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노장자

도가의 인생과 윤리

rainbow3 2019. 10. 10. 01:40


도가의 인생과 윤리               김 백 희**

  

요 약 문

 

도가의 세계관에서 볼 때, 인간은 우주의 일부분이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우주자연의 운행 속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작은 사건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생성변화 과정 속에 인간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인간은 끊임없이 생성소멸의 변화를 지속하는 우주자연의 운행법칙을 알아서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별다른 뜻이 없고, 단지 인간의 몸과 마음을 이루었던 기가 흩어지는 것일 뿐이다. 기가 흩어지면 인간의 생명은 끝나는 것이다. 기가 흩어지면 그저 우주자연의 기화(氣化)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법칙을 깨닫는다면 더 이상 생사(生死)에 연연할 것이 없다.

 

도가는 인간 수양의 기초로서 무위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삶의 상태를 회복하고자 노력할 것을 주장한다. 인간이 도의 법칙에 따라 살고자 노력하면 내면의 덕이 진실해지고 삶이 원만해진다. 인위적 가치의 굴레를 벗어나 마음의 평정을 얻는 방법의 하나가 좌망(坐忘)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좌망(坐忘)은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안정시키는데서 비롯된다.

 

인간은 우주자연 속의 만물과 차별되지 않는다. 도가의 윤리사상은 우주자연의 도를 내재하고 있는 인간이 인간 자신의 감각적 인식과 온갖 편견을 제거하여 자신의 내부에 본유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덕(德)을 구현하고자 한다. 인간은 세속의 반-자연적 삶을 지양(止揚)함으로서 우주자연의 운행과정에 순응하는 자유로운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무위자연의 삶이다.
바로 무위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도가의 이상적 삶이다.

 

※ 주요어: 도가, 실천윤리, 도, 무위, 자연, 수양, 좌망.

 

* 이 글은 2009년도 한국윤리학회 하계학술대회(2009. 6. 27. 한국학중앙연구원 대강당)에서 「도가의 실천윤리」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것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미숙한 발표문을 읽고 좋은 지적을 주신 이범웅 박사와 정순미 박사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자료센터 현대자료정보화연구실 연구원.

 

 

1. 서 론

 

일반적으로 윤리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실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필연적으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 더불어 사는 인간들 사이에는 상호 관계가 생기고, 그 관계 속에는 지켜야 할 법칙이 있다. 여러 인간들이 관계를 맺고 공동생활을 하는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 통상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질서와 규칙을 따르는 것은 중요한 윤리적 행위가 된다. 서양의 중세 시기에는 기독교 윤리가 삶의 중심 원리 역할을 했다. 동양에서는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대표적인 동양의 전통적 윤리 기능을 담당하였다. 한편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도 동양 전통의 맥락에서 인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윤리적 삶의 원리이다.

 

근대 산업사회 이전의 서양이나 동양 사회 모두 변화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빠르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 기간 이런 윤리적 원리들이 공동체의 안정과 사회통합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보화 사회로의 이행 속도가 문화적․윤리적 숙고(熟考)의 속도를 훨씬 추월하고 있다. 우리는 현대사회가 노정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충분한 숙고와 대응을 하지 못한 채 윤리적 반성을 결여한 과학기술의 질주를 따라가기에 바쁘다. 산업의 고도성장에 따른 지구자원의 고갈, 대기․토양․수질 등의 환경오염, 기계자동화에 따른 인간의 소외, 상품소비사회의 대중문화에 길들여지는 보편적 가치의 상실 등은 전통 시대에는 심각하게 대두되지 않았던 고민들이다. 이런 성찰적 주제들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반성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윤리적 존재인 인간들의 기본 의무이며 과제이다.

 

우리가 전통 시대의 윤리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은 전통의 답습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과 발전성을 고려하여 최선의 삶의 원리를 찾고자 하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실천적 탐구이다. 이런 탐구는 윤리적 원리나 규범에 대한 이론적 구명과 그에 따른 응용으로서의 실천적 윤리관(Practical Ethics)으로 나타난다. 본고는 동양의 전통 윤리 중의 하나인 도가의 윤리적 원리와 그 실천적 전개를 고찰하고자 한다.1)

본래『노자(老子)』와 『장자(莊子)』 그리고 『열자(列子)』의 사상은 도가 사상의 조류 속에 포함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사유의 유사성이 많다. 그러나 변별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본고는 도가 사상의 큰 조류 속에서 도가적 인생과 그 윤리적 함축을 조명하기 위해서 그 사유의 유사성에 주목하였다.2)

 

1) 도가 철학은 『老子』와 『莊子』에서 구체화된다. 대체로 『노자』는 정치철학의 성향이 강하고,『장자』는 개인의 정신적 자유와 미학적 세계를 꿈꾸는 경향이 강하다. 기존의 도가사상에 관한 연구논저를 검토해 보면 역시 이와 같은 주제에 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 본고의 주제인 도가의 윤리관에 관한 연구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徐復觀, 『中國人性論史― 先秦篇』, 臺灣商務印書館, 1969의 연구는 근현대 시기의 도가 윤리관을 구명한 글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는 『노자』의 사상에서 인간이 도(道)와 덕(德)으로 회귀하는 인생의 이상을 구명하고, 『장자』의 사상에서는 삶과 죽음의 자유를 구명하면서 인간의 윤리적 지향을 모색하고 있다.

2) 도가철학에 대한 개론서는 매우 다양하지만, 전반적으로 자신의 입장이 일관되게 반영된 것으로는 이강수,『노자와 장자』, 길, 1997; 김용옥, 『노자와 21세기』, 통나무, 2000; 김충렬,『노장철학강의』, 예문서원, 1995; 김형효, 『노장 사상의 해체적 독법』, 청계, 1999 등이 있다. 그리고 도가사상의 인생과 윤리를 논의할 때 참고할 만한 현대의 다양한 윤리 이론들을 다룬 것으로는 김용환, 『탈현대사회의 가치와 생태윤리』, 충북대학교출판부, 2009; 홍용희, 「생태적 삶과 환경윤리의 만남」, 『윤리연구』 제64호, 한국윤리학회, 2007; 진교훈,『현대 사회 윤리 연구』, 울력, 2003 등이 있다. 그리고 도가사상을 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과학의 시각에서 조명한 글로 참고할 만한 것으로는 한국도가철학회, 『노자에서 데리다까지』, 예문서원, 2001; 董光璧,『도가를 찾아가는 과학자들』, 이석명 역, 예문서원, 1994 등이 있다. 제자백가의 수준에서 도가와 법가를 다루면서 균형 있는 논의를 전개한 책으로는 王叔岷, 『先秦道法思想講稿』, 臺灣中央硏究院中國文哲硏究所, 1992가 있다. 

 

2. 인생

 

도가의 세계관에서 볼 때,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우주자연의 운행 속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작은 사건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생성변화 과정 속에 인간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인간은 끊임없이 생성소멸의 변화를 지속하는 우주자연의 운행법칙을 알아서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우주자연의 운행법칙은 한 마디로 도(道)이다. 

 

"삶이란 죽음을 뒤따르게 하며, 죽음은 삶의 시작이다. 누가 그것을 주관하는지 알랴!  인간이 사는 것은 기가 모이기 때문이며, 기가 모이면 삶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음이 된다. 이처럼 삶과 죽음은 붙어 다니는 것이러니, 내가 어찌 걱정하겠는가? 그러므로 온갖 사물은 차별이 없는 하나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아름다운 것을 신기하게 여기고, 추악한 것은 악취가 난다고 여긴다. 악취가 나는 것이 다시 변화하여 신기한 것이 되며, 신기한 것이 다시 변화하여 악취가 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의 기로 통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하나의 도를 귀중하게 여긴다.3)"

3)『莊子』, 「知北遊」, “生也死之徒, 死也生之始, 孰知其紀!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 若死生爲徒, 吾又何患! 故萬物一也. 是其所美者爲神奇, 其所惡者爲臭腐. 臭腐復化爲神奇, 神奇復化爲臭腐.

故曰: 『通天下一氣耳.』聖人故貴一.” 

 

우주자연은 모두 다 기(氣)로 이루어진다. 중국의 철학적 사유전통 속에서 존재성을 지니는 모든 개별자들의 질료적 기반은 원칙적으로 기다.4)

현대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 개념도 동양의 기화론(氣化論) 속에서는 배타적 구별이 없이 하나로 이해된다. 즉 물질과 정신은 이원적인 배타적 실체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과 몸을 구별하여 인식할 수 있지만, 그것은 현상적 구별일 뿐이다. 근원적으로는 양자의 원천은 원칙적으로 기이다. 그러므로 우주자연 속의 온갖 사물과 인간도 기에서 태어나며, 기의 세계 속에서 살다가, 죽으면 기로 돌아간다.

4) 도가의 사유 속에서 기와 기의 운행법칙은 모두 도라는 개념으로 포괄된다. 도는 우주자연의 발생적 본체이며, 그 자체로 우주자연의 운행법칙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맑고 가벼운 것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흐리고 무거운 것은 아래로 내려가 땅이 되며, 충화의 기는 인간이 된다. 그러므로 천지가 정기를 품어 만물이 변화 생성한다.5)"

5)『列子』, 「天瑞」 第一, “淸輕者上爲天,濁重者下爲地,沖和氣者爲人; 故天地含精,萬物化生.” 

 

충화(沖和)의 기(氣)는 음양의 두 기가 조화를 가장 잘 이루어 결합된 것이므로 인간이 얻은 기는 우주자연의 온갖 사물들을 이루는 기에 비해서 가장 우수하다고 볼 수 있다.6)

인간을 이루는 기는 맑기만 한 것도 아니고 혼탁하게 흐린 것만도 아니며, 그런 기의 가장 마땅한 상태를 알맞게 얻어서 沖和한 氣의 상태에 이른 것이다. 유가는 인간이 우주자연의 빼어난 기를 얻어서 생겨나며, 하늘과 땅과 더불어 삼재(三才)가 된다고 보고 있다. 도가도 역시 인간이 귀한 존재라는 사상이 있다.

6) 노자는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으며 충기(沖氣)로써 조화를 이룬다.”고 하였다.

『老子』42장,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도는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인간도 크다. 이 세상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인간이 그 중의 하나이다.7)"

7)『老子』25장, “道大, 天大, 地大, 人亦大, 域中有四大, 而人居其一焉.” 

 

인간은 沖和의 氣를 얻어서 다른 사물이나 생물에 비하여 고등한 존재가 된다. 인간은 몸(形體)을 지니면서 또한 마음(心神)을 지니고 있다. 마음은 몸을 부리는 스승과 같다. 

 

"무릇 성심을 따라서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누가 홀로 스승이 없으랴?

어찌 차례로 변화하는 이치를 알아서 스스로 도를 이룬 인간에게만 스승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인간에게도 스승은 있다. 마음에 견해를 이룬 것이 없는데 옳고 그름의 판단이 있는 것은 마치 오늘 월 나라에 가서 어제 도착한 것과 같다.8)"

8)『莊子』, 「齊物論」,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无師乎?

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

愚者與有焉. 未成乎心而有是非, 是今日適越而昔至也.” 

 

여기서 말하는 성심(成心)은 마음속에 일정한 의견이나 견해를 지닌 것을 말한다. 마음이 몸의 스승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인간에게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본성을 따라서 움직인다. 본성은 인간의 본질이며, 본성이 흐트러지면 마음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 여기서의 본성은 도가 사상의 근본 개념이자 우주변화의 법칙인 도가 내재화된 덕으로 볼 수 있다. 

 

"본성을 버리고 제멋대로의 마음을 따르며,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엿보게 되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없다.9)"

9)『莊子』, 「繕性」, “去性而從於心. 心與心識知, 而不足以定天下.” 

 

본성은 인간의 본질로서 늘 변화하지 않는다. 인간이 여러 가지 다양한 세상의 일들을 겪으면서 사는 동안에도 본성은 늘 한결같은 본질을 유지한다. 자연의 도를 알고 본성을 따라 순리대로 사는 인간은 하는 일마다 간결하게 이루어지며, 그런 삶이 지속되면 결국은 무위자연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본성에 반(反)하는 삶을 살면 반드시 하는 일이 어그러지며 마음이 혼란하고 괴로워서 삶이 힘들게 된다. 우주자연의 필연성에 몸을 내어 맡기며 사는 것이 도가적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순명(順命)과 같다. 

 

"본성은 바꿀 수 없고, 운명은 변할 수 없으며, 시간은 멈출 수 없고, 도의 작용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다.10)"

10)『莊子』, 「天運」, “性不可易, 命不可變, 時不可止, 道不可壅.” 

 

명(命)이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저절로 변화하며 살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수명(壽命)·길흉화복(吉凶禍福)·귀천(貴賤) 등의 운명과 같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필연성이며, 우주자연의 운행 속에서 인간이 순응해야 할 법칙을 뜻하는 철학적 개념이다. 도가는 우주자연의 온갖 사물이 저절로 변화하며 운행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지속해 갈 뿐 다른 뾰족한 수가 있을 수 없다. 도가의 윤리적 가치판단의 기준은 우주자연의 필연성을 본받는 무위자연이다. 운명은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무위자연의 개체적 양태이다. 그러므로 운명에 순응한다는 것은 무위자연의 삼연한 법칙을 거부하지 않고 따르는 삶의 모습을 말한다. 

 

"사물이 생겨나는 것은 마치 말이 달리듯 빠르다. 움직여서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고, 시간에 따라 이동하지 않는 것이 없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무릇 모든 것은 저절로 변화하게 마련이다.11)

11)『莊子』, 「秋水」, “物之生也, 若驟若馳, 无動而不變, 无時而不移. 何爲乎, 何不爲乎? 夫固將自化.” 

 

사물이 우주 변화의 과정 속에서 저절로 변화해 가듯이 인간도 예외없이 그렇게 변화해 간다. 인간은 이미 우주자연의 변화과정 속에 살면서 변화해 가므로, 인간의 일생 동안 겪는 모든 일들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계획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평생 동안 경험하는 일들은 이미 우주자연의 변화과정 속에서 타자와 관계를 맺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떤 일들은 이미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고, 어떤 일들은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두 가지 유형의 일들은 모두 인간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도가의 입장에서 보면, 개별적 일들은 그저 생멸(生滅) 변화의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며, 이 속에는 우주자연의 반복․순환이라는 자연법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12) 그러므로 인간의 일생에서 겪는 모든 일에 대해서 취해야 할 태도는 그 자연의 법칙에 내 맡기고 마음을 끓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일생은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오래 살거나 일찍 죽거나 돈이 많거나 가난하거나 모두 자연의 운명을 따르는 것이지, 인간 자신의 의지대로 주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은 의지대로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별다른 뜻이 없고, 단지 인간의 몸과 마음을 이루었던 기가 흩어지는 것일 뿐이다. 기가 흩어지면 인간의 생명은 끝나는 것이다. 기가 흩어지면 그저 우주자연의 기화(氣化)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다시 기가 모이면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죽었다고 해서 존재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소멸은 아니고, 우주자연 속에 있으면서 운행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법칙을 깨닫는다면 더 이상 생사(生死)에 연연할 것이 없다.13)

 

12)『列子』, 「力命」 第六, “命曰:旣謂之命,奈何有制之者邪?朕直而推之,曲而任之,自壽自夭,自窮自達,自貴自賤,自富自貧. 朕豈能識之哉? 朕豈能識之哉?”

13) 장자의 아내가 죽자 혜시가 조문하였다. 장자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말하였다. “자네는 아내와 함께 살면서 자식을 기르다가 함께 늙었네. 그런 부인이 죽었는데도 울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네. 아내가 처음 죽었을 때는 나라고 어찌 슬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겠나? 하지만 그 처음을 돌이켜 보건대 본래 삶이란 게 없었고 삶만 없었던 게 아니고 형체도 없었던 걸세. 흐릿하고 아득한 속에 섞이어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있게 되고, 그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겼으며,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생겼고, 이제 다시 변하여 죽은 것이라네. 이것은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서로 자리를 바꾸며 운행하는 것과 같은 것일세. 그 인간은 지금 우주자연이라는 거대한 방속에 편안히 잠들고 있는 것이야. 그런데 내가 큰 소리로 운다면 내 스스로 천명에 통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울음을 그친 것이라네.”

『莊子』, 「至樂」, “莊子妻死, 惠子弔之, 莊子則方箕踞鼓盆而歌. 惠子曰: 與人居, 長者. 老. 身死, 不哭,亦足矣, 又鼓盆而歌, 不亦甚乎!
莊子曰: 不然. 是其始死也, 我獨何能无槪然! 察其始而本无生, 非徒无生也而本无形, 非徒无形也而本无氣. 雜乎芒芴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今又變而之死, 是相與爲春秋冬夏四時行也. 人且偃然寢於巨室, 而我噭噭然隨而哭之, 自以爲不通乎命, 故止也.” 

 

3. 수양과 처세

 

도가에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도의 법칙에 따라 무위자연의 삶을 살아가는 지인(至人)이다14). 그런데 이는 전쟁과 기아와 폭력이 난무하는 각박한 사회현실 속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삶의 형태이다. 인간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야기하는 문명의 실질적인 주요 원인은 인위적 욕망이다.

도가에서는 욕망을 긍정한다. 욕망은 기본적으로 삶의 추진력이며 활력소이다. 욕망이 무위자연의 법칙을 좇아서 작용할 때는 건강한 욕망이 되지만, 무위자연의 법칙을 거부하고 인위적 가치에 지배되어 작용하면 병든 욕망이 된다. 삶을 소박하게 유지하는데 필요한 건강한 욕망은 차분하고 조용한 삶의 영위를 가능케 하는 필수적․자연적 요소이지만, 과도한 욕망 즉 병든 욕망의 과잉은 인간의 인생과 사회의 건강을 해친다. 자연성을 벗어난 병든 욕망의 과잉은 개인과 사회를 무위자연에 반대되는 길로 치닫게 한다. 그러므로 도가는 늘 “되돌아오는 것이 도의 운동이다.”15)라는 선언을 잊지 않는다. 우주자연의 변화 운행을 상기시킴으로서 이기적 욕망의 집착․고착을 경계한 것이다. 병든 사회는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해 물질적으로는 경제적 불평등을 구조화하고, 이념적으로는 신분적 불평등을 합리화한다.

 

인위적 학문이나 사회적 지배이념에 길들여진 인간의 사유는 세상을 선과 악 등 차별적 가치 기준으로 나누어 세상을 재단하고, 마치 절대적 가치를 담지 하는 영구불변의 무엇이 있다고 여긴다. 실제로 우주의 온갖 사물들은 우주변화의 풍랑 속에서 가치의 등급이나 이념의 적합‧부적합을 떠나서 스스로 그러하게 운행하는 것이다. 이런 도의 운행 법칙 앞에서는 이론적인 분석이나 가치의 탐구 자체가 부질없는 근심을 낳는 화근일 뿐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고정된 가치나 본질을 갖는 것이 아니고 그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나 판단에 불과하므로 그 차이는 큰 것이 아니다.16)

 

14)『莊子』, 「逍遙遊」, “至人无己.”

그리고 「應帝王」. “至人之用心若鏡, 不將不迎, 應而不藏, 故能勝物而不傷.”
15)『老子』 40장, “反者, 道之動.”

16)『老子』2장,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그런데 학문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고 문명을 세우는 지식인들과 통치자들은 언제나 우주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의미 과잉의 세계로 만들려 한다. 역사를 의미 과잉으로 가득 채울수록 지식과 이념을 소유하는 자는 역사 안에서 자연스런 운행과 분리된 채로 인위적 가치의 구축에 더욱 엄숙해진다. 그래서 신성함과 세속성을 구별하고, 지식(知識)과 무지(無知)를 분석하고, 인의(仁義)와 不仁(불인)․不義(불의)의 구별을 최고의 과제로 강조한다.

그러나 노자는 ‘성과 지(聖智)’, ‘인과 의(仁義)’, ‘교묘함과 이로움(巧利)’와 같은 세 가지의 가치 개념이 언제나 천하를 불안하게 했다고 생각하였다. 이 세 가지는 이른바 문명의 유지를 가능케 하는 문화적 가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성(聖)과 지(智)는 종교적 현존의 가치를 의미하며, 인의(仁義)는 윤리적 판단의 가치를 수립하고, 교리(巧利)는 경제적 노동 가치를 구축한다.

인위적 가치를 구축하여 그것에 집착하는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종교‧윤리‧경제의 세 방면에서 좋은 측면만을 선택하도록 강요해 왔고, 또 그런 선택만이 의미 있는 삶을 보장해 준다고 역설하였다.

 

도가는 의미․가치 지향의 태도를 제한적 사고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가치는 고정불변의 고유값을 갖는 진리가 결코 아니고, 상대적 의존관계에서만 성립하는 유한한 진리값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구축하는 인류역사 속으로만 의미․가치를 제약하는 그런 제한적 사고를 넘어설 때라야 인간은 진정한 해방․정신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17)

그러나 인위적 학문을 쌓아서 그 이념의 학문에 얽매이게 되면 나날이 도에서 멀어져 영구불변의 무엇이 있다는 ‘의미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18) 도가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의미는 인간의 인위적 이념에서 발생되는 족쇄와 같다. 따라서 그와 같은 속박을 키우는 “인위의 배움을 끊으면 걱정이 없다.”19)고 한다.

 

17) 이는『莊子』에서 역설하는 소요(逍遙)와 제물(齊物)의 경지를 말한다.
18)『老子』 48장,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取天下, 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19)『老子』20장, “絶學無憂.” 

 

인위적인 가치의 기준을 설정해놓고 그것을 마치 절대적인 것인 양 사는 세계에서 인간들은 아름다움과 추함의 절대적 구별에 얽매여 산다. 그리고 그것을 구별하는 기준을 확정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사는데, 이런 종류의 두려움이 생기는 원인은 바로 우주자연의 운행법칙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해놓은 가치의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가는 인간 수양의 기초로서 무위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삶의 상태를 회복하고자 노력할 것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인간이 “도의 법칙에 따라 살고자 노력하면 내면의 덕이 진실해진다.”20) 역시 집안과 마을, 나라, 온 세상의 차원에서 도의 법칙을 따르면 집안은 넉넉해지고, 마을은 오래 보존되고, 나라는 풍족해지며, 온 세상은 모든 인간이 고르게 덕을 실현하며 살 수 있다. 이런 무위자연을 본받는 수양의 방법은 구체적으로 사사로운 욕심을 없애고(去私),21) 아끼고 절약하며(嗇),22) 늘 만족함을 알고(知足),23) 조화로움을 지키는 것(守和),24) 부드럽고 약함을 지키는 것(柔弱)25) 등이다.

 

20) 『老子』54장, “修之於身, 其德乃眞.”
21)『老子』29장.
22)『老子』 59장, “治人事天莫若嗇, 夫唯嗇, 是以早服, 早服, 謂之重積德, 重積德, 則無不克, 無不克, 則莫知其極, 莫知其極, 可以有國, 有國之母, 可以長久, 是謂深根固저, 長生久視之道.”
23)『老子』 44장,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24)『老子』44장,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25)『老子』40장, “弱者, 道之用.”

 

 

이와 같은 수양을 토대로 세상의 일에 대처하는 방법도 나온다.

처세(處世)의 방법으로 거론한 첫째는 어리석음을 지키는 것(守愚)26)이다.

이는 “밝은 길은 어두운듯하다.”27)고 하는 말이나 “아주 훌륭한 기교는 서툰듯하며, 아주 빼어난 논변은 어눌한듯하다.”28)는 말과 상통한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인간은 남에게 잘난 체 하지 않는다.

26)『老子』65장,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 民之難治, 以其智多, 故以智治國, 國之賊,不以智治國, 國之福, 知此兩者亦稽式, 常知稽式, 是謂元德, 元德深矣遠矣, 與物反矣, 然後乃至大順.”
27)『老子』41장, “明道若昧.”
28)『老子』45장, “大巧若拙, 大辯若訥.”

 

둘째 방법은 다투지 않는 것(不爭)이다.

“우주자연의 법칙은 다투지 않고 잘 이긴다.”29) 다투지 않는 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 물의 모습이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사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늘 뭇 인간들이 싫어하는 곳에 거처하므로 도의 법칙에 가깝다.”30)

29)『老子』73장, “天之道, 不爭而善勝.”
30)『老子』8장,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셋째의 방법은 “여러 가지 빛들이 서로 어우러져 조화로이 비추듯이,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세속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다.”31)

31)『老子』56장, “和其光同其塵.”

 

넷째는 “신의를 중시하여 잘 지키는 것이다.(信)”

도의 법칙은 언제나 불변적 모습을 지니면서 우주자연의 만물들에 예외 없이 고르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믿음직한 법칙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생활 속에서 말을 하면 언제나 믿음이 있게 해야 한다.32)

그러나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않다.”33) 이런 수양과 처세의 방법은 역시 나라를 다스리는 성인 지도자의 입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32)『老子』8장, “言善信.”
33)『老子』81장, “信言不美, 美言不信.”

 

 

4. 바르게 사는 길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삶의 윤리적 원리는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무위자연이란 기본적으로 도의 운동 변화 법칙이 지니는 특성이다. 이는 무목적적․무의지적으로 자발적인 내재적 법칙에 따라 저절로 운동하는 힘의 흐름을 표현하는 형용사이다.34)

 

무위(無爲)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도의 법칙에 따라 만물의 운동 변화가 외부의 간섭 없이 자발적이고 자기 충족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억지로 인위적 가치와 목표를 세워놓고 자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도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레 살아가는 행위가 무위이다.

무위는 도의 궁극적 운동방식이다. 인간이 사회적 실천의 입장에 처해 무위에 따라 살면 바르게 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무불위(無不爲)의 삶을 살게 된다.

 

자연(自然)이란 그런 운동 변화가 억지로 타율적인 운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자체의 힘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자연은 우주자연의 운행과정이 배타적 주재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운행한다는 것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자연은 바로 무위의 운동방식이다.

결국 “도의 다양한 작용은 늘 억지로 함이 없이 저절로 하지만 되지 않는 것이없다.”35)이런 무위자연의 우주적 특성은 우주만물과 인간 사회의 연속성이라는 맥락에서 자연스레 인간사에 적용된다.

 

34) 현대의 자연(Nature)이라는 명사는 노자의 경우에 대체로 우주만물(天地)에 해당한다. 중국 사상사의 전통에서 ‘자연’이라는 말이 명사로 쓰인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35)『老子』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인간도 무위자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도가는 무위자연이라는 우주자연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인간의 현실적 실천원리와 일치시킨다. 우주자연의 존재․운동 법칙이 바로 인간이 따라야 할 윤리적 규범이 되는 것이다. 본래 도의 법칙은 배타적 주재성을 갖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주자연의 흐름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개별자들의 상관대대적 관계 속에 내재화되어 있는 법칙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도는 우주 만물을 생성하는 본체로서 자연과 사회를 관통하는 객관적이고 근본적인 법칙인 동시에 인간생활의 윤리적인 규범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만물 가운데 드는 하나의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주자연의 역동적 본체인 도(道)로 말미암아 생겨난 인간은 도의 운동법칙에 따라 살다가 역동적 본체로서의 우주 만물의 상태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도가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도의 법칙을 알아서 그대로 실행하며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귀결을 얻는다. 인간사회의 온갖 불행․일탈은 이 법칙의 무위자연성을 거스르고, 제멋대로의 인위적 기준과 질서를 만들어 자기 자신과 그 사회를 구속하는데서 비롯된다. 인간은 그 인위적 일탈의 집착을 버리고 무위자연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도가의 윤리적 선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몸을 담고 있는 사회문화의 실존적 조건을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늘 변화하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며, 그 본질도 실존적 현실의 운동․변화 속에 임시로 존재하는 개체의 본질일 뿐이다.
인간은 실존적 현실을 살아가는 와중에 자기의 몸이 직접 대상을 느끼게 되고, 의식은 그 몸의 지각을 개념적으로 생각한다. 몸의 느낌이나 지각이 의식의 생각과 통일되면, 그것이 나의 느낌을 개념화한 나의 생각이 된다. 이것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중요한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주체적 자의식을 지우고 이기적 소유의식만을 키우는 소비지향의 대중문화 속에서 자신의 주체의식을 갖고 세계의 참 모습을 자각하며 무위(無爲)적 삶을 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도가의 눈으로 볼 때, 사회적 삶을 사는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이기적 욕망은 자연성을 거스르는 유위적(有爲的) 사회문화의 구조적 공동욕망이다. 무위자연을 표방하는 도가의 무위적(無爲的) 윤리관은 이기적 욕망과 소유욕을 해체하고 세상을 본래 존재하는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놓아두려는 사상이며 삶의 방식이다. 이런 세계에서 소유욕에 사로잡힌 개인의 자아는 절대로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없으며, 자아란 단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임시적 존재이며, 장구한 우주변화의 흐름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흔적과 같다. 영원한 자기의 본질을 갖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볼 때, 무(無)로부터 와서 무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무는 아무런 존재성이 없는 ‘존재론적 무’가 아니라, 영원불변의 자기동일성 또는 본질을 갖는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개별자로서의 인간은 존재자(有)로 이 세상에 나오지만 잠시 만물의 형상으로 왔다가 개별성이 무화(無化)되는 무로 돌아간다.36)

이것이 우주자연의 필연성이며, 도(道)의 법칙이다. 인간은 이와 같은 우주자연의 참 모습을 바로 볼 때,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의 자세를 바꿀 수 있다. 마음의 의식이 무위(無爲)의 법칙을 익혀서 무(無)의 효과를 삶에 활용할 때 마음의 평정과 삶의 안정을 이루며, 자기의 정체성과 의미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건대, 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고정불변의 본질이 없고, 인위적 가치에 고착되는 자아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인위적 가치의 굴레를 벗어나 마음의 평정을 얻는 방법의 하나가 좌망(坐忘)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좌망(坐忘)은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안정시키는데서 비롯된다.37)

고요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이기적 욕망의 허무함을 자각하면 그 순간 병든 욕망의 자아의식은 이내 사라진다. 병든 욕망에서 기인하는 모든 불평등과 폭력은 인간의 사회문화의 구조를 우주자연의 존재양식인 상관적 차이의 법칙으로 통찰하는 사유방식에서 해소될 수 있다. 우주자연의 모든 개별자들은 서로 다른 위상을 지니면서 동시에 서로 의존해서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상관대대의 법칙에 순응하는 우주자연의 존재방식이다.

 

도가가 이해하는 우주자연의 존재방식 속에는 생성과 소멸의 지속적 운행이라는 순환법칙이 있으며, 이런 생멸(生滅)의 존재방식 속에는 온갖 사회문화적 소요와 갈등을 야기하는 고착적․이기적 소유의식이 없다.

생성과 소멸의 균형이 우주자연의 변화과정을 지속시킨다. 예컨대, 삶과 죽음이 연속적 운행의 양태이므로, 인간세상에서 아무도 죽지 않으면 세상은 인간들로 가득 차 움직일 수도 없게 될 것이다. 불멸의 존재자라는 꿈은 끊임없이 운행하는 우주자연 속에서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죽는 인간이 있어야 산인간도 살 수 있다. 이것이 우주자연의 필연성이다. 이런 우주자연의 필연성을 통찰하고 본받으려면38),

이기적 욕망이 투쟁하는 시끄러운 세상보다 조용하고 차분한 안식처에서 고요히 관조하고, 우주변화의 법칙에 따라 운행하는 세계에 귀를 기울이며, 무위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36)『老子』40장, “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37) “좌망(坐忘)”은 이후 도교의 수양법으로 계승된다. 김백희, 「사마승정의 『좌망론』」,『동서철학연구』 제43호, 한국동서철학회, 2007.

38)『老子』25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우주자연의 생성과 소멸의 필연성 속에는 인간이 교만하게 인위적 가치체계를 세워서 능동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우주자연의 운행이라는 큰 지평 위에서 인간의 위상을 성찰하지 못하고, 욕망에 이끌리는 인간 생명의 영원한 유지를 좋은 가치로 세우고 죽음을 나쁜 가치로 단정하는 양자택일적 판단이 무의미하다. 생성은 소멸을 전제로 안고 있으며, 소멸은 이미 생성을 선험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도가의 사유 속에는 인간이 우주자연의 변화하는 풍랑 속으로 돌아가 자연 속에서 자연에 의존하며 자연스럽게 살다가 고요하게 죽고 싶어 하는 유정(幽靜)한 사유가 있다. 도가의 사유방식 속에서 모든 개별자들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상호의존적 생멸의 존재이므로,39) 각각의 개체들은 배타적인 대립물이 아니라 상호 전제의 관계에서 존재할 수 있는 동기(同氣)의 필연성을 지닌다.40) 즉 일체동기(一切同氣)이다. 이것을 장자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이라 하여 우주의 온갖 개별자들이 모두 평등하다고 보았다.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현세의 차별성은 대립적 우열(愚劣)이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상관적 차이일 뿐이다. 나와 다른 것은 열등하거나 우월한 대립적 적(敵; 怨讐)이 아니라 또 다른 나로서의 다른 존재일 뿐이다. 배타적 고유성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도가의 사유 세계에서 남과 다른 나만의 영원불변의 배타적 가치란 우주자연의 필연성 속에는 결코 없다.

 

39) 이것을 우주변화의 양태를 설명하는 도가의 기화론(氣化論)으로 부연할 수 있다. 鄭世根,『莊子的氣化論』, 臺灣學生書局, 1991 참고.
40)『莊子』, 「지북유」, “生也死之徒, 死也生之始, 孰知其紀!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 若死生爲徒, 吾又何患! 故萬物一也.” 

 

5. 도가적 인생의 사회윤리적 의미

 

도가의 사상체계 속에서 볼 때, 형이상학적 사유의 연속에서 그 윤리적 원리가 도출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세상의 사회․정치에 관한 구상도 기본적으로는 우주자연의 운행 법칙과 연관된다. 현실의 사회적․정치적 질서는 다양성의 조화와 상반성의 균형적 공존이라는 구도 속에서 실현된다. 이는 우주자연의 운행 법칙이나 질서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의 사회‧정치적 질서의 조화는 우주자연의 질서를 체득하여 살아가는 성인 지도자의 사려 깊은 통치에 의존한다. 우주적 법칙과 소통하는 성인 지도자는 이상적 국가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그가 다스리는 공동체의 생명력은 그 구성원들 상호간의 관계를 미묘하게 조절하고 역동적 균형을 유지하는데 있다.

 

공동체를 인도하는 성인 지도자는 사회적 구성원들 즉 백성들을 인위적으로 이끌기보다는 우주자연의 운행이 그렇듯이 자발적으로 조화로이 살아가도록 한다.

인간의 존재론적 근원인 우주의 법칙처럼 바로 “무위로써 다스리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41)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국가의 “통치자가 무위를 잘 지켜서 실행하면 온갖 일들이 저절로 교화될 것이다. 억지로 교화하려고 하고 부러 일을 지으려 하면 나는 이름을 지을 수 없는 순박함으로 그것을 억누를 것이다. 이름을 지을 수 없는 순박함의 상태에서는 또한 헛된 욕망도 없다. 헛된 욕망을 품지 않은 채 고요히 차분하게 살면 이 세상은 저절로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42)

 

도가의 사상이 정초되는 시기는 그야말로 인위적 일탈이 극에 달한 춘추전국시대이다. 전쟁의 폭력이나 살인 약탈 또는 다양한 방식의 억압이 횡행하는 현실을 변혁하는 방법은 더 이상 인위적 인간 욕망에 매달리지 않고 무위의 길을 찾는 것이다. 사회 현실의 온갖 질곡 속에서 생겨나는 병든 욕망에 물든 인위적 노력으로는 반자연적 폭력 정치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직 헛된 욕망을 버리고 도의 법칙에 따라 무위자연의 삶을 사는 정치를 구현해야만 백성들이 참된 생명의 실현을 누리며 살 수 있다.

 

41)『老子』3장, “爲無爲, 則無不治.”
42)『老子』32장,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鎭之以無名之樸, 不將不欲. 不欲以靜, 天下將自正.” 

 

성인 지도자가 무위의 정치를 시행할 때는 구체적으로 몇 가지 실천적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우민(愚民)인데, 이것은 백성의 성품을 우직하게 하는 것이다.

“옛날에 도의 법칙을 잘 따르는 인간은 백성들을 명민하도록 하지 않고, 우직하도록 한다.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지혜가 명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민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에 해롭고, 지혜로써 다스리지 않는 것이 나라에 복이 된다.”43)

명민한 지혜는 인위적 지식과 이념의 결과물이므로 역시 나라를 다스리는데 부정적인 기능을 발휘한다.

43)『老子』65장,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民之難治, 以其智多. 故以智治國, 國之賊; 不以智治國, 國之福.”

 

둘째는 애민(愛民)인데, 이것은 백성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는 무위자연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44) 통치자의 덕목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44)『老子』10장, “愛民治國, 能無爲乎.”

 

셋째는 계도(戒盜)인데, 이것은 병든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 않는 것이다. 백성을 위해 정치를 하면서 백성을 착취하는 군주는 도둑의 우두머리(盜竽)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위에서 세금을 많이 걷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굶주린다.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위에서 인위적 욕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스리기 어렵다.45)

45)『老子』75장, “民之饑, 以其上食稅之多, 是以饑.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넷째는 거문식(去文飾)인데, 이것은 바로 백성을 혼돈케 하는 이념적 지배구조나 지나친 외형적 꾸밈을 버리는 것이다.46) 인간 세상에는 피해야 할 것이 많으면 일반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에게 욕망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여러 가지 물건이 많으면 국가는 더욱 혼미해진다. 인간들에게 기교가 많으면 기이한 물건들이 더욱 생기고, 법령이 더욱 번창하면 도적이 더 많아진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성인은 “내가 무위자연으로 다스리면 백성은 자연히 교화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은 스스로 바르게 되고, 내가 억지로 일거리는 만들지 않으면 백성은 스스로 부자가 되고, 내가 헛되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백성은 자연히 소박한 삶의 상태로 돌아간다.”47)고 말한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평화로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모든 백성들이 도의 법칙에 순응하려면 성인 지도자는 늘 구체적 사회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인위의 과잉을 경계해야 한다.

46)『老子』19장, “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 此三者, 以爲文, 不足.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47)『老子』57장,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성인이 국가를 다스린다는 것은 바로 무위자연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행하는 자는 실패하게 되고, 억지로 잡으려 하는 자는 잃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인위적으로 행함이 없으니 실패함이 없고, 억지로 잡으려 하지 않으니 잃는 것이 없다.”

헛되이 병든 욕망의 과잉에 기우는 인간은 언제나 현실적 부작용을 낳는다. 그것을 치유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이나 사회 현실적 차원에서 모두 무위의 길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한편, 국가의 지도자로서 성인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무위자연의 평화로운 삶을 위협하는 세력들에 대하여 부득이하게 대처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물론 모든 전쟁은 원론적으로 보면 무고한 죽음을 부르는 나쁜 일이다.

 

그러나 도가의 입장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전쟁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군사의 일은 상서롭지 못한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써야할 때는 소박하고 간결한 것을 제일로 여길 뿐, 아름답게 꾸미지 않는다.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살인을 즐기는 것이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의 일을 맡을 수 없다.”48)

우리가 이미 자연의 법칙으로 음미하고 있듯이, 음(陰)과 양(陽) 또는 우(右)와 좌(左)가 각각 상관대대의 관계를 이루고 존재하는 것과 같이 평화와 전쟁은 함께 가는 것이다. 단지 전쟁을 즐기거나 헛된 욕심의 충족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성인은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게 되어서야 부득이하게 전쟁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죽인 일이 많을 때는 슬픔의 감정으로써 울어 예를 표하는 것이니, 전쟁에 이겼으면 좋지 않은 일의 예로써 그 일에 대처하는 것이다.”49)

이는 평화로운 삶의 세상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능동적인 도의 법칙을 실천하는 데에서 확보되는 것임을 잘 알려주고 있는 구절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결코 수동적 은둔주의를 예찬한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48)『老子』31장, “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勝而不美, 而美之者, 是樂殺人, 夫樂殺人者, 則不可得志於天下矣.”
49)『老子』31장, “殺人之衆, 以悲哀泣之, 戰勝以喪禮處之.”

 

도가는 문화와 문명이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인위의 길로만 치닫는 인간중심주의적 발전을 거부한다. 인간중심주의적 문화와 문명은 자연과 인간의 연속성을 끊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인간화시킨다. 그리고 인간들의 국가사회도 대형화하여 온갖 인위적 가치로 사회를 길들이며, 인간의 본래적 자연성을 망각시키고 또한 건강한 욕망을 병들게 한다.

인간은 본래 자연의 흐름에 조화‧순응하면서 사는 것이 존재의 근원적 법칙에 일치하며 또한 현실적으로도 가장 알맞은 현실적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인위적인 구성물인 국가나 군주 등이 끼어들어 이념의 과잉으로 치달아 가게 되고, 이에 따라 인간은 무위자연에 반대되는 행위만이 지배하는 세상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길들게 되고, 자연스레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은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50)

그러므로 도가는 하(夏) 은(殷) 주(周) 삼대 이래로 계속 이어온 윤리적․인격적 우주관에 기초한 인간 중심적 문명이나 인위 과잉 문화의 유산 그리고 반자연적 사회․국가조직을 거부하고 해체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을 다시 결합시키고자 한다. 이는 단순한 반문명적 야만상태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도가가 구상한 사회의 핵심은 문명의 길이 무위의 길과 역동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50)『莊子』, 「天地」, “有機械者心有機事, 有機事者必有機心. 機心存於胸中, 則純白不備, 純白不備, 則神生不定, 神生不定者, 道之所不載也. 吾非不知, 羞而不爲也.”

 

문명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이끌어 간다. 그러나 문명은 그 편리함으로 유혹하여 인간의 욕망을 인위적으로 길들이게 된다. 인간들은 그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며,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편리함을 소유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삶의 편리성은 이제 소박함을 지키며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던 삶 자체를 해치고 구속하는 원인이 된다.

도가는 무지(無知)․무욕(無慾)을 강조하면서 실질이 빠지고 추상화되는 문화와 지식을 거부하고, 인위의 세계를 구축하는 이념적 지식인을 매우 꺼려한다. 그래서 “지혜를 끊고, 다스림의 규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배가 될 것이다. 재주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없게 될 것이다. 인위를 끊고, 거짓을 버리면, 백성이 효성과 자애를 회복할 것이다. 이 세 가지 말을 분별의 기준으로 삼으면 부족하다. 그러므로 돌아 갈 곳이 있음을 알려주나니, 본래의 바탕을 살피고 본래의 상태를 보존하여, 개별적 집착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 하라”51)고 했다.

 

51)『老子』19장, “絶智弃辯, 民利百倍: 絶巧弃利, 盜賊亡有: 絶僞弃詐, 民復孝慈. 三言以爲辨不足, 或命之或呼屬, 視索保僕, 少私寡欲.” 

 

문제의 핵심은 인위적 가치가 자연성을 넘어서 자기 자신의 몸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사회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언어․문자․지식 등 인위적 도구나 가치에 의해 선․악․미․추의 관념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위적 가치들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지배․피지배 수단이 되며, 더 나아가 본래 유지하고 있던 인간의 소박한 본성과 자연성을 파괴하게 된다.

도가는 인위적 이념에 경도된 사회를 거부하고, 인위의 과잉을 무위의 실천으로 균형 잡는 세상을 구상하였다.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같이 도가의 사상에 나타나는 반문명적, 반인위적 성격은 춘추와 전국시기의 고통스럽고 혼란한 사회상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기인한다. 도가는 사회와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의 타고난 자연스러운 본성이 파괴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인위에 과도하게 경도된 문화와 문명으로 대표되는 인간중심주의적 질서 자체를 옹호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과 인간이 분리․대립되는 인간중심의 문화 문명을 거부하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균형을 이루는 본래 상태의 회복을 주장한 것이다. 이런 사유방식은 인위의 과잉으로 인해 병든 인간의 욕망을 무위의 기능으로 치유함으로써 자연과 문명의 역동적 균형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국가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성인이 반드시 실천적으로 구현해야 할 의무이다. 이런 균형을 깨는 세력은 곧 사회적 폭력을 생산하는 세력이며 또한 도의 법칙에 위배되는 인간들이다. 이런 반자연적 제 형태들은 도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자의 길이 아니다.

 

평화로운 세상은 인간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설정해 놓은 순수한 이념적 완전사회가 아니다. 그런 사회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크게 솜씨 있는 재주는 졸렬한 것 같으며, 크게 곧은 것은 굽은 것 같다. 활동은 추위를 이기고, 고요히 맑은 것은 뜨거운 것을 이기는 것이다.”52) 인위적으로 설정된 하나의 이념적 목표에 외곬으로 집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사회적 병폐를 생산한다.

사회적 모순과 폭력과 갈등은 영원한 평화를 위해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순과 폭력과 갈등이 없는 순수하고 완전한 세상은 없다. 우주자연의 상관대대 법칙처럼, 이런 것들은 알맞게 관리될 때 그 사회의 역동적 생명성을 키우는 힘이 된다. 도 자체가 상관성과 대대관계라는 선험적 갈등․조화의 이중적 교직으로 우주자연을 생성․소멸 변화시키는 법칙임을 상기해야한다. 이와 같이 인간세상의 평화는 인위의 과잉을 경계한다. 그러므로
도가는 “맑고 고요한 것이 천하의 바른 기준이다.”53)라고 한다.

 

52)『老子』45장,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躁勝寒, 靜勝熱, 淸靜爲天下正.”
53)『老子』54장, “淸靜爲天下正.”

 

도의 법칙에 따라 무위자연의 모습대로 인간세상이 자연스레 돌아간다면 병든 욕망으로 인한 사회적 병폐가 있을 수 없다. 하늘의 해는 정오에 이르면서 동시에 바로 서산에 지기 시작하며, 밤하늘의 달도 원만한 모습으로 둥글게 차면 이내 기운다는 것이 불변의 이치이다. 우주자연이 변화해 가는 사계절의 운행 모습은 추호의 차이도 없이 이렇게 간다.

인간 사회의 현실 속에서도 “공(功)이 이루어지면 떠나는 것이니”54), 우주자연이 그러하듯이 인간도 마찬가지다.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높아졌다고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는 것이다. 이는 아주 간단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걱정을 면할 수 있는가? 우주자연의 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뿐이다. 인간세상의 사람들은 부귀와 공명을 얻으면 그것에 집착하여 빼앗기지 않으려고 폭력으로 무장하며, 교만함으로 화를 부른다. 그러므로 평화로운 세상은 부질없는 소유욕의 집착과 자기 것의 고집이 없는 공동체이다. 이런 세상이 따르는 원리는 바로 우주자연의 운행법칙이다.

 

54)『老子』9장, “功遂身退, 天之道也.”

 

좀 더 추상적으로 정리하자면, 도가는 전쟁․약탈․지배․상대적 지식 등으로 얼룩진 인위 과잉에 얼룩진 문명․문화를 무위자연의 작용․기능을 발휘하여 텅 빔(謙虛)의 여유를 갖도록 이끈다. 과도한 인위적 가치의 일탈 모습이 바로 전쟁의 폭력과 소유욕의의 과잉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인간이 무위의 힘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은 바로 우주자연의 건강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은 이념의 과잉인 문명․문화에 오염(불균형)되지 않은 작은 나라 적은 백성(小國寡民)의 공동체, 즉 인위의 문명과 무위의 자연성이 균형 조화를 이루는 세계이다.55)

 

나라의 규모는 크지 않아도 좋다. 백성의 수도 많을 필요 없다. 우주자연의 운행 법칙을 벗어난 병든 욕망과 인위적 가치의 과잉은 큰 나라와 많은 백성을 바란다. 그것이 무한히 팽창하려는 병든 욕망 즉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과도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병든 욕망을 확대 재생산하고 자연과 사회의 온갖 사물을 지배하려 한다. 인위적 가치의 과잉과 병든 욕망의 소유욕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은 이념의 과잉과 병든 욕망의 소유욕을 경계하는 도가의 실천적 목표로 볼 수 있다.

 

55)『老子』80장, “가능하면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나라의 인구를 적게 하라. 온갖 생활의 그릇이 있어도 쓸모가 없게 하라. 백성들로 하여금 죽는 것을 중하게 여겨 멀리 이사 다니지 않게 하라.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탈 일이 없게 하라.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그것을 쓸 일이 없게 하라. 인간들로 하여금 다시 끈을 매듭지어 쓰게 하라. 그 먹는 것을 달게 해주며, 그 입는 것을 곱게 해주며, 그 사는 것을 편안히 해주며, 그 풍속을 아름답게 해주어라. 이웃하는 나라들이 서로 바라다 보이는데,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小國寡民. 使有什伯之器而不用: 使民重師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民復結繩而用之.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鄰國相望, 雞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 

 

6. 결 론

 

도가의 사상은 춘추시대 말기라는 사회적 격동기에 출현하였다. 노장의 도가사상과 공맹의 유가사상은 중국철학의 가장 큰 양대 조류이다. 이 두 계열의 학문은 중국의 오랜 농경문화에 뿌리를 둔 자연철학의 사유방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자연의 변화에 큰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월(日月)의 운행과 사계의 순환에서 삶과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지혜를 얻고자 한 것이다. 이는 농경을 주로 하는 삶의 양식에서 필수 불가결한 사유라 할 수 있다.

 

우주자연을 인간과 연속적으로 보는 유가와 도가의 사유방식은 기본적으로 유사하다. 인간은 우주자연의 일부이며, 인간과 우주자연은 존재론적으로 단절될 수 없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도 이런 형이상학적 구도 속에서 이해된다.

 

단지 노자가 우주만물의 운행법칙에 순응하는 무위자연을 강조한 반면에, 공자는 인간내면의 윤리적 가치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도가(道家)는 기본적으로 우주자연의 속성을 가치중립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유가(儒家)는 우주자연의 속성을 윤리적으로 보았다. 유가에서 우주의 본성으로 묘사되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은 바로 윤리적 원리인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의 우주는 자연적 우주이며, 유가의 우주는 윤리적 우주이다. 양자는 모두 천도(天道)라는 세계의 법칙․규범과 인도(人道)라는 규범을 연속적으로 파악한다.

 

도가 윤리사상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서 정초된다. 이른바 노장철학 또는 도가철학은 자연과 인간이 합일하는 기화론적(氣化論的) 세계관 속에서 우주자연의 온갖 사물이 존재론적 동질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주자연 속의 만물과 차별되지 않는다. 도가의 윤리사상은 우주자연의 도를 내재하고 있는 인간이 인간 자신의 감각적 인식과 온갖 편견을 제거하여 자신의 내부에 본유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덕(德)을 구현하고, 세속의 반-자연적 삶을 지양(止揚)함으로서 우주자연의 운행과정에 순응하는 자유로운 경지를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무위자연의 삶이다.

 

도가의 사상에 보이는 반문명적, 반인위적 진술들의 성격은 춘추말기의 고통스럽고 혼란한 사회상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기인한다. 도가는 사회와 문명의 발전 속에서 인간의 타고난 자연스러운 본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인위에 과도하게 경도된 인간중심주의적 질서자체를 거부한다.
이것은 자연과 인간이 분리 대립되는 인간중심의 문화 문명 속에서, 인간과 자연이 조화 균형을 이루는 본래상태 구조의 회복을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은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의 이상적 공동체이다. 

 

참 고 문 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