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예수의 위대한 질문⑨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요한복음 3장 10절)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네모는 왜 예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는가?
그들은 십자가 사건을 보고 예수야말로 참다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로히르 반 데 웨이덴(1400∼1464)이 그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림>. 예수를 흠모했던 두 명의 제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등장한 그림이다. Rogier van der Weyden
메시아는 육신으로 태어난 인간들에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촉구하는 ‘경고자’다. 청년 예수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영적인 부활과 깨달음 없이는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전 세계 기독교도의 메카인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의 성묘교회.
그리스도교 전통의 예술가들은 성서의 중요한 사건들을 강력한 시각적인 드라마로 표현하여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한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면 다름 아닌 예수의 십자가 처형사건이다. 예수가 비참하게 그리고 허무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된 후, 예수 제자들은 깊은 시름과 회의에 빠졌다.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이 3년 동안 따라다니며 예수의 많은 기적을 경험하면서 예수가 이스라엘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하였다.
예수가 죽기 전날 제자들과 식사하면서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을 예고할 때에도, 예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의 그런 결정을 철회하라고 요구했지만, 예수는 자신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불렀다. 자신이 인류에게 보여주려는 삶의 전형이란 ‘사랑’이었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은 33세 청년 예수의 길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예수가 골고다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후, 몇 시간이 지났을까.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이 두려워 모두 잠적한다. 이렇게 죽어버린 예수에게 3년 동안 모든 것을 걸은 자신들이 한심했고 부끄러웠다.
예수 옆에서는 두 명이 함께 처형당했다. 로마 제국의 총독 빌라도는 유대에 어떤 정치적인 소란도 용인하지 않았다. 자신의 임무는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에게 세금을 정확하게 보내는 일이다. 빌라도는 예수라는 인물에 주목했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겠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유대인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 예수를 처형하는 것은 빌라도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성서에서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당한 자들을 ‘강도’라고 기록하지만 아마도 이들도 로마제국의 질서를 파괴하는 혁명가들일 가능성이 높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에 두둔하는 로마 총독들은 수많은 ‘불순분자’를 십자가 처형했다고 기록한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당한 골고다 언덕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우리는 그 상황을 로히르 반 데 웨이덴(1400∼1464)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림>(1435년)이라는 그림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예수의 시신과 애도하는 자의 눈물
예술사학자들은 웨이덴의 이 그림이 이제 막 시작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된 그림의 전형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구성과 인물의 감정표현이 압도적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애도하는 자들의 눈물이 보인다.
인간의 심오한 슬픔을 표현한 요하네스 버미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진주 귀걸이와 모습이 유사하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웨이덴의 색상의 선택과 감정표현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그는 각각의 인물을 여러 가지 색으로 구분하여 살아 있는 조각 부조물 같은 효과를 내고 싶었다.
웨이덴은 이 그림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의 죽음을 분명히 이해하고 예수의 고난(passio)에 자신들의 몸으로 동참한 연민(compassio)의 인물들을 묘사하였다. 예수의 시신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아리마대 요셉의 눈은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그의 시선 상에 위치한 그림의 왼쪽 구석에 위치한 아담의 해골을 응시한다. 웨이덴에게 예수와 마리아는 새로운 세계의 아담과 이브이다.
인류 구원의 본질인 예수의 대속(代贖)적인 삶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의 시신과 그 모습이 유사하다. 마리아의 이런 모습은 서양미술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은 토마스 아 켐피스가 1418년에 출간한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에서 표현한 신비한 감정에 대한 깊은 묵상의 표현이다.
아 켐피스는 예수의 고통을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과 동일시하도록 유도한다. 이 당시 신학자 드니스 카라투시아는 성모 마리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면서 예수가 죽는 순간 마리아도 살해됐다고 주장한다. 반 데 웨이덴은 바로 이런 당시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예수의 시신이 십자가에 내려오는 동안 일어난 여러 사건을 세 장면으로 표현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왼쪽에서 시작하여 다음과 같다.
마리아의 사촌 마리아 글로바, 사랑하는 제자 요한, 마리아의 또 다른 사촌인 마리아 살로메, 그리고 고통을 느끼며 옆으로 쓰러지는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시신, 빨간 색 옷을 입은 니고데모,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예수의 시신을 내린 아리마대 요셉의 종, 금빛 옷을 입은 부자 유대인 아리마대 요셉, 요셉 뒤에서 항아리를 들고 있는 수염이 난 사람, 그리고 그림의 맨 오른쪽에 두 손 깍지를 끼고 절규하는 막달라 마리아.
예술사학자들 간에는 누가 니고데모이고 누가 아리마대 요셉인지 논란은 있지만, 이 두 명의 존재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질 때 있었던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이다. 이 중요한 시점에 예수 곁에서 마지막을 배웅했던 인물은 바로 제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 두 명의 유대인 지도자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림> 그림에 등장하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두 명의 유대인이 있다. 예수를 메시아로 공개적으로 말하고 목숨까지 내놓을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던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 처형당하자, 곧바로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당시 유대사회의 이름난 지도자였던 두 명이 등장하여 예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준비한다.
웨이덴은 이 그림의 뒤 쪽에 네 명의 남성을 표현한다. 한 사람은 십자가에서 예수를 내리며 슬픈 표정을 짓는 이다. 오른손에 예수의 손에 박혔던 못을 들고 있고 왼손으로는 예수의 왼쪽 팔을 살포시 내리고 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의 몸을 하얀 천으로 감싸 예수의 겨드랑이를 지탱하며 내리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이다.
그는 독실한 유대인이며 바리새인으로 머리에는 유대인을 상징하는 짙은 고동색 키파를 쓰고 있다. 어깨에 망토를 걸치고 주황색 옷에다 빨간색 스타킹과 검은색 신발을 신었다. 그는 얼이 빠진 듯 대각선 아래로 예수를 쳐다보며 상념에 젖어 있다. 니고데모 옆으로는 화려한 금색 옷을 입은 부자가 있다.
그도 오른손으로 예수의 허벅지를, 왼손으로는 아직도 못에 박혀 하나로 이어져 있는 예수의 정강이를 들고 있다. 그의 시선은 그림의 왼쪽 아래, 땅에 닿은 마리아의 오른손 옆에 있는 해골을 응시하고 있다. 아리마대 요셉 뒤에는 향유를 들고 있는 그의 종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왜 이 자리까지 왔는가?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예수가 실제로 묻힌 정황을 알 수 있는 동시대 무덤의 모습. 입구에 거대한 연자방앗돌모양의 둥근 막음돌이 있다. 홈이 있어 밀면 굴러가게 되어 있다.
자신의 무덤을 예수에게 기증한 아리마대 요셉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의 일부가 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비잔틴 시대의 황금십자가 성물함.
아리마대 요셉은 복음서 4권에서 모두 등장하여 자신이 마련한 무덤을 예수를 위한 무덤으로 기증한다. 로마제국에서 십자가형이 가장 극악무도한 이유는 처형당하는 자가 공개적으로 극도의 수치심을 당하면서 서서히 처참하게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할지라도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매달려 있는 시신 그 자체가 공개적인 수치기 때문이다.
십자가상 시신은 맹금류의 먹이가 되거나 시신의 일부가 십자가에서 떨어진다면 대부분 들개의 차지가 된다. 적당한 매장을 하지 못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인간으로 겪지 말아야 할 가장 비극적인 운명이었다.
로마인들은 로마제국의 질서를 혼란에 빠뜨린 정치범들을 모두 십자가형으로 처형하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경우처럼 십자가형에 처한 인물에게 매장을 허락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구형했을 때, 그는 아마도 예수를 십자가 위에 며칠 동안 그대로 놓아둘 심산이었다. 유월절에 수많은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와 소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확실한 경고였다. 빌라도가 그런 관행을 깨고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일반적인 매장을 허락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직접 십자가형에 처하길 원하지 않은 산헤드린의 요구를 암묵적으로 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반란이 많은 유대인들에게 가시적이며 충격적인 경고를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마가복음> 15장 43절에서 그는 “존경받는 관원(불류테스, bouleutes)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산헤드린 의원이다”고 기록된다. <마태복음> 27장 57절에서는 요셉이 부자였으며 예수의 제자로 기록됐고 <요한복음> 19장 38절에서는 예수의 숨겨진 제자로 “빌라도에게 공개적으로 다가가 예수의 시신을 요구하였다”라고 묘사된다. 예수가 처형당한 후 장례를 위해 나선 자는 바로 유대인 중 유대인이며 유대인 지도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이었다.
빌라도는 예수가 사망한 것을 확인하고 요셉의 요청을 들어준다. <마가복음> 15장 46절은 요셉이 이 허락을 받고 바로 최고급 면을 구입해 골고다로 가서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았다고 기록한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마태-마가-누가복음)와 달리 한 사람을 더 등장시킨다. 그가 바로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였다. 니고데모는 향품과 향유(myrrh and aloe)를 준비해갔다.
<이사야서> 53장 9절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고난받는 종’으로서 메시아를 기록한다.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성서학자들은 “메시아가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간다”는 구절에서 부자를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해석한다. <마가복음> 저자는 아리마대 요셉을 ‘존경받는 관원’으로 정의한다. ‘존경받는’이란 그리스 단어는 ‘유스케몬(euschemon)’으로 원래는 ‘풍채가 좋은’이란 의미다.
이 단어는 또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뛰어나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존경을 받고 영향력이 있으며 재력가를 의미한다. ‘관원’이란 그리스 단어는 ‘불류테스’이다. 이 단어는 1세기 그리스인들의 최고 권력기관인 산헤드린의 일원을 지칭하는 용어다. 산헤드린은 기원전 1세기부터 등장한 유대 지도자들의 모임을 지칭한다.
서기관, 사제 혹은 정치적·법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로마제국은 이들을 통해 유대를 간접 통치했다. 산헤드린의 일원을 지칭하는 ‘불류테스’는 로마제국의 원로원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아리마대 요셉은 1세기 유대사회에게 가장 존경을 받으며 동시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린 아리마대 요셉
아리마대 요셉은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렸다고 기록한다. ‘기다리다’라는 그리스 단어 ‘프로스데코마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무작정 기다리는 상태가 아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오래전부터 기다리던 메시아가 와서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그의 이런 신념은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할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그런 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할 자세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메시아가 나타나기만 하면 주저 없이 그를 수용할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그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밭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지체 없이 그 밭을 사는 심정과 마찬가지다.
아마도 요셉은 산헤드린의 존경받는 지도자로, 또한 유대인의 경전 토라와 토라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정통한 학자로 자신이 그렇게도 기다렸던 메시아의 모습을 예수를 통해 확인했을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은 당시 최고의 유대학자이며 정신적인 스승이었던 힐렐의 가르침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실천하고 있었다. 힐렐(기원전 110년∼기원후 7년)은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토라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것에 대한 각주이다. 가서 실천하여라!”라는 유대인경전 미쉬나에 등장하는 구절을 삶의 모토로 삼았다. 아마도 1세기 유대인들에게 이 황금률은 삶의 철학이자 경전해석의 원칙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예루살렘 출신이 아닌 나사렛 출신의 예언자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된다. 그는 소극적인 황금률이 아니라 파격적이며 적극적인 황금률을 선포한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우리 삶에서 만나는 가장 불쌍한 자가, 우리의 도움이 절실한 이웃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선포한다. 아리마대 요셉은 바로 이 가르침에 매료되었다. 그의 영적인 배고픔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하는 렌즈가 되었다.
그가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한 사실을 동료 산헤드린 멤버들이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유대인들 가운데 유력한 권력자였고 엄청난 부자였기 때문이다.
2009년 당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주관한 ‘십자가의 길(Way of Cross)’행진. 예수가 죽임을 당한 ‘성 금요일’, 수천 명의 순례자가 촛불을 들고 교황의 뒤를 따랐다.
빌라도와 담판, “예수의 시신을 주시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가 십자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 할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그는 예수의 시신을 양도받아 자신이 매장하려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른다. 먼저 로마제국의 방식대로 처형당한 예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요구하는 행위는 자신의 명예나 지위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하는 일일지 모른다. 이런 행위는 또한 그가 누렸던 유대인사회, 특히 산헤드린에서의 권력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담대하게’ 예수의 시신을 요구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신실한 유대인으로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그날 바로 처리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다음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예배를 보는 것 이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마대 요셉은 단호하게 빌라도를 찾아갔다.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 지내 매장하려 한다. <마가복음> 15장 4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요셉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다.”
시신을 내어달라고 요구한 그리스 단어는 ‘아이테오’이다. 이 단어는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요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그는 빌라도에게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게 그리고 예의를 갖춰 요구한다. 요셉이 무슨 말로 빌라도를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마가복음> 15장 44∼45절에는 “빌라도는 예수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가 죽은 지 오래되었는지를 물어보았다.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알아보고 나서, 시체를 요셉에게 내어주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요한복음>은 이 동일한 장면을 다루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가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요셉은 위에서 설명한 웨이덴의 <예수의 십자가 내림> 그림에서처럼, 골고다 언덕으로 직접 가서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한 예수의 시신을 직접 내렸다. 이런 행위는 사실 인간의 상식을 뛰어 넘는 이야기다.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내리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아리마대 요셉은 분명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한 것 같다.
그는 미리 준비한 고운 천인 세마포를 가져갔다. 이 천은 그리스 단어로 ‘오쏘니온’이라 부른다.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오쏘니온은 고대 지중해 전역에 수출되었다. 특히 사제나 귀족의 장례와 같은 특별한 의식에서 시신을 감쌀 때 사용한다. 이집트인들은 파라오나 귀족의 미라를 감쌀 때 사용했다.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한 오쏘니온은 하나로 길게 연결된 최고급 모시였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한 또 다른 산헤드린 멤버와 동행했다. 그의 이름은 니고데모이다.
그는 이전에 예수를 조용히 밤에 찾아왔던 인물이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등장한다.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산헤드린 멤버였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다. 바리새인은 기원전 2세기부터 등장한 유대학자를 이르는 용어로 그 이름의 의미는 히브리어로 ‘구분된 자’였다. 이들은 스스로 엄격하게 유대 율법을 지키고 경전 연구에 전념한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있는 유대인 회당들에서 금요일 저녁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과 오후, 그리고 저녁 기도시간에 자유롭게 기도하고 월요일, 목요일 그리고 안식일인 금요일 저녁엔 토라경전을 강독한다. 제사장들이 성전의 의례를 주관하지만 바리새인들이 토라 연구를 인도한다.
바로 이 바리새인들은 히브리어로 ‘나의 선생님’이란 의미를 지닌 ‘랍비’로 불린다.
이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이미 경전에 대한 해석들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왔다고 믿는다. 바로 바리새인들은 이 구전전통의 경전해석의 권위자다.
“나는 당신이 메시아임을 안다”
예수가 활동할 때,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이 당시 사두개인들이라는 유대교 분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믿지 않고 메시아의 도래도 기대하지 않는 보수적인 종교인이다. 바리새인은 이들과 달리 기적을 신봉하며 메시아를 열렬히 기다리는 학자들이었다.
바리새인은 경전의 축자적인 의미보다는 그 경전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게 그 은유적인 의미에 집중한다.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와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이었다.
니고데모는 바로 바리새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였다고 기록된다. 여기서 ‘지도자’라는 의미는 한 지역에서 유대인 회당을 책임지는 종교지도자일 수도 있고 산헤드린의 일원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니고데모도 아리마대 요셉처럼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으며 부자였을 것이다.
그가 예루살렘 거리를 지날 때마다 모든 유대인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길거리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아리마대 요셉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와 메시아를 학수고대하는 사람이었다. 예수를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산헤드린 멤버들이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말한 예수를 ‘술주정뱅이’ 혹은 ‘미친 사람’으로 폄하하기에,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대낮에 예수를 방문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밤에 예수를 찾아온다. 그리고 말한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느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를 서슴지 않고 ‘랍비님!’라고 부른다. 랍비라는 용어는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간직해온 경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모두 암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1세기 유대인 상황에 감동적으로 적용하여 가르칠 수 있는 자에게 사용한다.
아마도 니고데모는 예수가 설교하는 내용을 들은 적이 있고 그의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해석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는 특히 예전에 예수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한 기적들을 보았다. 그는 “하느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예수는 니고데모가 자신에게 왜 이 말을 하는지 그 의도를 감지한다. 니고데모는 하늘나라와 메시아에 대해 알고 싶어서 왔다. 예수라면 하늘나라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메시아인지 직접 만나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자 예수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는 ‘다시 태어나는 자’에게 보인다”고 말한다. 니고데모는 생전 처음 ‘다시 태어난다’는 표현을 들었다. 그는 이 표현을 축자적으로 해석하여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한다.
예수는 이 질문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한다. 예수는 맨 처음의 한 문장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다시 태어난다’를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풀어 대답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본다’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표현한다. 즉 ‘다시 태어난다’는 인간이 어머니의 뱃속이라는 ‘물’에서 태어나는 자연적인 탄생이 있으며 두 번째는 ‘성령’으로 태어나는 영적인 탄생과 깨달음이 있다.
일본 홋카이도에 자리 잡은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물의 교회’(1989). 마치 십자가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령은 인간에게 숨겨진 신의 DNA
‘성령’이란 단어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신이 직접 인간에게 부여한 생기(生氣)이다. 이 생기는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숨겨진 ‘신의 형상’이라는 DNA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살아가면서 두 번 태어나야한다.
한번은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나오는 ‘물’로부터의 탄생이고, 다른 한번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신의 형상, 신과 같이 될 수 있는 신의 속성을 회복함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와 더불어 영적인 존재가 된다.
예수는 이 성령을 바람과 비교한다. 성령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처럼 자유롭다. 예수의 이 문장은 일종의 언어유희다. 히브리어로 ‘루아흐’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영’을 의미하기도 하고 ‘바람’을 의미하기도 하다. 영적인 인간은 무엇에 억눌리거나 제한 받지 않는다.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사람이다.
니고데모는 영적인 인간이란 유대교 전통의 경전 해석을 숙지하고 그것을 잘 지키며 실생활에서 효과적으로 지혜롭게 적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이런 파격적인 말을 듣고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예수가 다시 묻는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 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그 후에 예수는 니고데모가 알 수 없는 신기한 말을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예수는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부른다. ‘인자’라는 단어는 1세기에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했다.
첫 번째 의미는 구약성서 <다니엘서> 7장 13∼14절에 등장하는 메시아를 의미한다. 두 번째 의미는 ‘사람’이란 의미다. ‘인자’는 예수의 자기명칭으로 자신이 남들과 다르지 않은 인간을 뜻한다.
예수는 ‘인자’라는 단어가 품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사용하여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즉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아는 바로 인간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인자가 세상에서 할 일은 모세의 놋(구리)으로 만든 뱀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모세는 다시 정착촌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시는 그곳을 떠나지 말라는 경고로 놋으로 만든 뱀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세워놓았다. 이 놋 뱀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이자, 다시는 사막으로 나가 죽지 말라는 삶의 좌표다. 예수는 스스로를 모세가 든 놋으로 만든 뱀처럼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사막 위에 들려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안내자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아이콘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니고데모는 예수를 만나 자신이 놋 뱀처럼 들려져야 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가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골고다 언덕으로 간다. <요한복음> 19장 39절은 니고데모의 등장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알로에를 섞은 것을 100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부활절을 맞아 모스크바 시내에 설치된 커다란 부활절 계란 옆을 지나가고 있는 러시아 소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이유
로마 무게 단위로 1리트라가 218g이니까, 100리트라를 환산하면 21.8㎏이다. 이 무게는 니고데모가 혼자 가지고 갈 수 있는 양이 아니다. 부자인 니고데모가 자신의 종들을 시켜 몰약과 알로에를 가져왔다. 이렇게 많은 양을 짧은 시간에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니고데모가 자신의 장례를 위해 미리 준비해놓았기 때문이다. 몰약은 값비싼 노란색을 띠는 송진으로 예로부터 시신 방부처리를 하는데 사용하였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페르시아에서 온 동방사제들이 가져왔을 정도로 귀중한 물건이다.
예로부터 동방의 무역상들의 주요 수출품목에서 빠지지 않은 최고급 사치품이다. 알로에는 달콤한 향기가 나는 일종의 향수로 중동지방에서 나뭇잎에서 축출되는 즙에서 축출된다. 시신이 부패할 때 나는 고약한 냄새를 없애는 역할을 한다.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했던 충실한 유대인 지도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신속히 예수의 시신을 요셉이 자신을 위해 마련해 놓은 무덤에 안치한다. 그들은 안식일이 다가오기 때문에 이 일을 지체 없이 처리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은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이 아니라 땅에 매장되었다. 특히 예수와 같이 십자가형으로 죽임을 당한 시신들은 예루살렘 서쪽 ‘게힌나’라는 곳에 유기하기 마련이었다.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요구하고 요셉 자신을 위해 정성스럽게 만들어놓은 무덤에 장사 지내는 일은 그의 명성과 권력,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담보하는 행위였다.
대부분의 무덤은 와인의 코르크처럼 직사각형 돌로 완벽하게 봉인되어 있다. 그러나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예수의 무덤 입구의 돌을 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형식의 무덤은 매우 드문 형태로 최고 권력자만이 누릴 수 있는 무덤이다. 이 당시 무덤이 1천 개 정도 발견되었는데, 그중 10개 정도만 굴릴 수 있는 돌로 입구를 봉인하는 무덤이다.
이 무덤 입구 돌의 크기는 4.5피트, 137㎝ 정도 크기다. 무덤은 주로 가족묘이기 때문에 여러 개의 방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가족묘에 극형을 당한 범죄자를 매장하는 행위는 다른 유대인으로부터 대대로 모욕이 될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은 니고데모가 먼저 이집트에서 가져온 긴 세마포로 예수의 몸을 감싼 후,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과 알로에를 섞어 만든 향품으로 예수의 시신을 정성스럽게 바른 후 중앙 벤치에 바로 뉘었다. 1년이 지나 시신이 모두 분해되면 뼈를 추려 무덤 안 옆쪽에 유골단지에 보관한다.
왜 복음서는,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가 죽은 후, 예수의 무덤과 장례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설명하는 것인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네모는 왜 갑자기 등장하여 예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는가?
이 두 인물은 예수의 숨은 제자다. 자신들의 처지 때문에 공개적으로 제자가 되지 못했지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 예수야말로 참다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메시아는 모세가 들은 광야의 놋 뱀과 같이 육신으로 태어난 인간들에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촉구하는 경고자다. 33세의 청년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느님 나라를 보고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오늘날 여기에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한 이유는 영적인 깨달음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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