배하는 것은 법칙·원리, 곧 道라고 생각하게 된다.『노자』에서 단적으로 선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더 이상 외부의 神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중요한 현상들에 대해 스스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神의 의지를 파악하려 노력할 것이 아니라 道를 파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천지신명의 능력은 造化의 능력과 인식의 능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장자』에서는 이 두 가지 부분이 함께 등장한다. 神人, 至人, 眞人등이 가지는 초인적인 능력은 전자에 해당하고, 明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후자에 해당한다. 『장자』에서 神明개념은 분화되어 神은 인간의 생명력 혹은 그 본질인 정신을 표현하는 개념이 되고, 明은 道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과 이를 토대로 한 인식, 그리고 그러한 인식의 가능성을 표현하는 개념이 되었다. 老莊에서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여기므로 따라서 道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여 明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때 明은 일반적 지식·지혜와 구분되는 근원적 지식· 지혜를 의미한다. 물론 일반적 지식·지혜도 모두 생명력의 본질적 표현이자 인식의 능력인 明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神은 원래 밝은 것, 神明이다. 과거 지식과 지혜는 神의 영역이었고, 이제 道를 인식하는 것도 神이다. 그것이 인간의 외부에 있느냐, 인간에 내재하느냐의 차이이다. 道가 만물에 내재하는 것처럼, 神도 만물에 내재한다. 한편 만물은 氣로 이루어지므로 神도 氣를 바탕으로 한다. 그렇다면 氣의 상태에 따라 神의 明도 결정된다. 따라서 인간의 경우 神은 원래는 明하거나 明할 수 있지만, 항상 明한 것은 아니다.

 

생명의 측면에서 이야기하면, 생명은 생명의 원리인 道에서 비롯된 것이고, 道를 잃지 않으면[執道] 생명력으로서의 德이 충만하게 되고[德全], 德이 충만하면 形과 神이 온전하게 된다. 神이 온전하면 곧 神이 밝은 것이고, 따라서 道를 인식하고 실현할 수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 養神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明은 神의 작용이므로, 神의 온전함(순수함) 여부에 따라 明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장자』에서 養神과 全神을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장자』의 神明 관념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도가의 기본은 생명의 원리인 道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위이고 자연이다. 지혜와 지식을 획득하려고 정신을 힘들게 하지[勞神明] 말고, 생명을 온전히 하면 자연스레 밝아진다는 것이다. 생명의 실체는 神이고, 神이 충만하면 明은 자연히 드러난다. 따라서 관건은 養生하고 全生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養神하여 全神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장자』의 인식의 문제는 곧 양생의 문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72)

 

72) 「繕性」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속의 학문을 가지고 선성(繕性)하여 그 처음을 회복하려 하고, 세속의 생각을 가지고 활욕(滑欲)하면서 그 밝음에 이르려 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 한다.

繕性於俗學, 以求復其初; 滑欲於俗思, 以求致其明; 謂之蔽蒙之民.” 復初와 致明을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養生과 明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참 고 문 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