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신1

rainbow3 2019. 10. 9. 13:49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신의 위대한 질문① 

 

‘창세기’는 신과 인간의 우주론적 대화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신은 묻는다. 너는 어디 있느냐고.

그 질문은 신이 모든 인류에게 신이 묻고 싶은 첫 질문이다.

 

혼돈의 시대, 궁핍한 영혼의 시대에 성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신과 성서와 인간들의 이야기, 그 길고도 흥미진진한 오디세이를 연재한다.

이 오디세이는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진실’에 이르는 길을 묻고 또 묻는 과정이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가 월간중앙 독자에게 그 여정의 길잡이로 나선다. <편집자>

 

 

The Death of Socrates,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자기 삶의 발자취의 흔적과 일관성에 대해 이야기했다.이 자리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점’으로 표시했고, 그 점들의 일정한 방향성과 일관성이 현재의 자신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세 가지 중 첫째로 ‘점을 잇는 작업’에 대해 설명했다.어떤 이가 마라톤 출전을 준비한다고 하자.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한 육체적-정신적 훈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라톤의 마지막 목적지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이정표다. 목표로 인도하는 이정표를 통해, 선수들은 신체의 리듬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당신은 이 점들이 당신의 미래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배짱, 운명, 삶,카르마 등 무엇이든 믿어야 한다. 이 삶의 방식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이것이 내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라고 말했다.

그가 우리에게 “당신은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일종의 터부다. 물어서는 안 되는 질문이다. 힘들게 매일매일 연명하고 있는데 “왜 사느냐”,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라는 식의 질문은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이런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가졌던 편견과 무식을 확인하고, 자신의 삶을 덜 익숙하고 불편한 시각에서 보라는 것이 성인과 현자들의 촉구다.

서구철학의 시조인 소크라테스(BC 470~399년)는 지혜란 정보의 축적이나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당연한 결과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질문과 대답이라는 대화의 방식을 통해,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말한다.

 

아테네 지도자들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지혜를 추구하기보다는 지식과 정보의 축적을 원했다. 그들은 정의, 용기, 희생, 사랑 같은 기본적인 주제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혜안을 듣기를 원했다. 소크라테스는 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이 주제들에 대한 정보를 주기보다는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신은 침묵 속에 웅변하는 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경험들, 즉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엔 달이 뜨고, 사시사철 계절이 바뀌는 것 같은 자연의 현상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지극히 일부를 관찰할 뿐이지,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늘에 별이 몇 개 있는지, 우리 몸의 움직임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이 설명도 몇 년만 지나면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일시적 설명’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지속적인 질문을 통해, 자신의 삶의 지적 기반이 붕괴됨을 경험했다. 플라톤의 이런 질문과 대화는 자신이 더 이상 대답할 수 없는 ‘논리적 난점’인 ‘아포리아’(aporia)를 경험하게 하여, 스스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아포리아 단계에 진입하는 순간, 그는 지혜를 사랑하게 되며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연인을 사모하듯이 ‘지혜를 사랑하는 자’ 즉 ‘철학자’가 된다. ‘철학자’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으로 간직한 지식에서 ‘떨어져 나오는’ 엑스터시를 경험하게 된다.그리스 철학전통과 유사하게 고대 셈족인도 중요한 순간에 허를 찌르는 질문을 통해, 상대방을 압도하는 전통이 있다.

 

기원전 2000년경 아브라함을 통해 유일신 전통이 시작되어 기원전 6세기 유대교, 기원후 1세기 그리스도교, 그리고 기원후 7세기 이슬람교로 발전되었다.이 종교들은 각각 경전(經典)을 남겼다.

유대교의 ‘토라’(Torah), 그리스도교의 ‘성서’, 그리고 이슬람교의 ‘꾸란’이 그것이다.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자세히 설명하는 그리스 문학전통과는 달리, 아브라함 종교들의 경전들은 원래 시집이기 때문에, 그 운율과 리듬이 후대에 전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문장의 ‘행간(行間)’을 통해 말한다.

 

이러한 서술방식을 ‘침묵 속의 웅변(eloquence from silence)’이라고 한다. 인간의 언어가 원래 인간의 경험을 초월한 신의 말을 담을 수가 없기에, 아브라함의 전통 저자들은 ‘침묵’을 통해 자신들이 전하려는 내용을 독자들이 찾기를 바란다.

 

수천 년 동안 구전으로 내려온 인류의 지혜를‘ 신의 질문’ 이나 ‘인간의 질문’ 이라는 특별한 표현을 통해, 경전을 읽는 사람들에서 생각의 새로운 지평, 다가갈 수 없었던 신기루와 같은 이야기를 던져 ‘아포리아’ 상태로 진입하게 한다. 이러한 예들은 인간에게 수많은 예술과 문학작품들에 상상력과 창의력을 공급해왔다.

 

성서의 첫째 책인 창세기는, 그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삼라만상의 기원에 관한 책이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를 통해 신을 찾으려 하는 30억 인구는 자유, 정의, 그리고 자비의 원형을 창세기에서 찾으려 한다. 성서는 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윤리, 가치,영적인 깨달음을 통해 영원한 세계를 동경하게 한다.

 

도덕적이며 영적인 표식이 없다면, 인간은 거친 바다의 항해와 같은 인생이 매 순간 위기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본성, 즉 태고부터 지니고 있는 다른 인간과 경쟁하며 싸워(fighting), 먹을 것을 독점하려 하고 (feeding), 자신보다 힘센 상대가 등장하면 비겁하게 순응하거나 도망치고(fleeing), 짝을 찾아 관계를 맺어(reproduction),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남기려 한다.

 

창세기는 인간의 자기 파괴적인 본능을 넘어서 인간 안에 내재한 ‘신의 형상(imago dei)’을 회복하려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창세기는 한 민족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고의 가치에 관한 인류 보편의 이야기다. 성서 이야기들은 깨달음을 주기도 하고 재미 있기도 하다.

 

러시아 소설처럼 미묘하고, 세익스피어 소설처럼 극적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들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남녀간의 사랑, 배신, 섹스와 살인, 재난과 자연재해, 잔인함과 자비,환상과 비전, 법과 불법과 같은 인간적이고 심지어는 폭력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아담과 이브(Adam and Eve) © Gustav Klimt

 

 

성서는 보통사람의 이야기

 

성서는 분명히 어린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아동도서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성인의 이야기도 아니다. 성서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숭고한 영적인 이데아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들로 종종 자신의 숭고한 바람과 육신의 욕망 사이에서 부단히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성서의 영웅들은 보통사람들이다. 부모, 형제, 자녀로 등장한 이들이 어떻게 자신을 억매는 물질적·정신적 불행을 극복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기록은 인간만의 특권이자 의무다. 신은 인간의 잘못과 실수를 용서하지만, 거기에는 항상 그 대가가 따른다. 신은 지혜로운 부모처럼, 아담과 이브를 자궁과 같은 에덴동산에서 자유의지의 선택과 책임이라는 세상으로 데리고 나온다. 에덴동산 밖에서의 삶, 진짜 세상에서 사람들은 행동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 되는 어른이 된다.

 

성서의 가장 영웅적인 인물들은 예언자나 장군들이 아니라, 자신의 자식과 사랑하는 이의 감정적이며 영적인 성장을 위해 책임지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같은 보통사람들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당신이 인문주의자든,종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 불가지론자이든 상관없이 성서는 불완전한 세상에 일어난 신비와 기적을 목격할 수 있는 초대장이다. 신은 성서에서 전지전능한 분으로 묘사되지만, 세속적인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은 성서가 삶의 지표역할을 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

 

성서의 인물들은 바로 우주창조 이래 신의 권위에 도전한 자들에 관한 기록이다.

신을 절대 신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지 않은가?

실제로 신은 인간의 도전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그 도전을 부추긴다. 신과 인간의 첫 번째 만남은 희망적이지 않았다. 신이 인간에게 한 첫 질문도 인간의 잘못에 대한 지적이었다.

창세기 1장은 신이 7번에 걸쳐 세상을 창조했다고 기록한다. 창세기 2장은 창조의 세부사항들, 특히 최초의 인간 커플 아담과 이브를 위해 ‘에덴’이란 곳에 정원을 만드는 기록이다.

 

창세기 1장의 신이 우주와 지구, 육지와 바다를 설계하고 시공한 대건축가라면, 창세기 2장의 신은 지상의 생물들을 위해 많은 열매와 잎이 달린 정원을 만든 최고의 정원사다. 창세기 2장에서는 창세기 1장과는 달리, 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이나 식물보다 먼저 창조되었다는점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땅과 하늘이 창조될 때 이야기다. 아직 땅에 들의 숲이 없고 들판에 풀도 자라나지 않았다.

주하느님(히브리어로 ‘야훼 엘로힘’: 기원전 10세기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신명)이 땅에 비를 내리시지 않았고, 땅을 개간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땅을 개간할 사람이 없었다’라는 표현은 신이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표식이다. 그는 곧 최초의 인간을 창조한다.

 

“땅으로부터 안개가 피어나 지면을 적셨다. 그때, 주하느님 땅의 흙으로부터 인간을 빚어, 그 두 콧구멍에 생명의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인간이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다.”

 

최초의 인간을 히브리어로 ‘아담’이라 한다. ‘아담’(adam)의 의미는 ‘붉은 흙’이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단어 ‘아다마’(adamah)에서 파생된 단어로 직역을 하자면 ‘붉은 흙덩어리’라는 의미다. 안개가 내리고 비가 온 후, 먼지와 같은 흙이 촉촉해지고 변형이 가능하게 되어, 신이 인간을 만들게 되었다.

 

신의 숨은 생명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모두 동원했다. 흙, 물, 그리고 바람과 불이다. 신은 이들을 통해 인간을 완성한다. 마치 도공이 흙을 통해 생명을 불어 넣어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드는 것처럼, 신은 자신의 영혼을 흙에다 주입하여 사람을 만든다. 그것은 마치 물에 빠져 숨이 끊어진 사람에게 응급조치로 입을 대 심폐소생술을 하는 것처럼, 무생물을 생물로 만든다.

 

그 후에 신은 똑같은 흙으로 동물을 만든다. 그러나 신은 ‘심폐소생술’을 생략한다. 인간의 육신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인간의 영적인 본질, 인간의 영혼은 신으로부터 직접 왔다는 사실을 성서는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동물이면서도, 동물과는 다른 신으로부터 선물 받은 ‘신성’이 있다.

 

신은 ‘동쪽’ 어디엔가 위치한 ‘에덴’이란 장소에 동산을 만든다. 히브리어로 ‘동쪽’이란 ‘먼 옛날’이란 의미도 있다. ‘에덴’은 어원에 ‘기쁨, 풍요’라는 의미로, 신은 인간을 위해 기쁨과 풍요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신은 이 동산에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탐스러운 온갖 나무를 심었다. 특히 동산의 중앙에는 두 그루의 특별한 나무를 심었는데,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이다.

 

‘생명 나무’의 열매는 영생을 보장하는 나무이며,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는 우주의 신비와 비밀을 푸는 ‘지식’이 담긴 열매를 맺는 나무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는 흔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잘못 번역되었다.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이라는 이중성이 아니라, 선과 악을 초월하는 모든 지식이 방점이다.

왜 성서의 저자는 ‘선의 지식의 나무’와 ‘악의 지식의 나무’로 구별하지 않았을까? 

 

선악과는 선과 악을 초월하는 지식을 상징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1886년에 출간한 <선악의 피안에서: 미래철학을 위한 서언>은 선악에 대한 서구, 특히 유대-그리스도교의 구분과 신학에 대한 비판서이다. 그는 이전에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발전시켜 좀 더 비판적이며 논쟁적으로 서구문명과 종교를 분석한다.

니체는 진리와 신, 선과 악이라는 서구의 전통적인 철학과 신학을 비판하며 도그마에 기초한 철학의 종말과 관점주의 (觀點主義 perspectivism)의 시작을 주장한다.

 

관점주의는 한마디로 이 세상에 보편적·객관적·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사람들이 어떤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시각, 즉 관점은 필연적으로 변화무쌍한 현실에 대한 한 점에 불과 하기에 진리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는 선과 악을 넘어선 ‘전체’를 아우르는 나무다. 이 구절에서 ‘선과 악’은 그 자체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히브리 표현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개념을 나열시켜 전체를 의미하는 일종의 메리즘(merism)적인 표현으로 ‘모든 것, 전부’를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식’이다. 이 지식은 신만이 가지는 특별한 우주 전체의 원칙과 같은 것이다.

 

신은 인간을 동산의 정원사로 임명하고, 신의 정원에 언제나 들어가 거주할 수 있는 평생 출입증을 선사한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좋다. 그러나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는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 죽을 것이다.”아담이 에덴동산 안에서 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담은 ‘모든 지식의 나무’를 제외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신은 인간이 ‘모든 지식’을 알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가? 혹은 “신은 인간의 순종을 시험하고 있는가?”

신이 전지전능하고, 인간의 불순종할 것을 안다면 “신은 왜 ‘모든 지식의 나무’를 심었는가?”

 

신은 홀로 존재하는 인간 아담이 좋아 보이지 않아 ‘그를 돕는 이’를 창조한다. 인간은 99%의 유전자가 침팬지와 같지만 1%가 다르기에, 동물 가운데는 아담과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이 1%가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든다. 인간의 외로움은 자신과 유사한 동료를 만났을 때 해소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애완동물이나 다른 동물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충성심과 동반적 애정심에 대해 놀라곤 한다.

 

동물들은 우리는 배신하거나 속이지도 않고 매정하게 상처주지도 않는다. 사실 우리 주위에 동물만도 못한 인간이 많아 이런 동물들이 돋보이기도 하지만, 동물은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에게 결코 도전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동물들과 좋은 책이나 예술작품을 논할 수 없고, 함께 웃거나 눈물을 흘릴 수가 없다. 개나 말과 친해지기는 쉽다. 그러나 다른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훨씬 힘든 일이며 도전적인 일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이 다른 자식으로 대치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신은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한 후, 그의 한 부분을 꺼내 살로 메워 여자를 만든다. 이 신화에서 그의 한 부분이 흔히 ‘갈빗대’로 잘못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쨀라’는 물에 떠다니는 배의 반쪽을 의미한다.성서 해석을 지난 2000년 동안 독점한 남성들이 여성을 비하하기 위해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여성은 이제 ‘아담의 반쪽’이다. ‘아담’이란 단어로 그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아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①인간 ②남자. 여자가 창조되기 전에 ‘아담’을 ‘남자’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오해다.

‘남자’는 ‘여자’의 대칭적인 개념이며 존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창조된 후에, 아담은 비로소 ‘남자’가 되었다.‘인간’을 의미한 ‘아담’의 한쪽이 여자가 되었고, 다른 한쪽은 남자가 된 것이다. ‘여자’가 만들어지면서 비로서 ‘남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여자를 ‘하와(hawwah)’ 즉 ‘생명을 탄생시키는 자’라 불렀다. 남자와 여자는 인간의 원초적인 두 개의 짝으로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인간은 자라나서 자기의 반쪽을 찾아야 비로소 그 역할을 하게 된다는 의미다. 창세기 2장의 마지막 절에 “둘이 벌거벗었으나, 남자와 그의 아내는 부끄럽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지루하게 지내고 있었다. 서로를 성적인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신이 이들에게 따먹지 말라고 한 ‘모든 지식의 나무’는 그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전화시킬 ‘지식’의 열매가 있었다.

이 알레고리를 풀 수 있는 핵심 단어는 바로 ‘지식’이다. 에덴동산 이야기는 ‘지식’이란 히브리어 단어에서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다. 

 

나뭇잎 의상은 인류 문명의 메타포어

 

‘지식’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는 ‘다아쓰(da’ath)’다. ‘다아쓰’는 우리가 보기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가 있다. ①우주의 원칙과 삼라만상의 운행방식을 아는 ‘지식’, ②남녀의 성적인 행위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앎’이다. 이 단어는 특히 12세기 후반부터 스페인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유대 신비주의인 까발라 전통에서 우주를 지탱하는 10가지 원칙을 하나로 통합하는 철학적 개념으로 사용됐다.

 

‘다아쓰’는 신의 생각이 지상에서 구현된 통찰력인 ‘지혜(히브리어:호크마)’와 분석력인 ‘명철(히브리어: 비나)’이 승화되어 통합된 최고의 원칙이다. 신은 에덴동산의 한가운데에 이 깨달음의 열매가 있는, 우주의 원칙을 알 수 있는 열매는 맺는 나무를 둔 것이다.

 

창세기 3장은 ‘뱀’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뱀은 주하느님이 만든 모든 동물과는 달리 “알 수 없고 똑똑하였다”. ‘알 수 없고 똑똑한’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아룸(arum)’은 동시에 ‘벌거벗은’이란 의미도 있다. 고대 근동신화에서 뱀은 영생과 풍요의 상징으로 남성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대근동의 가장 오래된 영웅서사시인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서사시>에서, 영생의 불로초를 먹은 이는 길가메쉬가 아니라 바로 뱀이었다. 신약성서에 예수는 ‘뱀처럼 지혜롭기를’ 주문한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바로 ‘모든 지식의 나무’에 거주하며 이브를 유인한다. 뱀은 만일 ‘모든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게 된다면, ‘모든 것을 알게되는 신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무료한 에덴동산의 생활에서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스럽고 보기에도 즐거운, 그래서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 것 같은 그 열매를 먹는다. 이브가 처음으로 자신의 오감을 자극하는 물건을 발견한 것이다.

 

이브가 나무 위를 쳐다보니, 뱀이 사라졌다. 이브는 홀로 금단의 열매를 먹는다. 이브는 자신의 반쪽인 아담에게도 그 열매를 준다. 이 커플은 열매를 먹고 잠들게 된다. 이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들의 눈이 열렸으며,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뭇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었다.”

 

뱀의 말이 맞았다. 그들의 눈은 열렸고, 그들은 죽지 않았다. 아담과 이브는 ‘지식’ 즉 ‘다아쓰’를 경험한 후, 자신들의 모습을 인식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벌거벗었으며,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얼마나 이중적인 동물인가?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초월적인 영혼을 품었지만, 동시에 한시적임 육체 안에서 동물적인 본성과 싸우며, 자신의 필멸성을 의식하면 살아간다.

아담과 이브가 자신들이 누구인지 처음으로 깨닫게 되는 순간, 인류 최초의 의상인 나뭇잎 옷을 만든다. 나뭇잎으로 만든 의상은 인류 문명의 시초다.

 

나뭇잎으로 자신들을 가리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에덴동산에 해가 질 무렵, 이 광경을 다 알고 있었던 신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단순한 질문이 신이 인간에게 한 첫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시제가 없다. 히브리로 ‘아에카(ayeka)’이다. 이 질문은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어디 있느냐?” 혹은 “네가 어디에 있을 것이냐?”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어린아이의 순진함과 어른의 경험 사이에서, 신의 형상을 동물의 형태 안에 지닌 존재로, 우주의 원칙을 깨달은 존재가 나뭇잎으로 음부를 가린 존재로, 인간은 그 중간에서 어찌할 줄 모른다.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아직 책임을 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담은 신에 대한 불순종을 이브에게로, 이브는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다.

 

그 결과 아담을 땀을 흘려 일해야만 했고, 이브는 섹스의 즐거움과 함께 아이를 낳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으로부터 나와, 어른으로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인간은 단순히 과일을 따먹는 채집경제에서 기원전 1만년부터 시작된 신석기 혁명인 농경사회로 진입하면서 정착생활을 시작하고 문자와 도시생활의 문명사회를 발전한다.

주 하느님은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아담과 이브를 입히셨다”. 

 

인생의 목적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신의 첫 질문 ‘아에카’ 즉 “너는 어디 있느냐”는 무슨 의미인가?

지금부터 200년 전 제정러시아 리아디(현재 벨라루스)에서 살던 한 랍비가 차별받아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동료 유대인들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유대교를 고안한다. 신앙과 이성, 그리고 정신과 물질을 넘어서는, 현대인들을 위한 획기적인 삶의 철학을 만들었다.

 

그는 랍비 알터 렙베(Alter Rebbe)라고 알려진 랍비 슈노이어 짤만 (1745~1812)이다. 그는 유대 신비전통 까발라와 당시 유럽에 성행하던 신비주의 ‘하시디즘’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하여 자신의 철학을 ‘차바드(Chabad)’라고 불렀다.

 

‘차바드’는 유대신비주의에 등장하는 우주의 원칙들인 ‘호크마’(Chochma: 지혜), ‘비나’(binah: 분별력), 그리고 다아쓰(da’ath: 지식)의 첫 글자들로 만들어졌다. 알터 렙베가 하시디즘을 전파하기 시작하자 ,제정 러시아는 이 새로운 운동을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여기고 그를 체포했다.

 

그는 거의 8주 동안 심문을 당했다. 그를 심문한 러시아 관리 중 하나가 유대인 경전 토라에 심취에 있었는데, 알터 렙베의 지혜를 흠모하여, 자신을 평소에 괴롭혔던 질문을 그에게 던진다.

 

“왜 신은 아담이 ‘선-악의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의 열매를 먹은 후 그를 벌 주려 할 때,‘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는가?

아니, 신이 아담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야만 했는가?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는가?”

 

알터 렙베는 그 관리에게 유대교 최고의 주석가인 라쉬(Rashi)의 설명을 들려준다. 라쉬(1040~1105)는 중세 유대학자로 탈무드와 유대경전에 대한 기준이 되는 주석을 쓴 학자다.

라쉬는 “신은 아담을 겁에 질리지 않게 하기 위해 ‘왜 너는 죄를 지었느냐’라고 묻지 않고, 그를 두렵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질문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 러시아 관리는 “나는 그 설명을 알고 있다. 당신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알터 렙베가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본 후 이렇게 말한다.

 

“토라(유대 경전)는 영원합니다. 신이 아담에게 한 같은 질문을 오늘 모든 사람에게, 모든 순간에 묻습니다. 신은 언제나 우리에게 ‘당신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당신이 꼭 이루어야 할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를 들어, 당신의 나이가 60세입니다. 신은 당신에게 ‘당신의 인생의 미션은 무엇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디까지 왔느냐’고 묻습니다. 신이 당신을 통해 이루려는 그 미션을 행하고 있습니까?”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은 모든 인류에게 신이 묻고 싶은 첫 번째 질문이다.

‘신의 형상’으로 초월적인 영성을 지니고, 우주의 원칙인 ‘다아쓰’를 습득한 인간에게 신은 묻는다.

 

“너는 네 안에 숨겨진 신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느냐? 너는 동물과 같이 본능대로, 이기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