莊子의 자유인의 삶의 모습 *이순연(단국대학교)
요약
모든 사람들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그 어떤 구속에 매여 있는 것을 싫어하고 자유롭기를 원한다. 만약에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곳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갖고 싶은 물건을 가지지 못할 때나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 혹은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할 때 그것에 대한 집착과 갈망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착이나 욕심 때문에 스스로를 구속한다. 사실 욕심을 버리고 집착을 끊어 버리면 쇠사슬에 얽매인 마음이 풀어지면서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지만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종이 되어 탐욕에 끌려 다닌다.어쩌면 한 뼘 밖에 되지 않는 감옥 속에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그 안에서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莊子의 입장에서 보면 있고 없는 것도 별 의미가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차이가 없으며 높고 낮음도 결국엔 모두가 땅위에서 시작했을 뿐인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올려다보고 비교하면서 자신을 점점 고통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좋아 보이는 것에 미혹되어 자신을 구속하고 있으니 그 좋아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오면 참다운 편안함과 고요함을 만끽할 수 있다.
莊子는 인간을 구속하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은 外物로 인한 成心으로 보아 心齋와 坐忘을 통하여 수행을 하여 성심을 제거하고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본심인 常心으로 돌아가면 대립이나 편견에서 벗어나게 되니 자연적으로 욕망과 집착이 없어지면서 온갖 구속의 쇠사슬에서 벗어난다. 그 경계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이 자신의 아픔과 고통으로 공감되면서 자신의 깨달음의 목적이 결국엔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어 혼자 고요함과 평온함에서 자유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다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이웃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莊子가 그렇게 원했던 자유인의 삶의 모습일 것이다.
주제분류: 고대중국철학, 장자철학
핵 심 어: 常心, 成心, 心齋, 坐忘, 自由
Ⅰ. 들어가는 말
모든 사람들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어떤 구속에 매여 있는 것을 싫어하고 자유롭기를 원한다. 만약에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곳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갖고 싶은 물건을 가지지 못할 때나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 혹은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할 때 그것에 대한 집착과 갈망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집착이나 성취욕 등의 사슬에 매여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다. 사실 욕심을 버리고 집착을 끊어 버리면 쇠사슬에 얽매인 마음이 풀어지면서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지만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종이 되어 탐욕에 끌려 다닌다. 어쩌면 한 뼘 밖에 되지 않는 감옥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莊子의 입장에서 보면 있고 없는 것도 별 의미가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차이가 없으며 높고 낮음도 결국엔 모두가 땅위에서 시작했을 뿐인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올려다보고 비교하면서 자신을 점점 고통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좋아 보이는 것에 미혹되어 자신을 구속하고 있지만 그 좋아 보이는 것의 실상을 깨닫고 분별심을 없애면 진정한 편안함과 고요함을 만끽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구속하고 있고 그 구속에서 벗어나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을 때 그 이후의 삶은 어떠한지를 莊子의 자유사상과 곽암선사의 십우도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Ⅱ. 무엇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는가?
인간은 어떤 구속을 받고 있을 때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이 사회제도나 관습 혹은 종교나 혈연관계 등의 외적인 면뿐만 아니라 내적인 인간관계나 자신의 문제로 인한 구속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각가지 욕망들로 인하여 받는 구속은 더욱 힘들다. 볼 수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생겼기에 그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희노애락을 느끼며 살고 있으며 도대체 그 마음이란 것이 어떤 것이기에 다스리기가 어려워 마치 노예처럼 끌려 다니는지 이에 대해 莊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기 쉬워서 누르면 내려가고 일으키면 올라간다. 그 오르고 내림이 마치 감옥에 갇히거나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해로운 것이다. 부드러워서 강한 것을 유약하게 하고 모난 것을 깍고 그 뜨겁기는 마치 타는 불과 같고 그 차가움은 찬 얼음과 같다. 그 빠르기는 순식간에 사해의 밖을 두 번이나 돌 수 있고 그 거처함은 깊은 못과 같이 고요하다. 그 움직임은 하늘만큼 동 떨어진다. 억세고 오만하여 매어 놓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인간의 마음뿐이다.” 1]
1]. 「在宥」: “人心排下而進上, 上下囚殺, 淖約柔乎剛彊, 廉劇彫琢, 其熱焦火, 其寒凝冰. 其疾俛仰l之間而再撫四海之外, 其居也淵而靜, 其動也縣而天. 僨驕而不可係者, 其唯人心乎!”
마음이란 너무도 변화무상하여 예측하기 힘들고 섬세하면서도 상당히 예민하여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 “그 몸이 늙어감에 따라 마음도 그 같이 늙어간다면 어찌 큰 슬픔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생애란 본래 이렇듯 어리석은 것일까? 나만 홀로 어리석고 사람들 중에는 역시 어리석지 않는 자들도 있는 것일까? 대체로 자신에게 자연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마음에 따라 이를 스승으로 삼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스승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2] 라고 말했는데 이는 형체가 변화됨에 따라 마음도 그 형체와 더불어 변화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대체로 개인의 편견에 따라서 기준을 삼는다면 모든 사람은 각자의 기준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혼란을 초래하므로 개인의 편견에 의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또한 자기중심에 근거를 두고 행동하게 되면 인간은 자연의 본연함을 상실하여 道로부터 이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莊子는 인간의 일상적인 마음의 양상이 대체적으로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때때로 자기 자신을 혼란스럽게 할뿐만 아니라 사회까지도 소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며 사람의 마음을 常心과 成心으로 구별하였다.
2]. 「齊物論」: “其形化, 其心與之然, 可不謂大哀乎? 人之生也, 固若是芒乎? 其我獨芒, 而人亦有不芒者乎?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莊子는 「德充父」에서 本然之心으로 표현되는 常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계가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수양함에 있어서 자기의 지혜로 그 마음을 터득하고 스스로의 마음으로 그 변함없는 常心을 터득했습니다.’”3]
3]. 「德充父」: “常季曰 : 彼爲己. 以其知得其心, 以其心得其常心.”
여기서 말하는 常心이란 虛寧하여 일체의 사고나 감각지 등이 들어올 수 없는 마음이며 하늘이 본래부터 부여한 그대로를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마음으로 순수하고 전혀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은 마음이다.
이는 다른 말로 一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본래부터 부여받은 맑고 깨끗한 분별지가 없는 無心의 마음으로 그 어떤 편견이나 오염에 물들지 않은 상태이다.
반면 成心은 어떤 마음인가? 成心이란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의지작용으로서 주관적 견해 발생의 심리적 근거이며 이 成心에서 是非가 나와 자기주장을 설립하는 각 주체의 상호 대립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 현상을 낳는다.
특히 인간에게 심리적 고통을 주는 근본 원인을 外物과 인간의 감정에 대한 집착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집착된 마음이 成心이다. 이것이 자기 자신을 바로 알게 하지 못하게 하며 모든 문제의 근원을 나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고 是非를 통해 상대에게서 찾게 만들기 때문에 이러한 成心을 제거하지 않으면 마음은 자유롭고 편안한 상태를 이룰 수 없으며 늘 괴로워한다.
그래서 莊子는 인간 본래의 마음으로 복귀하려면 이 成心을 초월하여 자기중심적인 자의적인 가치판단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라고 하였다. 즉, 인간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보다 깊이 성찰하여 성숙한 인격형성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함을 강조한 것이다. 왜냐하면 成心은 모든 주관적인 是非나 독단적인 태도 및 배타적인 현상을 만들어내는 근원으로 자기중심적인 ‘나’라는 관념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삶이 힘들고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비교나 경쟁이 바로 ‘나’와 ‘너’라는 구별이 있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또 이것 아닌 것도 없다. 스스로 자기를 저것이라고 한다면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자기를 이것으로 본다면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생겨나고 이것 또한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저것과 이것은 방생의 설이다.”4]
4]. 「齊物論」: “物無非彼,物無非是. 自彼則不見,自是則知之. 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 彼是方生設也.”
사람은 태어나서 살면서 ‘나’라는 것을 형성하고 ‘나’라는 것에 의해서 경험속의 사물이나 사건들은 차별되거나 취합되면서 스스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아는 것만을 고집하게 된다. 일상적인 지식 또한 자기중심적인 ‘나’에 의해서 취합되기에 주관과 객관의 분열이 있고 이러한 분열이 대립과 투쟁을 만들게 되면서 인간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되었다.
「齊物論」에서 “무릇 일정한 成心에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어느 누가 스승이 없는 사람이 있으랴. 어찌 눈앞에 차례로 나타나는 감정을 판별하는 현자라야만 스승을 가지게 된다고 하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스승은 있는 법이다. 마음에 성견이 없는데 是非의 판단이 생긴다 함은 오늘 월나라로 떠나 어제 거기에 도착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셈이 된다.” 5]라고 말했다.
5]. 「齊物論」: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 愚者與有焉. 未成乎心而有是非, 是今日適越而昔至也. 是以無有爲有.”
즉, 인간 모두가 成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항상 자기가 옳다고 하는데서 是非와 분쟁이 생기기 때문에 成心이 眞僞를 가리는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 결국 인간사회의 모든 是非논쟁은 인간이 成心을 표준으로 삼아 모든 것을 자기기준에 맞추려 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모든 문제의 근원과 是非를 밖에서 찾으려 하기에 계속해서 고통스럽게 보낼 수밖에 없다.
“‘알지 못하면 세상 사람은 저를 어리석다고 하고 알고 있으면 오히려 이것저것 제 몸을 근심케 합니다.
또 어질지 않으면 남을 해치게 되고 어질면 오히려 남의 몸을 걱정하다가 내 몸을 염려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제가 불의한 짓을 하면 다른 사람을 손상하게 되고 의로우면 오히려 저 자신을 근심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제 괴로움을 康桑楚에게 간청하여 선생님을 찾아와 묻게 된 겁니다.’
남영주의 물음에 老子가 대답했다.
‘당신이 이것저것 번거롭게 신경을 쓰는 것은 마치 부모를 잃었다고 해서 장대를 내걸고 바다를 찾아다니는 것과 같소. 당신은 이미 본성을 잃은 사람이며 걱정으로 마음이 멍청해져 버렸소. 당신이 자기 본래의 본성으로 되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으니 정말 불쌍하군요.’” 6]
6. 「康桑楚」:
“南榮趎曰: ‘不知乎? 人謂我朱愚. 知乎? 反愁我軀.
不仁則害人, 仁則反愁我身;
不義則傷彼, 義則反愁我己. 我安逃此而可?
此三言者, 趎之所患也, 願因楚而問之.’
老子曰: ‘向吾見若眉睫之間, 吾因以得汝矣, 今汝又言而信之. 若規規然若喪父母, 掲竿而求諸海也. 女亡人哉, 惘惘乎! 汝欲反汝情性而无由入, 可憐哉!”
여기에서 남영주의 마음이 곧 成心이다. 그에게 지식이란 알지 못하면 남들이 나를 어리석다 하고 알면 그것이 자신의 몸을 근심케 하는 것이니 깨달음을 얻지 못한 모든 인간의 삶은 道를 얻은 사람의 눈에는 ‘마치 부모를 잃고 장대를 들고 부모를 찾아 바다를 찾아다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成心을 가질 때 발생되는 모든 집착과 탐욕 때문에 마음이 구속되어 고통의 나날을 보내며 그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사실 자유라는 것은 가지는 것도 만드는 것도 아니다.
본래 모두의 마음에 다 들어 있는데 成心에 가려져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니 자신의 마음속을 고요히 들여다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엇인가? 莊子는 인간의 마음은 바로 物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 것은 物에 구속되어 있는 인간의 마음이 바로 成心을 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莊子가 말하는 物의 의미는 매우 다양한 것으로 모든 사건과 사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식․욕망․감정․인의예악 등이 다 物에 포함된다.
우선 “무릇 모양과 象과 소리와 색을 갖는 것은 모두 物이다.” 7]에서는 감각의 대상이 되는 것을 物이라 했고 “언어로 논의할 수 있는 것은 物의 조야한 것이요 의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物의 정미한 것이다.” 8]와 “지사는 변란으로 지모를 쓸 일이 없으면 즐겁지 않고 변사는 제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으면 즐겁지 않으며 찰사는 말다툼해서 상대방에게 이기지 않으면 즐겁지 않다. 이들을 모두 物에 구속되어 있다.” 9] 에서는 의식하는 대상들도 物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천하 사람들은 모두 仁義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달린다. 이야말로 仁義로써 사람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것을 한번 말해보자. 하․은․주 삼대 이후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物 때문에 자기의 본성을 바꾸지 않는 이가 없다.”10]라고 말하면서 도덕적 가치도 物에 해당하며 심지어 사람도 物에 포함시켜 “자연으로부터 명을 받아 오직 요 ․ 순 임금이 우뚝하고 바르니 만물의 으뜸이다.”11]라고 말했다.
“物의 양에는 끝이 없고 시간은 멈춤이 없으며 각기 사물의 운명도 차례로 변하여 일정함이 없고 처음과 끝은 되풀이 되어 집착이 없소.” 12]에서는 무한하고 끝이 없는 양을 가진 物은 그 모습과 상태가 일정하지 않으며 시공간적 위치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말했다.
7]. 「達生」: “凡有貌象聲色者,皆物也.”
8]. 「秋水」: “可以言論者, 物之粗也; 可以意致者, 物之精也.”
9]. 「徐無鬼」: “知士無思慮之變則不樂, 辯士無談設之序則不樂, 察士無凌誶之事則不樂, 皆囿於物者也.”
10]. 「駢拇」: “天下莫不奔命於仁義, 是非以仁義易其性與? 故嘗試論之, 自三代以下者, 天下莫不以物易其性矣.”
11]. 「德充符」: “受命於天,唯堯舜獨也正, 在萬物之首.”
12]. 「秋水」: “夫物, 量無窮, 時無止, 分無常, 終始無故.”
이처럼 항상 변화하고 있는 物의 특성으로 “天地의 만물은 각기 모두 종류가 다르고 형체가 다르므로 서로 이어가며 변화하게 마련이다. 처음과 끝이 고리 같아서 그 순서를 알 수 없다.”13]라고 말했다.
“그 마음이 겉으로 들어나는 것은 物에 통하려 함이다”14]라고 했는데 여기서 겉으로 들어난다는 것은 본래의 위치를 떠나 밖으로 질주하는 것을 말한다. 즉, 마음이 物의 유혹을 받으면 겉으로 들어나고 그러한 마음은 物을 따라 옮겨가며 是非나 好惡이 생겨난다.
“태어난 때에 편안히 머물고 자연의 도리에 따르면 슬픔이나 즐거움이 끼어들 수 없다. 이것이 옛날에 말하던 懸解라는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그 속박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건 外物이 얽혀 매듭져 있기 때문이다.”15]
13. 「愚言」: “萬物皆種也, 以不同形相禪, 始卒若環, 莫得其倫.”
14. 「天地」: “其心之出, 有物採之.”
15. 「大宗師」: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此古之所謂縣解也. 而不能自解者, 物有結之.”
이처럼 인간들 대부분은 이러한 物에 묶여서 자신의 주체성도 정체성도 잊고 본연의 순수한 마음도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자신이 갈망하는 무엇인가에 얽매여 여러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번뇌하는 것이다.
“物은 왜 그런지 알 수 없으나 형체 없는 것에서 형체를 취하고 그 형체는 끊임없이 변화하여 단 한시도 일정한 법이 없다. 物의 죽음이나 삶은 천지와 함께 영원히 순환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物의 정기마저 떠나는 것일까? 物은 정해진 곳도 없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처럼 이 세상에는 온갖 物事가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지만 그 가운데 단 하나도 의지할 만한 것이 없다. 옛날 聖代의 도술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있었다. 莊周는 이러한 취지를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16]
16]. 「天下」: “芴漠無形變化無常. 死與生與天地竝與神明往與. 芒乎何之. 忽乎何適. 萬物畢羅莫足以歸. 古之道術有在於此者 莊周聞其風而設之.”
Ⅲ. 어떻게 자유에 이를 것인가?
莊子는 사람들이 物로 인하여 구속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부자유한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자기가 될 수 있는가를 갈망하면서 物에 얽힌 마음을 해체하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방법으로 心齋와 坐忘을 말했다.
우선 心齋란 마음 안에 일체의 긍정적인 가치들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경험을 통하여 집착하였던 관념들을 해체하는 방법이다.
莊子는 “너는 정신을 통일하라. 귀로 듣지말고 마음으로 듣도록 하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운의 질서를 통하여 듣도록 하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의 기능은 사물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지만 기운의 질서는 虛하면서도 일체의 사물에 응한다. 道는 오로지 虛에 모인다. 虛가 ‘心齋’이다.”17]라고 말했다.
17]. 「人間世」: “若一志, 無聽之以耳而聽之以心, 無聽之以心而聽之以氣! 耳止於聽, 心止於符. 氣也者, 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虛者, 心齋也..”
즉,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여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어서 감각적 욕망을 배제하고 마음속에 깃들어 있던 분별지를 제거하여 정신을 순수하고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에 대한 추구이며 그 추구란 부귀, 장수, 명예, 몸의 안락 등으로 자기 아닌 것에 대한 갈망이다. 이런 욕망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만나면 곧 소멸되나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계속해서 강한 욕구로 남아서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자연의 본연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心齋란 이목과 마음을 버리고 기운의 성질이 자득하는 바에 부합하여 虛로써 만물에 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감각적 지식과 이성적 지식을 부정하고 기운의 공능을 통하여 세계를 알게 한다.
心齋와 관련된 기운은 무엇보다도 지각기능을 지닌 마음의 부정적인 양상을 무력화하고 이를 폐기하는 해체적 기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기운이 虛를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응하게 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虛를 極致로 삼는다.’라는 것은 自我가 정기의 집중으로 말미암아 無知無慾을 체득하면서 고요한 상태로 텅 비게 되며 이렇게 텅 비어있어야 일체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포용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心齋이다.
外物이나 사욕, 또는 잘못된 감각이나 분별에 의하여 흐려진 마음의 상태인 成心을 본래의 허정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돌려진 인간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소박한 마음을 지닌 선한 존재로 회복되어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고 개체의 생명의 자유를 존중한다. 이러한 인간은 어떤 초월적이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인간 본래의 본성을 찾아 만물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자연적 인간이다.
이런 자연적인 인간이 되려면 극단적인 사고․善惡판단․허구적 自我개념․불신․소외․욕심․집착․주저․조급 등을 버려야한다. 이러한 마음들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인간 본래의 마음을 찾게 되니 成心이 없어지고 본래의 마음 상태인 常心이 되어 物에 집착하지 않게 되어 얽매였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莊子사상의 최대 목표는 모든 상대성을 뛰어 넘어 절대에 대한 확실성을 얻으려는 자유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세상사의 잡다한 차별을 잊어버리고 초월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식을 없애야 하는데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구별과 차이를 알게 해 주기 때문에 지식을 버린다는 것은 상대를 잊고 넘어서는 것으로 모든 차별을 넘어서서 이르게 되는 하나의 무차별의 세계로 이끄는데 이를 莊子는 坐忘이라고 했다.
莊子는 「大宗師」에서 말하기를 “顔回가 ‘저는 나아졌습니다.’라고 말하니 仲尼가 대답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顔回가 다시 ‘저는 仁義를 잊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니 仲尼가 ‘좋지만 아직 멀었다.’한다.
다른 날에 다시 顔回가 仲尼를 보고 ‘저는 더욱 나아졌습니다.’라고 말하니 仲尼가 ‘무슨 말이냐?’하고 물으니 ‘저는 禮樂을 잊었습니다.’라고 답변을 한다.
仲尼가 다시 ‘괜찮으나 아직 멀었다.’라고 말한다. 또 다른 날에 顔回가 다시 仲尼를 보고 ‘저는 전보다 더욱 나아졌습니다.’ 仲尼가 묻기를 ‘무슨 말이냐?’하니 顔回가 대답하기를 ‘저는 坐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니 仲尼는 놀라서 ‘무엇을 坐忘이라고 하느냐?’고 물으니 ‘四肢와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없애고 形體를 떠나고 지식을 버려서 大通하는 道와 합하는 것을 일러 坐忘이라고 합니다.’
이에 仲尼는 ‘大道와 한 가지가 되면 好惡의 차별심이 없어지게 되고 변화에 순응하면 하나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너는 과연 현인이다. 나 너의 뒤를 좇으리라.’”18]라고 했다.
18]. 「大宗師」: “顔回曰, 回益矣. 仲尼曰, 何謂也? 曰, 回忘禮樂矣. 曰, 可矣, 猶未也. 他日復見曰, 回益矣. 曰, 何謂也? 曰, 回忘仁義矣. 曰, 可矣, 猶未也.
他日復見曰, 回益矣. 曰, 何謂也? 曰, 回坐忘矣. 仲尼蹴然曰, 何謂坐忘? 顔回曰, 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仲尼曰, 同則無好也. 化則無常也. 而果其賢乎! 丘也請從而後也.”
여기에서 顔回는 먼저 仁義를 잊고 다음에 禮樂을 잊고 최종적으로 感覺이나 思慮의 절대화를 잊어버리는 순서를 거쳤다. 최종적인 坐忘을 통해서 모든 차별적인 是非를 잊고 형체에만 집착하는 것을 벗어 던질 수 있게 된 것이다. 坐忘은 心齋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心齋가 마음을 無知無慾의 고요한 상태로 텅 비게 하여 일체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포용할 수 있는 하나의 氣의 상태로 환원시키는 것이라면 坐忘은 氣로 환원된 心齋의 상태로 자기를 잊고 모든 사물도 잊고 결국엔 自他와 內外가 없어지면서 모든 만물과 하나 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心齋가 物我兩忘의 단계 이전에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과정으로 비우는 단계라면 坐忘은 깨끗이 비워진 마음이 모든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 어떤 구별은 없지만 각자 개체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서로를 비교하여 優勢나 美醜 또는 善惡 같은 가치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이를 “天地與我並生, 萬物與我爲一.” 즉, 萬物齊同 혹은 齊物論이라고 한다. 이는 心齋와 坐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결과이고 미혹된 마음도 이것을 통하여 본성을 회복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物에 얽힌 마음을 해체하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방법으로 心齋와 坐忘이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心齋와 坐忘의 경지를 어떻게 현실생활에 적용하여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갈 것인가?
우선, 자기를 비워야 한다.
세상의 온갖 물질적인 탐욕과 집착을 가지고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을 수가 없고 또한 자신의 근원인 고향
으로 돌아갈 수가 없으니 마음속의 모든 것을 비우고 또 비워내야 한다. 그래서 “육신을 버리고 지식을 제거하면 大通과 동화된다.”19], “지식과 기교를 제거하고 자연의 이치에 따른다.”20], “당신의 육신을 잊어 버리고 껍질을 제거하고 마음을 씻고 욕심을 제거하고서 사람 없는 들녘에서 노닐게.”21] 라고 말했다.
19]. 「大宗師」: “離形去知, 同於大通.”
20]. 「刻意」: “去知與故, 循天之理.”
21]. 「山木」: “吾願君刳形去皮, 酒心去欲, 而遊於無人之野.”
육신적인 욕망, 지식, 기교 등을 다 버리면 大通의 세계와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되어 사람 없는 들녘을 거닐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또한 莊子는 근원적인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은 ‘性을 닦아 德에로 되돌아가서 德이 지극하게 되면 태초와 같아진다.’22], ‘그의 성정을 돌이켜서 그 시초를 회복한다.’23]라고 말하면서 “저 虛靜, 恬淡하며 寂寞無爲한 것은 만물의 뿌리이다.”24] 라고 했다.
22]. 「繕性」: “反其性情而復其初.”
23]. 「繕性」: “繕性於俗學, 以求復其初; 滑欲於俗思, 以求致其明; 謂之蔽蒙之民.”
24]. 「天道」, “夫虛靜恬淡寂寞無爲者, 萬物之本也.”
이는 천지만물의 근원세계가 虛靜, 恬淡, 寂寞, 無爲하다고 보았다.
虛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이고 靜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염담은 마치 물맛처럼 어떤 맛도 아닌 담박함이고, 적막은 어떤 소리도 아닌 고요함이고, 무위는 어떤 의도나 작위가 없는 행위이다.
“이를 알고서 남면한 것이 요임금이 임금 노릇함이오, 이를 알고서 북면한 것이 순이 신하 노릇한 것이다.
이로써 아래에 처한 것이 현서, 소왕의 道이다.
이로써 물러나서 한가로이 노닐면 산수 간에 숨어사는 선비들이 감탄할 것이오.
이로써 세상에 나아가 백성들을 다스리면 공명을 크게 떨쳐 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고요하면 안으로 성스럽고 움직이면 밖으로 천하를 그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다툴 수 있는 것이다.”25] 말했다.
25]. 「天道」: “明此以南鄕, 堯之爲君也; 明此以北面, 舜之爲臣也.
以此處上, 帝王天子之德也;
以此處下, 玄聖素王之道也.
以此退居而閒游, 則江海山林之士服;
以此進爲而撫世, 則功大名顯而天下一也.
靜而聖, 動而王, 無爲也而尊, 樸素而天下莫能與之爭美.”
결국 근원에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기의 性情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향을 자기 밖 저 멀리 어딘가에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결국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근원을 보기 위해선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고요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둘째,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
莊子는 인간은 우주 안에 속해 있는 만물들 가운데 하나의 지극히 미약한 존재자일 뿐이라고 했다.
“내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마치 작은 돌멩이와 조그마한 나무가 큰산에 있는 것과 같으니 바야흐로 내 존재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알아 내었으니 또 무엇을 가지고 자만하겠소.
사해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을 계산해 보건대 돌멩이의 작은 구멍이 큰 못 속에 있는 것과 같지 않은가? 중국이 사해 안에 있는 것을 계산해 보건대 싸래기가 큰 창고 안에 있는 것과 같지 않은가?
物의 수를 만이라고 하나 사람은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할 뿐이다.
이들 사람은 만물과 견주어 보건대 털 끌이 말 몸 위에 있는 것과 같지 않은가?” 26]
라고 말하면서 天地에 비해 인간은 작은 조약돌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26. 「秋水」: “吾在天地之間, 猶小石小木之在大山也, 方存乎見少, 又奚以自多!
計四海之在天地之間也, 不似礨空之在大澤乎? 計中國之在海內, 不似稊米之在大倉乎?
號物之數謂之萬, 人處一焉; 人卒九州, 穀食之所生, 舟車之所通, 人處一焉;
此其比萬物也, 不似豪末之在於馬體乎?”
또한 “天地사이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마치 백구가 조그마한 틈 사이를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공간에서조차 지극히 왜소한 존재라고 했다. 혹은 백구를 준마 혹은 햇빛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백구가 틈 사이를 지나가듯이 인생이 아주 짧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그에게 찾아온 생명을 사양할 수도 없고 그로부터 떠나갈 수도 없다며 “오는 생명을 물리칠 수 없고 가는 생명을 막을 수 없다.”27]고 했다.
27]. 「達生」: “生之來不能卻, 其去不能止. 悲夫!”
이렇게 짧고 순간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으로 얼마나 많은 욕망과 집착으로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 놓는지 모른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형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바람을 움켜잡으려는 헛된 시도를 그만 두고 잠시 왔다가 가는 세상임을 안다면 붙잡고 있는 것도 자연스럽게 놓을 수 있게 된다.
셋째, 우주의 변화를 이해하고 生死를 초월해야한다.
만물은 무궁한 시공간 안에서 변화하고 있으며 이 변화는 소멸이 아니라 조화로운 융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生死도 변화의 한 과정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고 인간의 생명도 이와 같다.
莊子는 ‘만물은 하나이다.’라는 견지에서 인간의 生死도 하나라고 보았다. 만물이 하나라는 관점에서는 貴과 賤, 善과 惡, 美와 醜의 대립은 종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니 만유를 있는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生死의 대립도 마찬가지이다. 莊子는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氣의 합산과 분산으로 보았다. 氣가 모여지면 생명을 가지나 氣가 흩어져 없어지게 되면 이를 곧 죽음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이 죽었을 때 처음에는 슬퍼했지만 生死에 대한 이치를 깨닫고는 노래를 부르며 부인을 보내 주었다.
이처럼 인간의 生死는 대립되는 두 가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니 살아있음에 기쁘기도 하겠지만 죽음도 기꺼이 맞는 마음 자세도 함께 가져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의 세계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삶의 입장에서 죽음을 보기 때문이다. 상대적 입장에서 보면 죽음은 또 다른 별개의 세계가 되어 두려움의 세계로 다가오지만 만물이 하나라는 자리에 도달하면 삶도 죽음도 다 같을 것이다.
자연의 세계는 어떤 상대적 차별도 없으며 모두가 평등하다.
옛날 여희가 진왕에게 끌려갈 때 처음에는 두려워 눈물을 흘렸지만 왕과 함께 생활하면서 진귀한 물품과 산해진미가 즐비한 것을 보자 왜 그때 울었는지 후회했다고 한다. 죽음의 세계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자연의 변화에 따라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生死의 경계를 없애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와 오고 가는 것에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Ⅳ. 자유의 경지는 어떠한가?
첫째, 평화로운 삶을 즐긴다.
莊子는 “莊子와 혜시가 호수의 징검다리 근처에서 노닐고 있었다.
莊子가 말했다. ‘물고기가 한가하게 헤엄치고 있구나. 이것이 바로 물고기의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혜시가 말했다. ‘너는 물고기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莊子가 말했다. ‘너는 내가 아니다.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가?’
혜시가 말했다. ‘나는 네가 아니기 때문에 너를 알지 못한다. 너는 물론 물고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莊子가 말했다. ‘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말해보자. 너는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말인가? 라고 했다. 이 말은 이미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서 내게 물은 것이다. 나는 호수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다.”28라고 말했다.
28. 「秋水」: “莊子與惠子遊於濠梁之上.
莊子曰: ‘儵魚出遊從容, 是魚之樂也.’
惠子曰: ‘子非魚, 安知魚之樂?’
莊子曰: ‘子非我, 安知我不知魚之樂?’
惠子曰: ‘我非子, 固不知子矣; 子固非魚也,子之不知魚之樂,全矣.’
莊子曰: ‘請循其本. 子曰 “汝安知魚樂” 云者, 旣已知吾知之而問我, 我知之濠上也.”
물고기가 노는 것을 보고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다.”라고 한 것은 곧 莊子가 물고기로 화한 것이다. 이 대화에서 莊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천진난만한 본성으로 돌아가서 자유인이 되면 만물과 하나 되어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둘째, 차별심이 없는 평등심을 갖는다.
莊子는 “사람이 안다는 것을 헤아려보면 그가 알지 못하는 것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사람이 사는 시간이란 그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그렇듯 아주 작은 것이면서 턱없이 큰 세계를 규명하려고 하니까 혼란을 일으켜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29라고 말했다.
29. 「秋水」: “計人之所知, 不若其所不知; 其生之時, 不若未生之時; 以其至小求窮其至大之域, 是故迷亂而不能自得也.”
이는 우주 만물은 무궁무진한 반면에 이 우주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수명은 길지 않을뿐더러 아는 것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 是非를 가리고 貴賤을 논하며 자신을 타인과 구별시키는 것이 莊子가 보기에는 지극히 상대적이라 사물의 입장이 아닌 道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자고 했다.
“道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은 貴賤이 없다.
사물의 입장에서 보면 스스로를 귀하다 하고 상대방을 천하다고 한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보면 貴賤의 구별은 자기에게 없다.
차별의 관점에서 보면 각기 큰 것에 대해 크다고 한다면 크지 않은 것이 없고 각기 작은 것에 대해 작다고 한다면 작지 않은 것이 없다
…… 사물의 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각기 쓸모 있는 것을 보고 쓸모 있다고 한다면 만물은 쓸모없는 것이 없고 각기 쓸모없는 것을 쓸모없다고 한다면 만물은 쓸모 있는 것이란 없게 된다
…… 취향의 관점에서 보면 각기 옳은 것을 옳다고 한다면 만물은 옳지 않은 것이 없고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한다면 만물은 옳은 것이 없게 된다.”30]
30. 「秋水」: “以道觀之,物無貴賤,
以物觀之, 自貴而相賤,
以俗觀之, 貴賤不在己.
以差觀之, 因其所大而大之, 則萬物莫不大
.......以功觀之, 因其所有而有之, 則萬物莫不有, 因其所無而無之, 則萬物莫不無,
......以趣觀之, 因其所然而然之, 則萬物莫不然; 因其所非而非之, 則萬物莫不非.”
이처럼 사물, 세속, 차별, 작용, 취향 등의 관점에서 관찰하는 만물의 貴賤, 大小 등은 모두 상대적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면 나는 귀한 존재이고 너는 천한 존재라는 우월감이나 구별화된 대립적인 관념에서 벗어나니 더 이상 차별심을 갖지 않게 된다.
차별심이 없어지면 모든 사물 혹은 사람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편견 없는 공평한 자세를 취하며 또한 계급적인 신분에서 벗어나 평등한 마음으로 모두를 귀하게 여긴다.
셋째, 평상심을 유지한다.
莊子는 인간이 만물의 본모습과 천지의 이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판단을 할 때 많은 오류를 범하고 그러한 인간이 판단하는 是非도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래서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道를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道를 아는 자는 반드시 이치에 통달하게 되고 이치를 통달한 자는 반드시 임기웅변의 조치에 밝아지고 임
기웅변의 조치에 밝은 자는 사물 때문에 자신을 해치는 일은 없다.” 31] 라고 했다.
31. 「秋水」: “知道者必達於理, 達於理者必明於權, 明於權者不以物害己.”
곧 인간이 왜 道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말한 것이다. 道는 시작과 끝이 없지만 사물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사물에서의 완성이란 道에서는 변화일 뿐이다.
사물은 때로는 텅 비고 때로는 꽉 차 있어서 그 모습이 일정하지 않기에 그 완성을 믿어서는 안 된다. 사물은 말이 달리듯 빨리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고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는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고 시간의 흐름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만물의 본 모습이고 자연의 이치이며 道의 참 뜻이다. 이러한 道를 깨달은 사람은 세상사의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유지하면서 지극한 德을 갖추게 된다.
“지극한 道를 가진 자는 불도 뜨겁게 할 수 없고 물도 빠지게 할 수 없으며 추위나 더위도 해를 끼칠 수 없고 금수도 해칠 수 없다.”32]
32]. 「秋水」: “至德者, 火弗能熱, 水弗能溺, 寒暑弗能害, 禽獸不能賊.”
지극한 德을 지닌 사람은 천지자연과 함께 노닐기 때문에 어떠한 만물도 그를 상하게 하지 않는다. 지극한 德을 가진 자는 안전과 위험을 잘 살피고 禍와 福에 대해 마음의 흔들림이 없이 편안해 하고 행동에 있어서 나가고 물러남이 신중하기 때문에 어떤 만물도 그를 상하게 하지 않으며 심지어 짐승들도 해치지 않는다. 이러한 경지는 만물과 하나 되어 나 아닌 다른 것들과 함께 모든 것을 같이 즐기며 아무런 대립이나 구별없는 고요한 마음상태를 갖는다.
늘 평온한 평상심을 유지하며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生死를 초월하니 삶에 대한 모든 집착과 애욕으로 부터 벗어나 道와 더불어 이 세상을 멋지게 逍遙한다.
그래서 莊子가 말하기를
“眞人은 역경을 거스르지 않았고 성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일을 꾀하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사람은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아니하며 잘 되어도 스스로 득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며 불속에 들어가도 뜨겁지 않다. 이는 지식이 道에까지 승화될 수 있었으므로 그러한 것이다.
옛날의 眞人은 잠을 자도 꿈꾸지 아니하고 깨어 있어도 근심이 없었다. 음식은 맛있는 것을 찾지 않고 그 숨 쉬는 것이 깊고 고요하였다. 眞人은 발꿈치로 숨을 쉬며 보통 사람은 목구멍으로 숨을 쉰다. 外物에 굴복한 자는 그 목에서 나는 소리가 토해 내는 것 같고 욕심이 많은 자는 그 마음의 작용이 천박하다.
옛날의 眞人은 삶을 기뻐할 줄 모르고 죽음을 미워할 줄도 모른다.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는다. 무심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그 시초를 모르고 그 끝을 알려 하지 않는다. 삶을 받으면 그것을 기뻐하고 죽으면 그것을 돌려보낸다. 이런 것을 마음으로써 道를 버리지 않으며 인위로써 하늘을 돕지 않음이라 한다. 이 같은 사람을 眞人이라 한다.
이 같은 사람은 그 마음이 모든 것을 잊고 그의 얼굴은 적막하며 이마가 널찍하다. 서늘하기가 가을 같고 아늑하기는 봄과 같다. 기쁨이나 노여움이 사계와 같고 만물과 잘 조화되어 그 끝을 알 수 없다.”33]고 했다.
33]. 「大宗師」:
“眞人, 不逆寡, 不雄成, 不謨士. 若然者, 過而弗悔, 當而不自得也;
若然者, 登高不慄, 入水不濡, 入火不熱. 是知之能登假於道者也若此.
古之眞人, 其寢不夢, 其覺無憂, 其食不甘, 其息深深. 眞人之息以踵, 衆人之息以喉. 屈服者, 其嗌言若哇. 其耆欲深者, 其天機淺.
古之眞人, 不知說生, 不知惡死; 其出不訢, 其入不距; 翛然而往, 翛然而來而已矣. 不忘其所始, 不求其所終;
受而喜之, 忘而復之, 是之謂不以心損道, 不以人助天. 是之謂眞人.
若然者, 其心忘, 其容寂, 其顙頯; 淒然似秋, 煖然似春, 喜怒通四時, 與物有宜而莫知其極.”
Ⅴ. 자유를 얻은 후의 삶은 어떠한가?
자유를 찾은 사람들은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공평하게 보는 평등사상으로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것을 귀히 여기며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평상심으로 우주 공간 안에서 자연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그토록 莊子가 원했던 자유를 얻은 마음 상태라면 莊子는 왜 그렇게도 자유인이 되고 싶었을까? 또한 진정한 자유인의 삶의 모습은 그전까지의 삶과는 다르게 홀로 고귀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 속에서 逍遙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욕망과 집착의 사슬에 얽매여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을 껴안으며 그들의 고통을 대신하며 살아갈 것인가?
깨달음을 얻은 자는 여러 가지 더러움으로 오염된 사회를 맑고 향기롭게 만들어 사회에 도움을 주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깨달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곽암선사의 ‘十牛圖(혹은 尋牛圖)’와 연결하고자 한다.
十牛圖는 본래 도교의 八牛圖에서 유래하였으나 12세기 중엽 宋代의 廓庵선사가 2장면을 추가하여 十牛圖를 그렸다. 우리나라에는 宋나라 때 제작된 곽암본과 보명본이 전해지는데 곽암본이 더 유명하다. 그래서 여기서도 곽암본의 十牛圖를 중심으로 한다.
十牛圖는 소를 잃어버린 아이가 야성으로 돌아가 있던 그 소를 다시 찾아내 길들임으로써 소와 하나 됨을 실현한 다음 다시 저잣거리에 돌아와 중생구제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깨달은 자의 참 모습을 열 개의 연속된 그림이다. 이 十牛圖에는 ‘自己’라는 본질적인 문제, 즉 自己가 겪어가는 ‘自己의 온갖 모습’과 그 사이의 관련성을 각각의 단계에서 自己가 自己에게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 나타남을 참된 自己를 꿰뚫는 자각의 빛으로 조명함으로써 단계적인 自己를 초월해 참된 自己로 통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莊子가 心齋와 坐忘을 통하여 자연과 하나가 되는 大通이 되어 道를 이루게 되는 과정을 십우도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10장의 그림으로 한 단계 한 단계씩 보여준다. 그 각각의 단계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尋牛34]로 소를 찾아나서는 단계로 곧 참된 自己를 찾는 태도이고
두번째는 見跡35]으로 소의 자취를 발견하는 단계로 열심히 수행하여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수준이다.
세 번째는 見牛36]로 소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드디어 소를 보게 되는 단계이니 사물의 근원을 보기 시작하는 見性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네 번째는 得牛37]로 드디어 찾던 소를 얻었지만 아직도 마음은 갈 길을 잡지 못하고 헤매는 과정이다. 잃어버린 본래의 참 마음을 찾아서 변화의 새로운 모습으로 가기위한 첫 단계이기도 하다.
다섯째는 牧牛38]로 소를 길들이고 과정으로 고행과 수행을 통해 제멋대로인 마음을 길들이는 즉, 자신의 본성을 깨끗하게 닦는 과정이고
여섯 번째는 騎牛歸家39]로 소와 아이가 한 몸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自己에 대한 분열과 갈등은 다 사라지고 더 이상 아무런 장애가 없는 자유로운 無碍의 단계로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때이다.
일곱 번째는 忘牛存人40]으로 소는 잊고 사람만 존재하는 단계로 마침내 소를 얻었다는 생각마저 없는 상태로 본래의 자기 마음을 찾아 이제 나와 하나가 되었으니 굳이 본성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여덟 번째는 人牛俱忘41으로 사람도 소도 잊는다. 모든 것이 無 속으로 사라졌다는 텅 빈 원만이 그려져 있는데 이 無는 한계가 없고 모든 편견과 벽이 사라진 것을 의미하는 단계로 객관이었던 소가 없으면 주관이었던 나도 없다는 것으로 나와 남이 사라진 진정한 공이다.
아홉 번째는 返本還源42으로 모든 것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단계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닫는 것으로 우주를 아무런 번뇌 없이 참된 경지로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열 번째가 入廛垂手43인데 이는 저자에 들어가 손을 드리운다는 마지막 단계로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하여 자유의 경지에 도달했으나 다시 괴롭고 복잡한 인간세계에 들어가 利他行을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깨우치고 남도 깨우치는 데서 그 깨달음이 증명된 것으로 大悟한 사람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중생교화라는 것이다.
이렇게 각 단계를 살펴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장면은 처음에는 세속에서 탈출하여 수행의 정상에 올라 진정한 自己를 돌아간 후에 다시 타인으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즉 깨달은 후에 열려진 눈으로 세상을 보고 무연대비로서 중생을 포용하여 함께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실천행이다.
다시 말해서 道를 세상에 돌리니 남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경지로 결국 깨달음은 혼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남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면서 다시 돌려주었을 때 비로소 깨달음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莊子가 그렇게 자유인이 되고 싶었던 것은 결국 괴롭고 힘든 세상에 먼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미련한 인간들도 그러한 번뇌에서 벗어나와 참된 自己를 얻어서 함께 자유를 누리며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물론 莊子의 깨달음을 얻은 자의 眞人의 모습 가운데 ‘무심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 마음으로써 道를 해치지 않고 그저 자연의 道를 따름이라.’에서 말하는 자연을 따른다는 것은 이미 自他의 구별도 인간과 자연의 구별도 없는 상태로 모든 사람들은 無爲의 자비심으로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상대적인 관념을 초월하고 大通하였다는 것은 ‘나’와 ‘너’라는 구별이 없어졌으니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니 어찌 홀로 유유자적하게 즐기겠는가. 十牛圖의 열 번째 入廛垂手의 단계에 머물면서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모든 것을 함께 할 것이다.
그래서 莊子의 자유인의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생활에 적용하였다.
34]. “從來不失 何用追尋 由背覺以成疎 在向塵而遂失 家山漸遠崎路俄差 得失識 然是非鋒起.”
35]. “依經解義 閱敎知踪 明衆器爲一金 體萬物爲自己 正邪不辨 眞僞契分 未入斯門 權爲見跡.”
36]. “從聲得入 見處逢源 六根門 着着無差 動用中 頭頭顯露 水中鹽味 色裏膠靑 只上尾毛 非是他物.”
37]. “久埋郊外 今日逢渠 由境勝以難追 戀芳叢而不己 頑心尙勇 野性猶存 欲得純和 必加鞭韃.”
38]. “前思纔起 後念相隨 由覺故以成眞 在迷故而爲妄 不由境有 唯自心生 鼻索窂牵 不容擬議.”
39]. “刊戈已罷 得失還空 唱椎子之村歌 吹兒童之野曲 身橫牛上 目視雲霄 呼喚不回 據龍不住.”
40]. “法無二法 牛且爲宗 喩蹄兎之異名 顯筌魚之差別 如金出鑛 似月離雲 一道寒光 威音劫外.”
41]. “凡情脫落 聖意皆空 有佛處不用遨遊 無佛處急須走過 兩頭不着 千眼難竅 百鳥啣華 一場耱儸.”
42]. “本來淸淨不受一塵 觀有相支榮枯 處無爲之凝寂 不同幻化 豈假修治 水綠山靑 坐觀成敗.”
43]. “柴門獨掩 千聖不知 埋自己之風光 負前賢之途轍 提瓢入市 策杖還家 酒肆魚行 化令成佛.”
첫째, 가장 낮은 곳에 거한다.
莊子가 생각하는 삶은 신비롭거나 초월적인 곳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과 함께 하는 삶에 중점을 두었다. 다만 세속에서 물질에 오염되어 같이 뒤엉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道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산 정상에서 사는 신선 같은 삶이 아니라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와 그 곳에서 모든 차별을 인정하고 초월하여 무차별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莊子는 사람과 동떨어져 사는 신선 같은 삶을 원하지 않았으며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은 것에서는 절대로 낮은 곳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으니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한다. 예수님도 탄생 역시 가장 낮은 천한 사람들조차 가기 싫어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 인류를 구제하였고 원효대사도 깨달음을 얻은 후에 저작거리에서 곱추춤을 추면서 백성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그들을 교화하려고 하였다.
비록 진흙탕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지만 결코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처럼 스스로 내려가 가장 낮은 곳에서 타인들을 위해 자신이 몸을 기꺼이 던져주면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미래를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둘째, 선택과 거부를 하지 않는다.
자신은 물론 개개인의 발달과정과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바라볼 줄 알게 되면 더 이상 싫고 좋음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으니 선택과 거부를 하지 않는다.『莊子』에서 인용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모든 사람들은 보기 좋은 것을 취하려고 미운 것에 대해서는 거부하거나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 차별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莊子는 이러한 편견을 깨고 싶어서 부족하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등장시켜 보이는 것에만 집착을 하면서 보이지 않는 보배를 놓치는 사람들을 조롱했듯이 모든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면서 각자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선택과 거부를 하지 않아야 한다.
셋째, 이해와 공감을 하면서 기다려준다.
莊子는 인간사회의 모든 논쟁은 인간이 成心을 표준으로 삼고 이 成心에 집착하여 모든 것을 자기기준에 맞추려 들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成心이 가로막고 있는 무엇이 있는 한 자기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게 되고 모든 문제의 근원을 나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고 是非를 통해 상대에게서 찾으려 한다. 이러한 是非를 가리는 분별된 마음이 늘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데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是非의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에 是非를 가리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어떤 모양의 사람이든 어떤 형태의 사물이든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인정을 하면서 이해와 공감을 하여 상대방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고 변화할 수 있도록 기다려준다.
넷째,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한다.
莊子는 개성을 존중하는 태도는 곧 한 인간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각자 나름대로 고유한 특성인 개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개성을 자발적으로 나타내면 자기완성을 이루게 되고 그러면 보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여 개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莊子는 “노나라 임금이 새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새를 기르고”44], “학의 다리가 길다하여 자르고 오리의 다리가 짧다하여 모두 이어주는”45] 등의 우화를 말했는데 이는 모두가 자기 기준에 따라서 획일적인 방법을 개인에게 강요했을 때 생기는 비극을 말한 것이다. 즉, 인위적으로 개성을 변화하게 하면 그 자체의 본성이 상실되어 본래의 참된 가치나 참된 의미가 상실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개성과 개인차를 인정하고 각각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아 서로를 존중하여야 한다.
44]. 「至樂」: “己養養鳥也.”
45]. 「駢拇」: “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Ⅵ. 마무리하면서
莊子가 추구하는 인생철학은 모든 大小, 貴賤, 是非, 生死 등의 상대적인 관념들에서 초월한 정신적 절대자유를 누리는 삶이다. 이러한 삶을 즐기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이면 다 누릴 수 있지만 자의적으로 사물의 가치를 분별하고 그 분별된 가치를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간주하여 그것에 구속되는 삶의 태도로는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분별을 초월하고 주객의 모든 속박과 제한을 벗어나게 되면 비로소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天地가 나와 함께 살아가고 만물도 나와 하나가 된다.”고 말했는데 이가 곧 진정한 逍遙이고 진정한 자유이다. 이러한 삶이 莊子가 추구하는 진정한 삶이다. 이러한 삶은 앞에서 이미 열거했듯이 자신의 부정을 통해 나오지만 종국에는 다시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으로 돌아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는 것은 매우 험난한 일이지만 그 어려운 과정을 통해 버리고 없애고 다시 합하면서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야한다.
사람 사이에서 경쟁심을 버리고 명예와 이익도 버리는 삶을 통해 비로소 “아무 것도 없는 드넓은 들판에 나무를 심고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로이 쉬고 그 그늘에 유유히 누워 잠자는”46] 것과 같은 자유와 여유를 즐길 수 있다면 결코 헛된 삶은 아닐 것이다. 그 다음에는 깨달은 것을 이룬 것을 느낀 것을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도록 다시 되돌려 주여야 하는데 되돌려 주는 방법이 곧 우리들의 삶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 모습일 것이다.
46]. 「逍遙遊」: “樹之於無何有之鄕, 廣莫之野, 彷徨乎無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
<부록 1> 廓庵선사의 十牛圖
1단계 : 尋牛
2단계 : 見跡
3단계 : 見牛
4단계 : 得牛
5단계 : 牧牛
6단계 : 騎牛歸家
7단계 : 忘牛存人
8단계 : 人牛俱忘
9단계 : 返本還源
10단계 : 入廛垂手
참고 문헌-제외
34]. “從來不失 何用追尋 由背覺以成疎 在向塵而遂失 家山漸遠崎路俄差 得失識 然是非鋒起.”
애초에 잃지 않았는데 어찌 찾을 필요 있겠는가.
깨침을 등진 결과 멀어져서 세간을 향하다가 길을 잃었다.
고향집에서 점차 멀어져 갈림길에서 어긋난다.
얻고 잃음의 불이 타오르니, 옳고 그름의 분별력도 어지럽게 일어나네.
35]. “依經解義 閱敎知踪 明衆器爲一金 體萬物爲自己 正邪不辨 眞僞契分 未入斯門 權爲見跡.”
경전에 의거해 뜻을 헤아리고 가르침을 배워서 그 자취를 안다.
그릇들이 다 한가지로 금임을 밝혀내고, 우주만물이 곧 자기라는 사실을 체득한다.
바름과 삿됨을 가려내지 못한다면, 어찌 참됨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으리오.
아직 입문하진 않았으나 임시 방편으로 "자취를 본다"고 한다.
36]. “從聲得入 見處逢源 六根門 着着無差 動用中 頭頭顯露 水中鹽味 色裏膠靑 只上尾毛 非是他物.”
소리를 쫓아 들어가니, 보는 곳마다 근원과 마주친다.
여섯 기관의 문마다 한치도 어긋남이 없네.
움직이는 작용 속에 낱낱이 바탕을 드러냈다.
물 속의 소금 맛이요, 물감 속의 아교인데,
눈섭을 치켜뜨고 바라봐도, 별다른 물건이 아니로다.
37]. “久埋郊外 今日逢渠 由境勝以難追 戀芳叢而不己 頑心尙勇 野性猶存 欲得純和 必加鞭韃.”
오랫동안 야외에 숨어 있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그댈 만났네.
뛰어난 경치 때문에 쫓아가기 어려운데,싱그러운 수풀 속을 끊임없이 그리워 하네.
고집 센 마음은 여전히 날뛰니 야성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온순하게 하고 싶으면, 반드시 채찍질을 가해야 한다.
38]. “前思纔起 後念相隨 由覺故以成眞 在迷故而爲妄 不由境有 唯自心生 鼻索窂牵 不容擬議.”
앞 생각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뒷 생각도 뒤따르나니,
깨달음을 인해 진실을 이루기도 하며, 미혹으로 인해 거짓이 되기도 한다.
대상 사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오직 스스로 마음이 일어났을 뿐이요,
코를 꿴 고삐를 당길 뿐이니, 사량분별은 용납치 않는다.
39]. “刊戈已罷 得失還空 唱椎子之村歌 吹兒童之野曲 身橫牛上 目視雲霄 呼喚不回 據龍不住.”
투쟁이 끝나서,얻음도 잃음도 모두 비었구나!
나뭇꾼의 시골노래를 흥얼거리며, 시골 아이들의 풀피리를 불어 보노라.
태평한 모습으로 소 등에 누워, 눈은 아득한 허공을 바라본다.
불러도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끌어당겨도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40]. “法無二法 牛且爲宗 喩蹄兎之異名 顯筌魚之差別 如金出鑛 似月離雲 一道寒光 威音劫外.”
법엔 두 법이 없나니, 임시 소에 의탁해 종으로 삼았노라.
올가미와 토끼가 명칭이 다른 것 같고, 통발과 고기가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일세.
마치 금이 광석에서 나오고, 달이 구름을 벗어난 것 같으니,
한 줄기 차가운 빛은 겁 밖의 위음이로다.
41]. “凡情脫落 聖意皆空 有佛處不用遨遊 無佛處急須走過 兩頭不着 千眼難竅 百鳥啣華 一場耱儸.”
범속한 생각을 탈락하고, 거룩한 뜻도 다 비어 있다.
부처가 있는 세계엔 놀 필요가 없고, 부처 없는 세계는 모름지기 급히 지나가야 한다.
범속함과 거룩함 둘 다에 집착하지 않으니, 관음보살의 천안이라도 엿보기 어려워라.
온갖 새들이 꽃을 물고와 공양하는 것은, 오히려 한바탕 부끄러운 장면일 뿐이네.
42]. “本來淸淨不受一塵 觀有相支榮枯 處無爲之凝寂 不同幻化 豈假修治 水綠山靑 坐觀成敗.”
본래 청정해서 한 티끌에도 물들지 않으면서, 모습 있는 만유의 영고성쇠를 본다.
함이 없는 고요한 경지에 머물러, 더 이상 환상과 동일시 하지 않으니,
어찌 수행과 계율에 의지하리오!
물은 맑게 흐르고 산은 푸르른데, 홀로 앉아 세상의 흥망 성쇠를 바라보노라.
43]. “柴門獨掩 千聖不知 埋自己之風光 負前賢之途轍 提瓢入市 策杖還家 酒肆魚行 化令成佛.”
싸리문을 닫고 홀로 고요하니,천명의 성인이라도 그 속을 알지 못하네.
자기의 풍광은 묻어 버리고, 옛 성현들이 간 길들도 등져버린다.
표주박을 들고 저자에 들어가며, 지팡이 짚고 집으로 돌아간다.
술집도 가고 고깃간도 들어가서, 교화를 펼쳐 부처를 이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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