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노장자

장자의 죽음에 대한 연구

rainbow3 2019. 10. 2. 18:26


장자의 죽음에 대한 연구         류 성 태*

  

Ⅰ 서 론

 

21세기에 접해 종교가에서는 말세론이 더욱 강조되는데, 종말이 올 것을 강조하는 서구 사조가 그 배경이 되고 있다. 이는 메시아적 성격의 구원을 강조하는 종교일수록 더 농도가 진하다고 볼 수 있다. 말세론은 서양 사고에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동양에 말세론과 같은 것은 거의 없다.1]

서구 사조와 달리 동양 사상에는 절망 내지 말세란 말은 자주 거론되지 않는 편이다. 동양 철인들의 낙관주의적 사유에서 비롯된 생명관 및 성품의 선함을 강조하는 영향 때문이 아닌가 본다.

 

지금까지 있어온 말세론 등 불안 요인으로는 죽음의 공포가 그 중심을 이루어 왔지만, 동양의 성철들은 낙천적 사유에 의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死生의 문제에 대해 깊이 거론하여 왔다. 특히 道家 철인들은 죽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긍정적 관점을 갖게 하였다. 서복관에 의하면, 장자는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이고, 物化의 입장에서 구속을 극복하며, 조물자의 변화에 함께 따르라는 것 2]이라 한다. 이처럼 죽음 초탈을 강조하고 이 불안 극복론이 도가에 의해 거론되었다.

 

1] 송항용, 「노장철학의 세계」, 한국불교환경교육원 엮음, 『동양사상과 환경문제』, 도서출판 모색, 1997, p. 56.

2] 김항배, 『불교와 도가사상』, 동국대학교 출판부, 1999, p. 215.

 

그러한 죽음 초탈의 입장에서 도가 사상은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는 죽음의 철학을 제시하여 왔다. 노자의 ‘谷神不死’(도덕경 6장)라든가 장자의 ‘不死不生’(대종사편)이 그것이며, 이는 중국인의 육체 불멸론과도 연결된다. 중국인 고유의 육체 불멸에 대한 믿음은 대체로 노장이 활동했던 춘추전국시대 무렵에 생겨났다.

그 후 『山海經』에는 이미 신선 不死에 관련된 언급을 한다. 이러한 한대 이후의 도교 신선론은 『장자』와 『열자』의 長生 不死의 이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유교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현실적이다. 이는 도가와 달리 생과 사에 대한 관심의 차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공자는 그의 제자가 죽음에 대하여 물었을 때 죽음에 대한 관심을 삶으로 돌렸다.3]

이를테면 「아직 삶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리오」(『論語』 「先秦」, 未知生, 焉知死)라는 것이다. 곧 자공이 질문한 죽음에 대해 이는 한 생명체가 죽은 뒤에 알 수 있다며, 선진 편에서 말하는 계로와의 문답에서 공자는 死生의 문제를 산(生) 인간의 문제로 집중시키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공자와 달리 죽음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장자는 본질적으로 死生의 명확한 이해보다는 회의론적 입장을 견지한다. 「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죽은 뒤에는 그 끝나는 곳을 알 수 없는 이상 天命이 어찌 없다 하겠는가? 그러나 또 생명이 시작되는 곳을 모르는 이상 천명이 어찌 있다고 하겠는가?」 4] 이처럼 그는 생과 사의 문제에 대해 본질적으로 회의하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여기에서 장자는 죽음을 언급하는데 상징적 예화를 동원한다. 특히 죽음이란 ‘혼돈’의 경우처럼 無爲의 작용을 거스를 때 나타난다는 상징적 언급이 주목된다.

 「사람은 누구나 일곱 구멍이 있어서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이 혼돈에게만 그게 없다. 어디 시험삼아 구멍을 뚫어주자.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7일이 지나자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5]

이처럼 무위 자연을 거스를 때 죽음이 온다는 것이다. 인위를 극복하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자는 것이다.

 

요컨대 죽음이란 우주의 혼돈이 형상화되면서 거론된다. 이를테면 형상화된 육체의 죽음과 삶, 내세와 현세 어느 것도 자연의 법칙으로서 우주 음양의 變易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은 동양의 보편 정신 6]이 아닌가 본다. 장자의 죽음에 대한 관점 역시 이 우주 변역의 원리와 인간 개체의 생멸 원리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장자의 죽음에 대한 연구는 동양 사상에 있어 우주와 인간의 공존적 관계, 생사 초탈, 생명 형성, 죽음의 원인 등을 이해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3]이강수, 『중국 고대철학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0, p. 36 參照.

4] 『莊子』 「寓言」, 吾惡乎求之, 莫知其所終, 若之何其無命也, 若之何其有命也.

5] 『莊子』 「應帝王」, 人皆有七竅以視聽食息, 此獨無有, 嘗試鑿之. 日鑿一竅, 七日而混沌死.

6]류인희, 「인간적 문화에서의 영생」, 『죽음이란 무엇인가』, 도서출판 窓, 1990, pp. 146 參照.

 

* 이 논문은 2001년도 원광대학교 교비 지원에 의해 연구되었음.

**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Ⅱ 죽음의 의미

 

1. 죽음의 개념

 

죽음의 의미를 파악해 보는 일은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게 하는데 일익이 된다. 장자는 이러한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도록 공헌하였으며, 이는 그가 죽음에 대한 음미를 심도 있게 하였다는데 있다. 우선 그가 본 죽음은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으로, 귀신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했다.

 「밖으로 작용할 뿐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는 죽음으로 간다. 밖으로 작용하여 얻었다고 함은 바로 죽음을 얻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본성을 잃고 형체만 있는 것은 죽어서 귀신이 된 자이다.」7]

이처럼 죽음의 개념은 귀신으로 이어져 새롭게 다가온다.

 

그런데 중국 사상을 이해하려고 한 서양인의 사유에서 개체의 죽음과 혼백의 관련성은 흥미를 끌어낸다. 『고대 중국인의 생사관』의 저자 마이클 로이의 견해를 보자. 그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인간의 영혼을 상이한 두 요소 즉 魂과 魄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들이 조화상태에서 육체에 생명력을 넣어주고 육체를 유지시킬 때 인간이 살아 있는 것이고, 魂․魄․육체, 이 3요소가 분리되면 죽는다 8]는 것이다. 그는 서양인으로서 동양적 시각으로 죽음의 개념에 다가서고 있다.

 

그리하여 혼백이 분리되면 형체를 떠나 육체가 흩어진 無의 경지와도 같다. 장자는 이에 죽음이란 형체를 떠난 무형의 상태, 즉 본체의 道에 귀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죽음이란 활집이나 옷 주머니를 끄르듯이 하늘에서 받은 형체를 떠나 육체가 산산이 흩어지고, 정신이 이 형체를 떠나려 할 때 몸도 함께 따라 無로 돌아가는 것이며, 道로의 위대한 복귀인 것이다.」 9]

육체가 흩어져 천지 대자연에 합일하여 無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라 간주된다.

 

7]『莊子』 「庚桑楚」, 故出而不反, 見其鬼., 出而得, 是謂得死. 滅而有實, 鬼之一也.

8]마이클 로이 著, 이성규 譯, 『고대중국인의 생사관』, 지식산업사, 1998, p. 42.

9] 『莊子』 「知北遊」,

解其天弢, 墮其天帙(질), 紛乎宛乎, 魂魄將往, 乃身從之, 乃大歸乎, 不形之形, 形之不形, 是人之所同知也, 非將至之所務也.

 

 

이러한 죽음에 있어 無를 상정하면 생에 있어 有라는 개념이 또 합류한다. 곧 장자는, 죽음은 유에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요, 삶은 무에서 유로 된다는 논리로써 설명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죽게 마련이다. 차별을 버리고 평등 공평하기를 권하는 것은 죽음은 有에서 無로 돌아가므로 이유가 되지만 삶은 無에서 有가 되므로 그 까닭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10]

그가 언급한 논지는 죽음이란 유에서 무로 돌아가고, 삶이란 무에서 유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아울러 장자에 있어 죽음은 氣의 흩어짐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생명을 ‘氣’의 응집된 형태라고 보고, 죽음을 ‘氣’의 흩어짐이라고 보았다. 11] 『장자』의 지북유 편에 生은 氣聚가 된다고 했고, 死는 氣散이 된다고 했다. 사실 장자는 인간의 신체 형성을 氣로 인한 것이라 하고 氣의 보존이 生이 되는 것이며, 氣가 사라지는 것이 死라 보았다. 따라서 기수련을 통해 신선이 되고 장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 도가의 양생 및 수양론에 있어 근간이 되고 있다.

 

이 같은 氣散을 죽음으로 본 장자는 혼․백의 구별이 없이 우주 대자연에 합한 무차별의 고요한 경지를 지향한다. 장자는 이 무차별의 경지를 현실 초탈적 입장에서 말하여 죽음과 연결짓고 있다.

「죽음에는 위에 군주도 없고 아래에 신하도 없다. 또 사철의 변화도 없다. 편안하게 몸을 맡긴 채 천지와 함께 수명을 누린다. 제왕의 즐거움인들 이에 미치지는 못한다.」12]

죽음에 이르면 現世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나 상하의 차별에서 구애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그가 고요한 천지의 수를 누리며 寂寂의 경지와 함께 하고 있음을 말한다.

 

어쨌든 장자에 있어 죽음은 그가 동원한 여러 상징적 용어에 잘 나타난다. 그가 말하는 명백의 언덕과 곤륜의 구릉은 모두 죽음을 상징하며, 지리숙과 골개숙이 그곳에 구경갔다는 사실은 상징적인 죽음의 체험을 보여준다. 13] 지리숙과 골개숙이 보러 갔던 자연의 변화나 골개숙의 몸에 생긴 변화는 곧 죽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왼쪽 팔꿈치에서 버드나무가 돋아났다는 것도 죽음을 의미하며, 골개숙이 사후에 버드나무가 되어 轉生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곧 죽음론에는 도가의 轉變說이 연계되고 있다.

 

10] 『莊子』 「寓言」, 生有爲, 死也. 勸公, 以其死也, 有自也., 而生陽也, 无自也. 而果然乎?

11]陳鼓應 著, 최진석 譯, 『老莊新論』, 소나무, 1997, p. 305.

12]『莊子』 「至樂」, 死, 无君於上, 无臣於下., 亦无四時之事, 從然以天地爲春秋, 雖南面王樂, 不能過也.

13] 조민환, 『유학자들이 보는 노장철학』, 예문서원, 1996, p. 186.

 

 

2. 인간의 수명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가는 죽음 후의 내세보다 현재의 삶을 중시하는 성향이었다. 이는 인간 수명의 영생론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실 유가는 죽음 자체의 의미나 죽어서 시작하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또 이의 관심을 버림으로써 도리어 인생을 멋있게 엮어가기가 쉬워졌다. 14] 이는 공자와 제자의 죽음에 대한 문답에서 현재의 수명을 중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와 달리 죽음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도가의 장자는 단촉한 수명을 극복, 천지의 무한 壽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생명 개체의 한 존재인 인간에게 엄연히 죽음과 삶이라는 수명의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곧 그는 말한다. 「하늘과 땅은 무궁하지만 사람은 때가 오면 죽기 마련이다. 이 유한한 몸을 무궁한 천지 사이에 맡기고 있기란 준마가 문틈을 획 지나가 버리는 것과 같다.」 15]

이처럼 단촉한 우리의 수명을 천지의 무궁함에 비유하여 아쉬움을 토로하고, 결국 자연에 합일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라고 한 장자의 죽음관이 돋보인다.

 

그러면 장자는 당시 인간의 수명을 어떻게 보았을까? 물론 도가를 비롯한 도교는 장생 불사를 추구하는 성향이었으나, 장자에 있어 실제 인간의 수명은 짧다고 했다.

「사람의 수명이란 기껏해야 백 살, 중간 정도로 팔십 살, 밑으로 가면 육십 살이다. 병들어 여위거나 남의 죽음을 문상하고 또는 걱정거리로 괴로워하는 따위를 제하고 나면 (일생) 입을 벌리고 웃을 수 있는 것은 한달 중 불과 네댓 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16]

이처럼 그는 인간의 수명을 70-80 안팎으로 본 것이다. 오늘날 선진국 시민들이 누리는 수명과 별반 차이가 없다.

 

14]류인희, 上揭書, pp. 160-161.

15] 『莊子』 「讓王」, 天與地无窮, 人死者有時, 操有時之具, 而托於无窮之間, 忽然无異騏驥之馳過隙也.

16]『莊子』 「盜跖」, 人上壽百歲, 中壽八十, 下壽六十, 除病瘦死喪憂患, 其中開口而笑者, 一月之中不過四五日而已矣.

 

 

그리하여 장자에 있어 인간의 짧은 수명의 극복을 위해 보다 근본적인 입장으로 접근한다. 이는 생사의 문제를 상대적으로 접근한다는 뜻이다. 이에 장수와 요절은 순간의 삶으로 인해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그는 ‘장수와 요절은 있으나 그 차이가 얼마나 되겠소’(雖有壽夭, 相去幾何)라고 지북유 편에서 말한다. 또 그는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장수한 자는 없고 장수한 팽조는 일찍 죽은 자이다. 상대를 초월하면 천지의 유구함이 나와 함께 살아 있다」 17] 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장수와 요절의 문제를 상대적으로 접근하여 수명의 장단을 초극하고 있다.

 

이에 장자는 유한한 수명, 즉 죽음과 삶에 대한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을 개입하지 말라고 한다. 인간 형체의 轉變을 인지하여, 무한 자연에 순응하도록 한 것이 이와 관련된다. 그는 사람의 형체는 갖가지로 변화하여 끝이 없다고 본다. 이에 聖人의 경지가 되어 달관하라고 한다. 그리하여 「일찍 죽어도 좋고 오래 살아도 좋으며, 태어나도 좋고 죽는 것도 좋다」 18]고 그는 말하고 있다. 생사에 대한 인간의 희노 감정을 벗어나 성인으로서의 자연과 합일하는 생사 초탈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인간의 수명은 짧기만 하다고 본 장자는 추수 편에서 道의 무시무종(道, 無終始)을 거론함으로써 짧은 수명(物有死生)의 한계를 道의 변화 개념으로 극복하였다. 이는 죽음의 극복을 통한 대자연에의 합일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사람이 이 천지 사이에 살고 있는 시간이란 마치 준마가 벽의 틈새를 언뜻 지나가듯 순식간이다. 사물은 모두 자연의 변화에 따라 생겨나서 다시 변화에 따라 죽는다.」 19] 이처럼 인류의 유한한 생사를 道의 무시무종의 경지에서 초극하자는 죽음 초탈의 철학을 장자는 강구하고 있다.

 

결국 장자는 단촉한 수명의 공포를 극복하려는 뜻에서, 得道를 통한 죽음 초탈의 진인과 같은 이상적 인물을 상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옛 진인은 자연의 도(天)를 얻으면 살고 잃으면 죽는다’(古之眞人, 得之也生, 失之也死)고 서무귀 편에서 말한다. 사실 장자에 있어 眞人과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를 담보로 하는 미신적 사고는 발을 붙일 수 없다. 20] 이에 장자는 진인이나 천인 등이 시공 초탈의 경지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17] 『莊子』 「齊物論」, 莫壽於殤子, 而彭祖爲夭, 天地與我竝生.

18]『莊子』 「大宗師」, 善夭善老, 善始善終.

19]『莊子』 「知北遊」, 人生天地之間, 若白駒之過郤, 忽然而已, 注然勃然, 莫不出焉, 油然漻然, 莫不入焉, 已化而生.

20]조민환, 上揭書, p. 179.

 

 

3. 죽음의 원인

 

죽음이란 크게 두 가지 원인으로 발생한다. 육체의 수명 기간이 다 되어 氣가 흩어지는 자연사가 있고, 또 인위의 작용으로 인해 일어나는 사고사가 있다.

먼저 전자의 경우를 보자. 장자는 이러한 자연의 命에 따르는 죽음을 강조하고 있다.

 「삶과 죽음 …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이런 것은 세상 일의 변화(事之變)이며 운명의 흐름(命之行)이다.」 21]

이처럼 그는 생과 사를 운명의 흐름으로 파악하고 있어, 자연의 변화로 이해한다.

 

이어서 인위적 작용, 즉 인간의 巧智에 의한 재색명리로 인해 죽음이 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본능을 절제하지 못하여 나타나는 고통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것이 이것이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재물을 탐내다 병에 걸리고 권세를 탐하다 정력을 소모하며 편히 살 수 있으니까 음락에 빠지고 육체에 정기가 남아돌아 주체 못하게 되면 병이라고 할만 하다.」 22]

이처럼 外物에 대한 탐욕과 무절제의 삶에서 육체의 정기가 탕진될 때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인위적 행위는 과실나무가 그 수를 다하지 못하는 것에 비견되기도 한다. 과일이라는 열매로 인해 가지가 찢겨진다면 나무는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장자는 아가위․배․귤․유자 따위 열매 종류를 거론하면서, 열매를 따기 위해 가지가 잡아뜯기고 부러진다는 것이다.

이는 열매 맺는 능력 때문에 제 삶이 괴롭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죽게 된다.」 23]

자신의 有用, 즉 달콤한 열매 때문에 천수를 다하지 못하여 결국 죽음의 원인이 된다.

 

여기에서 장자는 인위보다는 무위 자연의 변화에 따른 죽음을 강조하고 있다. 죽음의 원인이 자연사가 인위적 죽음보다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어떠한 물리적 작용으로 목숨이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곧 그는 말한다.

일단 사람으로서의 형태를 받은 이상, 목숨을 해치는 일없이 그대로 죽기를 기다리자. 주위의 사물에 거역해서 서로 해치고 다툰다면 일생은 말달리듯 지나가 버려 막을 도리가 없다. 슬픈 일이 아닌가.」 24]

그가 언급하고 있듯이 ‘목숨을 해치는’ 어떠한 행위도 극복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인위적 원인으로 죽기 때문이다.

 

21]『莊子』 「德充符」, 死生存亡 … 飢渴寒暑, 是事之變, 命之行也.

22]『莊子』 「盜跖」, 貪財而取慰, 貪權而取竭, 靜居則溺, 體澤則馮, 可謂疾矣.

23]『莊子』, 「人間世」, 此以其能苦其生者也, 故不終其天年而中道夭.

24]『莊子』 「齊物論」, 一受其成形, 不化以待盡. 與物相刃相靡, 其行進如馳, 而莫之能止, 不亦悲乎!

 

 

그런데 동양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고사가 아닐 경우, 죽음의 원인이란 우주 元氣의 聚散 작용에 기인한다. 우주 대자연의 변화에 따른 시간적 흐름으로 천수가 다하게 된다. 곧 우주의 변역의 과정이 그렇듯이 사람이 생겨남은 우주 元氣가 이와 같이 응취하여 펴나오는 것(神․伸)이고, 죽음은 돌아가는 것(鬼․歸)에 지나지 않는다. 25] 다시 말해 죽음의 원인이 되는 것은 精氣가 수명을 다해 흩어지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흩어지는 정기를 중지시킨 채 장수하려고 한다면 이는 자연의 변화에 거역하는 행위이다. 이 죽음을 거부하려 하는 것은 고통일 뿐이라는 것이다. 추수 편에 밝혀져 있듯이 다가오는 시간의 변화는 막을 수 없기(時不可止) 때문이다. 곧 장자는 말한다.

 「사람은 태어나면 걱정과 더불어 살아가기 마련이다. 장수하는 자는 늙어서 정신이 흐려져 오랜 세월 걱정하며 죽지 않고 살아간다. 얼마나 괴로운 짓인가.」 26]

의도적 장수가 아닌, 이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죽음을 거부하지 말고 수용하자는 입장이 그에 의해 밝혀진다.

 

궁극적으로 장자는 得道의 깨달음과 죽음 초탈을 연결짓고 있다. 道를 얻으면 살고 이를 잃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바 있는 인위적 생명 단촉보다는 道에 합일하는 것과 연결된다.

 「도란 만물의 근원이며 모든 것은 이것을 잃으면 죽고 이것을 얻으면 살며, 일을 할 때 이것을 거역하면 실패하고 이것에 순응하면 성공한다.」 27]

일생의 삶에서 득도를 하여 자연의 변화에 생을 맡긴 채 살아간다면 요절은 없을 것이며, 또 어떠한 죽음의 공포도 사라질 것이다.

 

25] 류인희, 上揭書, pp. 146.

26]『莊子』 「至樂」, 人之生也, 與憂俱生, 壽者惛惛, 久憂不死, 何故也.

27]『莊子』 「漁父」, 道者, 萬物之所由也, 庶物失之者死, 得之者生, 爲事逆之則敗, 順之則成.

 

 

Ⅲ. 생명과 죽음의 상관성

 

1. 死生本無

 

사생이 없다는 것은 태어나는 과정이나 바탕이 없다는 것이며,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초현실적이고 초탈적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생명체에 있어 생산 근거가 없고 죽음의 전개가 없다는 것은 본체론적 동양철학에 바탕한 형이상학적 사유와도 같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만물은 생겨나는 근본이 없고 돌아갈 구멍도 없다.」 28]

그의 견해처럼 생겨나는 근본이 없으며, 죽게 되는 과정도 없다는 사유는 심미안적 본체 세계에서 생각해 봄직한 일이다.

 

이처럼 생과 사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우리의 상식적 논리를 뛰어넘어 초탈의 세계에서 마음껏 소요 자재한 장자는 生死 무분별의 경지를 寓言的으로 말한다.

언젠가 열자가 여행하다가 길가에서 식사를 했다. 그때 백년 묵은 두개골을 발견하고 쑥 풀을 뽑아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자네만이 죽음도 없고 삶도 없다는 걸 알고 있네. 자네는 과연 기뻐하고 있는 걸까?」 29]

장자는 死生이 없는 해학적 우언의 표현으로 ‘두개골’을 등장시켜 죽음과 삶의 미분을 체험하고 있다.

 

하여튼 삶도 없고 죽음도 없는 세계는 무엇일까? 장자는 ‘혼돈’(응제왕편)이라는 용어를 들고 있다.

이 혼돈의 경지는 死生 미분의 경지와도 같다. 즉 혼돈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나타나기 이전의 세계로서 상징적 죽음의 세계와 관련되며, 『장자』두개골의 우화와 연결된다. 30]

장자는 이러한 두개골과의 만남을 통해서 본래 생과 사가 없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죽음의 상징적 표현과도 같은 두개골의 용어가 등장한 것은 다소 해학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28] 『莊子』 「庚桑楚」, 出无本, 入无竅.

29]『莊子』 「至樂」, 列子行食於道從, 見百歲髑髏, 攓蓬而指之曰:唯予與汝知而未嘗死, 未嘗生也. 若果養乎? 予果歡乎?

30]조민환, 上揭書, p. 185.

 

 

그리하여 死生이 본래 없다는 논리는 장자에 있어 ‘無’의 경지에서 이해된다. 우주에는 처음 無가 있었다는 것이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천지의 태초에는 無가 있었다. 존재하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 31]

이와 같이 장자는 본래 존재의 無라는 것을 가정한다. 無의 혼돈 경지에서 출발한 후, 一이 생기고 命이 작용하며 萬物이 이루어지고 각자의 性이 구비된다는 것이다. 이 본래 無의 경지에서는 생과 사의 구분이 없게 된다.

 

그러면 왜 그는 생과 사가 본래 없다고 했을까? 보다 실제적 배경에는 생사에서 오는 두려움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생명 개체의 생사 한계를 벗어나려는 뜻에서 우주의 渾沌에 잠재운다. 인류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생사 존망의 문제라는 면에서, 장자는 생사의 문제를 개체아의 한계에서 벗겨다가 연원 속에 더 沖淡시킨다는 것이다. 32] 한 개체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연원 즉 大體에 합일하여 생사를 초탈하는 모습이다.

 

사실 생사는 원래 없다지만 정말 없는 것일까? 장자에 있어 물론 현실의 세계가 엄연히 전개된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生이란 잠시 우주의 기운을 빌리고 있을 따름이라고 장자는 말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천지의 氣를) 잠시 빌리고 있는 거다. 팔꿈치의 혹도 그 氣를 빌어 생긴 것이다. 삶이란 먼지나 티끌이다. 죽음과 삶은 낮과 밤이 있는 것과 같다.」 33]

이와 같이 우리의 생사가 존재하지만, 이는 우주의 기운을 잠시 빌린 것으로 장자에게 이해된다.

 

혼돈에서는 死生 本無이나, 인간의 현실 세계로 돌아오면 우주 기운을 빌려 생과 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장자는 이것마저 부인하지는 않는다. 道의 작용으로 無에서 有로의 전이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有는 道의 작용으로 인해 나타난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道가 얼굴 모습을 베풀어주고, 자연(天)이 몸의 형태를 베풀어주었다.」 34]

경상초 편에서 「有乎生, 有乎死」(삶과 죽음이 있다)라고 하여, 이러한 死生의 현상적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31] 『莊子』 「天地」, 泰初有无无有无名,

32] 김충열, 『노장철학강의』, 예문서원, 1995, p. 317.

33]『莊子』 「至樂」, 生者, 假借也., 假之雅生生者, 塵垢也. 死生爲晝夜.

34]『莊子』 「德充符」, 道與之貌, 天與之形.

 

 

2. 化生化死

 

生이 있으면 이어서 곧바로 死가 이루어진다. 영원히 生만을 보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를 장자의 용어로 말하면 ‘化生化死’라 한다. 그는 생과 사가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相卽의 관계로서 서로 이어진 연속체로 보고 있다.

 「사물은 모두 자연의 변화에 따라 생겨나서 다시 변화에 따라 죽는다(化生化死). 변화하여 생겨나는가 하면 다시 변화하여 죽는 것이다.」 35]

그는 시간의 연속에 의한 化生化死의 원리를 모르고 있는 인간들은 그저 죽음을 슬퍼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장자』를 주석한 유숙아는 이 ‘化生化死’에 대해서 ‘변화’의 개념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는 이에 말하기를 「생사거래는 모두가 변화이니 조물자에게 맡겨야 한다. 어찌 그것에 얽히겠는가?」 36]한다.

化生化死라는 생사의 원리는 자연의 변화 현상에 불과하며, 장자는 이를 조물자에 맡기도록 했다고 유숙아는 전언한다. 이에 인간은 생사 변화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의 ‘化生化死’는 장자의 친구 혜시가 밝힌 ‘方生方死’와 같은 흐름이다. 혜시의 본 학설을 그가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에 혜시의 말을 인용한다.

 「사물이 생겨난다는 것도 오히려 죽는 것(方生方死)이다. 큰 입장에서 보면 같은 것도 이것을 구분해서 작은 단위로 비교하면 각기 달라진다. 이것을 작은 분별이라 한다.」 37]

이와 같이 化生化死는 方生方死와 같은 내용으로 전개된 것이다. 生과 死 어디에 구애됨을 벗어나라는 뜻으로 이러한 언급을 하였다.

 

35] 『莊子』 「知北遊」, 已化而生, 又化而死.

36] 劉叔雅, 『莊子補正』, 新文豊出版公司 印行, 中華民國 64年, 生死往來, 皆變化耳, 委之造物, 何足係哉.

37] 『莊子』 「天下」, 物方生方死. 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이같이 化生化死와 方生方死는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면(生) 곧 죽는다(死)는 자연 변화의 원칙을 따라야 하며 거역하지 말라는 뜻이다. 陳鼓應도 이를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方生方死는 시간을 따라 길게 흐르는 관념에서 본 것으로, 만물은 변하지 않음이 없으며 시간은 흐르지 않음이 없다.」 38]

이와 같이 생과 사는 자연의 변화 현상으로서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生에서 死, 死에서 生으로 이어짐이 밝혀지고 있다. 이에 만물이 시간의 변천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化生化死와 方生方死는 생과 사가 단편적이면서도 하나됨을 말한다. 생사가 같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蔣錫昌은 이를 주석하여 말한다.

「만물의 생과 사는 모두가 한 개의 停留하는 단위가 되며 분할되어 단편이 된다. 하지만 惠施는 진정한 시간은 영원히 이동하는 것이며, 진정한 물체는 영원히 변동하는 것으로 보았다.」 39]

이것은 마치 태양이 동천에서 떠오르면 곧 서편으로 지는 것이며, 만물 역시 태어나면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영속의 뜻이다.

 

장자는 이에 生이 있으면 바로 죽음이 뒤따른다고 하였다. 양자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始終이 하나이듯 死生이 한 무리(徒)라는 것이다.

 「삶이란 죽음을 뒤따르게 하는 것이며 죽음은 삶의 시작이다. 누가 死生을 관장하는지를 어찌 알겠는가.」 40] 그에 있어 사물의 始는 곧 終이어서 언제나 빙빙 돌며 변화하는 것으로 비추어진다. 이에 始의 生과 終의 死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변화의 과정을 따라 일체가 된다.

 

따라서 만물 齊同의 입장에서 장자는 이 死生을 바라보고 있다. 이 만물 제동의 원리에서 化生化死 내지 方生方死가 투영되기 때문이다. 이에 장자는 제물론 편에서 말한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다.」 41]

이는 是非․成敗가 궁극적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는 만물 제동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死生이 궁극적으로 미분의 경지에서 조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지를 만끽하는 자는 바로 聖人이나 眞人의 경지가 될 것이다.

 

38]陳鼓應 註譯, 『莊子今註今譯』 下冊, 臺灣商務印書館 公司, 中華民國 70年, p. 971.

39]상게서, pp. 971-972.

40] 『莊子』 「知北遊」, 生也死之徒, 死也生之始, 孰知其紀!

41] 『莊子』 「齊物論」,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3. 死生命也

 

주지하듯이 죽음과 삶이 命이라는 입장은 동양인의 사생 달관적 경향을 대변해 왔다. 특히 장자는 이러한 死生之命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오고 가는 死生이 우리 생명체의 운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임을 그는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과 삶은 운명이다. 저 밤과 아침의 일정한 과정이 있음은 자연의 모습이다.」 42]

그리하여 장자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바가 생사 순응이요 만물에의 달관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어김없이 오고 마는 죽음의 현실은 막을 수가 없다. 이를 막으려 한다면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요, 슬픈 일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목숨이 찾아오는 것을 물리칠 수가 없고 또 목숨이 가버리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슬픈 일이구나. 세상 사람은 몸만 보양하면 그것으로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43]

하지만 장자에 있어 아무리 몸을 보양해도 결국 목숨을 보존할 수가 없음을 알고, 죽음에 대해 운명적으로 달관의 입장을 견지한다.

 

이처럼 장자가 사생은 命이라는 견해를 갖게 된 것은 道, 즉 자연이 우리에게 모습을 부여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자연이 부여한 생명체, 자연의 변화에 의해 사라져 가는 모습들이 道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그는 이에 말한다.

「자연(大塊)은 우리에게 모습을 주었다. 또 우리에게 삶을 주어 수고하게 하고 우리에게 늙음을 주어 편하게 하며, 우리에게 죽음을 주어 쉬게 한다.」 44]

이러한 자연의 작용으로 변화가 생겨 생과 사가 운명처럼 연속된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장자는 死生이 命임을 인지하고, 생과 사에 대해 好惡의 감정을 절제하도록 하였다. 어차피 받게 되는 운명인데 이에 인간의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부여한다면 부질없는 행위가 되고 만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살아 있음을 기뻐하지 않고 죽는 것을 역겨워하지도 않는다. 처음과 끝이 되풀이되어 (어디에) 집착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45]

이와 같이 장자는 사생을 命으로 알고 好惡의 희노 감정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42]『莊子』 「德充符」, 死生命也, 其有夜旦之常,

43]『莊子』 「至樂」, 生之來不能却, 其去不能止. 悲夫! 世之人以爲養形足以存生.

44]『莊子』 「大宗師」, 夫大塊載我以形, 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死.

45]『莊子』 「秋水」, 生而不說, 死而不禍, 知終始之不可故也.

 

 

아울러 장자의 사생관과 유사하게 漢代의 회남자도 사생을 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곧 억지로 삶을 구하거나 억지로 죽음을 막지 말고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면서 회남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내가 태어났다고 해서 만물의 수가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죽는다고 해서 흙이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죽음과 삶, (어느 것이) 기쁘거나 싫다든가, 이롭거나 해로운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精神訓). 46] 이처럼 도가류와 같은 흐름에서 회남자는 자신의 好惡 감정을 극복, 장자의 ‘死生은 命’이라는 입장처럼 생과 사를 달관하고자 하였다.

 

언급한 바대로 장자와 회남자는 운명론적 입장에서 사생에 대해 초연한 입장을 견지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삶에서 죽음으로 바뀌는 것을 자연의 변화인 命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인간은 삶을 좋아하지도 죽음을 싫어하지도 않게 된다면서 장자는 죽음이 자연스럽게 인간을 모든 질곡에서 해방시킨다고 본다. 47]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는 자유,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는 해방감이 도가의 장자에 의해 만끽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결국 장자는 ‘조물자’를 등장시켜 우리가 죽음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강조한다. 조물자의 권능을 인간의 능력으로 거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우언적으로 자래를 등장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물자가 내 죽음을 바라는데 내가 듣지 않으면 나는 곧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니) 그 조물자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자연은 내게 형체를 주었다.」 48]

이와 같이 조물자가 死生을 주재하니, 이 조물자는 사생에 있어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는 命임을 우리에게 강조하는 상징적 주재자로 등장한다.

 

46] 마이클 로이, 上揭書, pp. 52-53 參照.

47]조민환, 上揭書, p. 180.

48]『莊子』 「大宗師」, 彼近吾死而我不聽, 我則悍矣, 彼何罪焉! 夫大塊載我以形.

 

 

4. 氣之聚散

 

도가에 있어 氣의 聚散은 우리 모든 생명체의 생과 사를 가름한다. 장자는 이러한 氣의 취산 작용을 강조하여 生死에 어떠한 괴로움도 갖지 말라고 한다. 특히 죽음이란 氣가 흩어지는 자연 현상이니 괴로움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곧 그는 말한다.

「사람이 사는 것은 氣가 모이기 때문이며, 기가 모이면 삶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음이 된다. 이처럼 죽음과 삶은 뒤쫓는 것이니 내가 또 어찌 괴로워하겠는가.」 49]

이에 氣散의 죽음으로부터 다가오는 괴로움을 극복하려는 장자의 의지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같이 죽음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이유는 氣의 聚散 작용이 장자에 있어서 자연의 존재 질서라는 사실에 있다. 인위적 사고가 아니라 자연의 변화 현상에 대한 생명체의 순응이 이것이다. 이러한 세계의 존재 질서는 인간의 생명에도 그대로 적용되면서 인간의 생명은 기운이 모이면 삶이 되고 기운이 흩어지면 죽음이 된다. 50] 존재의 질서에 있어 이러한 氣의 聚散 작용을 벗어나는 생명 개체는 거의 없다. 특히 생명체의 생존 법칙이 氣 취산 작용의 지배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에 있어 氣의 聚散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주 대자연이요, 天地이다. 따라서 천지는 氣로 충만되어 있다. 장자는 곧 말한다.

「천지란 만물의 어버이이다. 천지의 두 氣가 합쳐지면 사물의 형체가 이루어지고 두 氣가 흩어지면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51]

천지에서 두 氣가 妙合하여 사물의 형체가 이루어진다. 또 그 수명이 다하면 형체는 다시 본래의 無로 돌아간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위의 두 가지 氣는 聚散 요소의 핵심 즉 陰陽이다. 음과 양이 묘합하여 생명체가 탄생한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陰과 陽의 작용이 서로 비추고 서로 해치며 서로 다스리고 사시가 서로 교대되며 서로 생기고 죽이며 … 장수와 요절이 서로 겨루고 삶과 죽음이 이루어진다.」 52]

이처럼 氣란 음과 양으로 나뉜다. 따라서 고요할 때는 陰氣에 그 덕을 맞추고 움직일 때는 陽氣에 그 동작을 맞춘다. 陽變陰合의 현상처럼 두 氣의 특성이 동정이라는 속성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陰陽의 작용은 본체의 측면에서 보면 道에 귀속되며, 현상의 측면에서 보면 有形이 나타난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죽음이란 … 형체를 떠나 육체가 산산히 흩어지고 정신이 이 형체를 떠나려 할 때 몸도 함께 따라 無로 돌아가는 것이며 道로의 위대한 복귀이다.」53]

그리고 無形에서 유형이 생기고 有形에서 무형으로 돌아가는 원리가 밝혀진다. 이처럼 죽음과 삶은 氣의 散과 聚 즉 무형과 유형으로 이해되며, 궁극적으로 道(無)로 귀속됨을 알게 된다.

 

49]『莊子』 「知北遊」,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 若死生爲徒, 吾又何患.

50]李鍾晟, 「莊子哲學에 있어서 絶對의 解體戰略과 道의 自然性에 관한 考察」, 『道家哲學』창간호, 韓國道家哲學會, 1999, p. 174.

51]『莊子』 「達生」, 天地者, 萬物之父母也, 合則成體, 散則成始.

52]『莊子』 「則陽」, 陰陽相照, 相蓋相治., 四時相代, 相生相殺. … 緩急相摩, 聚散以成.

53]『莊子』 「知北遊」, 魂魄將往, 乃身從之, 乃大歸乎.

 

 

生死가 氣의 聚散 작용임을 인지한 장자는 그의 아내가 죽자, 육신의 정기가 흩어진 것을 알고 슬픈 감정을 개입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죽자 혜자가 문상을 갔다.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는 깜짝 놀라 그 연유를 물었다. 이에 장자는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소’라며 답한다.

 「본래 형체가 없었을 뿐이 아니라 본시 氣도 없었소.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氣가 생기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며 형체가 변해서 삶을 갖추게 된 거요. 이제 다시 변해서 죽는 거요.」 54] 이처럼 氣의 聚散 작용을 인지한 그는 아내의 喪禮에서 이를 달관, 순응하고 있다.

 

아무튼 장자는 그의 아내가 죽자 태연하였으니, 氣의 聚散으로 인해 일어난 생사 감정을 달관적 지혜로 초탈한다. 氣가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형체가 변화하는 것을 알면 질곡에서 해방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聚散 작용, 즉 자연의 변화 속에서 모든 사물은 轉生을 통하여 순환하는데, 老莊에 있어 이 轉生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55] 이 轉生論에서 보면 장자가 생과 사를 氣의 聚散으로 간주, 聚散 순환적 사생관을 이끌어 낼 수도 있을 법한 일이다.

 

54]『莊子』 「至樂」, 非徒无形也而本无氣, 雜乎芒芴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今又變而之死.

55] 이강수, 『노자와 장자』, 길, 1997, p. 44 參照.

 

 

Ⅴ. 죽음 극복의 방안

 

1. 安命 物化

 

죽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가? 설혹 정신적 성숙됨으로 이를 초극할 수 있는가 등이 궁금한 일이다. 장자는 이에 죽음 초극의 철학자라 할 정도로 이에 대한 변설을 늘어놓는다. 곧 죽음을 사물의 변화로 알아 이를 초극하자고 그는 말한다.

 「죽음과 삶 또한 중대한 일이지만, 그 변화와 함께 변하는 일이 없고,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꺼져도 역시 함께 떨어지지 않는다.」 56]

이와 같이 사물의 변화를 인지, 사물의 변화를 운명으로 알고 그대로 따르면 된다는 입장이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安命이 여기에서 시사된다.

 

그리하여 장자는 자연 변화의 安命을 강조하는 입장에 있다. 그는 이를 우언적으로 언급하는 바, 舜이 죽어갈 때 禹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그대는 명심하라. 육체는 사물의 자연스런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제일이고, 심정은 본성을 따르는 것이 제일이다」 57]

자연 현상의 변화에 순응하면 육체를 자연의 또 다른 변화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이의 공포를 벗어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운명에 편안히 하는 그의 철학적 모습이 역력하다.

 

사실 서구적 사유와 달리 죽음을 우주 영원의 안식처로 생각할 수 있다는 장자의 사유는 생명의 개체가 자연의 命으로 돌아감을 말하는 것이다. 이 命에 귀의할 수 있도록 죽음을 이해하려면 生의 문제를 알아야 하고, 生의 문제를 알면 죽음의 공포도 극복된다. 여기서 장자가 언급한 바, “죽음을 주어 나를 안식하게 한다”(息我以死)는 말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태도로서 서양 문화의 생사관과는 다르다. 58] 서구적 사조에 있어, 죽음은 편안한 휴식처로 알고 安命하자는 견해보다는 죽으면 흙과 더불어 흩어지고 공허함으로 돌아간다는 보편적 사유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安命의 입장에서 장자는 생과 사를 달관적으로 접하며, 개인의 감정 이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에 생과 사에는 기쁨이나 슬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자는 곧 말한다.

「어쩌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 그가 어쩌다 이 세상을 떠난 것도 죽을 운명을 따른 것일 뿐이다.」 59]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상태를 ‘하늘에 묵어 매닮에서 풀림’(帝之懸解)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해 슬픈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상태는 安命에 의해 가능하다.

 

56]『莊子』, 「德充符」, 死生亦大矣, 而不得與之變, 雖天地覆墜, 亦將不與之遺. 審乎無假而不與物遷, 命物之化而守其宗也.

57]『莊子』 「山木」, 汝戒之哉! 形莫若緣, 情莫若率.

58]陳鼓應 著, 최진석 譯, 上揭書, p. 304.

59]『莊子』 「養生主」, 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

 

 

죽음과 관련해서 이 安命이 더욱 가능해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장자 독특한 物化論에 기인한다. 그가 밝힌 ‘物化’란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또 다른 삶으로 전개됨(轉變)을 알 수 있다. 마치 불교의 사생 순환을 의미하는 것과 통하는 듯하다. 장자가 말하는 物化란 생물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형태 변화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사물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60] 육체가 죽으면 자연의 변화임을 알고, 자연이 어떻게 轉變을 일으키는지 간섭하지 않고 순응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장자는 物化를 통해 轉變의 사유가 전개되는 것으로 ‘나비’ 관련 꿈을 꾼다. 꿈을 통해 나비라는 개체와 자신의 관계를 일체화하였다. 장자는 언젠가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자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깨어보니 장자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도대체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꾼 것일까. 장자와 나비에는 반드시 구별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物化라고 한다.」 61]

이와 같이 장자는 호엽몽을 통해서 物化를 매우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위의 언급처럼 物化는 죽음과 관련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장자는 각의 편에서 「其死也物化」라고 했다. 죽게 되면 바로 物化가 이루어지는데, 장자는 安命的 죽음의 상징으로 物化라는 용어를 등장시킨다.

인간의 생사 문제는 이분법으로 보는 한에는 해결될 길이 없으니, 오히려 장자처럼 死를 物化로 보고, 그것이 영원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62] 라고 김충열 교수는 말한다. 物化의 죽음, 轉變의 순응 이 모두가 安命과 연결되고 있는 셈이다.

 

60]김항배, 上揭書, pp. 215-216.

61]『莊子』 「齊物論」,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62]김충열, 上揭書, p. 318.

 

 

2. 死生 一條

 

죽음을 극복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장자는 ‘死生一條’를 거론하였는데, 이는 사생에 구애되어 갇히는 삶을 극복하고 죽음과 삶을 같은 연장선으로 알라는 뜻이다. 상호 다른 존재로 보면 죽음과 삶은 영이별로 간주되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가 엄습한다. 이에 장자는 「生과 死를 하나로 보고(死生一條), 是와 非를 하나로 여기는 자로 하여금 당장 수갑과 차코를 풀어주도록 해야 한다」 63]고 하였다. 이와 같이 생과 사를 하나로 보는 능력은 시와 비를 무분별의 하나로 보는 능력과 같아서 장자의 만물제동적 견지를 대변한다.

 

이러한 장자의 ‘死生一條’라는 개념은 유숙아에 의하면 유교의 공자에 나타나는 생명 한계를 지적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유숙아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공자로 하여금 仁義를 잊게 하고 生死를 함께 보게 하고, 시비를 하나로 보게 하지 않겠는가?」 64]

도가의 장자는 사생과 인의와 시비를 각각 하나의 범주로 보아 유교의 분별적 人爲에서 겪는 한계점을 벗어나려 한 것 같다. 그래서 이를 주석한 유숙아는 장자의 공자 극복이라는 측면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死生一條’의 개념은 달리 말하면 ‘死生同狀’(천지편) 혹 ‘死生一守’(경상초편)라고도 할 수 있다. 장자는 사와 생을 하나로 보라는 입장에서 死生이 同狀이요 死生이 一守라 했다. 또 장수를 기쁨으로 알거나, 요절을 슬픔으로 알지 말라고 하였다. 이러한 분별을 극복하고 만물이 하나인 경지를 알면 모든 고통과 번뇌를 극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만물이란 한 곳간에 있고 ‘죽음과 삶이 한 모양’(死生同狀)이다.」 65]

死生이 하나이고 만물이 한 부류임을 알게 되니 어떠한 분별 망상이 고통으로 자리할 것인가?

 

이처럼 장자가 死生이 하나라는 입장을 가지게 된 이론적 배경은 무엇인가? 그에 있어 道가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道의 무차별적 경지에서 볼 경우 차별 현상은 사라진다. 그는 이에 말한다.

참된 道의 입장에서는 다같이 하나가 된다. 한쪽에서의 분산은 다른 쪽에서의 완성이며, 한쪽에서의 완성은 다른 쪽에서의 파괴이다. 모든 사물은 완성이건 파괴이건 다 같이 하나이다.」 66]

그는 이같이 ‘道에 다다른 자’만이 이러한 하나의 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분별 내지 판단에 머물지 않고 자연의 道에 귀의하기 때문이다.

 

63]『莊子』 「德充符」, 胡不直使彼以死生爲一條, 以可不可爲一貫者, 解其桎梏.

64]劉叔雅, 『莊子補正』, 新文豊出版公司 印行, 中華民國 64年, 何不使孔丘忘於仁義, 混同生死, 齊一是非.

65]『莊子』 「天地」, 萬物一府, 死生同狀.

66]『莊子』 「齊物論」, 道通爲一. 其分也, 成也., 其成也, 毁也. 凡物無成與毁, 復通爲一.

 

 

사실 道의 영원한 경지에서 보면 미분의 ‘하나’와 같은 혼돈의 상태가 된다. 이 혼돈에서 자연의 변화가 비롯된다. 이 변화 역시 영멸이 아니라 연속의 한 모습인 것이다. 이 영원은 바로 변화의 연속에서 이루어져 본래 영원인데, 그 선상에서 이탈하여 자기가 짧은 자기를 만든 꼴이 아닌가. 67]

덕충부 편에서도 「생사는 본래 일련의 연속 과정이다」(以生死者一條)라고 하였다. 死生一條인 이상 이는 道의 영속성에 있으며, 이에 생과 사는 하나의 혼돈에서 구별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한 경지가 체득될 때 생과 사는 하나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장자는 死生이 하나임을 아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라고 반문한다. 당시 자사 자여 자려 자래 네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과연 無를 머리로 삼고, 삶을 등골로 알며, 죽음을 꽁무니로 여길 수 있을까. 또 누가 과연 죽음과 삶, 있음과 없음이 하나임을 알 수 있을까. 그런 자와 벗삼고 싶구나.」 68]

이와 같이 장자는 네 사람을 우언적으로 등장시켜 死生을 一條로 보고 同狀으로 보는 자와 벗삼고 싶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마침내 장자가 벗삼고 싶은 사람은 사생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어디에도 구애됨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천하란 만물이 하나가 되어 깃든 곳이라고 한다.

이 하나가 되어 있음을 깨닫고 만물과 하나가 되게 하면 사지나 몸의 각 부분은 티끌과 같이 되고 죽음과 삶, 끝과 시작은 낮과 밤이 바뀌듯 되어 마음이 어지럽혀지지 않는다.」 69]

우주 천하는 만유가 하나로 용해된다. 여기에서 死와 生은 주야가 바뀌듯 연속적인 변화에 불과하므로, 죽음이라는 영이별의 사유를 갖지 않는 단서가 성립된다.

 

67]김충열, 上揭書, p. 318.

68]『莊子』 「大宗師」, 子祀子輿子犁子來四人相與語曰, 孰能以無爲首, 以生爲脊, 以死爲구, 孰知死生存亡之一體者, 吾與之友矣.

69]『莊子』 「田子方」, 得其所一而同焉, 則四肢百體將爲塵垢, 而死生終始, 將爲晝夜而莫之能滑.

 

 

3. 喪我 忘年

 

忘我와 喪我란 달리 말해서 주객 미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또 자아 무분별의 경지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나’라는 개체가 인식의 상태로 들어오지 않으니 미분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몰입하다가 일종의 주객 미분 혹은 불분명한 상태에서 일체감을 느끼는데, 忘我하거나 주체와 객체가 일치되면서 자아의 구별 의식마저도 놓아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70] 이처럼 망아는 자타 미분이 되고 주객이 홀연하여 死生의 구분도 자연히 없게 된다. 자신을 잊었으니 생과 사가 인식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한다.

 

이에 장자는 생과 사를 잊고 자신을 잊기 때문에 생과 사에 대해 어떠한 감성도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같이 생과 사에 대한 인간의 好惡 감정을 잊는 경지가 다름 아닌 자신의 육신을 잊는 ‘忘其身’ 혹 忘我인 것이다. 장자는 이에 말한다.

「오직 충실히 일을 하고 제 자신을 잊는 것(忘身)이다.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할 여유 따위가 어찌 있겠는가?」 71]

그의 언급처럼 자신을 잊는 망아의 상태가 되니 사생의 슬픔과 기쁨의 감정에서 벗어나 결국 사생 초탈에 이른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망아의 상태에서는 자신의 육체 구성요소 중 어느 것도 구분되지 않는 미분의 상태에 들어간다. 장자는 자상호, 맹자반, 자금장을 예로 들어 그들은 생과 사를 군살이나 곪아터진 것으로 여긴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장자는 말한다.

「대체 이런 인물들이 어찌 죽음과 삶의 우열 소재 따위를 아랑곳하겠느냐. 갖가지 다른 것을 빌려 (잠시) 하나의 몸이 되고, 간이나 쓸게 따위를 잊고(忘肝膽) 눈․귀도 잊은 채(遺耳目) 삶과 죽음을 끝없이 되풀이하며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한다.」 72]

이들이 갖는 경지는 육체 요소 즉 이목․간담도 잊는 망아의 진경이다.

 

이같은 忘我는 장자 수양론에 있어 심재와 좌망의 모습과 같다. 장자가 말하는 망아로서의 심재와 좌망은 자신의 개체 분별을 잊는 일이다. 그가 밝히는 심재와 좌망을 통하여 外物, 忘己, 無己, 無情, 虛靜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세계와 자아 사이의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게 된다. 73] 이 같은 세계 지평은 장자가 말하는 自然에 합일하는 것으로, 곧 大通과도 같다. 따라서 망아의 여러 가지 현상으로서 忘己나 無己는 생과 사에 구애 없는 無情이나 虛靜의 경지로 진입한다.

 

70]임채우, 「老莊의 세계이해 방식-整體와 部分」, 『道敎와 自然』, 도서출판 동과서, 1999, p. 66.

71]『莊子』, 「人間世」, 行事之情而忘其身, 何暇至於悅生而惡死

72]『莊子』 「大宗師」, 夫若然者, 又惡知死生先後之所在! 假於異物, 托於同體., 忘其肝膽, 遺其耳目., 反覆終始, 不知端倪.

73] 이성희(해양대), 「莊子 철학의 미학적 구조-物我 관계를 중심으로」, 『道家哲學』 第2輯, 韓國道家哲學會, 2000, p. 183.

 

 

그리하여 심재 좌망의 모습이 고목과 같고 死灰(불꺼진 재)와 같이 되는 것이다. 곧 장자는 우언적으로 남곽자기를 등장시켜 ‘멍하니 자기의 존재를 잊은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제자 안성자유가 육체는 본래 고목처럼 될 수 있고, 마음은 본래 불꺼진 재처럼 될 수가 있다는 것인가 라고 묻는다. 곧 남곽자기는 대답한다. 「지금 나는 내 존재를 잊어 버렸다. 너는 그걸 알 수 있겠느냐.」 74]

그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상태를 ‘喪我’라고 하였다. 이처럼 喪我가 된다면 육체나 마음의 생멸에 구애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것이 장자에게 고목과 死灰로 나타난다.

 

결국 장자는 생사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이도 잊고 의리도 잊는다’(忘年忘義)고 하였다. 나이를 잊으니 생과 사의 단촉됨에 구애될 리 없다. 이같이 그는 제물론 편에서 나이를 잊어 생사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나이와 생사에 구애됨이 없으니 無己가 되고 喪我가 될 수밖에 없다. 곧 無己가 되든지 喪我가 되든, 혹 坐忘을 하든 마음이 그의 원 위치, 즉 집을 찾아서 靈明性의 기능을 갖출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장자수행 공부의 관문이다. 75] 그리하여 장수나 요절이 그를 괴롭히지 않고 생사 초탈이라는 수행의 진수를 누리게 된다.

 

이에 장자는 忘我(육체를 객사로 여김)하니 死生이 그를 두렵게 하지 못한다고 하며 이 같은 경지를 체득하도록 한다. 그는 이에 말한다.

「天地를 뜻대로 다루고 만물을 내 것으로 삼으며, 육체를 한갓 객사로 여기고 귀와 눈을 가상으로 알며, 모든 지적 인식을 통일시켜서 정신적으로 죽음을 초월한 자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76]

그런 까닭에 死生이 그의 마음속에 머물지 않는다(死生驚懼不入乎其胸中)고 달생 편에서 말한 것이다. 이처럼 忘我와 忘年의 방법을 실천하고 보면 두렵게 여겨지던 죽음의 문제는 초연히 극복될 수 있다.

 

74]『莊子』 「齊物論」, 今者吾喪我,汝知之乎?

75]김충열, 上揭書, pp. 277-278.

76]『莊子』 「德充符」, 官天地, 府萬物, 直寓六骸, 象耳目, 一知之所知, 而心未嘗死者乎!

 

 

4. 時空 超脫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데 있어 시공 초탈의 세계를 상정할 수 있다. 이는 주로 시공과 死生의 절대적 견지보다는 상대적 접근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상대적 세계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상대적으로 접근하여 보는 신비적 세계이다.

「上古보다 더 오래 전부터 있어 왔어도 장수한다 하지 않으며, 하늘을 싣고 땅을 덮은 채 갖가지 형상을 조각해 내도 교묘하다 하지 않는다.」 77]

이같이 말하는 장자의 시공 이해는 상대적이다. ‘上古’라는 긴 시간 동안 존재하더라도 장수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곧 상대적 시간 이해이며, 여기에 死生 이해가 상대적으로 접목된다.

 

이에 상대적 시공 이해에 있어 시공 초탈이 가능해진다는 단서가 성립된다. 이는 시공에 의지하는 개체의 생명이 자연의 道와 합일될 경우이다. 그리하여 시공간 안에서 지배를 받는 생명체는 道의 초탈적 세계와 합류한다. 사실 사물은 물리적․기하학적인 시․공간 안에서 인과율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道는 이러한 일체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난다(『莊子』 「秋水」, 道無終始, 物有生死). 78] 곧 장자는 인간의 死生에 대한 접근 자세가 절대적 도와 합일하는 자신의 시공 초탈관에 기반되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시공을 초탈할 수 있는가? 기본적으로 死生에 구애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삶의 애착 즉 욕심을 버려야 한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을 죽이고 초월하는 자에게 죽음은 없고 삶을 살려고 탐하는 자에게 삶은 없다.」 79]

이와 같이 생에 집착되어 오래 살려고 보면 그에게는 오히려 죽음이 두려울 뿐 장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변화와 더불어 사생을 사적인 욕심 없이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변화 속에서 안정을 찾자는 장자의 견해이다. 나의 안정된 마음에서 사생의 고통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장자는 생명체의 죽음, 즉 死生의 고통을 몰랐다는 것인가? 물론 알고 있었지만, 천지 일월과 합일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死生에 대한 이해의 시각이 시공초탈적이다.

「나는 해와 달빛과 나란히 빛나며 천지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나를 향해 누가 찾아와도 멍하니 무심하고 내게서 멀리 떠나버려도 멍하니 무심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모두 죽지만 나만은 홀로 살 것이다.」 80]

그가 천지 일월과 영원함을 느끼고, 또 인간들은 사생을 반드시 겪지만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하는 신비적 경지는 그의 독특한 시공 초탈의 자세에서 가능한 일이다

 

77]『莊子』 「天道」, 長於上古而不爲壽, 覆載天地刻雕衆形而不爲巧.

78]李鍾晟, 「莊子哲學에 있어서 絶對의 解體戰略과 道의 自然性에 관한 考察」, 『道家哲學』창간호, 韓國道家哲學會, 1999, p. 170.

79]『莊子』 「大宗師」, 殺生者不死, 生生者不生.

80]『莊子』 「在宥」, 吾與日月參光, 吾與天地爲常, 當我, 緡乎! 遠我, 昏乎! 人其盡死, 而我獨存乎!

 

 

사실 老莊은 인간의 개체가 시공에 처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가를 인지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거대한 우주에 내맡기고 자연에 합일하는 마음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선보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道家들은 무한한 시공간과 마주서서, 개체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거대한 우주의 힘이 개체로 구현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81] 이에 장자는 무력한 자신의 육신을 우주 대자연에 합일함으로써 자신의 시공적 한계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낸 위대한 철학자였다.

 

이처럼 시공을 초탈하는 이상적 인물로는 至人과 神人․眞人 등이 거론된다. 곧 장자는 「지인이야말로 신비로운 존재여서 … 구름을 타고 해나 달에 올라앉아 이 세상 밖에 나가 노니는 것이다」 82]라고 하였다.

그리고 소요유 편에서는 藐姑射 산에 신인이 살고 있는데, 그는 ‘구름을 타고 용을 몰아 천지 밖에서 노닌다’(乘雲氣, 御飛龍, 而遊乎四海之外)고 하였다. 아울러 眞人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뜨겁지 않다(대종사편)고 하였다. 이처럼 공간을 초월하여 천지 밖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성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결국에 이들이 시공을 초탈하여 사생을 잊는다는 것은 천하 편에서 밝혔듯이 ‘위로 조물자와 노닐고’(與造物者遊) 아래로 ‘사생을 잊고’(外死生) 사는 초월자와 더불어 노니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장자의 형이상학은 道의 세계를 무궁한 시공 범주 속에서 투사하고, 그 작용에 따라 원기 왕성하게 모두를 다 발휘하게 하여, 생명 정신의 최고 경지를 이룬 것이다. 83] 장자가 죽음을 초월하는 이유도 무궁한 시공계에 자신을 내던지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생명 에너지를 최대한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81]존 K. 페어뱅크 外 2인著/김한규 外 2인譯, 『동양문화사』(상), 을유문화사, 1999, p. 60.

82]『莊子』 「齊物論」, 至人神矣, … 若然者, 乘雲氣, 騎日月, 而遊乎四海之內.

83]方東美 지음/남상호 옮김 『원시유가 도가철학』, 서광사, 1999, p. 341.

 

 

Ⅵ 결 론

 

死生의 문제는 인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고대 철학자들은 이처럼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해결하는데 진력해서 그들의 깊은 사유세계를 전개하였다. 장자는 이러한 사유에 몰두하는데 있어 중국의 고대 철학자들 중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마치 죽음의 고통을 몰아내는 구세주와도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자는 ‘온전함’(全)을 강조하면서 死生에 구애되기 쉬운 육체와 정신의 온전성을 강조한다. 이 같은 경지는 得道와도 같은 것이며, 장자는 이를 천지 편에서 ‘執道’라고 하였다. 이는 聖人의 삶을 구가하는 것인데, 그는 성인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을 (이 세상에) 맡긴 채 백성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아무 구애도 받지 않는 자유롭고 소박한 그대로의 온전함이다.」 84]

만일 道와 멀리하는 고통의 삶이란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며,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면 심신의 온전함을 잃고 결국 죽음의 공포에 구애되고 만다.

 

하지만 중국 고대의 철학에서 도가와 달리 유가의 死生 이해가 매우 규범적인 점은 고려할만한 일이다. 유가는 ‘殺身成仁’을 강조하여, 죽음으로 仁을 이루라는 규범을 말하고 ‘捨生取義’를 강조하여 義를 이루라고 하는 등 죽음의 희생정신을 강조하므로 현실 치세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가의 사생관은 유가의 시각과는 다르다. 특히 장자가 생사를 단순히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그가 사회적 책임이나 도덕적 의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85]

여기에 장자의 사생관이 비판받을 수 있는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사생에 대한 시각 차가 있음은 어쩔 수 없지만 현실 치세와 무위 자연의 가치관 차이 때문이 아닌가 본다.

 

논자 역시 장자의 사생관을 요해함에 있어 이러한 유가적 시각 부각에 소홀한 점이 있기도 하다. 다만 장자가 사생에 대한 그의 분명한 관점을 다양하게 조망하고 있어서 그 구체적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장자 중심의 시각을 전개하였다. 그는 사생관 전개에 있어 死生本無, 化生化死, 死生命也, 氣之聚散이라는 체계적 시각을 분명히 했다. 또 죽음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安命 物化, 死生 一條, 喪我 忘年, 時空 超脫이라는 관점을 초지 일관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여기에서 차기 과제로 유가의 사생관 내지 노자의 사생관도 거론됨직한 일이다.

 

아무튼 장자의 사생 초탈의 문제는 생명 현상에 대한 상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死生은 철학적으로 우리가 사고하는 절대적 시간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도 된다.

道 즉 자연의 변화 개념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그의 死生論은 종교의 구도자처럼 得道와 같은 종교적 경건성까지 요구하는 인상이다. 우리가 죽음의 공포를 지나치게 갖고 있다면 장자의 이 같은 구도적 경지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84]『莊子』 「天地」, 託生與民竝行而不知其所之, 汒乎淳備哉!

85] 조민환, 上揭書, pp. 193-194.

 

 

참 고 문 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