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일반

칸트의 물음: “인간은 무엇인가?”

rainbow3 2019. 10. 19. 01:24


칸트의 물음: “인간은 무엇인가?” 

 

강영안(서강대)

 

【주제분류】서양철학
【주제어】칸트, 인간학, 철학적 인간학, 세계 시민의 관점에서 본 철학 개념


【요약문】이 글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칸트의 물음이 제기되는 자리와 맥락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칸트의 두 철학 개념에 다시 주목할 뿐 아니라 이 물음이 칸트의 초기철학부터 말년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가진 기능과 역할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첫 부분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이 세 가지 물음이 등장하는 맥락, 곧 ‘이성의 관심’ 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이성의 본성적 필요에 따라, 이성이 나아가야 할 목적지가 드러난다.

이어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칸트의 물음은 타인과 함께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세계, 곧 자연 환경과 사회 속에서 삶을 가꾸어야 가야 할 ‘세계거주민’ 으로서의 인간에 관해서 묻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문헌으로 볼 때 칸트의 질문은 그의 철학의 후기, 또는 그의 말년의 철학에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물음은 마치 목적지처럼 칸트철학을 그곳으로 향하도록 이끌어준 물음이다. 그런데 칸트의 초기 문헌을 통해 이미 이른바 칸트의 ‘인간학적 전회’가 일어났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칸트 철학을 뒤에서 밀어준 물음이었다. 이 글의 후반부는 칸트의 앞 선 세 물음이 ‘세계시민’ 또는 ‘세계 거주민’의 관점에서 다시 물어볼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앞 선 세 물음의 성격을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드러내며, 이 물음에 대한 칸트의 답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그 답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어떤 지평을 다시 새롭게 열어주는지를 탐구해 보는 것이 후속 과제임을 끝으로 확인한다.

 

“...in cuius oculis mihi quaestio factus sum”
(Augustinus, Confessiones, 10, 43, 50)

 

 

I. 들어가기: 칸트의 물음

 

지난 세기 철학 가운데, 영미철학이나 프랑스철학 전통 보다 유독 독일 언어권의 철학 전통에서 ‘철학적 인간학’이란 이름을 가진 철학의 한 분과가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예컨대 막스 셸러나 미카엘 란트만, 아르놀트 겔렌, 헬무트 플레스너, 에메리히 코레트 등 몇몇 철학자들의 철학적 인간학이 국내에서 소개되고 이 가운데 몇몇 철학자에 대해서는 국내 학자들이 연구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1)

그런데 유독 독일철학 전통에서 철학적 인간학이 활발하게 논의된 까닭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19세기 말 심리학과 생물학, 사회학 등 신생 학문의 등장에 대한 철학자들의 반응, 특히 이 가운데서도 후설 현상학의 영향을 받아 전통 철학에 대한 관심 보다는 현상 자체, 문제자체를 두고 실재론적으로 철학을 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출현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나는 추정해 본다. 철학의 성격은 다르지만 막스 셸러나 하이데거는 이들 부류의 철학자에 들어간다.

 

추정컨대 칸트 철학도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관심이 유독 독일 전통에서 강하게 일어난 배경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칸트 철학이 독일어권의 철학적 인간학의 형성과 발전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고 나는 주장하지 않는다.

국내의 한 칸트 연구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철학적 인간학을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세운 철학자들은 칸트 철학에서 차지하는 인간학의 위치를 사실은 과소평가했다.2)

칸트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도 칸트의 인간학이 그의 전체 철학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논란을 해 온 사실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반응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판단하기로는 20세기의 현상학과 더불어 칸트철학이 독일 전통의 철학적 인간학의 부상과 형성의 한 요인으로 보는 것에는 아마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칸트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대학 전통에서 철학적 인간학을 거의 최초로 강의한 철학자이고 그의 인간학 강의록은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상당히 많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근대 철학사를 쓴 피오베사나를 따르면 일본에 최초로 소개된 서양철학서적 두 권 가운데 한 권이 칸트의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이다. 19세기 중엽 네덜란드인 자격으로 일본에 들어온 뵈딩하우스(C.E. Boedinghaus) 라는 상인이 이 책을 일본에 가져왔다.3) 칸트의 인간학 책을 선원이 손에 넣어 다닐 정도라면 그 책이 어느 정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지를 짐작할 수 있다.

 

1) 독일어권에서 철학적 인간학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국내에서 철학적 인간학의 수용과 관련해서 백승균, 『헬무트 플레스너의 철학적 인간학』, 계명대학교출판부, 2005, 5~19/23~29 참조.
2) 김수배, 「칸트의 인간관 - 실용적 인간학의 이념과 그 의의」, 『철학연구』,제37집, 1995, 171~191. 그 가운데서 172~173 참조.

3) K. Gino/S. J. Piovesana, Recent Japanese Philosophical Thought 1862~1962. A Survey, Japan, 1963, 5. 다른 책은 G. H. Lewes(1817~1878)의 A Biographical History of Philosophy (1843) 이었다.

 

 

칸트는 대학에서 자연 지리학을 오래 동안 가르치면서 인간학 강의의 필요를 느끼고 1772/1773년부터는 자연 지리학과 인간학을 매년 여름 학기와 겨울에 번갈아 말년까지 강의할 정도로 인간학 강의에 관심을 쏟았다. 그의 인간학 강의는 그가 죽기 6년 전인 1798년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1800년 수정판)으로 출판되었다. 인간학 강의와 관련해서 그가 쓴 원고들은 학술원판 『칸트전집』15권(15,1과 15,2)으로, 여러 시기에 걸쳐, 여러 사람들의 손을 통해 기록된 강의록은 『칸트전집』25권(25,1과 25,2)으로 출판되었다. 칸트의 철학적 인간학의 전모를 드러내고 인간학이 칸트 철학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려면 이 문헌들을 철저히 검토하고 전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분야는 칸트 연구자들에게조차 아직 많은 부분 미답지로 남아있다.

 

그런데 칸트의 인간학 강의가 그의 철학적 인간학을 담고 있는가 하는 물음과 관련해서 칸트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다시 말해 칸트의 인간학을 철학 전체 분야와 관련해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하나의 입장은 칸트의 인간학을 경험 심리학의 연장선에서 보려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본다면 칸트가 강의한 인간학은 철학적 중요성을 잃게 된다. 그것은 기껏해야 심리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와는 달리, 칸트의 인간학을 경험 심리학과는 별개로 세계에 대한 칸트의 관심, 다시 말해 세상에서 성숙한 인간으로, 자신들의 삶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실천철학이요, ‘경험의 철학’으로 이해하는 입장이 있다.4)
이 입장을 따르면 칸트의 인간학은 칸트의 비판철학과 이론적으로 상관관계를 가질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함’이라는 계몽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철학이다.

 

이 글에서 나는 칸트의 인간학과 그의 인간학 강의를 포괄적으로 다루거나 그 가운데 한 주제를 골라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렇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칸트의 물음, 곧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자세히 들여다 볼 것이다. 칸트는 물론 이 물음만을 던지지 않았다. 칸트의 저작에는 수많은 물음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문제를 생각할 때 역시 이 물음이 칸트에게서 중요한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아마도 칸트가 처음 던진 물음은 아닐 것이다. 칸트 이전에 다른 철학자가 이 물음을 던졌거나 이와 비슷한 물음을 던졌을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우리가 함께 던지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적어도 칸트 이후에는 대부분 칸트가 물음을 던지고 이해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칸트 이후 철학에서 널리 퍼졌다.

트가 던진 방식으로 이 물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는 이 물음을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라는 세 가지 선행된 물음에 이어서, 이 물음들과 함께,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이 물음들의 틀 안에서 이 물음을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걸음 물러서서 물어보자.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왜 이 세 가지 물음과 함께 물어야 하는가? 이것은 전혀 자명한 일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자명하지 않다면 왜 자명하지 않는가?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이 우리가 철학하는 활동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먼저 해명해 보려고 애쓰지 않을 수 없다. 칸트는 왜 “인간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왜 이것을 저 세 물음을 물은 다음에야 물으며, 왜 저 세 물음이 모두 마지막 네 번째 물음과 연관된다고 말하는가?

 이것을 해명해 보는 일을 나는 이 글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먼저 칸트의 물음이 등장하는 자리를 확인하고, 이어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세 가지 물음이 제기되는 맥락을 살펴보고(II절) 네 번째 물음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되는 맥락을 칸트의 두 철학 개념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것이다(III절). 그리고 끝 부분에서 앞선 세 물음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연관 관계(IV절)와 칸트에게서 인간이 문제가 된 까닭을 생각해 볼 것이다(V절).

 

4) 두 번째 입장을 최근에 가장 강하게 대변한 사람으로는 윌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Holly L. Wilson, Kant's Prgamatic Anthropology. Its Origin, Meaning, and Critical Significance, Albany/NY, 2006 참조.

 

 

II. 칸트의 물음이 등장하는 자리와 맥락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칸트의 물음은 예쉐(Gottlob Benjamin Jäsche)가 편집한 『칸트의 논리학: 강의를 위한 교본 (Immanuel Kant's Logik. Ein Handbuch zu Vorlesungen)』에 등장한다(앞으로 이 책은 『논리학』이라 부른다).

먼저 그곳으로 가서 물음이 등장하는 자리를 확인해 보자. 모두 10절로 나눈 서론 가운데서 세 번째 부분에서 칸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러한 세계 시민적 의미에서의 철학의 장(場)은 다음 물음들로 펼쳐진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4) 인간은 무엇인가?

 

첫 번째 물음은 형이상학이, 두 번째 물음은 도덕이, 세 번째 물음은 종교가, 그리고 네 번째 물음은 인간학이 답한다. 그러나 근거에서 볼 때 이 모든 것들은 인간학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세 가지 물음은 마지막 물음에 관계하기 때문이다.5)"

 

여기서 칸트는 철학의 장(場), 철학의 마당, 다시 말해 철학이 자신을 펼치고 일하고 놀 수 있는 장소 또는 영역(das Feld der Philosophie)으로 세 가지 물음을 지목한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해 답을 해 줄 수 있는 영역으로 칸트는 형이상학과 도덕, 종교, 인간학을 거명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곧 네 가지 물음과 네 가지 물음에 대해 답을 해 줄 수 있는 영역은 “근거에서 볼 때 인간학으로 보아도” 될 것인데, 그 까닭은 앞의 세 물음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세 물음에 모두 ‘관계’ 하기 때문이라고 칸트는 덧붙인다. 이와 거의 비슷한 내용은 푈리츠의 형이상학 강의 노트에도 나온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할 것이다).6)

 

5) I. Kant, Logik, Physischen Geographie, Pädagigik, Kant’s gesammelte Schriften, hrsg. Königlich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Leibzig, 1923, Bd. IX, 25.

6) Kant's Vorlesungen: Vorlesungen ueber Metaphysik und Rationaltheologie (hrsg. Akademie der Wissenschaften zu Göttingen), Kant’s gesammelte Schriften, hrsg. Deut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zu Berlin, Berlin, 1970, Bd. XXVIII, 2.2,533~4.

 


그런데 앞의 세 물음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이미 한번 등장한 적이 있는 물음들이다. 이 물음이 나타나는 부분을 보자.

 

"나의 이성의 모든 관심(즉 사변적 관심 및 실천적 관심)은 다음의 세 물음으로 통합된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첫째 물음은 순전히 사변적이다. (내가 자부하는데)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가능한 모든 답변들을 남김없이 파헤쳤으며, 마침내 이성이 충족할 수밖에 없고, 만약 이성이 실천적인 것으로 주목하지 않는다면 또한 만족할 이유도 갖게 되는 답변을 발견하였다. (중략)

둘째 물음은 순전히 실천적이다.
이 물음은 실천적인 것으로서 순수이성에 속하기는 하나, 그럼에도 초월적이지는 않고 도덕적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 비판 그 자체에게 일거리 일 수는 없다.

셋째 물음, 곧 “내가 행해야 할 것을 행했다면, 나는 그 때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은 실천적이면서도 동시에 이론적이다. 그래서 실천적인 것은 단지 이론적인 물음의 답변을 위한 실마리로서, 만약 이 물음이 높이 올라가면, 사변적 물음에까지 이른다. 무릇 모든 희망은 행복을 지향하고, 실천적인 것 및 윤리법칙과 관련해 있는 것은, 지식과 자연법칙이 사물들의 이론적 인식에 대하여 있는 것과 똑같다. 전자는 마침내 어떤 것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어떤 것(최상의 가능한 목적을 규정하는 것)이 있다는 추론에 귀착하고, 후자는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기때문에, 어떤 것(최상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있다는 추론에 귀착한다.7)"

7)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Kant's gesammelte Schriften, hrsg. Königlich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1911, Bd. III, 522~523 (B판 832~833). 『순수이성비판』은 앞으로 통상 방식대로 A/B판으로 인용한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 물어보자. 두 텍스트 사이에 어떤 어울림이나 어긋남이 있는가? 무엇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논리학』에 나오는 ‘철학의 장(마당, 장소, 영역)’이란 표현과 『순수이성비판』에 나오는 ‘이성의 관심’이란 표현이다. 우리 모두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의 정당한 사용의 원천이 무엇이며, 어디까지 사용의 범위가 미치며, 이성 사용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요소론」 부분에서는 이성 사용의 원천과 범위와 한계를 드러내는 작업을 엄밀하게 수행한다. 이 작업을 마친 후 순수 이성을 통해 지을 수 있는 집의 설계도를 보여주는 「초월적 방법론」 부분에서 칸트는 앞에서 인용한 세 가지 물음을 던진다. 그런데 이 물음을 칸트는 ‘이성의 관심’이란 이름으로 묻고 있다. 『논리학』과 여타 다른 강의록에서는 ‘철학의 장(마당, 장소, 영역)’을 명시하는 방식으로 네 가지 질문을 제시한다. 이 변화를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관심’(Interesse)은 비판기의 칸트의 주요 저작에 모두 등장하는 용어로 칸트가 이해한 이성의 본질과 밀접하게 연관된 용어라는 사실을 지적해 두자. 이성은 칸트에게서 단지 추론하고, 종합하고, 통일하는 능력에 멈추지 않는다. 이성의 이러한 활동의 바탕에는 인간 자신의 이익과 손해와 관련해서 최대한 열정을 가지고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무엇을 추구하고 선택하게 하는 힘이 작용한다. 이것을 칸트는 ‘관심’이란 말로 표현한다. 관심은 모종의 결핍과 결여가 전제되어 있다. 모든 관심은 부족이나 결여, 결핍에서 나오며 결여 또는 결핍에서 비롯된 관심은 그것을 충족시킬 목표 또는 목적으로 향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관심’을 칸트는 허치슨과 루소로부터 배웠고 이를 독일 철학 전통에 정착시켰다.8) 그런데 ‘이성의 관심’에는 (물론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관심이 여럿 등장하지만 우리의 논의 맥락과 관련해서 한정해서 말하자면) 두 가지, 곧 이론적/사변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이 있다고 칸트는 명시한다.

 

칸트는 이 구분을 토대로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순전히 사변적 관심과 관련되어 있다고 규정하고 이 물음은 『순수이성비판』에서 충분히 답변되었다고 본다.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는 물음은 실천적 관심에서 나온 물음으로 도덕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물음, 곧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은 두 번째 물음이 묻고 있는 내용을 실제로 삶 속에서 실천했다면 희망할 수 있는 행복에 관한 것으로 실천적이면서 동시에 이론적인 관심과 관련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성의 관심을 이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으로 구분해서 볼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초판 서문에서 인간 이성의 본성, 아니 인간의 본성 자체가 무엇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형이상학과 관련해서 인간 본성은 무관심할 수 없다.9)

예컨대 인간의 영혼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죽는가? 아니면 신체가 죽더라도 죽지 않고 여전히 사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이 세계 안에서는 자유가 없이 모든것이 결정되어 있는가? 자유의 여지가 있는가?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변증론」에서 칸트는 이 물음들에 대한 해결 방식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물음들이 인간 이성에 내재된 관심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중요하다. 칸트는 우주론적 이념의 정립과 반정립과 관련해서 경험주의와 교조주의, 이 두 원리가 이념의 규정과 관련해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교조주의는 정립의 편에 서서 (1) 세계에 시초가 있다는 것(우주의 유한성), (2) 나의 사고하는 자기는 단순하고 그래서 불후한 본성을 갖는다는 것(실체성), (3) 이 자기는 동시에 그의 의사에 따른 행위들에 있어 자유롭고 자연의 강제를 넘어 있다는 것(자유), (4) 세계를 이루고 있는 사물들의 전체 질서는, 그로부터 만물이 그 통일성과 합목적인 연결을 얻고 있는 한 근원 존재자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신의 존재), 이런 것들을 도덕과 종교의 초석으로 받아들인다. 건전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참된 이익을 고려하는 ‘실천적 관심’이 여기에 바탕으로 깔려 있다고 칸트는 본다. 이에 반해 반정립을 지지하는 경험주의는 ‘사변적 관심’을 표출한다.

여기서는 (1) 주어진 시초에서 더 상위의 시초로 계속 올라가야 하고 (2) 각 부분은 더욱 작은 부분으로 다가가야 하고 (3) 모든 사건은 계속해서 다른 사건을 원인으로서 자기 위에 가져 하고 (4) 현재의 조건들 일반은 매번 근원적 존재자인 자립하는 사물에서 무조건적인 뒷받침과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언제나 다시 다른 조건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사변적 관심’을 계속 가동시키지만 실천적 관심은 결국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런데 칸트를 따르면 정립을 지지하는 교조주의에는 대중성이 있지만 반정립을 지지하는 경험주의에는 그것이 없다. 다시 말해 교조주의의 주장이 보통 사람들이 가진 지성(der gemeine Verstand)에 부합하는 반면 반정립을 주장하는 경험주의는 논의의 영역을 오직 ‘자연’에 제한하기 때문에 ‘사변적 관심’에는 매력이 있지만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10)

 

8) V. Gerhardt, “Interesse”, Historische Woerterbuch der Philosophie, Basel/Stuttgart,
1976, Bd. IV, 479~494 참조.
9) I. 칸트, 『순수이성비판』, AX.

10) 이 문단에서 한 논의는 『순수이성비판』 A465/B 493~A476/B504 참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변적 관심에서 실천적 관심으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정립을 주장하는 교조주의의 입장이 이론적 차원에서 옳은 것으로 수용한다면 적어도 칸트가 생각하기에는 초경험적인 영역을 과학적 탐구 영역으로 끌어오는 일이 될 것이고 만일 반정립을 지지하는 경험주의의 입장을 수용한다면, 다시 말해, 타당한 지식과 경험의 영역을 ‘자연’에 한정한다면 지식의 욕구는 충족시킬 수 있지만 인간 이성에 내재한 초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성에 내재한 근본 관심을 칸트 방식으로 나누게 되면, 한편으로는 (경험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성의 사변적 관심을 경험 안에 한정시켜 반정립의 주장을 수용할 수 있게 되고 (교조주의가 주장하는) 정립의 내용은 이성의 실천적 관심으로 돌릴 수 있게 된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따라서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답을 얻게 되고 경험의 대상의 범위를 벗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답을 얻게 된다. 우주론적 이념과 관련된 것들은 이론적 관심 영역과는 다른, 실천적 관심과 관련해서 논의할 수 있는 터전을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얻게 된다.

칸트는 이를 배경으로 도덕 실천과 관련해서 두 번째 물음 “나는 무엇을 행하여 하는가?” 그리고 세 번째 물음 “내가 만일 마땅히 행할 것을 했다면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하는 물음을 묻고 있다.

 

 

III.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철학 개념의 구분

 

그런데 『논리학』에서는 (그리고 『형이상학 강의』에서도) 칸트는 ‘철학의 장(마당, 영역)’과 관련해서 네 가지 물음을 묻고 있다. 왜 ‘이성의 관심’이 아니고 ‘철학의 장’, ‘철학의 마당’ 또는 ‘철학의 영역’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철학의 장’, ‘철학의 마당’이 아니라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본 철학의 마당’(Das Feld der Philosophie in dieser weltbürglichen Bedeutung)이라는 칸트의 표현이다.

이 표현은 벌써 두 가지 의미의 철학 구분을 전제한다. 하나는 ‘학교 개념을 따른 철학’(Philosophie nach dem Schulbegriffe)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개념을 따른 철학’(Philosophie nach dem Weltbegriffe)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기에 앞서 미리 얘기해 두어야 할 것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칸트의 질문은 다른 세 가지 물음과 함께 등장한다는 것, 따라서 앞의 세 물음과 네 번째 물음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들어섰다는 것, 그리고 철학 개념의 정립과 이 질문들이 연관된다는 것이다. 이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철학 개념을 둘로 나누어 보는 방식은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방법론」 ‘이성의 건축술’ 부분에서 발견된다. 칸트는 이 자리에서 ‘철학’은 ‘모든 철학적 지식의 체계’이지만 이러한 철학은 ‘가능한 한 학문의 이념’일뿐 구체적으로 어디에도 주어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칸트는 유명한 물음을 던진다.

“도대체 어디에 철학이 있는가, 누가 철학을 소유하고 있는가, 무엇에서 철학이 인식될 수 있는가?

사람들은 단지 철학함을 배울 수 있다. 다시 말해 보편적 원리들을 준수하는 이성의 재능을 몇몇 눈앞에 있는 시도들에서 연습할 수 있다.”11)

이 맥락에서 칸트는 ‘학교 개념을 따른 철학’과 ‘세계 개념을 따른 철학’을 구분한다.12)

학교 개념의 ‘철학 개념’은 앎의 체계적 통일, 곧 인식의 논리적 완전성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고 단지 학문으로 추구되는 인식의 체계이다. 이런 의미의 철학은 중세 이후 ‘학교’, 곧 ‘대학’에서 연구되고 교수되어온 철학이다. 칸트는 이와는 달리 ‘세계 개념’ 으로서의 철학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은 모든 인식을 인간 이성의 본질적 목적과 관련지우는 학문, 곧 ‘인간 이성의 목적론’(teleologia rationes humanae)이다.13) 그런데 철학 개념을 이렇게 둘로 나누어 보는 것과 우리의 주제가 되는 칸트의 물음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학교’에 대한 언급은 이미 칸트의 젊은 시절 저작 가운데 나타난다. 칸트가 말한 ‘학교’는 오늘과 마찬가지로 철학을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연구하는 ‘대학’이었다. 칸트는 ‘대학’에서 당시 제도에서 요구한대로 출판된 책을 교과서로 삼아 강의했지만 그럼에도 철학자들의 학설을 가르치는 것을 그의 소명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의 교수생활 초기부터 학생들이 ‘생각된 것’, 곧 사상(Gedanken, Thought)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를 배우기’(denken lernen, Learn to think)를 원했다. 철학을 가르칠 때도 학생들이 ‘철학을 배우는 것’(Philosophie lernen)이 아니라 ‘철학함을 배우기’(philosophiren lernen)를 원했다.14)

그가 이렇게 말한 까닭은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학생들이 무엇보다도 가르치는 내용을 ‘알아듣는 사람’, 곧 ‘이해하는 사람’이 되게 하고, ‘이성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고 그리고 마침내는 ‘학식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계를 밟아갈 경우, 학생들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학교에서 배운 것을 통해서 “학교를 위해서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삶을 위해서는 더 경험 있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nicht für die Schule, doch für das Leben geübter und klüger geworden)이라고 칸트는 본다.15)

 

11) I. 칸트, 『순수이성비판』, A838/B866. 칸트의 이 물음에 관해서는 강영안,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삶과 텍스트 사이에서』, 한길사, 2012 참조.
12) I. 칸트, 『순수이성비판』, A839/B867.
13) I. 칸트, 『순수이성비판』, A839/B867.
14) I. Kant, “M. Immanuel Kants Nachricht von der Einrichtung seiner Vorlesungen in dem Winterhalbenjahre von 1765~1766,” Kant’s gesammelte Schriften, hrsg. Königlich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1912, Bd. II, 306.

15) I. Kant, “M. Immanuel Kants Nachricht von der Einrichtung seiner Vorlesungen in dem Winterhalbenjahre von 1765~1766,” Kant’s gesammelte Schriften, hrsg. Königlich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1912, Bd. II, 305~306.

 

 

방금 논의한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학교’와 ‘삶’의 대비이다. 뒤에 가서 좀 더 자세히 보겠지만 이 둘의 대비는 칸트의 인간학의 의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칸트는 자신의 업적을 통해서 보여주듯이 대학에서 일한 학자로서 학문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고 학자로서의 소명을 중시했다. 그런데 학자가 되기 전에 무엇보다도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 곧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만일 알아들었다면 스스로 추론하고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한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만 해도 삶 속에서 인간으로 제대로 기능하며 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교’와 ‘삶’의 대비는 1760년대 저작뿐 만아니라 1775년에 발표한 『인종의 차이에 관해서』라는 글에서도 계속된다. 여기서는 ‘삶’과 ‘세계’는 거의 같은 말로 등장한다.
칸트는 자신이 대학에서 매년 한 학기를 할애해서 가르친 자연 지리학을 일컬어 ‘세계 지식의 선행 연습’(Voruebung in der Kenntnis der Welt)이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세계 지식은 모든 다른 획득된 지식들과 기술들에 실용적인 것을 제공해 주는 데 쓰이며, 이를 통해 이것들은 단지 학교뿐만 아니라 삶을 위해서도 유용하게 되고, 또한 이를 통해 준비된 학생이 그의 목적지인 세계〔세상〕에 인도된다.16)"

16) I. Kant, “Von den verschiedenen Racen der Menschen” in: Kant’s gesammelte Schriften, Bd. II, hrsg. Königlich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1912, 443.

 

‘세계 지식’이라고 할 때 세계는 ‘물리학적 의미의 세계’나 ‘형이상학적 의미의 세계’와는 달리 칸트가 자연 지리학을 통해 학생들에게 가르친 세계, 곧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 다시 말해 ‘자연과 인간 세상’을 뜻한다.
이것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뒤에 쓴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에 대한 이념」(Idee zu einer allgemeinen Geschichte in weltbuerglicher Absicht)(1784)에서 ‘세계시민’ 개념으로 확장하고 『논리학』과 『형이상학 강의』에서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썼던 ‘세계 개념을 따른 철학’을 ‘세계 시민의 의미에서 철학'(Philosophie in dieser weltbürgliche Bedeutung; Philosophie in sensu cosmopolitico)으로 바꾸어 사용한다. 이제 『논리학』으로 가서 칸트가 두 철학 개념을 대비시키는 방식을 잠시 살펴보자.

 

『순수이성비판』 「건축술」 부분과 『논리학』서론에서 칸트가 두 개념의 철학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큰 테두리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칸트는 ‘학교 개념’의 철학 개념을 ‘철학적 지식 또는 이성 지식의 체계’라 말하고 ‘세계 개념’의 철학 개념은 ‘인간 이성의 최종 목적에 관한 학문’이라 정의한다.
그런데 『논리학』에서는 몇 가지 부연 설명이 첨가된다.

 

첫째, ‘세계 개념’의 철학이 더 상위 개념이고 이 개념이 철학에 ‘존엄성’, 곧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철학은 내적인 가치를 지니며 철학 외의 다른 지식에 비로소 가치를 부여한다. 따라서 칸트는 학자로서 ‘학교 개념’의 철학을 추구하고 그 부분을 최선을 다해 발전시켰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모든 인식을 인간의 최종 목적과 연관시키는 세계 개념으로서의 철학이 더욱 더 존엄성을 가진다고 본다. 이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관점은 이론적/사변적 이성에 대해서 실천 이성이 우위성을 가진다는 생각과 일치한다.

 

둘째, 『논리학』은 두 철학 개념이 각각 지향하는 목적을 구별한다. ‘학교 개념’의 철학은 ‘기량’ 또는 ‘숙련’을 목적으로 삼고 ‘세계 개념’으로서의 철학은 ‘유용성’을 목적으로 삼는다. 둘 다 실천적인 것과 연관되지만 기량 또는 숙련은 기술적인 실천과 연관되고 유용성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계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실용적 실천과 관련된다.

 

셋째, ‘학교 개념’의 철학은 일종의 ‘기량론’ 또는 ‘숙련론’으로 기량 내지 숙련을 키워주는 이론에 머물게 되고 철학자를 기껏해야 ‘이성의 기술자’로 만들지만 세계 개념으로서의 철학은 ‘지혜론’으로 철학자를 ‘이성의 입법자’로 만든다는 언급이 『논리학』에 나온다. 『논리학』과 『순수이성비판』에서 다 같이 칸트는 이런 의미의 철학자, 곧 ‘실천 철학자’ 또는 ‘도덕가’야말로 ‘진정한 철학자’라고 부른다.

철학은 이론적 지식을 마치 정보를 얻듯이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연습, 훈련, 실천을 통해서 배우는 것임을 강조할 뿐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야말로 ‘참된 철학자’이며 ‘참된 철학자’는 자신의 이성을 노예처럼 남을 흉내 내어 사용하지 않고 자유롭게 스스로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보다는『논리학』에서 훨씬 더 강조해서 말한다.17)

 

17) 논리학에서 철학 개념에 대한 논의는 I. Kant, Logik, Physichen Geographie, Pädagigik, Kant’s gesammelte Schriften, hrsg. Königlich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Leibzig, 1923, Bd. IX, 21~26 참조.

 

 

IV. 앞선 세 물음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연관 관계

 

칸트를 따르면 ‘세계 시민의 관점에서’ 철학을 볼 때 철학은 네 가지 질문, 다시 말해 네 가지 영역으로 구별된다. ‘이성의 관심’이란 이름으로 물었던 세 가지 앞 선 질문과 이제 네 번째 이 물음들에 덧붙여진 네 번째 물음, 곧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철학의 중요한 물음으로, 중요한 영역으로 등장한다.

이 영역들을 칸트는 형이상학, 도덕, 종교, 인간학이라 이름 붙인다. 그런데『논리학』 과 『형이상학 강의』에서 독특한 것은 이 모든 물음은 결국 인간학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철학의 영역을 물음의 형식으로 네 부분으로 나누는 일을 먼저 해 두고는 (그렇다면 이 영역 구분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이 모든 물음은 결국에는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그리고 철학의 영역들은 결국에는 인간학으로 귀결된다는 말인가? 칸트의 주장을 우리는 “모든 철학은 인간학”으로 보는 ‘인간학 환원주의’로 보아야 할 것인가? 형이상학이나 도덕, 종교철학은 상대적 독립성을 잃고 모두 인간학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할 것인가?

 

칸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근거에서 볼 때 이 모든 것들은 인간학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세 가지 물음은 마지막 물음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의 눈에 띄는 것은 세 표현이다. 먼저 “근거에서 볼 때”(im Grunde). 문제는 이 근거, 이 바탕, 또는 이 이유(라틴어로 ratio)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질문들의
근원이 되고 바탕이 되고,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어디에서 나오며, 어디에 터를 두고, 어디에 근거를 두는가, 무엇 때문에 생기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 다시 말해 이 질문들이 발생되는 근원, 이 질문들이 생기는 이유, 이 질문들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 곧 ‘인간’이다.

두 번째 눈에 띄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은 인간학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인간학으로 생각할 수 있다”(zur Anthropologie rechnen)”이란 말이 무슨 말인가?
“무엇₁을 무엇₂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는 “무엇₁을 무엇₂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앞의 것(무엇₁)이 주어져 있거나 이미 거론되었을 때 그것을 따라 오거나 뒤에 거론된 것(무엇₂)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앞의 세 질문과 세 영역, 다시 말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도 좋은가?”라는 질문과 이들을 다루는 형이상학과 도덕과 종교의 영역은 그 자체로 상대적 독립성을 가지면서도 그것들이 묻는 까닭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얻고자 하는 까닭이요, 이런 목적으로 이것들을 묻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세 번째, “처음 세 가지 물음은 마지막 물음에 관계 한다”는 표현이 방금 한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물음의 순서나 물음을 물어가는 과정에서 보면 앞의 세 물음이 앞서지만 그러나 마침내 이 세 물음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영역으로 말하면 ‘인간학’으로 모아지고 그와 관련된다는 말이다. 만일 지금까지 짧게 논의한 것이 옳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또 이 물음에 답을 주는 영역으로 지목된 ‘인간학’은 앞의 세 물음, 곧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라는 물음이 나올 수 있는 터전이요, 바탕이요, 원천이며, 이 물음을 묻게 하는 이유요 목적이다.
만일 ‘인간’이라는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좀 더 강하게 얘기하자면, 만일 ‘인간’이라는 존재가 문제가 아니라면 앎에 대한 물음, 행위에 관한 물음, 희망에 관한 물음이 생길 수 없고, 그 물음을 물을 수 있는 터전이나 바탕, 근거, 그리고 나아가 이런 물음을 묻는 이유와 목적을 찾을 수 없다.

 

2.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칸트의 저 세 물음이 칸트가 처음부터 명시적으로,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암묵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칸트 철학을 뒤에서 밀어주고 앞으로 끌어준 물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간의 문제는 칸트 철학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하는 문제이고 모든 문제는 인간 문제로 귀결된다. 말하자면 인간 문제는 칸트의 모든 철학적 논의를 그곳으로 향해 잡아당기는 자석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앞의 세 물음에 대해서 칸트의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칸트 철학에서 시원론적 기능(archeo-logical function)을 하면서 동시에 목적론적 기능(teleological function)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3.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학 환원주의’와 칸트의 태도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앞의 논의에 함축된 대로 칸트의 의도는 앞의 세 질문과 관련된 철학의 영역의 상대적 독립성을 충분히 존중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영역 구별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을 빌러 얘기하자면 철학 안에서 형이상학과 도덕(도덕철학)과 종교(종교철학)는 고유한 ‘영역 주권’을 가진다.18) 따라서 인간에 관한 물음은 어느 하나를 떠나, 한 부분만으로 해답을 얻을 수 없다. 형이상학은 형이상학대로 지식에 관한 물음을 통하여 인간이 무엇인지 답하며, 도덕철학은 도덕철학대로 행위와 관련된 물음을 통하여 인간이 무엇인지 답하고, 종교철학은 종교철학대로 희망에 관련된 물음을 통하여 인간이 무엇인지 답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고유의 영역, 고유의 마당 또는 고유의 장(Feld)을 얘기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학도 인간학 나름대로 칸트가 최종 출판한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1798)에서 보여주듯이 인간의 인식 능력과 쾌락과 고통의 능력, 그리고 욕구 능력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전개한 인간 능력론과 개인의 인격과 기질, 남성과 여성, 민족들의 기질 등의 논의를 통해서 인간이 무엇인지를 앞의 세 영역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여줄 고유의 권리와 의무가 있다.

 

18) A. Kuyper, Souvereiniteit in eigen kring (1880), Kampen: Kok, 1930³ 참조.

 

 

V. 칸트에게서 인간이 왜 문제가 되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물어보자. 칸트에게서 왜 인간이 문제가 되었는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칸트가 언제, 어떤 자리에서 처음 던졌는지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798년 출판된 그의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에는 이 물음이 출현하지 않는다. 출판된 책 가운데 이 물음이 등장하는 곳은 앞에서 얘기한 예쉐가 편집해서 1800년에 출판한 칸트의 『논리학』이다. 그런데 현재 출판된 칸트 전집 가운데 앞의 세 물음과 함께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논리학』외에도 칸트의 편지와 강의록에 각각 한번 등장한다.

 

칸트는 1793년 5월 4일 스토이틀린에게 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동봉해서 편지를 보내면서 순수 철학의 영역과 관련해서 자신이 오래전부터 세운 계획을 소개한다.19) 그러면서 세 가지 물음 뒤에 각각 괄호 속에 그와 관련된 영역으로 형이상학, 도덕, 종교, 인간학을 적시한다. 이 편지에서 주목할 것은 세 가지이다.

첫 번째, 칸트는 자신이 오랫동안 순수철학의 영역과 관련해서 세운 작업 계획은 세 과제의 해결이라고 밝힌 것이다. 세 과제를 칸트는 번호를 붙여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형이상학) 2)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도덕)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종교)”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 이것이 우리가 두 번째 주목할 것이다 - “마지막으로 네 번째 것, 곧 인간은 무엇인가?가 뒤따라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곧장 괄호 속에 “인간학; 이것에 대해서 나는 이미 20년 넘게 매년 강의를 해왔다”는 말을 칸트는 덧붙인다.

이로부터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칸트가 오랫동안 맡아 한 인간학 강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발생하는 문제는 조금 뒤에 가서 논의할 것이다.)

세 번째, 자신이 동봉해서 보내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는 자신의 계획의 세 번째 부분(곧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고 자신은 이 책에서 기독교 신앙을 자신의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다루었고 기독교 신앙은 가장 순수한 실천 이성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밝힌 것도 우리의 주목을 끈다.

스토이틀린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칸트가 1793년 이전에 이미 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칸트의 저 물음이 이에 앞서 출현하는 곳은 학술원판 『칸트전집』28권 두 번째 책 1권(28.2,1)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이른바 ‘형이상학 L2’라는 이름을 가진 강의록이다.20) 그런데 이 강의록 앞부분에는 칸트의 출판된 『논리학』서론과 비슷하게 앞의 네 물음과 그와 관련된 논의가 등장한다.
칸트가 이 내용을 그의 형이상학 강의에서 했거나 아니면 강의록을 입수해서 출판한 푈리츠(Pölitz)가 고의로 논리학 강의 노트에서 가져왔거나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출판된『논리학』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칸트가 이 강의를 할 때 논리학 강의에서 했던 부분을 형이상학 강의에서 반복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강의록(‘형이상학L2’)은 1789년에 한 강의로 추정된다.21) 만일 이 추정을 수용한다면 칸트는 1790년 이전에 “철학의 영역”을 생각하고 앞선 세 물음과 더불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네 번째로 제기하면서 형이상학과 도덕, 종교와 더불어 인간학이 철학의 네 번째 영역이라는 생각을 표명했을 가능성이 있다.

 

19) I. Kant, Kant’s Briefwechsel, Bd. II 1789~1794, Kant's gesammelte Schriften, hrsg.Königlich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Leipzig, 1922, Bd. XI, 429. 카를 프리드리히 스토이틀린(Carl Friedrich Stäudlin, 1761~1826)은 괴팅겐 대학 신학교수였고 1798년의 『학부간의 갈등』을 칸트는 이 신학자에게 헌정한다.

20) I. Kant, Kant’s Vorlesungen: Vorlesungen über Metaphysik und Rationaltheologie, Zweite Haelfte, erster Teil, hrsg. von der Akademie der Wissenschfaten zu Goettingen, Kant’s gesammelte Schriften, hrsg. Deut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zu Berlin, Berlin, 1970, Bd. XXVIII, 533~534.
21) 이 강의록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I. Kant, Lectures on Metaphysics. Translated and edited by Karl Ameriks and Steve Anragon, Cambridge, 1997, xxx~xxxiv 참조.

 

 

그런데 칸트가 스토이틀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언급과 관련해서 물음이 하나 등장한다. 칸트는 자신이 그 해(1793) 부활절 어간에 발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통해서 세 번째 물음(“내 계획의 세 번째 부분”) 곧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에 대한 자신의 과제를 ‘완수하기를 시도했다’(zu vollführen gesucht)고 말한다.22) ‘완수’란 말을 쓴 것을 보면 이 책만이 저 물음에 대한 답변 전체를 제공했다고 보기 보다는 그의 선행 저작들을 포함해서 이 책으로 이제 마침내 세 번째 물음과 관련된 과제를 완전히 수행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만일 세 번째 물음, 세 번째 철학의 영역과 관련된 과제가 이런 방식으로 해결된다면 첫 번째와 두 번째, 네 번째 물음과 관련된 과제는 무엇으로 ‘완수’되었는가? 첫 번째 물음과 관련해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가능한 답변들을 남김없이 파헤쳤으며, 마침내 이성이 충족할 수밖에 없고, 만약 이성이 실천적인 것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또한 만족할 이유도 갖게 되는 답변을 발견하였다”고 말한다.23)

만일 이것을 곧장 수용한다면 첫 번째 물음, 곧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또는 철학 영역의 첫 번째 과제와 관련된 수행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두 번째 영역의 철학 과제와 관련해서는 칸트의 『도덕형이상학기초』와 『실천이성비판』,그리고 나아가서 『도덕형이상학』을 당연히 두 번째 물음과 관련된 과제 완수의 저작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2) 스토이틀린에게 보낸 편지, 위 각주 19번 참조. 학술원 전집 XI, 429.
23) I. 칸트, 『순수이성비판』, A805/B833.

 

 

그러면 앞의 세 물음, 세 과제에 뒤이어 따라 오는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이 물음과 함께 주어진 철학의 과제는 어떤 부분이 수행하는가? 칸트의 일관된 답은 ‘인간학’이다. 그런데 어떤 인간학인가? 스토이틀린에게 칸트가 편지를 보낸 시기는 1793년 5월 4일이었다. 이때는『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은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이 책은 1798년에 초판이, 1800년에 개정판이 출간된다). 그러므로 네 번째 물음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관련된 답을 제공해 주고 이 영역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해 줄 ‘인간학’은 이 책을 두고 얘기했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스토이틀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칸트는 ‘인간학’이라 지목하면서 곧장 이에 대해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인간학; 이것에 대해서 나는 이미 20년 전 넘게 매년 강의를 해왔다.”

만일 칸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20년 넘게 -그가 인간학 강의를 시작한 것은 1772/3년 겨울 학기라고 보면 - 해 온 강의가 네번째 철학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강의의 바탕이 된 원고를 칸트 자신이 책임지고 출판한『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우리는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칸트가 한 인간학 강의(학생들의 필기를 토대로 출판된 강의록들이 몇 편 있다), 강의를 위한 메모들, 그리고『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등장한다.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이 (그리고 그의 강의를 담은 강의록과 인간학과 관련된 그의 메모들을 모두 포함하여)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과연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은 칸트가 이 저작에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실제로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인간의 능력들과 개인과 집단, 남녀 성별 차이와 민족 차이로 인해서 빚어지는 성품의 차이를 이 책은 주로 다루고 있다. 비록 초월적인 논의와 경험적인 논의, 합리적인 논의와 경험적인 논의를 구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칸트가 인간학을 통해서 보여 주고자 한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물음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칸트의 인간학을 초월철학의 한 부분으로 보기 보다는 볼프와 바움가르텐 전통의 경험심리학에 귀속시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루는 철학의 영역은 어디 있으며 그와 관련된 구체적 작업은 칸트의 어느 저작에 있는가?

 

이 물음을 생각해 보기 전에 먼저 고려해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인간에 대한 관심, 다시 말해 인간학적 물음은 칸트 철학의 후반기에 비로소 등장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만일 이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답한다면
칸트가 앞의 세 물음을 네 번째 물음과 연관시킨 것은 그의 비판철학의 작업이 성취된 뒤, ‘사후에’((nachträglich) 한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이렇게 보는 것이 옳아 보인다.

그의 철학 작업이 거의 끝난 지점에서 칸트는 자신의 철학 전체를 총괄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자신의 철학에 최종적인 모자를 씌워줄 목적으로 인간학을 지목했을 수 있다.
만일 이것을 수용한다고 해 보자. 그러면 그의 철학 작업이 끝난 지점에서 칸트는 일종의 ‘인간학적 전회’를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는 단서를 이미 칸트 철학 초기에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칸트는 철학자로 활동하기 시작할 때 주로 자연과학과 관련된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논문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1760년대 초 루소를 읽기 시작하면서 그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 시기에 쓴 한 메모 가운데는 이런 글이 있다.

 

 

"나 자신의 성향으로 보아 나는 탐구자이다. 나는 지식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했고 좀 더 진전을 보려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 보려고 쉬지 않고 열심을 내었다. 이 모든 것[지식 추구]만이 인류에게 영예를 주는 것이라 한 때 믿은 적이 있었고 아무 것도 모르는 평민들을 멸시하였다. 루소가 나를 바로 잡아 주었다(Rousseau hat mich zurecht gebracht). 맹목적인 우월 의식이 사라졌다.

나는 인간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고 만일 내가 나의 모든 고찰을 통하여 인간의 권리를 회복하는 데 기여한다고 믿을 수 없다면 나는 천한 노동자보다 가치가 없다고 나 자신을 생각하게 되었다.24)

24) I. Kant, Kant’sHandschftlicher Nachlass: Bd VII, Kant’s gesammelte Schriften, hrsg. Preu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1942, Bd. XX, 44.

 

 

칸트는 루소를 통하여 우리 인간이 한 국가의 시민이기 이전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인간으로서 고유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 보고 인간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과학적 탐구나 학문적 연구는 결국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고 인간의 도덕적 소명을 실현하는 데 기여하지 않고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칸트는 자연신학과 도덕철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자연신학과 도덕 원리의 판명성에 관한 탐구」(1763)와 「형이상학의 꿈을 통해 보여준 한 시령자의 꿈」(1766)이 이러한 전환을 보여준다.25)

칸트 철학의 일종의 ‘인간학적 전회’는 이 시기에 일어 났다고 볼 수 있다(이것을 만프레드 퀸은 ‘소크라테스적 전회’라 부른다).26)
만일 이것이 옳다면 칸트의 ‘인간학적 전회’는 자연신학과 도덕철학과 관련된 그의 저작과 1772/3년 겨울학기부터 시작한 인간학에 대한 강의를 통해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앞에서 인용한 칸트의 메모와 같은 곳에서 칸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일 인간에게 필요한 하나의 학문이 어디엔가 있다면 창조 세계 안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자리(Stelle)를 충분히 채우는 법을 가르치고 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학문일 것이다.27)"

 

여기서 우리는 칸트가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질 때 알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인간의 자리, 인간의 위치가 무엇인가, 두 번째는 인간이 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인간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그는 알고 싶어 하였다.

칸트는 1760년 초기에 벌써 이런 욕구를 강하게 느꼈고 자신의 철학 작업을 이러한 관점에서 이끌어 갔다. 이로부터 우리는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도덕적 소명을 밝혀 드러내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곧 자연과 사회 안에서 인간이 가진 자리, 곧 그의 본성과 가능성, 그의 실현 가능한 여러 자질 대한 탐구이다.

다시 말해 칸트는 ‘자연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연적 사회적 조건을 드러내고 나아가서 도덕적 소명을 지닌 존재자로서 인간을 탐구하되 인간을 ‘세계 거주자’로서 구체적 삶의 장소인 사회, 국가, 나아가서 세계의 인류 공동체 관점에서 탐구하기를 원했다. 루소의 영향이 지대했다는 것을 한번 더 지적해 두자.

앞에서 인용한 구절을 담고 있는 「미와 숭고의 감정에 관한 관찰에 덧붙인 생각들」에서 칸트는 뉴턴이 다양한 천체 운동을 하나의 질서와 법칙으로 통합했듯이 루소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들 가운데서 감추어진 본성과 법칙을 발견했다고 언급한다.28) 이때 이미 칸트는 자연 법칙을 발견한 뉴턴과 인간본성의 법칙을 발견한 루소를 세계 거주자, 곧 세계 시민의 관점에서 통합하고자 한 의도를 드러낸다.

나는 이러한 변화를 칸트의 ‘인간학적 전회’라고 부르고자 한다.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만일 이렇게 본다면, 후기에, 또는 말년에 등장한 물음이 아니라 칸트 철학 초기부터 후기까지 줄곧 칸트 철학을 뒤에서 밀어준 물음이며, 동시에 앞으로 이끌어준 물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5) Frederick P. van de Pitte, Kant as Philosophical Anthropologist, The Hague, 1971,11~14 참조.
26) M. Kuehn, Kant. A Biography, Cambridge, 2001, 132 참조.
27) I. Kant, Kant’s Handschftlicher Nachlass: Bd VII, Kant's gesammelte Schriften, hrsg. Preu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1942, Bd. XX, 45.

28) I. Kant, Kant’s Handschftlicher Nachlass: Bd VII 58~59. 칸트가 루소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사상을 비판 없이 따른 것은 아니다. M.Kuehn, Kant. A Biography (Cambridge 2001), 131~132 참조. 칸트와 루소의 사상적 연관에 관해서는 Ernst Cassirer, Rousseau Kant Goethe. Two Essays. Translated by James Gutmann, Paul Oskar Kristeller, and John Herman Randall, Jr., Princeton, 1970, 1~25 참조.

 

 

이제 끝으로 앞에서 제기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칸트의 물음에 답을 주는 저작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덧붙여 두자. 칸트의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은 이 물음에 대한 완전한 답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그곳에서 칸트는 인간이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정의를 (또는 정의와 비슷한 것을) 예컨대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초판 서문에서 발견한다. 여기서 칸트는 인간을 “자유로운,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이성에 의해 자신을 무조건적인 법칙에 묶는 존재자”라고 말한다.29) 이런 정의조차 칸트는『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에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는 결국 칸트의 전 저작을 통해서 얘기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칸트의『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은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서 한 단계 나아가서 인간이 지닌 소질들(기술적 소질, 실용적 소질, 도덕적 소질)을 보여주며 세계시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공동체적으로 개화하고 문명화하며 도덕화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도덕적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교육이 되어갈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이렇게 보면 칸트의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은 그의 교육학과 역사에 관한 저술들과 함께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인간을 보고 인간을 그러한 존재로 훈련시켜 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보여주는 저작이라 말할 수 있다. 철학은 이를 통해 단지 인간과 세계와 신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다루는 학문에 그치지 않고 삶의 길, 삶의 도(a way of life)를 보여주는 일상의 학문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는 학문적 철학을 철학자로서 엄밀하게 추구하면서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도외시하지 않은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우리는 세계 시민의 관점에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칸트의 물음을 통해서 볼 수 있다.

 

 

VI. 결론

 

이 글에서 나는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칸트의 물음이 제기되는 자리와 맥락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칸트의 두 가지 철학 개념의 의미에 다시 주목할 뿐 아니라 이 물음이 칸트의 초기철학부터 말년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가진 기능과 역할을 드러내 보고자 하였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이 세 가지 물음은 이른바 ‘이성의 관심’ 곧 이성의 필요에 따라 이성의 본질적 기능을 실현하기 위해서 나아가야 할 방향, 곧 목적과 관련된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통해서 지식(과학과 형이상학)과 실천(도덕), 그리고 종교와 관련된 이성의 소명이 충실하게 드러날 수가 있다. 그런데 이와 연관해서, 더 확장된 물음으로 제기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칸트의 물음은 인과 함께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세계, 곧 자연 환경과 사회 속에서 삶을 가꾸어야 가야 할 ‘세계거주민’으로서의 인간에 관해서 묻고 있다.

칸트의 물음은 그의 철학의 후기, 또는 그의 말년의 철학에 나타나고, 이런 의미에서 마치 목적지처럼 칸트철학을 그곳으로 향하도록 이끌어준 물음이다. 그런데, 이른바 ‘비판철학’이 출현하기에 앞서 1760년대 초 칸트 문헌을 읽어보면 루소의 영향으로 칸트의 ’인간학적 전회‘가 일어나며, 이러한 변화로 인해서 칸트는 인간학을 지리학과 번갈아 강의하게 된다. 칸트의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그 때부터 이미 칸트 철학을 뒤에서 밀어준 물음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칸트의 앞선 세 물음을 단순히 ‘이성의 관심’뿐만 아니라 ‘세계시민’ 또는 ‘세계 거주민’의 관점에서 다시 물어볼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된다. 이제 다음 과제는 세계 시민의 관점에서 앞선 세 물음의 성격을 드러내며, 이 물음에 대한 칸트의 답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그 답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어떤 지평을 다시 새롭게 열어주는지를 탐구해 보는 것이다.

 

 

참고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