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치료, 감성에게 묻다
-관점치료를 중심으로-
김선희(강원대 인문한국 연구교수)
<목 차>
1. 들어가는 말 : 현대인들의 삶․관점․병
2. 관점 치료
3. 이성과 감성의 역학 관계의 계보
4. 관점전환의 여섯 축 : 봄의 다양화를 통한 감성의 확장
5. 철학치료에 인식과 감성 : 매리노프와 카우프만
6. 소크라테스적 프락시스 : 프락시스에서 감성의 위상
7. 맺음 말
1. 들어가는 말 : 현대인들의 삶․관점․병
현대인들의 삶에 대한 감성이 지니고 있는 건강과 병을 조건 짓는 기준은 현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물질적 조건이자 정신적 조건이다. 특히 현대인들이 갖는 삶에 대한 다양한 감성을 저울질 하는 것은 피상적으로는 마치 물질적 조건인 것 같지만 그 실상을 보자면 이들이 지니고 있는 정신적 조건이다.
인간의 감성은 수많은 인위적인 매체에 의해서 부단히 텍스트화되어 가고 있다. 인간의 욕망이 부단히 기존의 것에 대한 권태와 새로움에 대한 갈구라는 이중적인 축에 의해서 작동되는 것은 마치 인간의 욕망의 속성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 것 같지만 이와 같은 변덕을 좌우하는 것은 광고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의 외부에 있는 무수한 상징적인 조작들이다. 우리가 그 어떤 물질적인 충족에 의해서도 단지 일시적인 만족뿐 지속적인 만족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감성의 고유한 속성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감성을 조작하는 외적인 메카니즘의 결과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삶에 대한 다양한 감성의 산물인 만족과 불만족,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을 작동시키는 기본적인 틀 중에 하나는 현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관점, 즉 세계관․인생관․가치관과 같은 관점들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위기에 처해있는 현대인의 삶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현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관점을 감성과의 연계 속에서 성찰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철학 치료의 한 방법으로서 관점에 대한 성찰과 변형에 대한 접근을 ‘관점치료(Perspective-Therapy)’에 대한 구체적인 모형을 제시해봄으로써 ‘철학치료(Philosophy-Therapy)’1)와 더불어 ‘인문치료(Humanities-Therapy)’의 모형 개발의 한 단초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문치료나 철학치료에 있어서 소홀하게 다루어지기 쉬운 감성의 치료적 위상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감성의 치료적 위상을 관점치료의 활용의 구체적인 모델인 소크라테스적 프락시스 기법들 속에서 살펴볼 것이다.
* 이 글은 2009년 6월 20일에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개최된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 창립 대회에서 발표한 「관점치료의 인문치료적 모형」에서 감성적 부분에 관한 논의를 확장한 것이다.
1) “현대 마음 치료의 한 분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철학 상담은 자기이해와 더불어 자기비판을, 기술적 해석과 더불어 규범적 해석을, 개인 내적인 심리적인 것의 평정과 더불어 개인 외부와 관련된 실질적인 문제의 해소를 함께 풀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바로 1980년대 이래 철학 실천(Philosophische Praxis), 철학
상담(Philosophical Counseling), 철학 치료(Philosophical Therapy) 그리고 임상철학(Clinical Philosophy)로 다양하게 불리는 철학의 새로운 활동의 구심점이다. 대화를 통한 철학함과 철학치료의 근본적인 신념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마음의 문제나 병을 스스로 진단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 상담사가 필요하다면 이는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푸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출발은 독일의 아헨바흐(G. B. Achenbach: 사진)에 의해서 철학 프락시스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국제
철학프락시스 학회인 IGPP(Die Internationale Gesellschaft für Philosophische Praxis)의 전신은 철학프락
시스 학회(Gesellschaft für Philosophische Praxis, 영어 표기는 ISPP; International Society for Philosophical Practice)였으나 1998년 “IGPP”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05년 초에 아헨바흐는 베르기쉬-글라트바흐(Bergisch-Gladbach)에 철학프락시스 지역학회인 GPP(eine regionale Gesellschaft für Philosophische Praxis)를 설립하였다.“ 이종하, 김선희, 정영근, 「삶을 철학하다: 철학 상담」,『삶․일상․윤리:현대인을 삶을 위한 12 가지 성찰』, 문음사, 2009(개정판), 342, 351쪽 참조.
2. 관점 치료
철학하기의 가장 고전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텍스트는 ‘함께 마시다’는 어원에서 유래한 플라톤의『심포지움Symposium』이다.2) 이 글에서 소크라테스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사랑(Eros)이라는 특정의 화두를 놓고 자신의 생각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이들은 사랑이라는 동일한 철학 주제에 대하여 상이한 자신의 생각들을 대화를 통하여 함께 나눈다.
동일한 주제에 대한 다른 생각들이나 다른 관점들이 동일한 하나의 답을 추구하기 보다는 동일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면모들을 드러냄으로써 심포지움에 참석한 사람들이나 그 향연에 관하여 듣는 사람이나 할 것 없이 하나의 주제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이와 같은 철학의 심포지움 정신을 현대에 확대 재생산하려는 시도 중에 하나가 바로 관점 치료이다.
심포지움의 힘은 철학이 출발점으로 하는 생각하기를 자신의 내부의 관점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외부에 있는 다른 관점들과 상호 교환하는 집단적 철학하기에 있다.3)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본다면 관점에 대한 연구는 철학의 중요한 주제이자 삶의 개선을 위해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사유나 행동 그리고 정서적 움직임은 이와 같은 관점의 다양한 축들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관점이라는 개념은 15세기의 산물이다. 그러나 봄에 대한 새로운 접근, 즉 관점에 새로운 요인, 즉 정서나, 가치가 개입된다는 사실은 훨씬 후인 19세기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전통적 형이상학에 있어서 관점은 논외의 대상이거나 극복의 대상이었다. 형이상학은 대상 파악에 있어서 객체에 대한 주체의 거리나 위치와 같은 요소들을 배제한다.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시선은 '참된' 대상의 파악을 위하여 무-시간과 무-공간을 상정하는 무-시점이나 초-관점을 지향한다. 형이상학은 앎에 있어서 보편적인 대상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보편적인 눈을 상정한다. 이와 같은 이해는 관점들의 보편성을 보장하는 선험적 눈에 대한 상정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눈들을 하나의 눈으로 환원한다.
선험적 눈은 공통의 관점을 가능케 하는 원근법의 한 지점, 즉 누구나 예외 없이 같은 장소, 같은 때라고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어떤 지점을 전제한다.
이 지점에 세워진 선험적 혹은 생각하는 주체는 바로 어떠한 살도 감정도 가지지 않은 기하학적인 사유자이다. 그가 보는 세계는 생성과 변화의 세계가 아니라 일종의 기하학적이며 수학적인 세계이다.4)
고정된 주체와 고정된 대상을 상정하는 원근법의 고정된 관계는 고정된 하나의 시점(point of view), 즉 단일-시점(single-point of view)을 전제한다. 이로써 근대 원근법의 대상과 주체 사이의 거리를 객관화시키려는 시도가 오히려 특정의 거리와 위치로 다양한 거리와 위치를 환원시키는 '원근법의 패러독스'에 사로잡히게 되고, 인식론 역시 붙박이 대상과 붙박이 주체를 탄생시키는 '원근법적 독단의 잠' 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서 탄생한 붙박이 대상과 주체가 대상 경험, 즉 대상에 대한 앎의 보장을 단일시점에 의해서 확보한 것은 결국 대상과 주체 사이의 수많은 다른 관점의 말소를 가져왔다. 근대의 원근법적 시선은 자신의 시선을 독단적으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고수함으로써 수많은 관점들을 침묵 속으로 가라앉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15세기의 원근법이 지니는 한계, 즉 단일 시점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 고전적 원근법의 종말을 선언한 시대인 19세기에 이르러 대상에 대한 앎은 하나가 아니라 다수의 공간과 시간을 설정하고 이에 따른 상이한 대상 경험을 상정한다. 뿐만 아니라 15세기 이래 고전적 원근법이 물리적인 거리와 위치를 상정했다면 19세기의 원근법은 가치의 거리(distance)와 위치, 즉 시점(point of view)을 상정한다.5) 이와같은 변화는 거리를 물리적 거리에서 가치적 거리로, 시점을 '단일-시점(single-point of view)'에서 '다-시점(multiple-point of view)'으로 이동시킨다. 관점에 있어서 이와 같은 전환의 대표 주자가 바로 니체이다.
니체는 인간에 대한 계보학적 통찰의 진수가 녹아있는 그의 저서 도덕의 계보학에서 오직 관점주의적으로 보는 것만이, 오직 관점주의적인 ‘인식’만이 존재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니체가 전통 형이상학이 지닌 본질주의에 반기를 드는 행위를 관점주의(Perspektivismus)라는 용어를 통해서 전개하지만, 그 내용은 고전적 의미의 원근법이 지닌 내용과 판이하게 다르다.
니체는 형이상학이 상정한 반-관점주의 입장에 반대하여 관점주의를 표방한다. 그럼에도 그는 고전적 의미에 있어서 원근법이 지니는 관점의 단일시점을 비판한다는 점에 있어서 반-원근법적 전통에 서 있다. 한편으로는 대상 경험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의 한계를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의 원근법이 지니고 있는 대상에 대한 한계를 철저히 해부함으로써, 니체는 기존의 관점의 '관점-전환(die Wendung der Perspektive)'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다.6)
인간의 삶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를 담론이나 언어 그리고 그것의 큰 틀인 관점으로 본 니체의 관점주의는 형이상학이 상정한 반-관점주의(Anti-perspectivism) 입장에 반하여 관점주의를 표방하지만 고전적 의미에 있어서 원근법이 지니는 단일시점을 비판함으로써 대상 경험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의 한계와 근대의 원근법이 지니고 있는 대상에 대한 한계를 해부한다.
이와 같은 니체의 관점전환의 또 다른 의의는 바로 관점 자체가 정신의 관점에서 몸이나 감성의 관점으로 이동 또는 확장했다는 점이다. 니체에 있어서 관점이 형성되는 기본 장소는 바로 몸이다. 인간의 인식에 대한 니체의 관점주의적 이해는 니체가 인식의 조건을 관점적으로 보았다는 점뿐만 아니라 니체가 인간의 인식의 중요한 매체를 몸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몸이 지니는 인식적 의미는 몸에 대한 관심이자 몸을 이루고 있는 감각이나 감성에 대한 중요성의 강조이다. 인식과 그것을 이루는 매트릭스에 대한 니체의 전환적 이해는 봄, 관점 자체의 몸성을 의미한다. 이는 주어진 관점 전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매체가 바로 몸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인간의 관점을 전환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매체로서 몸 그리고 이 몸을 이루고 있는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관점 전환의 전략만이 전환의 성공적인 절차를 보장한다.
2) Plato, Symposium, The Collected Dialogues Of Plato Including The Letters I, Edith Hamilton and Huntington Cairns (ed.), New Jersey: 1961.
3) 김선희, 「철학치유를 위한 서언: 철학치유의 세 축으로서 자기인식, 자기배려, 대화」,『철학연구』, 제107집, 대한철학회 편, 2008, 130-135쪽 참조.
4) 관점 치료는 이미 필자에 의해서 선행 연구된 부분이나 아직 관점치료라는 영역이 생소한 영역이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첨거한다. 김선희,「관점과 관점치료」, 강원대학교 HK 인문치료사업단,『인문치료』, 네오뮤즈, 2008, 125-143쪽 참조. 브루넬리스키와 알베르티의 원근법의 고안에 의해 서구의 대상들이 특정의 위치에 배열되기 시작하는 15세기에 인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최신예 발명품인 원근법과 근대의 인식론의 만남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거리와 위치에 대한 인식을 각성시켰다. 형이상학적 전통 속에서 전개되었던 대상의 본질 파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대상들은 특정의 공간 속에 배열되어 주체와의 거리에 의해서 자신의 크기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비록 근대의 발명품인 원근법이 대상에게 크기를 부여하고 인식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가 인정되었을지라도 이 원근법이 하나의 원근만을 상정한 것처럼 인식적 눈 또한 고정된 하나의 눈과 거리만을 인정함으로써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여전히 형이상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김선희, 「니체에 있어서 관점과 해석의 문제: 관점에 대한 아이러니한 태도」, 『해석학 연구』제19집, 한국해석학회편,2007, 78-79쪽 참조.
5) 회화의 영역에서 이와 같은 이행의 교량으로서 모네, 세잔, 벨라스케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피카소나 메를 로퐁티의 역할 또한 간과할 수 없다.
6) 니체는 그러나 그의 초기의 저작부터 이와 같은 인간의 지각의 산물 자체에 대한 가상성을 이미 명시적으로 의식하고 있다. “이러한 꿈 현실의 최고의 삶에서 우리는 그러나 여전히 그것이 가상임이 넌지시 내비치치는
것을 자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과 만물을 이따금 단순한 환영이나 꿈의 형상처럼 생각하는 어떤 사람의 재능을 철학적 능력의 표시로 간주한다. 철학적 인간은 게다가 우리가 살고 있고 존재하는 현실성 아래에서 어떤 제2의 전혀 다르게 은닉된 것이 놓여있으며 그것 또한 하나의 가상일 것임을 예감한다.” Nietzsche, W.F., Die Geburt der Tragödie, in: KSA1, 26쪽.
3. 이성과 감성의 역학 관계의 계보
기존의 관점의 전환이 인식적 차원을 중심으로, 그것도 이성이나 정신을 중심으로 하는 관점이나 관점의 전환을 추구하였다면 니체는 단지 인지적 차원의 관점, 즉 머리 중심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가슴과 배라고 하는 다양한 축뿐만 아니라 이들의 뫼비우스 띠와 같은 관계에 주목한 관점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니체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세계에 대한 감수성, 다양한 경험들에 대한 감수성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예의주시하였다.
디오니소스로 상징되는 감성이나 심미성 그리고 예술에 대한 니체의 강조는 특히 서양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시조인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판 속에서 구체화된다. 특히 삶에 있어서 비극(Tragödie)의 역할을 다루고 있는 니체의 초기의 저작인『비극의 탄생』은 비극이 삶에 부여하였던 강력한 영향력이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어떻게 감퇴되었는지를 드러낸다. 특히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강조되었던 도덕이나 앎은 니체에 있어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감수성을 마비시키는 부작용을 수반한다. 뿐만 아니라 이성을 기형적으로 강화시킴으로써 인간의 삶에 있어서 도덕과 앎의 비대화와 더불어 학문에 있어서는 윤리학과 인식론의 비대화를 초래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감성의 터부화는 인간의 심미적 체험이나 미학 혹은 예술의 죽음의 도래를 예고한다. 이와 같은 결과로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본능이 비판가가 되고, 의식이 창조자가 되는, 결함에 의한 진짜 괴물”7)이 탄생하게 된다.
세계를 지각하고 경험하는 매체인 감성이 오로지 도덕화되고 주지화됨으로써 인간은 미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이 되길 포기하고 이론적 인간(theoretischer Mensch)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 이론적 인간의 낙관주의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몰락을 의미한다.
즉 ““덕은 앎이다; 죄는 무지로부터 범해진다; 덕있는 자가 행복한 자이다”; 낙관주의의 이 세 가지 근본형식에는 비극의 죽음이 놓여있다.”8)
그러나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죽음을 통해 상징되는 감성의 죽음은 단지 소크라테스로 상징되는 고대의 형이상학자들에 국한되지 않는다.『반시대적 고찰』에서 역사개념에 대한 고찰이나『도덕의 계보』에서 우리의 가치(Wert)를 이루고 있는 가치의 가치(Wert der Werte)에 대한 고찰 속에서 이와 같은 심미성의 영역들이 어떠한 과정과 절차를 통하여 더 조직적이고 집요하고 치밀하게 말소되기에 이르는지가 폭로되어 있다. 결국 이와 같은 니체의 작업은 인간이 이론적 인간의 변형태로서 역사적 인간과 담론화된 인간으로 재탄생되는 과정에 대한 탐색이자 이렇게 상실된 디오니소스적 인간, 심미적 인간의 회복에 대한 시도이다.
니체 철학의 과제는 또한 현대의 마음치료의 과제일 수 있으며, 관점치료의 중심 과제일 수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감성의 존재이고 인간의 감성은 해석적이다. 오성과 분리된 감성이 불가능 하듯이 해석 없는 순수한 감성이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감성과 오성이 뫼비우스 띠와 같은 관계를 지니고 있듯이 인간의 감성과 해석 또한 뫼비우스 띠와 같은 관계 구조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계에 대한 니체의 고찰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저서가 바로『도덕의 계보』이다.
도덕의 계보에 대한 천착 속에서 니체는 근대인들이 신봉했던 의식이나 정신의 형성이 지니는 고질성을 “언어 속에 화석화된 이성의 근본 오류(der in ihr versteinerten Grundirrthümer der Vernunft)”9)나 해독되어야 할 “상형문자(Hieroglyphenschrift)”10)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우리의 정체성이 절대적으로 고정되어 있거나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어서 그것의 계보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명시한다. 그러나 저 표현들이 지니는 또 하나의 암시는 그와 같은 형성의 산물의 해독이 결코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변화 또한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정체성의 형성 과정에 대한 계보학적 통찰은 한편으로는 치료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그것의 진단이나 치료 자체의 어려움이 얼마나 클지를 명시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단과 치료가 이루어져야 할 장소는 바로 그것의 형성의 장소인 인간의 몸이자 이것의 통로인 감성이라는 점이다. 이는 니체에 있어서 인간의 의식이나 인식자체의 바탕인 몸성(Leiblichkeit)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의 변화나 가치의식의 변화, 나아가 관점의 변화는 단지 한 번의 성찰이나 사고의 전환에 의해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계보학의 역사적 시간을 겪음으로써 우리 안에 화석화된 몸성의 기억이 서서히 변형을 채비하게 되는 것이다. 의식과 몸의 상관성, 몸과 언어의 상관성 그리고 언어와 사물의 고착성에 틈을 마련하는 것은 단순히 순간적이고 추상적인 사고의 과정이나 예술의 체험을 통해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니체에 있어서 저 고착성을 상기하기 위하여 우리가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개념은 바로 기억술(Mnemotechnik)이다. 그는 인간의 기억(Erinnerung)과 망각(Vergessen)의 문제를 기억술을 통해서 해결한 전형적인 예를 서양의 이성사에서 찾는다. 기억을 위해서나 망각을 위해서는 기억술이 필요하다.11)
기억술은 때로는 아주 평화로운 절차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아주 잔인한 과정을 통해서 실행되기도 한다. 특히 강제적으로 특정의 기억을 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즉 특정의 관점을 더 강하게 고정시키고, 필연의 올가미에 더 오래 묶어 두기 위하여 몸은 잔혹한 경험을 겪게 된다.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의 역사는 기억술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며 이 기억술에는 피 냄새가 진동한다. 이와 같은 잔혹한 기억술은 기억과 망각에 있어서 강제성 수반함으로써 기억과 망각 자체의 타자성을 초래한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망각되기 위하여서나 새로운 기억이 각인되기 위하여 꼭 잔인한 기억술만이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저 기억과 망각의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자발적인 형태를 우리는 이미 다루었던『비극의 탄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평화로운 기억과 망각의 매체를 니체는 고대에서는 특히 예술(Kunst), 즉 꿈과 도취로 상징되는 조각과 음악 속에서 발견하며, 근대라는 시간 속에서는『반시대적 고찰』에서 보듯이 기억술이라는 용어 대신에 “조형력(plastische Kraft)”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과거의 것이 잊혀야만 하는 정도와 한계를 규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인간, 한 민족, 한 문화의 조형력이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하는데, 나는 저 힘을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습득하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며 부서진 형식들을 스스로 본떠 만드는 힘이라고 부른다.12)"
그러나 조형에 대한 사유를 니체는『반시대적 고찰』이전에 저 비극에 대한 논의에서도 선취하고 있다. 조형의 매체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미 사용했던 매체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우리가 잘 볼 수 있듯이 때로는 아폴론의 꿈(Traum) 속에서, 그리고 때로는 디오니소스적 도취(Rausch)에 의해서 기억과 망각의 강력한 조형의 경험이 이루어지게 된다.13) 꿈과 도취라는 조형력에 의해서 우리는 일상의 관점에서 자유로워지고, 우리는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경험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속에서 자기 자신이나 세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전환된 관점을 지니게 된다.
이처럼 니체는 기억과 망각의 변형과 관련하여 상이한 시대에 상이한 매체가 사용되고 있음을 그의 저술 활동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은 상이한 논의의 와중에도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이와 같은 변형의 객체인 동시에 주체라는 사실이다. 그는 인간을 꿈과 도취를 통한 예술적 변형의 주체로 파악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간을 예술이나 변형의 객체로 이해한다. 즉, 인간은 예술가(Künstler)일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Kunstwerk)이다. 인간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하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14)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작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원적 일자의 최고의 환희를 위하여 전체 자연의 예술적 완력은 여기서 도취의 전율 아래서 드러난다. 가장 고귀한 점토와 가장 값진 대리석은 여기서 반죽되고, 다듬어진다.15)"
꿈과 도취의 공통점은 이와 같은 경험이 단지 이성이나 정신에 의해서 독점된 인식이라고 하는 머리의 작용에 국한된 경험이 아니라 온 몸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적 충동의 관점에서 예술의 주체와 객체로서 파악된다는 점이다.
"그것을 만들어냄으로써 모든 인간이 완전한 예술가인 꿈의 세계의 아름다운 가상은 모든 조형 예술(aller bildenden Kunst)의 전제 조건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그것은 시학의 중요한 절반의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형상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 속에서 즐기고, 모든 형상들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중요하지 않은 것도 불필요한 것도 전혀 없다.16)"
그러나 니체가 고대 그리스의 문화 속에서 주목한 이와 같은 평화로우면서도 자발적인 예술적 매체는 어느 순간부터 위에서 더 강력한 매체에 의해서 교체되어진다. 예술이 지니는 자유분방하고 부드럽고 자발적인 기억과 망각의 조형력은 근대의 안팎에서 더 강력한 장치들에 의해, 즉 우리의 의식을, 우리의 몸을 완전히 통제하고자 하는 타자적인 수단에 의해 단련됨으로써 우리의 의식은 우연의 자유로움에서 이끌려 나와 필연성의 족쇄에 감금되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형태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기억과 망각을 통한 우리의 감성의 재구성 작업은 종교적, 윤리적, 정치적 매체에 의해서 대체되어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체물의 특징은 인간의 정체성, 인간의 몸, 인간의 삶 그리고 감성의 재구성 작업에 대한 니체의 계보학적 통찰 속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니체에 있어서 감성이나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접근의 다양성은 인간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다양한 통로를 제공한다.
인간의 정신뿐만 아니라 몸이나 감성을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 더우기 때로는 강제적이고 수동적인 과정 속에서 엄격히 통제된 절차 속에서 계산적인 규율권력에 의해서 생산되는 것으로 보는 니체의 계보학적 통찰은 인간의 감성 또한 예술의 저 주체와 객체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스스로 변형의 주체이자 변형할 수 있는 변형의 객체로서 변형될 수 있는 점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인간의 감성 또한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라기보다는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성과 감성의 역학구조에 대한 계보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물음은 과연 이와 같은 계보를 지닌 우리의 감성은 지금 건강한가 아니면 병들어 있는가? 이와 같은 물음은 인간의 삶을 치료하고자 하는 모든 치료적 이론에 있어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물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저 계보학적 고찰 속에서 우리는 감성의 수난사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일차적이 작업은 문제의 감성에 대한 진단일 것이다. 우리의 감성과 삶의 역학관계에 대한 물음은 치료적 통찰의 중요한 화두를 제공한다.
그러나 감성에 대한 치료적 물음에 있어서 결국 감성 자체가 타자에 의해서, 더 강한 권력에의 의지에 의해서 지배적으로 고안되고 실행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단지 전복되어야 할, 혹은 망각되어야 할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주어진 것 중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 감성은 몸의 기억 속에 보존하고 확장하는 한편 우리의 삶을 병들게 하는 것은 예방과 치료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감성의 변형의 정도는 감성에 대한 조형력을 통하여 우리는 감성을 만드는 예술가일 수도 있고 우리 자신 그 만듦의 대상, 즉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치료의 제1명제가 치료 대상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하듯이, 인간 존재의 감성을 대상으로 할 경우 진정 감성의 어떤 면이 병과 건강의 기준이 될 수 있을지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니체는 그 어느 철학자보다도 이성중심주의 속에 쇠약해진 인간의 몸의 죽음, 감성의 죽음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죽음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치명적인 결과를 진단하고 그 대안을 찾고자 노력했다.
현대인들의 삶 속에 각인되어 있는 이와 같은 치명적인 결과는 바로 고정된 관점(fixierte Perspektive), 그리고 그 관점을 사로잡고 있는 이성중심주의 그리고 이것의 부작용으로서 한편으로는 과도한 감성주의라고 할 수 있는 감각주의, 퇴폐주의 그리고 쾌락주의의의 만연과, 다른 한편으로는 감성을 터부시하는 이성중심주의의 몸과 감성에 대한 경멸로 인한 인간의 감성의 말살에 의한 인간의 기형화이다.
7) Nietzsche, W. F., 같은 책, 90쪽.
8) Nietzsche, W. F., 같은 책, 94쪽.
9) Nietzsche, W.F., Zur Genealogie der Moral, in: KSA Bd.5, 279쪽.
10) Nietzsche, W.F., 같은 책, 254쪽.
11) Nietzsche, W.F., 같은 책, 295쪽 참조.
12) Nietzsche, W.F., Unzeitgemäße Betrachtungen, in: KSA Bd.1, 251쪽
13) Nietzsche, W.F., Die Geburt der Tragödie, in: KSA1. 이진우역,『비극의 탄생』, 책세상 2005, 29-30쪽
참조.
14) 김선희, 「여성주의와 니체 그리고 푸코의 새로운 만남: 계보학적 변형과 예술적 변형의 여성주의적 함의」,『한국여성철학』, 한국여성철학회, 2007. 47쪽 참조.
15) Nietzsche, W.F., Die Geburt der Tragödie, in: KSA Bd.1, 30쪽.
16) Nietzsche, W. F., 같은 책, 26쪽.
4. 관점전환의 여섯 축 : 봄의 다양화를 통한 감성의 확장
고착된 관점에게 운동감을 부여하는 것은 현대인의 마음병의 치료에 있어서 기본 과제이다. 니체는 관점의 전환의 의의를 지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다음과 같이 진지하게 논하고 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이 단지 지평(Horizont) 안에서만 건강하고 강하고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보편적 법칙이다; 하나의 지평을 이동시킬 수 없고, 너무 자기 본위적이어서 낯선지평 안에 자신의 시선을 포함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외통수가 되거나 급격하게 시기 이른 몰락으로 쇠약해질 것이다.17)"
인간의 삶의 전환이 인식의 전환을 전제하고, 인식의 전환이 곧 몸의 전환을 전제한다면, 관점전환은 근본적으로 몸 중심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한다. 이와같은 몸성의 또 다른 영역으로서 정서나 욕망 그리고 행동과 같은 영역들이 관점 전환의 중요한 탐구 영역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주체의 네 축의 변화를 통하여 우리는 인식의 전환과 정서의 전환과 욕망의 전환과 행동의 전환을 시도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생각, 새로운 정서, 새로운 욕망, 새로운 행동을 시작하게 된다.
철학치료나 인문치료의 가능한 방법으로서 관점치료는 그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나 치료의 대상 영역 그리고 매체 사용문제에 있어서 감성과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있다. 그렇다면 관점 전환에는 어떤 가능한 축들이 있을까? 필자는 관점치료의 핵심인 관점전환을 위해 여섯 가지 축과 그것의 양태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들의 중심축은 주체와 대상, 인칭, 시간, 공간, 거리,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주체와 대상 축의 양태와 관련하여 관점 전환은 치료적 활동의 주체와 대상으로 인간을 인지적 부분을 상징하는 머리, 정서적 부분을 상징하는 가슴, 욕망을 상징하는 배 그리고 행동의 차원으로 구분하여 관점 전환을 시도한다.
그리고 두 번째, 인칭축은 1인칭, 2인칭, 3인칭으로 양태를 구분하여 문제시되는 관점에 접근할 수 있다.즉 나의 관점을 체험하고 상대방의 관점을 체험하고 그리고 제3자의 관점을 체험함으로써 문제 관점에 접근한다.
그리고 세 번째, 시간 축과 관련해서 우리는 현과거의 관점에서, 현재의 관점에서 미래의 관점에서 문제 대상에 대한 관점을 전환할 수 있다. 동일한 대상이라도 보는 시간적 관점에 따라서 상이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네 번째, 공간 축과 관련해서는 지금 관점이 처해있는 여기 그리고 그 관점의 장소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거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지의 장소인 저기의 관점을 통하여 문제 관점의 전환을 시도한다.
다섯 번째, 거리의 축은 물리적 거리와 가치적 거리로 구분된다. 물리적 거리는 대상과 관점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가치적 거리는 경험되는 우리의 세계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가치적 요소들에 의해서 영향 받고 있다는 점에서 대상의 중요도를 상징하는 존재감이나 가치가 대상 자체와 우리 사이의 객관적 거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인 가치의 거리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마지막으로 시점은 단일 시점과 다시점으로 구분된다. 우리가 대상을 경험할 때, 우리의 관점이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단일시점에 속할 것이고 우리의 관점이 다양한 위치와 거리에 의해서 형성된다면 이는 다시점이다.
이와 같은 여석 가지 축과 그것의 양태를 중심으로 관점전환이 시도된다. 관점 전환을 시도함으로써 현대인들의 마음의 병을 치료적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관점치료는 4단계의 과정 속에서 문제의 관점 진단과 치료를 수행할 수 있다.18)
제1단계는 관점-성찰(Perspective-Reflection)로서 내담자와 철학 상담자는 내담자의 문제를 그를 사로잡고 있는 관점, 즉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등과 같은 관점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관점 성찰을 통하여 철학치료는 문제를 형성하고 있는 중심 관점을 이끌어 내는 것을 시도한다. 이는 마치 관점의 고고학자처럼 내담자를 지배하는 관점의 정체를 파악하는 단계이다.
관점-성찰이 이루어지면 제2단계에서는 관점-이해(Perspective-understanding)단계로 이행한다.
이 단계는 문제의 관점들이 내담자에게 발생하게 된 유래를 이해하는 단계이다. 특정의 관점이 문제시된 내적 맥락과 외적 맥락을 파악해 들어간다.
왜 특정의 관점이 문제시 되는지를 내적ㆍ외적 관계나 상황을 이해해 들어감으로써 특정의 관점과 관점의 주변 환경 사이의 역학관계 속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모색한다. 이 단계는 내담자의 관점만을 탐구하는 고고학적 단계와는 달리 관점과 관점의 외적인 상황의 역학관계를 추적하는 계보학적 단계이다.
제1단계에서 문제시되는 관점이 성찰되고, 제2단계에서 문제제기 된 관점의 내적ㆍ외적 역학관계가 이해되었다면 이제 제3단계인 관점-공감(Perspective-Sympathy) 단계로 이행한다.
제3단계는 문제의 관점을 심정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다. 제1ㆍ2단계가 문제시 되고 있는 관점을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단계라면 제3단계는 문제 관점에 수반되는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아픔과 고통을 공감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시도하는 단계이다.
현대인의 마음 치료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객관적 문제 상황의 해결과 더불어 그것에 수반되는 정서적 불편함이다. 따라서 제3단계 또한 철학치료에서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는 관점-조형(Perspective-Molding)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2단계의 문제시되는 관점의 이해와 3단계의 마음의 평정을 기반으로 문제를 실천적으로 변형하는 단계이다.
지금까지의 단계가 일종의 이론적 앎인 마테시스(mathesis)의 단계를 경유하여 심정적 앎인 공감의 단계를 막 지나왔다면, 마지막 단계는 수련의 단계, 즉 자신의 관점을 실천적으로 조형하는 관점의 아스케시스(askesis) 단계이다.
제4단계는 자신의 관점의 심화(Vertiefung), 확장(Erweiterung) 혹은 변형(Veränderung)의 경계를 선택하는 단계이자 이것을 실천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과거의 우리의 관점이 유지되어야 하거나 변화되어야 할 정도와 한계를 문제 설정하는 조형력(Plastische Kraft)이다. 조형력을 통하여 철학치료사와 내담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관점의 심화가 필요한지, 확장이 필요한지, 아니면 관점 자체의 변형이 필요한지를 결정하게 된다. 조형력을 통하여 내담자는 자신의 관점을 단일-시점에서 다-시점으로 전환하거나 가치 관점을 바꿈으로써 관점을 심화ㆍ확장ㆍ변형할 수 있게 된다.
17) Nietzsche, W.F., Unzeitgemäße Betrachtungen, in: KSA Bd.1, 251쪽.
18) 김선희, 「관점과 관점치료」, 강원대학교 HK 인문치료사업단, 『인문치료』, 네오뮤즈, 2008, 140-141쪽 참조.
5. 철학치료에 인식과 감성: 매리노프와 카우프만
오늘날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매리노프의 철학상담 방법은 PEACE이다.19)
5단계로 이루어진 PEACE 모델에서 1단계는 Problem, 즉 어떤 문제를 철학적으로 생각하고자 할 대상이 되는 문제 자체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2단계는 Emotion,즉 문제가 우리의 내부에 수반한 정서의 분석 단계이다. 매리노프는 대부분의 심리학과 정신의학은 이 단계를 넘어서지 못함을 지적한다.
3단계는 Analysis, 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열거하고 평가하는 단계이다. 이 때 이상적인 해결 방법은 외부 사항인 문제와 내부사항인 정서를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다. 이는 약물치료와의 변별성을 주는 부분이다. 4단계는 Contemplation, 즉 보다 넓은 전망을 확보한 상태에서 전체적 상황을 정관하는 단계이다.
1-3단계가 문제를 세분하는 단계라면 4단계는 통합하는 단계로서 전반적인 상황을 관리하는 철학적 통찰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5단계인 Equilibrium은 지금까지의 단계, 즉 문제를 발견, 정서를 표현, 대안을 분석, 철학적 입장을 정관 한 다음에 도달한 철학 상담의 궁국적인 상태이다.
카이 호프만(Kay Hoffmann)은 지평, 즉 Horizont라는 단어를 통하여 철학 상담의 목표를 제시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철학 상담의 목표는 내담자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20) 그녀에 의하면 지평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 영역과 눈으로 볼 수 없는 먼 곳의 하늘이 맞닿은 선이다.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 시선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지평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로놓인 지평선은 현실과 비전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Horizont의 구체적인 전략으로 호프만이 선택한 것들은 무엇일까?
H는 Herausforderung, 독일어로 도전을 뜻한다. 도전이라는 용어에는 호프만의 인생관이 담겨있다. 인생이란 도전, 즉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삶의 의미에 대한 대답은 전적으로 우리 인간의 몫이다. 삶을 가꾸어 가는 힘과 능력도 우리의 몫이다.
O는 Option, 즉 선택이다. 상상력은 정신의 의식적 활동이다. 세계와 현실의 다양한 가능성들이 눈앞에 등장한다. 정신은 마치 연극배우가 된 듯이 말과 행동,의상, 대본, 무대 등을 선택하여 연출한다.
R은 Reality, 즉 현실성이다. 이제 선택의 현실성을 검토해야 한다. 먼발치에서 가능성으로 꿈꾸었던 것들을 현실로 불러낸다. 구체적이고 제한적인 현실에는 어쩔 수 없는 요구와 필연성이 존재한다. 이들과 정면으로 대결할 때 비로소 머릿속의 생각들은 현실성으로 단련된다.
I는 Intuition, 즉 직관이다. 직관은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서 시야를 넓혀주어서 전체에 대한 전망을 가능하게 해 준다. 개별적 관찰 과정의 성과가 이제 직관을 통해서 전체에 대한 조망 밑으로 들어간다. 스토아적 이성에 맞추어진 인지적 치료법과 반대로 여기서는 카오스가 새로운 질서로 가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Z는 독일어로 Zielsetzung, 즉 목표설정이다.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직관의 도움으로 목표에 대한 시선이 실제적으로 발전된다. 목표를 확정짓는 순간 목표는 상상력이 발휘되는 창조적 과정에서 벗어난다. 목표는 이제 선택되어 현실 생활에서 자기 기능을 발휘한다.
O는 Organization, 즉 조직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삶의 과정은 새롭게 조직되어야 한다. 상상이나 직관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조직된다.
N은 Nutzen, 즉 유익이다. 유익은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힘으로서 목표를 향한 우리의 노력을 정신적, 내면적으로 지원해 준다.
마지막 알파벳인 T는 Tanz, 즉 춤이다. 춤을 추는 사람은 저마다 개인적인 춤 스타일이 있지만 춤을 출 때 중요한 것은 내 스타일의 관철이 아니라 나와 세계의 통일이다. 음악과 공간에 대한 적응노력은 나와 바깥 세계와의 만남을 상승시킨다.
지평 상담의 주요 과제는 ‘생각하며 느끼는’ 방법을 가르치고 그럼으로써 무의식의 작용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이를 통해 무의식의 나쁜 작용은 무력화시키고 좋은 작용은 더욱 활성화시키는 데 있다. 이와 같은 ‘지평’은 개괄적인 차원에서 철학 상담의 주요 진행 방식과 개별적인 단계들에 교육학적 체계를 부여하기 위해 호프만과 그녀의 동료(레더러)가 개발한 철학 상담 개념이다. 폭넓은 시선으로 지평을 바라보게 되면 이제까지 눈에 띄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포착된다. 경직된 시선에서 벗어나 여유를 갖게 되는 순간 곧 문제의 해결책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지평은 우리의 의식과정의 특정한 단계를 여는 열쇠이다.
이와 같은 호프만의 철학 상담 방법은 매리노프와 상당 부분 차이가 있다. 루 매리노프의 PEACE 5단계에서 C이전까지의 단계는 일반적인 수준의 내용으로서 굳이 철학 상담이 필요로 하는 부분은 아니다.
매리노프는 철학 상담의 진정한 대상을 C 단계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호프만의 지적에 따르면 Contemplation은 자신의 정체성과 에고로부터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한다. 심한 경우에는 이를 위하여 적절한 형태의 진정제 사용까지도 고려한다. C는 에너지와 의식이 흐름이 꺾이고 정체하고 말라버리는 위험이 있다는 호프만의 우려이다. 이것은 PEACE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불안한 정신에 안정을 주려는 모든 조치들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E(Equilibrium)는 C에서의 향정신성 화학진정제보다는 좋은 해결책이다. 그러나 카이 호프만은 이와 같은 태도의 한계 또한 제시한다.
즉 스토아적인 형태의 자아 통찰에서 이루어지는 극기의 태도는 충만한 활기와 엑스타시스에 대한 긍정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스토아적 태도는 소심한 자기 제한을 포함한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삶의 평정을 취하는 것은 좋지만 이를 통해 의욕들이 사라진다면 삶은 아무런 자극도 없는 따분한 것이 되고 말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호프만의 날카로운 감성과 삶의 연관성에 대한 통찰이다.
감성의 결박 혹은 냉각화는 과연 인간의 삶에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감성의 죽음은 삶의 활기의 정지를 의미한다. 인식과 정서의 긴밀성, 감성은 근본적으로 해석적이고 가치적이고 의미적이고 정서적이다. 따라서 감성은 인식코드의 영향을 받는다. 외적인 자극에 의해서 우리의 인지적 과정은 코드화되고 의미부여 되며 외적인 자극은 감성을 통하여 우리의 인지 속으로 수용된다. 이렇게 형성된 인지메커니즘은 다시 우리의 감성을 통하여 인지적 ․ 정서적 해석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와 같은 해석 과정은 근본적으로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이고 해석적이다. 따라서 우리의 정서의 다양한 유형은 우리의 인식 메트릭스와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이와 같은 인식 메트릭스의 변경은 감성을 통해 새로운 의미코드를 각인시키는데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는 감성이나 정서를 단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 또는 인식과 무관하거나 독자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이 양자 간의 긴밀한 연결성을 전제로 정서나 감성 자체의 인지적 속성이나 인지 자체의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속성을 전제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정서의 치료와 관련해 인지나 이성과 독립적인 부분으로 간주하는 기존의 치료이론들과 입장을 달리한다.21)
이와 같은 내적인 구조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우리는 정서의 문제의 해결이 단순히 카타르시스를 통한 망각만으로는 일회적이고 피상적일 수 있으며 도한 반대로 인식적인 전환만으로도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자와 관련해서도 근본적으로는 그 정서를 유발하는 근본적인 인식의 구조, 즉 관점에 대한 성찰(mathesis)을 필요로 할뿐만 아니라 관점의 조형의 지점, 그와 같은 관점이 문제시되는 구체적인 맥락에 대한 실천적 앎(phronesis)을 필요로 한다. 나아가 이와 같은 구체적인 문제의 원인을 실천 속에서 변형하는 것, 즉 askesis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감성이나 정서 치료의 내적인 구조와 관련해서 이와 같은 다양한 치료적 과정이 필요하지만 또한 치료의 매체와 관련해서도 우리는 인지적 매체에 한정되기 보다는 감성적인 부분에 대한 활성화가 중요함으로 알 수 있다. 치료의 절차, 즉 진단에서 처방 그리고 치료에 이르는 과정이 단지 치료의 수단으로서만 전락된다면 치료 자체는 지루하거나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치료적 절차의 감성화는 감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에게 치료를 고통스러운 시간이 아니라 즐거운 시간으로 체험하게 한다. 삶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교육이나 치료 그리고 상담의 적절한 감성화나 실천화는 그것의 효과뿐만 아니라 치료 자체의 호감도 또한 상승시킨다.22)
19) Lou Marinoff, 『Plato Not Prozac: Applying Philosophy to Everyday Problems』, New York:HaperCollins, 1999. 루 매리노프, 이종인 옮김, 『철학으로 마음의 병을 치료한다』, 해냄, 2000.
20) 카이 호프만, 박규호 역,『철학이라는 이름의 약국: 놀라움의 미학 Bei Liebeskummer Sokrates:Praktische Philosophie für den Alltag』, 더불어책, 2004.
21) 다음의 책은 이와 같은 입장을 대변하는 심리치료 영역의 저서이다: Leslie S. Greenberg, Sandra C.Paivio, 이흥표 옮김,『심리치료에서 정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2008, 학지사.
22) 정서와 감각을 강조하는 이론으로는 로저스의 인간중심주의 이론, 프랑클의 실존치료 이론, 펄스의 형태주의 치료이론, Bateson과 푸코의 이야기 치료, Neimeyer와 Mahoney의 구성주의 심리치료 이론, Deutsch와 Horney의 여성주의 심리치료 이론, Maslow의 초월심리학적 치료이론, Gendlin의 초점지향심리치료이론, Gary Craig의 정서자유기법(emotional freedom technique: EFT), Grinder의 NLP(정서와 감각에도 포함 가능) 등이 있다. 그리고 사고를 강조하는 이론은 벡스의 인지치료이론, Ellis의 REBT이론, 사피로의 EMDR, Grinder의 NLP(정서와 감각에도 포함 가능), Callahan의 TFT(Thought Field Therapy) 등이 있다.
행동의 강조하는 이론으로서는 행동치료이론, Meichebaum의 인지행동치료 이론, Glasser의 현실치료 이론, 단기해결중심치료 이론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통합치료이론으로서는 Lazarus의 복합모형치료이론, Ivey와 Rigazio-DiGilio의 발달치료이론, Wachtel의 통합적 정신역동-행동치료이론, Hutchins의 사고-감정-행동모형이론, 적응적 치료/준비도 모형, Atkinson, Kim, Caldwell의 다문화 상담을 위한 삼차원모형, 공통요인모형, 단계변형모형 등이 있다. 조용태, 「예술심리치료기법의 통합 방법」, 한국예술심리치료학회, 제9회 예술심리치료사양성 예술심리치료연수회,『예술심리치료연수회 자료집』, 2009.7, 128-9쪽 참조.
6. 소크라테스적 프락시스 : 프락시스에서 감성의 위상
철학 또는 철학하기의 전형적인 장애물은 한편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철학의 전통적 방법인 성찰과 대화의 매체적 단일성, 즉 이성 중심의 활동에 있다. 인간의 몸이나 감성을 사용하는 것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관점치료의 정언명법이라고 할 수 있는 철저히 문제 관점의 생각ㆍ정서ㆍ욕망 그 자체와의 대면을 실현하기 위하여 중요한 것은 관점이 열리는 장을 마련하는 일이다. 또한 그와 같은 한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사유와 대화에 현대인들의 인식적ㆍ심리적 부담감이나 거부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도 바로 감성의 문제를 어떻게 대화와 성찰의 문제와 연결하는가 하는 점이다.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철학의 가치에 대한 자명한 인식을 현대인의 삶 속으로 녹아내리게 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은 이와 같은 철학하기에 대한 거부감이나 부담감을 해소할 수 있는 철학적 도구의 개발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에게 산파의 역할을 권하였다면23) 이와 같은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하여 생각하기와 대화하기에 대한 일장적인 부담감을 경감시키면서도 생각하기와 대화하기의 즐거움을 촉진할함으로써 철학의 고유한 정신을 잘 구현할 수 있는 산파의 기술이나 도구의 개발이다. 필자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하나의 대안적 방법으로서 관점 치료를 그리고 그것의 현실적 기법으로서 '소크라테스적 프락시스(socratic Praxis)'를 제안하고자 한다.24)
철학 수업의 가능한 대안적 유형이 될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철학 프락시스는 기본적으로 철학을 이론적으로 공부하고 이를 다시 프락시스를 통하여 이론과 삶의 연관성들을 함께 다루는 것이다.
기존의 이론(Theorie) 중심의 철학 강의 형태에 철학 프락시스 (Praxis)라고 하는 형태를 추가하여 이루어진 이와 같은 철학 프락시스 또는 철학 강의의 기본 구조는 프로토콜-이론-프락시스(조별 활동)-퍼포먼스(조별 발표)로 이루어져 있다.25)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이루어진 소크라테스적 프락시스 속에서 참여자들은 타인의 관점과 자신의 관점을 경험하게 된다. 즉 이론단계를 통하여 기존의 철학자들의 관점을, 프락시스 단계를 통하여 자신의 관점과 집단 참여자들, 특히 같은 조원들의 관점을, 그리고 퍼포먼스 단계를 통하여 다른 조의 다른 조원들의 관점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인식적 차원의 활동뿐만 아니라 조별활동의 다양한 매체를 통한 천천히 자연스럽고 역동적인 활동을 통해 자신의 기존의 정서적 관점을 심화ㆍ확장ㆍ변형, 즉 조형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와 같은 관점치료의 치료적이고 교육적 활용의 궁극적 목적은 타인들의 인지적ㆍ정서적 관점 성찰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나의 인지적ㆍ정서적 관점을 성찰함으로써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에 대한 관점을 건강하게 조형하여 행복한 삶을 만드는 데 있다.
23) 「앎에 이르는 길로서 산파법, 변증법, 아이러니: 소크라테스, 낭만주의, 헤겔, 키에르케고어를 중심으로」, 『동서철학연구』, 제47집, 한국동서철학회편, 2008, 235-257쪽 참조.
24) 소크라테스적 프락시스 기법이란 기존의 다양한 치료적 매체들을 철학치료(철학 프락시스)에 맞게 변형한 것이다.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적 프락시스 기법의 종류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소크라테스적 별칭 짓기, 집단 철학 활동의 5계명 만들기, 소크라테스적 개념 놀이, 소크라테스적 문장 놀이, 소크라테스적 스크래치, 소크라테스적 자유연상, 소크라테스적 창조연상, 소크라테스적 개사하기, 소크라테스적 개작하기, 소크라테스적 콜라주, 소크라테스적 만화 그리기, 소크라테스적 체베나 쓰기, 소크라테스적 인터뷰, 소크라테스적 극본 쓰기, 소크라테스적 그림 그리기 등이 있다.
25) 이와 같은 논의는 「실존철학을 통한 집단실존상담치료의 사례 발표」(한국철학상담연구회, 2008. 9. 20.)에서 이미 발표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구조에서 퍼포먼스 부분을 추가하였다.
7. 맺음말
최근에 더욱 더 첨예화되고 있는 삶의 고통이나 문제를 풀기 위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철학 영역에서 또한 철학 프락시스(Philosophische Praxis), 철학상담(philosophical Counseling), 철학치료(philosophical Therapy), 임상철학(clinical Philosophy)의 형태로 이와 같은 노력을 함께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인문치료(Humanities Therapy) 또한 한편으로는 인문학이 지니고 있는 삶에 대한 고유한 힘을 재인식하고 실천함을 통하여 이와 같은 현대인의 고민을 함께 하고자 부단히 애쓰고 있다. 필자 또한 이와 같은 문제를 관점치료라는 새로운 방법을 통하여 풀어내고자 시도하였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관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특정의 위치에서 특정의 거리를 두고 대상을 경험한다. 하지만 인간은 대상이 다른 위치와 다른 거리에서 다르게 보임에도 그 대상에 대한 기존의 자신의 관점과 동일시하여 그 대상을 보곤 한다. 따라서 관점은 대상들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중요한 매체인 동시에 걸림돌이 된다. 세계 속에서 인간의 삶이 지니는 인식적․정서적 파노라마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는 자신의 관점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에 의존한다.
인간의 관점은 고정되려는 경향성과 변화하려는 경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자신의 관점을 붙박이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 부단히 조형하는 관점의 조형력을 통해 현대인의 삶은 그만큼 더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고립된 섬에서 나와 타인들과 함께하는 경험은 성찰과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며, 성찰과 대화의 철학적 도구로서 활용될 수 있는 프락시스나 치료 방법 중에 하나가 관점치료이다.
필자는 관점치료 이론의 구체화인 관점치료 모형을 감성을 활성화하는 다양한 매체를 통한 소크라테스적 프락시스(socratic Praxis) 기법들을 통하여 전개시켜 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결실은 더 즐겁고 더 쉽게 철학이 삶과 조우할 수있는 도구에 대한 필자의 문제의식 속에서 실행했던 수많은 실험적 프락시스의 산물이다.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계속되는 연구와 실험을 통하여 완성도를 높여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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