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5

rainbow3 2019. 10. 7. 21:07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예수의 위대한 질문⑤

 

-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누가복음 6 : 32)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증오와 무관심으로 바라보는 보통 인간의 심성

…그러나 진정한 영웅의 위대함은 원수를 사랑하는 도덕적 결단에서 비롯된다

 

 

2012년 인도 캘커타에서 열린 간디 서거일 추모 행사에 모인 485명의 ‘간디 복장’ 어린이들. 마하트마 간디는 생전 “당신이 원수라고 생각 하는 사람들과 친구로 지내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유대교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결심과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이다. 그 모든 신학적인 계시와 가르침은 황금률에 대한 각주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주제도 바로 황금률이다. <누가복음>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은 그 황금률을 초월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데까지 나아가라는 것이다. 

 

당신은 종교의 진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도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간디(1869∼1948)는 말한다.

 

“친구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원수라고 여겨지는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 진정한 종교의 진수입니다. 종교에서 다른 것들은 장사에 불과합니다.”

 

간디는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의 정의를 파괴한다. ‘종교’라는 단어는 큰 건물, 교리, 성직자 등을 연상하게 하지만, 간디는 종교의 핵심은 원수와 ‘친구 되기’라고 말한다. 원수를 안 보고 살거나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 있으나, 정말 원수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간디는 왜 ‘불가능 한 일’을 종교의 진수라고 말하는 것일까?

 

사실 원수와 친구가 되라는 명령은 간디뿐만 아니라 공자, 붓다, 힐렐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와 성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예수는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요구한다. 여기에서 ‘원수’는 전쟁터에서 만나는 적군이나 우리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친 극악무도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큰 ‘원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그 미움이 유발시키는 우리 자신의 파괴적인 행동이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면 화가 치밀거나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한 화, 미움, 회한이 우리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 이런 감정을 극복할 수는 없는 걸까?

 

동서고금의 위대한 성인들은 ‘황금률’이라 부르는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를 가르쳐왔다. 오늘날 중국의 기틀을 마련한 철학자 공자(기원전 551∼479년)는 최초로 황금률을 고안해낸 인물이다. 춘추시대 위나라의 유학자 자공이 공자를 찾아와 인생의 화두에 대해 묻는다.

“선생님, 제가 평생 동안 실천해야 할 것을 한마디로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공자는 지체 없이 “그것은 바로 ‘서(恕)’이다”라고 말한다.

 

‘서(恕)’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무책임하게 덮어주는 잘못된 행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서서 생각할 수 있는 지혜다.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 내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서’는 상대방을 나처럼 여기는 마음이다.

 

공자는 인간이 하루 종일, 일생 동안 반드시 행해야 할 원칙을 바로 용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자는 ‘서(恕)’를 다음과 같이 쉽게 풀어 설명한다.

“서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己所不欲 勿施於人).”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이웃의 삶으로 들어가는 ‘무아연습’이다. 

 

 

미국 의회 도서관이 소장한 ‘구텐베르크 성경’. <누가복음> 6장 32절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그것이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는 구절은 성경 말씀 중 가장 위대한 질문으로 꼽힌다. 

 

공자의 다른 제자 중궁이 중국철학의 기틀인 ‘인(仁)’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다시 한번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답으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인(仁)은 문을 나서 만나는 그 누구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큰 손님을 대하듯 모시는 것이며(出門如見大賓), 사람을 대할 때 신에게 큰 제사를 받들 듯이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使民如承大祭)이다.”

그리고 이어 공자는 말한다.

 

“신에게 제사를 받들 듯 사람을 모셔라”

 

“인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라고. 그러면 나라에서도 집안에서도 원망이 없을 것이라고 기록한다. ‘인’은 중국철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서’와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주의를 초월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려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다.

 

기원후 1세기 유대사회는 생존을 위해 새로운 유대교를 탄생시켰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6세기 유대왕국의 바빌론제국에 의해 무참히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자 창조적인 영성을 고안해낸다. 이전까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절기에 따라 거행하는 의례가 중심이었다. 유대인들은 성전(聖殿)을 대신할 대안을 모색하였다. 그 대안은 바로 자신들의 신앙을 기록한 거룩한 경전(經典)을 만들기 시작한다.

 

유대인 경전(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는 기원전 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수집되어 편집 과정을 거쳐 기원전 2세기까지 완성된다. 성전(聖殿)이 성전(聖典)으로 대치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그들의 마음속에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예루살렘 성전의 벽돌 한 장을 쌓는 행위라고 믿었다.

기원전 2세기에 등장한 유대교를 랍비 유대교라고 부른다. 랍비 유대교는 자신들의 경전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한 새로운 경전을 만든다. 이 경전이 기원후 200년경에 완성된 <미쉬나>이다.

 

<미쉬나>에는 랍비 정통성을 추구하는 두 유파(流派)가 있었다. 한 유파는 랍비 심마이의 사상을 따랐고 또 다른 유파는 힐렐의 사상을 따랐다. <미쉬나>에서 심마이와 힐렐은 경전의 핵심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소개한다. 한 이교도가 심마이와 힐렐의 명성을 듣고 멀리서 찾아와 유대경전인 토라에 대해 묻는다.

 

“위대한 랍비 심마이! 당신이 만일 한 발로 서있는 동안(짧은 시간에) 토라 전체의 핵심을 알려준다면, 내가 개종하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랍비 심마이는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일생 동안 공부해온 방대한 토라를 어떻게 한 순간에 요약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의 지팡이로 그 이방인을 내리쳐 내쫓았다.

실의에 찬 이방인은 별 기대 없이 또 다른 위대한 랍비라고 알려진 힐렐에게 갔다.

 

그 이방인은 힐렐에게도 똑같이 질문한다. “당신이 만일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토라 전체의 핵심을 알려준다면, 내가 개종하겠습니다.” 힐렐은 이런 허무맹랑한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힐렐은 깊은 묵상에 빠지더니 마침내 입을 연다.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토라의 전부이며 나머지는 그저 각주일 뿐입니다. 가서 이것을 공부하고 실천하십시오!”

 

오늘날 유대인의 생존은 바로 이 힐렐의 명언에서 출발하였다. 힐렐은 놀랍게도 공자가 500년 전 자공과 중궁에게 말했던 ‘기소불욕불시어인’과 동일한 내용을 말한다. 자신이 당하기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토라의 전부이며 핵심이다. 힐렐은 유대인들의 위대한 경전 해석집들인 <미쉬나>를 언급하지도 않는다.

 

야훼신의 유일성이나 천지창조 이야기, 출애굽 사건과 613가지 계명과 절기, 그리고 위대한 예언자들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는다. 힐렐은 우리가 생각하는 중요한 내용들이 유대교가 아니다. 유대교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결심과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이다. 힐렐에게 이 모든 신학적인 내용은 황금률에 대한 각주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오래된 문헌이자 서사시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주제도 바로 황금률이다. 이 책들의 저자는 기원전 8세기에 살았던 호메로스로 알려져 있다.

호메로스는 기원전 12세기부터 회자되던 그리스와 트로이와의 전쟁에 관한 노래를 즐겨 부르던 시인이다. 호메로스는 이 위대한 서사시를 기록한 자로 알려졌지만 그의 위대한 점은 ‘그리스 알파벳’을 처음으로 창제한 사람이란 점이다. 호메로스는 당시 페니키아에서 온 상인들과 접촉하였는데, 이들로부터 페니키아 알파벳에 매료된다.

 

호메로스는 자음으로만 이루어진 페니키아 알파벳을 변형시켜, 몇몇 자음을 모음으로 변형시켜 그리스 알파벳을 시험적으로 만든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모든 행이 여섯 음절로 이루어진 서사시로 24권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이미 기원전 12세기경 거대한 노래로 고정되어 지난 450년 동안 시인들에 의해 회자되었다. 시장이나 포럼에 모인 사람들에게 호메로스는 트로이전쟁의 영웅들을 노래한다. 아마도 호메로스는 그 당시 최고의 가수였을 것이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나오는 터키의 트로이전쟁 유적지에는 거대한 목마가 세워져 방문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아킬레우스의 천막으로 들어간 프리아모스의 용기

 

<일리아드>는 특히 그리스인과 트로이인의 10년 전쟁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사실 전쟁에 갈 생각이 없었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인간 펠레우스 사이에 태어난 아킬레우스는 반신반인이다.

 

그가 인간으로 평범하게 산다면 인간이 누리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지만, 만일 영웅으로 산다면 불행해질 것이라는 신탁을 받지만,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전쟁에 참가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 파트로클로스도 이 전쟁에 참여한다.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레우스의 아름다운 부인인 헬렌과 눈이 맞아 트로이로 도망가자,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을 소집하여 트로이 원정에 나선다.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 해변에 도착했지만 아가멤논 왕과 논쟁한 아킬레우스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최정예부대를 퇴각시키고 막사로 돌아간다. 그리스연합군은 9년이나 트로이 해변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아킬레우스가 나서지 않는다면 그리스인들의 사기가 떨어져 도저히 트로이 군사들, 특히 트로이의 왕자이자 전쟁영웅인 헥토르를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에 갑옷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리스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자신이 아킬레우스 갑옷을 입고 출정하겠다고 설득한다. 그러나 트로이 왕자 헥토르는 아킬레우스 갑옷을 입은 파트로클루스를 아킬레우스로 착각하고 그를 살해한다.

 

<일리아드> 대 서사시의 마지막 책 24권은 이 시점에서 시작한다. 아킬레우스는 사랑하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에게 갑옷을 빌려줌으로써 그가 살해당했다는 죄의식과 하나밖에 없는 친구의 죽음에 한없는 슬픔을 느끼며 분노에 휩싸인다. 그는 홀로 갑옷을 입고 전차를 타고 트로이 성벽 앞에서 소리 지르며 헥토르에게 결투를 제안한다. 성벽 위에서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가 이들의 결투를 지켜본다.

 

그 어느 인간도 ‘발이 빠른’ 아킬레우스를 이길 수 없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성벽에서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헥토르를 살해한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왕실이 보는 가운데 헥토르의 시신을 파트로쿨루스의 무덤 주위로 끌고 다니며 그의 시체를 훼손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 시신을 돌려주기를 거절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정당한 장례의식은 죽은 자의 영혼을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절차였다.

 

적절한 장례 의식 없이 헥토르의 영혼은 영원히 쉬지 못할 것이다. 그날 밤 헥토르의 아버지이자 트로이의 왕인 프리아모스는 용기를 내어 아킬레우스의 천막에 몸소 가기를 결정한다. 헤르메스 신이 프리아모스에게 용기를 북돋는 말로 위로한다.

“그대는 아킬레우스의 천막으로 들어가 그의 무릎을 잡고 그의 아버지와 머릿결 고운 그의 어머니와 그의 자식의 이름으로 애원해보라. 그러면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호위병인 아우토메돈과 알키모스 몰래 아킬레우스의 천막으로 들어간다.

 

“다가가 두 손으로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잡고 자기 아들을 수없이 죽인, 남자를 죽이는 그 무시무시한 두 손에 입 맞추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무서운 미망에 사로잡혀 고향에서 사람을 죽이고 이방의 어떤 부잣집으로 피신하게 되면 그를 본 사람은 누구나 깜짝 놀라듯이, 꼭 그처럼 아킬레우스는 신과 같은 프리아모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킬레스는 트로이 왕이 자기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자신에게 온 프리아모스의 부정(父情)에 감탄한다.

 

프리아모스는 애원한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여,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시오! 나와 동년배이며 슬픈 노령의 문턱에 서 있는 그대의 아버지를. 혹시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그분을 괴롭히더라도 그분을 파멸과 재앙에서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그래도 그분은 그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날이면 날마다 사랑하는 아들이 트로이에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오.

하나 나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오. 드넓은 트로이에서 나는 가장 훌륭한 아들을 낳았건만 그중 한 명도 안 남았으니 말이오….

 

그리고 혼자남아서 도성과 백성을 지키던 헥토르도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얼마 전에 그대의 손에 죽었소. 그래서 나는 그 애 때문에, 그대에게서 그 애를 돌려받고자 헤아릴 수 없는 몸값을 가지고 지금 아카이오이족(그리스)을 찾아온 것이오.

아킬레우스여! 신을 두려워하고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나를 동정하시오. 나는 그분보다 더 동정받아 마땅하오. 나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차마 못한 짓을 하고 있지 않소! 내 자식들을 죽인 사람의 얼굴에 손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 앞에서 프리아모스는 이 감동적인 말을 통해 아킬레우스 가슴속에 숨겨져 있는 아버지를 위해 통곡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은 깊은 묵상에 잠긴다.

프리아모스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헥토르를 위해 울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엉엉 운다. 이들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온 집안에 가득 찼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 중 복수심에 불타는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가장 고귀한 전사 헥토르에게 돌진하는 모습. 

 

‘창세기’의 영웅 요셉과 그의 형제들

 

<일리아드>는 이 이야기로 마친다. 아킬레스의 분노가 사라지고 상대방에 대한 한없는 공감과 연민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의 고통을 공감하고 원수와도 같았던 그를 자신의 아버지처럼 생각하기 시작한다. 원수가 자신의 아버지처럼 될 수 있다는 연민을 발견한 것이다.

진정한 영웅은 원수 안에서 미움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공유한 고통과 연민을 발견한다. <일리아드>는 바로 이것이다.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공감하고 심지어는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영웅이다.

 

그런 영웅을 <창세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요셉이 그런 영웅이다.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 37∼50장에 등장하는 단편소설이다. 아브라함으로 시작하는 족장시대와 모세를 중심으로 한 출애굽사건의 중간에 넣은 이야기이다. 성서의 저자는 구약성서의 첫 번째 책이며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창세기’ 이야기를 왜 요셉 이야기로 마쳤을까? 요셉 이야기를 한두 장이 아니라 37장부터 50장까지 열네장에 걸쳐 장황하게 묘사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리아드>의 아킬레우스 이야기처럼 창세기 전체 주제를 요셉이야기로 말하려는 의도는 아닌가? <일리아드>와는 달리 <창세기>는 종교 경전이기 때문에 위대한 신앙인의 표상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야곱에게 12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후에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이 된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다. 요셉은 어려서부터 꿈을 꾸고 그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민한 아이였기 때문에 야곱은 그런 요셉을 편애한다.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하여 이집트로 내려가는 대상무역상에게 요셉을 인신매매 해버린다.

요셉이 팔려간 곳은 이집트 파라오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이었다. 요셉은 그 집에서 열심히 일을 하여 신임을 얻는다. 보디발은 요셉을 집안 모두 관리하는 총집사로 임명한다.

 

시험은 항상 잘나갈 때 오기 마련이다. 보디발의 아내가 끈질기게 잘생긴 요셉을 유혹한다.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는 요셉을 오히려 모략하여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남편 보디발에게 말한다. 화가 난 보디발은 요셉을 자신이 관리하는 감옥에 수감시킨다. 이곳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다. 이 감옥생활은 요셉에게 전화위복이 된다.

 

파라오의 음식과 음료를 관리하던 시종장들이 경호대장의 집 안에 있는 감옥에 새로 들어오게 된다. 이들이 들어와 자신들의 꿈 이야기를 하는데, 요셉은 두 명에게 사흘 뒤에 석방되어 다시 파라오 시종장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요셉의 말대로 두 명은 석방되어 다시 파라오를 섬기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다. 요셉은 여전히 감옥 속에 있었다. 이번에는 파라오가 기이한 꿈을 꾸는데, 동방의 어떤 해몽가나 마술사도 그 꿈을 풀 수가 없었다. 이 시종장들은 자신들이 감옥에서 만난 요셉이 기억나, 그를 파라오 앞으로 불러온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푼다.

 

앞으로 7년은 풍년이고 7년은 흉년이니 풍년이 계속되는 일곱 해 동안에, 이집트 땅에서 거둔 것의 5분의 1을 해마다 받아들여 각 성읍에 곡식을 저장하라고 조언한다. 파라오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그를 이집트의 총리로 세운다. 요셉은 서른 살 나이에 이집트를 다스리는 총리가 된 것이다.

 

요셉이 예언한 대로 7년이 지나자 이집트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체가 흉년이 들었다.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요셉의 형들도 아사 직전이었다.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얘들아, 왜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느냐? 듣자 하니,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그리로 가서, 곡식을 좀 사오너라. 그래야 먹고 살지, 가만히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

그래서 요셉의 형 10명이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갔다. 야곱은 요셉의 아우 벤자민만은 형들에게 딸려 보내지 않았다. 벤자민을 같이 보냈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할까 보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때에 요셉은 나라의 총리가 되어서, 세상의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요셉의 형들은 거기에 이르러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요셉에게 절하였다. 요셉은 그들을 보자마자, 곧바로 그들이 형들임을 알았다. 그러나 짐짓 모르는 체하고, 그들에게 엄하게 물었다.

 

“너희는 어디에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먹을거리를 사려고, 가나안 땅에서 왔습니다.”

요셉은 그 순간 형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깊은 구덩이에 빠뜨리고 자신을 조롱하고 돌을 던질 때를 기억하였다. 특히 형들이 험악하게 생긴 대상들에게 자신을 팔 때 비웃은 형들의 이미지가 엎드려 곡식을 구하는 형들과 겹쳐졌다.

 

원수의 행위도 위대한 신의 섭리

 

요셉은 형들에게 간첩누명을 씌우고 투옥시킨다.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너희는 이렇게 하여라. 그래야 살 수 있다. 너희가 정직한 사람이면, 너희 형제 가운데서 한 사람만 여기에 갇혀 있고, 나머지는 나가서, 곡식을 가지고 돌아가서, 집안 식구들이 허기를 면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너희는 반드시 막내아우를 나에게로 데리고 와야 한다. 그래야만 너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가 죽음을 면할 것이다.”(<창세기> 42:18∼20)

그들은 요셉이 통역을 세우고 이집트어로 말하였으므로, 그가 요셉인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요셉은 그들 앞에서 물러가서 한참 울었다.

 

그들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갔지만 그 다음 해에도 기근이 계속되자 다시 이집트로 구걸하러 내려온다. 이번에는 요셉의 친동생 벤자민을 데리고 간다. 그들은 요셉의 집에 들어왔다.

요셉은 자신의 어머니 라헬의 아들이자 친동생 벤자민을 보고 “이 아이가 지난번에 그대들이 나에게 말한 바로 그 막내아우요?”하고 물었다. 요셉은 자기 친동생을 보다가, 마구 치밀어 오르는 형제의 정을 누르지 못하여, 급히 울 곳을 찾아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서, 한참 동안 울었다. 그날 밤, 요셉은 함께 취하도록 마셨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보고 싶은 마음에 계략을 세운다. 요셉은 종들에게 명령한다.

“저 사람들이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많이, 자루에 곡식을 담아라. 그들이 가지고 온 돈도 각 사람의 자루 아귀에 넣어라. 그리고 어린 아이 벤자민의 자루에는, 곡식 값으로 가지고 온 돈과 내가 쓰는 은잔을 함께 넣어라.”

 

아무것도 모른 채 가나안으로 돌아가던 형제들은 자신의 자루에 숨겨져 있는 돈과 은잔을 보았다. 요셉의 관리인들이 이들을 붙잡아 요셉에게 데리고 온다.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요셉의 종들이 기꺼이 되겠다고 간청한다. 그러자 요셉은 말한다.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다. 이 잔을 가지고 있다가 들킨 벤자민만 나의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돌아가거라.”

 

유다가 간청한다.

 

“우리에겐 늙은 아버지가 있고, 그가 늘그막에 얻은 아들 하나가 있는데, 그 아이와 한 어머니에게서 난 그의 친형은 죽고, 그 아이만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 아이를 무척이나 사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소인의 아버지는 이 종들에게 ‘너희도 알지 않느냐? 이 아이의 어머니가 낳은 자식이 둘뿐인데, 한 아이는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는다. 사나운 짐승에게 변을 당한 것이 틀림없다. 그 뒤로 나는 그 아이를 볼 수 없다.

그런데 너희가 이 아이마저 나에게서 데리고 갔다가, 이 아이마저 변을 당하기라도 하면, 어찌하겠느냐? 너희는, 백발이 성성한 이 늙은 아버지가, 슬퍼하며 죽어가는 꼴을 보겠다는 거냐?’ 하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 아이 없이, 제가 어떻게 아버지의 얼굴을 뵙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제가 차마 볼 수 없습니다.”(<창세기> 44:18∼34)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요셉은 자신의 모든 종을 나가게 한다. 큰 홀 안에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만 있었다. 요셉은 눈물을 흘리면서 형제들에게 말한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시다고요? 내가 바로 형들이 수십 년 전에 이집트로 내려가는 대상에게 팔아넘긴 형들의 동생 요셉입니다.”

요셉은 다시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파라오의 궁에도 들렸다고 전한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이 팔아넘긴 동생 요셉이 자신들의 생살여탈권을 쥔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운명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절망의 늪으로 빠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요셉의 반응은 이들의 상식을 초월하였다.

 

“형님들,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주시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기> 45:3∼5)

 

요셉은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죽음으로 내몬 ‘원수’들의 행위를 신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라고 해석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원수의 행위처럼 보이나, 그것은 신의 위대한 섭리(攝理)라는 것이다.

요셉은 자신의 친동생 벤자민의 목을 얼싸안고 울었다. 벤자민도 울면서, 요셉의 목에 매달렸다. 요셉은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형들과도 하나하나 다 입을 맞추고, 부둥켜안고 울었다.

 

 

2012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 유대인 랍비(종교 지도자)의 장례식. 예수는 2천 년 전 ‘이웃’에 대한 유대인 랍비의 협소한 해석을 깨우치기 위해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례를 들어 설교했다. 

 

율법교사의 허를 찌른 예수의 질문

 

예수가 활동한 기원후 1세기에 한 유명한 율법교사가 있었다. 그는 유대인 경전을 새롭게 해석한 <미쉬나>의 모든 규율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율법에 따라 행동하는 완벽주의였다.

그는 당시 많은 제자를 거느리며 기상천외한 말들, 유대 랍비들과는 달리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예수를 만나고 싶었다. 그는 밤에 몰래 예수를 찾아온다.

한 수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실력을 가늠해보기 위함이었다. 그가 예수에게 묻는다.

 

“당신은 나와 같은 율법교사 랍비가 아닙니까? 사람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는 이 자신만만하고 똑똑한 교사의 질문 의도를 처음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당신도 랍비 아닙니까? 모세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당신의 해석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예수의 질문은 율법교사의 허를 찌른다.

예수 질문의 방점은 모세 율법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그의 해석과 실생활에서의 해석 능력을 듣고 싶었다.

 

율법교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수없이 받아왔고 거침없이 대답한다. 구약성서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9장 18절의 내용을 엮어 대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미쉬나> 경전해석의 원칙인 ‘호로즈(Horoz)’를 적용하여 100점짜리 대답을 내놓았다. 호로즈란 유대인들의 현재의 삶의 정황에서 오래된 경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추적하는 경전해석의 원칙으로 경전 안의 통일성과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구약성서의 구절들을 그 역사적인 배경과는 상관없이, 저자들이 처한 역사-신앙 안에서 해석하는 관주 방식이다. 예수가 보기에 이 율법교사는 50점짜리 대답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율법교사가 흔히 아는 <신명기> 6장 5절에 호로즈를 이용하여 <레위기> 9장 18절을 붙여 자신의 해석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시도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혁명적인 해석도 예수의 성에는 차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교사는 아직 ‘이웃’과 ‘사랑’에 대한 개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율법교사의 허를 찌르기 위해 비유를 든다. 

 

“어떤 생면부지의 이방인이 아무도 가기를 꺼리는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어요. 여리고로 가는 길은 ‘피의 길’이라고 알려진 곳이죠. 예루살렘이 해발 640m인데 북동쪽으로 한참 가파른 길을 36㎞ 정도 내려가다 보면 해방 258m 지점이 나오는 그곳이 여리고입니다. 이곳에선 항상 강도들이 들끓는 지역이라 아무도 가지 않는 길입니다.

 

갑자기 강도들이 나와 집단으로 그 사람을 옷을 벗기고 폭행하여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습니다. 만일 당신이 피투성이가 된 거의 죽은 이방인을 발견하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그를 도우러 간다 할지라도 강도가 나와 당신을 폭행할 수도 있고 혹은 강도가 죽은 체하다가 당신이 다가오면 당신을 넘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이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은 “내가 그를 도와주러 멈춘다면, 내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하면서 대부분 지나갈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의 관용과 사랑

 

예수는 이 비유에서 언급해서는 안 되는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집단인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킨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8세기 앗시리아인들에게 점령당한 후, 이들과 결혼하여 유대인의 정체성을 버린 사람들로 여겨져 왔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원수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이 무명의 사마리아인이 길을 가다가 피투성이가 된 이방인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측은한 마음이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여기는 마음이며 용기이다. 우리는 우리와 관계된 사람들, 가족이나 친족, 그리고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과도한 관심과 측은한 마음을 느낀다.

 

이 사마리아인은 서슴지 않고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맸다. 그는 아마도 이전에 이곳을 지나다 강도를 당한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에 미리 구급약품을 지니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죽어가는 이 여행자가 자기 가족 같아, 가던 길을 멈추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 숙박시키고 그 다음 날 다시 이 여관으로 돌아와 이틀 치 여관 삯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비유를 마치고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라고 생각합니까?” 율법교사는 눈물지으면서 말한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율법교사에게 말한다. “선생님! 말만 하지 말고 가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십시오.”

 

상대방이 누구이던지,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그 대상을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다. 그런 마음을 심지어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아마존 정글에 사는 사람이나 에스키모인에게도 느낄 수 있다면 그는 위대함을 실천하는 자가 된다. 예수는 우리에게 요구한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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