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신의 위대한 질문②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인간사회의 갈등과 그것이 초래하는 불가피한 비극의 원형이다.
인간은 카인이 저지른 죄악을 극복하고, '동생을 지키는 자’로서 도덕적 각성에 이를 수 있는가?
성서에 등장하는 신의 첫 번째 질문은 ‘모든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숨은 아담에게 던진 “네가 어디 있느냐?”였고, 두 번째 질문은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이다.
아담과 이브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자식을 낳았다. 그 후에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고 숨어있을 때, 신은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창세기 4:9)고 묻는다.
신의 두 번째 질문은 첫 질문과 비슷해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 질문은 첫 인간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지만, 두 번째 질문은 그 장소에 없는 제 3의 인물인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이다.
그러자 카인은 “나는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오히려 신에게 되묻는다.
전지전능하신 신은 뻔히 아벨이 살해당한 줄 알면서도 왜 카인에게 이런 질문을 했을까? 이 질문의 심연에는 신의 첫 질문, “네가 어디 있느냐?”의 답이 숨어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곧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마찬가지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아담’이라고 했다. ‘아담’은 원래 ‘붉은 흙’이란 의미를 가진 ‘아다마’에서 유래했다. ‘붉은 흙’은 지중해 지역의 전형적인 흙 형태로 ‘테라로사(terra rossa)’라고 불린다. 인간은 사실 본질적으로 흙이다.
인간은 원래 흙이었고 잠시 숨이 붙어있는 동안 지상에 살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이기에,고대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붉은 흙’, 즉 ‘아담’이라 불렀다. 로마인도 유사하게 인간을 흙으로 보았다. 라틴어‘호모 (homo)’는 ‘흙’이란 의미를 지닌 ‘후무스(humus)’에서 왔다. 인간의 유한함을 드러내는 단어로 ‘인문학’이라는 단어 ‘휴매너티즈(humanities)’도 같은 어원을 지닌 파생어이다. ‘인문학’이란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고 무한함을 지향하는 노력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안스로포스’라고 불렀다. ‘안스로포스’의 어원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마도 ‘(하늘을) 보는 존재’라는 의미로 추정된다. 이 용어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땅을 보는 존재’이지만, ‘인간만이 동료 인간들과 하늘을 보는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와 유사하게 고대 인도인들은 인간을 ‘마누(manuh)’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만(man)’에서 파생한 단어로 인간만이 지적인 능력을 지닌 ‘생각하는 동물’이다.
물론, 영어 ‘man’이나 독일어 ‘Mann’도 이 단어에서 파생했다.이 전통에서 보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징을 ‘생각’이라 상정한 것 같다. 서양의 인간 개념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그 사람의 본질이 결정된다고 생각하여 ‘인간(人間)’이라고 명명하였다. ‘인간’이란 단어에서는 ‘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간(間)’이 더 중요하다. 서양에선 ‘인(人)’에 집중하여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였다면, 동양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인 ‘간(間)’에 집중하였다.
이 개념은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에서도 드러나듯이 ‘인간’이란 다른 사람과 주변 환경과의 관계성에서 그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여긴다. 이 인간의 ‘관계성’을 가장 명확히 드러낸 이야기가 창세기에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이야기다.
최초의 살인사건, 인류 비극의 원형
아담과 이브가 ‘모든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나온 후 '에덴동산의 동쪽’에 정착했다. 창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동산의 동쪽에 그룹(cherub 천사)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에덴의 동쪽은 ‘놋의땅’이라고 창세기 4장 16절은 전한다.
‘놋’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방황하다’라는 의미를 지녀 카인의 유목생활을 설명하는 지명이다. 인류의 첫 커플, 아담과 이브 사이에 태어난 카인과 아벨은 신을 경외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카인과 아벨의 살인사건의 발단이 신께 정성을 바치는 예배에서 시작했다는 점이 놀라우면서도 비극적이다. 성서는 인간사회의 원초적인 비극을 형제 간의 갈등으로 설명한다. 사실 거의 모든 신화와 문학작품의 갈등은 형제 사이에서 시작한다.
이것을 ‘형제살해(fratricide)’라고 한다. 카인과 아벨 간의 갈등과 살인사건과 같은 형제살해는 문명과 문화의 창건신화에 종종 등장한다. 고대 로마 도시의 건립과 관계된 신화에서도 쌍둥이 형제인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신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경쟁하다,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살해하고 로마의 첫 번째 왕이 된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흔히 최초의 살인사건으로 기억되며, 인간사회의 갈등과 그것이 초래하는 불가피한 비극의 원형이라고 알려져 왔다. 아담과 이브의 첫 아들인 카인은 아버지 아담의 가계를 이어받아 농부가 되었고, 둘째 아들인 아벨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여 양을 치는 유목민이 되었다.
카인과 아벨의 갈등은 서로간의 질시가 아니라,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통해 표출되었다. 신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아벨의 제물만 받았다. 카인은 신이 자신의 제물을 거절한 사실을 알고 분노에 휩싸인다.
사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은 이들의 이름에서 그 실마리가 찾아진다. 카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까인(Qayin)’은 ‘획득하다,장사하다’라는 의미다. 카인의 직업 ‘농부’는 인간이 문명사회로 나가는 첫 단계를 의미한다. 빙하기를 마친 후, 인간은 기원전 1만년에 처음으로 사냥-채집경제에서 농업-정착생활로 전환한다.
학자들은 이 사건을 '신석기 혁명’이라 부른다. 인간들은 정착-농업생활을 통해 마을과 도시를 만들고, 수로개발과 음식저장 기술을 통해 잉여 농산물을 배출한다. 비로소 인간들은 정교한 노동 분화와 장거리 무역, 계급사회, 중앙집권적 정치형태를 이루어 문명사회로 크게 나아간다. 그 결과 인간은 메소포타미아(지금의 이라크)에서 기원전 3300년에, 그리고 이집트에서 기원전 3100년에 정교한 문자와 도시문명을 이루게 되었다.
아벨이란 이름은 카인-아벨 이야기의 중심이 카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아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헤벨(Hebel)’로, 그 의미는 ‘숨, 수증기, 헛됨’이란 의미이다. 누가 자식의 이름을 ‘헛됨-금방 사라지는 존재’로 짓겠는가? ‘헤벨’이란 단어가 가장 잘 드러난 구절은 <전도서> 1장 2절이다.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이 문장에서 ‘헛되다’라는 단어가 바로 ‘헤벨’이며, 곧 아벨의 이름이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쓴 성서 기록자는 맨 처음부터 ‘아벨’은 곧 사라질, 전체 이야기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소개했다고 봐야 한다. 성서 기록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는지는 카인의 행동과 말을 통해 추적해 봐야 한다.
카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신이 자신의 제물을 기쁘게 받지 않아 분노에 차 있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면,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원한다. 특히 한국사회 경조사는 안 보이는 약속, 즉 상호간의 보답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선물을 할 때 받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 선물에는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에, 되돌려 받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그 선물의 본래 취지를 퇴색시킨다.
문제는 카인이 자신의 제물을 신에게 받아들이지 않자 화가 났다는 사실이다. 카인은 신에게 감사의 표시로 제물을 바쳤다기보다 신이 자신의 제물을 받나 혹은 받지 않나 시험했었는지 모른다. 그는 너무 화가 나 얼굴색까지 변했다.
신은 마치 부모처럼 카인의 마음을 읽었다. 신은 카인에게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색이 변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 그리고 곧 이어,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라고 신은 말한다.
이 문장에서 드디어 ‘죄’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죄’는 나의 영혼의 문에서 웅크려 있는 괴물과 같다.우리가 흔히 ‘죄’라 하면, 십계명과 같은 조항을 어길때 짓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생활을 조화롭게 하려고 도덕적으로 그리고 양심적으로 지켜야 할 관습을 지키지 못해도 죄를 짓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죄가 있다.
‘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하타’인데, 그 본래의 의미는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다”이다. 여기서 길이란, 개인이 신에게 부여 받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의미한다. 고대 셈족은 ‘죄’란 신이 개인에게 맡긴 그 길을 알지도 못하고, 추구도 하지 않을 때 짓는다고 했다. 그 길로 들어서는 상태, 신과 이웃과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게 ‘샬롬(히브리어)’ 혹은 ‘살람(아랍어)’이다.
신은 카인의 불만족이 그의 삶을 파괴하리란 사실을 알았다. 카인이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죄가 그를 지배할 것이라고 말한다. 카인은 신의 충고를 들으려하지 않는다.
카인의 욕망인 죄가 그를 사로잡아, 아벨을 살해하려 결심한다. 카인은 아벨을 자신의 삶의 터전인 들로 데리고 나가 살해한다.
‘에덴의 동쪽’이 은유하는 원죄와 구원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존 스타인벡(1902~68)이라는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덕분에 다시알려졌다. 그의 <에덴의 동쪽>이라는 소설은 제임스딘이 주연을 맡은 <에덴의 동쪽>이란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하다. 존 스타인벡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살리나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공황을 격은 1930년대의 사회현실주의 작가다.
그의 작품 <분노의 포도>(1939)는 점점 산업화되고 기계화를 통해 일자리를 잃은 이주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통해, 자본주의 모순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만년의 대작인<에덴의 동쪽>(1962년)을 통하여 인간의 원죄와 그 짐을 지고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묘사했다. 그는 <에덴의 동쪽>에서 “내 평생의 모든 것은 이 작품을 위한 연습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노벨상을 수상한다.
<에덴의 동쪽>의 주제는 선과 악의 대결이다. 이 책의 첫 장면부터 스타인벡은 경치를 통해 상징적으로 선과 악을 묘사한다. 캘리포니아 북쪽에 있는 에덴동산과 같은 살리나스 계곡. 이 계곡의 동쪽은 햇빛이 잘드는 가빌란 산맥이며 서쪽은 어두운 산타 루치아 산맥이다.
선악의 상징이 지형보다는 인물에 미묘하게 숨어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아담 트라스크이다. 사무엘 해밀턴과 그의 아내 리사는 아일랜드에서 온 이주민이다. 이들은 살리나스 계곡에 자리를 잡고 불모지를 개척하며 9명의 자녀를 키운다. 해밀턴의 자녀들이 성장하여, 각자 자기 삶을 찾아 나갈 때, 아담(Adam) 트라스크라는 부자가 살리나스 계곡의 가장 좋은 목장을 구입한다. 그는 코네티컷의 한 농장에서 배 다른 동생인 찰스(Charles)의 학대를 견디며 살아 남았다.
여기에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녀의 이름은 캐씨(Cathy) 에이메스다. 캐씨는 ‘잘못된 영혼’의 소유자다. 그녀는 냉담하고, 잔인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다.
캐씨는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부모를 죽이고 집을 떠난다. 그녀는 후에 포주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은 다음 아담과 찰스가 사는 집의 대문에 쓰러져 있는다.
찰스는 그녀를 거절하지만, 아담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를 치유하고, 사랑하고 결혼한다. 스타인벡은 주인공의 이름을 통해, 선과 악을 표시한다. 그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선의 상징을 아벨(Abel)로, 악의 상징을 카인(Cain)으로 해석하여, 소설인물에서 A로 시작하는 인물은 선의 상징으로, C로 시작하는 인물은 악의상징으로 표시한다. 그러므로 아담(Adam)은 선의 상징으로, 찰스(Charles)와 캐씨(Cathy)는 악의 상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새로 결혼한 부자청년 아담은 살리나스 계곡의 해밀턴 목장근처에 임신한 캐씨와 함께 도착한다. 아담에겐 완벽해 보이는 삶이었다. 그러나 캐씨는 캘리포니아 농촌에 남아 아내로, 어머니로 살기를 혐오한다. 캐씨는 쌍둥이를 출산한 뒤, 남편 아담의 어깨에 총을 쏘고 도망가버린다. 어깨에 총상을 입은 아담은 육체적 건강을 회복하지만 심한 우울증에 빠져든다.
그는 중국요리사 리와 이웃 사무엘 해밀턴의 도움으로 쌍둥이를 키운다.아담은 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리, 아담, 그리고 사무엘 해밀턴은 종종 모여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논쟁을 한다. 특히 이들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 집중한다. 리는 카인과 아벨이야기가 영어성경에 잘못 번역되었다고 주장한다. 리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자신의 친척들이 고전 히브리어를 2년 동안 공부하여,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히브리원전으로 읽고, 핵심내용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한편 아담의 부인 캐씨는 창녀가 되어 살리나스 도시의 가장 비싼 사창가의 창녀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케이트(Kate)’라고 바꾸고, 그 사창가 여주인을 죽이고 자신이 주인이 된다. 그녀는 남편 아담과 두 아들을 까맣게 잊고 생활한다. 아담의 두 아들, 갈렙(Caleb)과 아론(Aron)도 자신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른다.
아론은 아브라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갈렙과 아론은 자신의 어머니가 실제로 살리나스에 생존해 있다는 소문을 듣지만, 그녀가 케이트인지는 몰랐다. 친절한 이웃 사무엘 해밀턴은 죽고, 아담의 사업은 어려워진다.아론은 존경받는 사업가가 아니라 웃음거리가 된 아버지 아담을 보고 슬퍼한다.
아론과 갈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길을 간다. 갈렙은 성서의 카인처럼 농사에 관련된 일을 하고, 아론은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입학한다. 갈렙은 불안한 성격의 소유자로 모든 사람을 피하고 밤에 도시를 방탕하게 돌아다니다, 우연히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 있고, 그 사창가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카인은 마침내 구원을 찾았는가
갈렙은 사무엘 해밀턴의 아들, 윌 해밀턴과 사업을 시작한다. 돈을 벌어 아버지에게 인정받겠다는 생각이다. 갈렙은 살리나스 계곡에서 나는 콩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식량이 부족한 유럽에 수출하여 큰돈을 벌 생각이었다. 그는 사업에 성공하여 추수감사절에 아버지에게 현금 1만5000달러를 드릴 계획을 세운다. 한편 아론은 추수감사절을 지내려고 대학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아론은 목사가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신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려는 참이었다.
식구들이 추수감사절 식사를 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갈렙이 먼저 칭찬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에게 현금을 드린다. 그러나 아버지 아담은 그 돈을 거절하며 이 돈을 벌겠다고 학대한 농부들에게 돈을 돌려주라고 말한다: “네(갈렙)가 나에게 네 동생(아론)이 가진 것, 자신이 하는 일에 자존심과 그 일을 이루는 과정에 기쁨을 줄 수 있다면, 내가 기뻐할 것이다. 돈, 심지어 깨끗한 돈도 그것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갈렙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자 그 화를 아론에게 돌린다. 갈렙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 아론을 상상하면서, 그를 어머니에게 데리고 간다. 아론은 사창가 여주인인 케이트가 자신들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아론에게 알린다. 케이트는 자기가 버린 자식 아론을 보고 자기 혐오에 빠져 자살한다. 목사가 되려 했던 아론은 충격에 빠져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한다. 아버지 아담은 아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리로부터 듣고 뇌일혈로 쓰러진다. 이 소설은 리가 투병하는 아담에게 갈렙을 용서하라고 애원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아담은 갈렙에게 ‘팀쉘(timshel)’이란 말로 그를 용서한다. ‘팀쉘’ 이란 단어는 스타인벡이 <에덴의 동쪽>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을 담았다. ‘팀쉘’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사무엘, 아담, 그리고 리는 종종 신학적 논쟁을 하곤 했다. 특히 창세기 4장에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신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대화를 통해 찾아내려 시도하였다. 이들은 10년 전에도 이 이야기의 핵심을 찾지못했고, 갈렙과 아벨이 11살이 되었을 때, 이 이야기를 다시 언급한다. 카인은 영원히 저주를 받았는가? 아니면, 마침내 구원을 찾았는가?
리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 네 명의 중국 학자와 랍비와 함께 이 이야기를 토론했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신은 카인이 죄를 극복하게 된다고 약속 했다는 해석과, 신은 카인이 죄를 극복하라고 명령했다는 두 가지 해석을 상기한다. 리는 히브리 단어 ‘팀쉘(timshel)’은 실제로는 “너는 …할지도 모른다/ 할 수 있다”란 의미라고 주장한다. 리는 ‘팀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드러내는 단어이며,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자유를 신에게서 부여받은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카인은 선과 악 중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택일 할 수 있는 자유를 신으로부터 부여 받았다는 것이다.
‘팀쉘’은 인간에게 그의 과거가 어떻든 그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 희망과 구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촉구한다. 어느 누구도 부모의 삶의 영향으로 악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아론이 전쟁에서 전사한 후, 갈렙은 인간의 사악함을 믿고, 그렇게 살고 있지만, 아담은 손을 들어, 갈렙을 축복한 후, 히브리 단어 ‘팀쉘’을 말한다. 창녀의 자식인 갈렙은 ‘팀쉘’의 심층적이며 강력한 상징, 즉 자신의 도덕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가 있음을 확인한다.
사실 창세기 4장 7절 마지막에 등장하는 히브리어 문장은 ‘팀쉘’이 아니라 ‘팀숄’이다. 전체 문장은 히브리어로 ‘워 아타 팀숄 보’이다. ‘팀숄’의 의미도 <에덴의 동쪽>에서 리의 말을 통해 해석된 “너는 …할지도 모른다/ 할수 있다”가 아니라, “너는 그것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다. 인간이 자신의 미래를 절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의미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팀쉘이란 인간의 삶은 개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이기적인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이타적인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단어이다. 창세기 4장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자신의 동생을 살해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있는 카인에게 신은 질문한다. 성서에 등장하는 신의 첫 질문과 유사하지만, 내용은 다르다.
신이 아담에게 한 첫 질문, “네가 어디에 있느냐?”(히브리어로 ‘아에카’)에서 신이 카인에게 물은 신의 두 번째 질문은 “네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히브리어로 ‘아에카 아벨, 아헤카’)로 변했다.
에덴의 동쪽에 거주하기 시작한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점은 내 존재의 위상뿐만 아니라, 내 주위사람, 그것이 동생이던 친구이던, 이웃이던,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카인은 퉁명스럽게 “저는 모릅니다.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오바마의 명연설, “나는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신의 두 번째 질문에 누구보다도 설득력 있게 대답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다. 2004년 7월 26~29일까지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톤에 있는 플리트 센터에서는 대선에 출마한 민주당 존 케리 상원의원을 지명하려는 민주당원 모임이 있었다. 존 케리 의원은 당시 무명에 가까운 한 인물에게 기조연설을 맡긴다.
그는 일리노이주 민주당 상원의원에 출마한 시카고 출신 케냐 이민자 2세인 버락 오바마였다. 오바마는 하와이 호노룰루에서 케냐 이민자 아버지와 캔사스 출신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바마의 연설은 감동 그 자체였다.
이 연설은 미국 국민 모두를 감동시켰다. 그는 일리노이주로 돌아가서 재직 중인 공화당 상원인 알란 케이스를 물리치고 민주당 상원의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4년 후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나는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오바마는 다음과 같이 연설을 시작한다.
“미국의 중심이자, 링컨의 땅인 위대한 일리노이주를 대신하여 제가 여러분에게 이처럼 중요한 모임에서 연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아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특별히 저에게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이 연단에 서있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는 케냐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외국학생입니다. 그는 염소를 치면서 성장했고 양철판 지붕으로 된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의 아버지, 저의 할아버지는 가정부 요리사였습니다”라고 시작했다.
그는 ‘미국은 하나’라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시카고 남부에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면,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닐지라도,그 사실은 제게 중요합니다. 만일 어딘가에 약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노인이 의료비와 월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녀가 내 할머니가 아닐지라도, 내 삶마저 가난하게 됩니다.
만일 어떤 아랍계 미국인 가족이 변호사 선임도 못한 채 혹은 정당한 법적인 절차 없이 체포당했다면, 그것은 나의 시민권 침해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근본적인 믿음입니다. 나는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나는 내 여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를 작동하게 하는 원리입니다.”
창세기 4장 9절에 등장하는 신의 두 번째 질문,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에 카인이 대답 대신했던 질문인 “내가 제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에 오바마는 대답했다. “나는 내 동생, 내 이웃, 동료 인간을 지키는 자입니다!” 인간이란 자신만을 지키는 자에서, 내 주위사람, 아니 내 행동반경을 넓혀 우리 이사회, 심지어는 오지의 름 모를 사람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21세기가 요구하는 리더는 권모술수로 인기에 영합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라, 내 관심의 영역을 넓혀, 나와 상관없는 사람에게까지 내 도움의 손길을 펼 수 있는 마음과 행동의 소유자여야 한다.
오바마는 이 중요한 연설을 준비하면서, 인간이 해야 할 도리를 경전인 성서에서 발굴하여, 전 미국을 감동시켰다. 리더는 경전과 고전을 즐겨 읽고 묵상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발견한 혜안을 감동적으로 설득력 있게 국민에게 호소해야 한다. 우리는 “나는 내동생을 지키는 자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감동적으로 우리 모두를 이끌 리더가 더욱 간절하다. ‘팀쉘’의 주사위는 우리 각자에게도 던져졌다.
지나보면 순간을 사는 우리들, 우리는 ‘나만, 내 형제만,내 주위사람만’ 지키는 자인지, 아니면 우리사회, 아니 글로벌 공동체 안에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지키는 자인지 생각해보자.
신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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