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일반

알랭의 행복론

rainbow3 2019. 10. 18. 01:49


알랭의 행복론

 

1장 불안함과 평정심


정념에 관하여


정념보다는 병을 견디기가 쉽다. 왜냐하면 정념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점에서 모두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정념은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몸에 상처가 나서 아플 때는 우리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사정을 인식한다. 그리고 아픈 것을 제외하면 만사가 순조롭다. 어떤 대상이 눈앞에 나타나고 그 형태와 소리, 냄새가 우리 마음에 강한 공포감이나 욕망을 불러일으킬 경우라도 우리는 심신의 평온을 되찾기 위해 그것을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념에 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좋아하든 미워하든, 대상이 눈앞에 존재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대상을 상상할 수도 있고 아니면 시를 쓰는 것처럼 마음의 작용을 통해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다. 무엇을 하든 거기에 도달한다. 이런 나의 추론은 궤변적이기는 하지만,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가끔 그러한 지적 명석함에 놀라기도 한다.


엄청난 공포가 엄습할 때는 달아나면 된다. 그럴 때 당신은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두려웠던 일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면 분노나 변명이 떠오른다. 특히 밤에 혼자 잠을 잘 때 그 수치스러운 일이 떠오르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때는 아무런 여과 없이 수치를 고스란히 맛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쏜 화살은 한 자루도 빠짐없이 당신에게 떨어진다. 자기가 곧 자신의 적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념에 휩쓸린 사람은 자신이 결코 병에 걸린 것이 아니고, 당분간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아갈 수 있다고 확신하여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정념은 어차피 내 자신의 일부다. 그리고 그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정념에는 항상 강렬한 후회와 공포가 동반된다. 그것도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렇게 자신을 제어하는 데 서툴까?” 왜 이런 똑같은 푸념을 이렇게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스스로가 부끄럽고 한심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아주 불안해진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내 사고방식 자체가 침해되고 있어. 내가 내세운 논리가 내 자신을 공격해온다. 내 생각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마력은 무엇일까?”

여기에 마법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감춰진 힘을 생각해 내고 한 마디 듣는 것만으로, 한 번 보기만 하고 불운한 운명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은 정념의 힘, 즉 내적인 노예근성이라고 생각한다. 정념에 휩쓸린 자는 자기가 병에 걸렸다고 판단하지 못하므로 저주받은 것으로 단정지어 버린다. 이러한 생각이 끝없이 계속 뻗어나가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 깊은 고통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고통이 시시각각 더 심해질 거라는 절망적인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기꺼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이 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다. 그리고 스토아학파는 공포와 분노에 관한 훌륭한 이론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누구보다 데카르트야말로 이 주제를 다룬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데카르트는 『정념론』에서 그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정념이 그저 사유의 한 형태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속에서 이루어지는 움직임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똑같은 생각이 반복적으로 우리 뇌리에 떠오르는 것, 더구나 한밤중 조용한 시간에 극히 격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혈액의 운동에 의해 신경이나 뇌속을 도는 어떤 액체의 운동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이러한 육체적 움직임을 모르고 있다. 단지 그 결과만을 볼 뿐이다.


또 우리는 그것이 정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육체적인 움직임이 정념을 키우는 것이다. 이 점을 잘 이해한다면 꿈과 정념에 대해 숙고하고 판단하는 모든 수고를 덜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책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외적인 필연성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슬프다. 눈앞이 완전히 캄캄하다. 그러나 여러 사건도 이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의 논리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논리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은 바로 신체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위장(胃腸)의 의견이다.”


-1911.5.9

 

 

2장 궁극의 깨달음


긍정의 힘


우리가 살다보면 예기치 못한 불행에 직면할 때도 꽤 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상상력에 이끌려 불행에 다른 불행을 더하게 된다. 당신은 매일 적어도 한 사람쯤은 자기 일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은 항상 설득력 있게 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일에도 불평거리는 있는 법이고, 어떤 것이든 완전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교사는 이렇게 투덜댈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떤 일에도 흥미를 갖지 않는 난폭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공무원은 이렇게 불평할 것이다.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혀 있어야 한다고. 또 변호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기의 말은 듣지도 않고 졸고 앉아 있는 판사 앞에서 변호를 해야 한다고. 이것은 모두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에 더해 나는 당신의 위 상태가 좋지 않다든가, 당신의 구두 속에 물이 스며들었다면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일 때문이 인생이나 인간 혹은 신까지도 저주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 말은 끝이 없고, 슬픔은 슬픔을 낳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명을 한탄함으로써 불행을 키우게 되고, 웃을 수 있는 희망을 애초에 자신으로부터 빼앗아 버리고, 그로 인해 위의 상태가 더욱 나빠지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일에 대해 불평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그를 위로하며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보라고 충고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왜 당신 자신에게는 그런 소중한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좀 더 자신을 좋아해주고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든 처음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선인(先人)이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건에는 두 개의 손잡이가 있는데, 잡았을 때 다치는 쪽 손잡이를 선택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말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경우에든 가장 좋은 말, 사람에게 힘을 가장 북돋워주는 말을 선택하는 것, 즉 진리의 과녁을 맞히는 사람을 철학자라고 부른다. 따라서 문제는 자신을 위해서 변호해 주는 것이고 자신을 힐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훌륭한 변호인이라, 풍부한 설득력을 갖고 있으므로 이 길을 선택하기만 하면 만족할 만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부주의한 탓이며 또한 약간의 예의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그들이 타인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하는 일이나 자신들이 고안해낸 것에 대해 말하게 된다면, 그들은 금방 시인, 그것도 유쾌한 시인이 될 것이다.


비가 조금 내리고 있다. 당신은 길에 있으므로 우산을 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또 구질구질하게 비가 오네! 제기랄!”이라고 말을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 기분은 이해가 된다. 그런다고 빗방울이나 구름이나 바람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을 할 바에야 차라리 “오! 근사한 비네!”라고 말하는 게 좋지 않는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역시 빗방울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좋다. 아마 당신의 몸에 활기가 느껴지고 몸이 따뜻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아주 사소한 기쁨이라도 그런 것이 기쁨의 동작이 가져다주는 효과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하면 비를 맞아도 감기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도 비와 같이 생각하면 된다. 당신은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비와 비교해 볼 때 훨씬 쉽다. 왜냐하면 당신의 미소가 비에는 아무 영향도 줄 수 없지만 사람에겐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소의 흉내만 내도 벌써 사람들의 슬픔이나 무료함은 줄어든다.

만약 당신이 당신 내면을 바라본다면 그들을 용서할 단서를 쉽게 찾아낼 것이지만, 여기서는 고려하지 않겠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침마다 이렇게 말했다.

 

“오늘도 나는 허세 부리는 자와 거짓말쟁이, 부정한 자와 귀찮은 수다쟁이를 만나게 된다. 그들이 그런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1907.11.4

 

 

3장 인생의 고락


쓸데없는 근심



스토아학파들이 정신력이 강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들은 증오, 질투, 두려움, 절망과 같은 정념에 대해 사유한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그들은 솜씨 좋은 마부가 말을 다루듯이 멋지게 정념을 제어하게 된다.


그들의 사상 가운데 항상 내 마음에 들 뿐 아니라 실제로 유용했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추론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참고 극복해야 할 것은 현재뿐이다. 과거나 미래는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도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과거나 미래는 우리가 그것을 생각할 때만 비로소 존재한다. 과거나 미래는 관념일 뿐 현실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한이나 불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엄청난 수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여러 자루의 단검을 하나씩 쌓아올리는 곡예사를 본 적이 있다. 그가 이마 위에 한 줄로 세워놓은 단도들은 오싹한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였다. 우리도 곡예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회한이나 불안을 한 줄로 엮어서 지니고 다니는 경솔한 아티스트다. 곡예사가 1분이라면, 우리는 1시간이나 지니고 다니는 셈이다. 또 곡예사가 1시간이라면 우리는 하루, 열흘, 몇 달, 몇 년 동안이나 지니고 다니는 셈이다.

 

다리가 아픈 사람은 어제도 괴로웠고, 훨씬 전에도 괴로워했고, 내일도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 생에 전체를 한탄한다. 이 경우에 분명 지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의 고통은 제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이 문제라면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일만 그만두면 그 뒤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거절당한 남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며 단단히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가 과거나 미래에 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슬픔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한 번의 실패로 상심하는 야심가도 과거를 곱씹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고통을 영원히 되풀이하는 전설의 시시포스와 같은 것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현재의 일을 생각하라. 지금 순간순간을 영속하는 자기 생활을 생각하라. 지금 1분 뒤에는 어김없이 다음 1분이 찾아온다. 당신은 현재 살아 있으므로 당신이 현재 살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미래가 두렵다고?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건은 결코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당신이 현재 느끼는 고통은, 과연 고통이 너무 가혹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필경 가벼워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하며 모든 것은 지나가게 마련이다. 이러한 격언은 종종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쩌다 우리를 위로해줄 때도 있었지만 극히 드문 일이다.


-1908.4.17

 

 

4장 인간의 행동력


이기주의자의 오산


오귀스트 콩트가 지적한 것처럼 서구의 여러 종교가 저지른 오류 중 하나는 인간은 이기적이어서 신의 도움 없이는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모든 면에 나쁜 영향을 주었고 희생정신까지도 타락시켰다.


그 결과 가장 보편적인 사고와 가장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괴한 억측이 나타나게 됐다. 즉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들도 그저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전쟁을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정의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술을 좋아한다.”

심지어 무정부주의자조차도 신학자이다. 반항은 굴욕에 대응한다. 이런 생각은 모두 같은 통에서 나온 술이다.


사실은 젊은이들의 경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인간이 좋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쾌락이 아닌 행동이다. 축구 경기를 했다고 하면 밀치기, 주먹질, 발길질 그리고 결국에는 시커멓게 든 멍과 물수건 찜질을 받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일 전부를 열렬히 소망하고 있고 또 훗날 추억으로 그리워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다리는 이미 뛰어나가려고 한다. 그리고 관대한 정신이 즐거워서 타박상, 고통, 피로 따위는 무시하게 된다.


따라서 전쟁도 한번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전쟁은 게임으로서 멋진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잔혹성보다도 관대함을 많이 보여준다. 전쟁에서 특히 추악한 것은 전쟁의 원인이 되는 예속 상태와 전쟁 뒤에 오는 노예 상태다. 요컨대 전쟁으로 인한 무질서에 수반되는 것은,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죽어가고 교활한 무리들의 부도덕한 지배가 자행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본능에 맡기고 판단해 보면 이 경우에도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데룰레드(1846~1914 프랑스 시인·정치가)와 같은 마음 좋은 사람들은 남에게 이용당하면서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잘 고려해볼 만하다. 이기주의자들이 아무리 비웃는다 해도 관대한 감정마저 쾌락과 고통의 차감계산으로 따진다면 헛수고이다.

“명예를 사랑하다니 당신은 참으로 바보로군. 그것도 남을 위해서라니!”

가톨릭의 천재 파스칼은 이런 글을 남겼다. 이 말은 얼핏 심오한 의미를 가진 듯 하지만 그뿐이다. 그는 또한 “사람들이 화젯거리로 삼아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목숨을 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남이 준다면 싫다고 말하고 스스로 토끼 한 마리를 잡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는 사냥꾼을 비웃는 사람이었다. 신화적 편견은 정말 강력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눈에 그 다음 진리가 보이지 않도록 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쾌락보다 행동을 사랑한다. 그 행동이란 다른 어떠한 행동보다 규율 있고 규칙적인 행동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의를 위한 행동을 말한다. 거기에서 결과로서 엄청난 즐거움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행동이 즐거움을 좇아 추구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즐거움이란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쁨은 쾌락에 대한 사랑을 잊게 한다. 개나 말에게 신으로 군림하는, 대지에서 태어난 이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기주의자는 순간의 그릇된 판단으로 자기 운명을 잘못 인식한다. 그는 엄청난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이런 계산으로는 참된 쾌락을 놓쳐버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참된 쾌락은 언제나 먼저 고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에 의해 신중하게 계산해 보면 항상 고통이 우위를 점하게 마련이다. 걱정은 언제나 기대를 압도한다. 결국 이기주의자는 질병, 노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의 절망은 그가 자신을 잘못 이해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913.2.5

 

 

5장 소통의 인간관계


배려



누구나 그 유명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보마르셰(1732~1799 프랑스 극작가)의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바질이 모두에게서 “자네 얼굴이 몹시 창백하군.” 이라고 여러 번 듣는 바람에 결국 자신이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그 장면 말이다. 가족 각자가 다른 이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아주 친밀한 가정에 갈 때마다 나는 매번 그 장면이 떠오른다. 조금이라도 얼굴이 창백하거나 붉게 보였다가는 큰 소동이 벌어진다.

온 식구들이 근심하기 시작하며 그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잠은 잘 잤니?” “어제는 뭘 먹었니?”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그리고 그밖에 기운을 돋우는 말을 해준다. 그러고는 ‘좀 더 일찍 손을 쓰지 아니한’ 병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는 이런 식으로 애지중지 사랑을 받고 과보호를 받는 민감하고도 약간 소심한 사람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설사, 기침, 재채기, 하품, 신경통 같은 일상적인 불쾌감이라도 얼마 후 그에게는 무서운 증상이 될 것이다. 그는 징후의 진행 상황을 가족들의 도움과 의사의 냉담한 시선 밑에서 계속 지켜보게 될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의사란 스스로 바보 취급을 받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런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걱정거리가 생기면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상상으로 병을 앓고 있는 이 사내는 자기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밤을 보내고, 지난 밤 이야기를 하면서 낮을 보내게 된다. 이윽고 그의 병은 특정한 병으로 분류되고 다른 사람들 모두가 다 알게 된다. 활기가 없어져가던 대화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된다.

이 불행한 사내의 건강에는 증권시장의 시세처럼 등락표가 붙어서 때로는 올라가고 때로는 내려간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알게 되거나 또는 짐작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신경쇠약 환자가 한 명 더해지는 것이다.


치료법은 고사하고 뭐냐고? 가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무관심한 사람들 가운데서 사는 것이다. 그들은 인사치레 말로 “잘 지내십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진지하게 대답한다면 그들은 모두 달아날 것이다. 그들은 당신의 불평은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위를 불편하게 하는 부드러운 염려가 담긴 시선을 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이 곧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다면 당신은 치료될 것이다.


[교훈 - 남들에게 결코 안색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하지 말라.]


-1907.5.30 

 

6장 노동의 즐거움


행복한 농부


노동은 지상에서 가장 즐거운 것이고 또 가장 힘겨운 것이기도 하다. 자유로이 일하는 것이면 가장 좋고, 노예처럼 일하는 것이면 가장 괴롭다. 가장 자유로운 노동이라 함은 문짝을 만드는 기술자처럼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 자기 스스로가 조정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가 사용하기 위한 문을 만들 때는 사정이 좀 다르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는 장래에 대비한 실험이 되기 때문이다. 목재의 내구성을 조사하기도 하고, 갈라진 틈이 생겨도 예상했던 일이라면 눈을 즐겁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 중에 이 지성의 역할은 문을 만들지 않을 때 격정의 씨를 뿌리게 된다. 자기 일의 성과를 자기 눈으로 확인하면서 계속할 수가 있고 사물의 명령에만 따르고 사물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하다.


자기가 조종할 배를 만드는 일이라면 더욱 행복하다. 키를 움직일 때마다 일의 성과가 보이고 신경을 쓴 곳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눈에 띈다. 흔히 교외에서 노동자가 스스로 구입한 재료로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집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궁전이라도 결코 그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또 군주의 참된 행복도 자기 계획대로 집을 짓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행복한 이는 문의 빗장 위에서 자기가 직접 두드린 망치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때 고통은 즐거움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의 명령에 따라 행하는 단조로운 일보다 힘든 일이라도 자기 스스로 만들고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을 좋아할 것이다. 감독이 방해를 하거나 중단시키는 일이 가장 괴로운 일이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데 마루를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는 가정부는 가장 가엾은 피고용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가정부들 가운데도 가장 정력적인 여자는 자기 일을 지배할 수 있고 또 즐기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밭을 직접 경작할 수만 있다면 농사가 가장 즐거운 일이다. 생각은 끊임없이 일에서 성과로, 시작된 일에서 계속되는 다음 일로 진행된다. 심지어는 수확조차도 인간의 노고로 새겨진 땅 그 자체만큼 눈에서 보이지도 않고 끊임없이 지각되지도 않는다.

자기가 직접 닦은 길 위를 힘들이지 않고 차를 몰고 간다는 것은 한없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밭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이 보장된다면 이득 같은 것이 없어도 괜찮다. 이러한 까닭에 땅에 얽매인 농부는 다른 노예보다 행복한 노예이다.


비록 하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일에 대한 권한과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이러한 원칙을 지킨다면 남을 부리기도 쉽고 남의 일을 해주고 살기도 쉽다. 다만 주인은 권태로울 것이다. 그래서 노름에 빠지거나 오페라의 여배우 때문에 정신을 놓게 될 것이다. 사회 질서가 파괴되는 것은 언제나 무료함과 무료한 나머지 저지르는 미친 짓 때문이다.


현대인도 고트족, 프랑크족, 알라만족, 그리고 여타 무서운 약탈자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만 그들이 결코 권태를 느끼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자기의 의지에 따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한다면 그들은 결코 권태롭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집단 농업은 권태로운 자들이 봉기를 일으킨다 해도 찻잔속의 태풍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대량생산 방식의 노동은 이와 같은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포도넝쿨을 느룹나무에 감기게 하듯이 공업을 농업과 결합시켜야 할 것이다.

모든 공장은 전원에 위치하고 공장 근로자들이 모두 땅을 소유하고 자신이 직접 경작하게 될 것이다. 이런 현대판 유토피아에 의해 변화를 갈구하는 정신은 만족감으로 충분히 상쇄될 것이다.


이런 시도는 철도 건널목지기가 만든 조그만 정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엔 꽃이, 포석(포석) 사이에 자라는 잡초와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화물이 운송되는 도중에도 피어나게 될 것이다.


-1922.8.22

 

 

7장 행복의 진정한 가치


행복의 미덕


외투를 입는 것처럼 우리 힘으로 만든 것이 아닌 행복도 존재한다. 유산 상속이라든가 복권 당첨이라든가 하는 행복이 그것이다. 명예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것도 우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는 행복은 우리 존재에 스며들어 있다. 그런 행복은 양모가 염료로 물드는 것처럼 우리 존재에 스며든다.

고대의 어떤 현자가 난파선에서 구조돼 알몸으로 상륙한 뒤 “나는 전 재산을 몸에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바그너는 음악을 몸에 걸치고 있고, 미켈란젤로는 그가 그린 숭고한 그림 전부를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권투선수 역시, 메달이나 돈을 가지는 방법과는 다르지만 주먹과 다리와 훈련의 모든 성과를 몸에 지니고 있다. 돈을 잘 버는 법을 아는 사람은 빈털터리가 됐을지라도 자기 자신이라는 재산을 지니고 있으므로 여전히 부자이다.


옛날의 현명한 사람들은 이웃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했다. 오늘날의 현명한 사람들은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고귀한 일이 못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어떤 이는 미덕이 행복을 경멸한다고 말하려고 한다.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지 않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모두의 행복이 자신들 행복의 진정한 원천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의견 중에서 가장 공허한 의견일 것이다.


왜냐하면 구멍 뚫린 가죽부대에 술을 붓는 것처럼, 주위의 사람들에게 행복을 퍼붓는 것보다 더 헛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자기가 자기인 것에 진력을 내는 사람을 즐겁게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 이미 음악가가 된 사람에게 음악이 주어지는 식으로 말이다. 모래 속에 씨를 뿌려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나는 이 점을 숙고하면서 모든 것이 부족한 자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씨 뿌리는 사람의 유명한 비유(마태복음 13장, 20~21절)를 이해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해진 사람은 타인에 의해 더 행복해지고 더 강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다. 행복한 사람들은 멋지게 행복을 거래하고 교환할 것이다. 그러나 행복을 남에게 주기 위해선 자기 내부에 행복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행복해지려고 결심한 사람은 이러한 방향에서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식의 사랑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따라서 내 의견으로는 자기 혼에 친밀한 행복은 결코 미덕과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힘을 뜻하는 미덕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러한 행복은 그 자체가 미덕이다. 완전한 의미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옷을 벗어 던지듯이 다른 행복을 태연히 밖으로 내던져 버리는 사람이란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진정한 행복은 결코 내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돌격하는 보병이나 추락하는 비행사라도 그런 짓은 못한다. 그들의 혼에 친밀한 행복은 그들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에게 못으로 박은 듯 단단히 붙어 있다. 그들은 행복을 무기로 해서 싸운다.

그러기 때문에 쓰러져 가는 영웅에게도 행복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본래 스피노자 식의 표현으로 고쳐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그들이 행복했던 것은 조국을 위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행복했기 때문에 죽을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