養生사상의 정당화 가능성 문제:
莊子, 嵇康, 葛洪의 관점을 중심으로
이진용(건국대)
[한글 요약]
이 논문은 莊子, 嵇康과 도교학자인 葛洪의 養生이론을 중심으로 ‘養生’사상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일반적으로 ‘養生’사상은 신비적이고 비합리적 내용으로 구성되었다고 평가된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고 ‘養生’사상의 함의를 온전히 밝히기 위해, 『莊子』 「養生主」 편, 嵇康의 「養生論」 및 葛洪 『抱朴子內篇』의 養生이론을 검토하였으며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들 세 학자의 ‘養生’사상은 생명을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생의 의지를 실현하여 생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지를 토론한 측면에서 ‘輕物重生’의 의미로 접근해야 한다.
둘째, 세 학자의 ‘養生’사상은 그들이 이해하는 ‘생명’의 의미와 생명을 마주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상이하게 발전해간다.
장자는 정신적 생명을 중시하며 이를 통해 다양하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지키고자 한다. 혜강은 기본적으로 장자의 양생사상을 수용하는 가운데 육체적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갈홍의 가장 큰 관심사는 육체와 몸에 집중되어 이전과 다른 육체적 생명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양생사상이 정립된다.
따라서 이들의 양생사상은 <‘養神’중심 - ‘養神’과 ‘養形’ - ‘養形’위주>의 발전 궤적을 그린다.
‘양생’사상의 정당화 가능성은 철학의 문제영역과 현재적 관점에서 수용가능한지의 여부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중국철학의 문제로부터 접근했을 때, 장자와 혜강은 道家와 玄學의 범위에서 이 문제를 철학적 문제로 접근하여 고민했기 때문에 ‘양생’사상은 충분히 철학적 담론이 가능한 타당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현재적 관점에서 접근해 본다면, ‘양생’사상은 생명의 담론에서 밀려난 육체와 몸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또한 정당한 평가가 가능하다.
주제분야 : 道家, 道敎
주 제 어 : 養生, 養神, 養形, 形神관계, 莊子, 嵇康, 葛洪
1. 들어가는 말
‘養生’사상은 현재 철학과 종교의 영역 뿐 아니라 다양한 담론을 통해 그 함의를 온전히 밝히려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양생’의 문제는 특히 道敎의 철학과 종교체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에, 도교의 다양한 경전에 드러나는 양생의 함의를 명확히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생명을 온전히 길러낸다’는 함의로서의 양생을 과연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리고 생명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양생사상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떠한 메시지를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부여 받은 생명을 온전히 보존하고 잘 길러내면 건강히 살 수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수명을 거스르면서까지 장생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할 수 있다는, 다분히 상식적이거나 때로는 상식과 상충되는 논의로 빠져들 수도 있는 ‘양생’사상의 함의를 제대로 밝혀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양생’사상을 지금 우리가 타당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정당한 명제로 생각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 작업이 진행되어야, 비로소 양생사상의 참다운 면모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양생’사상에 대한 철학적 검토가 요청된다.
이러한 문제를 풀기위한 하나의 유효한 시도로서 이 글에서는 『莊子』의 「養生主」 편, 嵇康의 「養生論」, 그리고 葛洪의 『抱朴子內篇』에 드러난 ‘양생’사상의 함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즉 선진시기의 道家, 魏晋玄學, 그리고 위진시기 神仙道敎에서의 ‘양생’사상의 함의를 온전히 파악함으로써 현재적 관점에서도 유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양생’사상의 특징을 찾아보고 그 정당성 여부를 따져보기로 한다.
2. 『莊子』 「養生主」 편의 養生의 함의
『장자』내편 가운데 세 번째 편인 「養生主」 편은 장자의 養生論의 기본 원칙을 밝히고 있다.
양생주는 ‘양생의 주재자’ 또는 ‘양생의 도’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1] 장자는 이러한 양생의 주재자 또는 양생의 도를 통해 우리가 부여받은 생명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방법과 그 의미를 논한다. 「양생주」는 먼저 생명을 해치는 원인을 분석하는 데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1]이강수, 『장자』, 도서출판 길, 서울, 2005, 169쪽.
"나의 생명은 끝이 있으나 알아야 할 것은 끝이 없는데, 끝이 있는 것으로써 끝이 없는 것을 뒤쫓아 따르니 위태하도다. 이미 이러한데도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은 위험할 뿐이다.
선을 행하더라도 명성을 가까이하지 말지며, 악을 행할지라도 형벌을 가까지 하지 말지니, 督을 따르는 것으로 떳떳함을 삼으면 몸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며, 생의 의지를 온전히 살릴 수 있을 것이며, 어버이에게서 받은 것(신체)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며, 자연 수명을 다 누릴 수 있을 것이다. "2]
2]『莊子』, 「養生主」.
“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以有涯隨无涯, 殆已; 已而爲知者, 殆而已矣.
爲善无近名, 爲惡无近刑. 緣督以爲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莊子』원문은 郭慶藩의 『莊子集釋』(中華書局, 北京, 1989)을 저본으로 함을 밝힌다.
장자는 우리의 생명은 분명 유한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문제는 전체 우주의 흐름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일생에서 우리는 끝도 없이 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국 생명을 위험한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생명을 해치게 되는 원인을 ‘앎의 추구’에서 찾는 장자의 견해에 주목해야 한다.
앎의 추구는 내가 대상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여 나의 목적을 충족하는 기나긴 과정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인식의 과정에서 종종 나 자신만의 특수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상세계 뿐 아니라 나 자신을 왜곡하고 특수한 관점 안에 가두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나의 욕망과 감정을 충족하고자 대상세계를 재단하려는 목적에서 인식기관을 활용하는 것이다. 장자는 이러한 앎의 추구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점을 직시하고, 그 결과로 생의 의지 뿐 아니라 생명조차 상실할 수 있음을 경계한다. 따라서 위 인용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소중히 여기는 것: 생명, 육체, 생의 의지[生意], 자연 수명, 督
② 경계해야 하는 것: 지식 추구, 명성, 형벌
여기서 주의할 점은 ①과 ② 모두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구체적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①은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장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不得已한 것이자 동시에 객관적 존재의 양태를 가리키는 반면, ②는 이러한 ①을 바라보는 우리의 주관적 반응 양태를 의미한다.
문제는 ②에서 제시된 주관적 반응 양태가 우리의 주관적 정서와 자의식을 통해 객관적 존재의 양태인 ①을 침해하는 경우이다. 따라서 장자는 「양생주」 편에서 ①을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부터 출발해 ②의 상황이 ①에 개입하여 침해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함으로써 ①을 온전히 보전할 것을 요청한다.3]
3]이상의 「양생주」 첫 구절 이해의 기본 틀은 김성환의 「道學․道家․道敎, 그 화해 가능성의 재조명」(『道敎學硏究』 제16집, 한국도교학회, 2000)에서 『老子』에서 귀하게 여길 것과 경계할 것을 설명하는 방식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위의 인용문에서 마지막으로 해명할 내용은 바로 ①의 마지막에 언급한 ‘督’의 의미이다. 바로 ‘緣督以爲經’의 ‘督’으로, 이 때 ‘督’은 ‘中’ 또는 ‘虛’의 의미로 모든 사물의 이치가 깃들어 있는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 ‘中’ 또는 ‘虛’를 따르는 것은 바로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장자는 이를 ‘양생’의 원칙으로 제시한 것이다.4]
그렇다면 장자가 생명을 보존하고 지키는 데 있어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은 나에게 깃든 것만을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이치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가? 만약 저마다의 이치를 따른다면 그 때 자연의 이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상의 질문에 대해 장자는 「양생주」 편에서 ‘포정해우’의 이야기를 통해 접근해 간다. ‘포정해우’ 이야기는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아 풀어내는 것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잡아 풀어내는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4] 이강수, 앞의 책, 171쪽.
① 이제는 제가 신명(정신)으로 만나되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 작용과 지각 작용은 멈춰지고 정신이 움직이려 함에, 소의 자연스러운 결[天理]을 따라 힘줄과 뼈 사이의 틈을 치고, 골절 사이의 빈곳으로 집어넣습니다. 소의 본래 그러한 구조를 따르는지라 경락이 서로 이어진 곳과 뼈 사이 살과 힘줄이 얽힌 곳조차 거리끼지 않거늘 하물며 큰 뼈이겠습니까? 5]
5]『莊子』, 「養生主」. “方今之時, 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卻, 導大窾, 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 而況大軱乎!”
② 이제 저의 칼은 19년을 사용하였고 풀어낸 소가 수천 마리이지만 칼날이 아직도 숫돌에서 방금 갈아낸 것 같습니다. 소의 골절 사이에는 비어 있으나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칼날을 가지고 골절 사이의 빈틈에 집어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놀리는데 반드시 여지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19년을 사용했는데도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방금 갈아낸 듯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뼈가 얽힌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하기 어려움을 보고서 두려운 듯이 경계하여 시력을 집중하며 손은 느리게 움직입니다. 6]
6]『莊子』, 「養生主」.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閒, 而刀刃者无厚; 以无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
위의 인용문 ①에서 포정은 자신이 풀어내는 소를 마주할 때, 감각이나 사려 작용보다 더욱 심층에 있는 ‘정신’의 작용을 통해 다가선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감각이나 사려 작용은 나 자신의 생명을 해칠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이나 욕망의 출발점일 수 있기 때문에 장자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정신’의 온전한 작용을 통해 대상을 마주할 수 있다면, 포정의 우언에서처럼 소를 한 덩어리의 몸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안에 깃든 ‘天理’, 즉 천연의 결을 따라 소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①의 인용문에서 ‘天理’는 천연의 결 혹은 자연스러운 결, 즉 모든 사물과 사건에 내재한 자연스러운 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앞의 논의에서 ‘督’ 즉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는 것은 내적으로는 나에 깃들어 있는 자연스러운 이치를, 외적으로는 모든 사물에 내재한 자연스러운 천연의 이치를 따른다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장자의 ‘양생’의 원칙은 나와 남 모두에 깃들어있는 자연스러운 이치를 따르는 것이며, 이로부터 나와 타자의 생명 모두를 존중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이치를 따르는 구체적 방식은 무엇일까?
장자는 ②의 인용문에서 포정이 소를 잡아 풀어낼 때의 이야기를 통해 상세히 설명한다. ‘以無厚入有間’에서 두께가 없는 칼날은 마음의 상태를, 빈틈은 사물들의 자연스러운 결의 상태를 설명한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虛’하고 ‘中’하며, 사물들의 자연스러운 결 속의 상태 또한 우리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虛中’하다. 따라서 본래의 마음 상태인 ‘虛心’으로 사물들의 자연스러운 이치 안의 ‘虛’를 마주하게 된다면 칼날이 19년을 사용했더라도 방금 숫돌에서 갈아낸 것처럼, 우리와 마주하는 대상인 사물의 생명은 상해를 입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장자의 ‘양생’은 나의 생명 뿐 아니라 내가 마주하는 타자의 생명 모두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지켜내는 것을 궁극 목표로 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장자는 우리가 잘 보존하고 지켜야 하는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다음 짧은 구절을 통해 살펴보자.
"비계는 땔감이 되는 데서 다하지만 불이 전해지는지라 그것이 다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 7]
7]『莊子』, 「養生主」. “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
위 인용문은 「양생주」 편 마지막 구절이다. 땔감은 우리의 육체를, 불은 정신을 비유한다. 사람의 몸은 땔나무처럼 다 타서 소멸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불처럼 영원히 활활 타오르면서 전해진다는 것이다.
즉 육체는 소멸할지라도 정신만은 오래도록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명을 구성하는 요소는 중국 전통철학의 일반적 이해의 틀에 따르자면 육체와 정신[形과 神]으로 구분되며, 이로부터 形과 神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펼쳐진다. 장자 또한 인간의 생명을 形神으로 이해하며 정신이 육체에 우선하는 관점을 견지한다. 이는 앞서 살펴본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과 경계해야 하는 것의 논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실 그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주관적 정서, 의식 등이기 때문에, 정신이 대상세계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생명을 온전히 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이로부터 장자는 우리의 정신이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해야 육체 또한 부여받은 자연수명의 범위 안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앞서 언급한 ‘소중히 여기는 것’과 ‘경계하는 것’에 ‘경계하는 방식’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① 소중히 여기는 것: 생명, 육체, 생의 의지[生意], 자연 수명, 督
② 경계해야 하는 것: 지식 추구, 명성, 형벌
③ 경계하는 방식(또는 소중히 여기는 방식): 緣督以爲經, 無己, 無功, 無名
나와 타자의 생명을 해칠 수 있는 다양한 원인을 나의 잘못된 지식 추구에서 찾은 뒤, 장자는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한다. 그가 제시한 경계하는 방식은 그 자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방식이라 할 수도 있다. 장자는 이러한 방법으로 「양생주」 편에서 자연스러운 이치를 따를 것을 요구하는데, 그 내용은 「소요유」 편에 보이는 無己, 無功, 無名이다. 8]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는 세상살이에서 남들에게 좋은 일을 하기도 하고 그 결과로 이름을 날리기도 한다. 다만 의도적인 마음으로 접근하여 명예를 위해 남을 배려한다면 그 결과는 도리어 나의 생명을 해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장자는 無功과 無名을 주장한다.
無己는 일종의 자기중심주의를 깨부수는 것이라 할 수 있다.9] 잘못된 공명심의 밑바탕에는 자기중심주의가 깔려있기 때문에,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공명심에서 벗어나 우리의 생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자기중심적 사고와 고착된 자의식에서 벗어나 ‘나’ 자신 뿐 아니라 사물에 깃든 자연스러운 이치에 따라 살 수 있다면, 대상세계와 잘못된 방식으로 관계 맺어 다다르는 온갖 속박과 피해로부터 나의 생명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자기의 마음에 깃든 비본질적 요소를 거두어내고 사물의 자연스러운 성향에 따르라는 것이 장자의 ‘양생’ 이론의 핵심이다.10]
결국 장자 ‘양생’사상은 지식과 욕망의 대상인 物보다 생명을 중시하는 ‘輕物重生’이라 규정할 수 있으며, 그 특징은 다양한 변화에 대처하여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정신세계를 개척하는 데에 있다.
8]『莊子』, 「逍遙遊」.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9]이강수, 『노자와 장자』, 도서출판 길, 서울, 2005, 230쪽.
10] 이강수, 앞의 책, 231쪽.
3. 嵇康 「養生論」의 養生에 대한 이해
장자의 「養生主」 편에 드러난 ‘양생’의 함의는 중국철학의 흐름에서 다양한 이론으로 발전해간다. 그 가운데 위진시기의 嵇康은 장자의 ‘양생’의 관점을 수용하여 이후 도교의 양생관 성립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혜강은 위진시기 현학의 주요 학자이자 竹林七賢의 대표 인물로, 그의 ‘養生’에 대한 관점은 「養生論」에 집중되어 있다.11]
혜강 또한 장자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게 되는 원인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11]혜강의 「養生論」은 또 다른 竹林七賢의 학자이자 元康시기 현학의 발전을 이끈 向秀와의 논쟁을 통해 전개된다. 혜강이 「養生論」을 저술하여 양생의 필요성 및 구체적인 양생의 방법, 그를 통해 다다르게 되는 이상 경계를 논하자, 向秀는 바로 혜강의 양생관을 반박하는 「黃門郞向子期難養生論」을 지어 양생방법과 혜강의 구체적 이론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그의 힐난은 엄연히 양생뿐 아니라 魏晋玄學의 주된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보여준다. 뒤이어 혜강은 「答難養生論」을 통해 다시 상수의 반박에 대해 하나하나 논증을 해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구체적인 입장을 밝힐 뿐 아니라 논변이란 방식을 통해 상수와의 근본적 오해를 풀어나간다. 본 장에서 다루는 혜강의 양생의 관점은 그의 「養生論」과 向秀의 힐난에 대한 반박의 글인 「答難養生論」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① 무릇 입에 달고 씀, 몸에 아픔과 가려움은 외부 사물과 접촉해 발생하고 일에 반응해 일어나는 것이지, 배운 뒤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빌린 뒤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필연적 이치여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2]
12]『嵇康集校注』 권7 「難自然好學論」.
“夫口之於甘苦, 身之於痛癢, 感物而動, 應事而作, 不須學而後能, 不待借而後有. 此必然之理, 吾所不易也.”(嵇康의 원문은 戴明揚 校注,『嵇康集校注』(人民出版社, 北京, 1962)에 따르고, 한글번역은 한흥섭, 『혜강집』(소명출판, 서울, 2006)의 번역문에 따르되 필요에 따라 번역을 달리함을 밝힌다)
② 저 사려하지 않고 욕구하는 것은 본성의 움직임이나, 알고 난 뒤에 감응하는 것은 지식을 쓰는 것이다. 본성이 움직인다는 것은 사물을 만나 알맞게 하고 충족하면 필요 이상의 것을 두지 않는 것이나, 지식을 쓴다는 것은 감응하는 대로 쫓아 피로해져도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근심하는 것과 화가 말미암는 것은 항상 지식을 쓰는 데 있지 본성의 움직임에 있지 않다. 13]
13]『嵇康集校注』 권4 「答難養生論」. “夫不慮而欲, 性之動也; 識而後感, 智之用也. 性動者, 遇物而當, 足則無餘; 智用者, 從感而求, 倦而不巳. 故世之所患, 禍之所由, 常在於智用, 不在於性動.”
③ 욕망이 움직이면 근심과 걱정이 생기고, 지식이 작용하면 근거 없는 주관적 추측[前識]이 세워진다. 前識이 서게 되면 뜻이 흐트러져 사물을 쫓게 되고, 근심과 걱정이 생기면 걱정거리가 쌓여 몸이 위태로워진다. 14]
14]『嵇康集校注』권4 「答難養生論」. “欲動則悔吝生, 智行則前識立; 前識立則心開而物遂, 悔吝生則患積而身危.”
④ 군자는 지식 추구가 일정하지 않아서 생명을 해치고 욕망이 사물을 쫓아서 본성을 해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15]
15]『嵇康集校注』권4 「答難養生論」. “君子識智以無恒傷生, 欲以逐物害性.”
우리의 생명을 해치게 되는 원인을 엄밀히 분석해 본다면, 그 원인은 외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외물과 잘못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외물과 잘못된 관계를 맺는 이유는 나의 지나친 욕망 충족의 결과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은 욕망을 어떻게 이해하고 마주하는가에 달려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혜강은 인간의 ‘욕망’을 상세히 고찰해간다.16]
혜강은 ①의 인용문에서 대상세계와 사태에 마주하여 발생하는 우리의 일상적 반응양식과 그 충족은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필연적 이치라고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혜강은 ‘자연스러운 본능’ 그 자체는 인정한다. 그러나 욕망충족의 과정에 그대로 우리를 내맡길 수 없는 것 또한 자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혜강은 ②의 인용문을 통해 우리가 긍정할 수 있는 욕망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욕망을 나누어 고찰한다. 그는 우리의 욕망을 두 층위, 즉 ‘본성이 움직이는[性動]’ 욕구와 ‘지식을 쓰는[智用]’ 욕망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본성이 움직이는’ 욕구는 그의 표현대로 내가 마주하는 대상세계와 필요충분의 관계만을 맺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오히려 발전적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식을 쓰는 욕망’은 장자가 경계했듯이 지식의 작용을 통해 나와 주변을 나의 목적에 맞게 재구성해 나가는 의식적이고 의도적 행위의 결과이다. 이러한 의식적/의도적 행위는 감관의 욕구에 내맡겨 끝도 없는 충족의 길로 나 자신을 인도하게 된다. 바로 그의 표현대로 “감응하는 대로 쫓아 피로해져도 그치지 않는다”는 것으로, 결국 나의 생명에 크나큰 불행을 가져오게 된다. 물론 자연스러운 본능에 따라 ‘본성이 움직이는’ 욕구 또한 때때로 나의 생명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무한한 허용은 용납될 수 없다.
따라서 위의 ③의 인용문에서처럼 지나친 욕망의 충족은 근거 없는 주관적 추측, 즉 선입견을 세우게 되고, 선입견과 나의 입장에 따라 대상세계를 끝도 없이 추구한다면 근심과 걱정이 생겨 결국 몸이 위태로워지고 생명을 해치게 된다. 이처럼 혜강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 충족 활동을 인정하지만, ④의 인용문에처럼 지식 추구와 욕망 충족의 허용 폭을 제한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의 생명을 지킬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며,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16] 혜강의 욕망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졸고 「嵇康의 윤리도덕에 대한 이해」(『도교문화연구』제33집, 한국도교문화학회, 2010)를 참고하기 바란다.
"지식이 작용하면 고요함[恬]으로써 거두어들이고, 본래 성질이 움직이면 조화[和]로써 바로잡으니, 지식은 고요함에 머무르게 하고 본래의 성질은 조화에 만족하게 한다. 그런 뒤에 정신은 고요함으로 순박해지고, 몸은 조화로움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얽매임을 없애고 해로움을 제거하여 저 道와 더불어 더 새로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 17]
17] 『嵇康集校注』권4 「答難養生論」.
“智用則收之以恬, 性動則紏之以和, 使智上於恬, 性足於和. 然後神以黙醇, 體以和成, 去累除害, 與彼更生.”
혜강은 ‘고요함’과 ‘조화로움’의 방법을 제시한다. ‘고요함’과 ‘조화로움’은 세계의 참모습이자 동시에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성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道’의 고요함과 조화로움을 바탕으로 잘못된 욕망충족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는 구체적으로 ‘지식을 쓰는’ 욕망 충족은 ‘고요함’의 방법으로, ‘본성이 움직이는’ 욕구 추구는 ‘조화로움’의 방식으로 수렴하고 바로잡을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만 무분별한 욕망 충족에서 벗어나 우리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의 생명은 어떠한 특징과 내용을 지니는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① 정신의 형체에 대한 관계는 나라에 군주가 있는 것과 같다. 정신에 안에서 조급해하여 어지럽게 되면 형체가 밖에서 제자리를 못 잡으니, 마치 군주가 위에서 어둑하게 헤매면 나라가 아래에서 어지러워지는 것과 같다. 18]
18]『嵇康集校注』 권3 「養生論」. “精神之於形骸, 猶國之有君也. 神躁於中, 而形喪於外, 猶君昏於上, 國亂於下也.”
② 이 때문에 군자는 형체가 정신에 기대야 제대로 서고 정신은 형체에 의지해야 보존된다는 것을 알고, 생명의 이치가 쉽사리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한 번의 실수로 생명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본성(생명)을 닦아 정신을 보존하고 마음을 편안히 하여 몸을 온전히 하여서,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것이 정에 깃들지 않고 근심과 기쁨이 마음속에 머물지 않아서, 담담하게 어떤 것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며 몸의 기가 조화롭고 평안하게 된다. 또한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데 묵은 것을 내보내고 새 것을 들이쉬며, 각종 약물을 복용하여 몸을 길러내어, 형체와 정신이 서로 가까워지고 겉과 속이 모두 어려움에서 벗어나 잘 되도록 한다. 19]
19]『嵇康集校注』권3 「養生論」. “是以君子知形恃神以立, 神須形以存; 悟生理之易失, 知一過之害生, 故修性以保神, 安心以全身, 愛憎不棲於情, 憂喜不留於意, 泊然無感, 而體氣和平. 又呼吸吐納, 服食養身, 使形神相親, 表裏俱濟也.”
①의 인용문에서 혜강은 정신을 한 나라의 군주에 비유함으로써, 그 또한 장자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은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고, 정신이 육체에 우선한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②의 인용문 앞머리에서도 정신과 육체가 상호의존적 관계로 우리의 생명을 구성한다고 인정하며, 정신이 외부 사물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해야만 우리의 생명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②의 인용문 말미에서 호흡법과 服食의 방법 등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우리의 생명을 구성하는 육체와 정신의 긴밀한 상호연관성을 다시금 강조하는 점이다.
혜강은 「양생론」 첫머리에서 당시의 “신선은 배움을 통해 이를 수 있다”는 설과 長生不死의 논점을 격렬히 비판하지만,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아가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②의 인용문에서처럼 장자와 달리 ‘양생’을 ‘養神’과 ‘養形’으로 구분하여 고찰하며, 온전하게 생명을 보존하는 데 두 가지 방법 모두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양생론」의 마지막 단락에서 혜강은 이러한 관점을 다시금 강조한다.
"양생을 잘 하는 자는 이렇지 않다. 맑고 텅 비었으며 고요하고 편안하며, 사사로움을 죽이고 욕심을 덜어내며, 명예와 지위가 덕을 해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를 가벼이 여기고 도모하지 않는데, 이는 하고자 하나 억지로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음식 맛이 생명을 해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는데, 이는 탐낸 뒤에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외물이 마음을 얽어매어 자리하지 않으니 정신은 순수하고 맑음을 홀로 드러내고, 넓게 트여 걱정이나 근심이 없고, 고요하여 사려하는 것이 없으며, 또한 一(道)로써 그것을 지키고 조화(德)로써 그것을 기르면, 조화로운 이치가 나날이 성취하게 되어 천리와 같아지게 된다.
그런 뒤에 영지로 몸을 보양하고, 단 샘물로 윤택하게 하며, 아침 햇빛으로 말리고, 오현의 음악으로 편안히 하며, 무위하여 스스로 만족하면 몸은 오묘해지고 마음은 그윽해지니, 즐거워하는 것을 잊은 뒤라야 즐거움에 만족하게 되고, 생명을 잊은 뒤라야 몸이 보존된다. 이와 같이 한다면, 거의 羨門과 수명을 견줄 수 있고, 王子喬와 나이를 겨룰 수 있을 텐데, 어찌 그것이 있지 않다고 하는가! " 20]
20]『嵇康集校注』권3 「養生論」.
“善養生者則不然矣. 清虚静㤗, 少私寡欲, 知名位之傷德, 故忽而不營, 非欲而强禁也; 識厚味之害性, 故棄而弗顧, 非貪而後抑也.
外物以累心不存, 神氣以醇(泊)[白]獨著; 曠然無憂患, 寂然無思慮. 又守之以一, 養之以和, 和理日濟, 同乎大順.
然後蒸以靈芝, 潤以醴泉, 晞以朝陽, 綏以五絃, 無爲自得, 體妙心玄, 忘歡而後樂足, 遺生而後身存. 若此以徃, 庶可與羡門比夀, 王喬爭年, 何爲其無有哉!”
위 인용문의 앞 단락은 장자의 양생의 관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인용문 후반부에서 혜강은 다양한 ‘養形’의 방법을 제시한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養神’과 ‘養形’의 방법을 통해 羨門과 王子喬처럼 무병장수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소중히 여기는 것: 생명, 본성, 자연수명, 무병장수
② 경계해야 하는 것: 지식을 쓰는 욕망 추구, 자연스러운 본성이 움직이는 욕구의 지나친 충족
③ 경계하는 방식(또는 소중히 여기는 방식): 養神, 養形
혜강은 부여받은 우리의 생명을 온전히 잘 지키는 것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영원한 삶 또는 不死의 추구는 인정하지 않지만, 자연수명의 범위 안에서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아가는 것을 나의 생명을 온전히 지키는 목표로 설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목표와 상충되는 잘못된 지식과 욕망의 충족 과정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으로 여기며, 이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인 ‘養神’을 제시한다. 흥미로운 점은 본래 ‘양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을 구성하는 두 요소 가운데 정신만을 보듬어 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즉 ‘養神’의 방법 이외에 호흡법과 服食의 방법 등 ‘養形’에도 주목해야 한다. 분명 우리의 생명은 혜강이 강조하듯이 정신이 육체에 우선한다고 해서 정신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양생’에 있어서도 육체와 정신 모두를 보존하고 길러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혜강의 ‘양생’사상의 특징을 찾을 수 있으며, 혜강의 ‘양생’사상을 통해 자칫 소홀히 하거나 잊어버릴 수도 있는 육체 또는 ‘몸’의 중요성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4. 葛洪 『抱朴子內篇』의 道敎 養生論
중국사상사에서 ‘양생’에 대한 논의는 道敎의 발전과 맞물려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양생’사상의 함의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 반드시 도교의 담론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교의 논의를 중심으로 ‘양생’사상에 접근한다면, 지금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도교의 양생법 가운데 內丹의 방식은 차치하더라도, 단약의 복용을 통해 장생을 추구하는 外丹의 방법은 지금의 과학에 비추어 고려 가치조차 없는 신비주의적 논의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도교의 ‘양생’의 논의를 모두 폐기해 버려야 할까? 비합리적이고 신비주의적 색채를 거두어 냄으로써 그 이면에 담긴 그들의 이상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첫걸음으로, 위진시기 神仙道敎의 체계를 정립한 葛洪 『抱朴子內篇』의 ‘양생’과 ‘생명’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갈홍의 ‘생명’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자. 갈홍 또한 인간의 생명이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양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 有는 無에 의해 생겨나고, 형체는 정신에 따라 성립된다. 有는 無의 집이고, 육체는 정신의 집이다. 그러므로 제방에 비유한다면 제방이 무너지면 물은 고여 머물 수 없고, 촛불에 비유한다면 초가 다 타면 불도 꺼지는 것과 같다. 육체가 지치면 정신이 산만해지고, 기가 고갈되면 목숨도 끝난다. 뿌리가 고갈되고 가지만 무성하면 이미 푸르고 푸른 생기는 나무로부터 없어지고, 기가 피로한데 욕구만 기승하면 생명은 몸을 떠난다.21]
21]葛洪, 『抱朴子內篇』, 권5, 「至理」.
“夫有因無而生焉, 形須神而立焉. 有者, 無之宮也; 形者, 神之宅也. 故譬之於堤, 堤壞則水不留矣;方之於燭, 燭糜則火不居矣. 身勞則神散, 氣竭則命終, 根竭枝繁, 則靑靑去木矣;氣疲欲勝, 則精靈離身矣.”
(이하 『抱朴子內篇』은 王明의 『抱朴子內篇校釋』, 中華書局, 北京, 1988을 저본으로 한다)
② 그러므로 한 사람의 몸은 한 나라와 같다. 가슴과 배의 자리는 궁실과 같고, 사지가 늘어선 곳은 국경지대와 같으며, 골절의 나뉨은 백관과 같으며, 神은 군주와 같고, 血은 신하와 같고, 氣는 백성과 같다. 그러므로 몸을 다스릴 줄 알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대저 그 백성을 사랑하면 그로써 그 나라를 편안케 할 수 있고, 그 기를 기르면 그로써 그 몸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 백성이 흩어지면 나라가 망하고, 기가 소진되면 몸이 죽으니, 죽은 자는 살릴 수 없고, 망한 것은 보존할 수 없다. 22]
22]葛洪, 『抱朴子內篇』, 권18, 「地眞」. “故一人之身, 一國之象也. 胸腹之位, 猶宮室也. 四肢之列, 猶郊境也. 骨節之分, 猶百官也. 神猶君也, 血猶臣也, 氣猶民也. 故知治身, 則能治國也. 夫愛其民所以安其國, 養其氣所以全其身. 民散則國亡, 氣竭則身死, 死者不可生也, 亡者不可存也.”
③ 만약 氣를 바르게 하여 쇠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형체와 정신이 서로 지키게 되니, 해칠 수 없다. 23]
23]葛洪, 『抱朴子內篇』, 권13, 「極言」. “苟能令正氣不衰, 形神相衛, 莫能傷也.”
갈홍 또한 장자와 혜강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은 정신과 육체로 구성된다고 여긴다. 다만 ①의 인용문에서처럼 갈홍은 육체를 정신이 머무르는 집으로 보아 만약 집이 무너지면 집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정신이 머무르는 육체가 온전해야 정신이 이에 깃들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앞서 살펴본 장자의 땔감과 불의 비유와 정반대로 갈홍은 초가 다 타버린다면 불이 계속 탈 수 없다고 하여 육체의 중요성을 한 층 더 강조한다. ②의 인용문에서 정신은 군주, 血은 신하, 氣는 백성으로 비유하며, 우리의 생명을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인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만 혜강이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나라에 군주가 있는 것으로 비유한 것과 달리, 갈홍은 혜강의 논의에 ‘氣’ 개념을 더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마치 한 나라에 백성이 없다면 나라가 존속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몸의 기가 소진해 버린다면 생명을 영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③의 인용문에서처럼 ‘氣’를 온전히 보존하고 길러내는 것을 통해, 즉 ‘養氣’를 매개로 육체와 정신의 두 생명 구성요소를 온전하게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갈홍의 形神관계의 논의는 ‘정신’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우리의 ‘육체’ 또는 ‘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생명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길러내는 ‘양생’의 논의에 있어서도 ‘養形’의 방법을 우선시한다. 문제는 도교학자로서 갈홍이 표방한 ‘양생’의 목표와 그 방법이 앞서 살펴보았던 장자와 혜강과 동일한지의 여부이다.
주지하다시피 갈홍으로 대표되는 위진시기 神仙道敎는 양한시기 초기도교와 달리 ‘長生不死’의 추구를 그 목표로 한다. ‘양생’의 목표는 어디에도 구속됨 없이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長生不死‘의 경지로까지 확장된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의 추구를 위한 구체적 방법이 바로 ‘양생’의 방법으로 제시된다. 바로 이 점에서 장자 및 혜강의 관점과 단절이 생긴다. 그렇다면 갈홍을 비롯한 도교에서는 ‘長生不死’와의 연관성 속에서 ‘양생’의 목표 설정과 그 방법을 논하게 되었을까? 이 점이 올곧이 해명되지 않는다면 도교의 ‘양생’은 한낱 허무한 꿈꾸기 혹은 신비주의의 범위 안에서 머무르고 말 것이며, 오랜 역사 동안 다양하게 논의되었던 도교의 ‘양생’ 담론 역시 지금 우리에게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헛된 이야기로 치부될 것이다.
우선 갈홍이 제시한 구체적 ‘양생’의 방법에 대한 올바른 해명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갈홍의 도교는 신선되기를 그 목표로 하기 때문에 ‘神仙道敎’라는 이름을 얻었고, 金丹의 복용을 그 주요 방법으로 주장했기 때문에 金丹道派 24] 혹은 丹鼎道派 25]라고도 불린다. 문제는 바로 金丹의 복용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해 보더라도, 金丹을 복용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황당하고 실현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金丹을 제조하는 방법과 그 복용의 효용이 어느 정도 당시 경험과 관찰을 통해 얻은 과학적 사유에 근거했다는 점이다. 특히 “외물의 힘을 빌려 자신을 견고하게 한다” 26]는 점에서 당시 경험과학의 성과와 더불어 인간의 후천적 노력을 중시하는 갈홍의 견해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양생’의 방법에 있어서 갈홍은 金丹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養形’뿐 아니라 ‘養神’의 방법도 강조한다.
24] 卿希泰 主編, 『中國道敎史』, 上海人民出版社, 上海, 1991, 73쪽.
25] 任繼愈 主編, 『中國道敎史』, 上海人民出版社, 上海, 1991, 73쪽.
26]葛洪, 『抱朴子內篇』, 권4, 「金丹」. “此蓋假求於外物以自堅固.”
"신선이 되는 방법은 고요하고 무위하여 자신의 몸을 잊어야 한다. " 27]
27] 葛洪, 『抱朴子內篇』, 권2, 「論仙」. “仙法欲靜寂無爲, 忘其形骸.”
혹자는 도교가 노장사상처럼 사람들에게 평안한 정감과 담박한 심정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정열적이고 광기에 가까운 분위기 속에서 일종의 허튼 위안만을 줄 뿐이라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서 도교는 강렬한 자극 아래서 혼신의 정열을 불태우며 충동질하고, 번뇌의 바다에서 무궁무진한 신비의 환상을 꿈꾸고,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 있는 생존과 향락의 욕망에 자신을 맡기는 미망의 분위기에서 허황된 피안의 세계만을 열렬히 추구할 따름이고, 이런 추구 속에서 위안을 찾고 일시적인 배설의 쾌감을 맛볼 따름이라고 한다.28]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일면 도교의 내적 맥락을 간과하거나 폄하하는 시선에서 비롯되었다. 도교의 다양한 수행방법들을 살펴보아도 방만한 욕망의 충족은 배제하고 있으며 심지어 엄숙함과 정결함을 지니기까지 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갈홍은 ‘고요함’과 ‘無爲’를 강조하는 동시에 ‘몸’을 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무엇보다 육체와 몸의 비약을 강조하는 갈홍 또한 감각기관과 의지의 다양한 욕구의 주체로서의 ‘몸’이 생명을 해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 것이다. 이처럼 갈홍을 비롯한 도교는 생명의 근원을 잘 보듬어 안기 위해 ‘無爲’와 ‘無欲’이나 ‘小私寡欲’의 방법을 통해 감각기관이나 의지의 다양한 욕구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또한 갈홍은 인간이 ‘無爲’․‘無欲’할 수 있기 때문에 도와 하나가 될 수 있고, 도를 체득하게 되면 양생의 목표인 ‘長生不死’를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갈홍의 신선도교 체계에서 ‘道’는 ‘一’과 동일 개념으로, 도를 체득하는 방법이 곧 ‘守一’이 된다.
28]葛兆光, 심규호 역, 『도교와 중국문화』, 동문선, 서울, 1993, 443쪽.
"만약 하나를 지키게 되면 이러한 모든 방법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하나를 알면 만 가지 일은 모두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 29]
29]葛洪, 『抱朴子內篇』, 권18, 「地眞」. “若守一之道, 則一切除棄此輩. 故曰: 能知一, 則萬事畢者也.”
長生不死의 추구는 쉼 없는 운동을 지속하는 자연계의 질서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즉 갈홍의 논의에서처럼 도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동일한 근원에서 파생된 만큼, 다시 동일한 근원으로의 환원[歸根, 反本]도 가능하게 된다. 도교에서 인간은 비록 현실적 불완전함에 사로잡힌 존재이지만, 자신의 한계를 주체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자기 생명을 구성하는 근원적 요소를 자각적으로 수련하여 본래의 경지로의 회귀를 도모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은 세계의 원리가 발현되는 장소이자 동시에 세계의 법칙과 일대일의 상응관계에 있는 원리가 머무는 장소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의 법칙과 상응관계에 있는 한 몸의 원리를 우리 몸에 지속적으로 머무르게 할 수 있다면, 결국 건강과 장생불사 모두를 이룰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도교는 생명을 구성하는 근원적 상태로의 회귀를 통해 영원한 생명과 不死의 이상을 추구한다.
다음으로, 갈홍의 신선도교는 종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종교는 일정 부분 불안정한 현실로부터의 ‘초월’,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을 꿈꾸는 상상의 체계를 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하는 갖가지 욕망을 충족하여 궁극적 행복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현재 모습을 반성하고 회의하며, 거듭되는 수행과 실천의 여정을 밟아나간다. 도교 또한 이러한 특징을 공유한다. 도교는 기본적으로 현실이 불완전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특히 질병과 재난, 전쟁과 폭정의 고난이 일상화된 삶을 사는 대중들은 이러한 현실의 불완전함을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인식할 것이다.
갈홍이 살아갔던 晋代 사회 역시 정치․경제․문화 등의 방면에서 사회적 불안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일반 대중들의 조화롭고 안정된 삶을 실현하고 각자의 ‘생명’을 온전히 지키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그의 철학은 정립되어간다. 이러한 입장에서 갈홍의 ‘양생’사상은 인간의 근본적 고통인 죽음으로부터의 탈피나 초월을 꿈꾸는 ‘長生不死’를 궁극적 목표로 삼았으며, 그 무엇보다 ‘육체’와 ‘몸’의 승화와 해방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갈홍의 신선도교는 ‘몸’의 승화와 해방이라는 입장에서 생명을 이해하고, 생명을 마주하는 방식을 논의하였다. 특히 우리의 육체적 생명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자칫 생명의 중요성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소홀히 다루어질 수도 있는 ‘몸’의 담론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그 ‘양생’사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정신과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생명의 무한한 확장의 결과로서의 ‘長生不死’의 경지이며, 이를 거스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경계 대상으로 삼게 된다. 이상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① 소중히 여기는 것: 생명, 육체/몸, 영원한 생명과 不死의 이상[長生不死]
② 경계해야 하는 것: 생명을 해칠 수 있는 모든 것
③ 경계하는 방식(또는 소중히 여기는 방식): 養形과 金丹, 養神
5.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장자․혜강․갈홍의 ‘양생’사상은 다음의 특징을 지닌다.
첫째, 장자로부터 도교학자인 갈홍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주장한 ‘양생’ 사상은 ‘輕物重生’ 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생명을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생의 의지를 실현하여 생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지를 고민한 것이다. 따라서 ‘양생’사상은 그 무엇보다 생명을 중시하는 경향성을 지닌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양생’사상은 대상세계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 ‘나의 생명’을 온전히 지킬 것을 요구한다. 다만 생명에 대한 이해와 생명을 올곧이 마주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양생’의 의미와 내용은 다양하게 정립될 수 있다. 장자는 정신적 생명을 중시하며 이를 통해 다양하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지키고자 한다. 혜강은 기본적으로 장자의 양생사상을 수용하는 가운데 육체적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갈홍의 가장 큰 관심사는 육체와 몸에 집중되어 이전과 달리 육체적 생명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양생사상이 정립된다. 따라서 이들의 양생사상은 <‘養神’중심 - ‘養神’과 ‘養形’ - ‘養形’위주>의 발전 궤적을 그린다.
‘양생’사상의 정당화 가능성은 철학의 문제영역과 현재적 관점에서 수용가능한지의 여부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장자와 혜강의 ‘양생’사상은 나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라 대상세계의 자연스러움을 마주할 것을 요청하며, 그 결과로 나의 생명뿐 아니라 타자의 생명 또한 온전히 보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정신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양생’사상과 ‘생명’을 중시하는 이론이라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도가철학의 문제로부터 접근했을 때, 장자와 혜강은 도가와 현학의 범위에서 이 문제를 철학적 문제로 접근하여 고민했기 때문에 ‘양생’사상은 충분히 철학적 담론이 가능한 타당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도교의 ‘양생’사상은 ‘長生不死’라는 목표설정 때문에 늘 자연법칙을 거스르면서까지 목숨에 집착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도교는 어느 학파 못지않게 철저하게 자연법칙을 탐색하고 이를 근거로 현실의 삶을 바라보고자 했다.
갈홍의 ‘양생’사상은 다분히 소홀히 다루어질 수도 있는 ‘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동시에 세계의 근원과의 합일을 통해 피차의 경계를 해소하려는 시도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에 대한 다양한 탐구와 이를 보존하려는 ‘양생’의 논의에서 ‘몸’과 생명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접근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적 관점에서 접근해 본다면, ‘양생’사상은 생명의 담론에서 밀려난 육체와 몸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또한 정당한 평가가 가능하다.
참고 문헌 - 제외
'동양사상 > 노장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老子와 莊子의 문화이론과 미학사상 (0) | 2019.10.16 |
---|---|
노자의 ‘자연성 회복(復歸於樸)’을 위한 ‘마음치유’ (0) | 2019.10.16 |
莊子의 幻想-그가 꿈꾸는 無何有之鄕 (0) | 2019.10.10 |
도가의 인생과 윤리 (0) | 2019.10.10 |
함석헌의 장자관 (0) | 2019.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