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노장자

莊子의 幻想-그가 꿈꾸는 無何有之鄕

rainbow3 2019. 10. 10. 11:14


莊子의 幻想-그가 꿈꾸는 無何有之鄕

 

윤지원(육사)* ·

김원명(한국외대)** 

 

[한글 요약]

 

莊子가 살았던 戰國時代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였다. 각 국의 통치자들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 전쟁에 몰두하였고, 시체가 늪지의 풀처럼 나라 전체에 깔려 있어 백성들은 어느 곳에도 발붙일 곳이 없었다. 이러한 비참한 현실은 莊子로 하여금 현실을 초월한 이상세계인 ‘無何有之鄕’을 꿈꾸게 하였다.

 

莊子의 ‘無何有之鄕’은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일상적 自我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無何有之鄕’을 갈망하는 현실 인간의 모습을 곤이라는 물고기에 비유한다.

곤은 북쪽바다에 사는 물고기로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어느 날 곤은 힘차게 날아 올라 길이가 몇천리나 되는 붕이라는 새가 되어 남쪽바다로 날아간다. 현실의 부정을 통하여 鯤이라는 물고기는 鵬이라는 새로 다시 태어난다. 물고기에서 새로 변한다는 것은 인간의 질적 전환이며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일상적 自我를 넘어 선 새로운 自我의 구성이다. 이는 어떠한 목적의식으로부터도 해방된 초월적 自我의 실현이며, ‘無何有之鄕’으로 향한 여정의 시작이다.

 

본 논문은 莊子가 꿈꾸는 ‘無何有之鄕’에 대한 고찰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먼저人間의 實存的 限界狀況과 그 근원인 成心에 대하여 분석하고, 成心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본질적인 拘束의 解放가능성과 그 방법에 대하여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無何有之鄕’ 의 意味에 대하여 고찰할 것이다.

 

주제분야 : 中國哲學, 先秦道家, 心論
주 제 어 : 莊子, 無何有之鄕, 成心, 自我, 解放

 

* 제1저자
** 교신저자 

 

1. 莊子의 幻想

 

블로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을 기대하고 희망하며 지향하는 것”1) 이 인간 의식의 기본 형태라고 말한다. 이상세계에 대한 환상은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으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고 희망하며 이를 현실화 시키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때문에 이상세계의 문제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다루어졌다.

 

이상세계는 왜곡되지 않은 인간다운 삶의 모습을 통해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 주기도 하고, 기존 현실을 비판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며,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역동성과 변혁적 의식을 고취시켜 주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상세계에 대한 열망은 인간의 본질적 사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莊子가 살았던 戰國時代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였다.2) 각 국의 통치자들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 전쟁에 몰두하였고, 시체가 늪지의 풀처럼 나라 전체에 깔려 있어 백성들은 어느 곳에도 발붙일 곳이 없었다.3) 이러한 비참한 현실은 莊子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강한 회의와 부정을 가지게 하였고, 그로 하여금 현실을 초월한 이상세계를 열망하게 하였다.

어려운 난세의 삶 속에서 인간은 누구나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莊子는 자신이 직면한 현실 속에서 어떠한 세상을 꿈꾸었을까? 그가 꿈꾸었던 세계는 ‘無何有之鄕’이다.

莊子는 ‘無何有之鄕’을 통해 현실 속 개별적 인간이 존재적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1) E. Bloch, Das Prinzip Hoffnung I, Suhrkamp, 1977, p. 5.
2) “춘추시대에는 아직 염치의 덕목이 살아있었지만 전국시대에는 극도의 몰염치한 타락상이 나타남으로써 전국시대가 한층 더 혼란하였다.” 劉向, 『戰國策』, 上海古籍出版社, 下冊, 1990, pp. 1195∼1198. 顧炎武역시 그의 『日知錄』에서 “춘추시대에는 오히려 예의와 신의를 존숭해야 한다는 말이라도 있었지만 전국시대에는 예의와 신의에 대한 말을 하는 것조차 끊어져 버렸다”라고 이야기 하며 戰國時代의 시대상이 春秋時代와 비교해볼 때 더욱 암울하고 참담하였다고 말한다.
3) 『莊子∙人間世』 “死者以國量乎澤若蕉, 民其無如矣” 본 고에서 인용하는『莊子』의 원문 및 주석은 郭庆潘의 『庄子集释』(北京:中華書局,1961年)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陳鼓應의 『莊子今注今譯』(台北: 商務印書館, 1967年)과 曹礎基『庄子淺注』(北京: 中華書局, 1982年)를 참고 하였다. 이후 편명만을 밝힌다. 

 

莊子는 말한다.

 

“물러가라. 넌 야비한 인간이로구나. 얼마나 불쾌한 질문이냐. 난 지금 조물주와 벗이 되려 하고 있다.

싫증이 나면 다시 아득히 높이 나는 새를 타고 이 세계 밖으로 나아가 아무것도 없는 곳(無何有之鄕)에서 노닐며 끝없이 넓은 들판에서 살려 한다.

그런데 너는 어찌 천하를 다스리는 일 따위로 나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는가.”4)

4) 『莊子∙應帝王』

“無名人曰: 去! 汝鄙人也, 何問之不豫也! 予方將與造物者爲人,

厭, 則又乘夫莽眇之鳥,以出六極之外, 而遊無何有之鄕, 以處壙垠之野.

汝又何帠以治天下感予之心爲?”

 

莊子가 말하는 無何有之鄕은 삶과 죽음, 잘나고 못난 것이 구별되지 않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일상적 自我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無何有之鄕을 갈망하는 현실 인간의 모습을 곤5)이라는 물고기에 비유한다. 곤은 북쪽바다에 사는 물고기로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어느 날 곤은 힘차게 날아올라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 붕이라는 새가 되어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6)

곤이 살아가는 배경이 되는 북쪽 바다는 인간이 처한 현실의 상황으로 존재구속의 공간이며, 여기서 곤은 개별적 인간의 존재방식으로서 존재의 구속성을 상징한다. 곤은 붕이되어 북명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자유롭게 난다. 하늘은 바다와 달리 자유를 의미한다. 하늘은 무한하여 얽매임 없이, 걸림 없이 날 수 있는 곳이다. 거대한 새 붕은 자유로이 남쪽으로 날아간다. 북쪽바다에 살고 있는 곤에게 남쪽 바다는 희망의 상징이다. 때문에 곤은 현실의 존재구속의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비상을 시작한다.7)

 

중국역사상 가장 혼란한 戰國時期를 살았던 莊子에게 이상적인 삶은 ‘無爲自然’을 통한 온전한 生의 추구였다. 그는 이러한 삶을 살아갈 이상적 세계의 모범으로 ‘至德之世’와 ‘無何有之鄕’을 제시한다.

至德之世는 聖人에 의해 無爲之治가 이루어지는 理想社會를, ‘無何有之鄕’은 일상적 自我의 해방을 통해 도달
할 수 있는 道의 世界를 의미한다.

본 논문은 莊子가 꿈꾸는 ‘無何有之鄕’에 대한 고찰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먼저 人間의 實存的限界狀況과 그 근원인 成心에 대하여 분석하고, 成心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본질적인 구속의 해방 가능성과 그 방법에 대하여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無何有之鄕’의 意味에 대하여 고찰할 것이다.

 

5) 段玉裁는 鯤을 ‘물고기로 태어나기 이전의 것, 즉 魚卵’이라고 보았고 김충렬은 鯤은 본래 고기새끼인데 장자의 입을 통해 이것이 자라서 더없이 크게 된 것 이라고 말한다. 『중국철학산고1』, 온누리, p. 185.
6)『莊子∙逍遙遊』 “北冥有魚,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은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상징한다.
7) 현실의 부정을 통하여 鯤이라는 물고기는 이라는 새로 다시 태어난다. 물고기에서 새로 변한다는 것은 인간의 질적 전환이며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일상적 自我를 넘어선 새로운 自我의 구성이다. 이는 어떠한 목적의식으로부터도 해방된 초월적 自我의 실현이며, 無何有之鄕으로 향한 여정의 시작이다. 

 

2. 人間의 實存的限界狀況

 

莊子에게 있어 인간은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물들 가운데 하나이다.8) 따라서 ‘自然’9)이라는 세계의 본질적 존재방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 인간은 다른 존재와 질적 차별성을 지니지 않는다.

氣를 공통의 운동인으로 삼는 만물이라는 범주에서 보면 인간은 세계를 구성하는 다른 모든 사물들과 아무런 간극이 없는 존재이며10), 때문에 莊子의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자기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만물이 만들어내는 질서 속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莊子에게 있어 인간의 이러한 존재론적 지위는 무조건 적이다.11)

 

문제는 인간의 삶이 근원적으로 세계의 통일질서이자 만물의 존재방식인 ‘自然’을 역행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莊子에게 있어 세계가 드러내는 질서인 ‘自然’은 완벽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원인적인 질서를 구성하는 세계 내 사태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그 질서와 괴리되고자 하는 내적 경향성을 지닌 이중적인 존재이다. 만약 세계 내에서 진행되는 특정 사태가 그 질서를 손상시킨다면 그것은 당연히 부정적인 사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로 인간이 그 부정적 사태인 것이다.

 

8) 『莊子∙秋水』 “號物之數謂之萬. 人處一焉.”
9) 莊子가 이야기 하는 自然은 본연한 세계의 상태를 형용한 ‘스스로 그러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自然은 인간의 의식에 대상화되기 전의 세계 자신이 지닌 존재 상태를 형용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어떤 의도나 목적 없이 순수하게 존재하는 無爲의 세계이다.
10) 『莊子 齊物論』 “道通爲一”,

『莊子 知北遊』 “通天下一氣”

萬物의 有形的인 形體의 본질은 無形의 氣이며 萬物은 흩어져 無形의 순수한 一氣의 상태로 돌아간다. 道는 이러한 氣와 통한다. 때문에 萬物은 道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의 道이며, 또한 하나의 道는 萬物이다. 莊子는 在宥편에서 道와 物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物物者之非物”.

천지 만물의 생성은 끝없는 계열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시원을 소급할 때 무한히 반복되게 된다.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도(物物者)는 이러한 物의 생성과 소멸의 고리에서 벗어나 있는 非物이다. 때문에 道는 천지 만물에 사이가 없이(無際) 간여할 수 있다.
11) 『莊子∙大宗師』 “今大冶鑄金,金踊躍曰: 我且必爲鏌鋣, 大冶必以爲不祥之金. 今一犯人之形, 而曰:人耳人耳,夫造化者必以爲不祥之人. 今一以天地爲大鑪, 以造化爲大冶, 惡乎往而不可哉! 成然寐,遽然覺.”

인간존재는 조화자에 의해 파생된 유한자이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생명의 기초이며 생명의 원리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모습을 실현하는 것이다. 생명체로서 인간의 기초는 생명의 유지와 지속이며 때문에 중요한 것은 自然의 질서 속에서 참된 생명력을 회복 보존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부정적이며 존재구속적일 수밖에 없을까?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莊子는 그 원인을 人爲12)에서 찾고 있다.

12) 人爲는 인간의 행위를 이야기 하며 ‘自然’과 對比되는 개념으로 제한된 成心으로 인한 行爲를 가리킨다. 

 

莊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은 발굽이 있어 서리나 눈을 밟을수 있고, 털이있어 바람이나 추위를 막을수 있다. 마음대로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며 깡충거리고 뛰논다. 이것이 말의본성이다.

.....

내가 좋은 말을 만들겠다고 하여 말의 털을 지지고 깎으며 발굽을 깎아 내고 인두를 대고 하여, 굴레와 다리줄로 묶어 늘여 놓고 구유와 마판을 만들어 나란히 모아둔다. 이래서 말의 2,3할은 죽는다.

먹이를 주지 않고 물도 안 준 채 달음박질을 시키고 명령대로 잘 움직이게 만들며, 앞에는 재갈과 가슴 받이를 달고 달리고 뒤에는 채찍의 위협이 따른다. 이래서야 말의 반수는 죽고 만다.”13)

13) 『莊子∙馬蹄』

“馬,蹄可以踐霜雪, 毛可以禦風寒,齕草飮水, 翹足而陸,此馬之眞性也.

雖有義臺路寢,無所用之. 及至伯樂, 曰:

我善治馬. 燒之,剔之,刻之, 雒之, 連之以羈馽,編之以皁棧, 馬之死者十二三矣;

飢之, 渴之馳之, 驟之, 整之, 齊之, 前有橛飾之患, 而後有鞭策之威, 而馬之死者已過半矣.” 

 

莊子는 생명의 본질이 상실되는 원인을 말을 조련시키는 행위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自然상태의 말은 자신의 고유한 생명을 자연스럽게 유지하면서 살아가지만 인간의 人爲가 부여되면서부터 자신의 본래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만다. 아무리 말을 잘 조련하는 伯樂이라도 말의 생명을 억압하지 않고는 말을 조련할 수 없다. 즉 말을 조련한다는 것은 人爲로서 말의 본래의 생명을 파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人爲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앞의 인간의 내적 경향성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人爲의 문제를 발생시키는 진원지는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14) 자연적 생명을 구속하는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더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莊子가 주목한 것은 이 부분이다. 莊子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이 생겨나면 분별지15)가 생겨나고, 이 분별지에 의해 서로 다른 2종류의 마음이 생겨난다.
첫 번째는 물욕에 의하여 발생하게 되는 주관 인식의 마음16)이며, 두 번째는 본연의 마음으로서 常心이다.

常心은 虛靜하여 일체의 사려나 감각지 등이 들어올 수 없는 마음으로 하늘이 본래부터 품부한 그대로를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마음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본래부터 두 종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은 하나인데 그것이 虛靜한 本心이 될 수도 있고 외물에 의해 어지럽혀진, 本心의 상태를 잃은 마음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莊子에게 있어 마음은 그 자체로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의 필연적 질서체계와 갈등을 일으키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자신의 부정적인 경향성을 스스로 극복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人爲의 원인은 주관 인식의 마음이다.

莊子는 자신들의 가치에 얽매여 있는 주관 인식의 마음을 成心17)이라 부른다.

 

14)『莊子∙在宥』 “人心排下而進上, 上下囚殺, 淖約柔乎剛疆. 廉劌彫琢, 其熱焦火, 其寒凝氷. 其疾俛仰之間而再撫四海之外, 其居也淵而靜, 其動也懸而天. 僨驕而不可係者, 其唯人心乎!”

莊子는 마음을 흔들리기 쉽고 다루기 어려운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15) 莊子는 지식의 성립과 관련하여 分別知는 감각기관과 사유기관에 의하여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16) 주관 인식의 마음은 功利를 추구하며, 是非와 善惡을 가르고 각자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며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고 생각하는 등 是非와 善惡 그리고 美醜에 관한 논쟁의 늪에 빠지게 된다. 때문에 주관인식으로 가려진 마음의 작용은 사람을 어지럽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 역시 혼란스럽게 하며 인간의 온전한 삶을 방해하는 근원이 된다.

17) ‘成心’은 주석가에 따라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해석용례를 가진다. 郭象은 “마음이 충분히 일신의 작용을 제어하는 것을 成心이라한다.(夫心之足以制一身之用者,謂之成心)”라고 말하며 긍정적으로 성심을 해석하고 있다. 이에 반해 성현영은 “一家의 편견에 사로잡힌 것을 成心이라 한다.(執一家之偏見者,謂之成心)”고 이야기 하며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정세근 『장자의 심론-성심(成心)설을 중심으로』 참조 

 

莊子는 말한다.

 

"무릇 자기의 成心에 근거하여 긍정과 부정의 표준을 삼는다면 누구인들 기준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만사 만물의 변화하는 이치를 알아서 마음에 체득한 현자에게만 있겠는가?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있을 것이다. 成心이 없어도 긍정과 부정의 논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오늘 월나라로 떠나 어제 도착했다’라고 하는 언설과 마찬가지이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된다.18)"

18)『莊子∙齊物論』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

愚者與有焉. 未成乎心而有是非, 是今日適越而昔至也. 是以無有為有. 無有為有”

 

여기서 成心19)이란 우리의 판단 이전에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일정한 신념 체계 또는 인식 체계를 의미한다. 사물 고유의 속성으로 본래부터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판단하는 본질적인 是非판단에는 이미 그렇게 판단하는 자의 입장이나 전망이 개입되어 있다. 때문에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고서도 是非가 만물에 본래부터 고유하게 있다고 하는 것은 오늘 떠나 어제 도착했다는 말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을 있다고 우기는 터무니없는 일이 된다.

 

19) 莊子는 외물과 감정에 대한 지나친 욕망과 집착 때문에 成心이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윤지원, 『선진도가의 마음공부』 p. 354 디지털정책학회 11권 8호 2013

 

莊子에 의하면 人爲의 원인이 되는 成心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첫째 局限性이다. 成心은 시간 지역 교육에 의해 형성된 마음이기 때문에 환경의 제한을 벗어날 수 없다.

 

“우물 안 개구리와 바다에 대하여 토론할 수 없는 것은 지역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며, 여름벌레와 더불어 겨울철의 얼음에 대하여 토론할 수 없는 것은 시절에 구애되어 있기 때문이며, 한 부분만을 아는 선비와 더불어 道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까닭은 교육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20)

20) 『莊子∙秋水』 “井不可以語於海者, 拘於虛也; 夏蟲不可以語於氷者, 篤於時也; 曲士不可以語於道者, 束於敎也.”

 

莊子는 우물 안 개구리를 예로 들어 인간의 成心이 특정 시대와 지역 그리고 교육에 의하여 형성되며, 그 의식은 외적 조건에 의존하고 제한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21) 이 局限性때문에 인간은 大道를 보지 못하고 자기가 보고 듣고 아는 세계만이 유일하게 옳은 세계라 고집하며 是非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21) 莊子는 徐無鬼편에서 濡需者와 暖姝를 등장시켜 공간과 교육에 얽매인 모습을 묘사한다.
濡需란 언제 죽을 줄도 모르고 자신이 붙어사는 돼지 몸 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그곳이 온 세상인 줄만 아닌 이(蝨)를 이야기 한다. 난주란 자신이 모르는 앎의 세계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받은 교육에 만족하는 이를 말한다. 

 

둘째는 外馳性22)이다. 外馳는 외부 사물에 이끌려 치달려 가는 것을 의미하는 데 莊子는 이를 ‘馳’,또는 ‘坐馳’23)라고 쓰고 있다. 마음이 坐馳한다는 것은 마치 고삐 풀린 말이 날뛰듯이 외물을 쫓아다니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莊子는 이러한 마음의 外馳를 슬퍼하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22)『莊子∙齊物論』 “其寐也魂交, 其覺也形開, 與接爲搆....其形化,其心與之然,可不謂大哀乎?”
23) 坐馳란 莊子가 心齊의 방법을 통해 얻게 되는 至人의 마음을 말하는 대목에서 등장하는 말이다. 莊子는 至人의 마음의 상태를 虛와 靜으로 묘사하고 이러한 至人의 마음과 대비되는 衆人의 마음을 坐馳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成玄英은 坐馳를 몸은 앉아 있으나 마음은 치달리는 것이라 하고 林希逸은 몸은 이곳에 있으나 마음은 밖으로 내닫는 것이라 하며, 章太炎은 멈추어 있어야 하는데도 멈추지 못하고 천리사방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 보아 마음은 고요히 멈춰 있는 것이 본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心은 물과 서로 거스르고 서로 닳아지며 말 달리듯 나아가나, 그것을 그치게 할 수 없으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24)

24) 『莊子∙齊物論』 “與物相刃相靡, 其行進如馳, 而莫之能止, 不亦悲乎!” 

 

세 번째는 片面性이다. 莊子는 말한다.

 

“사물은 저것(彼)이 아님이 없고, 사물은 이것(此)이 아님이 없다. 그것(彼)으로부터는 보이지 않으니, 자기가 아는 것만 알게 된다.”25)

25)『莊子∙齊物論』 “物无非彼,物无非是. 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彼此의 판단은 항상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즉 자신이 彼라고 보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신을 此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成心은 항상 자신을 기준으로 하고 자신 쪽에서 상대를 볼 수 있을 뿐이다. 莊子는 片面性을 갖는 成心은 자신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본다(自我觀之)26)고 말한다. 자신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나로부터 보아서는 彼는 항상 彼이고 此는 항상 此이며 是非, 美醜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是非의 기준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는 서로 자신이 옳고 상대방을 그르다고 하며, 상대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한다. 莊子는 이러한 성격을 지닌 成心을 본성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사실 인성론적 측면에서 莊子에게 있어 ‘타고난 그대로의 자연적 본성’이 선하다는 생각은 허구이다. 그것은 자연적 인간 자체가 자기중심적인 편향성으로 너무나 쉽게 기울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후천적인 변화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성향의 한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그 자기 중심적 편향성이 구체화된 결과인 成心의 상태로부터 저절로 해방되기에는 역부족인 존재이다. 해방은 어디까지나 그 成心으로 표상되는 일상적 自我의식의 해소라는 자기 극복 과정을 거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타고난 그대로의 인간의 존재상황은 처음부터 극복되어야 하는 구속이다.27)

 

26)『莊子∙ 齊物論』 “且吾嘗試問乎汝...民濕寢則腰疾偏死,鰌然乎哉? 木處則惴慄恂懼,猿猴然乎哉?....;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蘪鹿見之決驟. 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 自我觀之,仁義之端, 是非之塗, 樊然殽亂, 吾惡能知其辯?.”
27)『莊子.山木』 “何謂人與天一邪? 仲尼曰有人天也. 有天, 亦天也. 人之不能有天, 性也, 聖人晏然體逝而終矣!” 

 

3. 일상적自我의 解放과 그 방법

 

앞서 인간의 존재적 한계의 근원과 그 속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成心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본질적인 구속은, 莊子가 볼 때 인간을 억압하는 내적 진원이며 해체의 대상이다.28) 莊子는 成心을 해체하지 않는 한 일상적 自我로부터의 해방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존재적 한계인 成心의 해체는 가능할까?
莊子는 成心을 인간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때문이라 생각한다. 인간에게 내재된 德은 道가 구체화 된 것으로서 인간뿐 아니라 만물에 갖추어져 있다. 道는 자연계의 전체적 질서이며, 德은 자연계 속의 개체의 생명 원리이다.29) 莊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8) 莊子에게 있어 成心의 극복은 그 목적이 아니다. 그에게 成心의 해체는 일상적 自我를 넘어선 새로운 自我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이는 어떠한 목적의식으로부터도 해방된 초월적 自我의 실현이다. 그리고 이것이 莊子철학의 출발점이다. 莊子는 자연 질서와 인간질서의 괴리문제를 인간의 본성문제로 내면화시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29)『莊子∙庚桑楚』 “道者, 德之欽也; 生者, 德之光也; 性者,生之質也. 性之動,謂之爲; 爲之僞,謂之失.” 

 

"태초에 무가 있었다. 존재하는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

여기서 하나가 생겨났는데, 하나는 있어도 아직 형체가 없었다.  만물은 이 하나를 얻음으로써 생겨나는데 그것을 德이라 한다.

아직 형체는 없지만 구분이 생겨 차례로 만물에 깃들면서 조금도 틈이 없다. 이것을 운명이라 한다.

하나는 유동하여 사물을 낳는데 사물이 이루어져 事理가 생긴다. 이를 형체라고 한다.

형체는 정신을 지키고 각기 고유한 법칙이 있다. 이것을 본성이라 한다. 30)"

30) 『莊子∙天地』

“泰初有无,无有无名;

一之所起,有一而未形. 物得以生, 謂之;

未形者有分, 且然无間, 謂之.;

留動而生物,物成生理. 謂之;

形體保神, 各有儀則, 謂之.”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이름도 없는 것은 道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道에서 생겨난 것이 하나인데 이것은 어떤 것도 나뉘지 않은 미분화상태를 말한다. 만물이 하나가 됨으로써 德이 생겨나는데, 이는 道로부터 나온 것으로 본질적으로 道와 德은 하나이다. 德이 개별적 사물들이 지니는 본성이라면, 道는 만물로 하여금 만물이 되게끔 하는 궁극적인 법칙인 것이다. 즉, 道는 천지만물의 근원이고 德은 개별적인 사물에 내재된 道로서 개별적인 사물의 本性을 의미한다.

 

德이 이미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마음의 思慮작용을 통해 德과 육체의 대립가운데 德에 대한 자각을 얻을 수 있다. 이를 통해 德은 곧 마음의 본성이 된다. 즉 인간에게 내재된 道인 德이 마음의 본성이 되기 때문에 육체를 초월하여 德을 파악함으로서 成心을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물의 근본으로서의 道가 만일 인간 외부에 설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成心의 극복은 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道가 인간에게 내재한 것으로 이해됨으로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역량을 깨달아 道와 합일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지게 된다.

道는 만물의 기원으로서 道로부터 德이 분화하여 인간과 만물 가운데 내재, 그들의 본성이 되고 인간과 만물은 性을 닦아 道와 합일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만물 가운데 一物이므로 物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道를 파악하고 道와 합일될 수 없다.

道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외부로 향하던 관심을 내부로 전환하면 자신의 내부에서 道를 찾는 것이 가능하고, 이 道를 체득하는 경지가 바로 成心을 극복하는 길이 된다. 莊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본성이 잘 닦여지면 본래의 德으로 돌아가고 德이 지극한 데에 이르면 태초의 상태와 같아진다. 태초와 같아지면 공허해지고 공허하면 커진다.”31)

31)『莊子 ·天地』 “性修反德, 德至同於初. 同乃虛,虛乃大.”

 

莊子에 의하면 일상적 自我로부터의 해방은 道와의 합일을 통하여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大宗師에 등장하는 南伯子葵와 女偶의 대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道는 배울 수 있는 것이냐는 南伯子葵의 물음에 자신이卜梁倚라는 사람을 가르쳤던 경험을 들려주며 女偶는 말한다.32)

32) 일상적 自我의 解放이 하위등급의 自我로부터 上位의 自我로 전화해가는 과정의 완성이라는 일반적인 修養論적 담론을 莊子 역시 수용하고 있다. 

 

"나는 가르쳐서 지키게 했는데, 삼일이 지나자 천하를 잊을수 있었소.

이미 천하를 잊게 되자 나는 또 지키게 하였는데, 칠일이 지나자 일체 외부의 것을 잊을 수 있었소.

이미 일체 외부의 것을 잊게 되자 나는 또 지키게 하였는데 구일이 지나자 삶을 잊을 수 있었소.

이미 삶을 잊게 되자 환히 깨칠 수 있었소.

환히 깨치게 되자 절대적인 경지를 볼 수 있었고, 절대적인 경지를 보게 되자 시간적인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시간적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자 죽음도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갈 수 있었소.33)"

33)『莊子·大宗師』

“吾猶告而守之, 參日而候能外天下;

外天下矣,吾又守之, 七日而後能外物;

外物矣, 吾又守之, 九日而後能外生;

外生矣, 而後能朝徹;

朝徹, 而後能見獨; 見獨, 而後能无 古今;

无古今, 而後能入於不死不生.”

 

‘忘’의 관점에서 보면 自我의 解放이란 천하를 잊고 외부의 대상 일체를 잊으며 삶을 잊은 뒤 이루어지는 경지이며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상들에 각기 대응하는 自我의 상태를 순차적으로 폐기시켜 나감으로서 보다 높은 경지로 진입하여야 한다. 여기서 폐기의 대상이 되는 自我는 眞我가 아닌 小我34)를 뜻한다.

 

莊子사상에서 自我는 크게 세 측면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 번째 自我는 자기 중심으로 시비를 판단하는 自我로서 小我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자각성을 특징으로 하는 自我로서 莊子는 이를 靈臺라고 부른다. 비록 靈臺가 의식에 속하기는 하지만 자신을 반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小我와 차별성을 가진다.

마지막 세번째는 莊子가 眞君이라 부르는 진실된 自我이다. 이것은 우주를 관통하는 보편적 自我로서 앞서 小我와 대비되는 大我이다.

 

34) 方東美는 齊物論에 나오는 ‘吾喪我’를 설명하며 自我의 여러 가지 층차에 대하여 설명한다.

 ‘吾喪我’의 ‘喪’은 喪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잊는 것, 즉 ‘忘’을 뜻하며, ‘我’는 眞我가 아닌 ‘小我를 뜻한다. ‘小我’는 다시 3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신체적 自我이고, 둘째는 感官의 활동 및 意識作用이며, 셋째는 自我라는 觀念을 지속시켜 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自我들은 모두 각각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타의 대립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제한되고 부자유스러운 것이다. 때문에 일상적 自我의 해방을 위해서 극복되어야만 한다. 方東美, 『원시유가도가철학』, p. 260∼261. 

 

莊子에게 있어 일상적 自我로부터의 해방은 大我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고 그 방법은 自我가 지니고 있는 주체적 반성능력을 통하여 小我를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35)

莊子는 人間世에서 이를 위한 心齋와 坐忘36)의 體道방법을 孔子와 그의 제자인 顔回의 대화형식을 빌려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35) 박원재 『도가의 이상적 인간상에 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1996, pp. 112∼113.
36) 표현되고 있는 내용에만 국한시킨다면 心齋가 종합적임에 비하여 坐忘은 부분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坐忘은 다만 감성인식과 이성인식을 버리라는 부정적인 주장만 개진할 뿐 心齋에서 보듯이 그 이상의 경지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은 없다.

心齋와 坐忘의 차이에 대하여 馮友蘭은 心齋 心을 無知無慾하게 하여 이른바 虛一而靜에 도달하는 것으로서, 그런 상태에 도달하면 精氣가 집중된다고 보는 宋尹學派의 방법과 동일하다고 본다. 반면에 坐忘 忘자에 중점이 두어져 있고 사물에 대한 일체의 분별을 초월하여 일종의 정신상의 경계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莊子學派의 방법이라 주장한다. 이와는 다르게 湯一介는 心齋와 坐忘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견해에는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다른 것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莊子가 지향하는 세계를 설명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지 앞의 것은 宋尹學派의 것이고 뒤의 것은 莊子學派의 것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는 오히려 이 둘은 모두 인식을 부인하고 일종의 혼돈된 심리상태에 도달하기를 요구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 원문을 살펴보자.

 

“안회가 감히 心齋를 묻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仲尼가 대답했다.

너의 뜻을 專一하게 하고 귀로써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 氣로써 들어라.

귀는 듣는 데에서 그치고 마음은 부합하는 데에서 그쳐야 한다. 氣라는 것은 虛하되 사물을 기다리는 것이다. 오직 道만이 虛를 모은다. 虛라는 것이 곧 心齋이다.”37)

37)『莊子· 人間世』

“回曰:敢問心齋. 仲尼曰:

若一志, 無聽之以耳而聽之以心, 無聽之以心而聽之以氣!

聽止於耳, 心止於符. 氣也者,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虛者,心齋也.

顏回曰: 回之未始得使,實自回也; 得使之也,未始有回也, 可謂虛乎? 夫子曰: 盡矣”

 

虛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心齋라는 공자의 결론에서 보듯이 전체적인 요지는 虛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고 그 출발점은 志에 대한 제어이다. 志는 욕망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의 형태이다. 때문에 그 志를 專一하게 하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욕망충족의 충동을 제어하라는 말이다. 이어서 志를 전일하게 하는 것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莊子는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것은 氣를 통하여 대상과 접촉하기 위해서 이다.

 ‘듣는다’라는 표현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감각기능과 마음의 지각기능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다.

莊子는 왜 氣로 들어야 한다고 말할까? 그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은 단순히 외부로부터 오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고, 마음은 그렇게 감각으로 수용된 정보에 의하여 형성된 관념에 그것을 대조해 조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위에서 ‘듣는다’로 표현된 우리 몸의 감각기관과 마음이라는 지각기관의 활동은 우리의 의식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이들의 활동은 道의 성격에 어긋나는 사태를 초래한다. 때문에 莊子는 우리에게 氣로 들으라고 하는 것이다.38)

 

38) 莊子가 가장 바람직한 知覺의 방법으로 氣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사람이나 사물 모두 하나의 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天下를 관통하는 것은 一氣이기 때문이다. 

 

감각기관과 사려기관의 작용을 중지시킴으로써 이르는 氣의 상태가 곧 虛이다. 여기서 虛는 虛心을 의미하며 이는 成心으로부터 해방된 초월적 自我를 의미한다.

다음 坐忘에 대해 살펴보자.

 

坐忘은 정좌한 상태에서 自我 사회 자연 등 일체의 현상을 잊어버리는 정신의 경지이다. 즉 외물과의 접촉에서 오는 모든 사려 분별과 욕구를 제거하고 잊어 물아의 경계가 없어지는 방법 그것이 坐忘이다.

莊子는 坐忘 역시 顔回와 仲尼의 단계적인 문답을 통해 설명한다. 顔回는 다음과 같이 仁義와 禮樂을 버리고 形體 및 是非의 지식까지도 잊어 결국 坐忘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顔回가 “저는 진보했습니다.”

孔子가 말하기를 “무슨 말이냐?”

顔回가 말하기를 “저는 仁義를 잊었습니다.”

孔子가 말하기를 “괜찮기는 하지만 아직 미흡하다.”

뒷날 다시 만나 顔回가 말하기를 “저는 진보했습니다.”

孔子가 말하기를 “무슨 말이냐?”
顔回가 말하기를“저는 禮樂을잊었습니다.”

孔子가 말하기를“괜찮기는하지만 아직 미흡하다.”

뒷날 다시 만나 顔回가 말하기를 “저는 진보했습니다.”

孔子가 말하기를 “무슨 말이냐?”

顔回가 말하기를 “저는 坐忘했습니다.”

이에 孔子가 놀라 묻기를 “무엇을 坐忘이라 하는가?”

顔回가 말하기를 “손발이나 신체를 잊고, 귀와 눈의 작용을 물리쳐 형체를 떠나고, 지각을 버려 大道에 통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 합니다.”39)

39)『莊子·大宗師』

“顔回曰:回益矣.

仲尼曰:何謂也?

曰:回妄仁義矣.

曰:可矣,猶未也

它日復見,曰:回益矣.

曰:何謂也?

曰:回忘禮樂矣.

曰:可矣,猶未也.

它日復見.曰:回益矣.

曰:何謂也?

曰:回坐忘矣.
仲尼蹴然曰:何謂坐忘?

顔回曰:墮肢體,黜聰明,離形去知,同於大通,此謂坐忘.”

 

“형체를 무너뜨리고 총명을 내어 쫓는다는 것”은 외형과 시비판단을 잊는 것을 의미하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버림을 통한 坐忘공부의 궁극적인 경지가 ‘大道에 통하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 大道와 통한다는 것은 외물과 주체 사이에 일체의 장애가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仁義, 禮樂을 잊고 형체40)와 시비를 잊는 버림의 과정은 결국 외물과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坐忘을 통한 虛靜한 상태가 되어야 莊子가 강조하는 忘我의 상태를 얻게 된다. 忘我란 我를 중심으로 생겨난 지식과 욕구와 감정들을 버리고, 道와 하나 된 나, 즉 大我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40) 형체를 잊는다는 구절에 대해서 徐復觀은 그의 『中國藝術精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莊子는 근본적으로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욕망을 부추겨 파란을 일으켜서 각자의 본성으로부터 넘쳐흐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본성 내의 욕망에 있어서는 莊子는 本性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긍정하였다” 

 

4. 無何有之鄕

 

莊子는 成心을 극복하고 大我를 회복하여 천지만물의 道와 막힘없이 통하고 인간의 本性인 德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眞人또는 至人이라 부른다.
이들은 有爲41)의 삶을 제거한 사람들로서 아무런 목적의식이나 사회적 욕망 없이 세계의 질서를 따른다. 마음을 비우고 즉 무의식의 상태를 유지하고 세계의 필연성을 체득 자연적 본성을 회복하여 정신의 自由에서 노닌다. 莊子는 이러한 眞人의 경지를 종종 ‘遊’로 표현한다. ‘遊’는 道와 합일된 體道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형식이다. 또한 遊는 體道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體道를 향한 방법 이기도 하다.

莊子는 “무궁의 경지에서 노니는 자” 라든가 “사해의 밖에서 노닌다.” 혹은 “아무도 없는 들에서 노닌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노닌다.” 등의 표현들을 통해 ‘遊’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비유적으로 묘사한다. 42)

莊子에게 있어 이러한 眞人의 정신적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근거는 道다. 그리고 이러한 道의 세계상이 바로 ‘無何有之鄕’이다. 때문에 莊子의 일상적 自我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노력은 ‘無何有之鄕’ 이라는 절대적인 자유의 차원에서 종결된다.

莊子의 ‘無何有之鄕’은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이른바 無爲自然의 道가 행해질 때 도래하는, 생사가 없고 시비가 없으며 지식도, 마음도, 하는 것도 없는 참으로 행복한 곳 또는 마음의 경지이다.

 

서양에서의 유토피아는 통상적으로 ‘좋지만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불가능 사회’를 이야기한다. 즉 유토피아 개념은 좋은 또는 완전함과 존재하지 않은 또는 불가능함이란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것은 모어가 유토피아라는 신조어를 만들면서 의도적으로 모음을 생략한 것이 원인인데 이것이 좋은 장소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가리키는 지 또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진 것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명료하지 않다.43)

 ‘無何有之鄕’을 언어적으로만 해석한다면 無는 何有를 부정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본다면 ‘無何有之鄕’이란 현실세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마을이라는 의미가 된다.

莊子가 꿈꾸었던 ‘無何有之鄕’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가?44)
莊子에게 있어 ‘無何有之鄕’은 일상적 自我로부터의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적 근거이며, 어떠한 타자도 대상으로 정립될 수 없는 道의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無何有之鄕’과 현실의 세계는 서로 다른 별개의 세계가 될 수 없다.

 

41) ‘有爲’란 분석적이고 차별적이며 ‘人爲’적인 意識이 개입된 모든 行爲를 지칭한다.
42) 박원재 도가의 이상적 인간상에 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1996, pp. 151∼152.

43) 손철성, 『유토피아, 희망의 원리』, p. 15 철학과 현실사, 2003.
44) 劉笑敢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莊子는 현실세계에는 자유가 없다고 인식하고 ‘無何有之鄕’ 에 가서 자유를 찾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莊子의 이른바 ‘無何有之鄕’이나 사해의 밖, 진구의 밖은 모두가 순전히 정신적인 영역으로서 현실세계와는 조금도 관계가 없는 곳이다.” 

 

우리는 ‘無何有之鄕’에 도달 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물음에 대해 莊子는 자신의 입을 통하여 자신이 제시한 해방의 방식은 특수한 개인에게만 가능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자신이 말하는 이상적 삶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만년에 한 번 만나더라도 그것은 아침 저녁으로 만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소와 말의 발이 네 개인 것이 자연이고 말에 낙인을 찍고 소에 코뚜레를 끼우는 것이 인위라고 명쾌하게 정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人爲와 自然을 진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眞人이 된 뒤라야 가능하다는 고백은 그의 幻想이 일상인이 도달하기에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이상인가를 잘 보여준다.

비록 莊子가 이야기 하는 ‘無何有之鄕’이 현실에 대한 깊은 인식을 기초로 해서 제시된 이상 세계지만 우리는 영원히 일상적 自我로부터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참고 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