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6

rainbow3 2019. 10. 7. 22:56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 예수의 위대한 질문⑥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마가복음 4:30)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독립적,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신의 속성

…인간이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 때, 바로 그 대상이 신이다 

 

예루살렘 성전 자리의 서쪽 장벽인 일명 ‘통곡의 벽’. 예수는 인류 최고의 가치를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라고 깨닫고 생의 마지막을 보낸 예루살렘에서 “성전은 기도하는 곳인데, 너희가 그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일갈했다. 

 

신이 거처한다는 천국, 사실은 우리의 일상에 숨어 있다.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일상을 거룩하게, 큰 손님 모시는 것처럼, 더 나아가 신처럼 대하는 것이다. 언젠가 그 범속한 일상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이유를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사후세계 혹은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는다. 그 누구도 사후세계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천국은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증명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는 왜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자신들의 핵심교리로 삼을 만큼 집착하는 것일까?

천국이 그리스도교의 존립에 꼭 필요한 개념이라면, 이성이 중심이 된 과학기술시대에 천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천국의 존재를 과학적,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천국은 그 존재를 알아보고 싶다고 해도 해외 여행을 하듯이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갔다가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천국에 다녀왔다는 유명한 인사가 한 명 있다.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였던 신경정신과 의사 에벤 알렉산더 박사다.

그는 자신 있게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주장한다. 이 놀라운 경험을 과학적인 용어를 빌어 책을 출판했다. 〈나는 천국을 보았다〉란 책이다.

 

알렉산더 박사는 2008년 뇌수막염에 걸려 수일 동안 혼수상태였다. 대뇌의 신피질이 작동하지 않아 신체의 모든 기능이 마비됐다. 그는 오히려 정신이 말짱했으며 천국을 다녀왔다고 주장한다.

푹신푹신한 구름 위로 날아가 ‘투명하고 빛나는 존재들’을 만나고 한 천상의 여성이 인도하여 시간이 없는 세계로 여행했다고 기록한다. 그는 천국에 대해 “그곳은 광활하게 공허하고 칠흑과 같으며 광대하지만 무한하게 편안한 공간”이라고 묘사한다.

 

저 세상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어렵겠으나, 알렉산더의 서술은 이전에 출판되었던 다른 임사체험의 책들과 유사하다. 1981년 국제임사체험협회는 미국 내에서만 1500만 명이 다음 세계를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심리학자 레이몬드 무디의 〈다음 생애〉라는 책은 수천 명이 아픔이 없고 신비롭고 특별한 빛으로 가득한 세계를, 아름답지만 만질 수 없는 안내자의 인도로 경험했다고 전한다.

 

알렉산더의 천국묘사는 위대한 작가들의 천국여행기와 흡사하다. 4세기 신학자 성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 단테의 〈신곡〉 그리고 밀튼의 〈실락원〉에 등장하는 천국에 대한 묘사도 비슷하다.

우리는 이들의 유사성으로부터 다음 세 가지를 가정할 수 있다.

 

첫째,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고백했기 때문에 천국이 있다는 증거라는 가정이다.

그 여행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많은 사람이 임사체험을 통해 사후세계를 목격했다는 사실을 기초로 천국의 존재를 인정할 수도 있다.

둘째, 이들은 모두 정신 나간 사람들로 자신의 특수하면서도 충격적인 경험을 떠올리며 기록했다는 가정이다. 필자도 종종 자신이 하늘에 가서 황홀경 중에 신을 만나 받아 적은 ‘글들’을 받아보곤 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필체로 갈겨 쓴 이 글들은 적어도 내게는 ‘낙서’ 같았다. 

 

지옥에서 저주받은 영혼들을 그린 윌리엄 부게로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단테는 〈신곡〉에서 자신이 천국으로 인도된 사실을 그렸지만 정작 천국의 구체적 모습은 형용할 수 없었다. 

 

“형상화할 수 있는 신이나 천국은 없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종착점으로 그 너머 세계에 대한 궁금증은 인간의 문명, 철학, 종교를 넘어서는 궁극의 관심사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천국, 파라다이스, 니르바나, 잔나 등을 인간의 언어와 상상을 넘어선 어떤 것으로 가르쳐왔다.

 

알렉산더 박사의 천국묘사는 단테의 〈신곡〉 중 천국 ‘파라디소’와 흡사하다. 단테는 천국에서 아름답고 파란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인도를 받는다. 그는 어릴 때 친구이며 완벽한 여성상인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의 인도로 천상을 구경한다.

 

그러나 단테는 알렉산더 박사와는 달리 천국에 홀로 남겨졌을 때, 그것을 형용할 수 없었다.

단테의 〈신곡〉에 삽화를 그려 넣었던 보티첼리는 그 마지막 장을 빈 공간으로 남겼다.

그 빈 공간이 사실 천국의 증거라고 주장한 알렉산더의 책보다 더 강력하다. 하여튼 알렉산더의 책은 그의 학력이나 명성 때문에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지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었다. 

 

미국 성공회 주교 존 로빈슨. 그는 1963년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형상화하는 천국에 대한 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천국’이라는 물질적 공간의 행방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신은 어디에 계신가?” 혹은 “신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라는 탐구와 직결된다.

 

이 근본적인 문제를 현대인에게 물어 한바탕 기존 신학계와 종교계를 당황하게 만든 인물이 바로 영국 성공회 주교였던 존 로빈슨이다.

 

그는 1963년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을 출판하여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만큼 영국사회와 서구 그리스도교에 신학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이 책은 단번에 17개 언어로 번역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다.

 

로빈슨은 그 전에도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판금하는 재판에서 섹스는 일종의 ‘성례적 행위’ 라고 말해 물의를 일으켰다. 그는 그리스도교인들이 형상화하는 천국이나 신에 대한 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 지상에 살고 있고 신은 ‘저기’ 구름 위에서 우리를 지켜본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르네상스시대에 이미 지구 중심으로 천체가 돈다는 ‘천동설’에서 지구는 천체의 일부로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태양계 역시 은하수를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그리며 한없기 운동하기에 거기에는 ‘위-아래’가 없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이 단순한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느닷없이 인류를 심판하러 위에서 내려오실 재림 예수를 기다린다. 로빈슨은 신이나 천국이 ‘저 구름 위’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발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고, 천국에서 영생을 보장하며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영원한 불길 가운데 심판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로빈슨에게 예수는 현실의 삶에서 우리에게 헌신적이며 인생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준 인물이다. 천국이 저 위에 없다면 어디에 존재하나?

 

아브라함종교에서 천국이란 개념은 중동의 사막 환경에서 등장한 독특한 개념이다. 현재 이라크의 남부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일구었던 수메르인들에겐 ‘에딘(edin)’이라는 특별한 정원이 있었다.

‘에딘’은 계곡 사이에 위치한 초목지대를 이르는 용어다. 척박한 환경에서 지내던 수메르인들에게 ‘에딘’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수메르어 ‘에딘’은 기원전 2000년경 이곳에 들어와 수메르를 정복한 바빌로니아인들로부터 차용됐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사용하던 아카드어로는 ‘에딘나(edinna)’이다. 이 중요한 문화차용어는 나중에 구약성서로 흘러 들어갔다. 기원전 586년경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찬란한 문명을 보았다. 특히 그들은 느부가드네살 2세가 자신의 아내 아미티스를 위해 만든 공중정원, 하늘을 찌를 듯 솟은 92m 높이의 신전인 지구라트(후에 성서의 바벨탑 이야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물),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든 정원인 ‘에딘나’에 감탄했다.

 

 

기원전 164년에 이미 헬리혜성의 출현을 기록한 바빌론 서자판. BC 586년경 바빌론에 유폐된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인의 찬란한 문명에 경탄했다. 

 

에덴동산이 곧 하나님의 나라

 

구약성서 창세기에도 이 정원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자유롭게 소통하는 공간을 ‘에덴’이라고 불렀다. 에덴동산은 창세기의 첫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거주한 장소로 등장한다. 창세기 2장에 소개된 소위 ‘야위스트’ 저자(하느님의 이름을 야웨라고 부르는 기원전 10세기경 예루살렘의 성서 기자)의 창조기사에서 에덴의 위치는 비손강, 기혼강, 티그리스강, 그리고 유프라테스강 사이라고 기록돼 있다.

수메르어 ‘에딘’이란 단어가 바빌론을 매개로 팔레스타인으로 흘러 들어가 ‘에덴’이 되었다. 일부 학자는 ‘에덴’이란 히브리 단어는 원래 셈족어로 ‘기쁨과 풍요가 넘치는 장소’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창세기의 저자도 ‘에덴동산’에서 ‘에덴’을 지명으로 사용했다. 이 문구에서 ‘동산’이란 단어는 매우 오래된 셈족어 어근 ‘jann-’에서 유래했다. ‘jann-’이란 셈어는 히브리어로는 ‘간(gan)’으로, 아랍어로는 ‘잔나툰(jann-natun)’으로 표현된다. 아랍어 ‘잔나툰’은 지상의 정원인 ‘하디카툰’과는 다른 ‘천상의 정원; 하늘나라’를 의미한다. 창세기에서 ‘동산’이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간’은 기원전 3세기 그리스어 ‘파라데이소스’로 번역된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지리학자인 크세노폰이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용병으로 참전하였다. 크세노폰은 페르시아 제국의 창시자 고레스가 파사르가데에 만든 정원을 보았다. 고레스는 이 정원을 ‘사방이 나무로 둘러쌓인 장소’라는 의미로 고대 페르시아어 ‘파이리다에자’라고 불렀다.

크세노폰은 이 용어를 차용하여 ‘파라데이소스’ 즉 ‘파라다이스’가 되었다. 고레스는 자기가 정복한 나라에서 구한 진귀한 동물과 식물들을 한 곳에 모아놓았다.

 

구약성서에서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이상적인 공간을 ‘에덴동산’이라 불렀다면 신약성서에서는 이런 공간을 ‘하늘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라고 불렀다.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말씀 선포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고 전한다.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공관복음서에서 100번 정도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신학용어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그 어느 곳에서도 이 왕국이 어떤 왕국인지 확실히 정의되지 않았다. 아마도 예수가 ‘하늘나라’를 선포할 때, 청중들은 이 개념이 너무 익숙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또 하나 궁금한 점은 예수가 ‘하느님’을 한번도 ‘왕’으로 지칭하지 않고, 하느님이 계신 곳을 ‘왕국’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서학자들은 예수가 ‘하늘나라’를 미래의 현상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지금 이루어진 현실로 보았는지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천국은 인간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그 무엇

 

하늘나라를 앞으로 이루어질 현상으로 보는 많은 성서 구절이 있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태 6장10절)라는 구절과 예수가 몇몇 제자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목(마가 9장1절) 등이다. ‘미래에 다가올 하늘나라’는 최후의 만찬 사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잘 들어두어라.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마태 26장29절)

 

반면 하늘나라가 현재 이루어진 현실을 지칭하는 구절도 많이 있다. 예수가 광야에서 유혹을 받은 후, 공생애를 시작하며 하신 첫 말씀이 그렇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가 1장15절)

예수 말씀 선포의 핵심 중의 하나는 바로 ‘하늘나라’가 이미 도래했으며 예수의 말씀과 선교행위를 통해 활동을 개시했다는 사실이다.

 ‘하늘나라’의 완전한 승리와 완성은 예수의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예수 말씀은 개개인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행해야 할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가르침이다.

 

우리는 천국(天國)이나 ‘하늘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거주하는 이곳이 아니라 알 수 없고 갈 수 없는, 혹은 임사체험이나 특별한 신비경험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천국’을 영어로 ‘kingdom of heaven’이라고 번역하는데 이 영어구절도 의미가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kingdom’이란 단어를 흔히 ‘왕국’이라 번역하지만 영어에서 ‘-dom’ 어미는 앞에 붙는 명사나 형용사를 추상명사로 만든다. 그러므로 ‘kingdom’이란 영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왕이 다스리는 상태’ 혹은 ‘왕권’이란 의미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종종 천국을 언급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이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등장한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의 한 형태인 ‘코이네 그리스어(Koine Greek)’로 기록되었다. 코이네 그리스어는 흔히 ‘민중 그리스어’라고 부른다. 기원전 3세기 알렉산더가 등장하면서 점차로 사용한 그리스어인데 이전 그리스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고전 그리스어(Classical Greek)과는 구별된 방언이다.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 있는 2천여 년 수명의 올리브나무. 이 나무는 예수의 기도와 설교, 그리고 로마군에 붙잡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 성서와 신약성서가 이 방언으로 기록되었다. ‘천국’은 그리스어로 ‘바실레이아 톤 후라논(Βασιλεία τ ν ‘Ουρανν, basileia tōn houranōn)’이다. 이 구절에서 ‘바실레이아’는 ‘왕이 다스리는 영토’ 즉 ‘왕국’이란 의미보다는 ‘왕권; 통치’라는 의미이다. ‘바실레에아 톤 후라논’는 장소가 아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상태; 이상적인 원칙이 통하는 상태’이다.

 

기원후 5세기 제롬은 그리스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 ‘바실레에아 톤 후라논’을 ‘레그눔 카일로룸(regnum caelorum)’으로 번역한다. 라틴어 ‘레그눔’역시 장소를 뜻하지 않는다. 그 의미는 ‘통치’다.

예수가 신약성서에서 ‘천국’을 말할 때 사후세계로 언급한 구절도 있다. 그러나 그런 구절들은 후대 예수의 어록을 기록한 제자들의 해석이 아닐까.

 

예수는 ‘천국’이란 구절을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예수는 분명 구약성서에 고전 히브리어로 언급된 ‘천국’이란 단어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단어를 고전 히브리어로 재구성해보면 ‘말꾸쓰 샤마임(malkuth shamayyim)’이다. 이 구절에서 ‘말꾸쓰’라는 단어 역시 추상명사로 ‘왕권; 통치’라는 의미다.

‘천국’이란 죽음을 인식하고 사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이 사후세계를 지칭하는 단어로 인간의 시-공간 개념을 넘어선 어떤 것이 아닐까? 예수는 그런 천국을 무엇이라고 정의했는가?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천국과 같은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가 ‘비유’이다. ‘비유’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마샬(mashal)’의 축자적인 의미는 ‘비교’이다. 그러나 문장의 장치로서 ‘마샬’은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사건을 이용하여 이상적이며 영적인 혹은 천상의 의미를 유추하려는 과정이기도 한다.

 

구약성서에서 비유는 딱 5번만 등장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탈무드와 미드라쉬에서는 갑자기 많은 수의 비유가 등장한다. 유대랍비들은 비유를 교육의 중요한 수단으로 믿었고 유대율법의 진위를 가리고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탈무드와 미드라쉬에서는 모든 종교적 개념, 도덕적 가르침, 그리고 윤리적 강령을 항상 비유를 통해서 설명한다.

 

신약성서에도 비유가 많이 등장한다. 비유는 탈무드의 비유처럼 호기심을 자극하여 듣는 자에게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귀’를 요구한다. 신약성서에는 예수가 비유로 말한 후에 “귀 있는 자는 들어라”라는 구절이 종종 등장한다. 피안의 세계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언어와 문자인데, 이 안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육신의 귀가 아니라 영적인 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영적인 귀는 훈련을 통해서만 서서히 생긴다. 마치 외국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에겐 그 언어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오랫동안 공부하면, 그 언어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예수의 이런 비유를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를 열심히 쫓아다니던 측근들과 열두 제자가 예수에게 와서 묻는다.

“선생님, 우리가 도저히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는 말한다.

“하나님은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그들이 이 비유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예수는 제자와 외부인들의 차이점을 시력과 청력에서 찾는다. 외부인들은 같은 것을 보아도 알지 못하고 같은 것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여 이탈리아어를 배웠다고 가정하자. 그가 단테가 지은 〈신곡〉을 원전으로 읽는 느낌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일반인하고 전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천국은 밭에 감춰진 보화

 

비유는 심금을 울리는 천국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문법을 넘어서 신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신의 언어를 판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외국어를 배우는 것처럼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신의 언어를 판독할 수 있는 눈과 귀가 필요하다. 천국을 일상에서 경험한 사람들은 ‘제3의 눈’과 ‘제3의 귀’를 가진 자들이다.

 

제3의 눈을 통해 밭에 숨겨진 보화를 찾을 수 있고, 천체와 자연의 신비함과 경이로움을 느끼고, 사람들의 안에 내재한 신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은 우주의 비밀을 지속적으로 인간에게 알려주는데, 인간은 그것을 판독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없다. 영적인 눈과 귀는 자신의 마음을 깊이 보는 묵상의 연습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마태복음〉 13장엔 천국에 대한 비유들이 등장한다. 예수는 말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춘 보화와 같다.”

예수는 천국을 사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밭’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천국’을 특별한 장소, 찬란한 빛이 가득한 천사들이 찬송을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한없이 아름다운 장소에서 찾으려 한다. 인간은 천국을 장소라고 착각하여 우리가 사는 이 땅에 거대한 성당이나 교회를 짓는 오류를 범한다. 

 

첫째, 예수가 생각하는 천국은 ‘밭’이다. ‘밭’은 도시에서 떨어진 외진 땅이다. 밭은 농부에게 시절을 좇아 밭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어 가을이 되면 추수를 하는 그런 삶의 터전이다. 겨울이 되어 눈이 소복이 쌓이면 죽은 듯하다 봄이 되면 다시 싹을 틔우는 신비이다. 농부는 밭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함을 배운다.

예수는 천국을 당시 가장 위대한 도시인 예루살렘이나 로마라고 말하지 않았다. 혹은 훌륭하게 건축한 종교건물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건물들에는 신을 인간의 공간에 가두려는 인간의 욕망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류 최고의 가치를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라고 깨닫고 생의 마지막을 예루살렘에서 보낸다.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나? 바로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 성전을 뒤엎은 것이었다. 그리고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너희는 그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구나”라고 외친다.

예루살렘 성전은 자신을 돌아보고 신의 뜻을 알기 위해 깊이 묵상하는 장소이나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 곳, 인간의 욕망을 신에게 요구하고 욕망의 도구이자 방패로 삼는 곳, 즉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

 

인간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이 상정하고 이해한 신을 만들어 숭배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예배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신을 이단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자신의 속 좁은 배타적인 신 이해만이 참신이라고 착각한다. 이런 종교인들에게 예수는 경종을 울린다.

 

천국은 ‘밭’으로 상징되는 일상(日常)이다. 밭은 농부에게 힘들고 냄새 나고 땀 흘려야 할 대상이지만 자신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터전이다. 예수는 일상이야말로 천국이라고 주장한다.

그 일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학생에겐 학교와 공부, 직장인에겐 일터, 군인에겐 군대, 심지어는 수감자에게 수용소가 바로 천국이다. 이런 장소일 뿐만 아니라 내가 보내는 이 일상의 시간, 하루하루가 또한 천국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지만 나와 일상생활을 하는 내 식구들, 남편, 아내, 자식들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 

 

둘째, 천국은 “감추어져 있다.” 주변의 모든 ‘밭’이 천국은 아니다. 천국은 거대한 산 안에 숨겨진 광맥과 같다. 우리는 보통 천국은 진귀한 명품과 같아서 모든 사람이 소유하고 싶은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런 명품에 대한 광고에 현혹되어 자신이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명품의 특징은 신비하고 미묘하고 좀처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천국은 보통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천국을 밭이라는 ‘일상’에 숨어 있다고 깨달아야 한다. 신은 하늘에서 천둥번개를 치며 강력한 빛으로 등장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구약시대 에스겔이 경험한 것처럼 ‘미세한 침묵의 소리’ 안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천국의 둘째 특징은 ‘은닉성(隱匿性)’이다. 천국은 모든 사람에게 명약관화하게 드러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것은 십중팔구 속임수이거나 가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천국이 숨겨져 있다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일상에 숨어 있다.

일상에 숨겨있는 천국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밭에 깊이 묻혀 있는 천국을 캐내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일상을 일상으로 대하지 말고 거룩하게, 큰 손님 모시는 것처럼, 더 나아가 신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 일상이 천국으로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브라질 리오데 자네이로 코르코바도 언덕에 세워진 예수상에 LED 조명이 비춰진 모습. 예수는 일상에 감춰진 천국을 찾기 위해서는 과감한 모험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일상 속 천국, 어떻게 발견할까?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이 더운 여름에 사막을 지나는 세 명의 처음 보는 여행자를 정성스럽게 모시니 그 나그네들이 신이 되었다. 신은 원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자비가 그 대상에게 전해질 때, 바로 그 대상이 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후, 3년 동안 따라다니던 두 제자가 실의에 빠져 엠마오라는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을 때, 한 나그네를 만난다.

 

그 나그네는 원치 않았지만, 두 제자가 필요 이상으로 호의를 베풀어 그 나그네에게 저녁을 대접하니, 그 나그네가 바로 예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일 이 두 제자가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면, 그는 나그네로 남는 것이다. 이 나그네는 자신이 예수로 변한 후에, 바로 사라져버린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사랑한다면, 바로 그 이웃이 신이라는 가르침이다. 

 

셋째, 천국은 ‘보화’다. 성서는 “사람이 보화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기록한다. 그 드넓은 밭에서 보화를 발견하는 장소는 한 곳이다. 보화의 특징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가? 우리가 ‘보화’를 찾기 위해서는 다른 돌과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보화는 매력적이면서 압도적이어서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이 보화를 다시 ‘극히 값진 진주’ 하나와 비교한다. 천국은 이 보화 자체라기보다는 이 보화를 찾는 과정이다.

 

예수는 말한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고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다.”

예수는 진주를 찾아나서는 장사를 천국이라 정의한다. 이 보화를 찾아가는 끝없는 탐구과정이 천국이라는 것이다. 이 탐구하는 과정은 그물을 바다에 치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 중 좋은 것을 선별하는 행위다.

천국은 바로 삶의 우선순위를 아는 지혜이며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이다. 이것을 바로 예수는 ‘보화’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는 또한 천국을 겨자씨며 누룩이라고 말한다. 겨자씨는 유대인들이 정원에 키우지 않을 정도로 주위의 모든 것을 잡초로 만드는 그런 해로운 식물이다. 예수는 하필이면 왜 천국을 겨자씨와 같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겨자씨는 자라나 잡초가 된다. 잡초가 되어 주위의 식물이나 나물을 휘어감아 잡초로 만드는 특징이 있다. 실제로 1세기 유대인 율법에 의하면 정원에 겨자씨를 파종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유대인들은 겨자씨가 자라나 주위 식물이나 야채를 휘감아 정원 전체를 망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정원에 겨자씨를 심는다면 얼마 가지 않아 정원 전체에 겨자나무만 남게 될 것이다. 예수가 그를 추종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라고 말했을 때, 유대인들의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들은 아마 너무 놀라 예수를 얼굴을 힐끔 쳐다보고 “제정신이냐? 겨자씨에 대해 알기나 하나? 미쳤군!”이라며 비웃었을 것이다. 제자들 중 한 명이 말한다.

“예수님! 당신이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와 비유한다면, 당신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처럼, 자기혁명을 축적해야

 

예수는 이 충격적인 예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한다. 예수가 21세기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나라는 악성 컴퓨터 바이러스와 같아”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AIDS와 같아”라고. 당신이 이런 비유를 들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예수는 이 겨자씨 비유에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은 겨자씨처럼 미세하게 시작한다. 오늘날 바로 여기서 천국생활을 하는 혁명은 미미하게 시작한다. 그것은 정원에 있는 잡초처럼 보잘것없지만 곧 퍼져나간다. 그것이 닿는 모든 것을 잡아당겨 잡초로 만든다. 사람들이 그 잡초를 뽑으며 노력할수록 그 잡초는 더 빨리 퍼져나간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기 혁명은 바이러스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병처럼 퍼져나간다. 그것은 감기 바이러스와 같아서, 그 보균자는 만나는 사람에게 바로 바이러스를 옮긴다. 예수는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를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라고 말한다. 예수는 유대인 가정에서 매일 먹는 밀가루 빵을 들어 하늘나라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누룩을 통해 무엇을 의도했는가? 누룩은 겨자씨와 마찬가지로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도 작지만 밀가루 반죽에 더해져 시간이 지나면 전체가 부풀어 오른다.

 

하늘나라를 갈망하는 마음도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인간의 삶에 더해진다면, 삶 전체가 변화될 것이다. 누룩은 또한 스스로 변신한다. 밀가루가 안으로부터 부푼다. 자신의 변화를 우선한다. 성서는 기록한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그 혁명은 일상을 비범하게 보고 듣는 연습에서 시작한다. 남다르게 볼 수 있고 남다르게 들을 수 있는 지혜로 숨겨진 보물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은 그물과 같아 내 삶에 있어서 정말 소중한 것을 찾아 건져내는 행위다. 그 여정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진주를 찾아나서는 비즈니스다.

예수는 천국을 찾는 모험을 감행하라고 촉구한다. 그것은 마치 전염병과 같아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바이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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