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7

rainbow3 2019. 10. 8. 00:19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예수의 위대한 질문⑦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장 31절)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믿음은 삶의 중요한 것을 헤아려 아는 능력

…우선순위를 매겨 그것을 자신의 목숨처럼 지키려는 삶의 태도 가져야

 

 

예수의 마지막 만찬을 형상화한 스위스 제네바 생 피에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예수는 제자들에게 ‘목숨처럼 지키는 믿음’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우리는 대부분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지식’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가짓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나는 남아프리카에 가본 적은 없지만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존재를 ‘믿는다’. 내가 아는 새나 물고기의 종류도 몇 가지밖에 없다. 내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수십만 종 이상의 조류와 어류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 나는 새나 물고기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나는 태양계 안에 있는 다른 행성들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존재를 과학자이나 미국 NASA의 보고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정할 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확실하게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테오리아(theoria)’라고 주장한다. ‘테오리아’는 인간 영혼의 가장 순수한 상태로 내가 알고자 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테오리아’는 ‘관조(觀照)’라고 흔히 번역된다. 피타고라스는 ‘테오리아’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올림픽 경기에 참가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예로 든다.

 

경기에 참여하는 운동선수들, 선수들에 돈을 거는 상인들, 그리고 경기를 있는 그대로 관람하는 관객들.

운동선수들은 경기를 통해 명예와 부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도구는 바로 ‘지혜(sophia)’다. 상인은 자신이 선택한 선수를 통해 ‘쾌락(apolaustic)’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경기를 있는 그대도 ‘관조(theoria)’하는 구경꾼이 있다. 이들은 경기에 몰입하여 ‘적극적으로 관찰한다’. 피타고라스는 이 관찰을 통해 얻는 지식만이 진리에 근접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너무 확실하여 의심할 수가 없는 그런 지식이 있는가? 이 질문은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이 그의 첫 저서인 <철학의 문제들>에서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겉보기에는 그렇게 어려운 질문처럼 보이지 않으나 대답하기 가장 힘든 질문 중 하나다.

 

러셀은 이 질문에 대한 쉬운 대답을 저해하는 장애물을 인식하는 것이 철학공부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철학은 우리 일상의 지식을 너무나 쉽게, 혹은 교리에 기초하여 단언적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관조를 통해 우리가 정말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현저한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만든다.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내가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나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에 글을 쓰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고 있고 창문 밖에 산과 태양을 본다. 태양은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지구보다는 훨씬 크고, 지구의 자전으로 태양이 매일 아침 떠오르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내 방으로 들어온다면 그는 내 책상, 의자, 컴퓨터를 볼 것이다. 그러나 내 책상은 보는 사람마다 그 형태가 다를지 모른다. 그 책상은 직사각형으로 검은색 나무 모양이며 네 개의 다리가 있다. 햇빛이 반사되어 책상이 검은색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어떤 부분은 검은색이지만, 어떤 부분은 회색 같기도 하고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색을 띠고 있다.

 

책상 위 검은색의 분포는 내가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내 방으로 들어온 사람도 ‘검은색’ 책상을 보지만, 내가 책상을 보는 각도와 그가 보는 각도가 다르기 때문에 빛이 반사되는 모양이 달라 그가 보는 책상의 색과 내가 보는 책상의 색은 엄밀한 의미에서 다르다.

 

내 책상은 ‘검은색’이라고 단정하면 이런 차이가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이 책상을 명확하게 그리려는 화가에게는 그 차이가 중요하다. 화가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검은색’이라는 상식으로부터 벗어나, 책상의 진짜 색이 무엇인가를 탐구해야 한다.

러셀은 철학의 시작을 ‘겉모습’과 ‘실제’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무엇이 ‘책상’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한다. 어떤 이들은 책상을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울퉁불퉁한 표면을 묘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현미경이 등장하면 일반 현미경으로 관찰한 책상은 그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책상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현미경으로 관찰한 책상을 신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오감에 기초한 지식을 믿을 수 없다. 책상의 모양도 그 실제 모습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그 모양이 진짜 모양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책상을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책상의 모습은 달라진다. 그러므로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우리가 감지한 ‘겉모습’이 실제의 모양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종교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신앙(faith)’이다. 신앙과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단어가 ‘믿음(belief)’이다. 믿음은 종종 어떤 객관적인 진실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오감에 기초한 관찰로 시작한다.

 

더욱이 신앙의 핵심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믿음은 이 지식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지식 자체가 주관적이며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경험과 전통에 노출되었느냐에 따라 그 믿음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정의할 때 그 사람의 어떤 면이 그를 믿음을 지닌 자로 정의할 수 있는가? 종교인들은 흔히 반박할 수 없고 증명 가능한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강한 믿음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종교적이라면 사람들은 그가 그 개별 종교에서 형성된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신앙과 믿음을 동일하게 여긴 것은 최근의 일이다. ‘신앙’이란 영어단어 ‘faith’는 원래 ‘신뢰’다. ‘신앙’이란 어떤 사람이나 이상적인 삶에 대한 신뢰이자 충성이다.

신앙은 지적이며 정신적인 활동이나 고백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내재된 일종의 덕(德)이다.

 

약속한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그것을 지조 있게 지키는 행위가 바로 신앙이다. 신앙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자기성찰과 수양의 과정이다. 신앙은 종종 의례와 이야기를 통해 배양된다.

객관적인 증명이 ‘진리’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은 도전이다. 인간의 삶에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 바로 신앙이다.

 

 

좌로부터 버트런드 러셀, 프리드리히 니체, 르네 데카르트. 이들 3인의 근·현대 철학가는 종교를 이성의 잣대로 재단했으나 신앙의 은유적 기능과 이에 입각한 인간과 세계해석의 가능성을 간과했다. 

 

통찰을 통해 우선순위를 정하는 삶

 

신약성서의 언어인 고대 그리스어에서 ‘신앙’은 ‘피스티스(pistis)’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피스티스’는 수사학적 용어로 그 원래 의미는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적당한 수단들을 찾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서구 수사학 전통에서 연설의 목적은 ‘피스티스’를 통해 동의를 얻고자 한다.

 

그러므로 ‘피스티스’란 연설을 통해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을 갖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연설을 듣는 자는 피스티스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이성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피스티스를 통해 어떤 사안에 대한 일정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런 이성적인 설득(피스티스)을 거쳐 도달하는 상태 또한 피스티스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피스티스’는 ‘설득’이자 설득의 결과인 대상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라틴어에 ‘크레도(credo)’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나는 믿는다’로 흔히 번역된다. 크레도라는 단어는 ‘심장’을 의미하는 ‘코르(cor)’와 ‘우주의 질서에 맞게 배치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다레(dare)’의 합성어다. ‘크레도’의 의미를 직역하자면 ‘우주의 질서에 맞게 자신의 심장(생각과 정성)을 배치하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credo in unum Deum’ 즉 “나는 한 분의 신을 믿습니다”라는 문장은 어떤 초월적인 신을 맹목적으로 신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이 신을 믿는다는 문장은 사실 “우주의 질서를 만든 어떤 절대자를 찾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배치하다” 즉 “나는 삶에 대한 신비와 경외심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부단히 설득하고 있다”라는 말이다.

 

11세기 영국 캔터베리 신학자 안셀름은 ‘credo ut intellagam’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의 의미는 “나는 삼라만상의 질서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공부하고 내 삶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있다” 정도일 것이다. 안셀름은 한 종교가 만든 교리를 무비판적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는 또한 현재 자신이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굉장한 주장들을 언젠가는 이해할 것이라고 허망하게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단순히 “내가 내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우선순위를 매기고 그렇게 산다면 언젠가 신을 이해할 것입니다”라고 기도한 것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교리의 의미는 단순히 지적인 활동으로 한순간에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온전하고 완벽한 종교생활을 지향하고, 그 종교의 신화와 의례를 기꺼이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때,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다. 현대의 무신론자들은 종교를 선택하기 전, 그 형이상학적인 주장을 지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이 과학적인 관행이다. 그들은 교리에 담긴 내용을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만일 그가 신의 존재에 대한 교리에 설득당하지 않는다면 그는 믿음을 잃었다고 치부할 것이다. 종교 교리가 이성적으로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면, 거짓이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위대한 사건을 기억한다. 기원전 13세기경 모세는 당시 이집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이라고 불리는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험난한 여행을 시작한다. 모세가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바다를 치니 바다가 갈라져 마른 땅이 드러났다고 전한다.

이 바다를 건넌 사건은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기적을 기록하였다. 이 이야기는 실제 사건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것을 전달하려 한다.

 

유대 정체성의 핵심은 통과의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역사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다. 이 성서 이야기는 다른 성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인 서술이 아니라 의도적인 ‘신화’로 기록된 것이다. 여기서 신화는 믿지 못할 거짓말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그 의미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이야기다. 물이 갈라져 마른 땅이 등장하는 이야기와 신이 바닷물을 갈라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이야기는 성서에 종종 등장한다.

 

이 신화는 ‘통과의례’에 관한 이야기다. 혼돈으로 상징되는 물을 바람으로 걷어내고 마른 땅이 드러나는 주제는 <창세기>에서의 우주창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축자적으로 ‘믿으려는’ 시도는 성서의 본래 의도와는 맞지 않는다. 오늘날 과학주의와 역사주의를 경전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시도다.

 

이 신화는 의례를 통해 유대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다. 매년 유대인들은 유월절 의례인 ‘세데르(seder)’를 통해 이 괴상한 이야기를 자신의 삶 안으로 수용하고 자신의 삶에서 적용시키려 한다.

유대인들의 유월절 이야기인 ‘하가다’에 의하면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다 탈출하여 갈대바다를 건넌 고대히브리인들의 하나로 상상해야 한다. 출애굽 이야기가 이런 방식으로 신화화되고 의례화되고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지 않는 한, 이 이야기가 종교적이 될 수 없다. 만일 어떤 이가 출애굽 연대를 추정하고 그것을 증명할 역사적이며 과학적인 증거를 요구한다면 이 이야기의 본질과 목적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런 신화적인 사고가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가 등장하면서 자취를 감춘다. 그에게 우주는 생명이 없는 기계다. 거기에서 어떤 신적인 정보도 담겨 있지 않다. 데카르트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신화’를 이용하지 않고 대신 ‘이성적인 사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과학자로서 자명한 수학적 논리로 진리를 증명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코기도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라고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그는 이 문장만이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추운 겨울에 난로 옆에 앉아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불확실성에 매몰되어 과거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함양한 영적인 해석을 질식시켰다.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신은 죽었고 인간에게 궁극적인 방향을 알려주던 신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묻는다. “저 위에 혹은 저 아래 누가 아직 존재하는가? 우리는 무한한 허무 안에서 길을 헤매고 있지 않습니까?”

엄청난 무서움, 의미를 상실한 분노 그리고 파괴에 대한 두려움이 현대인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현대인의 삶에 신앙이 없다면 그 삶은 쉽게 절망의 늪에 빠질 것이다. 아우슈비츠, 르완다, 보스니아, 코소보와 같은 우리 시대의 니힐니즘은 신앙을 상실하고 신성함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을 때 생길 수 있는 현상이다. 

 

 

이탈리아 화가 일 바치치아(1639∼1709)가 그린 ‘세례자 요한’. 세례요한이 살해당한 후 예수는 40일간의 묵상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깨닫게 된다.

 

 

세례요한 죽음의 의미

 

예수는 인간은 자신의 삶에 숨겨진 보화를 찾는 ‘천국’을 향한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촌인 요한과 함께 자랐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자매간이다.

 

요한은 예수보다 먼저 복음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는 요단강가에서 과거의 삶을 단절하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세례의식을 통해 회개하라고 선포한다. 요한이 언제부터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를 베풀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예수가 아직 목수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요한은 이미 선교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수는 자신의 사촌 요한의 회개운동을 알고 있었다.

 

‘복음’은 원래 로마제국에서 새로운 황제의 시작을 알리는 소식이다. 이 ‘복음’은 로마제국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이 복음을 들고 간 전령은 속국으로 가서 “우리가 새로운 황제를 맞았다. 그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시저다. 너의 삶을 고치고 무릎을 꿇어라!” 로마황제는 ‘구원자’ 혹은 ‘주’로 불린다. 로마황제는 세상에 정의, 평화, 번영과 축복을 가져오며 ‘폰티펙스 막시무스’ 즉 ‘대제사장’이라 불린다.

 

황제는 사후에 신이 되기 때문에 ‘신의 아들’이라 불린다. 전령이 이 소식을 알릴 때, 황제의 특별사면장을 가져간다. 사면을 기대하지 못했던 죄수들은 갑작스럽고 기대하지 않게 죄를 사면받고 석방된다.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일생을 기록한 저자들은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선포한 내용이 바로 로마시대의 사면장과 같은 ‘복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세례요한을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다. 예수는 이제 제자도 생기고 자신을 따라다니는 많은 군중도 있었다. 예수는 자신이 세례요한과 마찬가지로 천국에 대해 선교 여행하는 중에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세례요한이 참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로마제국의 사두정치의 한 사람으로 유대지방을 다스리던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감금했다고 기록한다.

 

헤롯이 자신의 아내인 파사일리스와 이혼하고 자신의 동생인 헤롯 빌립 1세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강제로 취하였다. 아무도 감히 왕에 대해 말을 못하는 상황에서 세례요한이 공개적으로 헤롯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여러 차례 비난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여러 차례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를 예언자로 따르는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헤롯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헤롯과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었다. 헤롯은 살로메의 춤에 매료되어 취중에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라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살로메는 바로 헤로디아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린다. 헤로디아는 헤롯보다 권력에 매몰된 여자였다.

그녀는 헤롯이 장차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어떤 반란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헤로디아는 살로메에게 요한을 참수할 것을 요구하라고 사주한다.

 

살로메는 헤롯에게 돌아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이리로 가져다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헤롯은 세례요한이 반란을 일으킬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지만 그를 죽일 만큼 잔인한 왕은 아니었다. 헤롯인 자신이 귀족들 앞에서 이미 공개적으로 맹세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세례요한은 목이 잘려 죽게 되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내고 나서 예수께로 가서 알렸다.

 

이 시점은 예수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자신에게 세례를 베푼 세례요한이 살해되자 예수는 충격을 받았다. 예수는 외딴 곳으로 숨는다. 육지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추종했기 때문에, 그는 아마도 제자들에게 부탁하여 배 한 척을 빌려 혼자 미지의 장소로 피신한다. 예수는 이제 세례요한이 자신에게 한 말을 기억했다. “보라! 신의 어린 양이다. 나는 당신의 신발 끈을 묶을 사람도 못됩니다.”

 

예수가 40일간 광야에서 묵상과 금식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다면, 어려서부터 자신을 보아온 사촌이며 당시 모든 사람이 예언자로 존경하는 세례요한은 말을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깨닫기 시작한다. 예수는 ‘신에게 바쳐질 어린 양’이라는 사실이다. ‘어린 양’은 예수가 3년간의 공적인 삶을 살면서 점차로 행동에 옮긴 화두였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의 은유

 

 

요단강 서안 나블루스에서 유월절 행사의 하나로 어린 양을 대형 화덕에 굽고 있는 이스라엘인. 이들은 일주일간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며 유월절을 기린다.

 

 

유대 민중들은 세례요한이 죽고 나서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예수는 아직도 배를 타고 외딴 해변가에 정박해 있었다. 예수를 알아본 민중들은 그곳까지 몰려와 예수만 바라보았다. 급기야 예수는 배에서 내렸다. 이들은 왜 이렇게 예수를 따라다니는 것인가?

 

예수는 가난하고 절망적인 삶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찾으려는 이 불쌍한 사람들의 눈을 보았다. 그들을 보자마자 참수당한 세례요한이 생각나기도 하고, 목자가 없이 길을 헤매는 양과 같은 이들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예수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예수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하루하루 연명하는 이들을 보고 그 처지를 예수 자신의 모습으로 생각했다. 측은한 마음, 즉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여기는 마음을 ‘컴패션’이라 부른다.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나와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영국인의 마음을 헤아려 그들을 내 자신으로 여기기 위해서다. 인간만이 이 ‘컴패션’의 범위를 다른 동물과 식물, 심지어 다른 행성까지 그 범위를 확대해왔다. 성인이나 존경받는 지도자의 특징은 바로 이 ‘컴패션’에 달려 있다.

 

무리들은 좀처럼 예수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해가 지고 제자들이 예수께 달려와 말한다.

“여기는 풀 한 포기 없는 들판입니다. 날도 이미 저물었기 때문에 무리를 각자 집으로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을한다.

“물러갈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2만 명쯤 모인 사람들을 먹일 식량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제자들이 나름대로 먹을 것을 수집해 보니 빵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다.

 

그러자 예수가 무리를 땅에 앉게 하고 이것들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다. 예수는 먼저 제자들에게 그 일부를 주었고 제자들은 다시 이것을 무리에게 주었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외에,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까?

 

 

로마 성베드로성당 앞 광장에 있는 베드로의 석상. 베드로가 예수를 향해 물 위를 걷다 바다에 빠진 것은 믿음의 부족과 이로 인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각자 삶 속에서 영적 고백 실천해야

 

이 이야기를 축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기적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녀노소를 2만 명을 먹였다는 사실을 역사적이거나 과학적으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수의 기적을 축자적으로 믿기 시작한 것은 서구에서 과학혁명과 계몽주의가 발흥한 이후 19세기 말부터 시작됐다. 성서의 역사를 보면 이미 2세기부터 성서에 문자적인 해석이 아니라 은유적인 해석이 도입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겐은 성서는 다음 3단계 해석을 통해 깊은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축자적 해석, 도덕적 해석, 그리고 영적인 해석이다.

오리겐은 축자적 해석을 이단의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 특히 기적 이야기를 축자적으로 믿는 것은 이단의 해석방법이라고 폄하한다.

 

두 번째 도덕적인 해석은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자신의 삶에서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를 염두에 둔 해석이다, 오리겐은 도덕적인 해석은 초보 그리스도인들의 성서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 해석인 영적인 해석은 그 이야기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해석이다.

 

오병이어(五餠二魚)로 5천 명을 먹인 기적을 축자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오리겐의 해석에 의하면 이단이나 무식한 자들이다. 심지어는 그렇게 축자적으로 믿는 것이 신앙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두번째 해석은 초보 신앙인들의 해석인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물고기와 빵을 가져온 사람이 그 음식을 혼자 먹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나누었더니 기적이 일어난다는 해석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오늘날 우리의 행동강령을 알려주는 도덕적인 의미가 있다.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는 상황에서 가진 자들이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나눌 때, 그 사회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가르침이다.

 

세 번째 영적인 해석을 시도해보자. 영적인 해석은 이 이야기를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스스로 깊이 묵상하라는 요구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삶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신과의 부단한 대화를 통해 서서히 삶에 내재되는 수련이다. 오리겐은 도덕적인 해석을 알레고리, 즉 은유적인 해석이라고 부른다. 은유적인 해석은 영적인 해석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 해석은 일방적이지도 않고 정답과 같은 해석도 없다. 각자가 자신의 삶 안에서 그 영적인 의미를 확인하고 찾아야 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았습니까

 

예수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고 사람들은 더 많은 기적을 요구했다. 예수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자기보다 먼저 호수를 건너가게 했다. 예수는 민중들에게 집으로 각자 돌아가라고 말한다. 예수가 그들을 돌려보낸 이유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기도하기 위해서다. 예수는 홀로 기도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간다.

 

소명의 이해는 남들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 자신의 마음을 깊이 보는 연습을 통해 가능하다. 예수는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홀로 산으로 올라가 묵상한다.

예수의 삶 중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습관처럼 반복되는 행동은 바로 혼자 산에 올라가 행하는 묵상이다. 묵상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이 선물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난다.

 

<마태복음> 14장 26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였다. 그들은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할까?

오리겐이라면 이 문장을 축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가 물위로 걸었다”는 문장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성서에서 물이나 바다는 항상 혼돈을 상징하기 때문에, 인간이 혼돈의 세상인 물에 빠지지 말라는 상징이다. 이 문장은 우리에게 세상에 살면서 그 유혹에 빠지지 말고 도덕적으로 살도록 촉구하는 이야기이다.

 

예수는 그를 유령으로 착각한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를 시험한다. “주님, 주님이시면, 저에게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는 베드로에게 “내게 오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지게 되었다. 파도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파도를 보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베드로를 바다에 빠지게 한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최선의 삶이 정해졌을 때, 최고의 선은 선택과 집중이다.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 되는데, 우리는 세상의 유혹, 기대, 체면에 사로잡혀 그 길을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베드로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꾸짖는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자신의 사명을 깊은 묵상을 통해 정하고 그 사명을 어떤 시련이나 유혹이 와도 지키려는 마음가짐이다. 믿음은 짧은 인생을 사는 우리가 삶의 중요한 것을 헤아려 아는 능력이며, 그것들에 우선순위를 매겨 자신 목숨처럼 지키려는 삶의 태도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믿음이 있습니까?”

이 문장의 의미는 “당신은 삶에 대해 깊이 묵상한 적이 있습니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았습니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까?”

이것이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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