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 신의 위대한 질문③
“사라의 여종 하갈아,너는 어디로 가느냐?”
성서는 아브라함과 하갈을 통해서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한다.
하갈이 출산한 아이 ‘이스마엘’이 바로 이슬람의 조상이다.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의 갈등은 과연 원죄와도 같은 숙명인가?
성서가 기록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6세기 무렵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자신이 믿는 신을 통해 이 세상에서 고난이 없는 평화로운 삶을 보장받았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동쪽 메소포타미아에서 몰려온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 산산이 깨졌다.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그들의 거룩한 성소인 예루살렘을 초토화한다.
바빌로니아 군대는 당시 예루살렘의 모든 왕족, 귀족, 지식인 그리고 기술자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이때가 기원전 586년이다. 이스라엘인들은 1948년에 독립하기까지 길고도 긴 디아스포라 생활을 시작했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말한 ‘축의 시대’(Axial Age), 동서양에서는 독립적으로 창조적인 사상가가 대거 등장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예언자와 학자들이 등장하여 예루살렘을 대치할 영적인 보물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경전’이다.
신을 예배하던 장소인 ‘성전(聖殿)’이 장소를 초월하여,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거룩한 말씀을 책으로 만들 ‘성전(聖典)’으로 대치되었다. 우리에게 전해온 구약성서의 90% 이상은 바로 이때에 기록되었다.
유대인들이 만든 새로운 성소는 가시적인 공간이면서 파괴가 가능한 또 다른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시간, 즉 여느 시간과 구별된 시간인 ‘안식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세계어디에 있던지, 자신의 ‘성전(聖典)’을 펼치는 바로 그 순간 신이 임재한다고 믿었다.
유대인들은 이 거룩한 책을 ‘토라’라고 불렀다. ‘토라’ 라는 히브리 단어의 의미는 ‘과녁 명중’이란 뜻이다. 그들은 인생을 궁수가 활을 당겨 화살이 날아가는 궤적과 비교하였다. 화살이 날아가 과녁을 맞히듯 인생에는 누구나 가야 할 길이 있고,그 길을 바로 ‘토라’(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라 불렀다.
만일 그들이 이 토라에 기록된 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화살이 길을 잘못 택해 과녁을 비껴나가는 것이며, 그는 ‘죄’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히브리 단어 ‘하타’라는 동사는 ‘과녁을 비껴나가다’와 ‘죄를 짓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유대인들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편집하면서, 우주와 인간 그리고 인간문명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들을 토라의 맨 앞에 배치하였다.
토라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11장의 내용은 역사적이거나 과학적이 아니라 신앙 고백적이다.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오리엔탈 르네상스로 고대 이집트 성각문자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들이 판독되면서, <창세기>의 기원(起源)론적 이야기들과 유사한 신화가 많이 발견되었다. 고대 오리엔트의 일부였던 이스라엘도 이 신화들을 공유하여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창작하였다.
우주가 맨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 누가 목격하여 기록할 수 있나? 영장류, 특히 인간이 지구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의 기억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나? 사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할지라도 우주나 생명의 기원에 관한 이론은 가정일 뿐이고, 새로운 이론이 등장한다면, 현재까지의 그 기원에 대한 주장은 폐기될 수밖에 없다.
미국 NASA가 개발한 허블망원경으로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별의 수는 대략 6000억 개라고 한다. 이 수는 역시 먼 미래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극히 적은 숫자이다.
성서는 과학적이며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고백한 내용이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삶을 지탱케 하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상대방과의 믿음, 사랑과 같이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성서 최초의 역사적 인물, 아브라함
성서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소위 중동지방의 유일신 종교, 즉 기원전 6세기부터 시작한 유대교와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등장한 그리스도교, 그리고 7세기 아라비아에서 등장한 이슬람교 신앙의 조상이다. 구약성서와 이슬람경전 꾸란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자식들, 즉 이삭과 이스마엘은 각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가 바빌로니아 왕으로 재임할 때, 오래된 수메르 도시인 우르에서 태어났다. 우르는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 서쪽으로는 티그리스강 사이의 비옥한 땅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한 최고의 국제도시였다. 그 당시 동쪽으로부터 ‘아모리인’들이 대규모로 들어와 평화로운 수메르 문명을 호전적인 바빌론 문명으로 교체하면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게 된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는 우르에서 신의 동상을 만드는 최고의 명장이었다. 수메르인들은 우상을 신전에 모시고, 살아있는 신처럼 매일 옷을 입히고 목욕재개하고, 그를 위한 의례를 진행한다.
그들은 이런 신상 안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유대인들의 십계명 중 제1계명이 바로 우상을 만들지 말하는 명령이다. 여기서 우상은 신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테라는 우르에서 명성과 부를 지닌 상류층 인사였다.
테라의 공장은 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실제 크기의 신, 왕, 그리고 귀족들의 동상뿐만 아니라 개개인들이 부적처럼 갖고 다니는 소형 신상도 대량으로 생산했다. 수메르와 아카드의 모든 가족은 신전에 자신들의 보호신을 소형신상으로 만들어 두었다. 신전들은 우르의 신인 달신 난나와 그녀의 가족을 위해 성스러운 동상들이 필요했다. 테라는 신전에 사용할 동상들을 1년에 몇 개씩 조각하여 팔았다. 당시 테라는 말하자면 자크 루이 다비드나 오귀스트 로댕과 같은 부와 명성을 누리는 예술가였다. 하지만 테라의 가세는 바빌론 제국의 함무라비 시절에 급격히 기울어졌다.
함무라비는 원래 메소포타미아인이 아니라 서쪽에서 이주해 온 정복자였다. 그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야 했고, 이전에 부각되지 않았던 바빌론을 수도로 건설하였다. 함무라비는 수메르 도시들 특히 우르, 우룩, 니푸르와 같은 오래된 도시로부터 신상과 예술 작품을 모두 철거하여 바빌론을 장식하는 데 사용하였다. 함무라비는 바빌론을 그가 만든 제국의 수도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특히 수메르의 찬란하고 독창적이 예술을 재생산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동일한 동상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테라는 결국 아들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라, 그리고 조카 롯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하란에 도착했다. 하란은 오래전부터 수메르가 대상무역소를 설치했던 장소이다. ‘하란’이란 단어 자체가 ‘교차로’라는 의미다. 이곳에는 고대 근동지방의 대상들이 모여들었지만 우르에서 발견된 달신 ‘난나’ 신상이 발견된 것으로 미뤄 보아, 테라는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려고 과거 달신 ‘난나’ 신상들이 필요한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하란은 현재 터키와 시리아 국경지대에 있는 산우르파에 해당한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우르에서의 삶 못지않은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심각한 영적인 위기에 봉착했다. 이때 그의 나이 75세였다. 아브라함은 악몽에서 깨어나 무서워 떨며 침대에 앉았다. 그의 아내 사라는 나이가 55세였다.
기득권 버리는 영적인 여행을 시작하다
이 노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사라는 불임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주위사람들이 당시 관습대로 아브라함에게 씨받이를 통해서 자식을 얻으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서로를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여인을 통해 자식을 얻을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침대에서 일어나 하란에서 가장 훌륭한 자기 집 마당을 걸었다. 그 순간 그 아름답고 화려한 집이 마치 무덤과 같다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테라가 죽으면서 남긴 유산으로 화려한 집, 종들,가축들, 인간이 부러워할 만한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공허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아브라함은 잠을 설치다가 이른 새벽에 몸을 일으키기 일쑤였다.그는 자신이 왜 사는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새벽녘 회색빛 하늘사이로 별들을 보고, 멀리서 들려오는 들개 짓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이 파놓은 이 ‘구덩이’ 속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사라는 새로운 삶을 갈망하며 명상하는 아브라함을 말 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신이 아브라함에게 말을 건 내용이 창세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네 자신을 위해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것이다.”
느닷없이 신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 성서는 왜 신이 아브라함 선택하셨는지 아무런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는다. 신은 아브라함 자신을 위해 집과 고향을 버리고 떠나라고 말한다. 아담과 이브가 ‘모든 지식의 나무’를 먹고 실제 세상으로 나온 것처럼, 신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에게 그들이 누리고 있는 현재로부터 나오라고 촉구한다.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는 비전이 없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변화를 위한 욕망과 그에 대한 불확실한 두려움 사이의 긴장이 있다. 우리가 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근심을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고향’이란 단어는 이 문맥에서 아브라함이 가진 기득권을 의미한다. 고대 사회에서 고향을 떠나는 일은 곧 죽음이다. 특히 유목사회에서 자기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는 일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 특히 살인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을 때 내리는 형벌이 바로 그 사회로부터의 추방이었다.
그러면 왜 신은 그런 엄청난 요구를 아브라함에게 하신 걸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아브라함 자신을 위해서’라고 신은 말씀하신다.
히브리 본문에서 간과하기 쉬는 구절이 바로 ‘렉크-르카’라는 구절이다. 성서를 해석하는 학자들은 흔히 이 구절의 해석을 등한시한 것 같다. 축자적인 의미는 “너 자신을 위해서 떠나라”이다.
여기에서 신은 아브라함의 믿음, 그의 삶에 대한 시각을 살펴보시려 한다. 신은 우리가 일생을 통해 일궈놓은 우리의 게젤샤프트와 게마인샤프트, 우리의 기득권을 과감히 버리고 신과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시험하신다. 그 이유는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인간은 종종 자신이 사회적 위치와 기득권 때문에, 삶의 의미와 목적을 쉽게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버림은 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아브라함 자신을 위한 길이다.
신은 아브라함의 전부를 포기할 것을 명령한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따른다면, 신은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 약속은 너무도 황당한 약속의 연속이었다. 아브라함이 우르와 그 후에 정착한 하란을 다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아들인다. 이 명령은 아브라함이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고 신이 원하는 그런 삶을 살고자, 영적인 여행을 떠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시험이다. 신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는 삶, 그 삶은 사실 과거로부터의 단절, 삶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의 변화를 통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과감히 떠난다. 여기서 떠났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할락’인데 이 단어는 ‘가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의미는 ‘매일매일 그런 삶을 살았다’라는 의미다. 아브라함이란 자연인, 또는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져도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할 사람에서 인류역사의 가장 위대한, 그리고 중요한 여행을 통해 4000년 뒤 인류의 절반인 30억 인구를 아브라함 종교로 인도했다.
복이란 ‘이 세상에 꼭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
이런 여행을 촉구하는 신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다. 그러나 그 약속들도 가만히 들어보면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애매모호하다. 다음은 신의 약속들이다.
첫 번째, “내가 너를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 신께서 그를 위대한 나라의 수장으로 만들겠다는 약속이다. 만일 신이 아브라함을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으로 만들겠다고 하신다면 이해가 가지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통치자로 만들겠다는 약속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처지를 생각하면 무척 매력적인 약속이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식을 허락하시겠다는 신의 의중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약속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외적인 조건들도 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나이가 75세였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는 불임여성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아브라함의 눈으로 봐선 불가능한 약속이었다. 그는 신이 말씀하셨으니 안 믿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고민에 봉착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약속은 신의 축복이 아니라, 아브라함 신앙의 시련과 단련의 시작이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신께 달렸다는 선포이며, 그것을 믿고 따르라는 명령이다.
두 번째, “내가 너를 축복할 것이다”: ‘축복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또한 신의 축복의 내용은 무엇일까? 먼저, ‘축복’이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의 히브리어 ‘버러카’라는 표현의 어근은 b-r-k인데, 이 단어의 가장 근본적은 의미는 ‘베렉’ 즉 ‘무릎’이다. 무릎과 축복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축복’이란 말뜻은 물질적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보다 근본적인 축복을 의미한다. ‘축복’이란 명사는 위에서 언급한 어근에서 파생하여 ‘버러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무릎을 꿇고 신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둘째는, 첫 번째 순종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신께서 우리를 향해 하시고자 하는 바를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축복이다. 그 축복은 바로 ‘무릎’과 관계가 있다. 우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신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원하시는 바를 무릎을 꿇고 깨달아 그러한 영적인 삶을 살겠다는 순종이 바로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두 번째의 결과를‘blessing’으로, 즉 축복이란 단어로 번역하는데, 그 단어에 숨겨진 본래의 의미는 순명(順命)이다.
세 번째, “내가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순간 이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께서는 “신경 쓰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겠다. 그리고 그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말씀하신다. 75세에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 아내 사라가 불임여성인 아브라함, 그의 이름은 곧 없어질 위기에 있었다.
더욱이 고향을 떠난다는 사실은 위기의 상황에 확실히 못질하는 일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신께선 아브라함에게 “더 이상 네가 지금까지 가진 이름을 잊어라” 하고 말씀하신다.
‘이름’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름은 고대나 지금이나 개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고대 이집트인은 사람을 구성하는 5요소 가운데 이름을 의미하는 ‘렌’을 중시했다. 그 사람의 존재, 인격, 명성이 그 이름에 모두 담겨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셈족’이란 단어는 바로 그 이름에서 나왔다. 셈족 사람들은 이름을 ‘쉠’이라고 했다. 이들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체성은 ‘이름’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이 ‘이름’은 ‘역사, 기억, 명성’으로도 번역된다. 신의 말을 의지해서 과감한 영적 여행을 떠난 아브라함과 사라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식을 낳을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신의 뜻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아내 사라와 씨받이 하갈의 갈등 폭발
신의 명령을 받고 하란을 떠나 이집트를 거처 팔레스타인에 거주한 지 10년 이상이 지났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점점 늙어가고, 후사를 얻을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자 그들은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사라의 몸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점점 노쇠해지면서, 자신의 남편 아브라함이 성취해야 할 미래를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신은 지난 10년 동안 자녀를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주시겠다고 약속만 했지, 아무런 결과가 없는 텅 빈 약속으로 노부부는 한숨만 짓고 있었다.
만일 신이 아브라함을 통해 위대한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한다면, 사라는 자신의 몸을 통해 달성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아브라함이 기다리지 않고 다른 여자를 취한다면, 신의 약속, 즉 사라의 몸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이 파기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라 자신이 몸종 하나를 선택하여 씨받이로 허락한다면, 그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몸종 하갈을 언급하면서, 자식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종을 통해 후사를 얻는 일은 고대 오리엔트 사회,특히 함무라비법전에 등장할 만큼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아내 사라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하갈은 젊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집트 출신으로 더욱 더 이국적인 미를 지녔다. 하갈을 통한 아들도 잘 생기고 아름다우리라 추측하였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집트에 거주할 때부터 지켜본 하갈은 정직하고 충성스러웠다. 사라의 빈틈없는 준비로, 아브라함은 하갈과 동침하였다. 하갈이 임신하고 나서부터 집안에 불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아브라함은 늘그막에 자신을 위해 자식을 임신한 하갈을 편애하기 시작한다. 하갈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몸종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소홀이 하고 음식을 주문하며, 심지어는 사라를 무시하기에 이른다. 사라는 더는 하갈을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부른 배는 사라의 남편과의 밀접한 관계를 만천하에 공표하고 있었다. 드디어 사라의 질투가 폭발한다:
“내가 받는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나의 종을 당신 품에 안겨주었더니, 그 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멸시합니다. 주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사라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존 그레이의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여자가 화내는 이유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자에게서 애정을 느끼기 위해서라 말하지 않았던가!
남자와 여자의 감정적 요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차이를 조화시켜야 한다. 신학자 폴 틸릭 “사랑의 첫째 의무는 잘 듣는 것이다”라고 말했다.아브라함은 이 말을 듣고 불이 꺼진 밤이 돼서야 하갈의 천막으로 가고,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사라의 텐트로 돌아왔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감정을 해치지 않기 위해, 하갈의 임신을 기뻐할 수도 없었다.
아브라함은 곤경에 빠졌다. 만일 그가 하갈을 편들면,사라가 섭섭해 할 것이고, 하갈을 차갑게 대하면, 그 부족 전체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상황에서 자신이 책임지지 않을 발언을 사라에게 한다: “여보,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기 바라오.”
그러자 사라가 하갈을 심하게 대하고는 내쫓고 말았다. 사라는 하갈을 영원히 내쫓으려 한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 단지 그녀의 위치를 확인시켜, 자신이 주인이고 그녀는 종이란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따름이다. 사라의 학대를 견디다 못한 하갈이 어느날 밤 임신한 몸을 이끌고 사막으로 도망을 친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하갈에게 천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묻는다:
“사라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그러자 하갈은 “나의 여주인 사라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천사가 하갈에게 한 질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와 “너는 어디로 가느냐?”다.
성서에 등장한 신의 세 번째 질문은 하갈에게 한 질문으로 이전에 아담이나 가인에게 한 “네가 어디에 있느냐?”와 “네 아우아벨이 어디에 있느냐?”와는 심층적인 면에서 그 의미가 다르다.
이 두 질문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하갈의 여주인으로부터 나와 아무 생각도 없이 사막으로 도망가는 여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전개되는 천사의 예언들에 비추어본다면, 후에 등장한 이슬람 기원에 관한 중요한 미토스가 숨겨져 있다.
천사는 구약성서에서 신적인 존재로 어떤 경우에는 신으로, 어떤 경우에는 이름 모를 ‘나그네’로 등장하는 신비한 존재이다. 바로 그 천사는 과거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축복의 말을 건넨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
성서는 아브라함에게뿐만 아니라, 하갈을 통해서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장차 하갈이 출산할 아이의 이름도 알려준다.
그 이름이 바로 ‘이스마엘’이다. 이 이름의 의미는 “신이 들으셨다”이다.이스마엘이 바로 이슬람의 조상이다. 이슬람 경전에는 ‘이스마일’이란 이름으로 언급된다.
꾸란에서 이스마일은 예언자이며 무함마드의 조상이고, 그는 이슬람 최고의 성지 메카와 ‘카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신의 명령을 따라 하갈과 이스마일을 데리고 메카로 가서 카바를 건설한다.카바는 메카에 있는 이슬람의 가장 신성한 신전이며 이 단어는 입방체를 의미한다. 가브리엘 천사가 카바 장소를 알려주고, 아브라함,하갈 그리고 이스마일이 카바를 건설한다.
그 후에 신은 아브라함에게 카바를 하갈과 이스마일에게 맡기고 떠날 것을 명령한다. 하갈과 이스마일이 물이 떨어져 목이 몹시 말라 알-사파라는 언덕과 알-마르와라는 언덕 사이를 7번이나 왕복한다.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무슬림들의 메카 순례기간 동안 두 언덕 사이를 왕복한다.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갈이 신을 만나고 나서 한 말이다: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를 ‘보시는 하나님’,즉 ‘엘 로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하갈은 역사상 처음으로 신의 이름을 지은 사람이다. 성서에서 신의 이름은 신 스스로 인간에게 계시하거나,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이름이다. 셈족 전통에서 신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일종의 터부로, 사제만이 종교의례에서 언급할 수 있다. 하갈은 놀랍게도 신에게 이름을 준 역사상 첫 번째 인물이다.
하갈, 인류 최초로 신의 이름을 짓다
그녀는 신을 향해 ‘당신은 엘 로이’라고 말한다. 하갈은 여기서 오래된 셈족 전통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신을 찾아, 그 신의 특징을 포함하는 신명을 만든다. 이슬람 전통 경전인 ‘하디쓰’에 의하면 하갈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신을 ‘알라’라고 불렀고 심지어는 하갈은 여러 면에서 아브라함과 동등한 인물로 묘사한다.
하갈은 사라의 노예로 시작했지만 후에는 자유인이 되어 아랍민족의 조상이 되는 이스마일을 낳았고, 신의 이름까지 명명한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하갈은 후대 무함마드의 삶과 이슬람 공동체의 결성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무함마드가 610년부터 첫 계시를 받고 꾸란을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전파한 후, 많은 아랍인이 그의 신앙에 탄복하고 그를 따랐다. 그의 메시지는 물질주의에 탐닉한 기득권 계층인 쿠라이쉬 메카인들을 질타하여 미움을 사게 되고 기원후 622년 6월, 무함마드는 그를 암살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하고 메카를 떠난다. 무함마드와 그의 제자들은 메카에서 북쪽으로 320km 떨어진 야쓰리브라는 도시로 이주한다. 야쓰리브는 곧 ‘마디나트 운-나비’, 즉 ‘메디나’로 개명한다. 이렇게 메카에서 메디나로의 ‘이주’를 ‘헤지라(hijzrah)’라고 부른다. 바로 이 ‘헤지라’라는 이름은 무슬림들의 조상인 ‘하갈(hagar)’이란 이름에서 유래했다.
하갈 이야기는 현재 세계 최대 종교인 이슬람교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지만, 가장 잘못 해석되어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유대-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반목이 시작되는 이야기지만, 만일 그 시점에서 아브라함이 하갈을 쫓아가 데려오고, 자신의 아내 사라에게 자신의 편애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하갈에게는 사라의 질투를 용서하라고 부탁했더라면 이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스마엘과 이삭이 함께 살게 됨으로써 두 종교 간의 분란의 씨앗도 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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