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일반

인간의 행복에 대한 새로운 접근

rainbow3 2019. 10. 15. 22:17


인간의 행복에 대한 새로운 접근*

 

김 성 동

 

<요 약 문>


이 글은 인간의 행복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행복은 인간 삶의 궁극 목적으로서 인간의 삶의 지침이다. 근대에 들어 인간의 행복은 계속하여 증대되는 듯이 보였지만, 갑작스레 정체를 겪고 있다. 이러한 정체는 이제까지의 행복 이해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행복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위해서 행복에 대한 과거의 접근들 즉 행복의 역사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사리지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시대의 사람들은 행복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걱정이 없는 상태로 파악했다. 고대의 사람들은 행복을 이성적으로 고통은 피하고 쾌락을 구하는 일로 생각하였다. 중세의 사람들은 행복을 인간과 하느님의 일치로 파악하였다. 근대의 사람들은 행복을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풍요한 상태로 파악하였다.


오늘날에도 물질적 풍요가 인간의 행복을 가져온다는 근대의 행복 이해는 통용되고 있고,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인간의 삶에서는 여전히 타당하다. 하지만 이른바 풍요로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물질적 풍요는 인간의 적응과 재화의 한계효용 때문에 더 이상 행복을 증대시키지 못한다. 게다가 물질적 풍요는 더욱 불균형하게 분배되기 때문에 상대적인 박탈감은 더욱 증대되고, 더 큰 물질적 풍요를 확보하기 위한 행복의 다른 구성요소들의 희생 때문에 불행이 오히려 증대된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 풍요의 터전인 지구의 능력도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물질에 집착하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은 인류의 만성적인 물질적 결핍에 기인한다. 하지만 오늘날 인류는 그러한 결핍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러한 본능은 근사 메커니즘에 불과하다. 인간의 두뇌는 세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기획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메커니즘을 통제하고 자신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 다른 메커니즘을 작동시킬 수도 있다. 긍정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의 긍정적 반영인 쾌락을 넘어서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기획인 열락까지 누릴 수 있다.


이러한 경험적 지식을 고려하여, 행복에 대한 탈근대적 명제를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행복에는 물질적 풍요가 중요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인 의식주의 욕구가 충족되는 수준까지이다. 둘째, 행복은 세계를 반영한 결과이지만 세계에 대한 기획을 통하여 변경될 수 있다.

셋째, 행복은 물질적 풍요로부터 비롯되는 쾌락을 넘어서 건강, 가족, 일과 취미, 교유를 통한 열락으로써 자신을 확장시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에 따를 때 온전한 행복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적 요구들이 있게 된다.

 

※ 주요어: 행복, 쾌락, 열락, 근대, 탈근대.

 

1. 행복과 현대

 

이기주의라는 말의 뉘앙스가 좋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날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말을 쉽게 부정하지 못한다. 물론 심리적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들이 없지 않지만,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지적하고 있는 어떤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행복이라는 말을 피하고 싶어 하는 이론가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우리의 행위의 궁극적인 이유는 행복이다.’라는 말도 쉽게 부정할 수 없다. 하나의 궁극적인 이유를 지적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단어가 행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철학적 논의에서 행복에 관한 것을 찾아 보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스라이(Robert Misrahi)는 플라톤에서 칸트를 거쳐 하이데거에 이르는 전통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스피노자를 거쳐 블로흐에 이르는 전통을 구분하면서 현대철학이 전자만을 주목하며 후자를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2) .


이러한 비판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행복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심리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그것은 현대의 철학연구자들이 하나의 전통에 경도되어 다른 한 전통을 들춰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고대 그리스에서 행복은 철학의 주변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미스라이가 간과되고 있다는 전통의 첫머리에 위치시킨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닌 궁극적인 목적으로 파악하여 인간의 최고선으로서 인간 활동들의 지침이자 성과로서 파악하였다. 

 

"그래서 만약 ‘행위될 수 있는 것들’의 목적이 있어서, 우리가 이것은 그 자체 때문에 바라고, 다른 것들은 이것 때문에 바라는 것이라면, … 이것이 좋음이며 최상의 좋음3)일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니 이것에 대한 앎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큰 무게를 가지지 않겠는가? 또 마치 과녁을 가지고 있는 궁수처럼 마땅히 그래야 할 바에 더 잘 적중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4)"

 

"[최상의 좋음]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대중들과 교양 있는 사람들 모두 그것을 ‘행복’(eudaimonia)5)이라고 말하고, ‘잘 사는 것(eu zen)’과 ‘잘 행위 하는 것’(eu prattein)을 ‘행복하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6)"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우리의 행복에 대한 이해와 같을 수 없겠지만,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였던 것과 같이, 행복이 우리 삶과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행위를 선택하거나 않을 이유가 되고, 행위를 통하여 얻게 되는 성과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1) 캐츠 엮음, 『윤리의 진화론적 기원』, 김성동 옮김, 철학과현실사, 서울 2007, pp. 191-212.
2) 미스라이, 『행복: 기쁨에 관한 소고』, 김영선 옮김, 동문선, 서울 2006, pp. 7-10.
3) 이 글의 인용문의 모든 강조는 인용자에 의한 것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창우, 김재홍, 강상진 옮김, 이제이북스, 서울 2007, p. 14.

5)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이 우리가 말하는 행복과 같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Ross는 eudaimonia가 well-being으로, Cooper는 flourishing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Kraut는 예상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와 우리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Kraut, "Two Concemption of Happiness", Cahn & Vitrano, Happiness: Classic and Contemporary Reading in Philosophy,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2008, pp. 201-2.
6) 아리스토텔레스, p. 17.

 

 

Figure 2: Subjective wellbeing and per capita income38 (Source: Inglehart and Klingemann 2000, ref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대 그리스인들과 같이 행복에 대해 심사 숙고하지 않는 까닭은, 시대가 변하고 그에 따라서 이해가 변하여, 행복이 내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어떤 교양이 아니라 외적인 사물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타고난 권리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잘 작동되어 왔던 행복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최근에 들어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는 신호가 여기 저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계속 더욱  행복해질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가고 있으며, 행복 속에서의 불행이라는 역설적인 현상 또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신호들은 지금까지의 우리의 행복에 대한 이해에 어떤 결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앞의 표7)에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이 표가 우리에게 우선 말해주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행복을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수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8)을 들고 있는 것과는 무척 대비된다. 둘째로 말해주고 있는 것은 이러한 견해가 일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정도를 분기점으로 잘 맞아들지 않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표의 좌측에 나열된 국가들은 수입과 행복의 비례관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우측의 국가들은 이러한 비례관계가 해체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9)


더불어 이 표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이러한 분기점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표에 따르면 우리는 행복의 근대적 영역에서 탈근대적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행복에 대하여 새롭게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7) Layard, Happiness: Lesson from a New Science, Penguin Press, New York 2005, p. 32.
8) 아리스토텔레스, p. 30.
9) “이 영역에서는 ‘행복지수의 상승이 수입이 상승과 비례한다. … 더욱더 향상된 경제적 부의 상태는 결코 삶에 대한 심리적 만족을 추가적으로 보장해 주지 않는다.” 클라인, 『행복의 공식』, 김영옥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서울 2006, p. 318. 

 

2. 행복에 대한 과거의 이해

 

행복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앞서 행복에 과거의 이해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이해는 과거의 이해와 무관하게 제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남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 근대이전의 행복이해

 

근대 이전을 편의상 신화시대와 고대 그리고 중세로 나눈다면, 신화시대의 사람들은 행복을 천국에서의 삶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이유로 떠나왔고 그래서 그 이유가 소멸되면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서 천국을 상정하였고 그곳에서의 삶의 방식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였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하나 없고 정신적으로 걱정할 일이 하나 없는 천국, 그러한 삶이 신화시대 인간들의 행복의 내용이었다. 신화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인류의 다양한 신화들이 바로 이러한 내용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신화들은 지복, 자발성, 자유를 만끽하는 원초적인 인간을 소개한다.
인간은 유감스럽게도 지상과 천국 사이의 단절을 촉발시킨 신화적인 사건 이후 자유를 상실한다. 그러나 그때 그 당시 천국의 시간 속에서는 신이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들과 뒤섞인다. 인간은 … 몸을 실어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10)"

 

고대 그리스의 사람들은 이러한 신화적 행복을 넘어서 나아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는 황소가 신을 묘사한다면 그 신은 황소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연적 사실과 문화적 사실을 혼동11)하는 신화적 사유를 비판하였다.12)

 

쾌락주의의 창시자로 유명한 에피쿠로스는 행복 즉 최고선은 쾌락이라고 주장하면서, 쾌락을 육체적 고통이나 영혼의 문제가 없는 상태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쾌락이 현세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이기는 하지만 이성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고 또한 지적하였다.

 

"쾌락이 우리의 제일의 타고난 선이기 때문에,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모든 선을 취하지 않고 많은 쾌락을 떠나보낸다. 왜냐하면 그러한 쾌락들은 보다 큰 불쾌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우리는 고통을 쾌락보다 우위에 두는데, 그러한 고통을 겪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더 큰 쾌락을 가져오기 때문이다.13)"

 

이러한 행복 이해는 신화적 이해와 비교할 때 이성적 이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특성을 보다 강화시킨 것은 스토아학파였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며, 이럴 때에 행복에 이를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는 행복을 철학적 관조활동이라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대표적인 스토아 철학자인 키케로와 에픽테토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행복한 인간은 올바른 판단력을 소유한 사람을 뜻한다. 행복한 인간은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고유한 자신만의 선을 벗으로 삼는 사람이다. 행복한 인간이란 결국 이성이 모든 상황을 증명하고 충고하는 사람이다.14)"

 

"네가 원하는 대로 사건들이 일어나기를 요구하지 말고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생겨나도록 원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너의 삶이 행복해질 것이다.15)" 

 

이러한 행복 이해는 이성적 태도를 통하여 감성에 좌우되지 않는 냉철한 행복에 이른다는 것인데, 이러할 때 행복은 신화적이거나 에피쿠로스적 행복 이해에서와 달리 신체적 정신적 쾌락이 아닌 이성과 세계와의 일치감이다.16) 이러한 스토아적 행복 이해는 중세적 행복 이해의 특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 의해서 주도된 중세 사람들에게 행복은 하느님과의 일치였으며, 이러한 일치감이야말로 신체적 정신적 쾌락을 넘어서는 최고의 영성적 쾌락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스토아적 행복 이해에서 이성 대신 신앙을 대치한 것이 중세적 행복 이해라고 볼 수 있다.

 

10) 포쉐, 『행복의 역사』, 조재룡 옮김, 열린터, 서울 2007, pp. 27-28 재인용.
11) 하버마스는 신화적 세계관의 특징을 바로 이러한 “자연과 문화의 혼동”이라고 지적하였다.
Habermas, Theorie der Kommunikativen Handelns I, Suhrkamp, Frankfurt 1985, p. 79.
12) “만약 소나 말이나 사자가 손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할 수 있다면, 말은 그들의 신을 말과 같이, 소는 소와 같이 그릴 것이다. 그들 각각은 신을 자신들과 같은 모습으로 형상화할 것이다.” eds. Diels & Kranz,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6th., Zurich 1968, B, 16, 15. http://en.wikipedia.org/wiki/Xenophanes 재인용
13) Epicurus, "Letter to Menoeceus", Cahn & Vitrano, p. 36.

14) 포쉐, p. 70 재인용.
15) 보슈, 『행복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김도윤 옮김, 자작나무, 서울 1999, p. 188 재인용.
16) 플라톤이나 칸트의 행복에 대한 견해도 바로 이와 같은 입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중세의 행복 이해에서도 이성이 완전히 그 권능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는데, 행복의 기본 원칙은 초자연적 계시에 의해서 주어지지만, 그러한 원칙을 일상에 적용하는 것은 자연적 계시인 이성의 몫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아퀴나스 등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행복한 삶에 대한 세세한 논의는 중세의 행복 이해의 이러한 점을 보여준다.

 

"성적 욕망이 지나치거나 지배적이 되어 싸움과 폭력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법에 따라 이러한 욕망을 다스리고 수로화(水路化)하는 편이 낫다. 성적 욕망은 오로지 아이를 낳는 데 쓰일 경우에만 좋은 것이다.
성적 욕망에 교육이 뒤따를 때만, 아이를 낳는 일이 가치를 지니며, 이로 인해 신성하게 여겨지는 결혼을 존중해야 하는 태도가 요구된다.17)"

17) 보슈, p. 151. 

 

나. 근대 이후의 행복이해

 

서구가 그리스-로마적인 전통을 부활시킨 르네상스를 거쳐 계몽주의에 이르렀을 때에, 행복에 대한 근대적 이해는 이제 이성이나 절대자와의 일치감을 떠나 에피쿠로스적이거나 신화적인 쾌락주의 즉 육체적 고통이나 영혼의 문제가 없는 상태로 환원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쾌락은 선택받은 소수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누려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제 모든 남자와 여자들은 이승에서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행복의 가능성과 행복의 당위성이 근대 인간의 자기이해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생각은 제퍼슨이 기초한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명백하게 천명되고 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다.18)"

 

하지만 이러한 근대의 행복 이해는 행복의 문제가 개인이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책임질 문제로 확립되었다는 점에서 고대의 행복 이해와 구분된다. 정부를 조직하는 이유가 바로 사회적 행복의 추구에 있었으며, 사회적 행복이 저해될 때 그 정부는 폐지되고 새로운 정부로 재구성되어야 했다.19)

 

하지만 행복이 이처럼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됨으로서 행복은 그 내용에서도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것은 행복의 물질화이다. 정치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물질적 풍요이었다.

왜냐하면 정치적 행위란 객관적 행위여야 하는데, 개인의 행복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주관적 행복을 영위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으로서 정치적으로 제공될 수 있는 것은 주로 물질적 풍요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행복추구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은 그가 로크(John Locke)의 『인간오성론』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정부론』에서 로크는 ‘생명, 자유, 재산’을 이야기했는데, 제퍼슨은 이를 ‘생명, 자유, 행복’으로 대치하였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재산’과 ‘행복’은 사실 이 시대에서는 공동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20)

 

18) 「미국독립선언서」.
19) 같은 곳.

20) McMahon, Happiness: A History, Atlantic Monthly Press, New York 2006, pp. 316-17. 

 

이러한 변화는 행복에 대한 중세적 이해가 스토아적 이해에서 이성을 신앙으로 대치한 것이듯이, 행복에 대한 근대적 이해가 중세적 이해에서 신앙을 물질로 대치한 것과 같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은 베버(Max Weber)의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분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사회계층은 서구 문명을 이끌어온 원동력으로 숭배하게끔 조장된 신성에 가까운 힘에 복종한다. 그것이 바로 돈이다. 이 경우, 돈을 버는 것은 사실상 신의 은총을 입는 행위와 밀접히 관련된다. 막스 베버의 지적처럼,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트적 세계관 속에서 추구되었다는 사실은 서양 사회에서는 보다 명백해 보인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최후의 논리는 경제와 화폐가 결국 세상의 질서를 확립하고, 나아가 사회의 이상적 상태조차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가 국가에 속한 국민의 행복을 창출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면, 자본주의의 정치가 보장하는 행복은 오로지 경제라는 우월적인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21)"

 

행복을 물질로 받아들이는 근대적 행복이해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중세적 행복이해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근대 특유의 개인주의 내지 평등주의에서 비롯된다. 프랑스의 문화평론가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독립선언이나 프랑스의 인권선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근대인들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런 정신에 입각해서 인간은 행복에서도 또한 평등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22)

 

이렇게 보면, 인간의 평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평등의 내용에 대한 양적 계량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므로 행복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양적인 계량이 가능한 행복만이 행복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게 되는데, 이런 까닭으로 양적 계량이 가능한 물질의 소비만이 행복의 근거가 되었으며. 반면에 계량이 불가능한 다양한 형태의 내면적 행복은 행복의 내용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 보드리야르의 지적이다.23)

 

이러한 계량적 행복관은 사실 르네상스 이후 질의 양에로의 환원을 주장했던 과학주의적 사고방식24)에 일치하는 것으로서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평등의 이념에만 기원한다기보다는 이러한 양화주의적 과학이념에도 또한 연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계량 가능한 행복 이해는 모든 사람의 평등한 행복을 약속하지만 실제로 실현하는 것은 행복의 서열화이다. 각각의 개인에게 고유한 주관적 행복은 이제 더 이상 행복이라 불리지 않고 만인에게 보편적인 객관적 행복 즉 물질만이 행복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행복을 자신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의 행복과 비교하게 함으로써 끊임없는 불행의식에 빠져들게 하고 이러한 불행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사람들을 무한경쟁에 뛰어들게 한다. 행복한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은 바로 이러한 불행한 무한경쟁이다.

 

21) 포쉐, pp. 259-60.
22) 보르리야르, 『소비의 사회』,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서울 1992, pp. 52-53.
23) 같은 곳.

24) 후설은 이를 갈릴레이식 자연의 수학화라고 비판하였다.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Martinus Nijhoff, Hague 1976,p. 20. 

 

3. 현대에서의 행복이념의 전환

 

계량 가능한 행복이라는 이러한 물질주의적 행복이해가 근대의 행복이해인데, 앞에서 인용했던 도표는 바로 이러한 행복이해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 도표는 또한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전후하여 행복이념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는데, 이제 이러한 변화가 생겨나는 까닭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러한 변화의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가. 풍요의 적응과 한계효용

 

그 하나는 물질적 풍요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적응이 이를 상쇄하고 있으며 한계효용도 계속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독일의 국민들은 과거 50년 전보다 두 배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연구자들의 한결같은 결론은 그들의 행복이 별로 증대되지 않았거나 심지어 감소하기조차 했다는 것이다.25) 이스털린 역설(Easterlin paradox)26)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이 바로 행복이념의 전환을 요청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으로 제시되는 한 이유는 인간의 적응능력이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들을 검토해 왔는데, 그들은 인간에게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환경의 변화가 있을 때에 일시적으로 행복도의 변화가 있지만 곧 원래의 행복도에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가리키기 위해 행복의 셋 포인트(happiness set point)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27) 이러한 현상은 쾌락주의적 적응(hedonic adaptation) 혹은 쾌락주의적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불리기도 한다.28)

 

25) 빌렌브룩, 『행복경제학』, 배인섭 옮김, 미래의창, 서울 2007, p. 269.
26) 이는 행복경제학(happiness economics)의 중심개념인데, 이의 창시자라고 할 Richard Easterlin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그는 1974년에 발표된 논문 「경제적 성장이 인간의 운명을 개선하는가? 그 경험적 증거」에서 일단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은 부와 더불어 증대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27) 그들에 따르면 승진이나 실연과 같은 사건이 사람들의 행복도에 미치는 효과는 대개 세 달 정도 지속되며, 여섯 달이면 흔적도 찾기 어렵다. 복권에 당첨되면 영원히 행복할 것 같지만 1년만 지나면 당첨되기 전의 행복도로 돌아온다. 사고로 시력을 잃거나 전신마비에 빠진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전의 행복도로 돌아온다. Edward Diener가 이 개념을 제안했다.(Psychological Science, 1996. 5)
28) Sheldon & Lyubomirsky, "Achieving Sustainable New Happiness: Prospects, Practices, and Prescriptions", ed. Linley & Joseph, Positive Psychology in Practice, John Wiley & Sons, Hoboken, New Jersey 2004, p. 131. 

 

경제학자들도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7,812명의 독일인을 대상으로 16년 이상 매년 반복하여 실시된 설문조사를 통하여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더 높아진 소득은 오로지 첫 해 동안에만 현저하게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두 번째 해에도 여전히 측정 가능한 수준의 효력을 발휘하지만, 세 번째 해가 되면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그리고 네 번째 해가 되면 소득 증가에 따른 효과는 더 이상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된다.29)

 

이러한 적응의 효과와 더불어 선진국들에서의 물질적 풍요의 효과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다. 재화를 한 단위씩 더 소비할 때마다 그 효용이 점점 더 감소한다는 원칙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으며, 일반적인 경제원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진국에서의 물질적 성장은 후진국에서의 물질적 성장과 그 효용이 결코 같은 수 없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일년에 180Kg의 곡물을 소비하고 있는 반면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은 일년에 900Kg의 곡물을 소비하고 있다면.30) 이러한 상황에서 100Kg의 곡물을 이들에게 더 준다고 했을 때 이러한 추가적인 곡물이 가지는 효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크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없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스토아철학자인 세네카는 “돈은 인간을 절대로 행복하게 하지 못하며,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을 아귀로 만드는 것이다.”31)라고 지적하였다. 물질적 풍요가 인간을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이러한 주장은 철학자들의 사변적인 결론일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의 경험적인 결론이기도 하다. 심리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은 선진국에서의 수입증대가 실질적으로 행복지수를 증대시키지 못한다고 입증하고 있다.

 

29) 빌렌브룩, p. 270. Rafael Di Tella, John p. Haisken-Denew, Robert Macculloch은 2004년 발표한 논문 "Happiness Adaptation to Income and to Status in an Individua Panel"에서 이를 다루고 있다. http://ssrn.com/abstract=760368

30) 싱어, 『실천윤리학』, 황경식 외 옮김, 철학과현실사, 서울 1991, p. 217.

31) 아우렐리우스‧세네카, 『명상록‧행복론』 황문수‧최현 옮김, 범우사, 서울 1994, p. 383. 

 

나. 분배의 불균형

 

물질적 풍요가 인간의 행복을 증대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물질적 풍요를 증대시키려는 노력이 인간의 행복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주로 분배의 불균형 때문에 일어난다.

 

근대의 행복 이해는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이라는 이념인데, 여기에는 비록 모든 사람이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다고 해도 물질적 풍요를 계속 증대시켜 나가면 모든 사람이 풍요롭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다시 말해 생산의 증가가 재분배를 실현할 것이라는 희망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희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또한 지적하고 있다.

 

그는 빈곤이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와 같은 풍부함을 신봉하는 이상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남은 찌꺼기”로서 성장의 증가에 의해서 머지않아 흡수될 그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코 없어지지 않을 요소로서 오히려 “성장 자체가 불균형에 근거하고 있다”32)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풍부한 사회’도 ‘궁핍한 사회’도 여태까지 없었으며 또 현재도 없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사회라도 또 생산된 재화와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부의 양이 어떻든지 간에 모든 사회는 구조적 과잉과 구조적 궁핍에 동시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33)"

 

보드리야르는 물질적 풍요나 물질적 궁핍과 무관하게 상대적 과잉과 상대적 궁핍은 어느 사회에나 있는 구조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풍요와 궁핍의 대립을 통해서만 사회는 물질적 확대재생산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없다면 사람들이 생산의 동기를 잃는다는 사실은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역사적 사실로서 이미 확인되었다.

 

그는 풍요로운 사회에 존재하는 상대적 풍요와 빈곤을 소비재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풍요한 사회에서 육체노동자의 지출과 상급관리자의 지출의 구성 성분을 나누어서 비교해 보면 “생활필수품에서는 100:135에 불과한데, 주거설비에서는 100:245, 교통비에서는 100:305, 레저에서는 100:390이 되고 있다.”34)

 

이렇게 보면 성장은 궁핍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적으로 확장시킨다. 풍요로운 사회에서의 상대빈곤과 절대풍요의 차이는 궁핍한 사회에서의 절대빈곤과 상대풍요의 차이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에서의 부자와 빈자의 차이는 인도에서의 부자와 빈자의 차이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33) 같은 책, pp. 58-59.

34) 같은 책, p. 67.

 

이러한 상황에서 풍요한 사회에서 상대적 빈자들이 느끼는 불행, 즉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분배의 불균형을 더욱 심각한 문제로 만드는 것은 부유한 국가의 빈자가 빈한한 국가의 빈자보다 덜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인도의 노숙자들은 미국의 노숙자들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 게다가 미국의 노숙자들은 인도의 동료들과는 천양지차의 사회적 서비스와 복지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또한 인도의 노숙자들은 한달 평균 24달러로 생활해야 했지만, 포틀랜드와 프레스노의 노숙자들은 280내지 358달러를 사용하고 있었다.35)"

 

미국의 노숙자들이 인도의 노숙자들보다 열 배나 ‘부유’한 데도 덜 행복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인도의 일상인들과 노숙자들의 물질적 차이가 미국의 일상인들과 노숙자들의 물질적 차이보다 작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노숙자들은 이미 가족이라는 유대를 상실한 데 반해 인도의 노숙자들은 가족이라는 유대의 끈을 아직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노숙자들은 길거리에서 지내지만 대개가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그들과 달리 미국의 낙오자들은 부인이나 자식이 아예 없거나, 있다고 해도 대부분 수년 동안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노숙자 생활이 시작되기에 앞서서 이혼이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사건이 벌어진 경우도 많았다.36)"

 

물질적 풍요의 증대가 근대의 행복 이해가 반영하지 못하는 행복의 다른 요소들을 침해한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크게 주목받거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노숙자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는 사실 가족의 해체가능성이 높은 사회이다.

 

35) 빌렌브록, p. 165.

36) 같은 곳.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에 따르면 현대인의 행복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크게 7가지이다. 그것들은 가족관계, 재정상황, 일, 공동체와 친구, 건강, 개인적 자유, 그리고 개인적 가치이다. 미국 시카고 대학의 국립여론연구센터(National Opinion Research Center)에서 수행하는 미국일반 사회조사(U. S. General Social Survey)에 따르면 처음 다섯 가지는 그 중요성의 차례이기도 하다.37)


재정상황은 고작해야 현대인의 행복구성요소의 둘째 요소에 불과하지만 굳건한 가족이나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던 근대인들에게는 알파고 오메가였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요소들이 급격하게 약화되고 있다.


이는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용어를 빌어서 말한다면 사회체제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내지 신민화의 결과이다.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사회체계가 오히려 그 기초가 되는 생활세계를 해체하는 현상이 바로 이러한 상황이다.38)

이런 의미로 근대적인 행복이해는 재정상황 외의 행복의 구성요소들에, 특히 인간관계들에 부정적으로 작용함으로써 행복을 침식하고 불행을 생산하고 있다.39)

 

37) Layard, pp. 62-63.
38) Habermas, Theorie der Kommunikativen Handelns II, Suhrkamp, Frankfurt 1985, p. 293,452.
39) 이와 관련해서는 김성동, 『아버지는 말하셨지 너희는 행복하여라』, 철학과현실사, 서울 2007, p. 27, pp. 114-125 참조. 

 

다. 지속 불가능한 성장

 

물질적 풍요를 통하여 인간의 행복을 확보하고자 하는 근대의 시도가 일정한 경제수준 이상에서는 더 이상 성과를 거두지 못하며 오히려 인간의 행복을 저하시키는 결과까지도 가져올 수 있지만, 이러한 것들보다 더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자원의 한계이다.


앞에서 참조한 도표의 오른쪽에 자리한 사람들은 인류의 20%에 불과하다.40) 그들만의 풍요로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오늘날 당장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석유자원은 물론이고 맑은 물이나 신선한 공기와 같은 자원의 희소성이 대두되고 있다.


모든 인류가 이러한 방식의 삶을 영위한다고 한다면 지금보다 4배 이상의 자원이 필요할 것인데, 과연 이러한 자원요구를 지구가 견디어 낼 것인지 사뭇 의심스럽다.41) 이런 관점에서도 근대적 행복이해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40) 더닝, 『소비사회의 극복』, 구자건 옮김, 따님, 서울 2001, pp. 22-23; 이규, 『슬로라이프』, 김향 옮김, 디자인하우스, 서울 2005, pp. 173-174.
41) 여기서는 이러한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속 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이미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입증하였다고 가정한다. 

 

4. 인간의 행복능력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근대적 행복이념의 전환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행복에 대한 탈근대적 접근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 비해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행복에 대하여 훨씬 풍부한 정보를 가지게 되었다. 탈근대적 행복 이해는 바로 이러한 지식들을 배경으로 설정될 수 있다.

 

가. 사회생물학으로부터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진화론적 입장에서 설명하려고 시도한 사회생물학은 다양한 비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행복에 대한 한가지 유력한 설명방식인 것은 분명하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은 유전자의 성공적인 전달을 위하여 도움이 되는 행위를 보상하는 도구적 장치이다.


하지만 인간의 환경이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도구적 장치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사회생물학은 진단한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행복에 대한 진화론적 접근법은 더 이상 유용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고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인류가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 것은 1만 년 전 신석기혁명과 더불어 농업과 목축업을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인간의 유전자와 원숭이의 유전자를 비교하면 700만 년42), 발견된 화석을 기준으로 하면 450만 년43)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인류에게 1만 년이란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 이전에 인류는 늘 부족한 상황에서 살아갔으며, 오늘날 야생의 동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먹을거리를 소유한다는 것은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먹을거리와 같은 의식주의 필요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몇 백만 년의 역사가 우리의 본능이 되었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 이후의 인류의 삶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더 이상 우리는 그런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지 않다. 하지만 진화의 과정은 더디기 때문에 이러한 신속한 상황변화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런 절대결핍의 상황을 벗어난 지 꽤 되었지만 우리의 본능은 예전의 메커니즘을 그냥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사회생물학을 주창했던 미국의 생물학자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을 예로 들어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마오리족은 좁은 영토 내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구조절이 필요했고 이러한 인구조절을 부족 사이의 전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호전적이었다.


하지만 백인들이 총을 뉴질랜드에 도입하자 10년도 안 되어 인구의 25%가 감소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과거에 종족의 생존에 유리했던 본능이 문화의 간섭으로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응가 푸이족은 과연 복수를 위해 총을 사용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 후 전통적 가치들은 무너졌다. … 전체 마오리족은 집단적으로 급속히 기독교로 개종했고 부족 사이의 전쟁은 전면 중단되었다.44)"

 

사회생물학은 마오리족의 호전성이나 의식주에의 집착과 같이 과거의 진화과정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효율성을 상실한 메커니즘을 근사 메커니즘(proximate mechanism)이라고 일컫는다. 이에 반해 그 효율성을 유지하고 있는 메커니즘은 궁극 메커니즘(ultimate mechanism)이라고 한다.45)

 

인간의 물질에 대한 집착은 본능적이다. 생리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수립된 본능은 오늘날에도 근사메커니즘으로서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피임약이나 피임도구로 인하여 섹스가 더 이상 종족번식의 수단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인간이 여전히 성에 탐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수입이 더 이상 개체보존이나 종족번식의 수단, 달리 말해 유전자 적합성을 확보할 수단으로서의 한계효용을 상실한 상황에서도 수입에 탐닉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현명한 마오리족과 같이 우리의 본능에 충실할 것인지를 숙고해야 하다. 독일의 인간학자 셸러(Max Scheler)에 따르면 인간의 세계개방성(Weltoffentheit)은 인간이 본능의 통제에 대하여 ‘아니오’ 라고 말함으로써 약속하고 자살할 수 있게 해준다.46) 이처럼 우리가 궁극 메커니즘을 벗어날 수 있다면 당연히 근사 메커니즘도 벗어날 수 있다.

 

42) 다이아몬드, 『제3의 침팬지』, 김정흠 옮김, 문학사상사, 서울 1996, p. 54.
43)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가장 오랜 화석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인데 대략 450만 년 전에 존재했다고 믿어진다.
44)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서울 2000, pp. 167-70.

45) 근사 메커니즘과 궁극 메커니즘은 다음의 글과 같이 이타주의의 진화에 대한 논의에서 주로 원용되고 있다. 

 

나. 신경과학으로부터

 

최근에 들어 인류는 자신의 두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을 손에 넣었다. 뇌파기록장치(EEG: electroencephalogram)나 자기공명장치(MRI: magnetic resonance imaging)나 양전자방사단층촬영법(PET: positron emission tomography)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장치들의 도움을 받아 연구자들은 인간의 행복과 인간의 두뇌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신경과학자인 다마시오(Antonio Damasio)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행복을 포함한 모든 감정은 뇌가 몸으로부터 신호를 받아 이것을 가공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최고의 행복을 느끼는 순간에도 … 우리의 도취감은 우리 자신의 몸을 감각적으로 인지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
그러나 … 육체적 느낌을 이미 충분히 경험한 사람의 경우 그의 뇌는 몸을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 환상의 이미지가 내면의 눈앞에 펼쳐지듯이, 뇌 간은 실제로 전혀 접수하지 않은 육체적 느낌을 가장할 수 있다.47)"

 

이러한 연구 성과의 의미는 인간의 행복이 환경과 신체와의 상호작용에 달리 말하자면 세계에 반영에 달려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상호작용을 가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행복은 연습에 의하여 달리 말하자면 독립적인 기획에 의해서 증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좋은 느낌은 운명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좋은 느낌을 얻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46) 셸러,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 진교훈 옮김, 아카넷, 서울 2001, p. 67, 71, 93.
47) 클라인, p. 37.

 

이러한 태도는 에피쿠로스나 스토아학자들이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 간에 그것을 이성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불행으로 받아들일 상황조차도 행복으로 전환하려고 했던 태도와 서로 통한다. 물론 현대인들은 단순한 이성적 수용이 아니라 훨씬 전술적 접근을 통하여 행복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이러한 태도는 특히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이 가지게 된 하나의 근사 메커니즘 때문에 더욱 필요하다. 그것은 좋은 느낌보다 나쁜 느낌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인데, 나쁜 소식은 모든 신문에서 기쁜 소식보다 더 큰 머리기사로 처리된다.


공포라든가 슬픔 또는 분노를 통해 우리의 선조들은 덤불 속에서 조금이라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경우 아무리 탐스런 사냥감이 있더라도 다 버려두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비극에 대한 이러한 반응 체계는 진화의 과정에서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


이런 까닭에 우리의 본성은 행복보다는 불행을 더 쉽게 느끼고 오래 기억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의 정확한 반영이 결코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안전하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을 연습해야 한다.


신경과학이 지적하는 행복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신념들 중의 다른 하나는 행복은 불행이 없는 상태이거나 불행은 행복이 없는 상태라는 믿음이다. 우리는 시소게임을 하는 두 명의 아이들처럼 언제나 한 쪽만이 높이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철학적 전통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해온 것이고48) 그래서 논리적인 것같이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쾌감과 고통은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유쾌하지 않은 감정이 때로는 좀 더 많이 일하고 때로는 적게 일한다든가, 최고의 행복을 느끼는 순간에는 완전히 중단되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뇌 안에는 유쾌한 느낌과 유쾌하지 않은 느낌을 생산하는 두 개의 체계가 나란히 공존하고 있다. 이 두 체계는 함께 일하고 나란히 일하며, 때로는 서로 상대방에 대항해서 일한다.49)"

 

일반적으로 앞이마의 왼쪽 뇌가 활성화될 때 행복감이, 그리고 오른쪽 뇌가 활성화될 때 불행감이 느껴진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둘이 같이 활성화될 수도 있으며, 이 둘과 연결된 뇌의 다른 부분들은 서로 겹치기도 한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시원섭섭한 감정이나 달콤쌉쌀한 초콜릿처럼, 우리는 동시에 행복하고 불행할 수 있다. 또 금방 행복하다가 금방 불행해질 수 있으며 그 역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금욕주의자들처럼 불행을 피하는 것이나 쾌락주의자들처럼 행복을 덧붙이는 것만은 아니다. 이 둘을 모두 하는 것도 또한 가능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경과학은 우리의 행복과 불행이 전통적 견해에서 처럼 서로 배척하면서도 전통적 견해와 달리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불행을 축소시키고 행복을 증대시키는 훈련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통증을 일으키는 고추맛을 즐기는 것이 가능하듯이, 불행을 일으키는 자극들에 적응하거나 대안적인 자극들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50)

 

48)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는 “쾌락의 양의 한계는 고통스러운 모든 것의 제거이다. 쾌락이 현전할 때는 그것이 있는 한 육체나 마음의 고통 그리고 동시적인 그 두 가지 고통은 결코 없다.”라고 지적하였다.(Epicurus, "Leading Doctrines", Cahn & Vitrano, p. 17)

49) 같은 책, p. 56.
50) 같은 책, p. 77.

 

 

다. 긍정심리학으로부터

 

1950년대 후반에 이미 심리학에는 이전의 심리학과 달리 인간의 심리적 불행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를 문제 삼기보다 인간의 심리적 행복을 어떻게 고양시킬 것인가를 고민한 연구자들이 있었다.

매슬로(Abraham Maslow)와 로저스(Carl Rogers) 등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인문주의 심리학(humanistic psychology)이라는 새로운 경향을 창조하였다.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결핍욕구와 존재욕구로 구분했는데, 결핍욕구는 충족되지 않았을 때 불쾌감을 주지만 충족되면 그러한 불쾌감이 없어지는 그러한 욕구이고, 존재욕구는 충족되지 않아도 불쾌감은 없지만, 충족되면 쾌감을 주는 그러한 욕구이다.


매슬로가 결핍욕구(deficiency need)로 들고 있는 것은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과 사랑의 욕구, 존경의 욕구이다. 목이 마른 것과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에 따르면 불쾌감을 준다. 목마름이 가시고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으면 불쾌감은 사라지지만 이전의 불쾌감과 비교하여 쾌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쾌감은 곧 사라진다.

 

매슬로가 들고 있는 존재욕구(being need)는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은 쾌감을 만들어내고 이는 결핍욕구의 충족 때처럼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상당기간 지속된다. 예술가가 창작 작업을 하거나 자원봉사자가 다른 사람을 도울 때 느끼는 쾌감은 결핍욕구의 충족에서 오는 것과는 달리 상당 기간 지속된다.51)


인문주의 심리학을 계승하여 무엇보다도 인간의 행복을 주목하는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의 대표자들52) 중의 한 사람인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lyi)는 쾌락(pleasure)과 열락53)(enjoyment)을 구분하고 있다. 매슬로와 비교하자면 쾌락은 결핍욕구의 충족에 따르는 쾌감이지만 열락은 존재욕구에 따르는 쾌감이다.


근대적인 행복 이해에 따르면 행복이란 물질에 따르는 쾌락을 경험하는 것이다. 맛있는 식사, 멋진 섹스, 돈으로 살 수 있는 갖가지 안락함과 편리함 따위들이 그것들이다. 이런 쾌락은 생물학적 프로그램이나 사회적 환경에 의해 설정된 기대 수준이 충족되었다는 정보를 우리가 의식하게 될 때 느끼는 만족감이다.


이러한 쾌락은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삶의 질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이나 그 자체로 행복을 가져오지는 못한다. 이것은 불행을 해소시키기는 하지만 자아를 성장시켜 주지는 못한다. 자아를 성장시켜주는 것은 사람들이 재미가 있었다기보다는 보람이 있었다고 말하는 일들이다. 그는 이러한 일에 대한 경험들에 플로우(flow)54)라는 이름을 붙였다.

 

"[플로우 즉] 최적 경험이란, 주어진 도전을 잘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목표가 명확하고, 분명한 규칙과 즉각적인 피드백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흔히 우리는 플로우를 경험할 때 집중의 정도가 매우 높아서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도 없고 걱정도 사라진다. 또한 그 순간에는 자의식이 사라지고 시간이 흘러가는지도 인식하지 못한다. 플로우를 유발하는 활동은 너무나 만족스럽기 때문에, 스스로 그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55)"

 

막상막하의 상대와 테니스 시합을 하여 가까스로 상대방을 굴복시켰을 때 사실 플레이어는 몹시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 놓여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열락을 느낀다. 그의 기분은 최고이고 그는 최적 경험(optimal experience)을 한다.


사람들이 특히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생물학적이나 사회적으로 프로그램된 행동 이상의 것을 성취하는 동안 플로우에 빠지고, 플로우에 빠졌을 때는 사실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지만, 주로 그 일이 끝났을 때 비로소 열락을 느낀다. 이렇게 경험되는 열락은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의 자아는 확장되고 복합적으로 된다는 것이 칙센트미하이의 지적이다.
과거의 철학자들이라고 열락을 모르지 않았겠지만 그들은 이러한 경험이 높은 지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귀족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56) 하지만 현대와 같은 평등사회에서 열락은 특별한 지성을 요구하기보다 일상적인 상식적인 통찰로 충분하다고 본다.


이러한 긍정심리학의 관점에 따르면 행복을 쾌락에 한정시키는 것은 행복의 반쪽만을 이해하는 것에 불과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행복을 왜곡시키는 일이 된다. 행복은 쾌락과 열락을 포괄하고 있으며, 특히 풍요한 사회에서 행복은 쾌락보다는 열락에 더욱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51) Maslow, Motivation and Personality, Harper & Row, New York 1970, pp. 35-58.
52) 긍정심리학의 다른 대표자는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의 긍정심리학센터를 이끌고 있는 Martin Seligman이다.
53) 번역서에서는 이를 단순히 ‘즐거움’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쾌락과 구별되는 즐거움을 표시하기 위하여 ‘희열’에서 ‘열’자를 가져와 ‘열락’이라고 옮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이 글에서는 열락으로 새겼다.
54)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최적 경험을 묘사할 때, ‘마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느낌’ 또는 ‘물 흐르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칙센트미하이, 『플로우: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 최인수 옮김, 한울림, 서울 2004, p. 87.
55) 같은 책, p. 140.

56)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행복이 활동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노예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관조적 활동이라고 지적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pp. 369-71. Schoch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을 활동이라고 부른 까닭은 그것이 기술, 집중, 초점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Schoch, The Secrets of Happiness, Scribner, New York 2006, p. 16. 

 

5. 인간의 행복에 대한 새 이념

 

근대의 정치적 혁명과 더불어 수립된 행복 이해는 시대적 변화에 의해서 그 한계가 이미 노정되었다. 이스털린의 역설이 지적하듯이, 인간의 물질적 풍요가 증대해도 더 이상 행복은 증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물질 바깥의 영역에서 행복이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역설은 새로운 행복 이해를 요청하고 있으며, 이러한 탈근대적 행복 이해는 보다 정교해진 인간 이해에 근거하여야 한다.

 

가. 탈근대적 행복 이해

 

탈근대적인 행복 이해는 근대적 행복 이해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근대적 행복 이해에 제한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정 수준 이상에서 근대적 행복 이해를 유지하는 것은 행복의 증진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행복의 다른 구성요소들에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탈근대적 행복 이해의 첫째 명제는 다음과 같다. 

 

"명제1: 인간의 행복에서 물질적 풍요는 중요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인 의식주의 욕구가 충족되는 수준57)까지이다. 이 수준을 넘어설 경우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나, 행복의 다른 구성요소들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하여, 물질적 풍요를 지향하는 우리의 근사 메커니즘을 통제하여야 한다."

 

이러한 명제에 따른다면 사회조직은 기본적인 의식주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사회의 구성원에게 필요한 지원을 하여야 하며, 세계시민적 입장에서 보면 기본적인 의식주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회 조직에 대하여 원조하여야 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의식주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의 추가적인 물질적 풍요를 위하여 사회적 조직이 노력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한 노력은 그러한 구성원의 물질적 풍요 외의 행복을 저해하거나 지속 불가능한 성장으로 인하여 다음 세대의 물질적 풍요를 박탈하는 잘못을 범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의 구성원들은 마오리족이 호전적인 전사로부터 평화 애호적인 기독교도로 개종하듯이, 물질주의로부터 인간주의로 개종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본능적 물질주의가 근사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전파되고 인정되고 수용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필요로부터 둘째 명제가 도출된다. 

 

"명제2: 인간의 행복이 외적 환경과 신체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어 물질적 제약과 풍요는 인간이 주관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객관적인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상호작용의 결과들인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인간은 의식적인 반작용을 수행함으로써 보다 행복한 삶을 지향해야 한다."

 

탈근대적 행복 이해의 둘째 명제는 행복에 대한 의식을 요구한다. 근대에 인간들은 먼저 시간에 대한 의식을 강요당했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인간은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일하고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휴식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익혀야 했다.58) 소비사회에 들어서 인간은 수입에 대한 의식을 소유해야만 했다. 자신의 수입과 소비를 균형 잡는 방식을 익히지 않고서는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59)

 

탈근대를 지향하고자 한다면 인간은 이제 행복에 대한 의식을 소유하여야 한다. 행복의 정체와 행복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지지 않고서는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복에 대한 의식은 에피쿠로스에까지 소급되는 자유인이 내적인 노력을 통하여 성취해야 할 교양이기도 하다. 하지만 탈근대를 지향하는 자유인의 교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교양에 대한 필요로부터 셋째 명제가 도출된다.

 

57) 이러한 수준이 정확히 어디까지인가는 개인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개인적 선택의 문제이거나 사회적 합의의 문제이다.
58) Mumford, Technics and Civilization, Harcout Brace, San Diego 1934, p. 14; 엘루, 『기술의 역사』, 박광덕 옮김, 한울, 서울 1996, p. 341.
59) 보드리야르, p. 106. 

 

"명제3: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 풍요에서 비롯되는 쾌락을 넘어서, 건강, 가족, 일과 취미, 교우를 통하여 열락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을 확장시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소유를 통하여 쾌락의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활동을 통하여 열락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노력하고 서로 도와야 한다."

 

쾌락에 대한 열락의 우선성은 사실 근대에서의 두 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열락의 특징 중의 하나는 시간의식의 상실이다. 노동과 휴식의 구분을 가져온 시간에 대한 의식은 근대의 인간이 새롭게 가지게 된 특징이지만 탈근대인은 이러한 시간의식을 넘어선다. 이럴 때 넘어선다는 것은 휴식과 구분되지 않는 노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열락의 다른 특징은 자기목적성이다. 자기목적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 보상이 되기 때문에 다른 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근대의 인간에서 노동과 수입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었으며 우리는 임금노동자를 노동자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탈근대인은 이러한 노동과 수입과의 결합을 넘어선다. 이러할 때 넘어선다는 것은 수입과 무관한 노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러한 점들에서 탈근대적인 행복 이해는 근대적 행복 이해와 첨예하게 대립된다. 

 

나. 탈근대적 행복 이해의 실천적 요구들

 

이와 같이 탈근대적 행복 이해를 설정할 수 있다면,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과제들이 있게 된다. 사회적 의사는,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개인들의 의사의 반영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근대적 개인들이 이러한 탈근대적 행복 이해를 인정하고 실천하는 과제를 갖게 된다.


중세와 근대가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대립하였던 것처럼, 근대와 탈근대도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또한 대립한다. 중세가 신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건축했던 것에 반해 근대가 인간의 겸손을 위하여 공장을 건축한 것처럼,60) 근대가 물질적 쾌락을 위하여 인간의 삶을 조직한 것에 반해 탈근대는 정신적 열락을 위하여 또한 인간의 삶을 재조직하여야 한다. 이러한 재조직의 과제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근대의 행복 이해는 가정을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다.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복이 불안해진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탈근대의 행복 이해는 가족생활을 행복의 최고원천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가족관계가 상당한 물질적 풍요보다 중요한 행복의 원천이라는 점이 실천되어야 한다.61)


가정이 소비를 통하여 쾌락을 누리는 장소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한 쾌락을 위하여 가정의 유지와 성장이 희생되어서는 아니 된다. 일정한 시간 이상을 가족의 구성원들이 공유하여야 하며, 그러한 공유된 시간은 대중매체로 쾌락을 도출하는 시간이 아니라 공동의 대화와 활동으로 열락을 도출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근대의 가정과 학교에서 강조되어진 인간적 덕성은 능력이었다. 학생들은 그 어디에서건 좋은 성적과 좋은 학교로의 진학만을 강요받았다. 공부와 놀이는 분리되었으며 미래의 쾌락을 위하여 현재의 열락은 포기되었다. 같이 학습하는 동료들은 친구가 아니라 적수가 되었으며, 복합적인 인간이 아니라 정답을 생산하는 응답기로 양성되었다.


탈근대에서는 이러한 능력과 효율성 위주의 교육은 넘어서져야 한다.
특히 초중등교육은 경쟁이 아니라 우정을 경험하도록 구성되어야 하며,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는 일이 아니라 정신적 열락을 가져오는 일을 발견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져야 한다. 지식 위주의 교습이 아니라 덕성과 신체가 조화되는 교육이 강조되어야 한다.


퇴니스가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를 구분한 것은 지극히 근대적인 발상이었다. 기업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조직이라는 이해는 근대적 행복 이해의 소산이다. 기업도 학교와 마찬가지로 협동사회로서의 특징을 지닐 수 있고 지녀야 하며, 직업생활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경쟁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물질이지 결코 행복이 아니다.


탈근대적 행복 이해에 따르면 직업생활은 쾌락의 근거가 되는 수입이 발생하는 장소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열락의 근거가 되는 놀이가 수행되는 장소이여야 한다. 사용자와 노동자는 기업의 운영원칙과 기대하는 노동의 성과를 근대적 행복 이해에서와 달리 파악해야 한다. 쾌락과 열락을 동시에 산출하는 기업관이 견지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 내지 정부가 탈근대적 행복 이해를 실천하기 위하여 수행해야 할 과제는 근대적 사회 내지 정부가 해야 했던 일과는 상당히 다르다. 사회의 기본단위이자 행복의 제일원천인 가정을 보호하고 지원해야하며, 기업이 이익사회로서의 특징보다 협동사회로서의 특징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하며, 특히 물질적 풍요의 확보보다는 일거리를 제공하고 인간관계의 장을 확보하는 데에 정책적 지향을 두어야 한다.

 

60) 바타유, ?저주의 몫?, 조한경 옮김, 문학동네, 서울 2004, p. 175.
61) 세계가치조사에 참여했던 캐나다의 경제학자 John Helliwell은 결혼이 10만 달러, 별거와 이혼은 -7만 달러, 가족이 자주 만나는 것은 7만 달러의 수입만큼 행복을 증진시킨다고 환산하였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손실은 실업과 질병으로 -30만 달러의 수입손실에 해당한다고 보았으며, 친구와 자주 만나거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12만 달러, 어떤 집단에 소속되거나 이웃과 자주 접촉하는 것은 3만 달러의 수입상승과 맞먹는다고 파악하였다. http://www.gpiatlantic.org/conference/program02.htm 

 

다. 탈근대적 행복의 전망

 

오늘날 행복에 대한 경험과학적 연구들은, 비록 동일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훨씬 전에 제시되었던 철학적 결론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결론들을 제시하고 있다. 물질은 인간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종속시키며, 이러한 종속은 인간을 피상적으로 행복하게 할 뿐 본질적으로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산업혁명을 통하여 생산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풍요로운 물질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소수였기 때문에 물질의 풍요가 가져오는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경험적으로 접근할 기회가 없었으며 오직 사변을 통하여 접근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경험적으로 접근하여 이미 철학적 결론들을 확인하고 있다.


쾌락으로 인간이 행복에 이를 수 없으며 열락을 통해서만 온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명제를 이제는 부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명제는 개인적인 삶이나 사회적 삶의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실천적인 요구들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간략하게 다루기는 하였으나 보다 구체적인 논의들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이어져 온 하나의 철학적 전통이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고대의 행복 이해를 답습하지는 않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탈근대적 행복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 이 글은 그러한 탈근대적 행복 이해를 발의하는 하나의 몸짓이다.  

 

참 고 문 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